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최소한 클라이밍은 최대한
신병건
왜 오르는가?
클라이밍을 시작한지 어느덧 38년째다. 나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클라이밍을 하고 있을까? 심지어는 나이가 들수록 더 열심히 하고 있을까? 클라이밍은 돈도 안되고 밥도 안되는 정말 무상의 행위이다. 또한 순간의 실수나 방심은 부상 또는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활동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가 아니다 보니 인간관계도 좁아지고 오히려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다녀야 하기도 한다. 열심히 할수록 칭찬이나 좋은 말, 부럽다는 말보다는 ‘미쳤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 활동이다. 보험도 안되는 극악무도한 스포츠이다. 눈치 보고 집을 나와서 클라이밍하느라 온힘을 다 소진하고 나면 집에서도 쭈욱 널부러지게 마련이니 다녀와서도 환영받는 일은 없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무엇하나 이로울 것 같지 않은 짓이다. 골프처럼 폼이 나는 것도 럭셔리 한 것도 아니다. 이런 나쁜 활동을 왜 나는 죽기 살기로 하는 걸까?
대학 산악부
교대에 입학해서 선배의 권유로 산악부를 시작했다. 요즘은 산악부도 동아리라고 하던데 라떼는 동아리가 아니고 군대에 가까웠다.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군기 아니 산기가 심했다. 그래도 부산교대 산악부는 다른 대학 산악부보다는 훨씬 부드러웠다. 가끔 산에서 만나는 다른 대학 산악부의 활동 모습을 보면 해병대 또는 특수부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실도 잘 모르고 대학 산악부를 들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암벽등반이 생각보다는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스릴도 있고 재미가 있었다. 저녁에는 야영을 하면서 밥도 지어먹고 소주도 한잔 하면서 산노래도 배우고 선배들의 무용담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텐트와 침낭에서 자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주말이 아닌 평일에는 산악부실에서 생활할 수 있는 특권이 생겼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의 시간 외에는 부실에서 대학 생활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산악부실은 의식주가 가능한 곳이었다. 부실의 석유 버너로 라면을 끓여 먹고, 학교 앞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부실로 들어와서 몰래 잠을 자기도 했다. 선배들이 입었던 등산복, 체육복, 학군단복까지 빌려 입기도 했다. 부실에는 조악한 형태지만 트레이닝 기구를 설치해놓고 클라이밍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테니스장 옹벽을 기어오르기도 했고 학교 도서관 가는 길 벽면의 각진 자연석을 인공암벽 삼아 클라이밍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주말에 등반 가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점점 더 많은 암벽을 올랐다. 금정산의 대륙암, 무명암, 무명 릿지, 나비암 릿지, 준행암, 부채암까지. 금정산에만 해도 암벽등반의 등반 요소가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루트들이 있다. 금정산이 지겨워지면 더 먼 곳으로 갔다. 마산의 주사위 볼더, 꼬시락 바위, 울산의 문수암, 포항 보경사의 관음암. 방학이면 설악산의 장군봉, 적벽, 천화대 릿지를 등반했고 서울의 인수봉, 선인봉을 등반했다. 겨울에는 설악산의 빙벽들에 몰입을 했다. 비싸고 좋은 장비를 구입할 형편이 못되어서 선배들 것을 물려받거나 저렴한 것들을 사용하다보니 늘 춥고 배고프고 어렵고 힘든 동계 등반이었다. 빙벽은 암벽보다 더 위험하다. 위험할수록 더 끌리는 매력이 있는건지. 설악산 토왕성빙폭에 청춘을 걸고, 아니 목숨을 걸고 올랐다. 덕분에 완등도 하고 어깨도 어쓱했으며 성취감도 대단했었다. 대학 4년 동안 참 많은 등반을 했다. 그 시절에는 정말 시간이 늦게 간 것일까? 그 많은 산을 그 많은 등반들을 어떻게 다 했을까?
나는 교사인가, 클라이머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돈을 벌면 좋은 점이 많았다. 나만의 등반 장비를 살 수 있었다. 배낭, 암벽화, 안전벨트, 퀵드로, 헬맷, 피켈, 침낭, 텐트까지. OB가 되면 등반도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암벽대회도 출전했다. 2등으로 입상하여 일본 조가사키 해벽 등반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병역 문제 등으로 불발이 되었다. 첫 해외등반이 될 수도 있었던 조가사키 해벽을 갔다면 클라이밍 인생이 또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가열차게 등반을 해서 더 많은 등반의 성과를 냈을 수도 있다.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나름 다양한 등반을 즐겼다. 중국 사천성의 주산(6,410m)으로 고산 등반을 갔다. 첫 고산 등반으로 깨달은 것은 나는 고산 등반 체질은 아니다. 고산병도 심하고 체력도 약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등반지를 찾았다. 미국 요세미티 빅월 등반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엘캐피탄의 노즈(표고차 1,000m, 36피치) 루트를 2박 3일 동안 벽에 매달려 자면서 완등했다. 하프돔(표고차 600m, 24피치)은 1박 2일에 걸쳐 벽을 완등했다. 요세미티 등반을 성공리에 마치고 미국 서부를 클라이밍 투어했다. 나는 이런 등반이 좋은 것 같다. 여행같은 등반. 등반같은 여행. 오랜 꿈이었던 유럽 알프스 등반도 갔다. 알프스 6대 북벽 중의 하나인 이탈리아 돌로미테의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 치마 그란데 북벽의 코미치 루트(표고차 600m, 16피치)를 하루에 완등했다. 고산 등반에 가까운 뮌히도 등반했는데 알파인 등반치고는 아기자기 재미있는 곳이었다. 아이거, 마터호른과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은 나와 인연이 없는지 등반을 못해 아쉬움이 많았다.
아직도 클라이밍을 합니까?
지인들이 묻는다. 아직도 클라이밍을 합니까? 네, 아직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클라이밍 인생이 3회차에 접어들었다. 3회차는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과와 성취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좁고 깊게 파기 시작했다. 좁고 깊은 대신에 세세한 목표와 프로젝트 등반을 하고 있다. 100이라는 숫자를 활용해서 여러 가지 목표를 잡아보았다. 100개국에서 등반해보기. 5.13a루트 100개 이상 완등하기. 5.11c/d 이상의 루트 100개 하기. 5.11c/d 이상의 루트 동영상 유튜브에 탑재하기. 산악도서 100권 읽고 독후감 쓰기. 클라이밍 대회 100회 출전하기. 유명한 산악인이나 클라이머 100명 만나서 인증 사진 찍기. 새로운 자연암벽 등반지 100곳 등반하기. 실내·외 클라이밍장 100곳 등반하기. 턱걸이 100개 하기. 팔굽혀펴기 100개 하기. 윗몸일으키기 100개 하기. 볼더링 V3 이상 100개 하기. 스피드 루트 10.0초 달성하기. 또 다른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100개 하기 카테고리를 추가하고 있다. 100개 하기 프로젝트 중에서 이미 100개를 넘어서 200개, 300개로 가는 것도 있고 아직 저조한 기록을 내고 있는 것들도 많다. 100개를 넘은 대표적인 것은 5.11c/d 이상의 루트 100개 하기다. 현재 239개. 나의 클라이밍 행복 지수가 239라고 해도 되겠다. 숫자가 늘수록 행복감이 느는 것 같다. 2023년 1월 겨울에는 이 행복 지수를 높이기 위해 2017년에 갔던 태국 크라비를 다시 또 갔다. 도착하는 날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날까지 열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등반을 했다. 덕분에 14개의 루트를 완등했다. 1개의 루트를 완등할 때마다 요즘은 한 골 넣었다고 표현하는데 열흘 동안 14개의 골을 넣은 것이다. 몸은 피곤해도 행복 지수는 최고점이었다. 한국에서 토, 일 중에 하루만 등반하면 1주일에 한 골, 두 골 넣기도 쉽지가 않은데 단기간에 엄청난 골을 넣은 것이다. 사실 어려운 루트는 몇 달을 해도 완등이 안되는 곳도 많다. 조금 쉬운 루트는 온사이트로 한 번에 완등되는 루트들도 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있는 암장의 루트들은 이미 완등을 다 해버렸기에 새로운 루트가 많은 곳을 찾아가려면 많은 시간과 발품이 필요하다. 또한 현재의 최고 등급을 하나 더 올리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데 그게 쉽지가 않다. ‘일은 최소한 클라이밍은 최대한’으로 살고 싶지만 그래도 의무적으로 해야 일들이 많다. 자잘한 부상도 많고 게으름도 생기고.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다.
어렵고 힘들고 돈도 안되고 위험한 클라이밍을 하는 이유는 결국 행복이다. 나는 클라이밍을 할 때 가장 행복한 것 같다.
*****학교의 전문적 학습공동체 <글수다방> 숙제로 에세이를 써 보았습니다.^^
*****주먹밥 선생님의 클라이밍 프로젝트 영상을 보시려면 유튜브 <주먹밥TV>에서^^
첫댓글 클라이밍에 대한 열정을 존경하며 산악부 동생으로서 형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끝없는 도전과 발전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저도 클라이밍이라는 것과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며 계속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항상 기록이라는 것의 대단함을 느끼면서도, 순간을 즐기자는 말로 기록을 포기하는 저의 모습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