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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閑亭記
槐灘上流 地僻而佳 有翠壁澄潭長松脩竹之勝 吾老友朴益卿 築室而居之 名其亭曰愛閑 求記於薦紳間 五峯李相公 首爲文若詩 易其名曰閑閑 其意蓋以吾自閑之 曰愛則猶外也 益卿袖以示余 若有不解者然 曰亭名何居 願聞子之說 余就而繹之 夫所謂閑者 無事而自適之謂 人必自閑而後人閑之 役志於閑 非眞閑也 物之閑者 莫鷗若也 飛鳴飮啄 自適其性 非有意於閑 而見者閑之 夫豈自知其閑哉 此五峯之言所以發也 雖然 閑 公物也 惟愛者能有之 苟不愛焉 則雖處煙霞水石之間 其心猶役役也 彼狗苟蠅營 昏夜乞哀 乾沒勢利 卯酉束縛者 固不知閑之爲何事 奚暇於愛乎 益卿世家京洛 初非無意於仕宦者 今乃謝紛華而樂寛閑 一室蕭然 不知老之將至 朝於旭而閑 夕於月而閑 花於春而閑 雪於冬而閑 琴焉而愛其趣 釣焉而愛其適 行吟詩臥看書 登高望遠 臨水觀魚 隨所遇而皆閑 則名之以愛 不亦宜乎 愛之不已 終至於不自知其閑 則閑閑之意 亦在其中矣 斯固一而二 二而一者也 益卿何擇焉 乃若湖山之勝 余未嘗寄目 竊就君所命八景者而爲之詠
애한정기(愛閑亭記)
괴탄(槐灘)의 상류는 땅이 외지고 아름다워 푸른 벼랑과 맑은 물, 높은 소나무와 긴 대나무의 빼어난 경치가 있다. 나의 노우(老友) 박익경(朴益卿)이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정자 이름을 ‘애한(愛閑)’이라 하고 사대부들에게 그 기문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이 상공(李相公)이 맨 먼저 문(文)과 시(詩)를 지어 이 정자의 이름을 ‘한한(閑閑)’이라 바꾸었으니, 그 뜻은 대개 ‘나 스스로 한가로워야 하는 것이니, 한가로움을 사랑한다〔愛〕고 하면 오히려 한가로움을 외물(外物)로 인식하는 것이 된다.’라는 것이다. 익경(益卿)이 오봉의 시문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면서 그 뜻을 알지 못하는 듯 말하기를, “정자의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 그대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그 뜻을 풀이하였다.
이른바 한가로움이란 것은 아무 일 없이 자적(自適)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스스로 한가로운 뒤에 남이 그를 보고 한가롭다고 여기는 법이니, 한가로움에 일부러 마음을 두는 것은 참으로 한가로운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한가롭기로는 백구(白鷗)만 한 것이 없으니, 날고 울고 물을 마시고 먹이를 쪼며 자기 본성대로 자적할 뿐 한가로움에 뜻을 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구를 보는 이들은 한가롭다고 여기니, 백구 스스로 자기가 한가롭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것이 오봉이 ‘한한(閑閑)’이라고 한 까닭이다.
비록 그렇지만 한가로움이란 공물(公物)이요 사랑만은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따라서 진실로 그 한가로운 경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록 연하(煙霞) 어린 수석(水石) 사이에 있더라도 그 마음은 오히려 사물에 끌려다닐 것이다. 저 파리나 개처럼 염치없이 애걸하고 세리(勢利)를 차지하고자 밤낮으로 세사(世事)에 속박되어 사는 자들은 진실로 한가로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한가로움을 사랑할 겨를인들 어디 있겠는가.
익경은 대대로 서울에 살았으니, 당초에 사환(仕宦)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번화한 것을 멀리하고 한가로운 것을 사랑하여 정갈한 일실(一室)에 거처하며 노년이 곧 다가오는 줄도 모른다. 아침에는 해 뜨는 것에서 한가롭고 저녁이면 달 뜨는 것에서 한가로우며, 봄에는 꽃을 보며 한가롭고 겨울에는 눈을 보며 한가로우며, 거문고를 타면서 그 흥취를 사랑하고 낚시를 드리운 채 그 자적(自適)을 사랑하며, 다닐 때는 시를 읊고 누워서는 책을 보며,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조망하고 물가에 다다라 노니는 물고기를 구경하는 등 어떠한 경우이건 모두 한가로우니, 사랑한다〔愛〕는 것으로써 정자 이름을 짓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사랑해 마지않아 마침내 스스로 자기가 한가로운 줄 모르는 경지에 이르면 ‘한한(閑閑)’의 뜻 또한 그 가운데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진실로 한가로움과 내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라 하겠다. 익경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이 정자 주위, 호산(湖山)의 경치로 말하자면 내가 눈으로 본 적이 없기에 익경이 명명(命名)한 팔경(八景)을 시로 읊노라.
[주-D001] 팔경(八景)을 시로 읊노라 : 《국역 월사집》 제16권 〈애한정 팔영(愛閑亭八詠)〉 참조.
月先亭記
人謂石陽仲燮三絶 蓋仲燮詩學杜 筆得晉人法 畫尤名天下故云 夫夫雅有高致 嘗築室於公山 顏其亭曰月先 屬余爲記曰 吾廬遠不足以辱吾子 吾且言吾亭之勝 子爲我文之 其言曰 錦江南流 鷄岳西支 迤爲一大村 曰萬舍陰 亭在村之高處 臨野之迥得百里 山遠近環之 若脩眉若飛鳳若列屛障几案者曰 彌勒山德裕山朱華山天登山龍溪山漢芚山金山也 水橫流遶村 走入花津者曰 曲火川也 嶐而爲丘 窪而爲池 呀然而壑 蔚然而園 坦然而臺 庭無雜樹奇花 只二松千竹 儼立如環衛 又有十樹大梅近軒 軒名十梅以別之 風動月浮 香與影滿室 此皆吾廬之勝也 每良辰勝日 負杖登皐 童子後先 臨流觀魚 魚小大可數 呼鷹逐獸 耳後生風 濯足於溪 石可坐沙可步 瞑色自遠 村煙夕起 人語砧聲 斷續於霏靄之間 余倦而歸 山光滿簟 夜深靜臥 松聲竹籟 泠泠入耳者 此吾亭勝之所獨享也 鶴報客至 呼兒點茶 有酒酒釅 有飯飯香 果取園木 筍折竹林 蕈採松根 蔬摘春畦 客留則棲於軒 客去則送於臺 此則吾亭勝之與人共者也 吾亭不旣勝乎 余應之曰 亭若是其勝 而必以月先名者 何取焉 噫 余知之矣 夫月 一無價物也 而山必得月而高 水必得月而淸 野必得月而迥 月先於亭 則地之高可想 地旣高而又先得月 則亭之勝 蔑以加矣 漁與獵 子固樂之 然必氣動而興隨 興盡而神疲 夫豈若月之不邀自至 無心可猜者乎 梅與竹 子固愛矣 然必榮悴有時 不能長存 則夫豈若月之窮天地貫寒暑而卒莫消長也哉 亭之名 得矣 想其山日初沈 暮景蒼然 子未開戶 月先在軒 白髮綸巾 弄影婆娑 山河寂寥天地晃朗 斯時也 月沙老仙 馭風而至 把杯相屬 笑傲於其間 則子復以爲如何 嗟余病矣 只空言耳 遂書此以寄之
월선정기(月先亭記)
사람들은 석양(石陽) 중섭(仲燮 이정(李霆))을 두고 삼절(三絶)이라 하니, 중섭은, 시는 두보(杜甫)를 배웠고 글씨는 진인(晉人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얻었고 그림은 특히 천하에 이름났기 때문에 그렇게 일컫는 것이다. 그는 평소 고상한 멋을 지녀 일찍이 공산(公山)에 집을 짓고 정자에 ‘월선(月先)’이라는 편액을 걸고는 나에게 그 기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기를, “나의 집은 멀어서 그대를 오시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정자의 빼어난 경치에 대해 말할 터이니, 그대가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가 말하기를,
“금강(錦江)은 남쪽에서 흐르고 계룡산(鷄龍山)은 서쪽으로 뻗어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면서 큰 촌락을 이루고 있으니, ‘만사음(萬舍陰)’입니다. 정자는 촌락의 높은 곳에 있어 백 리 먼 거리의 들판을 굽어보고 있으며, 원근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로서 마치 긴 눈썹과도 같고 나는 봉황과도 같고 벌여 놓은 병풍이나 궤안(几案) 같은 것들은 미륵산(彌勒山), 덕유산(德裕山), 주화산(朱華山), 천등산(天登山), 용계산(龍溪山), 한둔산(漢芚山), 금산(金山)입니다. 물이 이 지역을 가로지르며 흘러 촌락을 휘감아 돌고 달려서 화진(花津)으로 들어가는 것은 곡화천(曲火川)입니다. 불쑥 솟아올라 구릉을 이루고 움푹 들어가 못을 이루고 입을 벌려 골짜기를 이루고 숲이 울창하여 동산을 이루고 땅이 평탄하여 돈대(墩臺)를 이루고 있으며, 뜰에는 잡다한 수목이나 기이한 화초가 없고 단지 두 그루 솔과 천 줄기 대가 호위하듯이 둘러서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열 그루의 큰 매화가 헌함(軒檻) 가까이에 서 있기에 헌함을 십매헌(十梅軒)이라 하여 구별지었습니다. 바람이 일고 달이 뜰 때에는 매화 향기와 매화 가지의 그림자가 방 안에 가득하니, 이는 모두 내 집의 빼어난 경치들입니다.
매양 좋은 날, 지팡이를 끌고 언덕에 오르면 동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르고 시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면 물이 맑아 크고 작은 물고기들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매를 불러 짐승을 쫓아가노라면 귓전에는 바람이 일고 시내에서 발을 씻노라면 바윗돌은 앉을 만하고 모래는 거닐 만합니다. 어둠이 멀리서 스며오면 촌락에는 저녁 연기가 일고 사람들 말소리와 다듬이 소리가 어스름 기운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들려옵니다. 내가 그제야 지쳐 돌아오면 산빛은 발에 가득하고 밤이 깊어 고요히 누웠노라면 솔바람 소리며 대숲의 바람 소리가 맑게 내 귀로 들어옵니다. 이는 나의 정자에서만 홀로 누리는 것입니다.
손님이 왔다고 학이 알려 주면 아이를 불러 차를 달이게 합니다. 술을 내오면 술이 진하고 밥을 지어 오면 밥이 향긋하며, 과일은 동산에서 따고 죽순은 대숲에서 꺾으며, 버섯은 솔뿌리에서 캐고 나물은 남새밭에서 뜯습니다. 손님이 오면 헌함에 머물고 손님이 떠나면 돈대에서 배웅합니다. 이는 나의 정자의 빼어난 점을 남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나의 정자가 매우 빼어나지 않습니까?”
하였다. 내가 응답하기를,
“정자의 경치가 이처럼 빼어난데 굳이 ‘월선(月先)’이라 명명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아, 나는 알겠소. 대저 달이란 하나의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인데, 산은 반드시 달을 얻어야 높아지고 물은 반드시 달을 얻어야 맑아지고 들판은 반드시 달을 얻어야 넓어지지요. 달이 정자보다 먼저 뜬다면 지대가 높음을 상상할 수 있으며, 지대가 이미 높고 또 먼저 달을 얻는다면 정자의 빼어남이 더할 나위 없다 하겠습니다. 고기잡이와 사냥을 그대는 진실로 즐기겠지만 반드시 기운이 움직이고 흥이 따라 일어나며 흥이 다하면 정신이 지치게 마련이니, 어찌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시기하는 마음이 없는 달만 하겠습니까. 매화와 대를 그대는 진실로 좋아하겠지만 그것은 반드시 시들 때가 있어 영구히 생존할 수 없고 보면, 어찌 천지(天地)와 한서(寒暑)가 다하도록 끝내 소멸하지 않는 달만 하겠습니까. 정자의 이름은 참으로 잘 지었다 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산에 달이 막 지고 저녁 경치가 어둑할 때 그대가 문을 열기도 전에 달이 먼저 헌함에 와 있고 백발에 윤건(綸巾)을 쓰고 달빛 속에 홀로 서성이노라면 산하는 적막하고 천지는 명랑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월사 노선(月沙老仙)이 바람을 타고 찾아와서 술잔을 잡고 서로 권하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눈다면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나는 병들었으니, 그저 빈말일 뿐입니다.”
하고, 이상의 내용을 써서 부쳐 주었다.
[주-D001] 월선정기(月先亭記) : 《국역 월사집》 제15권 〈월선정 십영(月先亭十詠)〉 참조.
龍仁圃隱先生書院記
先生書院 在松都者 以故宅也 在烏川者 以貫鄕也 在臨皐者 以舊居也 獨於墓下闕焉 丙子年間 多士議建書院於竹田 配享靜菴先生 以其地在兩先生墓道之中也 我先君及故士人李贄 實主張焉 不幸被壬辰兵燹爲墟 士林嗟惜 駒城一境 最刳於兵 十餘年來 人煙未集 靜庵先生墓下 無子孫奴僕 樵牧不禁 諸儒愍香火斷絶 議搆祠宇於塋側 歲乙巳 余忝按畿節 展拜先生墓 與縣監鄭從善,進士李時尹,鄭忠傳等謀曰 竹田書院重建合享 是實先志 而今無力矣 靜庵先生墓下 旣先建祠宇 而此猶未遑 非但斯文之歉 實我子孫之羞也 遂以營中俸錢爲根業 求助於子孫中爲守宰者 乃鳩材乃雇工 拮据五箇月 祠宇成 越三年訖功 凡祠宇三間 東西齋各二間 門樓三間 上爲講堂 下爲門 廚房庫舍 亦略具焉 戊申十月 奉安神位 其年冬 李時尹等上疏請額 我聖上特賜御製 名曰忠烈書院 亦異數也 仰瞻丘壟 若或見之 欽想高風 多士永有依歸 此生夙願 庶少伸矣 昔在庚子年 懿仁王后葬期已過 園陵久未卜吉 朝廷甚憂之 合諸術官各擧所知而密啓 士大夫墓山 無論貴戚 皆與焉 先生墓山 亦在其中 先王命禮官無遺往審 而獨於先生墓 下敎曰 設使鄭某之墓 果合於用 豈忍使忠賢朽骨 拔掘於二百年之後哉 其特勿看 余時忝長禮部 實承是命 聞者莫不感嘆 余嘗聞諸先君 先生之孫鄭公保 與六臣相友善 逮獄起 公常忼慨 公之庶妹 韓明澮之妾也 一日公往訪焉 問韓何往 妹曰 鞫罪人在闕 公醉罵曰 若殺此人 令公當爲萬世罪人 拂衣而去 韓還問鄭某來有何言 妾具以告 韓卽上闕啓之 公遂被鞫籍沒云 而未得其詳 丙午年 余忝知春秋館事 重刊先朝實錄 監校之際 偶閱六臣事 有曰鄭保有亂言 上親鞫 保供曰 常以成三問,朴彭年等爲正人君子 故實有是言 上怒甚命轘之 仍問此何人 左右對曰 鄭某之孫也 上遽命止之曰 忠臣之後 宜減死論 遂竄延日云 墓在先生墓之左支 嗚呼 大獄方張 公獨抗言吐實 而我光廟特爲先生宥之 國葬未卜諸山 無不遍審 而我先王特爲先生墓有別敎 諸賢書院請額甚多 而我聖上獨於先生書院御製賜扁 列聖崇奬之德 前後一揆 吁其至矣 數百年來 封植之典 靡所不盡 而此數事 尤爲盛擧 記載無徵 人或不知 余今奉奏朝天 來拜祠下 恐久益泯沒 呼燈口授 書與諸生 俾傳永世 竝記書院顚末如右云 時萬曆丙辰孟冬下澣 書于書院齋室
용인(龍仁) 포은선생서원기(圃隱先生書院記)
선생의 서원이 송도(松都)에 있는 것은 고택(古宅)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고, 오천(烏川)에 있는 것은 그 지역이 관향(貫鄕)이기 때문이고, 임고(臨皐)에 있는 것은 옛날에 살던 곳이기 때문인데, 유독 묘소 아래에만 서원이 없었다. 지난 병자년(1576, 선조9)에 선비들이 죽전(竹田)에 서원을 건립하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을 배향하자고 발의하였으니, 이는 그곳이 두 분 선생의 묘소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선친과 고(故) 사인(士人) 이지(李贄)가 실로 이 일을 주장하였는데, 불행히도 임진년의 병화(兵火)로 그만 폐허가 되었으므로, 사림(士林)이 탄식하였다.
구성(駒城) 일대는 병화를 가장 심하게 입어 10여 년 이래 거주하는 백성이 없을 정도라 정암 선생의 묘소 아래에는 자손과 노복(奴僕)이 없어 나무꾼과 목동의 출입을 막지도 못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향화(香火)가 단절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묘소 곁에 사당을 세우자고 발의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내가 경기 관찰사가 되어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현감(縣監) 정종선(鄭從善), 진사(進士) 이시윤(李時尹)ㆍ정충전(鄭忠傳) 등과 의논하기를, “죽전의 서원을 중건하여 두 분 선생을 합사(合祀)한 것은 실로 선친의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힘이 없습니다. 정암 선생의 묘소 아래에는 이미 사당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아직 세울 겨를이 없으니, 사문(斯文)의 허물일 뿐 아니라 실로 우리 자손들의 수치입니다.” 하고, 드디어 영중(營中)의 녹봉을 밑천으로 삼고 자손들 중 수령으로 있는 이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재목을 모으고 목수를 고용하여 5개월 동안 애쓴 끝에 사우(祠宇)가 완공되었고, 3년 뒤에 공사를 모두 마쳤다. 사우는 3칸이고 동(東), 서(西)의 재(齋)가 각각 2칸이다. 문루(門樓)가 3칸인데 위 칸은 강당이고 아래 칸은 문이며, 주방과 곳간도 대략 갖추어졌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10월에 신위(神位)를 봉안하였고, 그해 겨울에 이시윤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였다. 이에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어제(御製)를 하사하여 ‘충렬서원(忠烈書院)’이라 명명하니, 또한 특별한 은전이었다. 묘소의 산기슭을 우러러보면 선생의 풍모가 뵈는 듯하고 선생의 고풍(高風)을 공경히 생각하매 선비들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되었으니, 이내 생애의 숙원이 조금은 풀렸다. 예전 경자년(1600, 선조33)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 시기가 이미 지났는데도 원릉(園陵)의 길지(吉地)를 오래도록 잡지 못하여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다. 그래서 술관(術官)들을 모아 저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곳을 몰래 아뢰게 하니, 사대부들의 묘산(墓山)이 귀척(貴戚)을 막론하고 그 대상이 되었으며 선생의 묘산도 역시 그 속에 들었다. 선왕(先王)께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빠짐없이 가서 그 땅을 살펴보게 하였으나 유독 선생의 묘소에 대해서는 하교(下敎)하기를, “설사 정모(鄭某)의 묘소가 원릉의 터로 적합하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충현(忠賢)의 유골을 2백 년 뒤에 파낼 수 있겠는가. 특별히 대상에서 제외시키라.” 하였다. 나는 당시 예조의 장관으로서 실로 그 명을 받았는데, 명을 들은 사람치고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예전에 선친께 들으니, “선생의 손자 정공 보(鄭公保)가 육신(六臣)과 친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옥사(獄事)가 일어난 뒤로 공은 늘 강개(慷慨)하였다. 공의 서매(庶妹)는 한명회(韓明澮)의 첩이었는데, 하루는 공이 그녀를 찾아가서 ‘한명회는 어디 갔느냐?’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鞫問)하느라 대궐에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취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을 죽인다면 영공(令公)은 만세(萬世)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다. 한명회가 돌아와서 ‘정모(鄭某)가 와서 무슨 말을 하더냐?’ 하고 묻자 그 첩이 사실대로 다 말하니, 한명회가 즉시 입궐하여 그대로 아뢰었다. 그리하여 공이 국문을 당하고 적몰(籍沒)되었다.” 하셨으나, 그 이상의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내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중간(重刊)하면서 감교(監校)하다가 우연히 육신(六臣)의 사적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정보(鄭保)가 방자한 말을 하여 상(上)이 친국(親鞫)하였는데, 정보가 공초(供招)하기를 ‘늘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여겨 왔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몹시 노하여 거열(車裂)하라고 명하고 이어 묻기를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좌우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정모의 손자입니다.’ 하자, 상이 즉시 그만두라고 명하고 ‘충신의 후손은 사죄(死罪)를 감면해야 한다.’ 하고 연일(延日)로 원찬(遠竄)했다.”라는 기록이 있었다. 그 묘소는 지금 선생 묘소의 왼쪽 지맥(支脈)에 있다.
아, 대옥(大獄)이 일어난 때에 공이 홀로 직언으로 진실을 말하였고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는 특별히 선생을 위하여 죄를 용서하셨으며, 국장(國葬)의 길지(吉地)를 잡지 못하여 모든 산들을 남김없이 살펴보는 때에 우리 선왕께서는 특별히 선생의 묘소는 제외시키라고 하교하셨으며, 제현(諸賢)의 서원들에서 사액(賜額)을 청한 것이 매우 많은데도 우리 성상께서 유독 선생의 서원에 어제(御製)로 편액을 하사하셨다. 이처럼 열성(列聖)이 선생을 추숭(追崇)한 덕이 전후로 꼭 같으니, 아, 지극하도다.
수백 년 이래 봉식(封植)의 은전이 더할 나위 없이 극진하였거니와, 이 몇 가지 일은 그중에서도 특히 성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증명할 기록이 없어 사람들이 혹 알지 못한다. 내가 이제 주문(奏文)을 받들고 중국으로 가게 되었기에 사당에 와서 배알하노라니, 세월이 오래 흐르면 이러한 사적이 민몰(泯沒)되어 전해지지 않게 될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등잔불을 밝히게 하고 구술(口述)로 받아 적게 하여 제생(諸生)들에게 주어 영세(永世)토록 전하게 하고, 아울러 서원의 전말을 이상과 같이 기록하노라.
만력 병진년(1616, 광해군8) 맹동(孟冬) 하한(下澣)에 서원의 재실(齋室)에서 쓰다.
重修公州孔巖書院記
鷄龍之山 蟠於兩湖之間 環而邑者多 而公實主焉 山氣之鍾聚 地靈之亭毓 公皆專有之 以故溪山之勝 人物之盛 甲於一道 山之一支 西北走而爲峯屹然者曰孤靑 峯之下 豁而爲野 渟而爲潭 削而爲壁 長流繚之 白沙鋪焉 奇巖隱然集衆勝 爲一名區者曰孔巖 徐氏始居之 其名曰起 以其居是山 自號孤靑 博學守志 行義於其中 州之士與遠近學者 爭奔走焉 遂作講堂於潭下 曰博約堂 翼以兩序 東曰進修 西曰踐履 旣又相議曰境佳矣 堂美矣 不有先正 于何式焉 麗朝李正言,本朝李評事,成東洲 皆一代偉人 而卽我鄕先生也 且朱夫子主盟群賢 最有功於斯道 盍立祠尊崇 以爲依歸之地乎 遂以朱夫子主享 三先生爲配 建祠於講堂之北 無何 値壬辰兵燹 莽爲墟矣 今上卽位之元年 趙侯振來莅是州 首以興學勸士爲心 乃聚大夫士而言曰 州之學宮 旣重新矣 多士尊賢之意 止於斯乎 孔巖故有書院 而今亡焉 斯豈非地主之責歟 遂歸材與料 剋日重修 前都事朴輅 篤行人也 諸生擧以爲院長 俾主其事 誠以莅役 越明年工訖功 進士趙夢翼,吳中喆 具書廢興始末 求余文爲之記 余因此竊有慨焉 夫古之造士 莫盛於三代 其名庠序學校 其實五倫 其文六經 其器俎䇺 其事禮樂射御書數 今者國有學州有校 蔑以加矣 而惟書院是尙者 非亶玩舊而圖新 蓋以觀感之切 而風厲之有所因耳 亦古者家塾黨序之遺意 名其名實其實文其文事其事 是亦學也 何莫非敎也 噫 今茲院之旣廢而重新也 木石 資之人也 土瓦丹雘 資之人也 一念之欲新 而不浹歲 煥然卽新 況人五倫具於心 六經足乎已 禮樂射御 皆身之日用 苟能反求諸身 則德日新矣 余願遊是院者 咸以新其院者 自新其心 居於齋而懋眞知實踐之功 聚於堂而思博文約禮之訓 瞻乎廟而挹高風慕直節 以折衷於集成之大賢則幾矣
중수공주공암서원기(重修公州孔巖書院記)
계룡산(鷄龍山)이 양호(兩湖) 사이에 서리어 그 에워싸인 산세 속에 읍(邑)을 이룬 것이 많은데 공주(公州)가 실로 으뜸이라 그 응축된 산기(山氣)가 배양된 지령(地靈)을 공주가 모두 차지하였다. 이런 까닭에 계산(溪山)의 빼어남과 인물의 성대함이 일도(一道)에서 으뜸이다.
산의 한 가닥이 서북쪽으로 달려 우뚝한 봉우리를 이룬 것이 고청봉(孤靑峯)이고, 봉우리의 아래에는 후련히 틔어 들판을 이루고 물이 고여 못을 이루며 깎아지른 형세로 벼랑을 이루고 있는데, 긴 시내가 휘감아 흐르고 흰모래가 깔려 있으며 기암괴석이 은은히 보이는 등 빼어난 경치들을 모아서 하나의 명승(名勝)을 이루고 있는 곳을 공암(孔巖)이라 한다. 서씨(徐氏)가 처음으로 이곳에 살았으니, 그의 이름은 기(起)이다. 그가 이 산에 살면서 고청(孤靑)이라는 자호를 썼는데, 학문이 넓고 지조(志操)가 있으며 행의(行義)가 뛰어났으므로, 고을의 선비들과 원근의 학자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못 아래에 ‘박약당(博約堂)’이라는 강당을 짓고 좌우로 두 재사(齋舍)를 지어 동쪽을 ‘진수(進修)’, 서쪽을 ‘천리(踐履)’라 하였다. 이윽고 또 상의하기를, “경관도 좋고 집도 좋지만 선정(先正)이 없으니 누구를 본받겠는가. 여조(麗朝)의 이 정언(李正言)과 본조(本朝)의 이 평사(李評事)와 성동주(成東洲)는 모두 일대의 위인(偉人)이며 바로 우리의 향선생(鄕先生)이시다. 그리고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는 군현(羣賢)의 맹주가 되어 사도(斯道)에 가장 큰 공적이 있으니, 어찌 사당을 세워 존숭(尊崇)하여 의지할 곳으로 삼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주 부자를 주향(主享)으로 삼고 세 선생을 배향(配享)으로 삼아 강당의 북쪽에 사당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년의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상(今上) 즉위 원년에 조후 진(趙侯振)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 선비를 권면(勸勉)하는 일에 마음을 두어 대부(大夫)와 선비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이 고을의 학궁(學宮)을 이미 중수(重修)하였으나 선비들이 현인(賢人)을 존숭하는 뜻이 여기에 그쳐서야 되겠습니까. 공암(孔巖)에는 옛날에 서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었으니, 이 어찌 수령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재목과 급료(給料)를 보내 주어 기한을 서둘러 중수를 시작하였다. 전(前) 도사(都事) 박로(朴輅)는 행의(行誼)가 독실한 사람이라 제생(諸生)들이 원장(院長)으로 추대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니, 그가 성심으로 공사를 감독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진사(進士) 조몽익(趙夢翼)과 오중철(吳中喆)이 서원의 흥폐(興廢)의 전말을 갖추어 적어 주고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이에 개연(慨然)한 느낌이 일었다.
대저 옛날 선비를 육성한 것이 삼대(三代)보다 융성했던 때가 없었으니, 그 명칭은 상(庠)ㆍ서(序)ㆍ학(學)ㆍ교(校)이고, 그 실질은 오륜(五倫)이고, 그 글은 육경(六經)이고, 그 기물은 조두(俎豆)이고, 그 일은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였다. 지금은 나라에는 학(學)이 있고 주(州)에는 교(校)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그런데도 오직 서원을 숭상하는 것은 옛 학문을 공부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직접 보고 감화되는 것이 절실하여 선비들을 고무 면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고대의 가숙(家塾), 당서(黨序)와 같은 취지이니, 그 명칭을 명칭으로 삼고 그 실질을 실질로 삼고 그 글을 글로 삼고 그 기물을 기물로 삼고 그 일을 일로 삼는다면 이 또한 학(學)이니, 무엇인들 교(敎)가 아니리오.
[주-D001] 가숙(家塾), 당서(黨序) :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의 교육은, 가(家)에는 숙(塾)이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술(術)에는 서(序)가 있고, 국(國)에는 학(學)이 있다.” 하였다. 모두 교육 기관의 명칭이다.
아, 지금 이 서원이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새로 중건될 때에 나무와 돌을 남들의 도움으로 얻고 흙과 기와, 단청 등을 남들의 도움으로 얻었는데도 일념으로 새로 중건하고자 하여, 한 해가 채 되기도 전에 훤하게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하물며 오륜(五倫)은 마음에 구비되어 있고 육경(六經)은 자기에게 충족되어 있으며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는 모두 자신의 일용(日用)이니, 진실로 자신에게 돌이켜 찾는다면 덕(德)이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 이 서원에 오는 이들은 모두 서원을 새롭게 한 것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재(齋)에 머물면서 진지(眞知)ㆍ실천(實踐)의 공부에 힘쓰고 당(堂)에 모여서 박문(博文)ㆍ약례(約禮)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사당을 우러러보며 높은 풍모와 곧은 절개를 흠모함으로써 집대성한 대현(大賢)에게 절충하기를 나는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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