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 마주 앉고 싶은 그녀, 날갯짓한다..<4인용 식탁>의 전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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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 앉고 싶은 그녀, 날갯짓한다

 <4인용 식탁>의 전지현

 2003.01.07 / 최광희 기자 

1년반 전 온 세상에 엽기적 매력을 물씬 풍겼던 전지현이 이제 공포의 전령이 돼 돌아올 채비를 서둘고 있다. 심리 스릴러 <4인용 식탁>에서 비범하지만 고통에 몸서리치는 어린 주부 ‘연’을 연기하고 있는 전지현을 잠시 관객들 앞에 돌려세웠다. 어렵사리 마련한 그녀와의 소탈하고 수줍었던 미팅.

말할 때 그녀의 시선은 거의 두 방향이다. 우측 45도 아래와 상대방의 눈을 번갈아 보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주기가 대체로 일정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웬만한 성인 남자의 주먹보다 약간 큰 얼굴에 그냥 봐선 쌍꺼풀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기 힘든 눈매의 윤곽은 꽤 선명하다. 그러나 빛깔은 수줍다.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발음은 비교적 분명하다. 자근자근 말하는 품세가 겉으로 봐왔던 것보다 속내가 차분하고 다소곳할 거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가 낯선 이에겐 그리 쉽게 마음을 열 것 같지 않다는 얘기다. 안 그래도 알싸한 공기 때문에 연신 코를 훔치는 그녀의 다소 경직된 표정을 일부러라도 녹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감기 걸리셨나 보죠?” 기껏 던진 첫 질문이 감기 타령이다. “아니요, 조금 추워서요.” 그녀의 시선이 또다시 아래로 쏠린다. 실패다. 이럴 땐 정공법이 최고다. “주변에서 성격이 조금 내성적이라고 그러지 않나요?” 그제서야 피식 미소가 퍼진다. “아니에요, 저 성격 밝아요. 진짜 밝아요.” 아하! 대뜸 눈매를 치켜드는 표정을 보니 믿겠다. “단지 낯을 좀 가리긴 해요. 그래도 잘 아는 사람들이랑은 무지 편하게 지내는 편이에요.”

실은 경직된 건 이쪽이었다. 그녀는 난 원래 이런데 새삼스레 왜 그러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듣고 보아온 그녀의 인상만으로 허물없이 “어이” 하며 어깨를 툭툭 칠 것 같은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건 전적으로 이쪽 잘못이긴 하다. 그러니 처음에 웃음기 없이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거고. 어쨌든 고정화된, 혹은 정형화된 이미지와는 뭔가 다른 모습인건 분명했기에 본질적인 그녀의 정체와, 대상에 반응하는 이쪽의 심리 상태가 순간적으로, 또한 총체적으로 헷갈렸던 것이다. 왜지?


벗어나기

그녀는 이쪽에서 날아갈 질문들이 대충 어떤 것들이 될지 뻔히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안고, 받아넘기는 법을 배운 게 벌써 몇 년인가. 약관을 갓 넘어 두 해를 보낸 나이에 불과하지만 스포트라이트의 중심과 그 그늘에 놓일 때의 느낌을 터득하고도 남는 시간들을 보냈다는 걸 모두들 안다. 그녀에게 요구되는 대답 뻔한 질문에 때론 뻔하게, 때론 변주를 가하며 응수할 노하우도 몸에 익었을 터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부터 자신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엽기’라는 키워드였다. 물론 그녀에게 대입됐을 때는 어김없이 긍정적인 어감을 띄게 되지만 엽기 코드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절대적으로 아이콘화한 그녀의 위상에서 쉽게 벗어나기란, 우리도 그녀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어린 나이에 큰 성과를 거뒀다는 데 대한 만족을 지금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 만족, 평생 유지해도 될 거라고, 우리 역시 당신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나니 아까의 헷갈림이 비로소 근거를 찾아냈다.

1년반.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녀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꽤 오랫동안 그 이미지 안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볼 때 여전히 교복 입고 펼치는 화끈한 테크노 댄스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남자들은 그녀가 여전히 혀 꼬부라진 소리로 “자기야~”를 외치며 발 앞에 쓰러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지 모른다. 1년반 전 그녀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놓은 모습은 그렇게 강렬했다. 어쩌면 그 시간은 잊혀지기보다 각인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녀 자신도 세상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완전히 뿌리치진 않았다. 엽기 발랄한 표정과 섹시하고 도발적인 몸놀림이 필요할 때 간헐적이긴 하지만 그녀는 나섰다. 단지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이 무대였고, 창조적인 캐릭터가 아닌 재활용된 이미지가 무기였다. 템포만 조정됐다.


숙성하기

그녀는 초조했을까? 영화 연기를 선택한 자가 서 있어야 할 필름 카메라 앞을 그리워했을까? “초조하지는 않았어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잇는다. “조급함은 있었죠.” 초조하지는 않았는데 조급함은 있었다고? “들어오는 캐릭터들에서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죠. 대부분 예전의 캐릭터를 답습하거나 따라 하는 것들이고. 근데요…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연기는 느는 것 같아요.” 듣고 나니 초조하지 않음과 조급함의 간극이 어떤 건지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그녀는 대중들이 자신에게 빠져든 이미지 안에 갇힐까봐 조급했고, 그러면서도 그걸 거부하는 데 드는 시간을 그리 초조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도 연기가 는다는 말에 관해선 부연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학교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생각을 많이 하면 연기가 는다고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연기라는 것과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그런 것도 있고… 아무튼 나이를 먹으면서 연기를 기술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게 아닐까. 익는다는 것. 연기자이기에 앞서 세상 사는 사람으로서 안과 밖으로 동시에 숙성한다는 것. 그게 결국 자기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원천적인 밑바탕이 될 것이라는 믿음. 그걸 진정으로 터득했다면 그녀는 꽤 빨리 자라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래서 1년반 동안의 휴식은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됐어요. 영화 사이에 일정한 텀을 갖지 못하고 계속 영화를 찍는 분들은 이런 걸 느낄 새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이제 최근의 그녀가 몰입하고 있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어떻게 그녀를 1년반 동안의 휴식에서 깨워냈는지를 말할 차례다. “사실 <4인용 식탁>의 시나리오는 박신양 오빠에게 온 거였어요.” 그녀가 그 시나리오를 발견한 것은 소속사인 ‘싸이더스 HQ’의 사무실이었다. 1년여 동안 그녀를 찾아온 숱한 시나리오들처럼 역시 별 생각 없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제가 읽은 시나리오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는 시나리오였어요. 그리곤… 그냥 마음에 담고만 있었는데 사장님이 나중에 정식으로 제안을 했죠. 지현이, 네 색깔에 맞춰서 한번 해보라고요.” 영화 속 ‘연’이라는 역할에 욕심이 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정식 오퍼를 받자 그녀는 덜컥 겁부터 났다. 장르도 스릴러였던 데다 연은 내면의 상처가 많은, 게다가 비범한 능력까지 가진 여자였다. 기면 발작증을 앓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투시하는, 거기에다 혼령까지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겪고 있는 나이 어린 가정 주부. 그녀에게 맡겨진 연의 캐릭터다. 충무로에서 이름을 날리겠다는 여배우라면 탐내지 않으면 간첩일 정도의 역할이다. “연은 정말 매력이 많은 캐릭터예요.” 하긴 이런 중층적이면서 복합적인 캐릭터가 매력으로 다가올 만큼 그녀는 연기자로서의 목표점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때도 됐다.


몰입하기

늘 그렇듯 새로움에는 산고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녀에게도 변신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혼령을 본다는 사람들과 기면 발작증 환자들을 인터뷰한 비디오 자료들을 구해봤지만 연의 캐릭터에 몰입하는 건 여간 힘에 겨운 게 아니었다. “일단 저는 혼령이 있다고 믿지 않거든요. 그런데 연처럼 되려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어쩔 때는 촬영장에 나가는 것조차 싫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위눌린 사람은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그녀는 가위눌린 연의 세계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이젠 연이 불쌍하게 느껴져요.” 비로소 연이 된 그녀는 영화의 컨셉도 제법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 영화를 <디 아더스>나 <식스 센스> 같은 영화랑 비교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영화는 일단 혼령 영화는 아니에요. 혼령을 매개로 한 스릴러는 겉으로 흐르는 것이고 그 안에 다른 깊은 걸 감추고 있어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 그게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얘기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심도가 아주 깊은 영화죠.” 그런데도 그녀의 부담은 여전하다. 그런 부담은 “<엽기적인 그녀> 때와는 자못 다른 것”이라고 그녀는 얘기한다. “<엽기적인 그녀> 때는 처음엔 내가 이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큰 부담은 없었어요. 오히려 편하고 즐겁게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이번엔 달라요. 사람들이 진짜로 제 연기를 평가하게 될 테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그건 자신이 설정해 놓은 목표다. 다만 결과가 그 목표에서 어긋날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4인용 식탁>을 마치고 나서 제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배우는 끝까지 처음처럼 임해야 한다는 거죠.”


함께하기

다행히도 그녀가 이 난이도 높은 작업을 수행하는 데는 든든한 동반자가 있다. 박신양이다. 그와는 TV 드라마와 <화이트 발렌타인>에 이어 세번째 만남이다. “전 남자 배우들과 공연할 기회가 아직은 많지 않았거든요. 차태현씨하고 한 게 결과는 가장 좋았지만. 근데 이상하게 저하고는 코드도 그다지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박신양 오빠랑 자주 만나는 것 같아요. 이런 게 인연이겠죠?” 박신양이 맡은 ‘정원’은 역시 비슷한 고통에 빠져 있지만 연에 의해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프레임 밖에서는 반대다. “세번째 만남인데도 오빠와는 왠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제야 둘이 ‘함께’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죠. 현장에서 많은 얘기를 해요. 또 그래야 하는 영화고요. 저에겐 여러모로 도움이 되죠.” 저마다 끼가 넘치는 스탭들도 그녀에겐 현장의 즐거움을 배가해주는 원군이다. “있잖아요, 박신양 오빠가 한창 감정 잡고 숏 들어가려는데 왜 막 웃음이 나오려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는 먼저 웃으면 안 되니까 서로 눈치만 보고 그래요. 스릴러가 아니라 코미디에서 만났으면 참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스탭들인데….” 빙그레 웃으며 이런 말을 할 때 그녀는 영락없이 귀여운 엽기녀다.

우리의 대화에 가속도가 붙어갈 즈음이었는데 벌써 시간이 다 됐다. 처음의 어색함이 많이 누그러졌다. 맞다. 그녀는 과연 익숙해지면 훨씬 편해지는 스타일이다. 그녀와의 대화는 점점 물 흐르듯 편안해졌다. 물론 이쪽은 더 익숙해지길 바랐지만 시간의 재촉은 가혹했다. 내년 봄 그녀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할 터이니 아쉬움을 잠시 접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위안 삼았다. 생각해보니 그녀와 만난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의 늦은 오후였다. “오늘 뭐 특별한 약속 있어요?” “이상해요. 난 별로 특별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내가 굉장히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거라고 보는 거. 그게 오히려 절 외롭게 하는 것 같아요.” 검은색 트레이닝팬츠를 툭툭 털고 일어선 그녀는 “저, 이제 집에 가요” 하고는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은 전지현이다.

사진 이재용
스타일리스트 박정희
협찬 루이비똥, 마크 제이콥스, 스와로브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