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부전>의 배경은 남원 부제는 봄에 열리는 춘향제와 더불어 가을에 열리는 남원의 민속축제다. 매년 음력 9월 9일부터 이틀간 남원시 일원에서 열리는데, 1993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올해로 열 번째 맞이하고 있다. 올해는 10월 24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25, 26일 양일간 진행된다. 특히 도민체전 행사와 함께 열려 그 어느 해보다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마련돼 있다. 행사는 흥부사랑, 흥부가족, 흥부문화, 흥부박 등으로 크게 나뉘어진다. 흥부사랑 행사는 고유제, 사랑의 흥부가족 잇기, 흥부사랑 백일장, 그림 그리기 및 전시, 현대판 놀부전, 흥부·놀부와 한 컷 등으로 구성돼 있다. 흥부가족 행사는 기념식, 흥부마을 터울림 등이 진행되고 흥부문화는 전국학생 국악 경연대회, 흥부골 남원농악 경연대회, 도예 전시 및 시연, <흥부전>을 새로운 모습으로 극화한 창극 <흥부전> 공연 등으로 꾸며진다. 흥부박 행사는 박을 주제로 한 경진대회 위주로 진행된다. 이밖에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길놀이, 흥부가족 달리기, 화초장 지고 달리기, 시민위안잔치, 자생화·국화·분재 전시 및 경진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로 형제간의 우애와 베품의 사랑을 구현해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흥부제의 정신을 기리고 본받고 발전시키기 위한 흥부제가 왜 하필이면 남원에서 열리게 된 것일까. 그것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춘향전> <심청전>과 더불어 3대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는 <흥부전>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겠다. 전해오는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듯이 <흥부전> 역시 작가와 연대가 미상이다. 다만 조선 후기 어떤 지방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한 광대가 사설로 만들어 판소리로 부른 것이 그 시작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광대가 부른 판소리 흥부가가 살이 붙어 오늘날 같은 번듯한 소설 <흥부전>이 되고 판소리 <흥부가>가 된 것이었다. <흥부전>은 또한 많은 광대들에 의해 불렸기 때문에 여러 이본이 있다. 현재 밝혀진 것만으로도 목판본 3종, 필사본 11종, 판소리 사설 15종 등 30여 종이 넘는다. 이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흥부전>이 민간에 널리 퍼져 민중들에게 정신의 한 축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흥부전>은 1843년(헌종 9년)에 송만재가 쓴 <관우희>라는 작품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제비가 박씨를 물고 와서 은혜와 원수를 갚는데, 어진 아우와 어리석은 형이 분명하구나. 형형색색의 괴이한 것들이 톱으로 탈 때마다 매양 시끄럽게 쏟아지는구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정노식이 정리한 《조선창극사》에 보면 1771년에서 1841년을 살았던 조선 전기 8명창 가운데 한 분인 명창 권삼득이 그의 장기로 흥부가를 주로 불렀다고 하는 걸로 보아, 관우희 이전부터 흥부가는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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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첨지 설화와 춘보 설화 소설 <흥부전>이나 판소리 흥부가에서 보은표와 보수표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노정기에 보면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 얼품에 박가 형제가 사는지라. 놀부는 형이요, 흥부는 동생이라’ 하는 구절이 있는데, 운봉 함양 두 얼품이 바로 인월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인 것이다. 1992년부터 1년여 동안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에서 조사하여 고증한 결과에 따르면 인월면 성산리는 흥부 형제의 출생지이고 아영면 성리는 흥부의 발복지인데, 두 마을 모두 <흥부전>과 비슷한 설화와 그 지명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인월면 성산리의 박첨지 설화를 살펴보자. ‘옛날 경상도 함양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 민란이 남원 운봉까지 파급되어 팔랑치 아래에 살고 있던 부자 박첨지가 재산도 잃고 목숨도 잃게 되었다. 그 후 제법 시간이 흐른 다음에 전에 박첨지한테 큰 신세를 졌던 어떤 사람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박첨지 가족의 흩어진 무덤을 추스려 묘를 썼다. 역시 평소 박첨지한테 은혜를 입었던 마을 사람들이 묘답을 마련하여 해마다 3월 3일에 제사를 지냈다.’ 즉 어진 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던 박첨지가 바로 흥부이며, 그렇게 주장할 만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 아직도 성산리 주변에 <흥부전> 사설에 보이는 병영의 옥사장터와 옥터거리가 있다. 흥부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산제바위와 형 놀부에게 매를 맞고 돌아오는 길에 분함을 참지 못하여 신발을 털었다는 신털바위가 있다. 성산리 뒷산이 ‘제비 연(燕)’에 ‘날 비(飛)’를 쓰는 연비봉이고, 성산리가 제비마을 혹은 박바가지마을로 불렸으며, 놀부가 흥부한테 화초장을 얻어 지고 오다가 그 이름을 잊어먹었다는 화초장바위 같은 지명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런 연유로 인월면 성산리가 흥부형제의 탄생 마을이 된 것이다. 이번에는 아영면 성리의 춘보설화와 지명들을 살펴보자. ‘춘보는 성품은 착하고 덕이 많았으나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가 훗날 어찌어찌 부자가 되었는데, 역시 가난한 이웃들에게 후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다. 춘보가 죽은 다음에 마을 사람들이 그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세월이 수백 년이었다.’ 따라서 아영면 성리에서는 춘보야말로 흥부라고 주장하는데, 역시 흥부가 놀부에게 쫓겨나 유랑하다가 자리를 잡았다는 빈집골과 흥부가 부자가 되어 살았다는 흥부 집터가 있고, 부잣집의 큰 곳간을 뜻하는 고둔터와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는 화초장바위거리, 화초장을 지고 건너뛰다가 이름을 잊었다는 노더막거리, 잊어버린 화초장의 이름을 곰곰이 생각했다는 장구목이 있다. <흥부전>과 관련된 성리의 지명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마을 뒤를 휘감고 흐르는 봉우리가 ‘제비 연(燕)’에 ‘집 소(巢)’를 쓰는 연소봉이며, 흥부가 가난했던 시절에 나들이를 다녀오다가 지쳐 허기가 져서 쓰러졌다는 허기재와 마을의 어떤 사람이 목숨이 위험한 흥부에게 흰죽 한 그릇을 먹여 살려냈는데, 훗날 흥부가 그 은혜를 갚고자 보은 답으로 논을 떼어주었다는 흰죽배미와 흥부가 가난할 때 생금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는 생금모퉁이 등 생생한 지명들이 남아 있다. 인월면 성산리의 박첨지 설화와 지명들, 아영면 성리의 춘보설화와 지명들이 근거가 되고 관련 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각각 흥부 형제의 탄생 마을과 흥부의 발복 마을이 되어 남원의 민속축제인 흥부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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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부 정신 이어갈 터 흥부제는 흥부의 정신을 기리는 데 있다. 흥부가 보인 ‘나눔과 베품의 사랑’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남원흥부제전위원회에서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흥부 정신을 심기 위해 노력해 왔다. 행사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제전위의 그런 뜻을 읽을 수 있다. 즉 전국학생 판소리 경연대회나 <흥부전> 상징 그림 그리기나 <흥부전> 글짓기를 통해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흥부 정신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였으며, <흥부전>을 많이 읽게 함으로써 흥부 정신을 일깨움은 물론, 고전을 통해 우리 문학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키워갈 수 있었다. 또한 흥부가족 달리기나 화초장 지고 달리기, 혹은 시민위안 노래자랑 등을 통하여 시민 화합과 베품의 정신을 함양하였다. 민속축제인 흥부제가 열 번을 맞이하는 동안 이제 남원인이라면 <흥부전>의 발상지가 남원이며, 우리나라 3대 고전 가운데 <춘향전>과 <흥부전>이 남원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랑스레 여기게 되었다. 어떤 문학작품이건 그 고장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과 행동양식이 스며있다고 볼 때에 남원 사람들의 후덕한 인정과 베품의 정신, 혹은 이웃 사랑의 마음이 <흥부전>을 탄생시켰다고 보아도 큰 허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정신이라도 그것이 숨어 있으면 사람들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좋은 것일수록 드러내어 여러 사람과 함께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남원의 민속축제인 흥부제는 ‘베품과 사랑’의 정신인 흥부 정신을 시민들의 가슴에 심어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보여주는 축제가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참여하여 함께 하는 축제이기 때문에 흥부 정신을 함양하고 계승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고 보아야겠다. 앞으로 흥부제는 <흥부전>를 바탕으로 하는 행사 내용으로 더욱 다채롭게 꾸미고, 알차게 만들어 흥부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한 몫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