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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유생(儒生) 정암수(丁巖壽) 등이 소(疏)를 올리기를, |
“신 등이 성대(盛代)에 나서 함께 성화(聖化)를 받아 오다가 뜻밖에 역적이 이 지방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서로 마음이 아프고 뼈가 깎이는 듯합니다. 선견(先見)의 지혜로 청토(請討)1328) 하는 소장(疏章)을 미리 올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흉도(兇徒)로 하여금 몰래 결탁하고 널리 만연하게 하여 오늘날의 변을 야기시키게 한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다행히 천지(天地)와 묘사(廟社)의 묵우(默佑)를 힘입어 괴수가 복주(伏誅)되고 많은 도당이 체포되었는데, 아직도 대간(大姦)이 직위에 있고 강호(强豪)가 법망(法網)에서 벗어나, 인심이 의구(疑懼)하고 사설(邪說)이 자행(恣行)되는 실정입니다. 신 등이 변을 들은 처음부터 이를 속히 진달(陳達)하고 싶었으나 감히 본분을 넘어 번거로이 말할 수 없어 조정의 처리만을 기다린 지가 지금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소청(掃淸)되지 못하여 정난(靖難)을 기약할 수 없고 그 후환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신 등은 모든 서적을 두루 살펴보아 안위(安危)의 기미(幾微)를 약간 짐작하는 터인데 어찌 끝내 본분에 어긋난다는 경계만으로 입을 다물어, 우리 임금께서 선비를 양육하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
아, 사람의 천성(天性)은 본시 선(善)한 것이므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성인(聖人)이 만민(萬民)을 감복시키고 윤기(倫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딴 도리가 없고 다만 호오(好惡)의 바름을 밝히고 추향(趨向)의 방향을 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심을 상실치 않도록 한 뒤에야 윤기가 서고 국맥(國脈)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세도(世道)가 쇠미(衰微)하고 윤기가 해이해져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언행이 바르지 않아도 세상이 미워하지 아니하여, 하늘이 위에서 노하고 풍속이 아래에서 퇴패되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뒤를 이어 일어나니 이런데도 나라가 보존되는 것은 요행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걱정거리는 인심이 바르지 못하고 사설(邪說)이 종식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간인(姦人)이 국권과 요직을 절취(竊取)한 뒤로 충현(忠賢)을 마구 밀어뜨리고 사당(私黨)을 널리 확장하여, 그 모계(謀計)는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진퇴(進退)를 현부(賢否)에 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집을 이롭게 하고 직위를 보존할 수만 있다면, 그 마음과 행동이 도척(盜跖)이나 장교(莊蹻)와 같아도 끌어다가 응원을 삼을 뿐 임금을 망각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으니, 이는 비록 온 조정이 다 모역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적괴(賊魁)를 존경하여 성세(聲勢)로써 서로 의지하는 것을 보면 ‘역당(逆黨)’이라 해도 그 죄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시종 역적을 두호하고 조정을 방자히 저버리면서 혹은 지극한 음(陰)이 기회를 노리기를 마치 수척한 돼지가 날뛰려는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음이겠습니까. 1329) |
신들이 듣고 보았던 바를 죄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산해(李山海)는 본시 음휼한 자질로 부시(婦寺)의 태도를 외식(外飾)하여 성상(聖上)을 속여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요즈음 역적과의 상면(相面)이 비록 드문 편이나, 그 간담(肝膽)이 서로 맞아 교의(交誼)가 깊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보아온 터이니 어찌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적신(賊臣)의 집에서 문서를 수색해 낼 때 익산 군수(益山郡守) 김영남(金穎男)은 이산해 등의 수필(手筆)을 남몰래 찾아내어 소각시킨 뒤에 이산해에게 편지를 보내 걱정하지 말라 하였고, 이발(李潑)은 자신이 여립과 심교(心交)1330) 하였다 하여 궐하(闕下)에 대죄(待罪)하려고 멀리 산해에게 문의하니, 산해는 경솔히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아, 이미 역적과 더불어 순치(唇齒)가 되었고 반형(叛形)이 이미 드러난 뒤에도 대죄하려 하지 않았으니, 다시 무어라 하겠습니까. 여기서 더욱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적변(賊變)이 보고된 처음에 이산해와 정언신 등이 국가를 걱정하지 않고 다만 화(禍)가 사당(私黨)에 미칠까 염려하여 포적사(捕賊使)에게 말하기를 ‘지금 해서(海西)에 이이(李珥)의 제자가 많은데 감사(監司)는 식견이 없고, 수령 중에 서인(西人)이 많다. 반드시 무고(誣告)하고 얽어 매어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모함하려는 계략을 만날 것이니 공(公) 등은 이를 잘 처리하라.’ 하였습니다. 무부(武夫)는 천한 관원이라 군명(君命)의 지중(至重)함을 알지 못하고, 다만 권신(權臣)의 지휘만을 듣고 전주(全州)에 도착하던 날에 여립의 소재를 자주 물으면서 종을 울리고 군사를 뽑아 역적의 부내(府內) 옛 집부터 수색한 뒤에야 거주하는 촌사(村舍)를 포위함으로써 그가 도피할 수 있게 하여, 끝내 도하(都下)1331) 까지 압송하여 나라의 전형(典刑)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어찌 통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여당(餘黨)을 국문할 적에도 서로 두호하고 엄폐하기를 정언신처럼 하고 홀로 그 죄를 벗어나 구차히 그 직위를 보전하였습니다. 성상의 호선 오악(好善惡惡)을 쉬 헤아릴 수 없으나,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르니, 혹 왕법(王法)이 흔들릴까 염려됩니다. |
아, 옛적에 간인(姦人)들이 불궤(不軌)를 무고한 자가 있었지만 이는 다 임금이 어리어 혼암했던 세대를 이용하고, 환관 궁첩(宦官宮妾)들의 세력을 힘입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상이 임어하시어 궁금(宮禁)이 엄숙하여 어디에 빌붙어 무함할 길이 없고, 한준(韓準)·박충간(朴忠侃) 등 역시 시배(時輩)들이 미워하는 대상이 아니니, 그들이 유감을 품고 화를 좋아하여 조정의 진신(搢紳)을 일망 타진하려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전 현감 나사침(羅士忱)은 그 아들 덕명(德明)·덕준(德峻) 등이 평소 여립과 교분이 매우 깊었다 하여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아들을 구출하면서 ‘무고하는 사례가 어느 세대인들 없었겠는가.’ 하였으니, 그 소행은 정언신과 꼭 같아 신 등이 통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해 가을에 덕준 형제가 한성시(漢城試)를 보러 갔다가 여립을 찾아 보자, 여립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어찌 쇠미(衰微)한 세대에 시험을 보려 하는가. 앞으로 몇 해만 지나면 반드시 태평 성대를 보게 될 터이니, 그대들은 아직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덕준이 과장(科場)에서 남의 손을 빌어 응시한 일로 죄를 받게 되자, 덕윤(德潤)이 분개해 하면서 ‘장자(長者)1332) 의 가르침을 듣지 않다가 이같은 환(患)을 당했다.’ 하였는데, 지금 그 아비의 말이 또 그러하니, 그들이 역적의 교우(交友)가 되었음은 너무도 뚜렷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신 등이 역적의 사건에 대해 소(疏)를 올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덕윤이 자기 부자(父子)에 관한 말이 소에 언급될까 염려하여 그 아우 덕헌(德憲) 등을 많은 선비가 모인 공석에 보내 난동을 부리고 욕을 마구하여 진소(陳疏)를 저지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만약 조정에 있는 여당(餘黨)을 믿지 않는다면, 그 패역(悖逆)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겠습니까. |
또한 정인홍(鄭仁弘)은 정여립과의 정의가 매우 돈독하여 마치 한 몸과 같은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인홍으로 하여금 여립의 여당을 보호하여 지방의 이론(異論)을 수습해서 후일의 시비를 혼동시킬 목적으로 감히 전주 제독(全州提督)에 주의(注擬)하자,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여립을 위하는 일에 적극 힘을 다하였으니, 그 계략이 어찌 교묘하지 않습니까. 신 등은 이 고장에서 생장하여 여립의 평소 심술(心術)과 처사를 듣고 보아온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비록 그 역모는 알지 못하였으나, 탐폭(貪暴)을 일삼고 이익을 좋아하는 등 궁흉 극악(窮兇極惡)한 양상에 대해 말하자면 입이 더러워지고 보자면 눈이 욕되므로, 선비로서 약간의 식견만 가졌다면 아무리 향리(鄕里)의 친구 사이였어도 모두 여지없이 나무라고 미워하여 왔습니다. 여립도 고장에서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산을 유람한다 핑계하고 많은 요승(妖僧)·이류(異類)들을 거느리고는 해서(海西)·영남 등을 횡행하며 몰래 무뢰배들과 결탁했을 뿐 아니라 소위 글을 읽는다 하는 자들과도 수 없이 친교를 맺었습니다. 지금 그의 사우(死友)들이 다 역모에 참여했다고 하지는 못하더라도 시종 동아리지어 그의 흉추(兇醜)를 엄호하다가 결국 호선 오악(好善惡惡)하는 본심까지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찌 가까운 시일에 역적의 무리로 화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그 역상(逆狀)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늦게야 교우(交友)에 신중하지 못하였던 것을 스스로 뉘우치는 자는 오히려 용서할 수 있지만, 전날의 친절을 숨기고 일체 상종하지 않았다 하여 저 한효순(韓孝純)·이정립(李廷立)처럼 사실을 속이고 교묘하게 모면하려 한다면 그 심술의 소재가 끝내 의심스럽습니다. |
전 현감 정개청(鄭介淸)은 오랫 동안 여립과 교우가 친밀하여 온갖 사설(邪說)에 서로 호응한 자입니다. 여립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자는 양(陽)에 속하여 여자와 같지 않으니,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소위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王觸)의 일시적인 말이고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다.’ 하였고, 정개청은 일찍이 배절의설(排節義說)1333) 을 만들어 후배나 제자들을 현혹시키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폐단이 반드시 간귀(姦宄)를 야기시켜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성인이 《춘추(春秋)》와 《강목(綱目)》을 저술할 때 절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는데, 지금 정개청은 글을 읽는 데 힘써 유민(流民) 출신으로 사대부의 서열에 참여한 뒤에는 감히 터무니없는 말을 마구 만들어 스스로 역란(逆亂)의 길에 빠졌으니, 군친(君親)을 망각하고 버리는 마음이 뚜렷합니다. 진주(晉州)의 유종지(柳宗智)도 여립과의 상종이 각별하여, 산중에서 서로 회합할 때 그의 제자 양형(梁泂)만이 그 뜻을 알아서 편지를 전달하여 보고난 뒤에 즉시 소각시켜 버렸다고 합니다. 그 편지의 왕복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지난번에 이들 몇 사람이 한 고을의 선비를 창솔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하면서 ‘장차 망하는 나라에 응시해서 무엇하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차마 할 말이겠습니까. 아, 고인(古人)이 과거(科擧)에만 치중하면 구도(求道)하려는 의지(意志)를 빼앗긴다고 경계는 하였지만, 군중을 창솔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유종지의 그 의론은 과연 무슨 속셈입니까. |
아, 국가는 큰 기구(器具)이고 모역(謀逆)은 큰 악입니다. 큰 악으로 큰 기구를 엿보는 것은 일조 일석의 일이 아닙니다. 역적 여립은 온 서책을 관통하여 자기의 성패(成敗)를 헤아린 자입니다. 어찌 감히 품계 낮은 벼슬아치로서 하찮은 도당들만을 얽어 매어 나라를 도모하려는 계책을 세웠겠습니까. 혹은 농락 또는 음모로써 형세를 배치하여 그 전략이 매우 치밀하였고, 또 일대(一代)의 인심이 모두 정상(正常)을 상실하여 사설(邪說)이 널리 세상에 횡행하도록 만든 뒤에야 그 흉계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세월을 지연시켜 왔었습니다. 내부에는 정언신(鄭彦信)이 있어 오랫 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많은 무사(武士)들과 결탁하는 한편, 정언지·권극례(權克禮)·권극지(權克智) 등과 더불어 친구가 되고 요로를 차지하여 상호 주선하였으며, 안으로는 쓸데없는 역사(役事)를 일으켜 사섬시(司贍寺)의 재화(財貨)를 소비하고 밖으로는 수송해 온 곡식을 풀어 사사로이 은혜를 베푸는가 하면, 북호(北胡)가 변방에 침투하여 도둑질을 일삼는데 그들에게 땅을 떼주는 문권(文券)을 마음대로 만들어 주었고, 이일(李鎰)이 명을 받아 변방으로 나가는데 사사로이 검(劍)을 끌러 주었으니, 이미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녹둔(鹿屯)을 설치하여 한 지방에 해를 끼쳤고 추쇄(推刷)를 거행하여 제도(諸道)의 원성을 일으켰으니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동요시킨 바가 일체 오피(伍被)가 회남왕(淮南王)을 위한 계책1334) 과 같습니다. |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지목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전번에 조헌(趙憲)이 이를 사전에 간파하고 충성을 다해 극언(極言)하자, 삼사(三司)가 동시에 일어나 군부(君父)를 협제(脅制)하여 마침내 먼 지역에 찬배(竄配)시켜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계략을 삼았습니다. 여립의 역모가 누설되어 선전관(宣傳官)을 파견하였을 때 천위(天威)1335) 와 가까운 자리에서 입을 삐죽거리며 비웃고, 함께 추국(推鞫)하여 안험(安驗)1336) 할 때 사당(私黨)에 관련되는 말이 나오자 급히 그 사람의 입을 쳐서 모진 매로 즉살(卽殺)하였으나 이를 감히 핵실하는 자가 없었으니, 전하의 신하 중 거기에 따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고인(古人)의 말에 ‘양민(良民)으로서 도적을 감싸 주는 자도 역시 도적이다.’ 하였는데, 신 등도 신하로서 역당(逆黨)을 두호하는 자는 다 역당으로 간주합니다. |
또한 군부(君父)를 속이는 자는 으레 해당되는 율(律)이 정해져 있습니다. 저번에 권극례(權克禮)는 정언신이 젊었을 때 장람죄(贓濫罪)를 범한 사실을 환히 알고도 회계(會計)에 철저히 하라는 명을 즉석에서 어겼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그 죄를 밝혀 교정하지 못하여 식견있는 이가 많이 걱정하였습니다. 이번에 정언신이 감히 자신을 철저히 속였는데, 공론(公論)이 약간 일어나려다가 그만 중지되고 왕법(王法)을 의당 거행하여야 하는데도 지금까지 지연하고 있으니, 군부를 기만한 죄를 징계하지 않고 기강을 진작시키지 못하면 장차 국가를 다스릴 방법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정언신의 관직이 삭탈되자 무사(武士)들이 듣고 저마다 한숨을 짓고 개탄하며 의뢰할 곳이라도 잃은 듯하였는데, 부도(不道)한 정언신이 그처럼 무사(武士)들의 인심을 얻었다면 어찌 큰 후환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요즘 변방의 수비가 더욱 우려되고 있는데, 이들이 마구 날뛰어 문관(文官)을 제압하고 위세를 드날리는 실정이겠습니까. 이일(李鎰)은 본시 정언신의 조아(爪牙)로 남북(南北)에서 기염을 부리던 자입니다. 처음 호번(湖藩)에 있으면서 외람되이 편비(褊裨)의 보강을 청하였는데 이번의 변을 듣고 항상 스스로 불안해 하니, 이일의 속셈을 누가 알겠습니까. 미연에 방지하여 잘 처리하는 것이 국가의 복입니다. |
아, 왕망(王莽)이 거짓으로 겸공(謙恭)한 체하고 조조(曹操)가 으레 천자(天子)를 앞세웠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속았는데 이는 혹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지금 여립은 처음에는 비록 글 읽는 선비로 알려졌으나 뒤에 온갖 악행이 다 갖추어지자 성주(聖主)만이 그를 배척하였고, 여러 신하들은 그와 한 당파가 되어 혹 정직한 사람이 감히 그의 잘못을 말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밀어뜨리고 무함하여 그의 의사에 부회(傅會)하였습니다. 역모가 이미 탄로되어 국세(國勢)가 더욱 위태롭게 되어서는 사사로이 서로 엄폐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오늘날과 같은 인심(人心)은 오래전부터 점차 길들여져 왔던 것입니다. 당파를 마음대로 한 뒤로부터는 당파만 알고 군부(君父)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계미년1337) 에 삼사(三司)가 몇 사람의 현인(賢人)들을 공격하여 오래도록 윤허를 얻지 못하고 있을 때 한 대신(臺臣)이 ‘지금 상께서 걱정이 심하여 언짢아하시는 기색이 있으니, 우선은 논계(論啓)를 중지하는 것이 어떤가?’ 하자, 홍여순(洪汝淳)이 ‘지금같은 시기에는 사직(社稷)이 소중하다.’ 하므로 동료(同僚)들이 고개를 떨구며 손을 흔들었고 중외(中外)가 모두 이를 갈며 속을 썩혔으나, 홍여순의 무군 부도(無君不道)한 죄를 한 사람도 탄핵 토벌을 청하는 자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의리가 거의 없어졌던 것입니다. |
아, 시역(弑逆)의 죄는 사람마다 분노해 하는 바인데, 요즘 호남에 하인이 상전을 살해하여 그 정상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감사(監司) 유영립(柳永立)·추관(推官) 김우굉(金宇宏) 등이 뇌물을 받고 석방해 주었으니, 이는 관직이 있는 자가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 강상(綱常)이 무너진 것입니다. 조정(朝廷)의 청탁(淸濁)은 시대의 승강(升降)에 관계되는데, 요즘에 이양원(李陽元)·윤의중(尹毅中)·윤탁연(尹卓然)의 무리가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날마다 이익을 추구하고 악행만을 좋아하여 청탁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조정에 있는 자가 그지없는 욕심을 부려 염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심이 그러하기 때문에 나라에 변란이 있어도 항상 사당(私黨)만을 생각하여, 충의(忠義)에 항쟁하는 선비가 있으면 기어이 논척(論斥)하게 합니다. 계미년의 진소(陳疏)는 딴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 하고, 정해년1338) 의 봉장(封章)은 난민(亂民)으로 지목하였다가 다행히 성상의 보호를 입어 군흉(群兇)들의 참벌(斬伐)을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배(時輩)의 자제들이 학궁(學宮)1339) 에 마구 모여 붕간(朋姦)과 실없는 논의로 한세상을 어지럽히고 허풍과 공갈로 서로 을러대어 정기(正氣)를 좌절시키므로 수년 사이에 점차 말을 조심하여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감히 직언(直言)하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
이 세상을 둘러보면 모두가 서로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데, 성주(聖主)께서 배양하신 학맥(學脈)이 아직도 심후(深厚)하기 때문에 양천회(梁千會)·백유함(白惟諴) 등이 이어서 충언(忠言)을 올려 모두 가납되었고, 직언으로 찬적(竄謫)되었던 자들도 방면(放免)되었으며, 간녕(奸佞)을 통찰하고 충현(忠賢)을 불러들여 직언을 구하시는 교지(敎旨)의 뜻이 간절하기 때문에 사기가 다시 진작되고 국세가 점차 신장되어 온 나라가 함께 유신(惟新)을 갈망하니, 어찌 전하께서 성찰하고 근면하여 앞으로 큰 사업을 이룩할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전번에 국사를 그르쳐 나라를 팔려다가 기밀이 탄로난 자의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전하께서도 그 정상을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김응남(金應南)은 남몰래 모의를 주관하면서 외부로는 모르는 체 겸손을 가장하고 내부로는 시기가 심하여 현인을 헤치고 당파를 만드는 등 그 죄가 가장 무거운데, 성상께서 이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양(陽)은 매우 미약하고 쌓인 음(陰)은 해소시키기 어려우니 전하께서 금니의 경계[金柅之戒]1340) 에 밝지 못하시면 뒤에 반드시 박상의 환[剝狀之患]1341) 이 있을 것입니다. |
유성룡(柳成龍)은 소위 사류(士類)로 일신(一身)에 큰 명망을 차지하고 시론(時論)을 주관하면서 남의 말을 교묘히 피합니다. 이전의 일은 추구(推究)할 필요가 없으나, 요즘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도 사당(邪黨)을 배치시킬 뿐, 충현을 끌어들여 지난번의 과오를 고치는 계책으로 삼겠다는 한 마디의 말도 없으며, 도리어 우성전(禹性傳)이 이산해·김응남(金應南) 등의 기세를 꺾으려 한다 하여 옛 친구를 배반하고 새 붕당에 구합(苟合)하며, 매번 역적을 위하여 부회(傅會)와 찬양으로 온갖 정태(情態)를 써서 그를 끌어들여 우익을 삼으려고 천의(天意)1342) 를 탐지하고 병관(兵官)에 주의하여 낙점까지 받았으나, 그 때 마침 조헌(趙憲)의 소가 올라와 취임시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만약 병정(兵政)을 차지하여 흉모를 재촉하였다면 당당한 국가야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혈전(血戰)에 임한 군사들이야 어찌 조그마한 손해 뿐이겠습니까. 유성룡은 진실로 역모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만약 반성해 본다면 태양 아래서 어떻게 낯을 들고 살 수 있겠습니까. |
역적과의 심계(心契)가 가장 친밀한 자들로는, 송언신(宋言愼)은 역적에게 심중(心中)을 숨기지 않았고, 윤기신(尹起莘)은 앞장 서서 아첨을 부렸고, 남언경(南彦經)은 선물에 찬양까지 곁들였고, 이언길(李彦吉)은 목재를 수송해다가 집을 지어 주었고, 조대중(曹大中)은 역적을 위해 눈물을 흘렸고, 김홍미(金弘微)는 반드시 이진길(李震吉)의 집에서 유숙하였고, 이홍로(李弘老)는 여립의 적삼[杉]을 자랑삼아 입었습니다. 이상은 다 역적의 집에 드나들면서 사의(邪議)를 선동한 자들로 시골 사람의 사귐에 비할 바가 아니고, 이순인(李純仁)·유몽정(柳夢井)의 무리는 하찮아서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는 모두 신 등이 다같이 알고 있는 사실로, 평소 침 뱉고 비루하게 여겨 온 바인데, 전하께서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삼강 오상(三綱五常)은 천지의 상경(常經)이고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그 조목은 다르나 그 이치는 한 가지이므로, 행실이 불효(不孝)한 자는 임금을 범하게 되고 사귐이 불신(不信)한 자는 반드시 불충(不忠)하게 됩니다. 지금 여립에게 불효·불충한 행실이 있는데도, 권세를 탐내어 흉사(兇邪)를 일삼는 무리와 이익을 함께하는 붕당이 되어 상호 결탁하여 오늘날의 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임금이 사람을 쓰고 버리는 데에는 반드시 소행(素行)이 선악(善惡)과 교유(交遊)의 현부(賢否)부터 먼저 살펴서 진퇴시킨 뒤에야 어진이가 서로 끌어들이는 길(吉)함이 있고 당파를 만들거나 권세를 농단하는 자들이 저절로 종식될 것입니다. |
대체로 상·벌(賞罰)은 천하의 공동의 것으로, 임금도 사정(私情)을 둘 수 없습니다. 선유(先儒)의 말에 ‘요(堯)·순(舜)을 임금으로 삼고 고요(皐陶)를 신하로 삼더라도 상벌이 분명하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할 수 없다.’ 하였는데 오늘날의 상벌은 과연 적절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급박하면 원기(元氣)를 손상하고 너무 느리면 기율(紀律)을 방해할 염려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애틋한 마음을 두터이 하시고 또 적절한 형(刑)을 사용하시어, 죄 없는 자가 횡액에 걸리는 억울함이 없게 하고 죄 있는 자가 요행히 벗어나는 길이 없게 하신다면 백성들이 서로 권계(權戒)할 줄을 알아서 나라가 거의 다스려지게 될 것입니다. 아, 임금의 마음은 치도(治道)를 내는 근원이니 임금의 마음이 한번 정하여지면 나라가 안정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당(私黨)을 만들어 공론을 폐지하는 것을 모르시는 바가 아니고 현류(賢類)가 충심(忠心)을 가져 국가를 걱정한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바가 아니나, 사람을 쓰고 버리는 일이 상반(相反)되어 그른 사람을 믿고 의지하시니,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 ‘전하께서 사·정(邪正)의 소재를 잘 아시면서도 저들의 무리를 모조리 버리지 못하여 그 당원(黨援)이 이미 이루어지고 주세(主勢)가 날로 고립되었으니, 아무리 이를 전환시키려 하나 이제는 어찌할 수 없다.’ 합니다. 그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시세(時勢)가 있는 곳을 그들이 나아갈 방향으로 삼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본심을 더 이상 지키려 하지 않으니, 전하께서 이 까닭을 소급해서 생각하신다면 어찌 스스로 반성하여 깊이 뉘우치지 않겠습니까. |
아, 전날을 잊지 않는 것은 후일의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송(宋)나라원부(元符)1343) 초기에 비록 진관(陳瓘)·추호(鄒浩) 등 제현(諸賢)을 기용하였으나 간인(姦人)을 물리치기를 멀리하지 않아 훈유(薰蕕)1344) 를 한 그릇에 두었다가 마침내 군자는 날로 물러가고 소인은 한꺼번에 진출하여 정강(靖康) 시대의 화(禍)1345) 를 빚었습니다. 지금 아무리 많은 현자를 기용하고 여러 간인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덕을 지킴이 확고하지 않아 참소가 혹 편승한다면, 전하의 오늘날 마음이 시종 한결같기를 보장하기 어려울까 합니다. 아, 탁란(濁亂)이 지난 뒤에 폐정(弊政)이 날로 불어나고 기근을 겪은 뒤에 굶주려 죽는 사람이 속출하여, 변방에는 근심이 많고 국내에는 도적이 발생하며 수령이 탐잔(貪殘)하여 부역이 번중(煩重)합니다. |
오늘날의 일에 대해 말할 것이 진실로 많으나, 본(本)이 다스려지지 않았는데 말(末)이 다스려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의 진달(陳達)이 거기까지 언급할 겨를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호·오(好惡)의 근본부터 먼저 바루고, 진퇴시키는 즈음을 자세히 살펴, 상벌에 적당함을 얻고 시비에 알력이 없으며, 난관(難關)을 징계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백성을 기르고 어진이를 부르며, 충신·효자를 장려하여 세교(世敎)를 펴고, 은일(隱逸)한 재지(才智)와 준걸(俊傑)을 찾아 조정에 배치하여 학교의 행정을 증수(增修)하고 도학(道學)의 선비를 흥기(興起)시키소서. 그리고 날로 유신(儒臣)을 접촉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자문하여, 백성을 보전하는 도와 변방을 편안케 하는 계책을 내외로 함께 닦고 상하(上下)가 태만함이 없으며, 어진이를 임용하는 데 의심치 아니하여 능히 군사(君師)의 임무를 다하고, 근본을 견고하게 할 것을 깊이 생각하여 사설(邪詋)이 종식되어 인심이 바루어지며 삼강(三綱)이 확립되어 대법(大法)이 전개되도록 하신다면, 많은 난관이 도리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로 오늘날에 들어맞아 아마도 천명(天命)이 만세토록 다함이 없을 것이니, 이는 종사(宗社)의 큰 다행일까 합니다.” |
하였다. 이 소(疏)를 올리자 상이 즉시 이산해·유성룡을 인견하여 위유(慰諭)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
“진사(進士) 정암수(丁巖壽)·박천정(朴天挺)·박대붕(朴大鵬)·임윤성(任尹聖)·김승서(金承緖)·양산룡(梁山龍)·이경남(李慶男)·김응회(金應會)·유사경(柳思敬)·유영(柳瑛) 등이 국가의 역변(逆變)을 이용하여 감히 무함하는 술책을 써서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고 사휼(邪譎)의 소(疏)를 올려 현상 명경(賢相名卿)을 모조리 지척(指斥)하여 온 나라가 텅 빈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그 속셈을 따져 보면 장차 어찌하려는 것인가. 그 흉참(兇摻)한 양상이 더욱 해괴하다. 이는 반드시 간인(奸人)의 사주를 받은 것이 단연 의심이 없으니, 잡아들여 추국하고 율에 따라 죄를 적용하라.” |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1책 46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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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萬曆) 17년) 12월 1일(갑술) 16번째기사
호남 유생 정암수 등 50여 인이 정여립과 관련된 대신들에게 죄줄 것을 상소하다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 50여 인이 성지(聖旨)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
“한번 간인이 추요(樞要)의 권한을 도둑질한 뒤부터 충현(忠賢)을 밀쳐 모함하고 사당(私黨)을 널리 심어, 모계(謀計)는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고 진퇴는 현부(賢否)로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집을 이롭게 하고 자신의 지위를 보전할 수만 있다면 행실은 도척(盜跖) 같고 마음은 장교(莊蹻) 같은 자라도 끌어들여서 원조로 삼고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병들게 하여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온 나라가 모역한 것은 아니나 괴적(魁賊)을 숭장(崇長)하고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한 것으로 살펴보면 역당이라 하여도 그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
이산해는 본디 음흉하고 간사한 자질로 겉으로는 부녀나 환관의 태도를 꾸며 성조(聖朝)를 속여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근래 역적과 모여 면대한 것은 드물었으나 교분이 깊고 친밀하였습니다. 적신(賊臣)의 집 문서를 수색할 때에 익산 군수(益山郡守) 김영남(金穎男)이, 산해 등의 수적(手跡)을 빼내어 불태워버린 뒤에 산해에게 서찰을 급히 보내어 염려하지 말게 하였습니다. 이발은 스스로 정여립의 벗이라는 것으로 궐하에 대죄(待罪)하려고 산해에게 물으니 산해가 ‘경동(驚動)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
아, 역적과 이미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는 처지가 되었는가 하면 반란이 이미 드러난 뒤에도 대죄하려 하지 않았으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상변(上變)하던 초기에 산해는 국가를 염려하지 않고 오직 재앙이 사당(私黨)에 미칠까 두려워하여 곧 포적사자(捕賊使者)에게 ‘해서(海西)에는 이이의 제자가 많은데 감사는 지식과 생각이 없고 수령은 서인(西人)이 많으니 필시 무고하여 얽어서 진신(搢紳)을 모함하려는 계책일 것이다. 공들은 잘 처리하라.’ 하였다 합니다. 그리하여 무부 소관(武夫小官)이 임금의 명이 중한 줄을 알지 못하고 권신의 지휘만 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주에 당도하던 날 번거롭게 여립의 소재로 물어 먼저 부내(府內)의 옛 집을 수색한 뒤에야 거주하는 마을의 집을 포위하여 그가 피해 숨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마침내 함거(檻車)로 도성에 잡아 보내어 전형(典刑)을 밝게 보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당(餘黨)을 국문할 때에는 영호(營護)하고 숨기기를 일체 정언신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홀로 죄를 피하여 구차하게 작위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성명(聖明)의 호오(好惡)를 쉽게 헤아릴 수 없으나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르니 아마도 왕법(王法)에 어긋난 점이 있는 듯합니다. |
옛날에 간인이 무고하고 간인이 불궤(不軌)를 도모한 자가 있습니다만, 이는 모두 어린 임금이 있는 혼암(昏暗)한 세상을 타고 환관과 궁첩(宮妾)의 형세를 의지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지금 성명께서 임어하여 궁금(宮禁)이 엄숙하고 맑으니 진실로 인연하여 모함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한준(韓準)·박충간(朴忠侃)은 역시 시배(時輩)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아닐진대, 간인들을 끼고 재앙을 즐겨하여 조정의 벼슬아치를 일망타진하려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전 현감 나사침(羅士忱)은 그의 아들 나덕명(羅德明)·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이 평소 여립과 교분이 친밀하여 재앙이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 거짓말을 하여 현저히 신구(伸救)하기를 ‘무고하는 일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 하였으니, 사침의 말이 언신 등과 부절(符節)처럼 합치됩니다. 지난 가을 덕준(德峻) 형제가 한성(漢城)으로 과거 보러 가면서 여립에게 들러 인사하니 여립이 ‘그대들은 쓸만한 재능으로서 어찌 쇠세(衰世)에서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있겠는가. 수년을 지나면 태평 세대를 보게 될 것이니 그대들은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덕준이 과장(科場)에서 차술(借述)한 것으로 죄를 입자 덕윤(德潤)이 분해하며 ‘장자(長者)631) 의 가르침을 쓰지 아니하다가 이런 환난을 만나게 된 것이 후회스럽다.’ 하였습니다. 이제 그 아들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이들이 역적과 교분이 친밀한 것이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역적을 토벌하기 위해 소장을 진달한다는 말을 듣고 덕윤 등이 그들 부자의 말이 소장에 언급될까 염려하여 나덕현(羅德顯)·나덕헌(羅德憲) 등을 보내어 선비들이 모인 공좌(公座)에서 난동을 일으켜 소장을 올리는 일을 저지하려 꾀하였습니다. 이들이 만일 조정에 있는 남은 당여들을 믿지 아니하였다면 패역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
정인홍으로 말하면 여립과 정사(情事)가 매우 돈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홍으로 하여금 여립의 남은 무리를 보호하게 하고자 하여 일방(一方)의 이론(異論)을 수습함으로써 뒷날 시비를 현란시키기 위해 감히 전주 제독(全州提督)에 주의(注擬)하였으니,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여립의 처지를 위해 힘쓴 그 계교가 또한 교묘하지 않습니까. |
신들은 이 지방에서 생장하여 여립의 평일 마음가짐과 행한 일을 듣고 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역적의 조짐을 알지는 못하였으나 탐욕 포학하고 이익을 즐기며 몹시 음흉하고 극히 악독한 정상은 말하자니 입이 더럽고 보자니 눈이 욕스러웠습니다. 그러므로 선비로서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는 그의 향리 친척에 대해서도 더할 수 없이 비방하고 깊이 미워하였습니다. 여립이 한 지방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이에 산을 유람한다 말하고 요승과 이류(異類)를 많이 거느리고 해서와 영남 등지를 횡행하였는데 무뢰배와 몰래 결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서한다는 사람도 서로 앞세워 주고 서로 죽자 하는 벗이 된 자가 많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모역(謀逆)에 참여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시종 체결하고 흉추(兇醜)를 두호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본심을 잃기에 이르렀으니, 서로 적(賊)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지금 당초 모역의 정상을 알지 못하고 교우를 가리지 못한 것에 대해 뉘우치는 자가 있으면 그래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분의 관계를 숨기고 상종(相從)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로 저 한효순(韓孝純)·이정직(李廷直)이 성명(聖明)을 속여 교묘히 면한 경우가 있는데 그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을 끝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전 현감 정개청(鄭介淸)은 오랫동안 여립과 교유가 친밀하여 사설(邪說)을 서로 창화(唱和)한 자입니다. 여립은 항상 ‘남자는 양(陽)이므로 여자와는 다르니,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정개청은 일찍이 배절의설(排節義說)을 지어 후생 소자를 미혹시켰는데, 그 말에 ‘그 폐단이 반드시 간귀(姦宄)가 아울러 일어나서 마침내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야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성인(聖人)이 《춘추(春秋)》를 찬수(纂修)하고 《강목(綱目)》을 저술함632) 에 있어 절의를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지금 개청이 부지런히 독서하여 하찮은 신분에서 발신(發身)하여 사부(士夫)의 대열에 끼게 되었는데, 감히 할 수 없는 말을 함부로 하여 스스로 난역(亂逆)의 처지에 빠지게 되었으니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한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
진주(晋州)의 유종지(柳宗智)는 여립과 서로 추종하며 산중에서 비밀히 회합하였고 제자 양간(梁澗)만이 그들의 의사를 전하러 왕래하였으며, 모든 서찰은 보고 나서는 불에 넣어버렸다 합니다. 왕복한 내용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난해 이 몇몇 사람이 온 주군의 선비를 창도(倡導)하여 과거에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장차 망할 나라인데 과거에 나아가서 무엇하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로서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옛 사람이 진실로 사람들에게 ‘과거가 뜻을 빼앗는다.’ 하여 경계한 적은 있으나 대중을 창도하여 과거를 폐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종지의 이 논의는 과연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
국가는 대기(大器)이고 모역은 대악(大惡)입니다. 여립 또한 속마음으로 성패를 헤아리는 자이니, 어찌 감히 품계가 낮은 소관(小官)으로서 그저 산 속의 무뢰한들을 불러모아 나라를 도모할 계책을 하였겠습니까. 필시 농락(籠絡)하기도 하고 함께 음모하기도 하여 형세를 포치하는 데 사기(事機)를 지극히 비밀스럽게 하였고 또한 시대의 인심으로 하여금 모두 상도(常道)를 잃고 사설(邪說)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한 뒤에 흉계를 부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세월이 지연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
안으로는 정언신이 병권을 장악하여 많은 무사와 결탁하고, 정언지 및 권극례(權克禮)·권극지(權克智) 등 안팎의 친척 고구(故舊)와 요직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서로 주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무익한 역사(役事)를 일으켜 사섬시(司贍寺)의 재물을 텅 비게 하고 밖으로는 수송하는 곡식을 흩어 사사로이 먹여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북쪽 호인은 변경을 침구한 도적인데 땅을 떼어 문권(文券)을 만들어서 마음대로 주었고, 왕명을 받고 변방에 나가서는 전립(戰笠)을 벗고 칼을 끌러주어 사사로이 보냈으니 이미 임금을 무시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녹둔(鹿屯)의 역사(役事)는 일도(一道)에 해를 끼쳤고 추쇄(推刷)하는 일은 제도(諸道)에 원망을 쌓았습니다. 무릇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요란시킨 것은 모두가 오피(伍被)가 회남왕(淮南王)을 위해 계획한 것633) 처럼 하였으므로 인심이 고민하고 두려워하여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정여립의 모역이 누설되어 선전관을 보내게 되어서는 천위(天威)가 지척에 있는데도 입술을 삐죽거리며 비웃었고, 같은 추관으로 안험(按驗)하면서 말이 사당(私黨)에 미치게 되어서는 그의 말문을 급히 막아 엄흑한 장형으로 그 자리에서 죽였는데도 온 좌석의 사람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감히 핵정(覈正)하지 못하였으니, 전하의 신하로서 그에게 따르지 않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겠습니까. |
군부를 기망한 것에 이르러서는 절로 형률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권극례는 소시에 장람(臟濫)한 짓을 한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회계에 관한 명을 면대하여 속였으니 식자들이 근심하였습니다. 지금 언신이 감히 스스로 거짓말을 많이 하다가 공론이 점차 발론되자 도로 그만두었으니 왕법을 거행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지체되고 있습니다. 신들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 경계되지 아니하고 기강이 진작되지 아니하여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
아, 왕망(王莽)은 거짓으로 겸공하였고634) 조조(曹操)는 천자를 끼고 호령하였으니635) , 당세가 속은 것은 혹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립은 처음에는 독서로 이름하였으나 뒤에는 여러 죄악을 모두 구비하였습니다. 성주(聖主)께서 매양 신하들이 편당짓는 것을 지척하셨으므로 한 바른 사람이 그 그름을 과감히 말하면 떼를 지어 배척하고 뭇사람이 편당하여 그의 뜻에 부회하였습니다. 역모가 이미 탄로나게 되어 국세가 더욱 위태로워졌는데도 사적으로 서로 숨겨주는 데 있어 또한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인심이 점점 변하여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입니다. |
한번 간인이 멋대로 편당을 지은 뒤로부터 당여가 있는 것만 알고 군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계미년636) 에 삼사(三司)가 두서너 현인을 공박할 적에 한 대신(臺臣)이 ‘위에서 근심함이 요즘에 와서 극심하여 옥체가 미령한 증후가 계시니 우선 논계를 정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홍여순이 ‘이때를 당하여 사직이 중하다.’ 하므로, 동료가 목을 움츠리고 손을 흔들며 그만두었습니다. 저 홍여순의 임금을 무시한 부도(不道)한 죄를 한 사람도 거핵(擧劾)하여 성토하기를 청한 자가 없었으니 군신의 의리가 거의 없어진 것입니다. |
요즘 듣건대, 호남에 종이 주인을 죽인 정적(情跡)이 이미 드러났으나 감사 유영립(柳永立), 추관 김우굉(金宇宏)이 모두 뇌물을 받고 놓아 주었다 합니다. 이것은 지위에 있는 자가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강상이 실추된 것 입니다. 조정의 청탁(淸濁)에 시대의 쇠륭(衰隆)이 관계됩니다. 근자에 이양원(李陽元)·윤탁연(尹卓然)의 무리가 숭반(崇班)의 자리에 있으면서 날로 이익 취하는 것만을 일삼고 탐욕을 숭상하여 관절(關節)이 잇따르고 있다 합니다. 이것은 조정에 있는 자가 청렴하지 못한 욕심을 열어놓음으로써 염치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
김응남(金應南)은 은밀히 모의를 주장하면서 겉으로는 모르는 것처럼 하고, 양(陽)으로 베풀고 음(陰)으로 물리치나 안으로는 실로 시기가 많아서 어진이를 해치고 당여를 부식한 그 죄가 제일 중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 그것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
유성룡은 이름이 사류(士類)로 일컬어지고 자신이 중망(重望)을 짊어지고서 시론(時論)을 주장하면서도 남의 말을 교묘히 피하였습니다. 종전의 심사(心事)는 뒤에 와서 탓하는 것이 마땅하지 못합니다만, 요즘 국사가 날로 위태로와지고 사당(邪黨)이 포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도 충현(忠賢)을 끌어들여 개혁 경장(改革更張)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함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우성전(禹性傳)이 이산해·김응남 등의 기세를 꺾고자 한다고 하여 옛날의 친구를 저버리고 새 붕류와 구차히 합하였습니다. 매양 역적에게 이끌리어 정태(情態)를 잘 보이려고 그를 끌어다 기용하여 자신의 우익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성상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곧바로 그를 병조 낭관에 주의(注擬)하였는데, 마침 조헌의 소장이 올라와서 취직(就職)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룡은 본디 역모에 참여한 자임을 아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어찌 천일(天日)의 아래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
역적과 심계(心栔)가 가장 친밀한 자로 말하면, 송언신(宋言愼)이 속마음에 숨김이 없은 것, 윤기신(尹起莘)이 고분고분 달려가 아첨한 것, 남언경(南彦經)이 뇌물을 주고 찬송(贊頌)한 것, 이언길(李彦吉)이 제택(第宅)을 지어준 것, 조대중(曺大中)이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 김홍미(金弘微)가 기필코 언길의 집에 유숙한 것, 이홍로(李弘老)가 여립의 적삼을 자랑삼아 입은 것 등인데, 이같은 무리들은 모두 일찍이 역적의 집에 출입하여 사의(邪義)를 선동한 자이므로 향곡(鄕曲)에서 교유한 자와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순인(李純仁)·유몽정(柳夢井)의 무리들은 자잘해서 말할 것조차도 없는데 이는 신들이 함께 아는 바로서 평일 더럽게 여기던 바입니다. |
전하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삼강 오상(三綱五常)은 천지의 상경(常經)이고 고금의 통의(通義)입니다. 조목은 다르나 이치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행실이 효성스럽지 못한 자는 반드시 윗사람을 범하고, 사귐이 신실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충성스럽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립은 효성스럽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한 행실이 있는데다가, 권세를 탐하지만 세력이 없는 무리와 흉사(兇邪)하여 행실이 없는 무리와 이익을 같이하여 벗이 되어 서로 교결하여 오늘날이 있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임금이 사람을 쓰고 버림에는 반드시 먼저 그 집안 행실의 선악과 교육의 현부(賢否)를 살펴서 기용하거나 물리친 뒤에야 어진 사람이 함께 진출하는 길상(吉祥)이 있게 되고 당을 부식하여 권세를 전천(專擅)하는 자가 저절로 지식될 것입니다.” |
하였는데, 소장을 들이자, 상이 크게 노하였다. 이산해·유성룡 등이 모두 대죄하니 상이 인견하여 위유(慰諭)하고, 소두(疏頭) 이하 10인을 나국(拿鞫)하도록 명하였다. 양사가 잇따라 계사를 올려 언자(言者)를 죄주지 말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5책 59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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