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8章 쾌검(快劍)을 꺾는 둔검(遁劍) ① 군옥초가 목야성에 대한 묘한 거부감을 쓴 술과 더불어 발효시키고 있을 때. 목야성은 꽤 오랜만에 금어시(金魚翅)를 사용하여 거대한 한철갑문(寒鐵甲門)을 열고 있었다. 한철갑문의 두께는 일(一) 장(丈)에 달한다. 무엇이든 부숴 버린다는 강기( 氣)를 발출한다 하더라도 한철갑문에는 엷은 손도장이 찍힐 뿐 멀쩡할 것이다. 대거가 만든 화탄을 다 쓴다면 모를까? 대저 어떠한 파괴 수단을 쓰든 갑문은 붕괴되지 않는다. 게다가 열쇠를 이용하지 않고 강제적으로 문을 연다면 기관장치(機關裝置)가 발동되어 백 장 길이의 지하(地下) 석도(石道)가 단숨에 붕괴되어 버린다. 목야성은 열두 개의 비밀 창고 가운데 일곱 번째 창고로 접어들었다. 일컬어 만병고(萬兵庫)라는 곳이다. 만병고는 열여섯 개의 장방형 석실로 이루어졌다. 목야성은 열여섯 개의 석실 가운데 두 번째 방으로 들어섰다. 그 방은 일컬어 천검동(千劍洞)이다. 방 안의 크기는 백 평 남짓할까? 넓다면 넓은 석실의 벽면에는 고풍찬연한 고검(古劍)이 정연히 세워져 있다. 목야성은 팔짱을 낀 채 검가(劍架) 쪽으로 다가섰다. "이 안에 보관되어 있는 보검의 숫자는 이천사백! 이 가운데 만검풍운보(萬劍風雲譜)에 이름을 남긴 역사적인 보검은 사백여 자루. 자고로 무수한 인혈(人血)을 먹은 검은 살기만으로 흐느끼고, 검신이 드러날 경우 천기(天機)를 뒤바꾼다던가?" 검을 일컬어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한다. 목야성은 검가에 표기되어 있는 푯말로 검가에 꽂히어진 보검의 이름을 확인하며 걸었다. 태허(太虛), 자부(紫府), 금단(金丹), 구천풍(九天風), 어장(魚腸)……. 목야성은 무수한 검의 어름을 지나치다가 마음에 드는 이름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삼(三) 척(尺) 길이의 검은 검과 흰 검이 십자(十字)로 교차되어져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두 개의 푯말이 붙어 있다. 간장(干將), 막사(莫邪). "간장과 막사라……!" 목야성은 두 자루 보검을 손에 쥐었다. '후후… 그 자는 가진 게 많은 자이고, 동시에 다분히 눈이 높은 자다. 그런 자를 유혹하고자 한다면… 최고의 향수(香水)를 써야 하지.' 제칠창고인 만병고의 제사동부(第四洞府)는 백창동(百槍洞)이라는 곳이었다. 목야성은 그 안에서도 한 자루 신창(神槍)을 집었다. 일컬어 항마금강창(降魔金剛槍)이라는 것! 그것을 흔들어댈 경우 금빛 경력(勁力)이 유성우가 뿌려지듯하며 모든 것을 산산이 으스러뜨린다는 그러한 신병이기(神兵異器)였다. 목야성은 세 시진에 걸쳐 창고를 뒤졌다. 창고를 벗어날 때 그의 몸은 엄청나게 강한 보광(寶光), 신광(神光), 병채(兵彩)에 의해 휘감겨져 신형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② 수년 만에 서설(瑞雪)이 내리던 그 날. 동정호 일대에 묘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첫째는 오랜만에 내린 폭설(暴雪)에 관한 것! 둘째는 그 눈발 속으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 기이한 빛줄기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 빛은 동정호 안의 어딘가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처음에 그 빛은 금색(金色)이었다. 당시의 하늘에선 거위털처럼 흰 눈송이가 펑펑 토해지고 있었는 바, 하늘은 더할 수 없이 암울한 회색이었다. 하기에 어떠한 빛이든 회색에 뒤덮여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빛은 회공(灰空)을 뚫고 충천해 올랐다. 다음 날에도 그 빛은 가공한 기세로 떠올랐다. 빛은 금색에서 혈홍색(血紅色)으로 바뀌었고, 어떤 때 그 빛은 취록색(翠綠色)의 광휘로 뒤바뀌었다. 하늘 위에서 신마대전(神魔大戰)이 일어나는 듯한 일대장관(一大壯觀). 이러한 일은 수백 년 간 없었던 일이었다. 하기에 동정호 근처의 동정어부(洞庭漁夫)들은 물론이거니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을 흥분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③ "고서에 이르되, 동정호 한가운데에는 용혈(龍穴)이 있다고 하오. 용혈은 심해(深海)와 직통하는 바, 천 년 묵은 화리(火鯉)가 백 년에 한 차례씩 용혈을 통해 동정호 한가운데로 출현한다는 것이오. 그 때마다 동정호 전체가 금빛과 핏빛으로 물들며 하늘에 닿는 광채가 치솟는다고 하오. 저 빛은 바로 그 빛일 것이오." 군산(君山)에서 시묵회(詩墨會)가 열렸다. 일대의 공자대부들과 명문장가들을 초대한 시묵회의 주최자는 상강은협(湘江隱俠) 광묵도(曠墨道)로서, 대단한 달변가(達辯家)로도 소문난 인물이다. 그는 일컬어 만상서생(萬象書生)이라 한다. 또 그를 칭송하는 이들은 그에게 만박자(萬博子)라는 외호(外號)를 하나 더 선사했다. 여하튼 그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기에 누구도 그의 말에 항변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 동정호의 한복판이다. 정녕 대단한 광채(光彩)가 그 곳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눈을 아프게 할 정도로 강렬한 보광(寶光)들이었다. 해시(亥時)가 되어 가는 설야(雪夜). 시묵회장의 서천(西天)은 열 가지 빛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이번 시묵회는 십 년 이래의 대규모이다. 대강이남(大江以南) 최고의 학자이며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상강은협이 시묵회를 개최하는 것도 이채로운 일이거니와, 지난 칠 년 간 한 번도 이러한 자리에 끼이지 않았던 신비청년의 참가로 인해 시묵회의 권위가 한결 더 돋보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좌중은 서천 하늘을 밝히는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빛보다도 더 신경 쓰는 게 있다. 그들은 좌석 한 귀퉁이에 앉아 여아홍(女兒紅)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한 미청년의 보이지 않는 후광(後光)에 보다 더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제 나이 약관을 지나 스물셋 정도. 특별한 미남도 아니다. 그렇다고 추남은 아닐 것이되, 아름다운 용모라기보다는 다분히 고집스럽고 차갑게 생긴 키가 조금 큰 청년이다. 갑싼 옷을 걸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쩍거리는 금은의(金銀衣)도 아니다. 그는 청삼(靑衫)을 걸쳤고, 손에 한매도(寒梅圖)가 그려진 섭선을 들고 있었다. 그는 타인과 어울리는 게 싫은 듯 눈길을 술잔에 담은 채 술을 마실 뿐이었다. '탄생에 삼천만 냥이 쓰여진 자가 저 자인가?' '대륙의 잠룡으로 불리우는 자… 잠룡보 깊은 곳에 숨어 경천동지할 대상학(大商學)을 수업하고 있다고 소문났거늘, 정작 실물을 눈앞에 두고 보니 상상한 것보다는 유약해 보이는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강호상에 이름 세 자를 대어 통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학문으로 알려진 자도 있고, 그림으로 소문난 자도 있다. 칠음예자(七音藝子) 구양무초(歐陽無草) 같은 이는 일곱 가지 악기를 신인의 경지로 연주함으로 이름을 얻은 자이고……. 하되 다른 모든 사람의 이름을 합한다 하더라도 잠룡공자(潛龍公子) 하나만 못할 것이다. 잠룡공자 목야성! 그가 바로 이 시묵회에 참가한 것이다. 그런데 목야성의 몰골은 너무나도 평범할 뿐이다. 그는 사람들이 하늘을 물들이는 신광에 감탄해 하는 가운데 거듭 술잔을 홀짝거렸다. 사람들이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든 말든 그는 술 스물다섯 잔을 거듭 비웠다. 작시(作詩)의 순번이 되었고, 그가 낭송하게 된 시구에 대해 흥미를 갖는 사람이 많았다. 하되 그는 지극히 평범한 시를 지어 냈을 뿐이었다. 그 또한 호기심 많은 강호객들을 실망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하튼 시묵회는 자시(子時)까지 계속되었다. 시묵회는 목야성이 칠 년 신비를 깨고 얼굴을 드러낸 자리라는 데에서 더 지대한 의미가 있었다. 목야성은 자신을 평가 절하하는 눈빛들을 안다. 그러나 그는 동정호 물살처럼 그 눈빛들을 흘려 보내며 가끔 숨은 웃음을 흘렸다. '물은 높은 데로 흐르는 게 아니라, 낮은 데로 흐르지. 내가 초라하게 보일수록 상대는 잠룡보를 얕잡아 보고 허점을 드러낼 것. 현명한 장사꾼은 제 모습을 오 성(五成) 이상 보여 주지 않음을 먹물들이 알까?' 목야성은 연회가 정식으로 깨어지기 이각 전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 ④ 휘이이- 씨아아앙-! 대단한 눈보라였다. 호수(湖水)가 아무리 넓다 한들 하늘(天)보다는 좁다. 하늘을 온통 감추어 버리는 회색(灰色)의 눈보라는 뼛속으로 저미어 드는 한기를 흘려 보낸다. 원래 동정호에는 눈이 희귀하다. 이번 겨울의 한파는 대륙을 온통 눈보라로 뒤덮을 기세로 덮쳐 왔고, 남방에 위치한 동정호는 눈발로 쉬 뒤덮여 버리는 것이다. 목야성은 배가 대기되고 있는 호변 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술을 꽤 많이 마셨기 때문인가. 볼이 유난히 붉다.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한기가 몸을 꽁꽁 얼렸을 것이다. 목야성은 술기운만으로 한기를 이겨 내는 것도 아니고, 두툼한 옷의 온기로써 한기를 이겨 내는 것도 아니다. 최근 들어 그의 단해(丹海)에 모이는 열기(熱氣)는 하나의 구슬만한 크기로 자라났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그 기운이 사지백해(四肢百骸)에 열기를 훅훅 전한다. 그래서 이 혹독한 추위라 할지라도 알몸으로 눈보라 속을 거닌다 하더라도 일말의 한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목야성은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다. 그러다 문득 싸늘한 한 줄기 기운이 우측에서 다가섬을 느꼈다. 흡사 과거 주령의 예리한 시선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이 기운은……?' 목야성은 아직 살기(殺氣)라는 말을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정확한 의미의 살기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차디찬 눈보라를 가르고 다가선 한 줄기 예기를 느끼고도 애써 모르는 체하며 걸었다. 일순간이었다. 슷-! 홀연 길가 거송(巨松)의 나뭇가지에서 흰 그림자가 날렵히 떨어져 내렸다. 놀라운 것은 그가 눈 위에 떨어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컬어 답설무흔보(踏雪無痕步)라는 절정의 운신술! 그 자는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에 눈을 디디고서도 눈에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 것이다. 용안봉목(龍眼鳳目)이다. 그는 서글서글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강철 같은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목야성보다 다섯 살 정도 위로 보이며, 체격은 목야성의 두 배가 될 정도로 장대하다. 다만 그가 걸치고 있는 옷자락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한 백포(白袍)! 하기에 사정을 모르는 자라면 그를 무시하기 딱 좋다. 하되 강호를 아는 자라면 문제는 틀리다. 강호의 기라성 같은 영웅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열 개의 혜성(彗星), 강호십수(江湖十秀)에 대해 아는 자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흰색 너덜너덜한 경장을 걸치고, 죽검(竹劍)을 가슴에 안고 있는 이 이십칠 세 청년을 보고 공포와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자는 감히 없을 것이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방문하여 만나는 게 도리거늘, 그대가 거느리고 있는 식솔들을 해치고 싶지 않아 방문을 늦추고 있었소. 한데 마침 귀하가 시묵회에 참가하기 위해 군산에 온다 하기에 기다리고 있었지." 청아하고 강직한 어조였다. "귀하는?" 대조적으로 시건방지고 혼탁한 목소리가 목야성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백포청년은 약간 고민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군옥초(君玉楚)라 하오." "군옥초? 소졸(小卒)이로군. 내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소의궁협(素衣窮俠) 군옥초를 모르다니……! 그 이름은 강호백팔명가(江湖百八名家)의 말석에 끼여 있는 이름이 아니던가? 또한 당금 청천영웅문의 최고 고수이기도 하고! 군옥초는 처음부터 멸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심호흡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며 말을 이었다. "날 몰라도 좋소." "후후… 중차대한 사항을 갖고 있지 못할 자 같은데, 길을 피해 주기 바란다. 너같이 천박한 자와 말장난하며 흘려 보내기엔 시간이 너무 귀중하지." 목야성은 또다시 비웃어 말하며 일 보를 내디뎠다. "솔직히 말해 진실을 알기 위해 왔소." 군옥초의 표정은 대조적으로 진지하다. "진실?" "왜 그녀가 발작했는가, 그 이유를 알고자 하오!" "그녀라니?" "그대의 정혼녀, 주령!" "호오, 그 계집이 발작했단 말인가? 처음 듣는 말이로군." 목야성은 경박스레 지껄이며 군옥초를 예리한 눈길로 쓸어 내렸다. 그는 다분히 비아냥대는 표정 가운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군. 너는 주령을 동냥하게 한 당사자로군?" "동… 동냥?" 군옥초의 뺨이 창백해진다. "후후… 이제 기억이 약간 나는군. 청천영웅문에 군가의 소졸이 하나 있다는 게! 주령, 그 아이는 본래 소박한 아이인데 강호잡배들과 어울리며 간(肝)이 너무 커졌지. 칠백만 냥이 애들 죽마(竹馬) 살 돈인 줄 아나? 그 돈은 수백 수천을 죽이고 살릴 정도의 거금이야. 너희 같은 강호의 가난한 검사들은 평생을 통해 만져 보지 못할 정도의 거금이지. 난 그 돈을 너희들에게 주었거늘, 어찌해 날 막느냐? 그 돈도 부족하냐?" "군자금은 고맙소. 한데 어이해 그녀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 알고 싶소.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군옥초의 인내심은 상당했기에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다. "하하… 알 필요 없는 일일 텐데? 정혼한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 뭐 그리 깊숙이 알려 하는가? 백도의협은 그런 악취미를 소중히 평가하는가?" "그녀는 반 미쳐 떠나며 말했소. 파혼(破婚)이 되었노라고!" "파혼이라……!" 목야성은 역정에 가득 찬 표정으로 군옥초를 쓸어 봤다. 그는 한동안 볼을 씰룩거리다가 정녕 천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칠백만 냥짜리 나녀도(裸女圖)의 대가가 파혼이라……." "나… 나녀도라면……?" 군옥초의 모발이 송연해진다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죽검의 자루를 잡았다. 그러나 목야성은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후후… 난 상인의 아들이고, 또 한 명의 철저한 상인이지. 완전히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아. 하되 그 장사는 철저히 손해 본 장사였지." "이… 천박한 장사치!" 군옥초는 그제서야 전후 사정을 간파했다. 그는 정녕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죽검을 쳐들었다. 츳-! 죽검은 일순 눈보라를 갈랐고, 뽑힌 즉시 목야성의 천돌혈(天突穴)에 닿았다. "그 돈이 그러한 돈인 줄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게다. 주령 낭자는 백도를 위해 철저히 헌신코자 하였기에 너와의 가연(佳緣)을 정의로 승화코자 하였거늘… 감히 그런 패륜무도한 짓을 하다니." "후후후… 손해 본 쪽은 나다. 주령은 옷을 슬쩍 벗었을 뿐이고……." "네… 네가 감히……!" 군옥초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죽검을 한 치 정도 찔러 댔다. '백도여, 나의 경솔함을 이해해 달라!' 그는 목야성의 희고 매끄러운 목덜미에 혈선이 흐르는 것을 봐야만 노화가 풀릴 정도로 이성을 상실한 것이다. 한데 그 때였다. "그 목은 내 허락 없이 자를 수 없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취한 지껄임이 들려 왔다. 이어 경미한 파공성이 터져 나온다. 슷-! 문득 뿌연 빛이 허공을 가르더니, 군옥초가 든 죽검의 끝 부분이 두 치 가량 깎여진다. 그리고 지독한 술 냄새가 눈보라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주독(酒毒)이 올라 코가 딸기코로 화한 미청년(美靑年)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섰다. 취하기는 했으되 정녕 매혹적인 용모를 지닌 자이다. 그는 여인보다도 섬세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취해 흐늘거리고 있는 모습만 하더라도 지독히도 관능적이다. 그는 녹슨 철검(鐵劍)을 가슴에 안았고, 왼손에는 싸구려 죽엽청이 든 술병을 쥐고 있다. '으으, 찰나적으로 죽검 끝을 자르다니? 내가 흥분한 나머지 주위를 살피기를 잊었다고는 하나…….' 군옥초의 입술이 새파래진다. 그는 강호백도의 샛별이다. 그는 구파일방의 절전비급 열다섯 권을 암기하고 있다. 절대검호(絶代劍豪)의 경지에 올랐는다고는 할 수 없으되, 강호에서 그를 쉽게 꺾을 자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퇴폐와 허무에 가득 찬 술주정뱅이의 일 검은 눈 깜빡할 사이에 그의 죽검 끝을 잘라 버린 것이다. '한상, 역시……!' 목야성은 회심의 미소를 애써 참아 냈다. 다가선 자는 한상이었다. 그는 칠 년 만에 처음으로 검을 썼다. 과거 그는 강호에서 가장 빠른 발검(拔劍)의 소유자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취하는 자세는 철저한 둔검지세(遁劍之勢)일 뿐이다. 칠 년 간 검을 놓았기 때문일까? 그의 자세는 온통 허점으로 가득 차 있다. 정작 그의 몸을 노려 무기를 쓰고자 한다면 어디부터 공격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었다. "끄윽! 그 자의 몸은 꽤 비싸. 쉽게 자를 생각 말라구!" 한상은 게트림을 해 가며 다가섰다. "귀하는……?" "이름? 후후… 이름 따윈 잊었어." 한상의 눈빛은 게슴츠레하다. 군옥초는 그의 몸에서 허점을 찾고자 했다. 순간 찰나적으로 백 군데 이상의 공격 지점을 찾아 냈는 바, 도리어 공격 불가능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허(虛)하다. 전신이 허점 투성이이다.' 군옥초의 이마에 땀방울이 흥건해진다. 한상은 다시 한 모금 술을 마신다. 적 바로 앞에서 겨드랑이를 드러내는 모습은 무사답지 못한 경거망동이다. 군옥초는 그를 보다가 목야성을 보았다. "하하……!" 목야성은 웃고 있었다. 느물거리는 비웃음이었다. 그는 도저히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일 검을 흔들어 댔다. 슷- 슷- 슈아악-! 검영(劍影)이 일대를 뒤덮다가 하나의 단선(單線)을 형성하며 목야성의 가슴을 향해 다가섰다. 순간 한상은 지극히 느릿느릿 손을 쳐들었다. 녹슨 철검은 반원을 그리며 눈보라를 천천히 갈랐다. "그 목이 지금 잘리면 내가 굶게 돼. 그 자는 내 밥줄이야." 한상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바람 소리 속으로 퍼지는 찰나이다. 파팟- 팟-! 둔탁한 소리가 짧게 허공을 질타함과 동시에, 군옥초는 손에 약간의 무게만 느끼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없었다. 죽검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죽검이 아니라 죽검의 손잡이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나의 출수(出手)가 훨씬 빨랐거늘… 오오, 그렇다면 설마 귀하가 지금 시전한 검초가 전설로만 알려진 초극심쾌검(超剋心快劍)이기라도……?" 군옥초는 넋 나간 표정으로 한상을 쳐다봤다. 하되 한상이 해 준 대답은 역겨운 술 내음이 배어 있는 트림 한 번뿐이었다. "끄윽!" 한상은 취해 비틀거리며 소나무 둥지에 몸을 기대었다. "나… 나 따윈 대화 대상도 아니 된다는 것인가?" 군옥초의 얼굴이 눈빛깔처럼 파리해졌다. 그는 명예심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협사이다. 그런데 오늘 그가 최고로 여기고 있던 두 개의 자존심이 동시에 뿌리뽑힌 것이다. 첫째는 주령이라는 우상에 대한 사랑! 둘째는 자신의 애검에 대한 자신감! 두 가지의 그의 청춘을 지켜 온 정신적 지주(支柱)였거늘, 오늘 동시에 무참히 꺾이고 만 것이다. 그는 한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상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스르르 감고 고개를 흔들흔들거렸다. 도저히 취기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한데 군옥초는 여전히 그의 허점을 찾아 내지 못했다. 동시에 그는 살기와 내공을 한꺼번에 상실했다. "으으, 아무 데도 벨 수 없다니……!" 군옥초는 철저히 좌절하다 못해 검 자루나마 들 힘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숨이 막혀 온다. 기(氣)에 눌린 탓!' 죽검 자루는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눈 속으로 파묻혔다. "크크… 술주정뱅이의 취한 검마저 막지 못하다니… 이러한 몰골로 강호대의를 지킨다고 할 수 있으랴? 오오, 모든 건 신기루였다. 난 허명만 날리고 있던 하루살이였다." 군옥초는 괴로워 소리치며 오른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끊었다. 일컬어 단발(斷髮). 검은 머리카락 한 줌이 허공에 풀리며 돌개바람을 타고 풀풀 날아올랐다. "프핫핫… 프하하하핫……!" 군옥초는 단발을 한 이후 미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는 눈을 토해 내는 하늘을 노려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하늘이여! 오늘부터 강호에서 소의궁협이라는 이름을 없애 주시오. 나 군옥초는 오늘의 패배를 설욕할 진정한 상승검학을 익히기 전에는 절대로 강호를 밟지 않을 것이오. 절대로!" 군옥초는 맹세의 말을 거듭하며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는 설안비행술(雪上飛行術)이라는 경공절학을 써서 단숨에 형체를 눈보라 속에 파묻었다. 한상은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뜨며 그가 사라져 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괜찮은 녀석인데? 내가 창자에 누런 똥만 가득한 배부른 장사꾼을 보호하기 위해 애꿎은 녀석의 기만 꺾어 버렸군. 빌어먹을!" 목야성은 피식 웃었다 "한상! 네가 날 보호할 줄 알았다. 사실은 여기쯤 오면 군옥초가 날 노리리라 생각했고… 네가 날 보호하리라 믿었지." "결국 난 덫에 걸린 셈이로군, 주인 나으리!" "하하… 그런 셈인가?" "젠장, 내가 나으리를 위해 칠 년 간 녹슨 검을 다시 잡게 되었다고 해서 날 가진 듯 기뻐하지 마시오. 난 빚을 갚고자 검을 쓸 뿐이지, 나으리의 부귀와 지혜를 존경하기에 검을 쓰는 건 아니오. 나으리는 나와는 친할 수 없는 사람이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고아였소. 쾌검파에 입문하기 전, 난 쓰레기 더미에서 찬밥을 찾아 먹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소. 그대는 모를 것이오. 창자가 오그라드는 굶주림을!" "그런 체험은 중요한 게 아냐." "젠장, 그렇게 말한다면 더 할 말도 없군." 한상의 입매선이 일그러 들었다. 그는 가끔 목야성에 대한 순수한 살기를 드러내곤 한다. 그는 가장 비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쾌검파가 그를 거두지 않았더라면, 그는 녹림흑도의 거물로 성장하며 온갖 악을 실천하게 되었으리라. 눈보라가 심하다. 어느덧 목야성의 어깨에 눈이 한 치 가량 쌓였다. "어쨌든 나으리는 대단한 분이오. 나으리와 대거가 합작해서 만든 능파도(凌波島)의 함정은 강호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 오늘만 하더라도 내노라 하는 강호 명인 스물다섯이 능파도로 접어들었소. 그리고 밤이 가기 전 오십 명이 더 능파도로 들어갈 것이오." "후후……!" "대거, 그 자의 기문진은 완벽하오. 능파도로 들어간 자는 백 보를 가기 이전에 기문진에 걸려 배회할 수밖에. 그 진세는 생사문(生死門)이 뒤덮여 있는 혼천마라진(混天魔羅陣)이며, 뚫는 방법은 없소. 하기에 그 곳은 강호인의 무덤이 될 것……." "……?" "내공이 일 갑자 이상이라면 능히 전세를 뚫는다. 게다가… 파해강기(破解 氣)를 익힌 자라면 진세를 뚫고 진축(陣軸)으로 접어들 수 있지. 황홀한 신병이기들이 즐비하게 널리어 있는 환상의 동굴로……!" "파해강기를 익힌 자는 드물 텐데… 어쨌든 나으리가 죽이고자 하는 자는 파해강기를 익힌 자일 것이고! 여하튼 대단한 합작이오. 미친 부자(富者)와 미친 천재(天才)의! 하여간 날 거기 보내 누군가를 죽이게 할 작정이라면 지금 말하시오. 어차피 살인을 해야 한다면 술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하는 게 나으니까!" 한상은 칠 년 전에 이미 오백 이상을 베어 본 능숙한 검사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피 내음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는 피 내음을 맡을 때마다 구토를 하고, 그러하기에 피를 흘려야 할 때에는 미리 말술을 마셔 두는 것이다. "후후… 이번 일에는 너의 검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 대거가?" "내가 직접 처단한다." "미… 미쳤군. 나으리는 과대망상에 빠진 나머지 자신을 천하의 절정고수라고 착각하는 게 아니오? 능파도에 들어간 자는 대부분 강호흑도의 고수들. 그들은 상당히 긴장하고 있기에 전후사정을 알기도 전, 먼저 도검을 흔들어 대고 암기를 발출할 것이오. 일(一) 초(招) 무공(武功)도 모르는 처지에 거기 들어갔다가는 죽기 십상이오." "한상! 너의 검은 하룻밤 사이에 백 명을 죽이는 게 고작일 것이지만, 나는 머리로서 만 명을 죽인다. 넌 영원히 내 아래이다. 또한 대거의 아래이고……!" "크크… 내가 마음 먹는다면 나으리는 즉시 죽소. 그걸 한시도 잊지 마시오. 그러니 날 대할 때에는 약간이나마 공포심을 가져 주기 바라오." 한상은 키들거리며 술병을 텅 비게 했다. "천만에, 넌 날 베지 못해." "왜 그렇게 단정하오?" 한상의 눈이 차갑게 반짝거렸다. "네가 진짜 무사이기 때문……!" "진짜 무사?" "넌 검의 명예를 신봉하지. 하기에 넌 검의 명예에 따라 날 감히 베지 못하는 것이다. 넌 날 배반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라면 능히 배반하지. 난 무사가 아니라, 장사꾼이니까. 프핫핫……!" 눈이 모든 것을 뒤덮는다. 어찌나 심하게 내리는 눈인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