전고 47 산악회 서울 식물원에 가다.
1. 서울 식물원
2. 겸재 미술관
3. 궁산 등산기
강서구는 강남이지만 강남 3구에 끼지 못할 뿐 아니라 서울의 25개 구 중 북동 3구 즉 노도강(노원구, 도봉구, 강북구,)과
더불어 가장 낙후된 구이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우리 산악회가 강서구에 소재한 산을 오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가 일부러 강서구를 기피한 게 아니라 강서구는 김포평야에 속해서 산다운 산이 없어서였다.
강서구에 까치산 우장산, 개화산 등이 있긴 한데 모두가 해발 200m 내외밖에 안 된다.
산 다운 산이 없어서 우리 산악회가 강서구에서 모임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우리 산악회에 자주 나오는 회원 중 최기언, 이욱구, 노필우, 박종성 등이 강서구에 거주하고 있다.
저 회원들이 우리 산악회가 강서구에서도 모임을 갖자고 누차 주장했었다.
해서 우리 산악회가 올 첫 행사를 강서구에서 갖기로 하였다.
01월 22일 아침 마곡나루 역 3번 출구에 10시에 13인이 모이니 봄 날씨처럼 포근하고 화창했다.
오늘 우리가 오를 궁산이 한강 가라서 바람이 불면 어쩌지 하고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미풍도 없었다.
강서구는 김포평야라서 서울로 편입되기 전에는 논이 끝없이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이었었다.
강서구의 중심은 禾谷洞이다. 화곡동의 禾는 벼화 자이다. 화곡동은 논바닥 가운데에 들어선 동네란 뜻이다.
헌데 지금의 강서구는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서울의 25개 구 중 가장 역동적인 구일 것이다.
마곡역과 마곡나루 역 주변은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가 즐비했다. 고층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현재도 고층 빌딩을 짓고 있는 공사장이 곳곳에 있었다. 빌딩에는 국내외 유수의 대기업들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최근 회사원이 회삿돈 수천억을 빼돌려 물의를 일으킨 기업 본사 빌딩도 보였다.
강서구는 김포공항에 인접해 있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철도도 지나고 있으며 인천과 근접해 있다.
또한 경인선 철도와 경인 고속도로도 지나고 있다.
따라서 국내외 대기업들이 들어설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니 대기업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고 강서구 발전의 시동을 걸고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보금자리 주택단지로 지정하고 대단위 아파트를 조성하고 있었다.
우린 마곡나루 역을 나와 서울 식물원 쪽으로 걸어갔다.
1. 서울식물원 관람기
식물원은 공원 안에 있었고 입장권은 5,000원이었지만 우린 법적 노인이라서 무료입장했다.
주민등록증이 없어 경로증을 제시했으나 그것도 안된다 하여 코로나 백신 접종확인서로 대신하고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이 공원은 황량한 유휴지를 다듬어 멋진 공원으로 탈바꿈시켜 봄가을에 가족단위로 관광객이 상당하단다.
겨울이라 얼어붙은 개울에 갈대만 하늘거리고 있었지만 봄가을엔 화초가 아름다운 풍경을 역어 낼 것 같았다.
이윽고 우린 서울 식물원 앞에 당도했다.
서울 식물원은 축구장 70개 크기란다. 서울시가 서울의 마지막 남은 미개발지인 마들 나루에 통 크게 거대한 식물원을 조성한 것이다. 마곡나루 역의 마는 마들역처럼 말馬가 아니라 삼베의 마麻이다. 옛날에 이 지역에서 삼을 많이 재배했었단다
서울식물원은 박원순 시장의 작품일 것이다. 박 시장은 성희롱만 아니면 지금 쯤 대통령 후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성희롱 사건이 박 시장의 업적을 몽땅 집어삼켜 버렸다. 박 시장 본인도 삼켜버렸다.
온실 입장 티켓에는 보타닉파크라고 적혀있었다. 보타닉은 서양말로 란이라는데 언뜻 보기엔 진달래꽃처럼 보였다.
온실 입구에도 대형으로 된 보타닉 모형 꽃이 세워져 있었다.
서울식물원에선 온실을 식물문화센터라 부르고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여러 가지 뜻이 나와 있는데 식물문화센터와 부합되는 게 하나 있었다.
센터란 어떤 한 분야의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기능이나 설비를 갖춘 시설이나 기관이란다. 식물문화센터는 온실 기능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기관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희귀 식물의 전시는 물론 식물에 관한 연구와 보전, 새로운 식물 품종 개발과 정원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식물에 관한 교육을 하는가 하면 일반인들에게도 평생교육 차원의 교육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온실이라 하지 않고 "식물문화센터"라 하는 듯했다. 이곳은 열대우림 식물관과 지중해 식물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린 열대우림 관부터 구경했다. 열대우림 지대엔 지구 생물의 반이 서식하고 있단다.
이곳에는 브라질, 베트남, 인도네시아, 콜롬비아의 식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브라질은 지구의 보물이다.
브라질 습지 셀바스는 지구 전체 산소량의 25%를 생산하고 세계 담수량의 20%를 저장하고 있고 지구 동식물의 10%를 차지한단다. 열대 우림 기후대는 적도 부근이고 고온다습하며 년 평균 기온이 18도 이상이다.
이곳은 열대 우림 기후대를 재연해 놓아서 몹시 덥고 후덥지근했다. 바깥 겨울 날씨 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서 손에 걸쳐야 했다. 젊은이들은 첨부터 지하 1층의 토큰 락커에 옷과 가방을 맡겨두고 구경에 나서고 있었다. 1층 입구로 들어서자 멋진 포토존이 우릴 맞이 해 주었다. 특히 캐치 프레이즈와 환영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빛나는 모든 순간 온몸으로 느껴 보세요."라는 문구가 마음에 와닿았다.
저런 걸 봐도 온실 관리운영이 기존의 전통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일테면 생떼 쥐 벨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한 미니 온실이나 스카이워크 산책로가 그렇고 성탄절과 새해벽두 같은 시기엔 시의 적절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산타의 모자와 장화 같은 소품과 인형들을 배치하여 이벤트관을 설치해 둔 게 그렇다. 또한 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새소리는 녹음된 음향이었다. 하지만 저 새소리는 우덜로 하여금 열대 우림 밀림 속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저런 것들이 기발하고 참신해 보였다.
온실 곳곳에는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식물 해설사들이다. 어느 남자아이는 식물에 관한 정보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들고 읽어주고 있었고, 어느 여자아이는 달달 외워서 제법 근사한 제스처를 써가며 해설을 해주고 있었다. 어설프지만 열씸히 해설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젊은이들은 문화센터 지하 1층에서 기기를 대여받아 이어폰으로 오디오 가이드의 해설을 듣고 있거나 핸드폰에 애플을 다운로드하여서 듣고 있었다.
관람객을 살펴보니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거나 청춘 연인들이 커플로 오거나 휠체어를 탄 부모를 모시고 온 효자 효녀도 보였다. 더러는 우리처럼 은퇴노인들이 친구들과 그룹을 지어 온 경우도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자 인공폭포가 나왔다. 폭포는 환조 조각품처럼 사방팔방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발아래엔 각양각색의 열대 개구리들이 풀 잎에 앉아 있었다. 신기해서 사진에 담고 있는데 모조품 개구리 란다.
만져보니 모조품이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계속 돌아보노라니 기기 묘하고 신기한 식물들이 참으로 많았다.
어떤 나무는 천정부터 우덜의 머리 위까지 머리카락을 산발한 것처럼 축축 늘어져 있었다.
키이 바 초다 티는 일명 사이프러스 나무인데 줄기가 항아리처럼 생겼었다.
이나무 열매는 하얀 솜털로 되어있어서 베개, 이불, 구명조끼의 속을 채우는데 쓰인단다.
에틀란케라엘란 티 오르 나무는 정열의 불꽃이란 별명처럼 횃불처럼 생겼었다.
브룬 셀시아 아우스 트랄리스는 식물계의 카멜레온으로 꽃이 시간에 따라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로 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 아스터가 퍼뜨렸다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아시아 최고의 나무로써 십자가를 만든단다
우린 지중해관으로 들어갔다.
이곳엔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 터키, 우즈베키스탄, 호주, 미국, 남아공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지중해 기후대는 지중해 해안에 위치하고 사막과 인접해있고 위도상 남북위 30도에서 40도 지역이다.
지중해 기후대는 여름엔 습도가 급격히 줄고 기온이 높이 치솟아 식물들은 잎이 작고 두껍고, 뿌리는 깊이 뻗고, 줄기는 두꺼운 코르크가 감싸고 있다. 바오바브나무, 오렌지, 올리브, 코르크 나무가 다 그렇다.
척박한 토양과 가뭄과 건조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식물들의 처절한 노력의 결과이다.
올리브와 바오바브나무는 지중해의 깃대종 식물이다.
블로 멜리 아드는 흙 없이 생존이 가능하단다. 잎이 뿌리 대신 물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뿌리는 하나인데 줄기와 꽃은 색깔이 각각 다른 삼란성 쌍둥이 식물도 있었다.
터키 식물들도 있었다. 터키는 중동과 유럽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이다.
지리적으론 아시아에 속하지만 문화는 유럽에 속한다. 조상도 거슬러 올라가면 흉노족의 일부이다.
식물들도 튤립, 양귀비, 장미, 라 벤데 같은 동서양 식물이 공존하고 있었다.
1층을 샅샅이 둘러본 우린 2층으로 올라 스카이 워크 산책길을 걸으며 1층을 내려다보았다.
야자수, 종려나무, 망고, 파인애플, 소철, 바나나, 벤자민 고무나무 들로 뒤덮인 모습이 영락없이 열대 밀림 같았다.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장시간 구경을 하던 우린 출구로 빠져나왔다...
2. 김 겸재 미술관 관람기
단원, 혜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히는 겸재 정선은 65세에 양천현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양천 항교 근처에 있었던 양천현청에 부임하여 5년간 체류했었다. 그 시절에 겸재는 한강 하류 풍경을 많이 그렸었다.
그게 지금까지 양천 8 경첩으로 남아있는데 그 화첩엔 겸재가 그림을 그리고 이병연이 시를 썼었다.
겸재와 양천의 그러한 인연으로 수년 전 겸재 미술관이 강서구 궁산 자락 양천현청이 있던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니 현감으로 봉직하면서 실제 그림을 그리던 그 자리에 미술관이 지어진 것이다.
독자들은 "왜 겸재 미술관이 양천구가 아니고 강서구에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양천 항교와 양천초등학교도 양천구가 아닌 강서구에 있다.
즉 강서구와 양천구는 모두 옛날엔 양천 현령이 다스리는 양천현이었고 후에 강서구로 변경되었다가 양천구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겸제 미술관은 서울 식물원 지근거리에 있었기에 우린 식물원 주제 정원의 벤치에서 각자 싸온 간식을 꺼내놓고 야외 파티를 열었다. 겨울 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조금은 황량한 풍경 속에서 식물원 온실(식물문화센터)을 관람하느라 조금은 피로해진 신체에 에너지를 보충한 것이다.
공원에서 우린 뜻하지 않게 재미난 광경을 목도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공원 한편에서 한 젊은 여인이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여인은 테니스 공을 던져서 견공 더러 주워오게 하고 있었다. 여인은 공을 던질 듯 말 듯하며 견공을 놀리다가 공을 던지곤 했다. 견공은 주인의 장난질에 이골이 난 듯 주인과 제법 잘 호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공 역시 주인 못지않게 주인인 상대를 놀리고 있었다. 견공은 공을 물고 주인 가까이 와서는 더 이상 닦아서 지 않고 공을 주인에게 가져다 줄듯 말듯하며 주인을 놀리고 있었다. 견공 녀석 하는 짓이 하도 맹랑하여 우덜은 미소 짓고 말았다.
겸재 미술관은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있었고 골목 양쪽엔 확대된 겸재의 그림들이 벽화처럼 건물 벽에 붙어 있었다.
가로 세로 30,40cm짜리 그림을 5-6배로 확대해 놓으니까 전혀 딴 그림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 그림들 중 3점은 임옥상 화백이 겸재의 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그린 장대한 크기의 설치미술이란다.
일명 "신진 경산 수화" 란다. 화폭은 동판처럼 보였다.
미술관 형태는 기다란 사각기둥이었고 지하 1층 포함 4층 건물로 상당히 큰 규모였다.
겸재 이전 우리 화가들은 산수화를 그릴 때 중국 화풍과 준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흉내를 내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그리면 현장을 직접 가서 볼 필요도 없다. 방 안에서 상상하여 그리면 된다.
그러나 겸재는 명승지를 직접 답사하고 나서 우리 풍경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입혀서 화폭에 담았다.
그래서 겸재는 여행을 자주 했었다. 저게 이름하여 진경산수화다.
진경산수화는 실경 산수화처럼 현장을 직접 보고 그리되 실경산수화처럼 사실대로 그리지 않고 특징만을 잡아서 특정 부분을 확대하거나 축소하여 그리는 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그림에 담아냈다.
겸재는 우리 산수에 맞는 준법과 화풍도 개발해 냈다. 적묵 준법과 측필 준법, 그리고 수직 준법과 미점 준법이 정선이 개발한 준법이다. 전자는 인왕제색도에 후자는 금강전도에 나타난다.
그래서 겸재를 오늘날 우리가 훌륭한 화가로 대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저런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포, 경교명 습첩, 계상정거도 같은 겸선의 대표작을(복사본이거나 모조품이지만)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게 행운으로 여겨졌다.
아쉽게도 이 미술관엔 진품이 청풍계 도와 조어도 두 점 밖에 없었다.
금강전도는 37세 때 금강산을 답사하고 나서 부감법으로 그린 것이고,
경교 명승첩은 67세 때 양천현의 한강의 풍경을 그린 것이고,
인왕제색도는 76세 때 비가 그친 직후의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계상정거도는 천 원짜리 화폐 뒷면에 있는 그림인데 퇴계의 도산서원 모습을 그린 것이다.
부감법은 하늘에서 들여다 본모습을 그리는 방식이다
겸재 미술관은 운영방식이나 전시 방식에서 지금까지의 전통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1층은 전시실과 양천 현아 실이 있었다.
전시실은 겸재 작품이 아니고 현대 화가들이 전시실을 대여하여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관아실은 양천 현아를 재현해놓은 곳이다.
2층은 겸재 기념실과 체험학습실이 있었다.
기념실은 겸재 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체험학습실은 주로 아동과 학생들이 진경산수화를 그려보거나 낙관 디자인을 하거나 탁본 체험 등을 하는 곳이다.
3층은 다 목적 실과 뮤지엄 숲이 있었다.
다목적실은 강연을 하거나 방학기간에 학생들에게 강습을 시키는 곳이고, 뮤지엄숍은 겸재의 그림 화첩이나 복사본을 판매하는 곳이다.
옥상은 낙조를 감상하는 옥상공원으로 드라마 *착한 남자* 촬영지란다.
3. 궁산 등산기
겸제 미술관 3층 뮤지엄 숍을 지나 미술관 출구로 나가니 정원이 있고 양천고성지와 소악루 정자, 그리고 양천 항교 쪽으로 이어진 산책로가 나왔다.
1팀 6명은 산책로에서 향교 쪽 반대방향으로 도로를 5m 정도 내려가 오른편 언덕에 "궁산 땅굴 역사전시관"이 붙어있어 계단을 내려가니 미모의 안내원 두 분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벽면에 설치된 기다란 의자에 일열로 앉히길래 순서대로 입장시키려나? 했는데 맞은편 벽면에 설치된 대형 TV에서 해설이 진행되었고 이것이 끝이었다.
2008년 땅굴 발견 후 전시관 공사 중 일부 구간에서 대형 낙석이 발생하여 진입 방지장치를 마련하고 땅굴을 폐쇄한 채로 관리하다가 2018년 출입구에서 땅굴 내부를 조감할 수 있는 전시관을 조성하여 역사성, 교육성, 정체성을 융합한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단다. 궁산 땅굴은 높이 2.7m 폭 2.2m 연장길이 68m ㄱ 자 형태로 하여 양옆으로 날개를 단곳이 두 군데가 있어 통로 옆에 양쪽으로 방을 만들어 놓은 듯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 강점기에 굴착된 곳으로 무기, 탄약 등 군수물자를 저장하거나 김포비행장 관제, 공습 시 부대 본부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곳은 임란 시 왜군으로부터 한양을 지키던 곳인데 400여 년 뒤 왜군이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인을 동원하여 건설하였다니 서글픈 이야기이다.
월요일과 강서구 공무원 휴일(보통 일요일은 개방)만 제외하고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료관람 가능하다.
관람 후 산악회 2팀과 무선 연락을 취하니 2팀은 땅굴 관람 없이 벌써 고성지로 향하고 있어 산악회 1팀은 산악인 체형으로 금방 바뀌어 2팀을 뒤쫓아 고송지와 소악루를 찾아가게 되었다.
궁산에 있는 고성지는 사적지 372호로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의병들과 왜군을 무찌른 성이 있었던 성터란다.
권율 장군이 한강 북쪽에 있는 행주산성에서만 왜군을 무찌른 줄 알았는데 한강 남쪽에서도 왜군을 무찔렀단다.
양천현에 있었던 양천 항교가 아직도 남아 있었고, 산책길 끝자락에는 소악정이 있었다.
소악정은 영조 때 지었다가 중간에 없어져서 최근 복원했다는데 소악정에서 바라보는 뷰는 진짜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웠다. 소악정에는 겸재가 소악정에서 실제로 산수화를 그렸던 진경 산수화를 전시해 놓아 실제 풍경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었는데 산수화와 실제 풍경은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하여 헷갈렸다.
겸재가 풍경을 실제대로 그리지 않고 과장하거나 생략해서 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경산수화인 것이다.
우린 식물원만 구경하는 줄 알았었는데 뜻 밖에도 겸재 미술관과 양천 항교와 소악정, 궁산 고성지까지 덤으로 구경했으니 미술관과 소악정을 탐방한 감동은 길이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강서구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을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글쓴이 : 조 운제
촬영인 : 여러 인
편집인 : 김 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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