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 불교철학08 대승기신론
견성콘서트 3부 - 견성, 그 이후의 길 : 대승기신론 강의(01: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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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홍익학당과 이제 홍익선원 대표를 맡고 있는 윤홍식입니다. 오늘 내용은요, 대승기신론을 제가 주제로 말씀을 드릴 텐데요. 저는 요즘 이제 불교 분들이 금강경이라든가 이렇게 어떤 선종 간화선이라든가 화두선 하는 분들이 이제 권하는 그런 불경만을 너무 보시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대승기신론 같은 경우는 교종의 경전이라고 해서 좀 홀대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꼭 보셔야 할 경전은요, 대승기신론입니다. 금강경도 아니구요. 금강경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금강경이 제시해주는 방법, 단계, 반야심경이 제시해 주는 단계, 이런 단계들을 더 넘어서서 큰 그림을 얘기하는 게 대승기신론이고요. 금강경보다 더 중시하는 육조단경이 있죠. 지금 간화선 하는 분들이 제일 중시하는 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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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제가 신심명도 강의했었습니다만 신심명, 육조단경 이런 내용들이요 철저히 대승기신론에 근거한 겁니다. 대승기신론을 모르고 그것만 보니까요 그 책들이 자꾸 오해받는 겁니다. 제대로 안 읽혀요. 대승기신론에서 파생된 그 경전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심결만 해도요 보조 스님이 대승기신론을 요약한 거예요. 대승기신론의 개론서가 수심결입니다. 왜냐? 보시면 알아요. 대승기신론 보시면요 다 들어있어요. 선사들이 쓰는 방법론까지 거기 다 들어있습니다. 무념(無念)이라는 거, 6조 혜능이요 육조단경에서 “우리는 무념이 최고 경지다. 생각 없는 고 자리가 최고 경지다” 하는데 대승기신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말 자체가요. “무념을 잡으면 우린 곧장 부처로 향하게 된다”는 이 말이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말이에요. 어떻게 무념할 건지도 정말 소개가 잘 돼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이게 엄청난 보물인데 잘 안 읽히는 경전이고요 또 어려워요, 경전이. 그래서 원효, 우리가 대승기신론 하면 생각하시는 게 원효스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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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라든가 우리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래서 그걸 아무튼 정독을 한번 해 보실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시간에는요 아주 그 핵심만 좀 뽑아 가지고 했는데도 양이 많습니다. 그래서 근데 지금 낯선 단어들이 자꾸 나오고 엄청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제가 최대한 인제 쉽게 풀어드릴 거고요. 먼저 이제 이 대승기신론을 이해하시려면 체험이 있어야겠죠. 제가 항상 말씀드립니다마는 지혜는요 부처님이 결국 얻어야 한다 하는 게 지혜고요 지혜를 실천하는 게 자비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가 양 날개라고 하면 이거 지혜와 자비의 양 날개를요 닦아가는 게 수행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뭐죠, 아주 공부에 입지를 해서요 뜻을 세워서 불지까지 간다 했을 때요 이거밖에 없습니다. 지혜와 자비를요 계속 키워가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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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걸 알고요 부처님이 하는 걸 할 수 있으면 그걸 남한테 베풀 수 있으면요 부처님이죠. 예, 그래서 이 지혜와 자비를 닦아가는 건데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행이 필요합니다. 이 자비, 이 자비도 하나의 행위고요 지혜에 대한 행위고, 이 자비를 하려면요 제가 선행들을 선행을 선을 할 수 있어야 되고요. 이 선행에서 또 뭐냐면 수행이 바탕이 돼야 됩니다. 그래야 자비도 가능하고요. 여기서 이 지혜라는 것도 살아 숨 쉬는 지혜가 되는 거죠.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제가 지혜를 말씀드리겠지만, 그럼 여기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하셔야 될 게 있어요. 이 자비라든가 선행 이런 수행을요 지금 바로 하셔야 돼요. 안 그러면 이게 이해가 안 됩니다. 다른 얘기예요.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할 거냐 그러면 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이면 충분합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해서요. 육바라밀이에요. 육바라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①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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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테 베풀어라. ②지계, 계율을 지켜라. ③인욕, 부당한 성내지 마라. ④정진, 게으르지 마라. ⑤선정, 늘 마음을 명상 상태, 고요한 명상 상태를 유지하라. ⑥지혜, 그 상태에서 우주의 늘 실상을 꿰뚫어보고 있어라. 이 6개 다 들어있지요. 지혜도 있고요. 보시나 이런 건 자비고요. 지계 이런 건 선행이지요. 이걸 닦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렇게 일단 큰 그림을 그려놓고요. 그럼 우리가 명상도 이 안에 들어있죠. 선정. 선정을 하시면서 이걸 이해하셔야 이해가 되겠죠. 그래서 제가 가장 쉬운 선정법으로 말씀드리는 게요 지금 제가 또 한 번, 항상 강조를 하지만 오늘 또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하는 거 이제 잘 아시죠. 이게 익숙하신 분들은 익숙하실 텐데 또 처음 하신 분들도 계시니까. 선정은요 우리 제가 요 그림 하나 그려놓을게요. 요 그림을 이해하시면서 한번 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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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아를 에고라고 하면요 우리의 보다 큰 자아를 참나라고 할 수 있겠죠. 에고가 이게 더럽다는 게 아니라 에고가 참나에 비하면요 에고는요 시공의 세계에 작용을 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좀 색을 칠해 봤습니다. 참나는요 시공이 없어요. 근데 이 참나의 특징은 뭐냐? 에고는요 오욕칠정을 다 느낍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요. 시비와 어떤 희노애락에서 늘. 예 움직이는 자아라면 이 참나는요 이건 티벳 고승들이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텅 빈 각성. 우리나라 선사들이 얘기하죠. 공적영지. 예, 예 공적(空寂) 텅 비어있는, 각성, 신령한 앎. 우리나라 선사들이 얘기하는 거나 지금 티벳 불교가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티벳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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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포체들이나 이런 달라이 라마 같은 고승들만 못할 게 없어요, 우리나라 스님들이요. 내 안에서요 텅 비었다는 얘기는요 잡념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잡념은 없는데 각성은 있다. 죽은 물건은 아니라는 겁니다. 살아있어야 돼요. 의식이 살아있는데, 의식에 초점은 있는데 잡념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우리 참나입니다. 에고는 안 그렇겠죠. 에고는요 둘 중에 하나예요. 텅 빔이 없이 시끄럽던가 각성이 없이 잠을 잘 때는요 시끄럽지 않으면 자고 있어요. 요게 우리 에고입니다. 잠을 자든가 시끄럽든가 예요. 그렇죠. 그런데 텅 비어 있으면서 고요히 정신은 살아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요 우리가 삼매에 들었을 때예요. 일상에서 겪으시는 일들입니다. 잠과 이런 시끄러운 생각 사이에 계실 때가 한 번씩 있으시죠? 신바람 날 때요. 뭔가 삼매에 들어다는 건요 우리말로 하면 신바람 날 때입니다. 독서삼매, 책을 보다 삼매에 들 때는요 나와 책만 있고요 정신이 살아있고, 이때 특징은요 어느 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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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저 참나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래요. 멋진 예술작품이라든가 자연환경을 봤을 때 그때 저런 마음에, 음악이나 이런 걸 들었을 때 저 마음 상태에 도달합니다. 텅 빈 각성이 전면에 나오게 돼요. 그러면요 특징이요 에고가 말을 잃습니다. 에고가 말을 잃어야, 에고가요 시끄럽게 궁시렁대고 시끄럽게 시비를 따지고 있으면 고요한 마음이 들어가지를 못하겠죠. 그래서 시끄러운 에고가 잡아야, 에고를 잡아야 참나가 나오고 참나가 나오면 에고는 조용해집니다. 요게 같이 일어나요. 그래서 우리가 멋진 예술을 봤다든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할 땐 저게 일어난 이유가 에고가 이견이 없거든요. 그쵸.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 할 때는요 불만이 없기 때문에 안에서 밝은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에고가 입을 다물게 하는 게요 모든 선문답의 핵심입니다. 부처는 뭐, 부처가 뭡니까? 생각해보세요. 저 에고가 와서 얘기하는 거죠. 에고로. 부처가 뭡니까? 왜 나는 공부가 안 될까요? 왜? “부처가, 나는 부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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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이 내 안에 없는 것 같아요.” 막 얘기하는 사람한테 여러분은 뭐라고 해야 될까요? 텅 빈 각성을 알아차리게 하려면요. 그러니까 등짝을 치는 스님도 계시고. 짝(손뼉)! 방금 에고가 좀 조용했죠. 짝! 존재는 하는데 아무 생각이 없는 요 상태, 잠깐씩 체험하게 시키려고요. 여기를 치기도 하고 여길 치기도 하고 이이는 사(2x2=4).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합니다. 그럼 멈춰요, 에고. 이이는 사. 할 말 없으시죠. 어려운 화두라고 아는 것들이 대개 이런 겁니다. 이런 화두도 있어요. 조주 스님한테요 조주 스님 스승이 남전 스님인데, 남전 스님이 유명하거든요. 그러니까 조주 스님한테 어떤 제자가 찾아가서 “스님 남전 스님한테 배웠다면서요. 남전 스님을 만났다면서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냐면요 “여기 진주는 큰 무가 나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럼 요걸요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분들이 이걸 풀 길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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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요걸 풀었다고 하면 잘못됩니다. 오히려 진주에 큰 무가 난다는 사실이요 중국에서는 너무나 지당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 화두가 먹히는 겁니다. 우리말로 바꿔줘야 돼요. 우리나라 같으면요 “경허 스님 뵀다면서요?” 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경허 스님이 뭐가 중요하냐는 거예요.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참나를 모르죠. 너 안에 있는 참나를 바로 봐라라고 얘기해 주기 위해서 뭐라고 하냐면요 진주에 큰 무가 난다지는요 우리말로 하면 “제주에 귤 난다지.” 그러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예. 할 말이 없죠. 할 말 없는 상태로 몰고 가기 위해서 쓰는 겁니다. 삼이 서 근. 삼베 서 근이다. 그렇죠. 이런 화두도 있어요. 부처가 뭡니까? 삼이 서 근이다. 옛날 승복이 삼베로 만드는데요. 세 근으로 만들어요. 요게 상식인 데서 통하는 화두입니다. “부처가 뭡니까?” “요거 세 근이지?” “예.” “안 재 봐도 세 근이지?” “예.” 그래 보냈어요. 그럼 이 제자가 잘 이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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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 거예요. 다른 스님을 찾아갔어요. “내가 스님한테 물었더니 이런 말을 해줍디다. 뭔 뜻인가요?” 그러니까 스님이 그랬어요. “남방엔 대나무 북방엔 나무” 그랬어요. 우리말로 제가 바꿔드릴게요. “제주엔 귤 대구엔 사과.” 이랬어요. 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들을수록 이해가 안 되죠, 이 제자는. 같은 얘기가 계속 일어난다는 거 아시겠죠. 에고를 멈추게 하려고 하는 겁니다. 에고만 작용을 멈추면요 우리 안에 있는 본래 텅 빈 각성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제가 그걸 아주 쉽게 유도해 드리려고요. 여러 선문답의 내용을 종합해서 가장 쉬운 법문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게 성함 잊어버리시라는 겁니다. 성함만 잠시 잊어버리시면요 저 에고에 해당되는 건 조용해집니다. 이해되세요. 텅 빈 각성만 존재하실 겁니다. 한 번 느껴보세요. 자 성함 모르시는 겁니다. 여기 어딘지도 모르고요. 제가 누군지도 몰라요. 성함만 잊어버리시면 이게 자연히 일어납니다. 제가 질문드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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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한테 한다고 생각하시고요. 실감나게 내려놓으세요. 성함 어떻게 되십니까? 모르시죠. 성함 어떻게 되십니까? 자 이때 나의 존재는 있죠. 에고가 조용해졌으니까 더 잘 느껴지겠죠, 나의 존재가. 존재 느껴보세요. 성함 어떻게 되십니까? 제 얘기 다 듣고 있지만 느껴지시죠, 그 자리. 텅 비어 있죠. 각성, 알아차리고 있죠. 이게 어려운 문자 쓰면 공적영지(空寂靈知)입니다. 공적한데 신령하게 뭔가 알고 있어요. 신령하게 뭐 귀한 걸 아는 게 아니고 그냥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신령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잠을 자면 죽어버리잖아요. 잠을 자면 그거 알아차리는 놈도 잊어버리는데 지금 알아차린 자리 있잖아요. 그러니까 잠을 자면 공적하기만 하지 영지는 안 되죠. 깨어서 잠을 자야 돼요.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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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서 자는 겁니다. 정신 다 살려놓고 주무시는 거예요. 그럼 내 안에 있는 텅 빈 각성이 느껴지실 거예요.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이름은 어떻게 되나? 모른다고 하세요. 그리고 그 텅 빈 각성의 느낌을 느껴보세요. 제 얘기 들으면서도 하실 수 있죠? 일상에서도 하실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생각 감정 오감이랑은요 다른 차원의 존재예요. 보세요. 이 에고는요 에고는, 에고는 생각을 일으키고 감정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오감을 작용을 합니다. 요거(에고)랑 상관없이 요거(참나)는요 같이 존재해요. 이게(생각/감정/오감) 나타나면 이게(참나)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내가 명상할 때는 참나가 있었는데 명상에서 나왔더니 참나가 안 느껴진다. 요건 그래도 말이 돼요. 참나가 없어졌다. 말이 안 되죠. 지금 그 말 어디서 하고 있는데요? 자 재밌는 게요 질적으로 바뀌는 연금술,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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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금술인데요, 우리가 생각 감정 오감만 갖고 있을 때는 내 마음이 되게 조잡하고 잡스럽습니다. 뭐 내 거 같지 않은데요. 그리고요. 오감의 대상인 이 세계도요 나랑 전혀 관계없는 것 같아요. 저랑 여러분 지금 관계없죠, 전혀. 에고의 세계에서는요. 왜냐? 에고의 세계는 이 몸뚱이까지만 나라고 여겨요 그런데 보십시오. 에고에서 초점을 참나로 이동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한번 보세요. 자 성함 모릅니다. 제가 여러분하고 지금 둘인가요? 그 상태에서 보시면. 생각 내려놓으시고 한번 보세요. 느껴보세요. 생각 감정 오감도 그렇게 잡스러운 게 아니죠. 내 내면이 텅 비면요 요놈들도요 질적으로 변합니다. 이게 영적인 연금술이에요. 요거 하나를 썼더니, 요 잡철들이 다 순금으로 변해요. 요 3개도요 잡스럽나요? 나라는 이름을 잊고 보시면요 이 3개 그 자체가 내 마음에 나타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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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 선명한 그림일 뿐이지 그게 잡스럽다는 느낌이 안 드실 겁니다. 나랑 둘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을 거예요. 제 얘기 듣고 있는 그것도 오감이죠. 고게 잡스러운가요? 고요하지 않으십니까? 여기까지 가면 좀 상급(上級)입니다. 여기까지 느끼셔야 돼요. 이해되십니까? 생각 감정 오감이 나랑 별개로 있는 것들 같은데, 그게 깨어서 보면요 에고에서 볼 때는 이게 다 별개입니다. 그런데 참나에서 보면요 다 그냥 한 덩어리예요. 우리가 꿈속에서요 꿈속에서 내 몸이 있고 세계가 있고 막 시끄럽죠. 그런데 깨고 나서 보면 어떻게 기억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다 한 덩어리죠. 꿈속에서 몸이나 꿈속의 세계나 다 한 세트예요. 분리가 안 돼요. 꿈속에서의 생각들 나와서 보면은 그런 생각을 안 하죠. 고게 다 한 세트로 존재했다는 거를 밖에서 보면 보이는데 안에서는 안 보여요. 꿈 안에 여러분이 들어가시면요 몸 따로 있고 세계 따로 있고 나 따로 있고 내 감정 생각 복잡합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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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계요 초월한 시각에서 보면요 전체가 한 덩어리로 돌아가는 인과법 연기법으로 하나로 돌아가고 있는 그냥 한 덩어리의 세계라는 걸 알 겁니다. 이렇게 초연한 자세를 자꾸 가지셔야 돼요. 에고는 그냥 난데요. 참나는 우주적인 나입니다. 우주적인 나로 존재하세요. 방법 쉽습니다. 이름만 내려놓으시면 돼요. 이름을 제가 갖고 있으면요 저는 작은 나인데요. 제 이름을 잠시 내려놓으면요 큰 나로 초점이 이동합니다. 잘 되세요? 성함만 잊어버리시면 됩니다. 성함 모르시죠. 존재하시죠. 고 느낌을 그 느낌에 그 느낌에 안착하시려고 하세요. 그 느낌을 안 잊어보려고 하세요. 이것만 챙기시면 돼요. 이게 제가 임의로 막 가르쳐 드리는 게 아니에요. 다 있는 겁니다. 선문답은 다 이 법을 쓴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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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을 대승기신론은요, 대승기신론은 요 법을 갖다가 체계적으로 설명한 거예요. 원리부터요. 왜 이렇게 해야 되는지? 자 그러면 이걸 알고 나면요. 자 만약에요. 내가 에고를 초월해서 늘 참나에 머물 수 있으면 대단하겠죠. 그런데요 참나는요 그 오매일여(寤寐一如)란 말이 나오는 게요 참나는요 원래 잠을 안 자요. 잠은 누가 자나요? 에고가 잡니다. 잠자는 것도 에고고요 깨는 것도 에고예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건 에고의 놀음이에요. 이거는 의식 무의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초의식이라고 불러요. 잠을 자도 안 자고요. 잠을 자도 안 잔다는 게 누가 여러분 부르면 일어나시잖아요. 잠을 자도 안 자고 있어요. 깨워도요 이렇게 시끄러워서 참나 없는 거 같죠. 있어요. 우리가 거기 이 자리를 주목만 할 수 있으면요 잠을 자면서도 느낄 수 있어요. 잠을 자도 내가 있구나. 내가 자는 거예요. 깨어서 시끄러워도 내가 시끄러운 거예요. 나를 늘 볼 수 있으면요 참나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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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오매일여입니다. 자 이 오매일여를 여러분 이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매일여를 이뤘어요. 이제 에고가 내가 아니란 걸 확실히 알고 참나에 확실히 안착을 했어요. 요게 지금 요즘 간화선하시는 분들이 말하는 그 궁극의 경지라고 하는 겁니다. 근데 지금 대승불교에서 보면 이게 궁극의 경지가 아니죠. 왜냐? 에고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이 안 됐거든요. 근데 왜 그렇게 간화선 하시는 분들이 에고의 문제를 얘기를 안 하냐? 얘기를 안 해요. 에고의 세계는요 윤회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나는 윤회하지 않는 세계랑 하나가 됐다. 윤회하지 않는 세계에 나는 뿌리를 내렸고 나는 이제 이 세계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게 초기 불교에서 열반이에요. 이 참나라는 건 열반의 자리이기 때문에 아라한이라는 게요 지금 이 정도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에 대해서 글로 읽으니까요 엄청 판타지를 갖고 계시는데요. 아라한은요, 이 에고는요 에고의 생각 감정 오감 다해서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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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하고요 고통스럽고요 여기엔 나라는 게 없습니다. 늘 변화할 뿐이거든요. 여기는요 초기 불교에서 열반이라 그래요. 참나라고 안 부르니까 열반이라고 하고 참나라고 하니까는 또 헷갈리세요. 또 다른 자리인가 보다. 똑같아요. 텅 빈 각성을요 참나라고도 부르고 나의 뿌리니까 참나라고 부르고요 번뇌가 없는 자리니까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열반은 번뇌가 없다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자 그러면 늘 열반에 안주하게 됐다. 안착하게 됐다. 이제 무상 고 무아의 세계를 갖다가 다 내려놓고 참나에 머물게 됐다. 니르바나에 머물게 됐다. 이게 아라한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대승불교로 1지가 안 돼요, 아라한이. 엄밀히 말하면. 1지로 안 쳐줘요. 왜냐? 대승불교에서 1지는요 생각 감정 오감을 육바라밀로 단련해서 지혜와 자비로 쓸 수 있다는 게 그게 검은 띠 실력은 됐다가 1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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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9단이랑 똑같습니다. 생각하시면 돼요. 태권도 9단이요. 1단을 검은 띠로 안 줘요. 왜냐하면, 검은 띠는요 9단이 하는 거를요 기본적으로는 다 할 수 있어야 돼요. 9단만큼 잘하질 못해서 그렇지 기술은 다 알아야 돼요. 그런데 지금 이 참나를 밤낮으로 오매일여로 깨울 수 있다는 거에서는요 육바라밀에 대한 어떠한 그게 없어요. 육바라밀의 잠재성만 있지 육바라밀 실제 잘한다라는 증거가 지금 하나도 입증이 안 된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이분이 만약에 전생에 육바라밀을 엄청 닦았어요. 어려서부터 이미 육바라밀을 해요. 그분이 만약에 참나를 닦으면 그대로 이 양반은 1단을 바로 인정받을 수도 있어요. 오매일여와 동시에 1단은 인정받을 수도 있겠죠. 요거를 이게 작은 의미의 돈오돈수예요. 돈오했더니, 어! 내가 인격이 나오더라, 육바라밀이. 특이한 경우고요. 대다수는 돈오한 뒤에 육바라밀을 인격 훈련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요 두 개가 합쳐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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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지혜와 자비를 쌍으로 닦는다가 나와요.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요 이것만 이해하시면요 지금 불교계가 어디서 지금 뭔가 문제가 생겼는지가 다 나옵니다. 육바라밀을, 육바라밀 제가 접어두고요. 요거를 지금 티벳 불교 가면 이거 잘 얘기합니다. 티벳 불교는 이걸 잘 알아요. 대승을 오래 한 나라기 때문에 지혜를 반야라고 하고요. 자비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반야와 방편을 이걸 쌍으로 쓰잖아요. 이게 쌍운(雙運), 쌍으로 운행한다. 그럽니다. 반야방편쌍운(般若方便雙運)이라 그래요. 반야는요, 여기 지혜는요 아주 초월적인 지혜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 참나를, 참나의 세계가 지혜에 가깝고요. 지혜와 자비로 나누자면 이 에고의 세계에서 인격을 만들어내는 게. 인격은요, 에고한테 있는 겁니다. 참나는 인격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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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을 초월한 존재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요 성스럽네 인격이 아주 지혜롭네 자비롭네 하는 건 다 에고한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에고라는 조건을 빼버리고 얘기하면요 그 이제 수행의 온 그림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소승불교의 특징은 그리고 지금 이 선불교도요 소승적으로 쓰게 되면 이런 모습을 갖게 돼요. 보십시오. 이 참나를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에고에서 참나를. 참나는 텅 비어 있죠. 텅 비었다는 것은 육바라밀 중에 선정입니다. 각성이 있다는 건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죽은 물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래서 이거를 지(止) 관(觀) 볼 관(觀)자입니다. 쌍운(雙運) 그럽니다. 자 지관쌍운(止觀雙運)이라는 수행의 단계가 있고요. 제가 수심결에도 계속 나오는 게 이겁니다. 제가 번역한 수심결에서. 지관쌍운을 하면 계제가 얼마일까요? 이것만 구별하시면 됩니다. 반야방편쌍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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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분의 계제는 어떻게 될까요? 이쪽(반야방편쌍운)이 더 대단하겠죠. 왜냐? 여기는요 지관을 쌍으로 닦으면 반야가 닦여요. 근데 방편은 지금 방편, 인격적인 부분이 설명이 안 돼 있습니다. 요 방편까지 같이 닦아야 여기서부터 1지를 칩니다. 반야방편을 쌍운할 수 있다는 실력이 1지인 증거입니다. 그러면요 지관쌍운을 할 수 있다면요? 지관쌍운 한다는 건요 이겁니다. 성함 모르시죠. 깨어 계시죠. 그런데 나는 있죠. 정혜가 지금 쌍으로 닦이는 겁니다. 같이 있죠. 선정과 지혜가 같이 있죠. 무념이라는 것은 불가에서 요즘 무념(無念) 강조하지만 무념이 지관쌍운이에요. 무념은 에고를 내려놓은 겁니다. 념(念)은 에고의 세계거든요. 에고만 내려놓으면요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정혜를 쌍으로 닦는 겁니다. 나는 선정부터 닦으려고. 난 지혜를 닦으려고. 요러는 건 방편이고요. 실제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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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편 그걸 닦아 들어가다 보면, 보십시오, 나는 선정이네 지혜네 이거는요 에고의 세계예요. 난 선정만 닦을래. 난 지혜 먼저 닦을래. 요건 에고에서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참나는요 무조건 쌍운이에요. 참나의 본질이 텅 빈 각성인데요. 선정과 지혜가 원래 충만한 자리가 참나이기 때문에 따로 닦는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지금 제 얘기 들리시죠. 에고 내려놓으셔도 제 얘기 들리시죠. 고요하시죠. 선정과 지혜가 같이 있습니다. 요거 알면요 요거 알면 견성은 맞아요. 그렇죠. 성(性)을 봤잖아요. 견성(見性)입니다. 무념을 알면 된다. 지관쌍운(止觀雙運)만 알면 된다. 이 지관을요 지(止)를 정(定)이고 관(觀)을 지혜 혜(慧)자를 써서 같은 거거든요. 지혜고요. 지가 정이기 때문에 정혜쌍수라 그래요. 보조 스님의 정혜쌍수는 여기서 나온 겁니다. 정혜쌍수를 하시면요 정 따로 닦고 혜 따로 닦으면 이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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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래고요. 정혜가 같이 돌아가는 거라는 걸 아신다는 건요 깨어 계신다는 거예요. 견성하신 거예요. 그런데 1지는 안 주겠다는 겁니다. 대승불교 입장은. 소승에서는 1지가 견도위(見道位)예요. 견성하신 거예요. 왜냐? 무상 고 무아의 에고를 넘어선 참나의 세계에 안착을 했기 때문에 견성을 한 건데, 견성했다는 걸 대승기신론에서는요 인정은 하는데 성(性)을 다 보지 못했다라고 그래요. 왜? 성의 한 부분은요 인격적인 거거든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가요 인간이 만든 거면 이건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참나가 원래 이걸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중시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참나 보십시오. 지금 고요하시죠. 생각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요 나와 남을 둘로 보나요? 근데 왜 나와서는 보시를 안 하시죠. 그 자리에서는 어떠한 오염도 없는데 왜 나오면 파계를 하죠. 그 자리에서는요 조금도 화를 안 내는데 왜 나오면 화를 내죠. 다 에고가 하는, 참나 뜻대로 에고가 안 하는 걸요 바로 잡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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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일 뿐이에요. 이게 참나에서 위배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정진은요? 참나 자리는 원래 게으르지 않아요. 그런데 왜 게으름을 부리죠. 참나는 원래 고요한데 왜 마음이 시끄럽죠? 우리 에고는. 참나는 지혜로운데 왜 우리는 뭘 딱 접하면 모르겠다가 나오죠. 이해되십니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는요 참나의 작용입니다. 이거를 분명히 하셔야 돼요. 이거는 참나, 본성, 성의 작용일 뿐이에요. 하나도 밖에서 보탠 게 있다면요 그건 가짜입니다. 참나가 지지해주지 않는 선행은요 가짜예요. 그거는 위선이고요. 거짓선입니다. 이 성경 아시죠. 예수님 그 십계명 지키라고 했는데 십계명만 지키면 천국 간다. 열심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한테 예수님이 와서 이 독사의 족속들아 합니다. 왜냐? 이것을요 보시하면 유리하다니까 하고 있어요. 참나에서 나와서 하는 게 아니라 그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작용이에요. 이게 에고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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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나를 기독교에서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에서 나와서 하는 일이 아니면 다 가짜라는 겁니다. 왜냐? 에고로 하는 일은요 나한테 유리하니까 해요. 에고는 절대 유리하니까 합니다. 성령은요? 그게 선이라서 하고요. 에고는요? 유리해서 해요. 에고는 여기까지만 나오거든요. 참나는요 우주가 나기 때문에 우주한테 유리하다는 거 둘 다 유리한 것만 하는 건 똑같은데요. 우주한테 유리하다는 건 우리가 봤을 때 선이거든요. 이해되시죠. 성령으로, 나한테 에고한테 유리해서 하면요 가짜라는 겁니다. 성령에서 나와서 해야 안에서 그냥 성령이 원래 이걸 좋아하니까 하는 겁니다. 좀 이따 제가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원리를. 대략만 말씀드린 겁니다. 이해되시죠. 여기까지 안 어려우시죠. 그러면 참나 찾은 게 엄청 중요하지만 왜 이거를 1지를 안 주느냐? 선정과 지혜만 지금 체크됐다는 거예요. 나머지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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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 체크가 안 됐잖아요. 그것까지 해야 반야방편쌍운이 되죠. 이런 사람들한테만 대승은 1지를 주겠다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자 제가 지금 만약 방금 권해드린 방법으로요 지금도 깨어 계시나요? 제 얘기 들으시면서. 이게 24시간 끊어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요 에고는 자고 깨고 하지만 참나는 자고 깨고가 없어요. 오매일여를 그냥 하셔야 돼요. 당연히. 요놈이 잠을 안 자요. 그 선문답에서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디뎌라”는 거는요 아니면요 “은산철벽을 뚫어라”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그게 뭔 얘기를 하냐면요? 너무 자세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에고가, 이 에고는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죠. 의식과 무의식으로 있다고 치면요 의식일 때는요 깨어있을 때는 수행하기가 쉽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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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일 땐 제가 붙잡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은산철벽이라는 말을 안 써요 백척간두란 말을 안 써요 백척간두란 말 안 써요. 백척간두에 서 있다는 건요 한 걸음도 디딜 데가 없다는 얘기고요. 은산철벽은요 은으로 된 산을 철로 된 벽을 어떻게 기어 올라갑니까? 손잡을 데가 없는데 그 벽을 넘어가야 돼요. 어떻게 할 거냐? 이게 퀴즈입니다. 의식일 때가 아니고요 은산철벽이나 백척간두는요, 무의식일 때를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잠에 들어갔을 때도 깨어있으실 수 있느냐 예요. 깊은 잠을 자서 의식의 초점을 잃어버렸는데도 그러면 손잡을 데가 하나도 없죠. 백척간두예요. 움직일 수가 없는데 그때 정신을 딱 차릴 수 있으면요 그 신비한 얘기죠. 깊은 잠을 자고 있다가 정신을 딱 깨어나서 참나를 인지할 수 있느냐 예요. 이게 있으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고 그래요. 이걸 할 수 있으면. 죽음이랑 똑같죠. 무의식은 죽음이에요. 깨어있을 땐 잘 되는데 잠들었을 때, 죽음이랑 똑같이 무의식이 들어갔을 때 깨어서 나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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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느냐? 이 얘기는 잠잘 때 깨어있을 수 있느냐 예요. 요걸 다 할 수 있으면요, 근데 이건 에고 놀음입니다. 잠을 자고 깨건 에고에만 있지 참나에는 없어요. 그래서 이런 오매일여가 가능한 거고, 은산철벽을 뚫고 들어가 나올 도리가 있는 겁니다. 왜냐? 우리가 깊은 무의식이 있더라도 나는 있거든요. 누가 부르면 일어나요. 누가 부르면 일어나는 그 정신은 있기 때문에 은산철벽을 통과할 원리가 있는 겁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원리가 있어요. 이해되시죠. 자 이걸 이제 다 지워볼게요. 잠깐인데도 어지러우시죠. 두 가지, 자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지관쌍운과 방편반야쌍운. 덕까지 챙기느냐? 참나만 잡느냐? 참나만 잡을 수 있으면요 좀 더 아래, 이게 바둑으로 치면 한 1급이라고 보시면 돼요. 1급. 요거는요? 1단. 요거 완전 잘하면, 요걸 퍼펙트하게 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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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뭐 명인의 경지죠. 명인이 부처님이에요. 바둑으로 치면 입신(入神)의 경지. 넘어간 거죠. 이해되십니까? 이게 지금 선명하게 이해가 안 돼 있기 때문에요 대승기신론이 이해가 안 돼 있기 때문에 내가 견성했을 때 어느 경지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요걸 선명히 해 놓고 예전에 했단 말이죠. 원효 스님이 이걸 주를 냈잖아요. 대승기신론소를 낼 때 요 내용들을요 친절하게 설명해 놨어요. 대승기신론에 다 있습니다. 제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에요. 티벳불교 가면요 이게 기본으로, 달라이 라마가 항상 강연하는 수습차제연구라는 게 있어요. 수습차제라는 게 수행의 체계입니다. 거기 가면요 이게 소상히 나와요. 요 1지에서요 12지까지 2지에는 뭐가 되고 3지에는 뭐가 되고 다 얘기할 수 있어요. 왜냐? 경에 다 있거든요. 제가 지어내는 게 아니라.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갖다 강연하려고 지금 항상 벼르던 건데 대승기신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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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소개해 드리는 거고요. 제가 대승기신론을 오늘 동영상으로라도 최소한 원래는 책을 낼 계획인데 반드시 찍어서 좀 알려야 된다 하는 고 좀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게 이 부분 때문에 그래요. 제가 꼭 이 불교나 이런 공부하시는 분들한테 이 얘기를 해드리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이걸 모르고 접근하면, 이게 유교에도 있고 도교에도 있고 다 있어요. 이런 수행의 단계가요 이 단계를 모르고 한다는 건요 바둑을 두는데 내가 몇 급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거랑 똑같습니다. 그럼 한참 하다가 보면요 “나 정도면 명인인가?” 이런 생각하실 수 있겠죠. 단계를 모르면요 아니면요 잘하는데도 “나는 단도 안 되지?” 자기 혼자 산에서 만약에 하는 거랑 똑같습니다. 그런 얘기들 있잖아요. 산에서 한 10년 해갖고 나왔더니 단도 안 되더라. 산에 있을 때는 내가 명인인 줄 알았는데 나와서 직접 현장 가서 해봤더니 몇 급밖에 안 되더라. 이런 일이 가능해집니다. 지금 정신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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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아요. 혼자 할 때는요 내가 한 명인이 되는 것 같아요. 그쵸. 근데 당장 세상에 나와 부딪히면 충돌이 나고, 예. 지혜와 자비가 원만하게. 방편이 원만하다는 얘기는요 이겁니다. 지혜가 원만하다는 얘기는 사물을 다 꿰뚫어 본다는 얘기고요 방편이 원만하다는 얘기는 누구를 만나든, 방편이라는 건요 방편(方便)은 처방입니다. 편할 편(便)자고요. 형편입니다. 형편에 따라 처방하는 거예요. 술을 좋아한다. 술로 꼬셔요, 도를. 고기를 좋아한다. 고기로 꼬셔요. 여자를 좋아한다. 여자로 꼬실 수도 있습니다. 섣부르게 쓸 방법은 아니죠. 그러니까 방편을 잘 쓴다는 건요 정말 도인이어야 돼요. 섣부르게 저걸 썼다간요 자기도 파계가 되고 같이 당합니다. 술꾼 구제하겠다고 술집 갔다가 자기가 술꾼 되고 끝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가 웬만해선 못 해요. 저 방편을 잘 쓸려면요 불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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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뭐라고 돼 있냐면 7지보살 이상이 돼야 됩니다. 7지보살이면요 원효 스님이 불가에서 8지보살 7지보살 소리 듣습니다. 대충 경지 아시겠죠. 진묵스님이나 원효스님이 그래도 유일하게 7지 8지 그 정도 그 소리 들으세요, 절에서. 내려오는 말이에요, 절에서. 원효 스님 8지 보살쯤 된다. 진묵스님 한 8지 된다. 그 말 내려오는 분이 우리나라에 두 분 있어요, 고승 중에. 그럼 아까 제가 꼭 간화선 깨치면 어느 자리일까요? 1지가 안 됩니다, 실제로. 이걸 얘기한 게 보조 스님이 얘기를 하셨어요. 보조 스님의 글에 보면 이게 밝혀져 있어요. 지금 선하는데 그게 1지가 아니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1급 정도 자리라는 얘기를 해요. 이것 때문에 보조 스님이 지금 조계종에서 명판 내려지신 겁니다. 조계종의 아버지였는데 지금 이름 내려왔습니다. 화두선 하는 분들 건드리는 말을 너무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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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고. 이게 대승기신론 가지고 한 건데요. 그분 임의로 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보세요. 대승기신론 한번 같이 보면서 이제 얘기하죠. 요것만 제가 체크해 둘게요. 요걸 계속 유념해서 보세요. 여러 가지 계제를 나누는 방법이 있겠지만, 지금 불가에서 1주라 그래요. 머무를 주(住)자입니다. 머무름. 그 전의 경지가요 대승기신론을 보면 신(信)의 경지예요. 처음에는. 보세요. 남의 말이거든요. 부처가 있다고 해도요 지금 별말 들어도 남의 말이에요. 내 얘기가 아닙니다. 믿음의 경지예요. 믿음은요 무지, 제가 항상 이게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무지에 기반한 겁니다. 모른다는 소리예요. 아는 거에 대해서 믿음이란 말을 아예 안 써요, 우리는. 제가 남자라는 거 믿고 있나요? 지금 아니죠. 내일 태양이 뜬다는 걸 제가 믿고 있나요? 안 믿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확신하고 있는 거랑 믿음이랑 달라요. 외계인 믿으십니까? 여긴 믿음의 영역이에요.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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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해서 얘기할 수가 없거든요. 고런 건 믿어요. 그런데 만약에요. “저는 기독교를 믿어요. 예수님을 믿어요”라는 말을요 죽을 때까지 믿는다라고만 간다면 그 신앙은요 성숙되지 못한 신앙이에요. 왜냐? 여전히 우리가 에고는요 에고는 믿는다고 할 때는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전제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다만 나는 믿는 걸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는 수행이 안 돼요. 참나를 눈앞에 항상 봐야 되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죠, 이미. 그래서 화엄경 이게 화엄경에 나옵니다. 화엄경에서요 이 열 가지 믿음이라는 게 나와요. 10신 해서 믿음의 도리가 먼저 나오고요. 믿음 다음에 오는 단계가요 이 믿음이 단순히 믿고만 있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엄청난 수행을 해요. 이 10신에서 하는 수행이 아까 그 육바라밀인데 여기선 육바라밀이라고 안 해요. 요것도 아주 지금 그 불교하시는 분도 잘 이해 못 하시는 건데요. 여기선 여섯 가지 수행을 합니다. 여섯 가지 수행은 뭘까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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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지혜입니다. 바라밀이란 말 안 써요. 바라밀은요 엄청난 얘기예요. 그래서 “육바라밀은 하근기나 닦는 거다.” 이런 말을 하시는 선사 분은요 심각하게 착각하고 계신 겁니다. 바라밀이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고 계신 거예요. 바라밀은 함부로 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밀은요 참나의 작용일 때만 바라밀이라고 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바리새파가 열심히 십계명을 지키는 건 바라밀이 아니에요. 그냥 보시를, 보시하라니까 보시하고. 계율 지키라니까 억지로 지키고. 인욕, 화는 여기까지 지금 유혹이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화내면 내가 또 아닌 것 같으니까 안 하고. 이렇게 지금 살아요. 이것만 해도 엄청난 겁니다. 그래서 10신, 여전히 믿고 있는 단계라는 겁니다. 참나 아직 못 봤어요. 1주가 되면요 이게 견성입니다. 자 이런 수행체계는요 그 대승불교의 일반적 수행체계랑도 달라요. 이거는 화엄경을 기반한 우리나라 대승기신론의 입장입니다. 요건 다른 식의 수행체계랑은 별도로 이해하세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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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대학 때 이제 강의를 듣고 놀란 게 탄허스님이 항상 강조하시는 게 “1주가 견성이다.” 근데 보통 우리가 1주를 견성으로 안 보거든요. 1지가 견성이지. 이게 제가 그때 잘 몰랐던 거죠. 그래서 왜 그러지? 하고 대승기신론이나 화엄경을 다 읽어봤더니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거를요 6조 혜능이라든가 6조의 제자인 승찬 그 재전제자(再傳弟子)죠. 고런 분들도 똑같이 얘기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제가 증거를 보여드릴게요. 이게 아주 충격적입니다. 이 사상체계에 근거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1주가 견성이고요. 그럼 1지는요? 자 여기도 견성이죠. 자 여기(1주)는 뭐냐? 견성은 견성인데 대승기신론에 이렇게 나옵니다. 소분(少分). 적을 소(少)자 분량 분(分)자 작은 분량만 봤다. 아직 다 못봤다. 참나를 분명히 봤다. 자 여기 이해되시죠. 이거(1주)는요? 지관쌍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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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쌍수요. 여기(1지)는요? 반야, 지혜와, 지관으로 이루어진 이 반야와 플러스 방편, 나머지 보시 지계 인욕 같은 실천적인 인격적인 바라밀들. 바라밀이요 1지에 오면 당연히 일어나는데 1주는 그럼 바라밀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1주는 견성을 했다면요? 바라밀을 합니다. 1주는 이상이 돼야, 즉 참나를 찾아야만 여러분은 바라밀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바라밀은요 하근기가 하는 게 아니고요. 견성을 한 뒤에 할 수 있는 게 바라밀이란 겁니다. 여기까지 다 얘기를 하고 할까요? 그러니까 아까 방금 제가 말씀드렸듯이 바라밀이라는 건요 인도말로 우리 바라밀을 도피안(到彼岸)이라고 그러거든요. 우리 한문으로 번역할 때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 반야바라밀 하면요 피안이라는 건요 깨달음의 세계예요. 궁극의 세계예요. 저승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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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하는데요. 이를 도(到)자죠. 이를 도자. 저 피(彼)자 예 언덕 안(岸)자. 저쪽 언덕으로 건너갔다는 건요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그 얘기는요? 보시바라밀은 뭘까요? 보시바라밀은요 보시가요 궁극의 보시라는 겁니다. 아까 말한 수행해서 하는 보시는요 궁극의 수행 보시가 아니에요. 그냥 남 주는 거예요. 남 주기 연습하기고요. 이거는요 어떤 경지가 궁극의 바라밀이냐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왼손이 하는 걸 오른손이 모를 정도가 궁극의 보시입니다. 내가 줘놓고도 줬다는 생각을 안 해요. 이해되십니까. 이게 궁극의 보시에요. 노자는 이걸 유위(有爲) 그러죠. 이걸 유위. 에고가 하고 있어요. 에고가 하면 유위예요. 이거는요? 참나가 하면 무위(無爲)예요. 없을 무(無)자 할 위(爲)자. 무위로 하는 것만이 궁극의 바라밀에요. 그런데 무위를 하려면요 참나를 모르면 못해요. 왜냐? 참나가 원래 보시를 좋아해서 보시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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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 돼야 돼요. 제가 기독교적으로 설명 드릴게요. 기독교가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바리새파들은요 천국 가고 싶어서 보시를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 제자라면 어떻게 할까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보시를 했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요 내가 보시를 해 놓고 뭐라고 하냐면요 “하느님이 하신 거다”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걸 절대 갖지 않는 거예요. 했다는 것도 내가 안 갖는 거예요. 내 안에 성령님이 했지. 불교로 치면 참나가 한 거예요. 에고는 거들었을 뿐 에고가 한 게 아니에요. 참나가 한 거예요. 이래야 바라밀이에요. 그러니까 지계바라밀은요 계율을 지켜놓고도 지켰다는 생각이 없어야 돼요. “나는 참나만 따랐을 뿐이다”라는 입장이어야 돼요. “하느님 말씀대로 난 했을 뿐이다. 참나의 뜻대로 했을 뿐 내가 한 거 없다.” 요게 불교 용어로 회향이라고 하는 겁니다. 회향(廻向). 요즘 오늘 제가 불교를 너무 총정리 하는데. 회향. 돌려버려야 돼요. 내가 해놓고 돌려버려요. 참나의 공으로 돌려버려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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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바라밀 할 수 있을까요? 성령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걸 할 수 있을까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을 깨닫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바라밀을 못 해요. 에고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요 절대 바라밀을 못하게 돼 있어요. 바라밀 할 수 있다는 건요 최소한 지관쌍수, 정혜쌍수는 한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그래야 보십시오. 남 주기 싫어요, 에고는. 거지를 만났어요. 남 주기 싫어요. 그런데 또 안 주자니 옆의 사람이 볼 때 저를 좀 쪼잔하게 볼 것 같아요. 줬어요. 보시죠. 보시는 한 거지만 바라밀 한 건 아니에요. 바라밀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주기 싫어요. 에고는 주기 싫을 겁니다. 주기 싫은데 여기서 에고를 내려놓고 모른다 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모른다 해버리면 뭔가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겠죠. 참나 상태가 됐어요. 어떻게 나올까요? 불쌍한 사람 봤을 때. 참나는 네 거 내 걸 안 가리는 자리니까 주라고 할 거예요. 저 사람 필요한 것 같애. 줬어요. 지나갔어요. 요게 바라밀이에요. 그런데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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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자마자 에고가 다시 살아나서 “내가 기특하지.” 이렇게 가면요 또 다시 바라밀을 깎아먹는 겁니다. 요게 늘 일어나야 바라밀이에요. 그러니까 12지까지라는 엄청난 계제를 통해 닦는 거예요. 에고가 이런 소리 안 나올 때까지. 에고가 육바라밀을 완벽하게 하면서 아무 말을 궁시렁대지 않으면요 12지입니다. 그때 부처님 자리예요. 그러니까 오매일여 했다고 부처됐다는 것랑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이 얘기랑. 이 얘기는 이건 일상에서 끝없이 점검을 해야 돼요. 내 에고가 정화된 만큼 나와요. 참나는, 이 참나가요 광명한 등불이라고 해도 그걸 검은 막으로 씌워 놓으면요 빛이 새어져 나오지 않겠죠. 근데 오매일여 한다는 건요 그러건 저러건 내 안에는 광명한 등불이 있다는 거 아는 자리입니다. 정혜쌍수는요. 그다음에 방편반야쌍운은요 그 막을 벗겨내는 작업입니다. 이제부터 공부 시작이에요. 견성하시면 오히려 공부 시작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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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리에서. 견성 안 하면요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육바라밀을 닦을 수가 없어요. 자 이 입장을 보고 들어가시겠습니다. 보세요.
[3가지발심: ①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②해행발심解行發心 ③증발심證發心]
세 가지 발심이 있는데요. 벌써 50분 했나요? 쉬고 할까요? 그냥 할까요? 그냥 좀. 예. 그 좀 더. 제가 준비한 자료의 내용을 지금 대충 했어요. 읽으면서요 바로 또 확인해 보겠습니다. 자 보십시오. 세 가지 발심이 어느 경지인지 한번 보십시오.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은요 믿음이 성취됐대요. 믿음이 성취됐답니다. 어떤 경지일까요? 이거 아주 낯선 단어인데요. 지금 이걸 이해하시면 지금 대단하신 겁니다. 대승기신론의 어떤 흐름을 이해하시는 거예요. 신성취발심은요 믿음이 성취됐다는 발심이에요. 그 경지가요 믿음이 성취됐다는 경지라는 거예요. 1주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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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시겠습니까? 신성취발심은요 믿음이 성취됐다. 즉 내 밖에 뭔가 그런 게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불성을 직접 봤다는 겁니다. 거기에 믿음이 성취됐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해행발심(解行發心)은요? 그 해행발심 넘어서서 증발심(證發心)은요? 증을 한 건 증득했다거든요. 참나를 완전히 내가 증득했다. 어느 경지일까요? 본성을 완전히 봤다는 겁니다. 완전히 구현했다는 게 아니고요. 증득했다는 건 본성을 남김없이 봤다. 1지입니다. 1지가 증발심이에요. 이해되십니까? 1주가 신성취발심이고요. 그러면 중간에 이게 비죠. 해행발심. 이해하고 실천하는 발심은 그럼 어느 단계일까요? 1주와 1지 사이겠죠. 요 사이에 해야 될 공부가 이겁니다. 해(解) 이해하고요 행(行), 이해하고 실행하는 수행이 필요해요. 뭘요? 육바라밀을요 해행이라는 게 결국은 육바라밀을 닦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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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피안이라고 하는 바라밀을 닦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보세요. 1주는요 참나는 봤어요. 1지는요 참나가요 육바라밀을 해요. 그럼 이 중간에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육바라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행이 필요해요. 요 부분이 빠졌기 때문에 1주에서 멈춰버리면요? 참나는 이제 밤낮으로 참나를 봐요. 그런데요 밤낮으로 참나를 보는데 육바라밀 안 하면 어떤 경지에 빠지냐면요 “황홀하고 행복하다”예요. 이 세상에 나는 이제 우주가 무너져도 나는 괜찮다는 확신이 와요. 그렇겠죠. 이 에고를 초월한 참나에 늘 안착을 했기 때문에 겁나는 게 하나도 없어집니다. 여기서 멈추면요, 여기서 멈춘 수행자가 지금 전 세계에 많습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보시면 수행자들이 다 보여요. 그분이 육바라밀까지 하는지 아니면요 나는 지금 우주에서 초연해 있다는 자세를 취하는지 보시면 그 경지가 나옵니다. 인도의 어떤 성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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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주 자리를 확실하게 안착, 이게 머무를 주(住)잖아요. 믿음은 머무르질 못해요. 믿다가 머무르는 단계까지 왔다는 건 참나를 봤기 때문에 머물러요. 그런데 완전히 닦아서 어떤 지반, 땅을, 굳건한 땅을 못 만들었다는 건요 덕이 없다는 겁니다. 육바라밀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되게 짧아요. 본성이요. 보십시오. 본성은 텅 빈 각성, 황홀한 자리이면서 동시에 본성은 육바라밀을 하는 자리인데 텅 빈다는 것만 안 거예요. 본성은 텅 비어 있다. 단 육바라밀은 안 나와요. 그분하고 대화하면요 뭔가 육바라밀에 어긋나는 얘기를 하고 어긋난 행동을 해요. 근데 자기는 나는 에고가 없대요. 이것도 가능합니다, 이런 경지가. 그래서 인도의 어떤 성자 분한테 “전 세계가 지금 고통과 전쟁과 기아로 힘든데 이 편안한, 당신은 편안한 자리에 계시는데 뭔가 도와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까 그분이 뭐라고 했냐면 유명한 성자입니다. “네가 사는 세계에는 기아와 고통 그런 게 있겠지만, 내가 사는 세계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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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에 머물러 버리고 끝난 거예요, 이분은. 육바라밀이 안 나와요. 이런 경우에 그래서 대승불교와 소승이라고 공격을 한 겁니다. 그런 수행은 소승입니다. 참나를 못 깨쳤다도 아니고 공부가 아주 엉터리라는 건 아닌데 중간에 지금 멈췄다는 겁니다, 어느 선에서. 예, 그래서 이 대승기신론의 수행체계는요 먼저 믿음을 성취한 다음에 바로 육바라밀 실천하고 그러고 나서 진정한 참나가, 참나가 완벽한 건 아닌데, 이 완벽하다는 건요 참나를 완벽히 이해했다는 겁니다. 그게 1단이에요. 완벽히 표현했다는 건 아닙니다. 표현까지 하면요 부처님. 이해되십니까? 요 계제를 가지고 이해하시면 돼요. 그래서 보십시오. 신성취발심, 1주의 돈오인데요. 제가 써놨죠.
[1. 신성취발심(1주住의 돈오)
그런데 ‘믿음을 성취한 발심’(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떤 마음을 발한다는 것인가? 대략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3가지는 어떤 것을 말하는 가? ① 첫째는 ‘직심直心’(곧은 마음)이니 ‘진여법’을 바르게 알아차리기 때문이며(자리이타自利利他의 근본), ② ‘심심深心’(깊은 마음)이니 모든 ‘선한 행위’를 쌓아가기를 즐기기 때문이며(자리自利), ③ 셋째는 ‘대비심
大悲心’(큰 자비의 마음)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려 하기 때문이다(이타利他). 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說有三種 云何爲三 一者直心 正念眞如法故二者深心 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1주의 돈오에는요 대략 세 가지를 발심하게 되는데 뭐 어려운 내용들 아니구요. 보십시오. 1주가요 자 지금 이제 이해하시죠. 자 저기 1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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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상에서는요 보십시오. 성(性)은 봤는데 소분(少分) 작은 분량, 적을 소(少)자 분량 분(分)자. 작은 분량을 봤다. 즉 이제 어디까지 봤느냐? 세 가지를 봤다. 직심(直心), 참마음 참마음이요 진여(眞如)예요. 참나를 봤어요. 지금 그래서 또 하나 이게 이때 발심을 하는데 어떤 발심을 하느냐면 참나를 봤기 때문에요 여기서 소승은요 참나 본 거에서 끝낼 겁니다. 직심만 알 텐데 대승이다 보니까 자리이타(自利利他)까지 봐요. 소승은 자리(自利)까지는 보겠죠. 보십시오. 그다음에 깊은 마음 심심(深心), 깊은 마음은요 “아! 내가 온갖 선을 다 닦아야겠다.” 자리(自利) 불교 용어로 자리, 자신을 이롭게 할 여러 선행들을 닦아야겠다는 걸 압니다. 왜냐하면요 참나는 선을 하는 자리니까요. 악을 하는 건 에고가 하는 겁니다. 참나는 선만 해요. 그다음에 심심 다음에요. 대비심(大悲心) 대자대비한 마음이요. 대비심이 나와서 이건 이타(利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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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내가 이롭게 해줘야겠다.” 자리이타의 뿌리죠. 진여를 깨치고 나니까 나를 더 선하게 만들어야겠다. 남을 더 사랑해야겠다. 도와줘야겠다. 여기까지가 벌써 발심이 일어나야 1주예요. 그러면 이 1주가요 일반 저기 수행 좀 하다가 “깨달을 게 없다.” 뭐 “참나가 우주가 나랑 둘이 아니다.” 뭐 별말 다 하는 자리가 1주보다 더 안 됩니다. 그렇죠. 1주는요 여기까지 가야 돼요. “아! 나를 더 선하게 만들어야겠다.” “남을 좀 이롭게 해줘야겠다.” 그럴려고 지금 여기가 이제 1주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거예요. 이걸 뭘로 하냐면요 육바라밀로 공부를 시작해요. 육바라밀을 닦아가는 게 해행(解行)의 경지고요. 그러다가 참나라는 게 깨어있기만 해도 육바라밀이 착 나오는 경지 정도 가야 1지보살이 됩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 뇌가요 회로가 안 깔린 건 못해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요 안 하시다가 졸지에 견성을 하셨다 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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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으로 참나는 보실 수 있어요. 그런데 안 나와요, 이게. 보시 지계가 안 나와요. 그걸 나오게 연습하는 게 해행의 경지입니다. 연습을 연습을 하다 보면 나와요. 어느 날은요 깨어있기만 해도 이제 나와요. 참나만 붙잡았는데 나와 버려요, 자동으로. 요게 1지보살이에요. 그니까 이 수행의 체계가 지금 안 나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요 중생을 구제해 줄 정도의 큰 보살들이 지금 안 나오는 건요 견성 정도 1주보살 정도에서 다 멈춰 있기 때문에. 저 1주도 저는 다, 1주 가는 것도요 하늘의 별 따기로 알고 수행을 합니다. 제가 좀 건방진 얘기 많이 합니다마는. 한번 보시죠. 자 신성취발심 이해되시죠.
[* 승찬조사 신심명信心銘
‘마음’이 ‘평등’(자타불이)에 계합하면 ‘경계’와 ‘작용’이 모두 그치게 된다.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바른 믿음’(正信)이 조화롭고 곧도다. ‘일체’에 머물지 않으면 기억할 것이 없으니, 텅 비되 밝게 스스로를 비추면 심력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생각으로 따질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가 없다. ‘진여의 법계’는 나와 남이 없으니, 그 자리와 곧장 상응하고자 한다면 오직 ‘둘이 아님’을 말할 뿐이다. (오직 모를 뿐!) 契心平等 所作俱息 狐疑淨盡 正信調直 一切不留 無可記憶 虛明自照 不勞心力 非思量處 情識難測 眞如法界 無他無自 要急相應 唯言不二.]
자 승찬 조사가요 간화선에서 아주 중시하는 바이블입니다. 그 조계종에서요 몇 개 뽑는 그 경전에 들어가는 게 신심명입니다. 그 신심명(信心銘)이라는 게요 그걸 지금 제대로 이해를 못 하세요. 신심(信心)이라는 게 이겁니다. 이 경지를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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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이라는 게요 믿음이 성취된 경지, 1주보살 경지를 얘기하는 겁니다. 이 신심명을 엄청난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승찬 조사가 신심명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 자체가 왜 깨달음의 노래라고 하지, 다른 노래 있죠. 증도가(證道歌) 도를 증득했다는 노래를 부르시지 왜 굳이 신심을 얘기했을까요? 믿는 마음에 대해서. 화엄경에 기반한 겁니다. 믿는 마음이요 참나를 봐야만 머물러요. 진짜 믿음이 변해요. 믿음에서 확신으로 변해요. 그래서 신심명이라는 건요 그냥 밖에 있다고, 참나가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았을 때 진짜 믿음이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노래한 겁니다. 이 대승기신론이나 화엄경을 이해 못 하시면요 왜 제목이 신심명인지도 이해 못 하시는 겁니다. 보세요. 신심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평등에, 참나자리입니다, 마음이 평등에 계합(契合), 딱 하나가 되면 경계와 작용, 경계는 객관 세계고요. 작용은 나의 에고의 작용이에요. 에고와 세계가 모두 사라진다. 참나를 찾으면. 여우와 같은 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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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 바른 믿음이 조화롭고 곧도다. 이해되십니까? 진짜 부처를 봤을 때 참나를 봤을 때 요 앞 방금 지금 1주자리를 신성취라고 했죠. 신성취를 다른 말로 지금 바를 정(正)자에 믿을 신(信)자라고 정신(正信)이라고 쓰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래서 정신지(正信地)라고 그래요. 대승기신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도. 신성취의 이 1주를요, 1주보살 이게 1주죠, 1주를요 대승기신론에서 정신지라고 불러요. 바르게 믿게 된 자리. 그걸 지금 신심명이 얘기하는 건요 내가 말한 신심명 다 깨치면 1주보살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요 얘기를 안 해놔서 그렇죠. 지금 이게 지금 조계종에서 아주 손꼽히는 바이블인데 지금 대승기신론과 화엄경적으로 이걸 이해를 못 하고 있으면요 계제가 안 나와요. 그럼 이 정도 하면 명인인 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1주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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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인 줄 알아요. 저거 하는 거에요 목숨을 걸고 하십니다. 우리가 목숨 걸어야 할 건 이게 아닙니다. 1지 밟아 올라가는 거죠. 부처님 향해 가는 거죠. 자 또 이런 말도 있어요. 뒤에 그거 좀 건너뛰고요.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도다.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며. 신심 얘기를 또 합니다. 이 신심, 믿는 마음은 둘이어서는 안 된다. 즉 참나가 나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믿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거는 가짜 믿음이고.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님이 진짜 믿는 마음이다. 둘이 아닌 줄, 참나랑 내가 하나인 줄 알아야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과거 현재 미래가 사라지도다. 그 경지 가면은 참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텅 빈 각성이 나타난다. 자 이게 1주보살입니다. 이해되시죠. 그게 지금 다른 말로요 1주보살을 초발심(初發心)보살이라고 그래요. 왜냐하면, 이때 진정으로 우리가 도의 발심을 합니다. 그게 신성취발심이에요. 아까 그게 제일 먼저, 제일 처음에 오는 발심이잖아요. 그래서 초발심이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초발심보살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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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2. 초발심보살(1주住 보살): 보살(초발심 보살)이 이러한 3가지 마음을 발하면, ‘법신’을 조금 볼 수 있다. 菩薩發是心故 則得少分見於法身.]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분견어법신(少分見於法身) 법신이 우리 참나죠. 참나를 조금 본다. 보긴 본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조금 본다. 자 밑에 보면요.
[* ① ‘집상응염執相應染’(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이니, 성문⋅연각 2승의 해탈과 ‘신상응지信相應地’(믿음에 상응하는 경지, 1주住 초발심의 경지)에 의지하여 멀리 벗어나게 된다. ②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끊어짐이 없이 상응하는 오염)이니, ‘신상응지’에 의지하여 방편(6바라밀)을 익혀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으며, 1지인 ‘정심지淨心地’(마음이 청정해지는 경지)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것도 대승기신론에 나온 말인데 우리가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이 있는데요. 이거는 보세요. 성문 연각 즉 아라한들입니다. 성문 연각 하면요 아라한이에요. 아라한의 해탈과 신상응지 1주보살에서 벗어난다. 뭔가 강하게 에고로 세상에 대해 집착하는 건요 1주보살이 돼야 벗어나게 된다. 그럼 두 번째요 부당상응염 그래도 여전히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오염이 있는데, 이거는 신상응지 1주보살이 방편 육바라밀을 익혀서 1지보살인 정심지 가야 벗어난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가로막는 오염들이 있는데요. 이해되십니까? 일상세계에 강하게 집착하는 건요 아라한들이나 1주보살이나 돼야 벗어나고 그래도 여전히 지금 견성을 조금밖에 못 봤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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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이 안 나오거든요. 육바라밀 닦아서 육바라밀이 나오게 됐을 때 오염이 하나 또 벗어나면서 1지보살이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재미있는 게 대승기신론이요 아라한하고 1주보살을 같이 동급 취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죠. 아라한들하고 1주보살을 같이 보는 겁니다. 그 학년이 같아요. 그러니까 소승 아라한들이요 대승학교에 입학하면요 저기 바로 이 검은 띠 학원을 못 가고요. 저기 1급 학원 가가지고 여기 1급생들이랑 같이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잘하면 1단 쳐주는 겁니다. 요 계제가 엄정합니다, 학교에.
[3. 1주住 돈오 이후 점수의 필요성: ‘진여법’의 ‘본체’와 ‘본성’은 텅 비고 청정하나, 한량이 없는 번뇌에 의해 오염되고 더렵혀져 있다. 만약 사람이 ‘진여’를 알아차리더라도, ‘방편’으로 훈습하고 닦지 않는다면 청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때가 한량이 없어 온갖 법(오온五蘊,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걸쳐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닦아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행을 닦는다면 자연히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 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眞如之法體性空淨 而有無量煩惱染垢 若人雖念眞如 不以方便種種熏修 亦無得淨 以垢無量遍一切法故 修一切善行以爲對治 若人修行一切善法 自然歸順眞如法故.]
그다음에 1주보살, 돈오 이후 점수의 필요성. 왜 그러면 보십시오. 우리랑 똑같은 질문을 해요. 대승기신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게요 후에 선(禪) 하는 사람들이 질문할 질문을 미리 합니다. “아니 진여를 봤다는데 이런 걸 왜 닦습니까?” 이 말을 또 해요. “육바라밀을 뭐 하러 합니까? 진여를 봤는데.” 거기에 대해 질문해 줍니다. 원래 여기 이 전에는 비유가 있어요. 흙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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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속에 마니주 같은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있는 거 아는 게 1주고, 돌 털어내야 그걸 보배로 쓸 거 아니냐. 이 얘기를 한 다음에 이 얘기를 합니다. 진여법도 똑같다. 즉 보세요. 본체와 본성은 원래 텅 비고 청정하지만 한량이 없는 번뇌에 의해서 그동안 엄청난 윤회를 통해서 오염돼 있다. 만약 사람이 진여를 알아차리고도 방편으로, 나오죠. 진여를 알아차리는 게 반야입니다. 하지만 방편을 닦아서 육바라밀로 자신의, 훈습 됐다는 건요 오염됐다는 겁니다, 오염된 걸 닦지 않는다면요 끝내 청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때가 어디에 꼈냐면요 우리 생각 감정 오감이요. 오온, 색수상행식에 꽉 끼어있기 때문에 내 생각 하나 일어나도요 오염이 돼 있고 감정도 오염돼 있고 오감도 오염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다 벗겨내야만 진여법으로 쓸 수가 있다. 이해되세요? 지금 여러분이 쓰시는 생각이요 보십시오, 기독교적으로 보면 지금 여러분이 하시는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랑 일치하나요? 예수님은요 일치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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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있게 얘기하셨거든요. 그건 부처님 경지예요. 지금 얘기하실 수 있나요? 예수님이 이랬어요, 제자들한테. 아버지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진여가 눈에 안 보이죠. 진여가 안 보입니다. 아버지가 안 보여요.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버럭하면서 “내가 하는 거 보면 모르냐?” 이렇게 나온 이 정도 얘기하실 수 있어야 돼요. 그게, 그게 성인(聖人)입니다. 그게 부처님이에요. “나 하는 거 보면 몰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불법승(佛法僧)에서요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법이에요. 법을요 인격적으로 표현해 주신 분이 불(佛)이에요. 그걸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승(僧)이고요. 이해되시죠. 불이 해줘야 될 역할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눈앞에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눈에 말로 해주고 보여주고 다 해주는 게 불이에요. 이거 하실 정도 돼야 불이지 “아! 나는 밤낮으로 깨어있어. 난 늘 주인공 상태야.” 이걸로는 해결이 안 돼요. 이건 뭐 어디 급한 불 못 끕니다. 중생 괴롭다고 하는데 “너나 괴롭지. 난 안 괴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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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말 이제 괜히 살심(殺心) 부르는 말 할 필요는 없죠. 이게 거기에 문제가 생겨요.
[4. 해행발심(돈오 이후의 점수, 1지地 이전) : 이 보살(해행발심解行發心)이 처음 바르게 믿은 이래로(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첫 번째 아승지겁(무수겁無數劫)에 이르러 원만해지고자 하면, ‘진여법’에 대해 깊은 이해가 현전하며, 닦는 바가 형상을 떠나 있다.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 於第一阿僧祗劫將欲滿故 於眞如法中 深解現前 所修離相.]
제가 극단적인 비유를 들었습니다마는. 그 해행발심은요 이제 1주에서 닦아가는 건데 해행발심이 정말 중요해요. 1주에서 1지로 갈려면 뭐 닦아야 되느냐가 나오는 게 해행발심이거든요. 뭐하라고 돼 있죠? 이해하고 실천하라. 육바라밀을, 자 보십시오, 여기서 육바라밀을 이해한다는 거를 잘 이해하셔야 돼요. 육바라밀이 뭔지? 우리가 밖에 있는 육바라밀 이해하면요 뭔가 신심이 아니죠, 바른 믿음이. 벌써 육바라밀이 밖에 있으니까요. 요 부분을 제가 지금 강조 드리려고 했는데. 자 보십시오. 대승기신론에서 법신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진리의 몸이라고 할 때 이거는요, 대승기신론의 의미입니다. 다른 데서 쓰는 거랑 틀려요. 진리다. 참나다. 텅 빈 각성이다. 요 정도만 얘기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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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에서 법신이라고 할 때는요 온갖 선법(善法), 만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온갖 선한 것들. 이 선한 거를요 만법이라고 해서 끝도 없이 선한 게 이 불성, 불성 안에는 들어있는데요. 온갖 선한 게, 이 중에 6개만, 제가 6개만 얘기를 하자는 겁니다. 이 6개가 우리 불성 안에 좋은 법들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법신인데요. 요 법이 하나 밖으로 탁 삐져나오면요 보시가 돼요. 요게 탁 삐져나오면 지계가 돼요.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보세요. 보십시오. 인욕이 되고요. 요게 삐져나오면 정진이 되고 요게 삐져나오면 선정이 되구요. 요게 삐져나오면 지혜가 돼요. 자 삐져나왔다는 건 뭐냐? 에고의 세계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에고의 세계에 표현될 때 보시 지계 인욕 정진으로 표현돼요. 그래서 에고가 처음에는 보시를 할려고 애를 쓰지만 궁극의 보시는요 안에서, 안에서 터져 나온 보시만이 궁극의 보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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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십니까? 그게 참나의 작용이잖아요. 자 왜 견성을 1주보살은 견성을 조금밖에 못 봤다는 거냐? 이것만 봐요. 텅 비었다는 것만 봐요. 에고랑 다른, “에고랑은 다른 텅 빈 참나가 있다. 밤낮으로 그게 있다.” 이거 알아요. 자, 여기서 이제 1지보살 가려면 참나에 대해 더 이해하고 실행하는 겁니다. 육바라밀을 이해한다는 걸 다른 말로 하면 참나의 속성들을 이해하는 거예요. 밤낮으로 깨어있다 보니까요. 자 거기 써 있죠. 5번 보세요.
[5. 6바라밀(지관쌍운止觀雙運에 안주시 1주住, 1주 이후에 ‘바라밀’): ① ‘법성法性’(진여법의 본성)은 탐욕이 없음을 몸으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단계적으로 ‘보시布施 바라밀’(단 바라밀)을 닦으며, ② ‘법성’은 오염되지 않아 5욕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이해하였기에, 단계적으로 ‘지계持戒 바라밀’(시 바라밀)을 닦으며, ③ ‘법성’에 고뇌가 없어서 성냄과
번뇌를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단계적으로 ‘인욕忍辱 바라밀’(찬제 바라밀)을 닦는다. ④ ‘법성’에 몸과 마음의 형상이 없어서 나태함을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단계적으로 ‘정진精進 바라밀’(비리야 바라밀)을 닦으며, ⑤ ‘법성’이 항상 안정되어 있어서 어지럽지 않음을 몸으로 삼음을 이해하였기에, 단계적으로 ‘선정禪定 바라밀’(선나 바라밀)을 닦으며, ⑥
‘법성’이 광명함을 몸으로 삼아 어두움을 벗어나 있음을 이해하였기에, 단계적으로 ‘반야般若 바라밀’(반야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以知法性體無慳貪故 隨順修行檀波羅蜜 以知法性無染 離五欲過故 隨順修行尸波羅蜜 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 隨順修行羼提波羅蜜 以知法性無身心相 離懈怠故 隨順修行毘黎耶波羅蜜 以知法性常定 體無亂故 隨順修行禪波羅蜜以知法性體明 離無明故 隨順修行般若波羅蜜.]
밤낮으로 깨어있다 보니까 법성은 본래 탐욕이 없다는 걸 깨달아요. 자 여기 보세요. 이겁니다. 참나는요 가만히 나라는 걸 내려놓고 참나를 느껴보면요 거기는 탐욕이 없어요. 탐욕이 없으니까 “아! 보시를 해야 되겠구나.” 이걸 이해하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근거가 참나에 있는 겁니다. 탐욕이 없다. 그러니까 단계적으로 아! 보시바라밀을 닦자. 두 번째요 아! 참나는요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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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더러운 데 가도 오염되는 법이 없어요. 오염이 되지 않더라. 그걸 이해했기 때문에 닦기를요 지계바라밀을 닦아요. 계율을 닦지만, 보십시오, 참나가 본래 오염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지계를 닦으면 여전히 수행인데 결국 그게 참나가 하는 거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본인이 인정할 때, 알고 할 때 바라밀이 되는 겁니다. 계율이요 깨끗하게 돼요. 에고가 하는 계율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 저게 계율이 맞지 않나가 아니고요 참나에서 지키는 계율이 나옵니다. 이해되십니까? 요게 바라밀입니다. 뒤에 똑같아요. 법성에는 고뇌가 없더라. 거기는 성을 안 내더라 그러니까 인욕바라밀을 하게 되고요. 참나가 거기에는 형상, 나태함이 없더라. 정진바라밀 되고요. 거기는 항상 안정돼 있더라. 선정바라밀 되고요. 거기는 광명하더라. 어둠이 무명이라는 게 없더라. 지혜바라밀이 나옵니다. 이해되십니까? 이 정도 했을 때 우리가 참나를 제대로 이해한 거죠. 그랬을 때 1지보살이 되는 겁니다. 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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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이해했다고 해서 1지보살의 다른 이름이 법신보살이에요. 그러니까 이 지(地)에 올라간 보살들은요 법신보살이라고 불러요. 참나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제대로 다 지금 표현한 건 아닙니다. 참나를 제대로 이해한, 이제 제대로 증득한 거죠. 완벽하게 에고를 정화시켰다는 건 아닙니다. 참나에 대해 정확히 이해했다는 그게 1지보살의 특징입니다. 지금 이 여기까지, 자 어떤 수행자건요 보십시오. 물어보세요. 참나가 에고랑 다르게 시공을 초월해서 텅 비고 영원히 황홀하고 충만한 자리라는 걸 아느냐? 거기까지 가면 1주보살입니다. 자, 거기서 육바라밀이 다 나오더냐? 참나가 육바라밀을 원하더냐? 여기까지 이해하시면요 1지보살이 됩니다. 이걸 실제 하실 수 있으면요. 이해되시죠. 이게 자기 계제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겁니다. 계제가 애매하지 않아요. 지금 선불교가 왜 이걸 계제를 애매하게 하냐면 이 모든 게 교종의 책에 있다는 이유로요, 책에 있다는 이유로 본인들도 결국 책으로 공부하면서 교외별전, 우리는 이 교(敎) 외에 따로 내려온 거기 때문에
01:03:00
한 큐에 12지 간다라는 자꾸 그런 생각을 하세요. 이해되십니까? 대승불교 안에 원래 이 체계가 엄정한 건데 요걸 부정하고 우리는 한 큐에 간다. 그러면 제가 장담하는데 한 큐에 가시든 뭐 하시든 좋아요. 이게 나오면 제가 인정합니다. 단박에 깨달아서 육바라밀이 다 퍼펙트하게 나오면 제가 인정합니다. 그렇죠. 그건 뭐 인정 안 할 게 없죠. 방법은 다르지만 똑같이 결과가 나오면 인정하는 거죠. 저 결과가 나오냐를 제가 묻는 거죠. 왜냐? 안 나오죠. 공부를 안 했는데요. 그래서 어떤 스님들은 그러세요. 그러니까 어떤 스님은 견성을 하셨어요. 근데 살면서 계속 그분이 닦아가는 것 같아요. 조금씩 나아져요. “어! 스님 좀 나아지시는데요. 돈오 이후에 점수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변화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시는데 뭔가 좀 이상하죠. 이걸 진지하게 얘기하세요. 난 변화하고 있을 뿐이야. 아니죠. 닦아지고 있는 거죠. 왜 그걸 인정을 안 해요? 그래서 이 바라밀은요 다른 이름으로 바라밀은 아까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거잖아요.
01:04:00
바라밀을 다른 이름으로 뭐라고 하냐면 무수지수(無修之修) 그럽니다. 우리말로 할게요. 닦음 없는 닦음이요. 이해되십니까. 에고는 열심히 닦는 것 같지만 실제로 닦는 게 없어요. 안에서 나온 거지. 내가 열심히 한 것 같지만 사실은요 나온 것뿐이에요. 원래 있는 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닦음 없는 닦음. 저게 진정한 점수(漸修)예요. 점수를 지금 잘 이해 못 하세요. “돈오(頓悟) 이후 왜 점수를 해? 왜 에고놀음, 점수는 에고놀음이야.” 에고놀음이 아니에요. 에고가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돈오가 확장되는 겁니다. 참나가요, 고요하기만 하던 참나가 여러 가지 모습을 드러내는 거예요, 현실에. 만법을 쓰는 겁니다. 그래서 참나를 제대로 쓸 수 있느냐가 지금 1주에서 1지 갈 때 점검 사황인 겁니다.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은요 참나를 엄청나게 크게 쓰는 겁니다. 같은 참나지만 누구는요 자기 한 몸을 고요하게 하는 데 쓰고요. 소승입니다. 저 육바라밀이 나오면요 지금 현실 정치 경제 못 풀 게 없습니다,
01:05:00
육바라밀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세존(世尊)이라고 불러요, 보살들도. 세존이 부처님만 아닙니다. 보살들도 세존이라고 불러요, 위대한 보살들은. 세상에서 제일 존귀한 분이라는 거예요. 실제 세주(世主)라고도 써요.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요. 경영능력이 없어요, 텅 빈 것만 아는 분들은. 이해되십니까? 진짜 보살이라면요 절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실제 세상에 나아가서 경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경영을 잘하죠. 에고를 초월해서 경영하는데요. 그게 모든 화엄경에 나온 내용이에요. 보살들이요 온 우주를 가서 경영한다는 게. 이런 적극적인 사상이 자꾸 위축되는 거는요 이 견성에 대한 정확한 입장 정리가 안 돼서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자 요 부분을요, 요 부분을 제가 보여드릴게요. 참된 바라밀 요 그림 보이시죠. 요 그림이 제가 이걸 그려놓은 겁니다. 이 그림을 제가 설명 드리면 이해가 잘 되실 거예요.
01:06:02
요 그림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요 그림이랑 똑같은 거예요. 참나 안에는요 온갖 선한 게 다 들어있는데요. 보십시오. 우리가 에고가 있다 보니까 자 무엇만 하나 볼까요? 보시바라밀을 하나 볼게요. 번호를 붙여놓은 게 인욕바라밀이죠. 우리가 흔히 못 참는 게 화죠. 분노를 못 참죠. 보십시오. 자 참나는 성을 안 내는데요. 우리 에고의 세계는, 보십시오, 여기가 참나의 영역이면요 여기는 에고의 영역이라 에고는요 버럭 화를 내버려요. 분노를 내버려요. 어떤 상황에 접해서 화낼 일이 아닌데 화를 버럭 내요. 나한테 뭔가 안 좋아졌어요. 내 욕망이 충족이 안 되니까 화를 확 냈어요. 이때 어떻게 할 거냐는 거죠. 이때 이 1주보살 아래 경지는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화를 내려놓는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겨우 진정시키겠죠. 자, 견성하신 분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정혜쌍수를 하시는 분은 화를 참을 때요 어떻게 하냐면 화가 나왔잖아요.
01:07:00
그런 분도 화나요, 똑같이. 화가 올라왔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처리 방법이 주인공한테 던져 넣어버립니다. 이게 대행 스님이 아주 멋진 말로 “주인공한테 믿고 맡겨라.”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참나 자리는 원래 화를 안 냅니다. 화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참나밖에 없어요. 이해되십니까. 에고는요 화를 진정 못 시켜요. 도둑이 도둑을 어떻게 잡습니까? 곧장 주인 불러야죠. 참나를 바로 인식하는 겁니다. 화가 났을 때요 화를 안 내려고 하면 안 돼요. 화를요, 화가 났는데 화를 안 내야지 하면요 에고를 에고로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에 선사들이 말하는 도둑 잡는데 도둑을 불러들인 격이라는 거예요. 일이 더 시끄러워져요. 도둑과 도둑이 만나서 내야 되는데 안 내야 되는데 화는 나지 최악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 화가 올라올 때요 화는 그대로 두고 우리 몸을 빼는 겁니다. 화는 그대로 두고요 참나를 인식하세요. 정혜쌍수 상태로 머무르세요. 그러니까 정혜쌍수를 못 얻으시면 이게 실현이 잘 안 되겠죠. “주인공” 했을 때 참나가 딱 인식이 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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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되겠습니까? 화가 사라집니다. 참나는 원래 화를 안 내니까요. 에고의 입장에 우리가 있을 때는 화를 내겠지만, 자 보십시오. 에고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 화를 참으려면 안 돼요. 에고에서 입장을 참나 입장으로 바꿔버리시면요 화는 어디 가고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다시 화를 보면요 화가 어디 가고 없어요. 에고가 화를 내지 참나가 화를 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참나만 바로 인식하면요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인욕바라밀을 하는 격이 되는 겁니다. 화가 났을 때 인욕바라밀 쓴다는 건 이런 거예요. 이걸 잘못 이해하시고 화나면 참는 게 인욕이다. 그건 인욕은 맞는데 인욕바라밀은 아니에요. 인욕바라밀은요 궁극의 인욕이라는 거는 본래 화낼 게 없어서 안 내는 게 궁극의 인욕이에요. 보시바라밀은요 본래 나와 남이 없어서 주는 게 궁극의 보시고요. 지계바라밀은 본래 오염될 수가 없기 때문에 오염되지 않는 게 궁극의 지계입니다. 억지로 계율을 지키는 게 아니구요. 계율 지키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하는 게 궁극의 계율이에요. 조금도 남이 시켜서가 아니고 내 내면에서 올라온 동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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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왼손이 하는 걸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는 거예요. 왼손 오른손은 에고의 영역이에요. 에고가 모르게 작업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더 근원적인 곳에서요. 옆에 참된 점수의 방법 똑같애요. 인욕바라밀을 다시 좀 더 세밀하게 그려본 겁니다. 보십시오. 참나에서 성냄이 올라왔죠. 에고, 참나에서 성냄이 올라온다는 거는 이 에고를 거치면서요 에고가 화를 냈어요. 자 1번 보십시오. 1번은요 주인공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내가 화를 냈네” 하고 정혜쌍수 참나 자리를 찾으세요. 알아차리면 참나를 느껴요. “내가 화를 냈구나” 객관적으로 알아차리시다 보면요 안에서 참나를 느껴지시게 될 겁니다. 참나를 느끼시면요 2번 인욕바라밀이 참나에서 나옵니다. “화낼 게 뭐가 있냐”는 게 나옵니다. 그러면 3번 인욕바라밀 해놓고도 또 이름 붙이지 마시라는 겁니다. 참나로 다시 돌아가시라는 겁니다. 여전히 참나, 다시 정혜쌍수 입장으로 돌아가시라는 겁니다. 인욕을 해 놓고도요 다시 정혜쌍수로 돌아와서 “한 거 없다.” 하는 느낌으로 깨어 계시라는 겁니다. 이게
01:10:00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입니다. 인욕을 해 놓고도요 한 게 없어요. 그냥 나는 참나 자체로 깨어 있을 뿐이에요. 주인공 자리에서 알아서 화를 멈추고 다시 주인공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러면 주인공의 작용이 무한하게 나타나겠죠. 이걸 안 하고 하고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요걸 하고 안 하고는 엄청난 차이예요. 이게 지금 우리가 불교랑 유교가 다른 줄 아시는데요. 보십시오. 유교는요 유교는 요것만 4개를 택하는 겁니다. 인(仁) 사랑, 의(義) 정의, 예(禮) 예절, 오단으로 하면 성실까지 있고요. 사단 하면 성실 빼면 4개고요. 지혜. 우리 안에 양심에, 맹자의 사단확충론은 이겁니다, 우리 안에 양심이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 보면 사랑이 나가고, 잘못된 거 보면 화가, 불의, 정당한 뭐 공분이 나가고, 남하고 만날 때는 에티켓이 나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땐 지혜가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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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 계속 나오게 만드는 게 사단확충론입니다. 사단을 더 확장해 가기만 하면 된다. 원래 있는 거니까. 똑같은 얘기죠. 요걸요 기독교는요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거긴 9개를 얘기해요. 사랑의 은사, 아니 성령의 은사 9개, 성령의 열매가 9개가 있어요. 사랑 기쁨 인내 뭐 성실 온유 좋은 거 다 있어요. 진실. 이게 성령이, 성령에 응했을 때만 밖으로 나옵니다. 성령으로 안 하는 사랑 정의 이거는 다 가식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거를요 기독교식 용어로 하면 성령 부흥이에요.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성령을요 부흥시킨다는 건요 실제 사랑을 하고, 육바라밀이랑 똑같습니다, 사랑바라밀을 하고 인내바라밀을 하고 바라밀이라는 게 그겁니다. 인내를 해 놓고도요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기독교랑 똑같죠. 종교 구분 없이요 이거 해야 성인 됩니다. 이거 하신 분들은요 4대 성인에 올라 있어요.
01:12:00
잘하는 분들이. 뭐 신통, 이상한 거 해서 올라간 게 아닙니다. 4대 성인들은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도덕적인 잠재성을 100% 구현한 분들이에요. 이것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견성했다고 그러면 부처냐? 터무니없는 말이라는 게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견성은요 공부의 진정한 시작이에요. 그래서 초발심주(初發心住)라 그래요, 예전 어른들이. 처음 진정한 발심을 한 자리다. 도를 모를 땐요 진정한 발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막연하게 추측하는 거죠. 이해되십니까. 자 그러면 자 육바라밀이 그런 줄 알았고요. 좀 빨리 정리해 보겠습니다. 증발심.
[6. 증발심(1지地~10지地, 법신 보살, 반야방편쌍운般若方便雙運시 1지地)
‘도를 증득하는 발심’(증발심證發心, 법신을 온전히 증득함) 즉 1지인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 구경지’(10지)에 이르기까지는 어떠한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주관, 에고)에 의지하여 ‘경계’(객관, 세계)를 설하는 것이니, 여기서 증득한 것은 경계가 없으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일 뿐이니 ‘법신’이라고 부른다. 證發心者 從淨心地 乃至菩薩究竟地 證何境界 所謂眞如 以依轉識說爲境界而此證者無有境界 唯眞如智 名爲法身.]
6번 증발심은요 이제 계제에 오른 겁니다. 단에 오른다는 게 뭔지 한번 보시죠. 도를 증득한, 견성을 법신을 제대로 봤어요. 육바라밀까지. 보십시오. 참나 안에 이런 좋은 게 있다는 것까지 다 봤어요. 실제 쓸 줄 알아요. 이러면 1지보살이거든요. 그럼 1지에서 보살 구경지(究竟地)가 10지보살까지 가는데
01:13:00
어떤 경계를 증득하냐? 진여 하나밖에 없다. 오로지 참나만 보고 가요, 1지부터는. 이래서 1단이라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아까 이 1주는 1단을 못 주는 이유가요 참나를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못 주는 거예요. 참나를 제대로 보는 순간, 즉 태권도로 치면요 9단이 하는 기술의 잠재적인 걸 다 표현할 수 있을 때 1단을 준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1단이 가야, 1단이 싹이 난 거예요. 싹이 났다는 얘기는요 이제 물과 관심과 비료만 주면 돼요. 그러면 온전히 자라 나무가 되는데 싹이 덜 난 상태라는 거예요, 1주는. 1단은 이제 검은 띠 주는 이유가 “됐다. 요거 알면 됐다. 요거를 이제 잘만 하면 된다.” 요게 1단이에요. “고거를 잘만 하면 된다, 이제. 기술은 다 터득했다.” 고 기술을요 “지금 1단 정도다, 인제 기술은. 이거를 9단까지 가면 10단까지 가면 너 이제 부처다.” 요 말이 나올 수 있어야 1지보살입니다. 예. 이해되시죠, 이제. 여시고요. 자 7번.
[7. 지止ㆍ관觀을 닦음(1주住 이전, 1주 이전은 ‘바라밀’ 아닌 ‘수행’)
어떤 것을 ‘지止ㆍ관觀을 닦음’이라고 하는가? ① 이른바 ‘지止’(고요함)라는 것은 일체의 경계에 대한 차별상을 그치는 것을 말하니, ‘사마타’(Samatha, 고요함)의 관찰이라는 뜻에 단계적으로 따르는 것이며, ② 이른바 ‘관觀’(관찰함)이라는 것은 인연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형상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니, ‘위빠사나’(Vipassana)의 관찰이라는 뜻에 단계적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수순隨順’(단계적으로 따름)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이 두 가지 뜻(止觀)을 단계적으로 닦고 익혀서,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눈앞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毗鉢舍那觀義故 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 不相捨離雙現前故.]
요건 다시 1주로 넘어가는 겁니다.
01:14:01
1주 이전 단계예요. 지관, 자 정혜쌍수를 닦아야 되잖아요. 정혜쌍수를 닦는 것부터 설명을 해줘야겠죠. 정혜가 이제 텅 비고 지혜로움이 항상 같이 하면 1주보살이잖아요. 1주보살, 10신에서 1주 가려면 무슨 공부를 해야 되느냐? 아까 말한, 아까 제가 수행을 해야 된다고 그랬죠. 보시바라밀이 아니고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똑같습니다, 공부하는 항목은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게 마지막의 선정 지혜예요. 왜냐? 정혜쌍수만 되면 1주니까요. 선정 지혜를 어떻게 닦을 거냐? 보십시오. 지관을 닦는다는 것은 여기는 지관바라밀이 아니고 닦음, 수행입니다. 이른바 지(止)는 일체 경계에 대해 차별상을 그치는 것이니 사마타다. 두 번째요. 관찰이란, 관찰은 인연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형상을 분명하게 관찰하는 거니까 현상계가 무상하다 고다 무아다 다 아는 게 관(觀)이잖아요. 위빠사나다. 요건 위빠사나다. 수순(隨順), 이걸 단계적으로 닦아가는 게 이제 10신에서는요 1주로 가기 위해서는요 단계적으로 하나씩 닦아갑니다.
01:15:00
제가 수심결에도 체크를 해놨는데요. 몇 단계를 거쳐서 마음을 갖다 고요하게 만들고 이제 관을 해나가요. 자 요걸 어떻게 그리면 좋냐면요. 자 보십시오. 우리 참나는요 본래 정혜쌍수죠. 그런데 에고는요 안 그래요. 에고는요 선정할 땐 선정에 집중하고 지혜를 닦을 땐요 지혜에 집중해서 닦아야 돼요, 각각의 단계로. 그래서 선정도 닦고 지혜도 닦고 이렇게 에고가 하다 보면요 결국 들어가 보면 참나가 딱 나오면은 “아! 원래 정혜구나” 이거 알겠죠. 요게 지금 정혜를 닦는 겁니다. 처음에 정혜쌍수는요 둘로 닦는 거예요. 선정 닦았다가, 즉 명상하다가 또 위빠사나, “만물이 무상하지. 그렇지.” 이렇게 하나씩 분석해 가다 하다하다 보면 하다하다가 탁 초월이 일어나면은 “원래 고요하고 원래 지혜롭구나.” 정혜 바라밀이 일어나요.
01:16:00
정혜를 닦다 보면 정혜 바라밀. 퍼펙트한 정혜가 일어난다는 거죠. 이게 지관 닦는 거고요. 보십시오. 8번.
[8. 지止를 닦음(1주住 이전의 닦음)
만약 ‘지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단정히 앉아, 생각을 바르게 하고, ‘호흡’에도 의지하지 않고, ‘형체ㆍ색깔’에도 의지하지 않고, ‘허공’에도 의지하지 않고, ‘지수화풍’에도 의지하지 않고, ‘보고 듣고 깨달아 앎’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모든 ‘형상’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내려놓고 또한 내려놓았다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한다. 일체의 ‘법’(사물)이 본래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본래무상本來無相), 순간순간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불생불멸不生不滅). 또한 먼저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분별하지 말 것이며, 뒤에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는다는) ‘마음’까지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마음이 이리저리 치달리거든 곧장 거두어 들여 ‘바른 알아차림’(正念)에 머물게 해야 한다. ‘바른 알아차림’이란 ‘오직 마음뿐!’으로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뒤에 다시 이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또한 ‘자체의 형상’이 없어서 순간순간 그 형상을 얻을 수가 없다.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乃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諸想 以一切法 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心外念境界 後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攝來住於正念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卽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먼저 지(止)를 딱, 그러니까 처음 하는 사람한테 따로 설명해 줘야겠죠. 지(止)를 설명합니다. 선정을요. 선정을 하려면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한 거랑 다르지 않습니다. 선정을 하려면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단정히 앉아서. 나중에는 시끄러운 곳에서 해도 되죠, 정혜쌍수는. 그런데 초학자(初學者)니까요. 생각을 바르게 하고 호흡에도 의지하지 말고. 이 얘기는 이제 완벽하게 무념으로 들어갈 때 얘기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호흡도 의지해야 되지만 이제 무념으로 들어갈 때는요 호흡도 내려놓고 형체도 내려놓고. 보십시오. 지수화풍도 내려놓고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생각 감정도 다 내려놓고. 다 내려놓고 나면요. 보십시오. 모든 형상을 생각나는 대로 못 내려놓고 또한 내려놓았다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한다. 요게 지금 선(禪)에서 하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대승기신론이 더 먼저입니다. 모든 선(禪)의 비법이 여기서 다 나와요. 계속 보세요. 일체의 사물이 본래 형상이 없다.
01:17:00
본래무상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건 대단한 얘기예요. 본래 원래 형상이 없다, 만물은. 초월해 있다. 다 공이다. 순간순간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지금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아주 깊은 얘기입니다. 지금 깨어 계셔보세요. 나라는 걸 내려놓으세요. 이름을 내려놓으세요. 존재만 해보세요. 눈에 보이는 게 나랑 둘이 아니죠. 안 가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걸요 나랑 둘이라고 생각 안 하고 지금 제 얘기 들리는 거 그냥 듣고 계시지 둘이라고 생각 안 하십니다. 자, 요게 생겨난 것 같으세요. 에고로 보면 생겨났다 사라지지만요 깨어서 보면요 그냥 깨어있음의 나툼일 뿐이에요. 깨어있는, 그걸 둘로 보질 않아요, 자기랑. 참나랑도 둘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계는 본래 생겨난 게 없다는 겁니다. 참나 입장에서 보면요 둘이라고 안 봐요. 그냥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을 뿐이지 둘로 보질 않습니다. 바다예요. 파도가 끊임없이 친다고 해서
01:18:00
바다랑 파도가 둘이 아니거든요. 둘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요 아무리 파도가 치고 사라져도요 둘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깨달으라는 거예요. 이 정도 해야 1주라는 겁니다. 현상계에 대해서 이 정도 식견을 가져야 돼요. 그래서 먼저 마음을 따라 마음에서 나타나는 경계를 분별하지 마라. 자 이건 내가 말씀드린 게 이겁니다, 이름 붙이지 마라는. 저건 아무개다. 뭐다. 내 이름도 내려놓는 게 경계를 분별하지 않는 거고요. 그 뒤에는 분별하지 않았다는 그 마음까지 내려놔라. 제가 설명 드린 방식으로 말씀드리면 이겁니다. 이름을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러고 그냥 존재하세요. 이름을 내려놓고 존재해 보세요. 내 이름 잊어버리고 존재해 보세요. 고 상태입니다. 그게 본래무상이에요. 그냥 텅 빈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요 만약 마음이 이리저리 치달리거든 곧장 거두어들여서 바른 알아차림, 정념(正念)에 머무르게 하라. 이게 바른 알아차림이에요. 만물이 둘이 아니고 “오직 깨어 있을 뿐” 한
01:19:00
요게 “오직 마음뿐 바깥 세계가 없다.” 이 정도 알아야 1주입니다. 보십시오. 이 정도 알면요 선정이에요. 지금 선정 닦는 거예요. 선정을 이 정도 닦고요. 그런데 보십시오. 9번도 지금 삼매의 극치입니다.
[9. 진여삼매(1주住의 돈오) : 만약 앉거나 일어나고 가고 오고 나아가고 멈추는, 행위를 하는 일체의 때에, 늘 ‘방편’(정념에 안주하기)을 알아차리며 단계적으로 관찰하여, 오래도록 익혀 순수해지고 성숙해지면 그 ‘마음’이 안주하게 된다(구주심九住心, 몰입 4단계, 정념正念에 안주). 마음이 안주되면 점차 매우 예리해져 단계적으로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번뇌를 깊이 항복받고 ‘믿는 마음’이 자라나서, 신속하게 후퇴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보십시오. 이렇게 가고 오고 나아가고 멈추는 모든 일상생활에서 이걸 계속 노력, 바른 알아차림을 연습을 하면요 오래되다가 성숙해지면 어떻게 되냐? 진여삼매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하다 보면요 진여삼매, 정혜를 딱 잡게 돼요. 원래 참나, 진여 자리를 찾게 돼요. 이게 진여삼매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은 번뇌가 항복을 하게 되고 믿는 마음이 자라나서 진정한 믿음이 이루어지면서 신속하게 후퇴하지 않는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자 여기서 멈추지 마시고 관을 닦으라고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보통 선정만 얻어도, 이 정도만 얻어도 견성했다고 난리가 나겠죠. 그런데 지금 벌써 육바라밀 중에 하나만 닦았다는 겁니다. 지혜바라밀을 벌써 얘기합니다.
[10. 관觀을 닦음(1주住 이전의 닦음) : 만약 사람이 오로지 ‘지止’만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나태한 마음이 일어나서, 여러 ‘선행’을 즐기지 않을 것이며(자리自利를 닦지 않음), ‘큰 자비’를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이타利他를 닦지 않음). 이런 사정 때문에 ‘관觀’을 닦아야 한다.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 或起懈怠 不樂衆善 遠離大悲 是故修觀.]
01:20:00
자 그런데 만약 사람이, 10번입니다, 오로지 지(止)만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나태해져서. 선행을 하려고 안 해요. 자기를 위해서 여러 육바라밀을 닦아야 되는데 그걸 안 한다는 거예요. 선행을 하려고 하지 않고, 그다음 남을 도와주려고 안 해요. 큰 자비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관(觀)을 닦아야 된다. 내가 왜 육바라밀을 해야 되는지? 이런 걸 다 이해하는 공부를 따로 안 하면 멈춘다는 거예요. 이게 수행이 1주도 못 가서 지금 참나를 본 것 때문에 오히려 잘못된다는 겁니다.
[11. 지止ㆍ관觀을 함께 행함(1주住 이전의 닦음) : 앉아서 ‘지止’에 전념할 때는 제외하고는, 일체의 때에 ① ‘응당 해야 하는 것’(응작應作)과 ② ‘응당 해서 안 되는 것’(불응작不應作)을 마땅히 남김없이 관찰해야 한다. 가고 머무르며, 눕고 일어날 때 모두 응당 ‘지止ㆍ관觀’을 함께 행해야 한다. 이른바 비록 일체의 법(사물)의 본성은 생겨나지 않음을 알아차리더라도, 다시 ‘인연의 화합’과 ‘선악의 과보’가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비록 ‘인연’과 ‘선악의 업보’를 알아차리더라도, 또한 그 ‘본성’(일체 법의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 悉當觀察應作不應作 若行若住 若臥若起 皆應止觀俱行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 善惡之業 苦樂等報 不
失不壞 雖念因緣善惡業報 而亦卽念性不可得.]
그다음 11번이요. 앉아서 선정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때에 뭘 관(觀)할 거냐 이겁니다. 보십시오. 응당해야 될 것 선(善), 응당하면 안 되는 거 악(惡), 이 두 가지를 보는 겁니다. 선과 악을요 계속 관찰해야 돼요. 이게 지금 엄청나죠. 요게 지금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데요. 선택할 때마다 “선인지 악인지? 이걸 하면 되는지 안 되는지?”를요 계속 관찰해 가는 게 지금 1주보살이 해야 될 중대한 관(觀)이라는 겁니다. 깨어났더라도, 참나를 찾았더라도 이 관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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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관(觀)의 연장입니다. 이걸 하다 보면 육바라밀을 다 할 수 있게 돼요. 자 그래서 만약에 진정한 1주보살만 돼도요 우리가 뭘 물어보면요 선악을 명쾌하게 갈라주실 겁니다. 이해되시죠. 응당 가고 머무를 때 항상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된다. 자 요렇게 하면요 자 뒤에 7페이지 가면요, 자 좀 빨리 끝내겠습니다.
[* 보조 지눌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 ‘10가지 믿음’ 중에 ‘방편’과 ‘지관止觀’을 닦아, 자유로이 맡길 수 있는 공부가 이루어지면, ‘선정’과 ‘지혜’가 원만하게 광명해지니, 이를 ‘발심주發心住’(발심하는 머무름)라고 부른다. 自修十信中 方便止觀 任運功成 定慧圓明 便名發心住.]
7페이지 가면 보조 지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원돈성불론. 열 가지 믿음, 즉 이 믿음의 단계에서 지관을 닦아서 자유롭게 맡길 수 있는, 참나한테 맡길 수 있는 경지가 되면 우리가 발심주, 1주보살이라고 한다. 이게 보조 스님 입장이고요. 자, 보십시오. 육조단경에 나온 말입니다.
[* 육조단경
‘선정ㆍ지혜’는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 ‘선정’은 ‘지혜’의 본체요, ‘지혜’는‘선정’의 작용이다. 지혜를 쓸 때는 선정이 지혜에 있으며, 선정을 쓸 때는 지혜가 선정에 있다. 定慧一切不是二 定是慧體 慧是定用 卽慧之時定在慧 卽定之時慧在定.
‘선정’과 ‘지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의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으며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다. 등불은 빛의 본체이며,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이 비록 둘이나 본체는 한 가지이다. 이 ‘정ㆍ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다. 定慧猶如何等 猶如燈光 有燈卽光 無燈不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名雖有二 體本同一 此定慧法 亦復如是.]
선정과 지혜는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 선정은 지혜의 본체요 선정은 지혜의 본체요 지혜는 선정의 작용이다. 고요, 가만히 있으면 고요하고 움직이면
01:22:00
지혜롭다. 지혜를 쓸 때 선정이 지혜에 있으며 선정을 쓸 때는 지혜가 선정에 있다. 늘 깨어있는 참나를 깨달은 분은요 머리로 사물을 분석하더라도 고요하고요. 고요한 중에도 사물이 잘 보여요. 알아차려져요. 깨어 계시니까. 이해되십니까. 이게 육조단경의 제일 핵심 법문입니다. 정혜를 쌍으로 할 수 있느냐? 선정과 지혜는 뭐랑 같으냐? 등불의 빛과 같다.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다. 지금 보십시오. 여기 등이 있으면요 등에서 빛이 나오죠. 등은 선정이고요 나오는 빛은 지혜라는 겁니다. 둘이 아니다. 이게 6조 스님의 제일 핵심 법문이에요. 다 뭐냐 하면 대승기신론에서 온 것입니다. 6조 스님도요 대승기신론에서 오신 것이에요. 그런데 대승기신론은 소홀히 하고요 금강경(金剛經)만 읽으면 된다고 하는데 금강경에는 이런 얘기 안 나옵니다. 오히려 대승기신론에서 나온 얘기예요. 또 대승기신론은 이런 말을 합니다.
[13. 무념은 곧장 부처를 향함 : 이런 사정 때문에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중생이 능히 ‘무념無念’(생각이 없음)을 관찰할 수 있으면, ‘부처의 지혜’를 향하게 될 것이다.” 是故修多羅說 若有衆生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
무념, 이런 본래 무념, 만약 중생이요 능히 무념을 깨달을 수 있으면 부처의 지혜를 향하게 될 것이다. 무념만 얻으시면요 자 1주보살만, 무념을 얻으면 머무르게 되고요.
01:23:00
1주보살, 참나자리에 오매일여로 안착하시면요 부처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신 거예요. 당장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랑 이미 둘은 아니에요. 왜냐?, 부처도 이 본성 밝힌 분이거든요. 본성을 보셨기 때문에 부처랑 이미 구분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부처가 갖춘 핵심을 나도 얻었기 때문에요 이 정도만 되면 벌써 이게 칭찬이 나갑니다. 부처를 곧장 향하게 된다. 그걸 6조 스님이 이렇게 얘기해요.
[* 육조단경 : 선지식아, ‘무념법無念法’을 깨달으면, ‘만법萬法’에 남김없이 통하니,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여러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법을 깨달은 자는 ‘부처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善知識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位地.]
무념만 깨달으면 만법에 통달하니 무념을 깨달은 자는 부처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게 육조단경에 나온 얘기입니다. 둘이 아니에요. 대승기신론은 교종이고 육조단경은 선종이다. 이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이해되시죠. 자 여기까지만 할게요. 나머지 의성신(意成身)과 보신(報身)에 대한 얘기는요 좀 한번 읽어보시고요. 나중에 제가 또 아마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계제, 지금 일단 오늘 설명 드린 거는요
01:24:01
자 체험적으로 말씀드려 볼게요. 지금 내 안에 정혜쌍수(定慧雙修), 본래 고요하고 본래 지혜로운 자리 지금 느껴지십니까? 내려놓으시면 됩니다. 아까 대승기신론에서 뭐라고 했냐면요? 내려놓으라고 했어요. 내려놓으라는 생각 외에는 어떤 생각도 하지 마요. 성함 내려놓으세요. 제일 중요한 것, 성함 내려놓으세요. 이름 내려놓으시고요 이름을 내려놨다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사물하고 저랑 가르지도 마세요. 둘이 아니게 존재해 보세요. 무념 맛을 보시는 겁니다. 이거 대단한 거예요. 이 무념을 얻으려고요 그렇게 화두를 붙잡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맛을 보는 게 어렵지 않아요, 실제로는. 왜냐? 우리 안에 있는 참나니까요. 내가 내 것 보는데 뭐가 어렵겠습니까. 어렵다라고 자꾸 장벽을 세워놓으니까 어려워집니다. 쉬워요. 내가 내 것, 내가 내 것 만지는데 왜 못, 내가 내 것 보고 느끼겠다는데. 내려놓으시면 그 자리입니다. 요 자리가
01:25:00
지금 1주는 아니에요. 이 자리가 안착돼야 1주입니다. 1주는요 뜻이 머물렀다잖아요. 머무를 주(住)자입니다. 거기에 늘 안주할 수 있으면 1지입니다. 즉 오매일여 되면요 1주예요. 자 여기서 끝. 자 어떻게 수행해야 될까요? 이제. 자 만약에, 지금 참나 상태 지금 맛은 보셨죠. 요게 늘 한다고 치죠. 그러면 어떻게 닦아야 될까요? 앞으로. 1주가 먼저 안착되게 해야 되겠죠. 첫째. 그래야 1주보살이 확실해지겠죠. 그러면 바둑으로 치면 1급 정도가 되시는 겁니다, 그게 안착이 되면. 이게 안착이 됐어요. 안착이 되신 뒤에는 뭘 하셔야 될까요? 육바라밀을요 내 참나가요 사회생활 하시면 더 잘 닦기가 쉽습니다. 스님들 같으면 이때요 만행(萬行)을 나가야 돼요. 왜냐하면 절에서 닦을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요. 육바라밀을 다 닦아보려면요 사회에 나가봐야 돼요. 스님도 나가는데요 우리는 사회생활 하잖아요. 자 내가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하고 부딪칠 때 성이 날 때요,
01:26:00
화가 날 때 방금 그거 요 지금 이 무념의 상태에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에고로 같이 싸우지 마시고요 딱 깨어서 적절한 처방하실 수 있겠어요? 요게 지금 인욕바라밀 닦는 법입니다. 보시바라밀은요? 내가 좀 양보해야 될 때 양보하실 수 있겠어요? 에고는 하기 싫다고 할 거예요. 그때 “주인공!” 해서 깨어나셔 가지고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둘이 아니다.” 하고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계는요? 어떤 엄청난 유혹이 왔어요. 악에의 유혹, 어떤, 멈추실 수 있겠습니까? 계율을 지키실 수 있겠어요? 계율은요 뭐 절의 계율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계율은요 남한테 해코지 안 하는 게 제일 지켜야 할 계율이에요. 남한테 죄 안 짓는 게. 죄 안 지으실 수 있겠어요? 죄 짓고 싶은 욕망이 났을 때. 내가 죄를 좀 짓더라도 나한테는 한 엄청난 이익이 보장된다고 했을 때. 그거 따라가면 에고죠. 보살 영원히 못 됩니다. 보살은요 그때 깨어서 이익을
01:27:00
탐하지 않는 참나의 마음으로 해결할 수 있을 때 보살이에요. 지계. 자 이 공부 좀 아, 귀찮다 게으르다 싶을 때 깨어서 한 번 더 하실 수 있겠어요? “또 한 번 더 깨어있자.” 정진바라밀입니다. 늘 깨어있는 것은 선정바라밀입니다. 깨어서 이런 판단들을 정확히 내리는 게 지혜바라밀입니다. 그냥 “에이 마음대로 해버리자.” 그냥 “귀찮은데 생각하기도 귀찮다.” 하실 때 깨어서 지혜롭게 판단하실 수 있겠습니까? 요 육바라밀 이거 하는 게요 사회가 엄청 좋아요. 직장이 도량이 되실 겁니다. 가정이 도량이에요. 가정이 더 힘들죠, 직장보다. 가정에서는요 더 무례하게 굴거든요, 우리가 아는 사람한테. 더 무례하고요 더 많은 걸 기대해요. 주지는 않으면서 훨씬 많은 걸 기대해요. 그런데 우리가 사회에 나가면요 주고받고를 냉정하게 합니다. 사회에서는 오히려 덜 싸울 일도요 가정에 오면, 친한 사람, 친구 중에 싸웁니다. 많이 기대해요, 덜 주면서. “이해하겠지.”
01:28:00
“왜 이해를 못 해?” 요게 계속 반복됩니다. “내가 대충해도 이해하겠지. 친하니까.” 또 한편으론요 “왜 이걸 이해 안 해주지? 친한데.” 그럼 이때 참나로 누를 수 있겠습니까? 인욕바라밀을, 보시바라밀을. 이게 되시면요 1지보살이 가는 겁니다. 이게 안착이 돼서 깨어 계시기만 하면 이게 착착 일어난다. 정혜쌍수처럼 이게 항상 함께 다닌다는 게 확신이 드시면요 1지보살입니다. 참나를 제대로 보신 거예요. 참나 안에는 이런 좋은 것들이 있다는 것까지 확실히 보신 거예요. 그럼 법신보살이라고 그래요. 법신을 알았다고. 그러면 1단이 됐어요. 그럼 나머지 부처될 때까지 뭐합니까? 죽어라 그것만 하면 됩니다. 더 잘하려고 연구하면 돼요, 계속. 그러니까 법신보살은 오로지 진여만 본다는 게요 그전에는 진여만 보질 못해요. 육바라밀을 다 닦아야 되거든요. 법신보살 된 뒤에는 참나만 잡으면 이게 싹 같이 와요. 그러니까 깨어 계시기만 하면 육바라밀이 다 그냥 자동으로 일어날 때 1지보살입니다. 그러니까 진여만 보면 돼요,
01:29:00
그때부터는. 깨어있냐 안 깨어있냐만 그때부터는 봐도 돼요. 그런데 그 전에 봐버리면 큰일 나요. 1지가 아닌데 1지 흉내를 내면 큰일 나요. 1주인데 난 1주인데 1지처럼 깨어있기만 하면 나도 육바라밀이 나오려니. 지금 이런 착각에 빠지신 분이 되게 많습니다. 남들은 다 안 나온다는데 본인만 나온다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주위에서 다 저 사람 지혜도 부족하고 화도 못 참고 보시도 안 하고 계율도 어기고 다 그런다는데 본인은 깨어있다는 이유로요 “나는 황홀한데.” 그럼 1주도 망가집니다, 그러다가는. 그쵸. 어떻게 인간이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변할 거냐? “인성교육을 시키고 싶다. 요즘 애들 싸가지가 없다.” 젊은 친구들은요, “나이신 분들 이상하다. 고집쟁이다.” 그럼 남녀노소가 다 해야 돼요. 어떻게 하면 인격을 바꿀 수 있을까? 이게 불교라는 건 인격을 바꾸는 비급(秘笈)입니다. 대승불교란. 소승불교는 여기까지 안 가요. 대승불교는요 인격을 바꾸는 비급이에요. 소승의 목표는요
01:30:00
고통의 해결이에요. 나의 고통의 해결이에요. 내가 죽겠다는 거예요.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러니까 1주만 가면요 고통이 해결이 돼요, 내 고통은. 그럼 1주 이상은 다 뭘까요? 내 고통이 문제가 아니에요. 내 인격을 다듬고 모든 중생들을 갖다가 인격적으로 성숙시켜 주겠다는 어떤 서원을 세워야 돼요. 그게 보살의 특징입니다. 늘 원을 세우고 가요. 가만히 못 있어요. 명상을 하는 중에도 생각하는 게 육바라밀이 작동을 해버리잖아요, 이미. 깨어 있기만 해도 육바라밀이 작동을 해버리기 때문에요 보살들은요 가만히 수행을 해도 선정에만 들고 싶어도요 보여요. 저렇게 하면 중생이 더 좋을 거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고. 육바라밀이 계속 작동을 하면서 본인을 끌고 갑니다. 에고는 귀찮아해도요 해야 돼요. 보살이니까.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진여랑 너무 친해져서 일어나는 부작용이에요. 진여랑 너무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진여가 하자는 것 안 할 수가 없어요. 성경 보시면요 예수님이 이런 말 하실 때가 있어요.
01:31:01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내 뜻도 있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해되십니까? 본인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세요. “그래도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요 정도 돼야 보살이죠. 내 욕심이 있어요. 내 생각이 따로 있는데, 그런데 명상을 하니까 이렇게 하래요. 참나는 육바라밀을 이렇게 써보래요. 그러면 그걸 쓰는 겁니다, 귀찮아도. 요게 이제 12지까지 가는 단계입니다. 점점 끊어져 갑니다. 그래서 7지 보살 이상이 되면... 아! 요것만 하나 하고 끝낼게요. 그림 중에 돈오 이후의 점수. 요 큰 그림 밑에 있는 거 있죠. 요 동그라미 그림 밑에. 그게 크게 3단계로는 나뉩니다. 제가 여기까지 3단계는요 1지까지 가는 3단계였다면, 이제 1지에서 올라가는 3단계예요. 보세요. 1지보살은요 불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참나를 각성하고요. 번뇌로부터 자신을 청정하게 지킬 수 있고, 있어요. 그런데 무지와 아집의 (안주가) 아니에요,
01:32:00
여기서 안주해버리면 또 역시 소승이 됩니다. 나 하나 편한 자리가 돼요. 그래서 7지보살까지, 육바라밀을 더 닦고 더 닦다 보면 7지보살이 되는데 그때가 되면 아공이 인가 돼서 에고가 정화가 돼요. 이때 되면 나와 남을 둘로 가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불지까지 가면요 전지전능한 경지가 됩니다. 불지는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으면 7지보살입니다. 중생이 다, 이제 에고가 성숙해서요 참나 차원에서 둘이 아니다가 아니라 에고도 둘이 아닌 것처럼 남을 여기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지혜까지 보장된 건 아니죠. 보십시오. 아까 그 참나에는요, 참나에는 엄청 좋은 것들이 있는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지혜와 방편이었죠. 예. 요 두 가지를 닦아가는 과정에서 7지보살은 어느 정도 성과가 나냐면요, 지혜와 방편이 어느 정도냐면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을 정도까지는 해요. 그런데 불지는요 방편과 지혜가 더 퍼펙트해지는 겁니다. 지혜가요 우주를 다 꿰뚫어 볼
01:33:00
전지(全知). 방편이 전능. 진짜 하나님 경지까지 가는 게 부처고요. 7지보살, 그런데 7지보살만 돼도 왜 위대하냐고 하면요 나와 남을 이제 그 정도 가면 안 갈라요. 에고가 지혜와 방편이 성숙돼서 자유로이 남을, 지구상에서요 남을 도와주는데 아주 자유롭고요, 지구상에서 알아야 할 정보는 다 압니다. 근데 이제 왜 궁극의 경지랑은 다르냐? 궁극의 경지는 우주적이에요. 예. 이해되시죠. 7지는요 좀 더 지구적이에요. 지구 안에서는요 성인입니다. 7지, 지구에서 7지보살 이상이 몇이나 될까요? 과거 역사 속에서. 쉽지 않겠죠. 우리나라 스님들 중에 원효나 진묵 스님 정도가 7지 이상으로 대우를 받아요. 쉽지 않죠. 그래서 좀 뜻을 크게 세우고 가시라는 겁니다. 견성 정도로 뜻을 세우지 마세요. 물론 견성도요 부처 경지가 진정한 견성이다 하면요 그런 견성은 뜻을 세워도 되는데 거기에 담긴 많은 함축된 의미들이 있죠. 요걸 다 이해하셔야 됩니다.
01:34:00
“그냥 황홀하고 깨어있는 자리나 좀 보자.” 이렇게 하지 마시구요. 예.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01:34:08
[출처]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08 불교철학08 대승기신론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