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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 민속축제의 지향’에 대한 기조강연뒤 김덕진 광주교대교수가 ‘조운과 경강상인의 활동으로 본 법성포단오제’를, 국립박물관 오창현 박사는 ‘일제시기 어업근거지 파시의 전개과정’을, 나경수 전남교수는 ‘법성포단오제의 무형문화재로의 가치’를 발표했다.
이어 임돈희 교수의 진행으로 김동수(전남대교수) 이태호(이천시립박물관) 전경욱(고려대)교수 등이 함께해 무형문화재 지정을 강조했다. 본지는 주제발표를 요약 게재한다<편집자 주>
한국 전통 민속축제의 지향
서 연 호 (고려대 명예교수)
우리는 19세기까지 비교적 건전한 민속축제를 발전, 계승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민속축제를 부활시키려는 법성포와 김해, 전곡 같은 지역이 있다. 왜 부활시키려 하는가. 이에 대한 학술적 정의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지만 자치의 역량이 점차 증대되고, 지역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축제의 부활, 재생, 복원의 의욕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성행, 난립하는 축제들을 정비, 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
△민속축제와 이벤트를 차별화해야 한다. 금산의 인삼제, 이천의 도자기축제 등은 대표적인 이벤트들이다. 한 마디로 민속축제는 농경어로축제이고 이벤트는 산업축제라고 할 수 있다. △전통축제와 국제행사를 차별화 해야 한다. 성격이 애매한 국제축제라는 행사들이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유행하고 있다. 하루 빨리 정화되어야 할 대상들이다. △지역의 축제위원회를 독자적인 재단법인으로 법제화, 전문화해야 한다. △모든 축제비용은 감사를 받고 공개되어야 한다. △주민의 전폭적인 참여를 이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른바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대폭 늘려야 한다. △지역별로 정통성과 개성을 갖추어야 한다. 전국 3백여개의 축제 내용이 유사하다. 그 지역에 가야 볼 수 있는 개성적인 종목들은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지역별로 각급 학교 및 대학 교육과 긴밀하게 연계되어야한다. 지역 축제야말로 지역 교육과 문화계승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지역별로 출향인들의 귀향 참여를 실현해야 한다. △지역별로 특산물 판매를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축제를 생각하면 일상적인 포장마차와 잡상인들이 즉시 연상될 정도로 지역적 개성을 찾아볼 수 없다.
유네스코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을 2006년 4월 발효해, 세계 116개국이 가입하고 있다. 이처럼 무형문화재가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미래의 다양성을 창조하는 기반이 된다는 사실에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동조, 동참하고 있다. 재론할 필요 없이, 무형문화재의 꽃은 축제이다. 축제의 진정성과 창조성을 실질적으로 살리는 것이야말로 미래에 대비하는 우리의 문화목표이다.
위쪽부터 시계방향 순
조운과 경강상인의 활동으로 본 법성포단오제
서연호, 김덕진, 나경수, 오창현
김덕진(광주교육대 교수)
전라도 익산 출신 소세양(1486~1562)이 법성포 누각에 올라 지은 시에 의하면 세곡운송 철에 주막에서 하루 파는 술이 만병이나 될 정도로 포구는 사람과 여흥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구절은 그로인해 법성포 사람들이 수군진으로서의 위치를 망각할 정도로 ‘승평악’에만 젖어 있다는 것이다.
법성포가 일상적 축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어선이 멀리 출항할 때에 안녕과 풍어를 비는 해신제가 열렸다. 그리고 조운선이 출항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운과 관련된 당이 많이 분포하고 있고, 이들 당은 각 군현별로 세곡을 경창으로 수송하기
에 앞서 해난사고를 막고 순풍이 불기를 기원하던 곳이었다.
2-30척이 출항하는 법성포의 축제는 그 어느 지역보다 성대하였을 것이다. 특히 법성진장이 만호에서 첨사로 승격되고 조운작업에서 첨사의 역할이 보조자에서 주무자로 변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조운선이 돌아오면 더 큰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무사 귀가를 축하하는 기회이자 조운선이 싣고 온 상품을 받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운선의 회선일이 사람의 마음대로 매년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오날 무렵에 내려오는 해가 적지 않았다. 이때 맞춰 직납읍 재운을 하는 경강선도 법성포를 지나갔다. 또 경상도 조운선도 이 무렵 지나가다 법성포에 들어왔다. 경강선과 영남 조운선이 법성포를 그냥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때가 굴비가 본격 출하되고 조선의 4대 명절의 하나인 단오날이었다. 자연스럽게 일상의 축제가 특별한 축제로 승화되어 법성단오제는 일정한 규식을 갖추게 되었다.
법성단오제는 현지 관권과 외지 물주의 합작으로 개최될 수밖에 없었으며, 한말부터 매년 오월오일이면 숲쟁이에서 판소리와 입창, 좌창, 땅재주(앞군도, 뒷군도, 자반뒤지기 등등), 줄타기, 그네 등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기예가 경연되어 여기에서 명창명인이 결정되고, 최고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일제시기 어업근거지 파시의 전개과정
오창현(국립민속박물관)
본래 ‘칠산바다’는 칠산에서 위도에 이르는 해역을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식민지 말에 이르면 흑산도에서 태안반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으로 확대된다. 칠산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는 어선-운반선-포구[법성포]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도서지역에서는 주로 일본인의 모선에 의해 일본내지로의 유통 방식으로 어물이 유통되었다. 본래 모선은 단체어선의 원선으로서 미리 작업선에 자금을 하고 그 어획물을 매수, 운반하여 시장에 판매하는 상가선이었다. 조선 어민들로부터 싼 가격에 어물을 구입해 염장한 뒤에 일본으로 운송했던 염장모선이 있다.
법성면에는 법성포 외에도 파시가 섰다고 말해지는 지역이 두 군데가 더 있다. 한 곳은 와탄교 주변의 와탄포이고, 다른 한 곳은 목랭기이다. 세 곳은 성격이 완전히 상이한, 어업관행을 보여준다. 법성포는 어장을 관리하는 행정소재지이면서, 내륙지방에서 모이는 미곡류, 면포류와 어물류가 교환되는 전라남도 지역 내의 광역시장이면서, 동시에 충청남도 지방과 교역권을 가진 전국적인 광역시장이기도 했다. 반면 와탄포는 조선 전래의 내포시장의 모습을 보여주며, 목랭기는 국외시장과 연결되는 어업종별어기 근거지였던 듯하다.
1960년대까지 ‘파시가 섰다고 말해지는’ 목랭기(항월리)에는 본래 일본인 이주어촌으로 계획되었던 곳이었다. 목랭기는 법성포와 달리 다수의 새우 건조장이 설치되었던 곳이고, 2~3척의 모선이 정박했던 곳이었다.
1919년에 위도면 대리에 설립되었던 어업조합은 1938년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로 이전한 다. 본 조합은 위도면, 낙월면, 법성면, 홍농면, 백수면, 염산면, 군남면 (상하 낙월도 본도는 제외)를 포괄하고 있었다. 위탁판매출장소는 (계마리, 위도, 안마도) 3개소에 두었는데, 특히 자건하가 외국과 거래되고 있으며, 전국에서 유명하다고 적고 있다.
법성포단오제의 무형문화재로서의 가치
나경수(전남대 교수)
법성포에 조창이 생긴 것은 고려 성종 11년(992년)이다. 조선조에 들어 중종 7년(1512년) 영산창이 폐지되고, 법성포창은 무려 28개 군현의 세곡을 보관, 운송을 관장하였다. 이와 같이 전라우도의 조세가 모이다보니, 조정에서는 방비 필요에 수군을 주둔시키면서 진성을 축조하고, 성의 방풍 내지 운치림으로 괴목을 심은 것이 오늘의 숲쟁이 이다
법성의 단오제는 이 숲쟁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법호견문기에 따르면 1850년대의 법성포단오제가 숲쟁이를 주무대로 하여 각종 축제 행사가 이루어졌다 기록했다. 조선조 중종 7년(1512년) 이후 조창의 확대에 따라, 법성포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특히 전국 13개 조창 중에서도 유일하게 법성조창에만 수군진을 설치했을 정도로 국가적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언제부터 법성포단오제가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법성포단오제의 역사는 조창이 확대되고 법성진이 완성된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보더라도 최소 지금부터 500여년 전까지 소급할 수 있다.
법성포단오제의 기원과 관련하여 ‘조운기원설’과 ‘파시기원설’ ‘난장기원설’의 세 종류의 구전이 전하고 있다. ‘조운기원설’은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조창을 열려고 할 때와 포구들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미를 수납하기 위하여 창촌을 열려고 할 때에는 미리 방을 내걸어서 잡류들을 엄금하여야 한다는 것.
‘파시기원설’은 법성포에 파시가 섰기 때문에 단오제가 생긴 듯하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영광군 산천조에 파시전이라는 항을 두어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조기가 나는 매년 봄이면 경외의 상선들이 모여들어 매매를 하는데 북적거리기가 서울 시장과 같았다는 것.
‘난장기원설’은 단오 때가 되면 무부(巫夫)들이 중심이 된 마을사람들이 걸립을 하고 유지, 선주 등의 기금을 모아 단오제를 지냈다고 한다. 법성포 현지의 객주, 유지들이 모금을 해서 난장을 텄는데 이것이 바로 법성포단오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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