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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기감영(京畿監營)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평동 164번지(서울적십자병원 앞)
감영(監營)은 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관청을 말한다. 관찰사(감사)는 조선 시대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관할 지역 내에서 군사 · 행정 · 감찰 · 사법권을 행사했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도로변에 표지석이 서 있다.
1784년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경기 지역에는 신자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체포된 신자들이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용삼(베드로, ?-1801년)이 순교했다.
조용삼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의 문하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몸이 쇠약했음에도 혹독한 형벌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박해자들에게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용삼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자료제공 :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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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기 감영터.(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9 적십자병원앞. 5호선 서대문역 3번 출구)
감영(監營)은 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관청을 말한다. 관찰사(감사)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관할 지역 내에서 군사 · 행정 · 감찰 · 사법권을 행사했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서대문 적십자 병원 일대는 조선 시대에는 서대문 밖으로서 경기 감영이 있던 곳이다.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으며 속칭 포정사(布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로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음에도, 점점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잡혀 온 경기 지역의 신자들은 한성 서대문 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특히 가난하고 몸이 부실하며 배움도 부족했던 조용삼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11개월 동안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지 며칠 지난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조용삼 베드로를 시복하였다.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1816~1867, 펠릭스 베드로)도 이곳에서 문초를 받은 적이 있었다. 뱃사람인 그가 중국에 표류하게 된 상황을 조사받았다. 표류 후 1858년 1월에 귀국한 뒤 그는 의주와 경기 감영, 강진 등에서 표류 전말에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의심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어서 즉시 석방되었다.
124위 중 38위가 피를 흘린 서울대교구 관할지역 순교지는 서소문 밖과 포도청, 당고개, 새남터, 경기감영 등이다.
서소문 밖에서 25위, 포도청에서 5위, 당고개와 새남터, 경기감영 등에서 각각 1위가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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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기 감영은?
경기도 관찰사 즉 경기감사의 관아로, 기영(線營 혹은 折營)이라고도 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경기감영의 위치는 몇 차례 변동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처음에는 수원에 두었다가 1년 뒤에 광주를 거쳐 서울 돈의문(서대문) 밖에 설치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경기도 영평(永平)에 별도의 신영(新營)이 설치된 적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돈의문 밖의 기영 즉 경영(京營)이 소실되면서 잠시 도성 서북쪽의 사천감을 이용하기도 했다가 옛터가 복구되면서 환영했으나,그 시기는 확실치 않다.
감영에는 지방의 행정, 군사, 사법, 경찰을 총괄하는 관찰사와 이를 보좌하는 경력 (經歷, 종4품)과 도사(都事), 판관(判官,종5품) 등이 파견되고, 실무 사무는 6방 아전들이 담당하였다.
또 소속 비가 450명,소속 공장이 1명 있었으며,관둔전 20결,늠전 80결,공수전 15결 등이 소속되었다.
옛 경기감영은 돈의문(서대문) 밖 반송방(盤松方)에 위치해 있었다.
(현 종로구 평등 164, 서울적십자병원 및 강북삼성병원 자리). 그리고 경기감영 서쪽에 둔 경기 중군영은 경기도 순영(巡營)의 지휘소인 중군이 있었던 곳으로,현 서대문구 천연동 31번지(동명여자중학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후 1896년(고종 23) 경기감영이 수원으로 이설되자,옛 감영 건물은 군영(甫營)으로 사용되다가 1903년(광무 7년) 한성부가 이 전해 와 청사로 사용하였다.
2) 경기감영과 천주교 순교사
경기감영에서는 천주교 신자 체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찍 부터 서울의 좌, 우 포도청 에서 서울도성 지역뿐만 아니라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까지 담당하였고, 그 밖의 지역은 각 읍의 토포사(討捕使) 즉 진영장의 주관 아래 기찰이 이루어진 데다가 필요시에는 포도청에서 각 읍에 공문을 보내 〔移關〕죄인을 잡아 올리도록 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후 그 죄인들은 포도청이나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사형 죄수인 경우에는해읍정법(談邑正法,,사형 죄수롤 그가 살던 고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의 명에 따라 각 읍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성저십리 : 한성부에 속한 성 밖의 외곽 지역으로,한성부 도성으로부터 4km(10리) 이내의 지역이다. 오늘날의 서울 강북구, 동대문구, 마포구, 서대문구, 성동구 , 성북구, 용산구, 은평구 여의도 일대와 종로구, 중구 일부가 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 지역에도 한성부 산하의 방을 두었는데, 현재의 마포구 일부는‘서강방’
, 용산구 일대와 마포구 동부는 '용산방’,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및 성북구 서부, 강북구 일부는 ‘숭신방’,종로구 부암동, 부기동,평창동 일대 및 은평구는 ‘상평방’,서대문구 일대와 마포구일부,여의도는 ‘연희방’,서대문구 일부는 '반송방’, 동대문구와 성 북구 동부는 ‘인창방’,성동구 일대는 ‘두모방’ 을 두었다』
그러나 1800년 4월 J5일의 부활내축일에 여주에서 일어난 막해로 체포된 신자들은 여느 때와 달리 경기감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된다.
이 박해의 발단은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여주목사가 관내의 천주교 신자들을 뿌리 뽑으려고 작정한 데 있었다. 마침 그때 목사의 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러 다니던 포교배에게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이 발각되었다.
여주 출신의 복자 최창주(마르첼리노),복자 이중배(마르티노),복자 원경도(요한),양근 출신으로 여주 임희영 집에 기거하던 복자 조용삼(베드로)과 부친 조제동,동생 조호삼,정종호,예비 신자 임희영 등이 모여 개를 잡고 술을 빚어 대축일의 기쁨을 나누고 있던 차였다. 포졸들이 몰려오자 조호삼은 도망치고,나머지는 모두 체포되었다.
여주 관아로 압송된 신자들은 중에서 조제동, 용삼 부자 외에는 모두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특히 조용삼은 그때까지 예비 신자였는데,형벌 가운데 배교했다가 이중배의 권면을 받아들여 다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경기감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조용삼은 감영의 옥에서 ‘베드로’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이후에도 감영에서의 문초와 형벌을 계속되었지만,조용삼과 동료들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러던 중 조용삼 베드로는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몸을 다시 추스르지 못한 채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그 때 가 1801년 3월 27일(음력 2월 14일)이었다.
한편 그의 동료 최창주, 이중배, 원경도, 정종호와 예비 신자 임희영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았고, 해읍정법의 명에 따라 여주로 이송 되 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칼날 아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복자. 조용삼 베드로(5.29) 기본정보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Petrus)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뒤 조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이 조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조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려고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임에도 조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자 바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조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 마르티노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조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조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조용삼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최창주 마르첼리노(5.29) 기본정보
‘여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딸이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쳤고, 순교의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 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가족과 이웃 교우들을 힘써 권면하였으며,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그 가운데 하나는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 요한의 아내이고, 다른 하나는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의 며느리 최 바르바라이다.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사위인 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 마르첼리노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고, 그의 어머니 또한 피신을 종용하였다. 이에 그는 한양으로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날 밤에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관장은 곧바로 최 마르첼리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밀고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옥으로 끌려가 원 요한과 이 마르티노 등과 함께 갇히게 되었다.
이후 최 마르첼리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또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1801년에 들어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최 마르첼리노는 신자들을 대표하여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제 형벌은 점점 더 가혹해져 갔다. 그럼에도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 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경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최후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 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중배 마르티노(5.29) 기본정보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본디 용기와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호쾌한 기개가 있었다. 반면에 그에게는 난폭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도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마르티노가 처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797년이었다. 이때 그는 사촌인 원경도 요한과 함께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 요사팟에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하였고, 이후로는 교회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특히 그는 누가 알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는데, 그의 용감한 성격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1800년의 예수 부활 대축일에 이 마르티노는 사촌인 원 요한과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며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던 여주의 관장이 포졸들을 풀어 은밀히 신자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고, 관장은 곧장 포졸들을 그곳으로 보내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하였다.
관청에 끌려가자마자 이 마르티노 일행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은 자주 이 마르티노의 굳센 용기와 격려로 힘을 얻어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마르티노의 옥중 생활은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함께 있는 신자들이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또 그는 사촌인 원 요한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찾아와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자 엄하게 꾸짖어 보냈으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아버님, 저는 효의 근본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저와 같은 신자이시니, 부자의 정을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바라본다면,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본디 이 마르티노는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옥중에서 보여준 그의 의술은, 평소 같아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적 같은 효험을 나타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병을 치료받으려고 찾아온 사람들로 옥이 장터 같을 정도였고, 모든 이가 그 효험에 놀라워했다고 전하였다.
1800년 10월에 이 마르티노와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마르티노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이 마르티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이에 앞서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이중배 마르티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없앴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중배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원경도 요한(5.29) 기본정보
‘사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원경도(元景道) 요한(Joannes)은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물세 살 되던 1797년에 사촌 이중배 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 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원 요한은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00년의 예수 부활 대축일에 원 요한은 이 마르티노와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보내다가 체포되었다. 원 요한과 동료들이 여주 관아로 끌려가는 도중에 일행은 원 요한의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노모가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게 해 달라고 포졸들에게 부탁하였으나, 포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여주 관장은 그들 일행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고,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독촉하였다. 이때 원 요한은 일행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천주를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은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옥중에는 뒤에 체포된 원 요한의 장인인 최 마르첼리노도 함께 있었다.
그동안 원 요한은 여러 차례의 형벌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가 기적적으로 낫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달려와 노모와 부인이 슬퍼하고 있는 사정을 전하면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촌인 이 마르티노의 도움을 받아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1800년 10월에 원 요한과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원 요한은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고 사형을 선고한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감사가 내린 원 요한의 사형 선고문에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교회의 지시대로 형에게 제사를 폐지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를 모두 끊어 버린 행위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뒤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경도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 또는 28세였다.
원경도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하느님의 종’ 임희영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 ·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순교자 임희영과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여주 천주교 순교자 치명 기념비」.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라는 『벽위편』의 기록을 바탕으로 2009년에 세웠다(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홍문리 48-7).
사학(邪學)을 준수하여,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사학을 준수하여,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遵守邪術 不立主 不設祭).” ‘하느님의 종’ 임희영(任喜永, ?~1801)의 사형 선고문이다. 그는 1801년 음력 3월 13일(양력 4월 25일)에 여주에서 참수되었다. 이 선고문은 그가 순교한 신유박해(1801년) 직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학징의』에 남아 있다. 임희영의 세례명은 전해지지 않으나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대세를 받았다. 임희영은 여주군 금사면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금사리)에 살던 풍천 임씨 가문의 양반으로 본관은 황해도 풍천(豐川)이다.
임희영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은 모두 교리를 믿었으나 그는 도무지 성교 믿기를 거부했다. 아버지가 무섭게, 때로는 타이르듯 여러 차례 입교를 권했으나 대답을 피하며 “천주교를 신봉하기 위해서는 눈도 귀도 또 다른 어떤 감각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러 해가 지나 병이 든 아버지는 병세가 심해졌고 죽을 때가 되어 아들을 불렀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본다면 아무 여한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겠구나.’ 했다. 그럼에도 아들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아버지는 또 그를 불렀다. “나는 내일이면 죽을 것 같다. 그런데 너의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보기에 내가 죽은 후에 너는 오히려 내 제사를 지내려 할 것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너는 내 말을 도대체 듣지 않았으니 내가 죽은 후에 상복도 입지 말거라. 만일 제사를 지내면 난 너를 아들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선종하였다. 임희영은 상복을 입고 지극한 예를 모두 갖추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나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그의 친척들과 지인들은 모두 수근거렸다.
마치 한 마리 순한 양처럼 혹독한 형벌을 받다
1800년 봄, 아버지의 첫 기일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자 임희영을 감시하고 있던 관장이 그를 잡아들였다. “분명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고 묻는 관장의 질문에도 아버지 앞에서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장은 “계속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천주교인처럼 죽이리라.” 하면서 그를 옥에 가두었다. 임희영은 근 한 달에 두 차례씩 죄수들과 함께 신문을 당하였고,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마치 순한 양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의 한결같은 태도에 놀란 관장이 “네가 제사를 지낸다고 약속하고 재물을 바치면 풀어줄 것이나 계속 이대로이면 죽일 것이다.” 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럼에도 임희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옥 안의 교우들이 오히려 “천주교인도 아니면서 왜 우리와 같은 형벌을 받느냐.”고 답답해하며 “빨리 제사를 지낸다 하고 목숨을 부지하라.”고 재촉하였다. 그제서야 임희영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말하며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임을 재차 말하였다. 그의 단호한 뜻을 알고 난 교우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함께 천주를 섬기고 공경하자.”고 설득했다. 마침내 임희영은 기도문을 배우고 주일과 축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의 믿음을 증명하는 기록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순교자 임희영의 마지막을 소상하게 적었다.
“1801년 봄, 그는 4명의 교우와 함께 감사 앞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신앙을 증거했고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처럼 결안에서 명을 한 임희영은 여주로 옮겨졌다. 1801년 3월 13일 함께 참수되었다. 이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없지만 그가 옥 안에서 교우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믿어진다. 이 약전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들을 기다려야 한다. 처음에 우리는 순교자 명단에서 임희영을 뺄 생각이었으나 마지막에 그가 신앙생활을 했고 또 감사 앞에서 신앙을 증거했다고 사람들이 보증하니 그렇다면 그는 순교자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의혹이 있다면 뺄 것.”
“우리가 앞서 본대로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한 비신자 임희영은 진지하게 수계(守誡)를 계속하여 감사의 법정에서 자신이 교우임을 밝히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또 그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였다고 밝혔음이 확실하다. 또한 우리는 임희영이 감옥에서 대세를 받았다고 믿는다. 여주로 돌아온 이 증거자들은 그들의 고통의 결말과 항구심에 대한 보상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음력 3월 13일 5명 모두 여주 성 밖에서 참수되었다. 최 마르첼리노는 53세, 원 요한은 28세 혹은 29세, 이 마르티노와 정종호는 약 50세, 임희영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교회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순조실록』과 『벽위편』에도 임희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을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순교하였음이 드러나 있다.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이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으로 여주(驪州)에서 11인, 양근(楊根)에서 7인을 취초(取招)하고 사문(査問)한 후에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에 이중배(李中培) · 임희영(任喜永) · 유한숙(兪汗淑)은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여 사람의 윤리를 폐절(廢絶)하고 형륙(刑戮)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긴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부대시참(不待時斬)하도록 명하였다.”
“죄인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 길가에서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죄인 중배, 희영, 경도, 종호, 창주 등을 법률에 따라 참수하였습니다.”
순교자 임희영은 모든 의혹을 떨쳐 내고 2011년 2월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2013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가 되어 우리 신앙의 후손 앞에 하느님의 종으로 우뚝 섰다. 그의 믿음을 본받아 죽기까지 복음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평신도, 2019년 겨울(계간 66호), 글 ·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하느님의 종’ 정종호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의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 ·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 대축일에 「희락경」 외우던 정종호
‘하느님의 종’ 정종호(鄭宗浩, 1751?~1801)의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여주 고을 출신이었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진중한 사람이었다.”라는 기록과 함께 입교 후, 그의 신앙생활을 본 가족들이 모두 그를 따라 열심히, 또 변함없이 신앙을 실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01년 봄, 정종호는 원경도, 최창주, 이중배와 함께 감사 앞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신앙을 증거했다. 그곳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본래 살던 곳으로 옮겨진 후 참수당했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기록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1801년 음력 3월 원경도 요한, 이중배 마르티노 그리고 다른 3명의 교우가 부활절 축일을 보내기 위해 그(정종호)의 집으로 왔다. 그는 그 교우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여느 때처럼 함께 기도를 바치고 성경 읽기를 마치자 느닷없이 포교들이 들이닥쳐 모두를 잡아갔다. 정 씨와 앞서 이름을 댄 두 교우는 관장 앞에서 똑같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천주교인으로 죽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여 1801년 음력 3월 13일 여주읍에서 함께 참수되었다. 당시 정 씨의 나이는 50세였다.”라고 적었다.
안타깝게도 정종호의 믿음살이가 어땠으며 체포와 순교 당시의 정황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함께 잡혀 들어간 다른 교우들의 기록을 통해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교회 측 기록 가운데 황사영이 쓴 「백서」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및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이 특히 중요한 자료이다. 교우들은 1800년 부활 대축일 때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함께 길가(산골의 작은 길)에 모여 앉아 큰소리로 「희락경」(喜樂經, 지금의 부활 삼종기도)을 외우면서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온종일 흥겹게 지냈다. 하지만 교형자매들이 함께 모여 부활 삼종경을 외우는 기쁨을 누리던 것도 잠시, 원수처럼 지내는 한 가문의 고발로 정종호를 비롯하여 다수의 교우들이 잡혀가게 되었다. 교우들 중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여러 차례 독한 형벌을 겪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굳게 버텼으며 마침내 석방되지 않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옥에 갇힌 후의 행적은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여주 감옥에는 원경도 요한과 이중배 마르티노, 정종호만이 남았고 거기에 최창주 마르첼리노와 조용삼 베드로 그리고 천주교인으로 취급된 비신자 임희영이 추가되었다. 감옥 안에서 그들은 심심풀이로 글짓기에 전념하였으며 기도를 바치고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입교를 권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1800년 음력 10월에 수감된 교우들이 감사 앞에 호출되었는데 감사는 부드러운 말로 그들의 마음을 끌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즉시 그들을 석방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 그러나 모든 시도가 쓸데없음을 본 감사는 그들의 다리를 연속으로 때리게 하고 각자에게 서명시킨 그들의 사형판결을 선고하고, 그들을 옥으로 돌려보냈다.”
『일성록』과 『순조실록』에 실려 있는 정종호의 기록
『일성록』은 1760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일지이다. 여기에는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 1748~1817)의 상소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 정종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신이 조사하여 다스린 자들 중에서 이미 판결이 난 자는 이중배, 유한숙, 임희영 세 명의 죄수입니다. 이 밖에 더욱 못된 자들은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주운형, 윤유오, 장지의 여섯 명으로 모두 사형에 처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비교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순조실록』에도 실려 있다. 마찬가지로 감사 이익운이 경기도 여주와 양근에서 18명을 잡아들여 문초를 하여 조사한 뒤 법률에 따라 처단하도록 문서로 왕에게 요청한 장계(狀啓)이다.
“경기 감사 이익운이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으로 여주(驪州)에서 11인, 양근(楊根)에서 7인을 취초(取招)하고 사문(査問)한 후에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에 이중배(李中培) · 임희영(任喜永) · 유한숙(兪汗淑)은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여 사람의 윤리를 폐절(廢絶)하고 형륙(刑戮)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긴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부대시참(不待時斬)하도록 명하였다.
원경도(元景道) · 정종호(鄭宗浩) · 최창주(崔昌周) · 윤유오(尹有五)는 윤리를 멸절(滅絶)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敗沒)시켜 인심을 현혹시켰으므로 일률(一律)에 관계되지만, 모두 의정부로 하여금 상세하게 복심(覆審)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사형선고를 받고 여주와 양근의 옥에 갇혀 있던 정종호와 다른 교우들은 같은 해 1월과 2월에 관장 앞으로 다시 호출되었다. 관장은 여러 차례 배교를 하라고 설득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마침내 형벌을 내렸다. 사형 판결문이 확증된 뒤 그는 의금부 재판소로 이송되었으며, 의금부에서 다시 해읍정법(該邑正法)에 따라 그가 살던 여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해읍정법 또는 해도정법(該道正法)으로 처형된 것이다. 이러한 처벌 방법은 본래 거주하던 곳으로 죄수를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여주로 돌아온 그들이 천상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종호는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당했다. 그와 더불어 땅에서의 순교와 하늘에서의 영광된 월계관을 함께 쓴 교우들은 이중배, 원경도, 최창주, 임희영이었다.
[평신도, 2019년 가을(계간 65호), 글 ·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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