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의 일식(日蝕)을 살펴보면 오랜 세월 여러 나라와 문명에서 태양은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일식 현상을 굉장히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있었지요. 많은 문화권에서 일식은 어떤 검은 존재가 태양을 물어뜯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신화에서 뜯어먹는다는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시간의 종말과 연관되는 부정적인 상징의 전형이었지요.
동양에서는 일식을 ‘용이 태양을 삼키려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앞에서 부여곤지의 죽음 직전에 나온 검은 용 운운하는 대목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요. 여하튼 그 때문에 일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서 용을 쫓기 위한 구식례란 의식을 치렀고, 일식이 끝난 후에는 태양을 지켜냈다는 의미에서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여하튼 구식례의 사례를 살펴보지요.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친림(親臨)하여 구식례(救食禮)를 행하고, 복원(復圓)이 된 뒤에 비로소 내전(內殿)으로 돌아갔다.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정축 1번째 기사」 |
① 고구려의 동중정(動中靜)
동중정이란 정중동과는 반대로 움직임 중의 고요함입니다. 움직이지만 조용함이 있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지요. 거란 문제에 있어서 고구려는 분명히 움직였습니다. 그렇지만 북조의 북위, 남조의 유씨 송나라와 남제 그리고 백제에 대해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요. 이렇게 되면 동중정이라 할 만합니다.
남조의 문제도 문제지만 고구려는 북방 유목 종족인 지두우나 거란 문제도 나름 중차대한 문제였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거란의 추장과 수령을 막하불이라 일컫는다(契丹酋帥曰莫賀弗)。『수서』에서 말한다(《隋書》曰):거란이 고막해와 더불어 모두 동호 종족인데(契丹與庫莫奚皆東胡種),모용씨에게 격파를 당하여(為慕容氏所破),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竄於松漠之間)。이때 (거란이) 고(구)려에게 침략을 당하여(是時為高麗所侵),(거란이 북)위에 들어와서 붙기를 구하였다(求內附于魏)。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35(卷一百三十五) 「남북조 제기1 고제 건원 원년(서기 479년)」 주석 |
고구려가 남조, 거란, 북위 등의 문제에 집중했기 때문에 백제의 내전은 비교적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백제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요. 더구나 남조는 서기 479년에 왕조 교체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예의주시해야 할 상황이었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묘(辛卯)일(20일)에,(유씨) 송(宋)나라의 순제가 조서를 내려서 (실권자인) 제(왕 소도성)에게 (임금의) 자리를 선양한다 하였다(順帝下詔禪位于齊)。(중략) (송 순)제가 눈물을 흘리고 손가락을 털면서 말하였다(帝泣而彈指曰):“바라건대 뒤에 태어날 몸은 세세토록 다시는 천왕(天王)의 집안에 태어나지 말지어다(願後身世世勿復生天王家)!”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35(卷一百三十五) 「남북조 제기1 고제 건원 원년(서기 479년)」 |
② 삼근왕, 끝내 서거하다
삼근왕이 중국 남조의 상황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알았다면 삼근왕 입장에서는 이런 송 순제의 상황은 남의 일이 아니었겠지요. 관련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미(己未)일(18일)에,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여음왕(송 순제)의 집 문 앞을 지나가자 위사들이 두려워하였다。어떤 난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달려 들어와서(여음)왕을 죽이고는 병이 들었다고 보고하였는데 황상(소도성)은 죄를 주지 않고 그에게 상을 주었다。신유(辛酉)일(20일)에,송의 종실인 음안공 (유)섭 등을 죽였는데 어린아이, 어른을 가리지 않고 다 죽였다(無少長皆死)。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35(卷一百三十五) 「남북조 제기1 고제 건원 원년(서기 479년)」 |
제후왕인 여음왕으로 강등당한 송 순제는 서기 479년 5월 18일에 살해당합니다. 불과 6개월 뒤인 서기 479년 11월에는 백제에서 역시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지요. 이때 송 순제의 나이 불과 13세였습니다. 만으로는 12세도 못 채운 애처로운 죽음이었지요. 이런 상황은 백제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단지 누가 실행하느냐의 차이 정도였지요.
문주왕과 삼근왕에 이르는 백제 웅진 시대 초기까지 백제는 한성시대의 정치적 상황이 비교적 유지된 듯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진씨와 해씨가 서로 번갈아가며 정권을 차지하는 그런 방식이었다는 말이지요. 물론 조금씩의 변화도 감지되기는 합니다. 가령 해구가 은솔 연신 같은 인물과 함께한 것으로 보아 연씨의 전체 혹은 일부의 세력이 해씨에 가담한 행위 등이지요.
반면 나중에 백제 대성 8족이라 불리는 8개 귀족 가문들 중 나머지는 해씨의 대항 세력인 진씨에게 일단 붙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형식적이나마 그 구심점으로 삼근왕이 있었지요. 이렇게 나름대로 왕권을 쌓아나가는 것으로 보였던 삼근왕이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합니다. 이제 막 성년이 된 15세의 나이로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겨울 11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백제 본기 제4 삼근왕(三斤王) 3년(서기 479년) 11월」 |
삼근왕은 이제 고작 15세였습니다. 질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굉장히 낮다는 말이지요. 더구나 해씨 세력도 타도된 이 마당에 해씨가 해꼬지를 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낮습니다. 삼근왕은 재위 3년 차인 서기 479년 봄과 여름에 심한 가뭄을 겪고 11월에 갑작스럽게 승하하는 바람에 별다른 업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요.
이러한 사태는 정황상 해씨 세력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움켜쥔 진씨 세력의 정변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삼근왕의 뒤를 이은 동성왕이 유년의 나이었다고 하니 진씨 세력이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보이던 삼근왕 대신 자신들이 주무르기 쉬운 어린 왕족인 동성왕을 왕위에 앉혔다고 보이고요.
다음번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