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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세계와 춘추전국시대의 신체관: 무의에서 방사의학으로
1. 신화시대에 해부가 존재했을까?
2. 춘추전국시대의 방사의학
해부의 기원과 장부도의 세계
1. 『황제내경』과 해부의 기원
2. 화타시대의 신체관과 해부 인식
3. 송명이학적 신체관
Ⅰ. 머리말
역사상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의학분야에서 실제로 해부가
행해졌는지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왔다.
그러나 논쟁은 해부의 본질과 실제를 규명하기보다
해부 없는 의학의 문제점을 의식한 경우가 더 많았다.
해부학은 인간의 몸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근대 의학의 학문 분과이자
인간의 몸을 둘러싼 각종 규범과 인식들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기초가 되어왔다.
해부학이 하나의 학문체계로 정립된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근대세계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지만,
의학과 인간학의 기초로서 인간의 몸과 해부에 대한 관심은 유사 이래 지속되어왔다.
과거 인간의 몸에 대한 해부 지식이 중요했던 것은 인간의 몸을 안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의 총체였기 때문이다. 고대 서양에서 몸에 대한 이해가
신의 섭리를 파악하는 것이었다면, 고대 동양에서 몸에 대한 이해는 우주 원리와
인간세계의 원리가 구현된 공간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고대 동서양에서 해부
지식은 단순히 질병의 치료를 위한 의학지식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본질적인 지식이었다. 따라서 자연과 신체, 신체와 세계는 상호 대비될 수 있는
유비적 관계에 놓이게 되고, 신체는 자연질서와 조화 및 균형이 중요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해부 지식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원리인 신체관과 질병의
치료방식을 결정하는 질병관과도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서양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서양의 해부 인식이 기능적
병리적 해부학을 추구했다면, 동양의 해부 인식은 전체론적 생리적 해부학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고대 동양에서 해부 지식은 살아있는 신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물질적인
존재이자 관찰대상으로서 신체를 다루는 서양의 해부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해부는 『황제내경』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몸에 대한 관심과 질병의 이해를 위해서는 신화시대부터 해부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해부 인식의 발전을 고찰해야 신체관과 해부 인식 사이의 관계가 설명된다고 본다.
본고는 신화시대 이래로 신체에 대한 관념과 해부에 대한 인식을 추적한 다음,
장부도 등에 나타난 중국 고대의 해부 인식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해부 관념의 이해뿐만 아니라 서양의학의 해부학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신화세계와 춘추전국시대의 신체관: 무의(巫醫)에서 방사의학(方士醫學)으로
1. 신화시대에 해부가 존재했을까?
중국의 창조신화를 보면 태초에 반고라는 큰 거인이 태어났고,
반고는 1만 8천년을 살다가 죽었다. 반고의 죽음에 이르러 그의 몸이 변화되었는데,
몸 속의 기(기)는 바람과 구름이 되었고, 목소리는 우레가 되었다. 왼쪽 눈은 해가,
오른쪽 눈은 달이, 사지와 오체는 사방과 오악이 되었으며, 혈액은 강이,
근육과 힘줄은 지형이, 살은 토지가, 머리칼은 별이, 몸의 털은 초목이,
이빨과 뼈는 금과 옥이, 정액은 보석이, 땀은 비와 못이 되었고,
몸 속의 여러 벌레들은 바람에 감응하여 백성으로 변하였다.
거인이 죽어서 천지만물을 창조한다는 이야기는 세계 각국의
신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데, 신체가 분화되면서 지상의 모든 현상이
발현되었다는 주장은 인간과 우주, 자연을 일체로 간주하는 천인합일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신화적 존재들은 자연계의 독자적인 일원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변형되고 혼합되는 잡종들이다.
예를 들면 산해경에는 몸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 얼굴은
사람의 형상을 한 조인일체의 그림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또 파충류의 모습을 한 인간도 있으며, 수많은 기형인간들도 등장한다.
머리가 셋인 삼수인 팔이 유난히 긴 장비인하반신이 물고기인 저인 등이 그것이다.
왜 중국신화 속에서 인간은 동물과 결합하거나 기형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것일까?
중국신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은 언제라도 변형과 소통이 가능한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통해서 인간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장의 양생사상과 통하는 면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이다. 생명체의 근원인 기는 자유로운 변형이 가능하다.
무의가 다루는 영약은 질병도 치료가 가능하지만, 궁극적으로 기의 단련과 단약의 복용을 통해서
신체가 변형되거나 신선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기와 단약의 역할은 신화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춘추전국이래로 신선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었다.
신화시대의 대표적인 질병관은 귀신치병설 또는 질병이 귀신이나 저주 등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일종의 외인론인 셈이다. 갑골문의 복사에서도 귀신과 저주 등으로 병이 발생한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임술에 복하건데 긍이 묻노니, 이가 아픈데 저주가 있는가
묻노니, 사람을 아프게 하는데 부갑의 저주인가 묻노니, 제가 쳐서 왕이 아픈가 묻노니,
병이 있노니 황윤의 저주인가
부갑(父甲)은 선왕의 한 사람이고, 제는 최고신인 상제이며, 황윤은 은나라의 신하를 말한다.
질병은 선왕이나 상제, 신하의 영이 저주를 일으켜 발생한다고 믿었다.
심지어 벌레나 용의 영혼도 인간에게 저주를 내려 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귀신이나 영혼 같은 외부적인 요인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나 기원을 통해
치료를 기대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제사와 기도를 담당하는 무의는
질병치료를 담당하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신화세계에서 치료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는 무에서 기원했다. 치료할 의자는 본래 무당 의자에서 나온 것인데,
의는 무당이 치료한다는 의미이고, 의는 화살과 창에 찔린 상처를 술로 치료한다는 의미였다.
『산해경』에 등장하는 무팽과 무함은 의술의 창시자로 여겨지는데,
『여씨춘추』에 의하면, 무팽은 점복을 담당하였고, 무함은 의술을 담당하였다.
무팽과 무함 이외에 무즉 무반 무고 무진 무례
무저 무사 무라등 열 명의 무당이 영산을 오르내리며 약을 다루었다.
그들은 모두 불사약의 채약을 중요한 일로 여겼으며, 불사약을 가지고 죽음의 기운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한 임무는 어디까지나 신명을 받드는 일이었고, 병을 치료하는 일은 부수적인 일이었다.
실제로 『산해경』에는 여러 종의 약물이 소개되고 있고, 불사약을 비롯한
무약은 치료행위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산해경』에 나타난 의약은
총 121종에 달하는데, 이 중에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 46종, 병을 예방하거나
전염을 방지하는 것이 45종, 자손을 낳거나 기르는 것에 관련된 것이 4종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 의약들은 무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망과 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수당으로 활용된다.
무의가 약을 다루기는 했지만, 무의의 주요한 치료방식은 축유였다.
축유란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로 병을 치료하는 방식을 말한다.
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백서 중에는 『오십이병방이라는 의서가 있는데,
이 책에는 52개의 병증에 대해 283개의 처방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 36개는 축유였다.
즉 한대에도 축유에 의한 치료술은 널리 시술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십이병방』에서는 체취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복을 내려주고 재앙을
소멸시켜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의 천둥번개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또, 출혈이 있는 경우에는 “남자의 출혈이 멎게 해 주시고, 여자의 출혈이
빨리 멎게 해 주십시오”라는 축문을 읽고, 땅에 다섯 번 그리게 하였다.
신화시대 무의들에게 신체란 인간과 자연이 소통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는 영약과 축유에 의해 변형가능한 존재였다. 질병이란 외부의
나쁜 기운이 몸안에 들어와 신체와 자연과의 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질병을 치료하자면 몸안의 귀신을 내쫓을 수 있는 주술이나 영약과 같은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굳이 신체에 대한 외과적 수술이나 해부 같은 인위적 조작 행위는 필요치 않았다.
안마나 침술 역시 상주 이래 오래된 치료방법의 하나로써 무의적 치료방법을 보조하는 행위였다.
무의의 치료술은 언제나 신성성과 배타성을 가졌다. 그들의 치료술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거나
논의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의는 오직 자신이 점지한
후계자에게만 밀전의 형태로 영업비밀을 전수하였다.
『산해경』의 성립연대에 대해서는 서주 초기(B.C. 12세기)부터 위진시대(A.D. 3-4세기)까지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그 중 「오장산경의 경우,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 중국 초기에 의술이란 무축적전통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의의 특징은 점복을 통한 예언이나 무약을 통한 치료였다. 의술은 처음에는 무속과 통합되어 있었다.
신화시대의 대표적인 의사는 황제시기의 명의인 유부이다. 『사기』의 「편작·창공열전」에서는
황제시기의 명의인 유부를 언급하고 있는데, 유부는 “병을 치료할 때, 탕액, 예쇄 단술과 맑은 술),
참석 돌로 만든 침), 교인 손과 발을 굽혔다 폈다하는 의료체조의 일종), 안올
독위 아픈 곳에 약물을 붙임) 등을 쓰지 않고, 옷을 풀어헤쳐 잠시 진찰하는 것만으로
질병의 징후를 보았고, 오장에 있는 수혈의 모양에 따라 피부를 가르고 살을 열어
막힌 맥을 통하게 하고 끊어진 힘줄을 잇고, 척수와 뇌수를 누르고, 고황과 횡격막을
바로하고, 장과 위를 깨끗이 씻어 내고, 오장도 씻어 정기를 다스리고, 신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신화시대의 유부는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치료법인
침, 안마, 체조, 탕액, 고약 등을 사용하지 않고 잠시 진찰하는 것만으로
질병을 찾아내고 치료하는 명의였음이 강조된다.
그런 유부가 “피부를 가르고 살을 열었다”는 것은 실제 외과수술을 했다기보다는
침을 이용하여 맥을 통하게 하고, 약물을 이용하여 정기를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유부는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침과 약물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무의시대를 종결하고
방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2. 춘추전국시대의 방사의학
무의가 신화시대의 치료사를 대표한다면, 새롭게 등장한 치료사들은 방사(방사)였다.
방사들의 본격적인 출현은 전국시대로 주로 연제 지방에서 출현하였다.
연,제 지방은 오늘날 허베이성과 산둥성으로, 연,제 지방의 동부 연안에서
신선사상이 처음 등장하고 불사약이 유행하였다. 진시황제가 불사약을 찾기 위해 한종이나
서시 등 자신의 친위대를 파견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신선은 인간세상을 초월한 존재로,
죽음으로 도달되는 귀신이나 상제와 달리, 후천적 수련과 복약에 의해 살아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로 여겨졌다. 신선의 출현은 군신관계나 상하관계가 죽어서도 영원할 것으로 여겨졌던
고대사회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신선술을 고취했던 사람이 방사였다. 따라서
방사는 자신만의 수련법인 방술과 수많은 선약을 가지고 있었다.
방사들은 새롭게 등장한 의가들로 전국을 주유하면서 자신들의 학문과 사상을 유세하였다.
그들은 아직 무의들에 비해 사회적 신분이 낮았지만, 자신들의 학문과 실천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논리가 결여되고 신비주의에 사로잡힌 무의들을
주요한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방사들은 자연법칙에 의거하여 객관적인 논리와
해석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무의의 예언적이고 신비적인 치료법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사들은 여전히 점술가이자 예언가이며 의사이기도 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편작과 창공이었다. 편작의 의술은 무의적 치료법에서 방사적 치료법으로 이행하는 단계를 대표한다.
기원전 5세기 평범한 여관 관리인이었던 진월인이라는 자는 객사를 드나들었던
장상군으로부터 비밀스럽게 전해오는 의술을 전해받는다. 장상군은 그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는 밀전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밀약을 먹고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의 의술은 밀전과 복약을 통해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는 조나라에 있으면서 편작으로 불리었고, 제나라와 진나라 등을 주유하였다.
편작은 맥을 짚어보거나 진단을 하지 않아도 환자의 상태를 알아볼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그가 후대에 끼친 가장 중요한 의술은 맥법이라고 할 정도로 편작은 실제로 진맥에 뛰어났다.
편작은 의술로써 명성을 얻었지만, 진나라 태의령 이혜의 시기를 받아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편작은 뛰어난 의술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편작내경』과 『편작외경』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편작은 맥법을 통해 방사치료의 시대를 열었지만, 여전히 밀전과
복약이라는 무의시대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또한 편작은 영의라고 불리는 존재로 방울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약상자를 등에 지고
촌이나 거리를 순회하는 의사였다. 그들은 각국을 편력하며 제후나
유력한 사에게 객으로 비호받는 편력의였다.
편작이 신비 속에 가리워진 밀전과 복약에 의해 의술을 전수받았다면,
창공은 명확한 사승관계를 통해 의술을 전수받았다. 창공의 본명은 순우 의로
제나라에서 창고지기로 살았다. 어려서 의술을 좋아해서 여러 방면으로 의술을 익혔다.
고향에서 의술에 능통하다는 공손 광으로부터 각종 의술과 비방을 배웠다.
공손 광은 자신의 비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지 말라는 약속을 요구하였다.
창공에게 더 이상 가르챌 게 없다고 판단한 공손 광은 창공에게 자신보다
뛰어난 칠순이 넘은 양경(양경)을 소개하였다. 창공은 양경을 스승으로 섬겨 3년 동안 의술을 배웠다.
양경은 기존에 배운 의술을 모두 버릴 것을 요구하였고, 황제와 편작이 지은 『맥서』를 포함하여
상경 하경 오색진 기해술 규도음양외변, 약론 석신 접음양금서 등 밀전을 전수받았다.
창공은 제나라 시의가 될 당안을 비롯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의술을 전파하였다.
창공은 방사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인 이론화된 의사와 사승관계에 의해서 학맥이 전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공은 편작과 달리 각국을 배회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머무르면서 개업하여 일가를 이룬 일종의 정주의였다.
춘추전국시대 질병관의 특징은 외인론적 귀신소행설을 극복하고 내인론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진나라의 의화가 주장한 육기치병설을 들 수 있다.
육기치병설은 음 양풍 우 회, 명 등의 기운이 과도하게 넘칠 때 질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기존의 귀신소행설을 극복하고 자연계의 이치로 질병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에 진일보한 이론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의화가 진나라에 파견되어 진평공을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진평공의 병이 여자를 가까이하여 생긴 것으로 귀신이나 음식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그는 내인론적 질병관을 설파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은대 이래로 외부의 사기가 체내에
침입하여 질병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춘추전국시대 방사들의 실천방식인 방술은 질병과 고통의 치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방사들은 오히려 생리를 유지하고 회복하는 양생을 방술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양생을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치국의 근본이기도 했다. 적어도 당시의 학문집단은
치신뿐만 아니라 치국의 책략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임무 중의 하나였다. 방사들에게
치국책은 신체 경영술의 연장이기도 했다. 몸을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는 점에서 결국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치국책은 치신과 달리 보다
위계적인 정치윤리와 정치철학을 필요로 하였다. 치국책을 보완하기 위해 방사들은
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한 초기까지 방사와 유생이 분리되지 않는 까닭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면서 유생들은 점차 방사들의
주장을 흡수해버렸고, 방사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유생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방사들의 신체인식은 내경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내경도는
「내경도로 불리기도 하는데, 내경은 몸안의 질서를 일컫는 말이고,
내경은 몸안의 풍경을 의미한다. 한대의 황제내경이 전자의 사례이고,
위진시대의 『황정내경경이 후자의 사례이나, 「내경도는 근본적으로
『황제내경』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내경도」는 도가적 양생법을 장부도의 형태로
설명한 것으로 비교적 뒤늦게 등장한 신체내부에 관한 그림이지만, 그 사상적 원천은
신선사상이 등장하는 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내경도」가 표현하는
신체는 정* 기* 신*의 변화를 통해 자연과 일상과 신선 등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논을 갈고 타작을 하는 농부의 일상과 신선이 되어 천상에서 천수를 누리는 모습 등이 구체화되어 있다.
「내경도」는 일상의 삶과 신선의 삶을 대조시키면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선으로
승화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내경도」는 바로 그림 옆에 실려 있는 시를 통해 그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대체로 몸은 세 개의 단전으로 구성된다. 머리부인 상단전가슴부인 중단전
복부 이하의 하단전으로 구성된다. 상단전에 뇌가 있는 니환이 있고, 중단전에
오장육부가 배치되어 있다. 하단전에 신장을 의미하는 신수가 있는데, 신장은
기가 모이는 곳이고, 여기서 물레방아로 끌어올려 관개수로와 같은 긴 관을 통해 몸 전체로 기를 공급한다.
몸의 각 부위는 이 기를 받아 단련시켜 각자의 기능을 유지한다.
기가 흐르는 통로인 경락은 각 장기와 부위에 일정하게 개방되어 있고,
몸 전체도 외부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몸 전체가 자연의 일부로서
외부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내경도는 몸 전체가 열린 구조이며, 기의 흐름을 따라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신체의 작동방식은
물을 끌어올리고, 농사짓고, 단련을 통해 신선이 되는 일상의 삶의 방식이 연장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방사들은 자신들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특정인에게만 의술을 전수하였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비전을 계승할 제자를 만나지 못하면, 오랫동안 축적된 지식이
한순간에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식이 선호되었다. 심지어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암살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방사들의 학문세계와 실천방식은 방기 혹은 방술(方術)이라고 표현되는데,
의학, 약물학, 성학, 양생 등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결국 방사가 목표로 하는 세계는
약물과 심신단련 등을 통해 무병장수하고 불노장생하는 세계였다. 방사들은 치국의
책략을 제공하기 위해 주류사상에 편승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위사상과 유교를 받아들였고,
주류에서 배제될 경우 내단과 외단의 도교의학으로 침몰될 가능성도 높았다. 특히 호흡법이나
신체단련법 등은 종교집단이나 비밀결사 등의 성행을 조장할 가능성도 높았다.
춘추전국시대 방사들은 신체가 변형가능하다는 무의들의 신체관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판단하였다.
방사의학의 가장 큰 특징은 신비적이고 무의적인 신체관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새로운 신체관을 확립했다는 데 있다. 물론 마왕퇴 한묘 백서에 실려 있는
『오십이병방』, 『양생성』, 『잡료방』, 『태산서』 등에는 축유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한초까지도 무의의 축유가 상당부분 지속되었다. 그렇다해도 방사들이 축유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며
신체의 보편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치료행위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체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서로는 1973년 후난성 창사시에서 발견된
마왕퇴 한묘 백서와 1983-84년 후베이성 장링현 장가산 한묘 죽간 등이다.
이들은 매장연대는 각각 BC 168년, BC 190년 등 한초에 해당하는
시기로 전국시대 중후기의 저작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왕퇴 한묘 백서는 15종의 의서를 포함하고 있는데, 비단에 씌여진
백서 이외에 죽간과 목간을 포함하고 있다.
백서
①족비십일맥구경 ②음양십일맥구경 ③맥법 ④음양맥사후 ⑤오십이병방
⑥각곡식기 ⑦음양십일맥구경 ⑧도인도 ⑨양생방 ⑩잡료방 ⑪태산서
죽간 ⑫십문 ⑬합음양 ⑭천하지도담
목간 ⑮잡금방
원래 책에는 제목이 없고, 연구자들이 편의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오래된 것(①~⑤)은 진대(진대)에 가깝고, 새 것(⑫~⑮)은 매장 연대와 비슷하다.
이것은 사본으로 원 저작은 전국시대 중후기로 추정된다. 장가산 한묘 죽간은
『맥서』와 『인서』등 두 개의 의서로 구성된다. 맥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죽간 ⑯ 병후 ⑰ 음양십일맥구경 ⑱ 음양맥사후 ⑲ 육통 ⑳ 맥법
장가산 한묘 죽간은 마왕퇴 백서 3편에 『병후』와『육통』2편이 더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20여 편의 의서를 한대의 문헌분류법으로 정리하면, 방기
이하 의경, 경방, 방중, 신선 등을 균등하게 망라하고 있다. 이는 『한서•예문지』의 문헌분류법이
그 이전부터 상당기간 지속된 분류법이었음을 잘 보여주는데, 이러한 분류에
기초하여 방사의학의 면모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의경 경방 방중 신선
우선 이들 의서들이 갖는 특징 중의 하나는 침요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반면,
진맥, 경맥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맥이란 세로의 맥을 의미하고, 경맥으로부터 나뉘어 옆으로 나와 있는
지맥을 낙맥이라 하고, 둘을 합쳐 경락이라고 칭한다. 각종 경맥은
특정 질환과 연계되어 있는데, 박동에 어지러움이 생기면 그 맥에 속하는 질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의사는 진맥을 통해 어떤 경맥에 문제가 생겼는지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제시하여 치료하게 된다.
의경이란 사람의 혈맥, 경락, 골수, 음양, 표리의 근원을 따져서 이를 통해
온갖 병의 뿌리, 죽고 사는 구분을 정한다. 그리고 안마, 침, 폄석, 탕약,
뜸을 해야 할 곳에 따라 이용하고, 온갖 약을 조합하여 마땅하도록 조절한다.
아주 효과적인 약제의 배합이 갖는 효과는 자석이 철을 당기는 것과 같으니
서로의 효과를 증진시킨다. 이에 미숙한 자는 이치를 잃어 쉽게 나을 수 있는 것을
어렵게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을 죽는다고 한다. 황제내경과편작내경등이 이에 속한다.
경방이란 식물과 광물의 차갑고 따뜻함에 근본하고 질병이 깊은지 얕은지 헤아리며,
약의 다양한 맛을 빌고 기의 감응의 마땅함에 따르고, 다섯 가지 쓴맛과 여섯 가지
매운 맛을 구별하고, 수기와 화기가 최고의 조화를 이루도록 조제함으로써
막힌 곳을 통하게 하고 맺힌 곳을 풀어서 평안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마땅함을 잃어버린 사람은 열기로 열기를 더하고, 한기로 한기를 더하니
환자의 정기가 안으로 손상되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니 이런 것을 홀로 잃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기를 “병이 있어도 다스리지 못함은 늘 중의를 만났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오장육부비십이병방부인영아방등이 이에 속한다.
방중이란 인간의 본능이 극도로 흥분되는 상태로서 지극한 도리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성왕은 외적 쾌락을 절제함으로써 안으로부터 욕정이 일어나는 것을 금하되
남녀관계를 가질 때에는 일정한 격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전하는 말에 “선왕께서 즐거움을 누릴 때에는 온갖 일을 절제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즐겁더라도 절제가 있으면 몸과 마음이 화평하고 장수할 수 있다. 이러한 이치를
잘 모르는 자는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병이 생기고 생명을 손상시킨다.
황제기백안마황제잡자십구가방등이 이에 속한다.
신선이란 생명의 본질을 보좆하는 것이지만 몸 바깥에서 돌아다니며 구하는 것이다.
잠시라도 뜻을 씻어내고 마음을 편하게 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같은 것으로 여겨
가슴 속에 두려운 마음을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잘 모르는 자가 오로지
여기에만 몰두하게 되면 허망하고 거짓되고 괴이하고 우원한 말이 갈수록 늘어나게 되니
이것은 성황께서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찾고
행한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춘추전국에서 진한에 이르는 중국 고대시기에 의학이 독자적인 학문분과로 자리잡았던 것은 아니었다. 마왕퇴 한묘 백서와 장가산 한묘 죽간 등을 통해 전국시대로부터 한대에 이르기까지 의경, 경방, 방중, 신성 등으로 분류하는 방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의학의 지위는 『한서•예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서•예문지』는 한대 황실의 도서문헌 목록집으로 중국 정사의 문헌목록의 모범이 되었는데, 전체 문헌을 육예략(六藝略), 제자략(諸子略), 시부략(詩賦略), 병서략(兵書略), 수술략(數術略), 방기략(方技略) 등 6가지 범주로 구분하였다. 육예는 경전, 제자는 학파, 시부는 문학, 병서는 군사, 수술은 자연과학 등을 가리키는데, 방기는 다시 의경(醫經), 경방(經方), 방중(房中), 신선(神仙) 등 4가지 하위범주로 구분된다. 의경은 의학이론서, 경방은 약물학, 방중은 성학(Sexology), 신선은 복식, 도인 등의 양생술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방기는 인간의 생명과 관련을 가지는 범주로 의약과 양생을 기본 골격으로 삼았으며, 의학은 의학이론 및 약물 등으로 분화되고 방기의 하위분과를 형성하고 있었다.
“방기란 삶을 살아가는 도구이며, 왕의 관직으로 지켜야 한다. 태고에는 기백(岐伯)과 유부(兪拊)가 있엇고, 중세기에는 편작(扁鵲)과 진화(秦和)가 있었다. 대개 병을 논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진단의 원리로 정사를 이해하였다. 한나라가 흥할 때는 창공(倉公)이 있었다. 지금은 그러한 기술들이 흐려지고 애매해졌다. 그리하여 그에 관한 서적을 논하고, 방기를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한서•예문지』는 방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방기는 단순한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고 진단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기구로서 치국과 정사의 요체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 이래로 무의 비판에 앞장섰던 방사의학은 역사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무의가 담당하던 치유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객관적인 논리와 해석을 중시하면서 예언적이고 신비적인 치료법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무의들의 담당했던 점술가, 예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를 들어 한무제가 사랑하던 이부인(李夫人)이 죽자, 무제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애절하자 방사 소옹(少翁)은 이부인의 영혼을 불러내어 무제가 장막속에서 그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밖에도 방사의 중요한 업무는 불사(不死)를 위해 선인을 찾거나 신선이 되기 위한 단약을 만드는 일이었다. 방사의학은 한무제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고, 후한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점차 쇠락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이 국교가 되면서 방사들이 유생그룹에 대거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Ⅲ. 해부의 기원과 장부도의 세계
1. 『황제내경』과 해부의 기원
『황제내경(黃帝內經)』이 바라보는 신체는 단순히 기계론적 신체만은 아니다. 신체는 밖으로 드러난 형체인 형(形) 이외에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정신인 신(神)으로 구성된다. 『황제내경』은 “신을 얻는 자는 번성하고, 신을 잃은 자는 망한다”고까지 말한다. 신은 인간의 생사에 결정적인 요소이고, 육신인 형과 분리되지 않는다. 신을 비롯하여 정, 혈, 기, 혼, 백 등을 보관하는 장소가 오장이다. 오장은 정기가 가득 차 있는 장기이고, 육부는 정기를 운반하기 위해 비어있는 장기이다. 오장은 폐장•심장•간장•비장•신장, 육부는 대장•소장•담•위•방광•삼초 등을 일컫는다. 여기에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단중(膻中) 즉 심포락(心包絡)을 포함하여 육장육부로 불리기도 한다. 열두 장기는 1년 열두 달에 상응하기도 한다. 오장과 육부는 각기 짝이 있는데, 폐장은 대장, 심장은 소장, 간장은 담, 비장은 위, 신장은 방광과 서로 짝을 이루고, 삼초는 방광에 속하면서 짝하는 오장이 없는 고독한 부이다. 각각의 장기는 국가기구에 비유되고 군주-재상-장군-신하 등에 유비되면서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오장육부는 경맥을 따라 흐르는 혈기의 조화에 의해 유지된다. 혈은 음이고, 기는 양으로서 체내에서 음양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작용하고, 온몸을 순환하면서 신체의 생장과 발육에 관여한다. 따라서 『황제내경』의 치유방법은 병의 내인이든 외인이든 관계없이 몸 안의 자연질서인 생리를 어떻게 유지하고 회복하느냐 하는 양생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를 따라 몸이 그와 같이 조화롭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몸의 치유와 건장의 실현은 치국의 이상에도 연결된다.
『황제내경』은 기본적으로 질병은 음양의 조화가 깨진 인체의 상태를 가리킨다. 무릇 각종 질병의 발생은 대개 풍우, 한서, 음양, 기쁨과 노여움, 음식과 거처, 크게 놀라는 것과 갑작스런 공포 등으로 말미암아 혈과 기가 분리된다. 음양이 평형을 잃어서 경락이 막혀 끊어지고, 맥의 길이 통하지 않으면 음양이 서로 거스르고 혼란해져 위기가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그래서 경맥이 공허해져 기혈의 질서가 문란해지고, 인체가 그 정상적인 상태를 잃는다.
『황제내경』은 질병의 원인을 대체로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인체의 외부요인인 자연계를 표현하는 풍우한서이고, 다른 하나는 섭생과 감정의 상태 등 내부요인이다. 외부요인과 내부요인은 서로 상응하면서 인체에 영향을 미친다. 풍한이 먼저 육신을 상하게 하고, 감정은 내부 기운의 운행을 상하게 한다. 기운의 운행이 침해받으면 오장에 영향을 줘서 오장이 손상된다. 육신이 상하게 되면 체표에 병이 생기고, 근맥에 병이 생긴다. 외인 중에서도 풍은 모든 질병의 우두머리가 된다. 무질서한 풍은 자연에 감응하는 신체를 교란시킨다. 풍은 자연과의 조화를 방해하여 신체로 하여금 질병을 일으키게 한다.
『황제내경』은 기원전후 200여년에 이르는 다양한 학파들의 목소리를 종합한 의서이다. 그중에서 내인론을 발전시킨 학파는 황제파(黃帝派)이다. 황제파는 문진을 중시하였는데, “병을 진찰하는 데 있어, 걱정거리나 음식이 도를 지나치고 있지 않은지, 일상생활에 지나침은 없는지, 독에 걸린 것은 아닌 등을 묻지 않고, 즉 앞서 이 사항들을 살피지 않는 상태에서 무슨 병인가를 처음에 어떻게 알아맞힐 수 있겠는가”를 되물었다. 황제파가 특히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생활환경 등 신변에서 일어나는 심인성 질환에 관한 것이었다. 심인성 질병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정기가 말라버려 혈액이 줄어들고 생명활동이 약해지며 신체가 수척해지고 쇠약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다른 하나는 외인성 질병과 달리 신체에 나타나는 변화가 느리고 병증이 서서히 나나탄다. 이 점진적인 변화를 찾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정밀한 진맥법의 발달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황제파와 달리 외인론을 발전시킨 것은 소사파(少師派)였다. 소사파는 구궁팔풍설(九宮八風說)을 주창하였는데, 최고신인 태일(太一)이 동짓날 북방에서 자신의 궁전에 45일간 머무르고 동북방으로 옮긴다. 팔방의 궁전에 각각 45일 내지 46일 머물러 일년에 일주천(一周天)을 한다. 태일신이 있는 방위로부터 부는 바람을 실풍(實風), 맞바람을 허풍(虛風)이라고 한다. 태일신이 북쪽에 있을 때 남쪽에서 부는 대약풍이 허풍이 되고, 허풍을 맞게 되면 심장과 맥이 손상을 입게 되어 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설은 원래 태일신의 위치에 다라 점치는 점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사파는 태일점과 팔풍점을 묶어서 태일신의 위치에 따라 바람의 허실 개념을 도입하여 외인으로서의 사허풍(邪虛風)을 정의해낸 것이다.
소사파의 외인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기백파(岐伯派)였다. 그들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기(邪氣)로서의 허풍을 허사(虛邪) 혹은 허풍(虛風)이라고 부르고, 실풍도 허풍도 아닌 정사(正邪) 혹은 정풍(正風)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허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오싹하고 신체가 떨리게 되는데, 정사는 사람이 맞아도 깨닫지 못하고 자각하지 못한다. 허사는 방치하면 갈수록 심해지고, 정사는 자연히 낫게 된다. 소사파는 허풍만이 병을 일으킨다고 보았지만, 기백파는 모든 방위로부터 부는 바람이 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진일보한 견해를 제기하였다.
결국 내인론이든 외인론이든 질병의 극복이란 음양의 조화를 유지하고 회복하는데 있다. 즉, 양생에 힘써야 건강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하는데 있다. 이른 바 중화(中和)인데, 음양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덕과 도가 된다. 조화의 지속은 성인의 길이고, 천지의 중화는 궁극의 아름다움이 된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해부라는 용어가 언급된 『황제내경』의 성립 일시는 논쟁적인데, 대체로 기원전후 200년간으로 전한(前漢: B.C.202-A.D.8)과 후한(後漢: A.D.25-220) 시기에 걸쳐있다. 역사상 한대는 유학(儒學)이 국교의 지위를 얻게 되는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회적으로는 음양오행 및 참위사상(讖緯思想)이 유행한 시기였다. 『황제내경』은 음양오행을 통해 천지와 인체의 조화 및 질병의 발생원인과 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다. 『황제내경』,「영추•경수편」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으 몸을 가르고 각 기관의 구조와 기능을 헤아리는 ‘해부(解剖)’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원래 사람은 천지간 세계 속에 살고 있는데, 이 하늘의 높이와 땅의 넓음은 인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팔척의 사(士)라면 가죽과 살이 있고, 밖에서 계측하고 어루만져 보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사체를 해부하여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其死可解剖而視之). 장(臟)의 단단함, 부(腑)의 크기, 들어가는 곡물의 분량, 맥의 길이, 피의 맑기, 기(氣)의 분량, 십이경맥의 피가 많고 기가 적은 경우와 피가 적고 기가 많은 경우, 혈기의 많은 경우와 혈기의 적은 경우 등에는 모두 법칙이 있다.
내장과 경맥의 크기와 성질에 대한 이와 같은 서술은 매우 실체적인 것이어서 실제 해부에 기초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황제내경』은 해부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기와 혈기의 다소와 그 법칙 등을 설명하고자 했다. 위의 서술은 기백파의 기술로, 기백파는 외인론을 중시하면서 실제적인 해부로 나아갔다.
왜 『황제내경』에 이르러서 직접적인 해부가 이루어졌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신화시대의 무의와 춘추전국시대의 방사에게 해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황제내경』이 다양한 분파의 목소리를 종합하고 있고, 외인론을 중시한 기백파가 실제 해부와 계측을 중시하는 분파였다고 생각된다. 심지어 그들은 해부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기와 혈기의 다소를 측정하려고까지 하였다.
전한시기의 기백파를 계승한 것이 왕망(王莽: B.C.45-A.D.23)이 A.D. 16년 전한과 후한 사이에 세운 신나라에서 활동했던 백고파였다. 왕망은 역모를 꾀한 왕손경(王孫慶)의 사체를 해부하여 혈관의 길이를 쟀다는 사체해부 기록이 있다. 기백파와 백고파의 해부학을 계승했던 인물은 화타였다. 그 기록 이후로는 무려 천년이 경과된 다음에야 산적들에 대해 사체해부를 실시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실상 해부학을 중시했던 학파는 오랫동안 살아남지 못했다.
2. 화타시대의 신체관과 해부 인식
전한과 후한을 분기하는 시점에 신(新)나라가 있고, 신나라를 세운 이가 왕망(王莽: B.C.45-A.D.23)이다. A.D. 16년 왕망의 나이 61세에 왕망은 반역을 꾀한 동군(東郡: 河南省 濮陽 西南) 태수(太守) 적의(翟義)의 일당을 체포하여 3족을 멸하고, 가장 잔인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적의의 일족을 살해하였다. 적의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반역에 동참했던 병법가 왕손경(王孫慶)은 9년 동안의 도피 생활 끝에 붙잡혔고, 왕망은 그에게도 잔혹한 형벌을 내렸으니 태의(太醫) 등으로 하여금 사체를 해부하게 했다.
(왕망은) 적의의 도당인 왕손경을 체포하였고, 황실의사인 태의(太醫), 약물담당인 상방(尙方), 도살담당 교도(巧屠) 등이 함께 왕손경을 도려내고 벗겨내 오장의 크기와 무게를 재고 대침으로 맥을 통하게 하고 그 처음과 마지막을 알게 되니 이것으로 병의 치료가 가능할 수 있었다.
사체해부를 통하여 맥을 통하게 했으므로 정맥, 동맥, 혈액순환 등의 개념을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또, 장기의 무게를 잰 것으로 보아 계량해부학도 일정정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왕손경은 일반적인 죄인이 아니라 반역을 꾀한 점에서 그에 대한 해부는 질병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적인 성격이 강했다. “병의 치료가 가능해진다”는 것은 왕손경의 병이 아니라 왕망의 홧병을 말한다. 반역자의 질병을 치료할 이유도 없거니와 반역자들로 인해 마음 속의 홧병을 해부라는 가장 극악한 형벌로 다스리니 마음의 병을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왕손경을 해부한 것이나, 『황제내경』에서 계량해부를 기술한 자들이 이른바 백고파(伯高派)로 동일학파에 의해서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야마다 게이지(山田慶兒)는 『황제내경•영추』의 「골도」, 「장위」, 「평인절곡」등이 백고파가 기술한 것으로 보았다. 골도는 경부(硬部)의 계측, 장위는 연부(軟部)중 구순(口脣), 인후(咽喉), 위장(胃腸) 등의 계량, 평인절곡은 위장의 용량과 음식물 소화의 생리학을 각각 싣고 있다.
머리 둘레 2척 6촌, 가슴둘레 4척 5촌, 허리둘레 4척 2촌, 머리카락에 덮혀 있는 곳은 두개(頭蓋)로부터 목덜미까지 1척 2촌.(골도)
위의 크기 1척 5촌, 둘레 5촌, 길이 2척 6촌. 옆이 휘어져 있고, 물과 곡물 3말 5되를 넣을 수 있다. 그 속은 언제나 곡물이 2말, 물이 1말 5되가 들면 꽉 찬다. 상초(上焦)는 기를 밀어내는데, 빠르고 미끄럽고 움직이는 미세한 기를 낸다. 하초(下焦)는 밑을 향해서 제장을 쏟는다.(평인절곡)
백고파는 실측에 근거한 계량해부학을 발전시켰고, 이것은 실제 해부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 해부에 기초하여 경부나 연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계량한 사례는 이후 시대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후한대에는 도교의학과 장중경의 『상한론(傷寒論)』으로 대표되는 경험방이 유행하였다. 그 이외에 화타(華陀: 145-208)라는 독보적인 외과의사가 출현했다. 화타는 중국 한말의 전설적인 의사로 위나라 조조 밑에서 의원으로 일하다가 조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황제시대의 유부도 외과수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화타는 외과의 비조라고 여겨질 정도로 외과에 뛰어났다. 화타의 외과술에 대해서는 『삼국지』권29, 「화타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만약 병이 덩어리가 되어 안에 있는데도 침과 약도 소용없으니 응당 배를 갈라야 한다. ‘마비산’을 먹으면 잠깐 죽은 것처럼 의식을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배를 째고 맺히고 쌓인 것을 꺼내고 병이 장에 있다면 병환 부위를 장에서 제거하고 씻어내고 배를 봉합한 뒤 약을 바르고 4, 5일이 지나면 차도가 보이고 아프지 않고 자각하지도 못하면 한 달 안에 회복된다.
병이 몸 안에서 덩어리가 될 정도로 악화되면 수술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비산(麻沸散)을 먹여 마취상태가 되면 배를 가르고 덩어리를 꺼낸다. 봉합하고 약을 바르면 통증도 없이 치료가 끝난다. 수술과정은 대체로 이와 같은데, 전신마취를 하고 개복수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또 한 사대부가 몸이 좋지 않았다. 화타가 ‘댁의 병이 깊어 응당 배를 갈라 떼어내야 한다. 그래도 댁의 수명은 10년에 불과할 것이오. 병이 댁을 죽게 하진 않겠지만 10년간 병을 참아내면 수명도 다하니 자원해 수술을 할 가치는 없다.’라고 하였다. 사대부는 아픔과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화타가 손을 쓰자 환자는 차도가 있었고 10년을 살다가 죽었다.
또 배의 반절이 끊어지는 듯 아프고 십여 일간 귀밑머리와 눈썹이 빠진 자가 있었다. 화타는 “지라가 반이 썩었으니 배를 도려내야 낫는다”고 하였다. 그가 약을 먹이고 눕히고 밸르 갈라 보니 정말 지라가 반절 썩어 있었다. 칼로 그것을 자르고 썩은 살점을 도려내고 상처에 약을 바르고 약을 먹이니 백일이 지나 회복되었다.
첫 번째 환자는 병이 깊어 환부를 절개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십년을 살 수 있었다. 환자가 아픔ㅇ르 참아내지 못하자 개복수술을 한 것인데, 말 그대로 십년을 살고 죽었다. 두 번째 환자는 썩은 부위를 도려내서 완치된 사례이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공적인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마취 이외에도 지혈과 소독 등이 필요했고, 정교한 수술도구도 필요했ㅇ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타의 수술에는 단검 이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또 화타의 수술은 『황제내경』의 액체병리설과 달리 고체병리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화타가 중국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초래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화타가 중국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일 것이라고 추정을 제기해왔다. 화타라는 이름 역시 ‘후아다(의술의 왕)’라는 페르시아어에 기원한다고 말해진다. 마비산 역시 인도산 대마로 여겨지기도 한다.
화타의 외과술은 기존 전통과는 너무 다른 예외적인 것이어서 중국적 전통에서 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화타가 한방 방사의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점도 분명하다. 당시는 방사의학의 주술과 신비주의가 여전히 신망을 받고 있었는데, 화타 역시 예언과 망진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염독의 엄흔이 몇 사람과 함께 화타를 보러 때마침 왔다.
화타가 흔에게 물었다. “당신은 몸 속이 좋은가, 그렇지 못한가”
흔이 답했다. “다른 때와 같습니다.”
화타가 말하기를 “당신에게 급한 병이 있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난다. 술을 많이 먹지 말라”고 했다.
자리가 끝나서 돌아갔다. 몇 리를 갔을 때 흔이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차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부축해서 다시 태워서 돌아왔는데 한밤 중에 죽었다.
광릉 태수 진등이 갑자기 병이 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붉어졌으며 먹지를 못하였다. 화타가 맥을 짚어 보고 말하기를 “태수의 위 속에 벌레가 있고, 안으로 종기가 나려고 합니다. 누린내 나는 벌레들이 한 짓입니다”라고 하고 바로 탕 두 되를 지어 두 번 먹게 했다. 조금 뒤에 세 되 정도의 벌레를 토해 냈다. 머리가 붉었으며 꿈틀거리는 것이 반쪽은 산 물고기 회와 같았다. 아픈 것이 바로 나았다. 화타는 “이 병은 삼 년 뒤에 반드시 재발합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등이 그 때에 이르러 병이 재발했다. 때마침 화타가 없어서 마침내 죽었다.
첫째 사례는 망진으로 자각 없는 병을 맞춘 것이고, 둘째 사례는 맥진으로 위 속의 벌레를 알아내고 삼년 뒤 재발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예언, 예후는 편력의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방사의학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후한서』「방술전」에는 화타 이외의 16명으 방사들을 싣고 있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방사와 결혼시킬 정도로 방사를 존중했지만, 조조는 결코 방사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조조는 두풍(頭風)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어 치료가 필요했는데, 화타는 고향에 가고 싶어 부인의 병을 핑계로 물러가 버렸다. 이에 화가 난 조조는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천대하며 죽여버렸다. 화타 이후로 중국에서 화타의 외과술을 계승한 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림5 의방유취(1445) 권2, 오장문 오장육부도 중 심장도
이 밖에 한대 이후 위진시기에 걸쳐 도교사상과 신성사상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도교경전인 『도장(道藏)』에는 몇 폭의 장부도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도장』에 수록된 그림들은 도교의 존사사상(尊思思想)의 영향을 받았는데, 존사사상은 체내의 장기들을 신(神)에 비유하고, 그 신의 이미지를 명상하여 불로장생에 이르려는 수련법이었다. 『도장』의 그림들은 각 장부의 신과 동물을 그린 것으로 일반적인 장부도와는 차이가 크다. 이들 그림은 조선시대 세종대의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1445)와 같은 계통으로 보인다.
3. 송명이학적 신체관
송대 이후 중국인의 해부 인식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황제내경』이래로 실제 해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류의 신체관과 해부 인식은 신체를 자연과 소통 가능한 존재로 보는 것이었다. 몸 전체가 우주에 열려있는 구조였으며, 기의 흐름을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송대 이후로는 도교적 양생론과 신선사상적인 신체관에서 벗어나 실체적인 장부도의 전통을 시작하였다. 실제 해부는 형벌적 의미로 시행된 사체 해부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장부 중심의 해부 지식은 일무나마 계승되기 시작하였다. 송대에서 명대에 이르는 500여년 동안 중국인의 해부 인식은 오장육부의 장기 중심에서 두부와 장기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송명이학적 해부 인식으로 발전하였다.
10세기 전반 당말 오대(五代) 연진인(燕眞人, 호는 烟蘿子)의 「연라도(烟蘿圖)」가 현재까지 알려진 장부도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도교적인 색채가 강한 해부도였다. 11-12세기에는 두기(杜杞)와 오간(吳簡) 등이 서주(徐州)지방의 산적 두목인 구희범(歐希范)의 사체를 해부한 「구희범오장도(歐希范五臟圖)」(1045)와 이이행(李夷行)이 주편(主編)하고 양개(楊介)가 교정한 도적들의 장부도인 「존진환중도(存眞環中圖)」또는 「존진도(存眞圖)」(1102-1106)라 불리는 장부도가 있다. 「존진환중도」역시 「연라도」에 기초해서 교정한 것이다.
「구희범오장도」의 원본은 현전하지 않으나, 일본의 가지와라 쇼오젠(梶原性全:1266-1337)의 『만안방(萬安方)』(1331)과 청대 작자미상의 『순경고혈편(循經考穴編)』등에 실려있다. 『만안방』은 중의서적을 200여종을 인용하고 있는데, 대부분 현전하지 않는 것이어서 의학사적 가치가 높다. 「구희범오장도」는 목구멍이 3개로 이루어져 있고, 간장과 비장의 위치가 바뀌어 그려졌다는 특징이 있다. 「존진환중도」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만안방』에 실려 있는 「오장육부형정면도(五臟六腑形正面圖)는 목구멍이 3개이고, 간장과 비장의 위치는 올바로 되어 있다. 반면 『만안방』에 실려 있는 「오장육부형전향도(五臟六腑形前向圖)」와 「오장육부형배향도(五臟六腑形背向圖)」의 목구멍은 2개이고, 간장과 비장의 위치는 바뀌어 있다. 이로보아 『만안방』의 「오장육부형도」는 「구희범오장도」와 「존진환중도」를 모두 수렴하려고 한 것으로 판단된다.
「존진환중도」에 대해서는 송대 조희변(趙希弁)의 『독서후지(讀書後志)』에 실려 있는데, 「존진환중도」가 「구희범오장도」에 비해 섬세할 뿐만 아니라 오류도 많이 수정하였다고 한다. 원본은 현전하지 않으나, 「존진환중도」는 후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이천(李梴)의 『의학입문(醫學入門)』(1575)이 대표적인데, 이후 『만병회춘(萬病回春)』(1587)의 「측신인도(側身人圖)」, 『만수단서(萬壽丹書)』(1630)의 「장부도」등이 출현하였는데, 모두 「존환진중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밖에 원대 손환(孫渙)의 『현문맥결내조도(玄門脈訣內照圖)』, 『침구취영(鍼灸聚英)』(1529), 『유경도익(類經圖翼)』(1624), 『의종필독(醫宗必讀)』(1637) 등에 장부도가 실려 있다.
사체해부를 둘러싼 이와 같은 기록들은 주로 역적이나 도적 등에 한정되어 사실상 해부 자체가 의학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행해졌다기보다는 여전히 그 자체로서 형벌적 의미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사체해부가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인들이 실제해부를 통해서 초보적이나마 해부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명대에 들어오면 송금원 시기의 이학이론이 종합•절충되고 계통적으로 완비된다. 명대 의학자들은 송원명 이학(理學)의 태극(太極), 기화(氣化), 체용(體用), 선천후천(先天後天) 등의 개념을 신체와 약리(藥理)를 설명하는 중요 요소로 흡수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명문학설(命門學說), 기화론(氣化論), 체용론(體用論), 선천후천이론(先天後天理論) 등이다.
『의학입문』의 장부도가 이전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척추와 연결된 두부(뇌)를 모두 갖추었다는 점, 둘째, 횡경막을 중심으로 상하로 장부를 위치시킨 점, 셋째, 오장 중 심(心)을 위주로 하여 다른 네 개의 장기가 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넷째, 장부도가 측신도로서 상반신의 체표를 온전히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바탕으로 단중, 단전까지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명대 이전의 장부도가 단순히 장기 위주로 묘사한 것과 비교할 때 커다란 변화였다. 이것은 인체에 대한 천인상응적•기화론적 사유가 구체화된 것으로 신체를 기가 끊임없이 흐르는 우주적 공간으로 인식한 결과였다. 더불어 오장이 심을 중심으로 계(系)로 연결된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었는데, 이는 당시 흥성했던 양명학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질병은 이러한 체내외간•체내적 조화와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치병은 무너진 균형관계를 되찾는 것으로 가능했다. 이후 해부 지식은 19세기 왕청임(王淸任: 1768-1831)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기록이나 발전이 없었다.
중국의학의 해부 지식은 동아시아 각국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일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의서는 『의심방(醫心方)』인데, 수당의 불교의학과 음양오행사상이 종합되어 있다. 『의심방』은 뼈와 척추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만, 근육 및 관절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내장은 오장육부(五臟六腑)로 설명되는데, 오장(간,심장,비,폐,신)은 음이고, 육부(위,대장,소장,담,방광,삼초)는 양이며, 오장은 오행(화금수목토)에 대응된다. 즉 음양오행을 통해 오장육부가 설명되는데, 질병은 외부의 사시오행(四時五行)의 기운이 오장육부에 유행하거나 내부에서 신(神)을 상하게 하여 병이 생긴다고 보았다.
가지와라 쇼오젠(梶原性全:1265-1337)의 『만안방(万安方)』(1315)에 실려 있는 「오장육부형」오장도는 「구희범오장도」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야마와키 도요(山脅東洋: 1705-1762)가 『장지(臟志)』라는 해부서를 출간하기까지 음양오행적 관점에서 해부도를 파악하려고 했다. 『장지』는 실제해부에 기초하여 기존 해부인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동의보감』의「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가 대표적이다. 「신형장부도」는 명대 『의학입문』의 「장부도」와 『만병회춘』의 「측신인도」등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과 비교해 볼때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는 도교적 색채가 강하고, 이전에 비해 훨씬 간결해졌다. 특히 『동의보감』은 해부도를 전면부에 배치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신형장부도」에는 오장(간,심장,비,폐,신)과 육부(위,소장,대장,담,방광)가 있다. 육부 중 삼초(삼초)는 특정 부위가 아니므로 모습은 없고 기를 보존하는 작용만 있다. 곡도(곡도)와 수도(수도)는 각각 대변과 소변이 통하는 길이다. 척추는 맨 아래로부터 미려관(尾閭關), 녹로관(轆轤關), 옥침관(玉枕關)으로 구성되는데, 기를 수련할 때 정기가 오르내리는 길이다. 머리에는 9개의 궁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니환궁(泥丸宮)이다. 이환궁은 뇌를 가리키는데, 정신의 근본인 원신(元神)이 기거하는 곳이며, 하늘의 신과 교통하는 곳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곳이다.
즉 서양의 해부도가 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면, 동아시아의 해부도는 오히려 간결하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서양의 해부학이 인체의 구조를 밝히는데 집중했던 반면, 동아시아의 해부학은 기의 흐름이나 장기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한국, 일본 등의 해부도는 정면도보다는 측면도가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각 장기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오장육부의 생리기능과 눈으로 직접 보이지 않는 정기신의 운행을 설명하는데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Ⅳ. 맺음말
동아시아의 해부는 보통『황제내경•영추』에서 언급하고 있는 해부를 연원으로 한다. 『황제내경』에 따르면, 신체에 대한 직접 해부가 하나의 사건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잡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아시아인들의 전통적인 해부인식이나 신체관은 인간과 동물이 기형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신화세계에서 기원하고 있다. 신화세계에서 인간신체는 자연과의 합일 혹은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서 변형이 가능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를 위해서 기의 단련과 단약이 필요해진다. 신화시대에 질병이란 바로 신체와 자연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주술이나 영약은 신화시애에 사용된 전형적인 소통의 도구이자 방법이었다.
새로운 신체인식과 질병인식은 전국시대 방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방사들은 신선술을 고취하면서 무의들의 신비적인 치료법을 거부하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을 중시하였다. 방사들은 신체가 변형가능하다는 무의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판단하였다. 질병의 원인도 외부적인 요인을 중시하는 귀신소행설에서 벗어나 자연계와 신체내부의 관계로 설명하려는 육기치병설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외부의 사기가 체내에 침입하여 질병이 발생한다는 사고방식은 보편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기원전후 200년간에 걸쳐 완성된 『황제내경』은 음양의 조화가 깨진 상태를 질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하였다. 『황제내경』은 질병의 외인론과 내인론을 몯 말하였는데, 질병의 극복이란 음양의 조화를 유지하고 회복하는데 있었다. 『황제내경』이 직접적으로 내장과 경맥의 크기와 성질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실제 해부에 기초하여 해부를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황제내경』은 다양한 학파들의 목소리를 종합한 책이라 실제해부와 계량해부학을 중시하는 학파의 논의가 포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사회에서 사람해부는 법률로서 금지하고 있고, 형벌의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실제해부가 보편적으로 시행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삼국시대에 화타라는 걸출한 외과의사가 배출되었지만, 화타의 의학은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다. 위진시대에는 도교와 신선사상이 크게 유행하면서 신화시대 이래로의 자연과 소통하는 변형가능한 신체관이 더욱 유행하였다.
10세기 전반 당말 오대의 「연라도」는 현재까지 알려진 장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11세기 「구희범오장도」는 형벌로써 행해진 해부였으나 사람해부도는 여러 가지 형태로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오장육부 중심의 장부도는 해부를 통한 기초적인 지식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고대 사회에서 해부인식의 새로운 전환은 송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오장육부 중심의 장부도가 등장하면서 실체적인 해부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었다. 이른바 송명이학적 신체관이 완성되고, 명대에 의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지자, 살아있는 온전한 모습으 장부도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인체에 대한 천인상응적•기화론적 사유가 구체화된 것으로 신체를 기가 끊임없이 흐르는 우주적 공간으로 인식한 결과였다. 명문에서 뇌수에 이르는 기의 흐름이나 오장육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각각의 장기에 대한 세밀한 묘사보다는 머리에서 몸통까지 측면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명대 이후 적지 않은 장부도들이 측면도로 존재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중국 고대인의 신체관은 청말 왕청임의 『의림개착』과 홉슨의 『전체신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사람을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전체론적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자연의 질서와 우주의 원리를 구현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 고대인의 해부 인식 역시 단선론적이며 정체된 것으로만 설명할 수 없고, 다양한 학파의 경쟁 과정과 실체적인 해부 지식과 유교 이론의 축적 속에서 내재적인 발전을 지속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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