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고향 그리워
라인강에 새해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욱한 눈발에 강변을 따라 이
어지고 있는 나지막한 산들이며, 산의 품에 안기듯 자리잡고 있는 집들
의 모습은 아슴푸레했다. 그러나 강줄기는 더 진한 물빛을 드러내며 긴
흐름을 짓고 있었다. 강과 산, 그리고 이름 모를 고성과 가지가지
예쁜 모양의 집들이 하늘 가득 흩날리는 눈발과 어우러진 풍광은 환상
적으로 아름다웠다.
"세상에! 꼭 꿈속에 있는 것 같애."
두 팔을 벌리며 정남희가 감탄했다. 옆에서 걷고 있는 김광자는 정남
희를 보며 그저 웃음지었다.
"지금 서울에도 눈이 올까? 새해가 돼서 그런지 어쩐지 집생각이 나
서 못살겠다. 잘 익은 김치도 실컷 먹고 싶고. 지금 김치가 얼마나 맛있
을 때야, 글쎄."
정남희는 입맛 동하게 신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정남희의 말에 김광자는 서울이 아닌 강진이 불현듯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정남희는 서울 태생이었다. 김광자는 줄줄이 떠오르는 어머니
와 동생들의 모습에 금방 목이 메었다.
"알겄지야? 아부지가 생전에 농사짓대끼 그렇게만 혀, 잉?"
어머니가 공항까지 나와서 다짐했던 말이 또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농사짓듯이! 그 말은 가슴벽에 깊게깊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살껍질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없앨 수 없는 문신처럼.
"이젠 독일놈하고 놀아날 참이냐!"
오빠의 외침이었다. 오빠는 끝내 반대를 꺾지 않았다. 그 불신과 모독
때문에 어머니의 다짐을 가슴벽에 더 깊이 팠던 것이다.
"집생각을 하면 뭘 해. 자꾸 눈물만 나오지." 정남희는 소리 나게 콧
숨을 들이켜고는, "독일어 교육도 며칠 안 남았는데, 정말 넌 어쩌면 그
렇게 독어를 잘하니 글쎄. 꼭 대학 나온 것처럼. 넌 머리가 좋은 거니,
무슨 비결이 있는 거니?" 그녀는 가끔 해온 소리를 또 했다.
"비결은 무슨 비결, 그냥 죽어라 하고 하는 거지 뭐."
김광자는 축축한 감정을 걷어내며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니야, 난 머리가 나쁜가 봐. 나도 니 죽고 나 죽자 하고 앙심먹고
덤비는데도 영 잘되지를 않아. 그런 말 있지 왜. 독어는 울고 들어갔다
웃고 나오고, 영어는 웃고 들어갔다 울고 나온다고. 난 아무래도 울다가
끝날 것 같애."
정남희는 정말 울상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 우리가 영어는 중학교 때부터 배웠고, 독어는 처음 대
하는 것이라서 그래. 그러고, 너하고 나하고 좀 차이가 나는 건 나는 서
울에서 학원에 다녔고 넌 안 다녀서 그런 거야. 지금이 고비니까 어려워
하지 말고 치를 악물어. 우리보다 1-2년씩 먼저 와서도 독일말 잘 못하
는 나이 많은 간호원들 봐. 얼마나 구박받고 궂은일만 하고 그러니. 사
람끼리는 말이 통해야 하는 게 첫짼데, 우리 직업은 특히 그렇잖아. 그
러니까 밤낮으로, 꿈에서도 독일말만 생각해. 백 번 외워서 머리에 안
들어갈 단어는 없으니까."
김광자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보니까 정남희의 머리
가 과히 좋은 것 같지 않았고 독일어를 포기해 버리면 그녀가 어찌 될
것인지 무척 걱정스러웠다.
"어머, 넌 한 단어를 100번씩도 외우니?"
"그럼 어떡해 안 되면 200번도 해야지. 난 단어 외우는 것보다 발음
이 제대로 안 돼서 속 썩이는데, 발음이 독일사람들처럼 될 때까지 한
단어를 하루 종일 속으로 연습한 적도 있어. 한국에서 배운 발음은 거의
가 엉터리니까."
"하루 종일? 그럼 그게 몇 번이야?"
정남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몰라, 아마 수백 번은 넘을 거야. 혀가 제대로 소리를 낼 때까지 계속
하는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구."
"어머 얘, 너 보기하고는 다르게 독하구나. 나도 그러면 될까?"
정남희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가난해서 타국생활 하는 것도 서러운데 말 잘 못
해서 천대받아 봐. 그것처럼 서러운 게 어디 있겠어. 결심 단단히 해."
김광자는 정색을 하고 정남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았어 . 나도 그렇게 해볼게 근데 말야, 여기서 배겨내지 못하고 돌
아가는 여자들도 있다는데, 그게 말을 못 익혀서 그러는 걸까?"
"글쎄, 꼭 말 때문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 잘 안 통해서 당하는 불편이나 고통 같은 게 하나의 이유는 될 수
가 있겠지."
"그래, 그럴 거야. 정신병에 걸려 쫓겨갔다는 말을 들으면 으스스 떨
려. 이것저것 얼마나 힘들었으면 정신병이 다 걸렸겠어 글쎄. 신세 좋아
지려고 왔다가 신세 더 망쳤으니 그 집안이 어찌 됐겠어. 보나마나 빚지
고 왔을 텐데. 나 정신 바짝 차려야지."
정남희는 어깨를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간호원들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독일에 도착해서도 돈을
얼마나 쓰고 왔느냐고 서로서로 눈치 보아가며 묻고는 했다. 광부가 그
렇듯 간호원들도 뒷돈질을 하지 않고서는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고, 가
난한 살림에 그 돈은 다 빚을 내야 했다.
김광자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 강기수 의원에게 더욱 감사하고 있
었다. 국회의원 빽은 남녀를 서로 뒤바꾸는 것만 빼고는 못할 일이 없다
고 하더니 과연 그 위력은 대단했다. 강 의원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고
비서가 몇 군데 전화를 하는 것으로 거침없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던 것
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돈 없고 빽 없는 놈들은 시체라는, 세상을 떠
도는 말이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괜히 그런 우울한 생각하지 말고 힘내, 며칠 안 있으면 본격적으로
일 시작하게 될 건데."
김광자는 묵직하게 늘어진 가방을 왼쪽 어깨로 바꿔 멧다. 어깨에 쌓
였던 눈송이들이 떨어져 날리며 눈발에 섞였다.
"차암, 우린 언제 저런 멋진 집에서 사람답게 살아보니. 독일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워."
길게 한숨을 쉬는 정남희의 눈길은 무수한 눈송이들이 어지럽도록 현
란하게 춤추고 있는 저 멀리로 가 있었다.
"그래, 사람답게 산다는 게 뭔지 독일에 와서 알았어. 솔직하게 말하
자면, 서너 달 동안 살아본 것만으로도 독일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에 비해서."
"너도 그런 생각했니? 틀림없이 천국이지. 세상에, 공부시켜 주면서
돈까지 주는 나라가 어딨니? 우리나라 같았어 봐. 꿈도 못 꿀 일이지.
얘기가 나온 김에 나 창피스러운 얘기 하나 할까?"
정남희가 김광자를 쳐다보며 쑥스럽게 웃었고, 김광자는 무슨 얘기냐
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흉보지 말어?"
"흉은, 우리 사이에."
"글쎄 있잖아, 첫 달 공부를 끝내고 생각지도 못한 월급을 받고 얼마
나 놀라고 좋았는지 몰라.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는 거야. 그래서 한국
돈으로 얼마나 되는지 계산을 해봤지. 근데 글쎄 통닭 600마리 값이더라
니까, 600마리. 그러니까 말야, 이 삼은 육, 하루에 통닭 스무 마리 값을
쳐준 거라구 그 계산을 하고 나니까 얼마나 통닭이 먹고 싶던지. 그래서
다음날부터 여기저기 통닭을 찾아나섰지. 근데 독일엔 한국에서 유행하
기 시작한 그런 통닭이 없는 거야, 글쎄. 난 서울에 있을 때 그렇게 통닭
이 먹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 돈을 몽땅 집으로 보내면서 온 식구가 배가
터지도록 통닭을 사먹으라고 편지를 썼어. 내 몫까지 다 말야."
목소리가 잠겨든 정남희는 손등으로 두 눈을 번갈아가며 훔쳤다.
"그랬었구나. 참 잘했다. 나도 서울에서 통닭이 먹고 싶었지만 결국
못 먹었어."
김광자는 정남희의 팔을 꼭 잡았다. 자신은 통닭 대신 쌀 몇 가마가
되는지를 계산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독일어 학원만 다니면서 돈까
지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공부가 끝나고 병원에 돌아오면 환자
복 세탁이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꼬박꼬박 했다. 그 노동의 대가로 병
원 측에서는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고, 독일어 교육은 하루빨리 실용가
치를 높이기 위해서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들로서는 그 정도의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네댓
살의 계집애가 식모살이를 하면 겨우 입이나 얻어먹고, 성인이 식모살
이를 해도 월급이 쥐꼬리만한 한국 현실에 그녀들은 너무 익숙해져 있
었던 것이다.
"그래, 통닭 먹어본 사람들보다 못 먹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거야.
세상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근데 얘기 나온 김에 창피스런 얘
기 하나 더 해도 될까?"
김광자는 정남희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말야, 독일에 와서 신기한 게 한둘이 아니지만, 제일 놀라고 신기
했던 게 뜨거운 물, 찬물이 조정하는 대로 섞여 나오는 샤워였어. 그 샤
워를 아침저녁으로 틀어놓고 맘껏 몸을 씻는 게 꼭 꿈만 같애. 우리가
어디 자주 목욕을 하고 살았니?"
"그래, 나도 샤워기가 신기했는데, 더 신기했던 건 빵 굽는 토스터였어."
"맞아, 맞아. 빵이 다 구워져 자동으로 톡 솟아오르는 것이라니! 그러
고 보면 냉장고, 세탁기, 그릇 씻는 기계, 신기하고 부러운 게 너무 많지
뭐. 독일사람들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 사는 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독일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잘살지?"
"그러게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했다고 하잖아."
"그래. 근데 그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그 말을 귀아
프게 들으면서 독일에 왔는데 한강보다 좁고 별것 아닌 저 라인강이 무
슨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인지 난 그 뜻을 모르겠어. 석탄이나 짐 실은
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인데 말야. 우리나라에서 막 써먹는 '한강의
기적'도 그 말에서 따온 거라며?"
정남희는 의문 담긴 눈길로 김광자를 쳐다보았다. 스카프에 싸인 그
녀의 볼이 추위에 발갛게 얼어 있었다.
"응, 그건 라인강이 독일을 상징할 만큼 길고 큰 강이니까 그냥 '독일
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멋지고 근사하게 표현하느라고 그렇게 말
한 거지 뭐. 그게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2차대전에서 패한 독일
이 잿더미 위에서 다시 오늘날처럼 잘살게 경제부흥을 일으킨 건 기적이
라는 뜻인데, 그건 바로 독일인들이 일으킨 기적이라는 말 아니겠어."
"그래 글쎄, '독일인의 기적'이라고 쉽게 말하면 될 것이지 괜히 빙빙
돌려서 말하니까 나 같이 무식한 것들은 어리뻥뻥하고 헷갈리고 그러잖
아. 근데, 독일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한강의 기적'이 일어날까?"
"글쎄 ..... 누구나 잘살아 보려고 애들을 쓰고 있고 ..... 우리 같은
여자들도 이렇게 외국에 나와 돈을 벌어 보내고 하는데 ..... 잘살게 돼
야 할 텐데 어찌 될지 알 수가 있겠니."
"우리 잘살긴 틀린 것 같애.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서독 몰래 사람
들 마구 잡아가 서독하고 우리나라하고 사이가 나빠졌다면서? 광부고
간호원이고 더 못 오게 될지 모른다고 언니들이 걱정하고 있잖아. 서독
이 우릴 도와주고 있는데 왜 서독 비위를 건드리고 그러는 거니?"
"글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난 어떤 광부가 했다는 말을 들으면 잠
이 안 와."
"잠이? 왜, 무슨 말인데?"
정남희의 눈이 커졌다.
"응, 서독에서는 잡아간 사람들을 무조건 석방해서 서독으로 돌려보
내라 하고, 우리나라에선 그 말을 안 듣고 하는데, 그렇게 계속 사이가
나빠지다간 서독에서 광부고 간호원이고 다 한국으로 보내버릴지도 모
른다는 거야."
"아니, 뭐, 뭐라구?"
정남희는 걸음을 뚝 멈추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스카프 위에 내려앉
았던 눈송이들이 흩어져 날렸다.
"어머 왜 그리 놀라고 그러니? 당장 내쫓기는 것도 아닌데."
"안 돼, 안 돼, 그리 되면 우리 집은 쫄딱 망해. 나, 20만 원이나 들이
고 비행기 탄 건데, 그게 다 빚이라구, 빚."
정남희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뒷돈 쓴 것을 실토하고 있
었다. 20만 원이면 쌀40가마가 넘는 거액이었다. 그리 큰돈들을 써야
했는가..... 생각하며 김광자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정남희를 바라보았
다. 정남희의 눈에는 눈물마저 그렁그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마 그렇게까지는 안 될 거야. 왜냐면 서독이 우
리나라 광부나 간호원들을 불러들인 건 이 사람들이 뭐 특별히 마음이
좋아서 우리한테 인심쓰는 게 아니니까. 자기네 일손이 부족해서 당장
우리가 필요한 형편인데 그런 일을 저지르진 못할 거야. 사이가 정 나빠
지면 더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난
믿어."
김광자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힘주어 말했다. 그건 정남희만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게 정말 그럴까?"
"그럼 당연하지.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원들이 일 잘한다고 독일사람
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나 있잖아. 근데 우릴 내쫓아봐. 손해 보는 건 자
기네 독일이거든."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어쨌거나 제발 그런 일은 벌어지지 말아
야 해, 우리들 신세가 어찌 되겠어."
"너무 걱정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할 생각하자. 우리가 살길은 그것밖에
없잖아."
"그래, 나도 독일어 열심히 할 거야."
그들은 서로 눈길을 나누며 병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얼크러지고
설크러지고 휘돌고 맴돌며 황홀한 군무를 추고 있는 무수한 눈송
이들 저편으로 병원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3개월 동안의 독일어 교육이 끝나면서 김광자와 정남희
의 병원 근무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근무는 아침 6시부터 여덟 시간씩
3교대였다. 김광자는 오전근무에, 정남희는 오후근무에 배치되었다.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몰라.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정남희는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뭐가? 근무시간 땜에?"
김광자는 얼른 정남희의 마음을 짚었다.
"차암, 눈치 빠르기는. 오전근무가 되기를 바랐는데 글쎄 ....."
정남희는 무거운 손놀림으로 감자를 찍으며 전혀 식욕 없는 얼굴이
었다.
"왜, 따로 또 돈벌이하려고? 그럼 나하고 바꾸면 되지 뭐."
김광자는 한시라도 빨리 정남희의 근심을 덜어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넌 아르바이트 안 해?"
문득 정남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응, 난 동생들도 많지 않고, 너처럼 정식으로 간호학교를 나오지 않
아서 병원 일만 잘하기에도 벅차거든."
김광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정남희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얼른 둘러댔다.
"근데, 의사들이 말을 들어줄까?"
"그럼, 독일사람들은 논리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말이면 다 들어준대
잖아."
"그렇지만 아르바이트 때문이라고 할 순 없잖아. 그건 눈치껏 하는 일
인데."
"그야 그렇지. 어쨌든 나한테 맡겨."
3교대 근무에서 한국 간호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야간근무였
다. 야간근무는 고된 만큼 야근수당이 따로 나오는데다가, 3주를 근무
하면 2주간의 휴가까지 주었다. 그 기간에 딴 병원에 가서 일하면 또 돈
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야간근무는 독일에 먼저 온 고참들의 차지였
고, 병원 쪽에서도 경험자들을 우선 배치했다. 그 다음의 인기가 오전근
무였다. 오후2시에 근무가 끝나면 곧바로 꽃집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
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아르바이트는 시간당 5마르크였고, 한국 간호원
들은 다투어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김광자는 정남희와 함께 의사를 찾아갔다. 자신은 아침잠이 많아 오
전근무가 곤란하니 오후로 바꿔달라고 했다. 양쪽 의사는 그들에게 근
무시간을 서로 바꿀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는 이내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광자야, 너무나 고마워. 나 이 은혜 꼭 갚을게."
정남희는 김광자의 손을 싸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얘는, 은혜는 무슨 하여튼 돈벌이도 좋지만 몸 상하지 않게 해야 해."
자신도 돈욕심이 안 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김광자는 속으로 딴 욕
심을 다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돈벌이하는 시간에 자신은 공부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앞서 독일에 온 간호원들 중에서 3년 계약기간을 끝내고 의대에 진학
한 사람이 서넛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광자는 눈앞이 확 밝
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도 의사가 되자! 그 욕구는 좌절되어 버린
선생의 꿈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꿈은 오직 돈벌이를
위해 모국을 떠나왔다는, 조금은 서글프고 무언가 암울한 감정을 일거
에 뒤집는 빛이고 희망이었다. 오빠에게 꼭 복수하고 말리라! 의사가 되
려는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
이제 그 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가슴 깊이 박
힌 새 삶의 기둥이었다. 공부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면 학비가 거의 무
료나 마찬가지인 서독의 교육제도를 알고 나서부터 그 꿈은 더욱 바윗
덩이로 단단해졌다. 3년 동안 매달 월급에서 최소한의 숙식비를 떼내
저금해 나가면 집안을 돕고, 의대 공부도 할 수 있는 두 가지 목적을 모
두 이루어나갈 기막힌 기회였다.
정남희는 병원 식당의 독일 음식에 질려 진작부터 밥을 따로 해먹자
고 성화였다. 먼저 와 있던 여섯 명이 둘씩 짝지어 김치를 담가 밥을 해
먹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밥에 김치며 된장찌개를 먹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했다.
그러나 그건 식당에서 먹는 것에 비해 너무 큰 돈 낭비고, 시간 낭비
였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오래 독일살이를 하려면 어차피 독일 음식을
입에 익혀야 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될 그런 고역쯤 얼마든지 달게 치
를 자신이 서 있었다.
김광자와 정남희가 배치된 곳은 노인네들의 치매병동이었다.
"각오 단단히들 하라구 거긴 지옥이니까. 신참들은 거길 거쳐야 간호
원 인생이 뭔지 안다구."
서울 어느 종합병원에서 수간호원을 했다는 이정옥이 자신의 경력을
과시하듯 말했다. 마흔이 넘은 그 여자는 자신의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
는 것에 늘 불평을 털어놓았고, 서로 평간호원이면서도 한국 간호원들
에게 군림하려고 해서 모두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그 여자는 남자
들이 흔히 쓰는 어투인 '내가왕년에.....' 하는 말을 곧잘 해서 별명이
'왕년'이었다. 독일 병원에서는 한국에서의 경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모두 평간호원으로 출발시켜 그 능력을 평가하고 있었다.
정남희는 첫 근무를 시작하기 30분 전에 간호원 휴게실로 갔다.
"아, 정 간호원,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간호원인 독일 여자가 상냥하게 웃으며 정남희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정남희는 간단하게 인사하고 빈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긴장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첫 근무인데다가
독일사람과 말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먼저 와 있던 독일 간호원 둘은 마치 무슨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입맛까지 다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남희는 그들을 곁눈질하며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간에 보아온 것으로는 담배를 안 피우
는 간호원보다 피우는 간호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나이가 많고, 노처녀라는 점이었다.
"딴 좋은 직업들이 많아 젊은 여자들은 간호원 생활을 안 하려고 한대
잖아. 그 덕에 우리가 여기 온 거지 뭐."
김광자의 말이었다.
그런데, 왜 노처녀로 늙어가는 것일까? 남자들이 간호원을 싫어하는
것인가? 또, 담배들은 왜 저리 피워댈까? 노처녀 신세가 속상해 그러는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했다.
간호원 두 명이 더 오자 수간호원이 끓이고 있던 커피를 잔마다 손수
따라나갔다. 그리고 간호윈들에게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정남희는 너
무 놀랍고도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찌해야 옳은 것인지 몰라 이쪽저쪽 눈
치만 살피고 있었다. 수간호원이 아래 간호원들에게 손수 커피를 끓여
주다니 .....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
운 것은 아래 간호원들이 미안한 기색 같은 것 전혀 없이 태연하게 커피
잔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커피잔을 받으면서 그들은 당케 쉔(고맙습니
다) 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서양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늘 입에 달고
사는 몇 마디 중의 하나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정 간호원, 오늘부터 우리하고 함께 일하게 돼서 반가워요. 앞으로
일하면서 모르는 것은 그때그때 묻도록 하세요. 물론 새 일을 시작할 때
는 미리 가르쳐줄 테니까 걱정할 것 없고요."
수간호원이 웃음 넘치는 얼굴로 정남희를 바라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정남희는 잔뜩 긴장한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수간호원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 채 무슨 인사말이겠거니 짐작했다.
"여러분도 그동안 겪어봐서 알겠지만 한국 간호원들은 열심이고 성실
하고 영리해서 일에 아주 빨리 숙달돼요. 그들이 가진 약점이라면 우리
독일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에요. 그럴수록 여러분은 일을 친절하
게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건 그들을 위하기 이전에 우리 독일과 독일 환
자를 위해섭니다. 이 정 간호원도 특별히 뽑혀온 사람이니까 전 사람들
처럼 일을 잘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녀를 친절하게 도와주기 바랍니다."
수간호원이 아까 정남희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네 간호원을 둘러보며
진지하고 엄한 얼굴로 말했다.
근무교대 시간에 정확하게 맞추어 그들은 병실로 들어갔다. 수간호원
의 손짓에 따라 정남희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앞서 여기서 일한 한국 간호원들에게 대강 이야기 들었겠지만, 여기
서 할 일을 지금부터 설명하겠어요. 이쪽으로 와요. 여기에 침대 시트가
있어요. 자아, 여긴 환자복이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자아, 여기가 화
장실과 샤워장이에요."
수간호원은 말에 따라 손짓을 하고 문을 열고 해서 일일이 확인시켰
다. 정남희는 미리 치매병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게 무
슨 뜻인지 쉽게 이해했다.
"치매환자들은 손수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간호원이 밥을
먹여야 해요."
수간호원은 환자에게 밥 먹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남희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 였다.
"또 대소변을 스스로 가릴 수가 없어요. 그 일도 간호원이 미리미리
시간 맞추어 화장실로 데려가야 해요."
수간호원은 환자를 부축해 침대에서 내리는 시늉을 하고, 그 다음에
정남희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치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하의를 끌어
내리는 손짓을 하고는 정남희를 변기에 앉히며 알겠느냐는 표정을 지었
다. 정남희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가장 어려운 일이 있어요. 아무리 미리미리 살핀다고 해도
환자가 많고, 딴 일도 생기고 해서 환자들이 대소변을 그냥 옷에 싸버리
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요. 그때는 환자를 화장실로 옮겨 옷을 다 벗기
고 샤워를 시켜야 하고, 침대 시트를 갈고, 다시 새 옷을 입혀 침대에 눕
혀야 해요."
수간호원은 말이 바필 때마다 정확한 동작으로 말뜻을 표현했다. 정
남희는 그 동작만으로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
듣고 있었다.
"자아, 그럼 일 열심히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요."
가벼운 손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수간호원에게 정남희는 고개를 꾸벅
했다.
정남희는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켜며 자기 자신에게 환기시켰다. 절대로
옷에 똥오줌을 싸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건 일이 몇 배로 힘들어지는
고역일 것이 뻔했다.
옷에 싼 똥을 치우고, 똥 묻은 몸을 씻겨야 하고.....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정남희는 진저리를 쳤다.
그녀는 미리미리 똥오줌을 뉘어야 한다는 단 하나뿐인 방법을 어서
실천에 옮기려고 첫 번째 침대로 다가갔다. 머리가 하얗고 살이 많이 찐
남자 노인은 눈을 번히 뜨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큰 눈이 초점 없이
멍하고 텅 빈 것처럼 공허해 보였다.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
식들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하고 소변보러 가세요."
독일말을 할 수 없는 정남희는 한국말로 하며 노인의 팔을 흔들었다.
노인은 눈을 껌벅거리며 정남희를 이윽히 쳐다보더니 거부의 몸짓을
지었다.
"자아, 내려오세요. 부축해 드릴 테니까. 옷에 싸면 안 되잖아요."
정남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아까 수간호원이 시범을 보인 것처럼 노인
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었다. 그러자 노인은 거센 힘으로 팔을 뿌리쳤
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힘에 밀려 약간 비틀거렸다.
독일말이 아니라서 그런가? 얼굴이 낯설어서 그런가? 대소변이 안 마
려워서 그런가?
이런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가며 정남희는 난감해졌다. 싫어하는 사람
을 억지로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옆 침대로 옮겨갔다. 얼굴만 다를 뿐 그 환자도 눈동자가
풀리고 몸이 뚱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
노인은 정남희에게 의지해 순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머 !"
정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노인의 몸무게에 눌려 무릎이
휘청하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녀의 몸에 비해 노인의 몸은 두 배
는 더 커 보였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노인의 몸을 떠받치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인은 화장실 앞에서 더는 걸음을 옮겨놓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옷에 싸면 안 되잖아요. 들어가세요, 네?"
정남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노인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노인은 완강
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는, 근무교대
를 하면서 전 간호원이 대소변 처리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언
뜻 했다.
"네에, 돌아가세요. 억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정남희는 다시 노인을 부축하며 가자는 손짓을 했다.
노인의 큰 몸집은 불안정한 걸음걸이와 함께 축 처져 있었다. 그 몸을
떠받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기가 힘에 벅찼다. 그런데 노인은 침
대 앞에 이르러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정남희는
노인을 침대에 걸터앉히고 낑낑거리며 두 다리를 받쳐 올렸다. 가까스
로 노인을 침대에 눕히고 나자 숨이 가쁘고 진땀이 났다. 정남희는 이마
를 훔치고 긴 숨을 내쉬며 암담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일은 보호자나 간병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독일이었다. 정남희는 가난한 집안과 큰 빚을 생각하
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큰돈
을 벌어 돌아오겠다고 결심하면서 비행기를 탔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정남희는 아르바이트는 우선 제쳐두고 병실에서 필요한 독일어를 어
서 빨리 익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말이 안 통해서는 환자 간
호가 훨씬 어려울 거라는 실감이 났다. 그런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해야
미리 대소변을 가릴 수 있게 하는 것인지 답답해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한 노인이 침대에서 내려서며 비틀거렸다. 아, 변소에 가고 싶
은가 부다! 정남희는 그쪽으로 내달았다.
그 노인 앞으로 급히 다가서던 그녀는 주춤했다. 쿠린내가 나는 것 같
았다. 설마 하며 그녀는 코를 가까이 댔다. 역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엄마, 어떡해 난 몰라."
그녀는 울상이 되며 발을 굴렀다.
그런데 노인은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정남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노인을 부축했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고, 안으
로 접혀 들어간 위아랫입술이 안 보일 정도로 꼭 물려 있었다.
정남희는 노인을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다음을 어찌해야 좋
을지 몰라 또 눈을 질끈 감았다. 옷을 벗기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
고..... 그 순서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난감한 일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눈
을 떴다. 악취는 계속 풍기는데 노인은 희멀겋게 웃고 있었다. 이걸 못 해
내면 맨주먹으로 쫓겨가야 해. 그 많은 비행기 요금까지 빚이 되면.....
그녀는 입술을 물며 노인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으악!
그녀는 질겁을 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심한 악취와 함께 눈앞에
불쑥 드러난 것. 성인 남자의 그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정면으로. 기껏 보았어야 젖먹이들의 꼬치였고, 의학서적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러나 실물의 흉물스러움과 당혹감에 그녀는 혼비
백산했다 그것도 외국 남자의 그것이었다.
엄마, 엄마, 나 어떡해 .....
"각오 단단히들 하라구. 거긴 지옥이니까. 신참들은 거길 거쳐야 간호
원 인생이 뭔지 안다구."
선배 간호원 이정옥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해낼 수 있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정남희는 이를 맞물며 눈을 부릅떴다. 노인의 아랫도리를 다시 살펴
본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침대에 누워서 싼똥은 엉덩이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의 아래까지 맥질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진동하는 악취로 속
이 메스꺼운 것을 참아내며 바지를 노인의 발목에서 완전히 벗겨냈다.
그리고 노인을 샤워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샤워를 가장 세게 틀어 물줄기를 노인의 하체에 들이댔다. 거
센 물줄기의 힘으로 똥이 씻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겉에 붙은
것일 뿐이고 살갗에 짓뭉개져 있는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줄기를
오래 들이대도 소용이 없었다. 똥을 완전히 씻어내려면 천상 손으로 문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나 죽을 것 같애.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정남희는 또다시 진저리를 쳤다. 속이 더 심하게 메슥거리며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수만 리 밖에 있었고 여기는 자기 혼자뿐이
었다.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니다.
정남희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이를 맞물었다. 그리고 손에 마구 비
누칠을 했다. 물줄기가 쏟아지는 샤워기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을 노인
의 엉덩이로 가져가며 그녀는 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손을 마구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난 악착같이 이겨낼 거야. 난 꼭 해내고 말 거야. 누구처럼 미쳐서 갈
수는 없어. 난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난..... 난.....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 그녀의 꼭 감긴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어져 나
오고 있었다.
노인의 살찐 엉덩이 사이로 디밀어진 그녀의 손은 항문까지 닦아내고
앞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노인의 그것
아래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웩 소리를 토하며 주저앉
았다.
"우웩 ! 웩! 우웩!"
그녀는 가슴을 끌어안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샤
워기가 내뿜는 물줄기가 마음대로 그녀의 가운을 적시고 있었다.
"우웩! 우웨엑!"
그녀는 소리를 토할 때마다 상체를 들썩이며 눈물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아니 왜 그래요, 정 간호원?"
수간호원이 급히 화장실로 들어왔다.
정남희는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 비누칠까진 다 했군요. 어려운 일을 참 잘해 냈어요. 괜찮아요, 괜
찮아요. 첨엔 다 그래요. 특히 순결한 한국 처녀들의 마음 잘 이해해요."
수간호원이 정남희의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거렸다.
정남희는 수간호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위로라는 것을 알았
다. 그 마음이 고마워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수간호원은 시범이라도 보이듯 환자를 씻기고, 큰 수건으로 몸을 닦
고, 옷을 갈아 입히고, 바지를 뒤집어 똥을 변기에 털어냈다. 그리고 가
운을 꺼내 정남희에게 주며 환하게 웃었다.
"당케 쉔, 당케 쉔. (대단히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남희는 자신도 모르게 독일말을 하며 두 번, 세 번 허리를 굽혔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정남희는 김광자를 찾아갔다.
"아니, 눈이 왜 그래? 많이 운 것 같은데?"
책을 보고 있던 김광자가 먼저 물었다.
"말도 마, 부끄러워서 말도 못해. 왜 하필 남자 환자들 방이 걸렸는지
몰라."
정남희는 입을 씰룩이며 눈을 훔쳤다. 아까와 다른 서러움이 일며 눈
물이 솟으려고 했다.
"옷에 변을 본 환자가 있었어?"
김광자는 무슨 일인지 금세 알아챘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어찌 그리 귀신이야?"
정남희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신이기는. 먼저 일한 선배 간호원들 말 다 들었잖아. 특히 이정옥
씨 말 듣고 나도 남자 환자들을 어떻게 대할지 걱정되고, 마음 단단히
먹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글쎄, 그게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구. 글쎄, 나도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글쎄 막상 딱 당하니까 글쎄,눈앞이 캄캄해지고 죽을 것 같은
게 글쎄, 막 눈물이 쏟아지고 구역질이 나는데 글쎄 말로 할 수가 없는
게 글쎄 ....."
정남희는 연달아 나오는 '글쎄'에 맞추어 두 손을 맞비비다가, 가운에
문지르다가, 냄새를 맡다가 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고 있었다.
"왜 안 그렇겠어. 그렇지만 결국 그 일을 해냈잖아?"
"으응....."
정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럼 됐어. 큰 고비를 넘긴 거야. 왜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게 있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너는 이제 해방됐으니 얼마나 좋아. 난 앞으
로 당해야 하는데. 네가 부럽다. 가, 밥 먹으러."
"아니야, 아니야, 나 밥 못 먹어 지금도 구역질 나."
정남희는 입을 막고 돌아서며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이것도 이겨내야 해 밥을 굶고 어떻게 힘든 일을 하겠어. 여기까지
와서 그까짓 것 못 이겨내면 안 되잖아."
김광자는 정남희의 등을 다근다근 두들기며 좀 싸늘하다 싶게 말했다.
"너는 밥 먹을 자신 있어?"
정남희는 눈물 어린 눈으로 김광자를 쳐다보았다.
"우리한테 자신이 있고 없고가 어딨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낭떠러지
에 서 있는데."
"그래 ..... 그렇지, 낭떠러지지. 누구나 그렇지. 알았어, 가."
정남희는 외롭고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김광자는 식당으로 가며 어쩔 수 없이 이동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
신을 속여 남자를 경험하게 하고, 잊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자
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남자. 그의 덕으로 자신은 정남희처럼 고통스럽
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속웃음을 쓰게 웃고 있었다.
김광자는 이정옥의 말마따나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간호원 인생을 시작
했지만 치매병동은 역시 지옥이었다.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
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노인네들은 대소변도 가릴 줄 몰랐다. 노인네
들은 그저 먹는 것만 밝히면서도 스스로 식사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니
일일이 음식을 먹여야 하고, 옷을 입혀야 하고, 돌아가면서 대소변 수발
을 해야 하고, 아무리 재빠르게 부지런히 움직여도 옷에다 똥오줌을 싸
버리는 노인네가 생기고, 그럼 목욕을 시키고 옷을 다시 갈아입혀야 하
고..... 궂은일은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독일은 한국하고는 너무 달라. 한국에서는 가족들이 하는 더러운 일
들을 여기선 간호원들이 다 떠맡아하니 말야. 가족들은 코빼기도 안 비
치고, 내가 간호원인지 똥 치다꺼리 하는 몸종인지 모르겠어."
정남희의 탄식이었다.
"힘내, 그래도 정신병동보다 낫대잖아. 언제까지고 여기 근무하는 것
도 아니니까."
김광자는 이 말을 분명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서도 정
남희가 느끼는 것과 다름없는 회의와 실망이 엇갈리고 있었다.
"넌 어쩌면 그렇게 맨날 어른 같니? 기분 나쁘게."
정남희는 입이 뽀로통해져 눈을 흘겼다.
"그럼 어쩌겠니. 여긴 독일이니까 독일식을 따라야지. 어쩌면 한국식
이 잘못됐는지도 몰라. 언제 나을지도 모를 환자한테 가족들이 매달려
할 일도 못하면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할 일 제대로 하면서 세금 많이 내
고, 모든 걸 병원이 맡아서 하는 게 말야. 독일 간호원들도 다 하는 일이
니까 참고 견디자. 괜히 돈 많이 주는 것 아니잖아."
김광자는 정남희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냈다.
"그래, 돈 앞에서 할말 없지 뭐."
정남희의 풀죽은 대꾸였다.
"남희야, 너 교회 안 나갈래?"
"교회.....?"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정남희는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응, 닥터 한스가 하는 말이, 일을 쉽고 즐겁게 하려면 신앙을 가져보
라는 거야. 간호윈을 왜 '백의의 천사'라고 하느냐 하면, 간호원은 환자
들을 대하는 데 마음속에다 천사와 같은 사랑을 간직해야 한다는 거야.
그냥 의무와 책임으로만 일을 하면 일이 힘들고 괴롭지만, 천사 같은 사
랑의 마음으로 하면 쉽고 즐거워진다는 거지. 예수를 믿으며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래서 그런
지 닥터 한스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한 번도 없이
언제나 웃고 다정해. 꼭 친부모 대하는 것같이."
"어머, 얘, 너 그런 어려운 말을 다 알아들었단 말야?"
정남희의 관심은 엉뚱한 데로 튀고 있었다.
"다 알아듣기는, 대충대충 그런 뜻으로 짐작을 한 거지."
김광자는 꿀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런 말을 대충 짐작이라도 하는 네가 부럽다." 정남희는 가는 한숨
을 쉬고는 "그래, 힘든 일이 쉬워진다면 나가보지 뭐." 그녀는 지친 얼
굴만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광자는 똥을 치우며 비위가 상하고, 한 사람의 옷을 두 번씩 갈아입
히면서 짜증이 날 때마다. 내 부모라고 생각하자, 내 부모라고 생각하
자, 하며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애썼다. 그런데 닥터 한스의 말을 듣고는
언젠가 보았던 나환자촌의 수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외국인 수녀는
한국의 나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면서 더없이 정겹고 포근한 모습이었
다. 그 수녀는 아무 보수도 없이 그저 봉사하는 것이었고, 자신은 한국
에 있는 간호원들보다 열 배가 넘는 엄청난 돈을 받고 있었다. 그 수녀
가 간직하고 있을 천사의 마음을 배우려고 교회에 나가고 싶었다.
김광자로서는 옷에 싼 똥을 치우는 것 못지않게 고역스러운 것이 살
찐 노인네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살찐 노인네들은 노망기로 몸까지 늘
어져 있어서 무겁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침대에서 굴리듯
하며 옷을 갈아입히고, 샤워장으로 부축해 가고 하면서 김광자는 힘이
달려 낑낑매야 했다.
"엄살들 떨지 마, 아직 멀었으니까. 허리 디스크에 걸리고, 손가락 인대
가늘어나고 해봐야 제맛을 아는 거니까 괜히 고참 되는 것 아니라구."
이정옥의 밉살맞은 말이었다.
"아이구 얄미워. 고참 좋아하고 있네. 저건 여군이나 되지 왜 간호원
이 됐나 몰라. 저 여잘 보면 소화가 안 돼."
정남희가 성깔을 부렸다.
일요일 아침에 한국 간호원들은 기숙사의 휴게실에 모여 앉아 모처럼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찌르릉, 찌르릉, 초인종이 울렸다.
"또 피아노 쳐대네."
이정옥의 말에 그녀들은 쿡쿡거리며 창가로 몰려갔다. '피아노 친다'
는 것은 간호원들을 찾아다니며 기숙사의 초인종을 누른다는 광부들의
말이었다.
꽃을 찾아온 벌 셋이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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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강
한 강 = 제 2 부 유형시대 (5권)ㅡㅡㅡ 25. 고향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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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2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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