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는 천손민족의 표시..중국보다 앞서'
|
태극기의 원리와 변천과정을 담은 책 <태극기> |
2005년 8월 15일 서울시청은 대형 태극기와 3600장의 소형 태극기로 온통 뒤덮였다. 광복 60돌을 맞아 기쁨을 표현한 일이었다. 그 태극기가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희망이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이는 태극기가 중국 것이고 뜻이 어려우니 도안을 바꾸자고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 정말 그럴까? 이에 태극기는 우리 것이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국기라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허정윤·반재원씨가 도서출판 한배달을 통해 내놓은 <태극기>가 그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img2005%2Farticle%2F00.gif)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down%2Fimages%2F1%2Fsol119_357051_1%5B612523%5D.jpg) |
|
|
|
ⓒ 도서출판 한배달 |
그는 말한다. '단군 조선 이전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13자의 진리인 신선도에 그 맥이 닿아있는 우리의 태극기와 우주 천문의 운행원리를 근원으로 하고 있는 한글이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서로 둘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시원사상이라는 하나의 나뭇가지에 열린 한 열매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태극도형이 중국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다. 주렴계는 송나라 신종 때 즉 우리나라 고려 문종 24년, 1070년경의 사람이다. 하지만 신라 때 세운 감은사(感恩寺) 석탑 장대석에 새겨진 태극도형은 682년으로 보아 주렴계의 태극도설보다 388년이 앞섰다는 것이다.
또 중국 주렴계의 음은 검정, 양은 흰색이며, 음양의 군역이 좌우 대칭으로 되어있고, 음양의 머리 부분에는 점이 있으며, 둘레에는 8괘가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태극무늬는 음은 청색, 양은 홍색으로 되어 있으며, 음양의 권역은 좌우 또는 위아래 대칭으로 되어 있고, 네 귀퉁이에 4괘를 배치한 것이 다르다.
그렇다면 태극기의 원리는 무엇일까? 글쓴이는 아주 간단한 원리라고 강조한다. 태극기는 음양의 생성원리와 이에 따르는 계절의 순환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down%2Fimages%2F1%2Fsol119_357051_1%5B612525%5D.jpg) |
|
▲ 감은사 석탑 장대석에 있는 태극무늬(왼쪽), 1328년 고려 충숙왕 15년에 창건한 회암사 석계 고형석의 ‘회돌이 태극’(오른쪽) |
|
ⓒ 반재원 |
|
태극기의 음이 가장 극성하여 양이 처음 생겨나는 때가 동지이고, 양의 기운이 점점 자라나 음과 양이 같아지는 때가 춘분이며, 역시 양이 가장 극성하여 음이 생겨나는 때가 하지이고, 음의 기운이 자라나 음양이 대등하게 되면 추분이라는 것이다. 태극기는 음과 양에 더하여 이에 맞게 괘를 그려 넣었다.
태극은 허공의 충만한 두 기운인 음기와 양기의 조건에 의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또 조건에 따라 다시 태극으로 돌아가는 자연현상의 순환원리를 표현한 도식이라고 것이다. 따라서 이런 태극무늬를 오랫동안 써온 우리 겨레는 천손민족임이 분명하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또 이 태극도의 원리와 한글의 원리는 같은 맥락임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down%2Fimages%2F1%2Fsol119_357051_1%5B612526%5D.jpg) |
|
▲ 원리에 맞게 그려진 태극기(바탕은 옥색이며, 음의 색은 검정, 괘도 양은 붉은 색 음은 검정색으로 했다.) |
|
ⓒ 도서출판 한배달 |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down%2Fimages%2F1%2Fsol119_357051_1%5B612527%5D.jpg) |
|
▲ 태극 괘와 한글 가운뎃소리와의 관계 |
|
ⓒ 도서출판 한배달 |
|
이런 태극기를 '25시'의 작가이며, 루마니아 그리스 정교회의 신부인 게오르규는 태극기송(頌)으로 찬양한다.
'한국의 국기는 유일하다. 어느 나라의 국기와도 닮지 않았다. 세계 모든 철학의 요약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거기에는 우주의 대질서, 인간의 조건과 살과 죽음의 모든 운명이 선, 점, 원, 붉은 색, 흰색, 그리고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현재의 태극기에는 원래의 것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 특히 태극의 빛깔이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되어 있는데 파란색은 원래 음색인 검정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도안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실제론 고종황제라고 말한다. 특히 1882년 10월 2일자 도쿄 일간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 제179호에 실린 다음의 기사는 태극기 제작 배경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본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down%2Fimages%2F1%2Fsol119_357051_1%5B612528%5D.jpg) |
|
▲ 고종황제가 태극기의 직접적인 도안자임을 드러내주는 도쿄의 시사신문 기사. 내용 중엔 고종의 태극기가 나온다. |
|
ⓒ 도서출판 한배달 |
|
'지금까지 조선에 국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를 청국의 국기를 모방하여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서 쓰도록 한 데 대하여 고종황제가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거절하면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도를 적색, 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괘를 붙여서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
이 책에는 태극기의 원리를 확인하고, 변천과 수정론 등을 살피는 것은 물론 한글의 원리에도 대입하고 있으며, 태극기와 제작 방법과 국기 게양법을 상세하게 다룬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국화인 무궁화와 애국가에 대한 얘기도 들려준다.
이 책은 글쓴이의 많은 노력 속에서 출간된 것이 분명하다. 특히 태극기의 원리에 대해 많은 참고 자료를 탐독하고, 깊은 숙고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도 약간의 옥에 티는 있다. 좀 더 쉽게 풀어주고, 컬러사진 자료들을 많이 덧붙였더라면 아주 훌륭한 책이 되었을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down%2Fimages%2F1%2Fsol119_357051_1%5B612531%5D.jpg) |
|
▲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기(음이 위에 있고, 검정색이다), 고종황제가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태극무늬가 회오리 모양), 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 '대한독립'이라고 쓴 안중근 태극기 (왼쪽부터 시계방향) |
|
ⓒ 김영조 |
|
우리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의 원리를 잘 모르고 있다. 원리를 모르니 중국의 것이라는 오해로 국기를 바꾸자는 주장도 나오는 것이다. 또 태극기의 도안자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탐독함으로써 한국인인임을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일이다.
'태극기는 고종황제의 자주정신이 빚었다'
[대담] <태극기>의 저자 반재원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ohmynews.com%2Fdown%2Fimages%2Fbox%2F357051_1%5B1%5D.jpg) |
|
▲ <태극기> 책을 보며 설명하는 반재원 |
ⓒ김영조 | - 어떻게 태극기를 연구하고 책을 쓰게 되었나? '나는 오랫동안 훈민정음 창제 기원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원리에는 음양오행이 있었고, 훈민정음 원본에는 태극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따라서 훈민정음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태극의 원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공부 과정에서 태극기에 대한 오해가 많음을 알았고, 이를 책으로 써서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 원래의 태극무늬는 회오리 모양인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닌지? 또 태극무늬만 있고 괘가 없었는데 언제부터 붙었고, 없애면 어떤가?'물론 원래의 태극무늬가 회오리인 것은 사실이고, 그 모양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또 4괘도 고종황제 때부터 붙은 것이다. 괘는 부연설명일 뿐이므로 없어도 상관없다. 또 원래 고종의 태극기는 옥색 바탕이었기 때문에 바탕 색깔도 바꾸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의 국기로 써온 태극기의 도안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 원초적 철학이 담긴 태극무늬를 중국이 국기에 쓰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중국에서 맨 처음 태극에 대한 논리를 얘기한 주렴계의 태극도설 이전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태극무늬를 써왔다. 조선에서 너무 오랫동안 써왔기에 태극도는 조선의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천손의 표시인 태극무늬를 중국에 뺏기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태극기를 고종이 디자인했다면 고종의 자주적인 생각 때문이라고 보는가?'물론이다. <시사신보>의 기사를 보면 청국의 깃발을 모방하여 만들라는 청국 사신의 권유에 화를 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황룡포를 입고,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 고종황제가 자주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태극무늬를 국기에 썼다는 생각이다.'
- 국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흔히 태극무늬가 중국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 또 원리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어렵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국기를 바꾸자고 주장하지만 내용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바꾸자는 주장을 할 리가 없다. 태극기를 바꾸자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이 책을 통해 잘못된 오해를 풀고 태극기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으면 한다.'
- 태극기를 옷에 디자인하여 입기도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바람직한 일이다. 태극기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천손민족임을 표시하며,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그동안 지나치게 엄격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래서 태극기가 더 어렵게 느낀 것이 사실이다. 옷에 디자인하여 입는 것은 태극기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질 것이기에 좋은 일이다.'
#우실하, '최초의 태극 관념은 음양태극이 아니라 삼태극/삼원태극이었다'[동양사회사상] (서울:동양사회사상학회, 2003) 제8집, 5-37쪽.
2003년 11월 30일자로 간행된 위 학술지에 실린 필자의 글이다. 사진 자료 때문에 사이즈가 너무 커서 그동안 파일을 올리지 못했는데, 사진 자료의 사이즈를 줄여서 파일로 올려 놓았다. -----------------차례----------------------------- <최초의 태극 관념은 음양태극이 아니라 삼태극/삼원태극이었다.> 우실하(사회학박사, 전 요녕대교수, 연세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1. 글을 시작하며: 음양태극과 삼태극 2. 상商, 주周, 춘추春秋, 전국戰國 시대의 삼태극 문양 3. 일본에서 사용되는 삼태극 문양 4. '태극원기 함삼위일太極元氣 函三爲一': 삼태극/삼원태극의 철학 1).『한서』「율력지」의 삼태극 논리: 최초의 태극 개념은 삼태극/삼원태극이었다. 2). 당唐 나라 시대까지도 태극은 삼태극/삼원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사기史記』「율서律書」의 주에 보이는 삼태극 관념 5. 태극 관념의 변화 6. 삼태극 관념의 기원에 대하여 7. 글을 맺으며 -------------------------------------------------- <국문요약>
'태극太極'에 대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음과 양이 어우러진 태극 곧 '음양태극陰陽太極'을 떠올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음양태극 대신에 흔히 '삼태극三太極' 혹은 '삼원태극三元太極'이라고 불리는 문양이 많이 사용된다.
한, 중, 일의 경우 사용되는 태극의 모양이 다르다. 예를 들어 전통 북(鼓)의 표면에는 ꡐ태극ꡑ이 장식되어 있는데, 중국의 전통 북에는 음양태극이 그려져 있고, 한국과 일본의 북에는 삼태극/삼원태극이 그려져 있다.
상ㆍ주ㆍ춘추ㆍ전국 시대에 이르는 고고 유물이나 악기에는 삼태극 도형이 대단히 많이 보이는데 반해서 음양태극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상, 주, 춘추, 전국 시대의 각종 고고 유물에서도 삼태극이 그려져 있다면, 도대체 중국에서는 언제부터 삼태극이 음양태극으로 바뀐 것일까?
이 글에서는 고대의 동양에서 태극이란 삼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한서』「율력지」에는 '태극원기는 셋을 함유하면서 하나가 된다(太極元氣, 函三爲一)'는 삼태극 관념이 보이고, 이것은 한나라와 삼국 시대 그리고 당나라 시대의 학자들에게까지도 보편적인 태극 이해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태극을 삼태극으로 이해하던 관념은, 송대宋代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이래로 음양 2기만을 포함하는 음양태극 관념으로 변화된다. 이와 더불어 이 글에서는 이런 삼태극 관념이 동북방 샤마니즘의 '3수 분화의 세계관'의 산물이라는 점도 밝혀놓았다.
'다운로드 파일'들을 클릭해도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서 엔터치면 그대로 작동합니다. 즉, 다음의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 작동시켜 보세요.
(다운) http://www.gaonnuri.co.kr/z/data/paper/2003,_최초의_태극관념은_삼태극,_동양사회사상_8호_(2003).pdf
#우실하, '삼태극(三太極)/삼원태극(三元太極) 문양의 기원에 대하여', [정신문화연구] 제29권 제2호, 통권 103호(2006년 여름호), 205-237쪽. (학진 등재지)
---------<차 례>----------- 1. 글을 시작하며 2. 당나라 시대까지도 태극(太極)이란 삼태극/삼원태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빛날 경(冏)’자와 ‘밝을 명(明)’자의 옛 글자 ‘囧’자 4. 명(明)자의 변화 5. 맹(盟)자의 변화 6. 태양을 상징하는 ‘日’과 ‘囧’의 차이 1) ‘밝다. 빛나다, 환하다’의 의미를 지닌 한자들 2) ‘빛, 불빛, 햇빛’의 의미를 지닌 한자들 3) ‘囧’자 모양은 ‘태양 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다 7. 글을 맺으며: ‘囧’자 형태의 태양상징은 파문(巴紋)ᐧ와문(渦紋)ᐧ삼태극(三太極) 문양의 기원이다 -------------------------
On the origin of the Shape of ‘Sam Taegǔk(三太極)������������������������������������������������������������or������������������������������������������������������������Sam-won Taegǔk(三元太極 )������������������������������������������������������������
Woo Sil-Ha (Ph. D., Hankook Aviation Univ. General Studies)
Chinese hieroglyphic character ‘囧’ is an old style letter of ‘冏(shine, be bright)’ and ‘明(light, bright)’. Hieroglyphic character ‘囧’ is seen in ‘Gapgol-mun(甲骨文: inscriptions on bones and tortoise carapaces)’ and ‘Gum-mun(金文: inscriptions on bronze ware)’. But, there are three different theories about what is the meaning of hieroglyphic letter ‘囧’. The first one says that ‘囧’ represents 'an open window' exposed to the shinning moon. The second one says that ‘囧’ represents 'the ear of cattle' that had been used in the sacrificial rites for the 'god of brightness(明神)' every 12 years in ancient China. The third one says that ‘囧’ represents 'a flame in the fire'. In this paper, the author critically reviews the old style letters of '冏ᐧ明ᐧ盟ᐧ日' that is closely connected with hieroglyphic character ‘囧’. Through these critical review the author suggests that Chinese hieroglyphic character ‘囧’ represents 'a flame' that give rise to 'a light'. Especially, ‘囧’ represents 'a flame flared up inside the sun'. Moreover the author suggests that the shape of ‘Sam Taegǔk(三太極)������������������������������������������������������������or������������������������������������������������������������Sam-won Taegǔk(三元太極 )������������������������������������������������������������that is frequently seen in Korean traditional culture is also related to hieroglyphic character ‘囧’. That is to say, the shape of ‘Sam Taegǔk������������������������������������������������������������or������������������������������������������������������������Sam-won Taegǔk’ has its origin in 'a flame flared up inside the sun'. So, the author concludes as fallows; At the beginning the shape of ‘Sam Taegǔk������������������������������������������������������������or������������������������������������������������������������Sam-won Taegǔk’ represents the figure of 'a flame flared up inside the sun'. Therefore, original design of ‘Sam Taegǔk������������������������������������������������������������or������������������������������������������������������������Sam-won Taegǔk’ represents the shape of sun in which sun-flame is whirling strongly.
-------------------------- <국문초록> 삼태극(三太極)/삼원태극(三元太極) 문양의 기원에 대하여
우실하 (사회학박사, 한국항공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갑골문과 금문에 보이는 ‘囧’자는 ‘빛날 경(冏)’자와 ‘밝을 명(明)’자의 옛 글자이다. 그러나 이 ‘囧’자가 무엇을 상형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공존하고 있다. 첫째, 달빛이 비치는 ‘열린 창문’을 상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둘째, 12년 마다 제후들을 모아 ‘밝음의 신(明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맹(盟)이라는 행사에서 제단에 올려졌던 ‘소의 귀’를 상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셋째, 빛을 발산하는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글에서는 ‘囧’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冏)ᐧ명(明)ᐧ맹(盟)ᐧ일(日) 등의 갑골문과 금문에 보이는 이들 글자들의 변화를 통해서 위의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를 통해서 밝을 경(冏)자와 밝을 명(明)자의 공통 기원인 ‘囧’자가 태양 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라는 점을 논증하였다. 특히 ‘밝다⋅ 빛나다⋅ 환하다’는 의미의 ‘囧’자는 ‘빛’을 발생시키는 ‘불(火)’ 곧 ‘태양 속에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불꽃’을 상형한 것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보면, (1) ‘囧’자의 갑골문과 금문에서 보이는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원 안에 3-4개의 선이나 C자형 곡선이 둘러져 있는 囧자 형상’에서 각종 파문(巴紋)이 발생하였고, (2) 이런 파문들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원 안에 3개의 선이나 3개의 C자형 곡선이 둘러져 있는 囧자 형상’에서 우리나라에서 특히 많이 사용되는 삼태극(三太極) 혹은 삼원태극(三元太極)의 초기 형상이 기원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 <주 제 어 > 태극(Taegǔk : 太極), 음양태극(Yin-yang Taegǔk : 陰陽太極), 삼태극(Sam Taegǔk : 三太極), 삼원태극(Sam-won Taegǔk : 三元太極), 샤머니즘(shamanism),
'다운로드 파일'들을 클릭해도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서 엔터치면 그대로 작동합니다. 즉, 다음의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 작동시켜 보세요.
(다운) http://www.gaonnuri.co.kr/z/data/paper/2006,_삼태극,_삼원태극_문양의_기원에_대하여_(정신문화연구_103호).pdf
~~~~~~~~~~~~~~~~~~~~~~~~~~~~~~~~~~~~~~~~~~~~~~~~~~~~~~~~~~~~~~~~~~~
- 기 타 자 료 -
우실하, <중국의 역사관련 공정의 최종판 요하문명론> (2006.9.13일 국회발표자료)
9월 13일에 국회에서 발표를 했었고 국회방송에서 생방송으로 나갔으며, 9월 17일 국회방송에서 녹화방송을 내보냈던 자료 입니다.
'다운로드 파일'들을 클릭해도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서 엔터치면 그대로 작동합니다. 즉, 다음의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 작동시켜 보세요.
(다운) http://www.gaonnuri.co.kr/z/data/paper/국회발표(2006.9.13)_게제용_사이즈.hwp
우실하, 동북공정의 최종판 ‘요하문명론’ ([단군학연구] 제15호, 2006.12)
'다운로드 파일'들을 클릭해도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서 엔터치면 그대로 작동합니다. 즉, 다음의 다운로드 링크를 복사해서 익스플로러 주소란에 붙여넣기 해 작동시켜 보세요.
(다운) http://www.gaonnuri.co.kr/z/data/paper/200612(동북공정의_최종판_요하문명론).pdf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heologia.pe.kr%2Fzeroboard%2Fdata%2Fother%2F1092588305%2FK_37.jpg)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보다 많은 사진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 요서에서 '임둔(臨屯)' 봉니 출토
연합뉴스|기사입력 2002-04-11 08:30 |최종수정2002-04-11 08:30
한사군(漢四郡) 위치 재검토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설치했다는 낙랑.임둔.현도.진번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 지역에서 출토됐다.
이는 한사군이 설치됐던 장소, 즉 위만조선의 통치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한반도 북부 및 만주 요동지역 일부이며 이 중에서도 임둔군은 한반도 북부에 자리잡았다는 학계 통설을 전면 재검토하게 하고 있다.
중국 지린대(吉林大)에서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학술지 「백산학보」 61집에 기고한 논문<'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에서 문제의 봉니 출토사실을 소개했다.
봉니란 고대 중국이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예외없이 직인이 찍혀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임둔태수장'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된 봉니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 성곽에서 지난 93-94년 지린대박물관과 랴오닝성 고고문물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발굴됐다.
해안에서 30㎞ 남짓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자리잡은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가는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를 비롯해 후대의 요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4개로 구분되는 문화층이 확인됐다.
이 중 '임둔태수장' 봉니(3 x 3㎝)는 중심 연대가 서한(西漢)인 제3문화층에서'丞'(승)이라는 글씨가 적힌 또 다른 봉니 등과 함께 출토됐다.
'임둔' 봉니는 문헌이나 다른 지역 출토 봉니 연구성과를 검토할 때 규격과 서체, 문장 등이 서한의 규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한나라) 중앙에서 임둔군 태수(군 우두머리)에게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논문은 말했다.
따라서 이 봉니가 발견된 곳이 한사군 중에서도 임둔군에 속했을 가능성이 매우커졌다고 복기대씨는 평가했다.
한국상고사 최대 논쟁거리였던 한사군 위치 문제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로 대표되는 만주설과 제국주의시대 일본 학계 및 해방 이후 남한.일본학계의 평양중심설이 팽팽히 맞서다가 최근에는 적어도 강단사학계만큼은 평양 중심설로 완전히굳어진 형국이었다.
이런 흐름과 함께 학계 일부에서는 한사군 중에서도 낙랑군과 현도군을 제외한임둔군과 진번군의 경우 존속 시기가 대단히 짧고 그 흔적이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로도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점을 근거로 '가상의 군(郡)'이라는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임둔' 봉니 출토로 적어도 임둔군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됐으며, 임둔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 문제 또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논문은 덧붙였다.
임둔군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등 기록에 따르면 한 무제 건봉(建封) 4년(기원전 108)에 설치됐다가 20여년만인 기원전 85년에 폐지됐다. <사진및 그래픽 있음>taeshik@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7.blog.daum.net%2Fimage%2F10%2Fblog%2F2008%2F03%2F05%2F21%2F39%2F47ce944d7336a%26filename%3D1.jpg)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7.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3%2F05%2F21%2F39%2F47ce944deb103%26filename%3D2.jpg)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김종서씨 “고조선-한사군 中대륙 깊숙한 곳에 위치”
고대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중국 허베이(河北) 성 동쪽에서 랴오허(遼河) 서쪽으로 길게 자리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종서(51·중앙대 강사) 씨는 최근 중앙대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으로 통과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에서 문헌 고증과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을 통해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대륙 깊숙한 곳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논문에서 적용한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거리를 현재의 지도에 적용해 그 위치를 역추적하는 방법.
중국 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당시 한의 수도였던 뤄양(洛陽·허난 성 서쪽의 도시) 동북쪽으로 5000리에 낙랑군이, 4000리에 현도군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한서(漢書)’의 무릉서(茂陵書)에는 장안(뤄양보다 더 서쪽에 있는 현재의 시안·西安)에서 6138리에 임둔군이, 7640리에 진번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리는 당대(唐代) 이후 0.393km로 고정된다. 그러나 한나라 시절, 1리가 얼마인가에는 논란이 있다. 김 씨는 위나라 기록에 등장하는 뤄양 및 장안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거리를 비교해 한대의 1리가 현재 거리의 75% 미만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한대의 기록과 현재 지도상의 거리 비교를 통해 한사군의 위치를 추정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평양지역으로 추정돼 온 낙랑군의 경우 중간에 산악지대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랴오닝 성 서부 진저우(錦州)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또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알려진 현도군은 허베이 성 동쪽과 랴오닝 성 서부를, 황해도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진번군은 압록강 서북쪽을 넘어설 수 없다.
김 씨는 여기에 한대의 도로 굴곡지수를 감안할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멀었던 현도군은 현재 베이징(北京) 동북쪽 지역,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웠던 진번군은 랴오닝 성 서부 다링허(大凌河) 유역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1990년대 초반 랴오닝 성 진저우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는 직인이 찍힌 봉니(封泥·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가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일치한다.
이 논문은 랴오허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초기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고조선의 실재를 뒷받침할 수 없다는 ‘물증 부족’의 비판에 대한 새로운 반론이다. 또 흥륭와, 홍산, 하가점 등 랴오허강 유역의 고대 신석기·청동기 문명과 고조선의 연관관계를 뒷받침하게 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7.blog.daum.net%2Fimage%2F32%2Fblog%2F2008%2F03%2F05%2F21%2F39%2F47ce944fdebf5%26filename%3D3.jpg)
봉니(封泥) : 다른 곳에 보내는 문건을 넣은 나무함을 도중에 열어보지 못하도록 노끈 같은 것으로 가로세로 매여가지고, 그 매듭에 진흙덩이를 붙이고, 거기에 군현 책임자의 도장을 찍은 것.
일종의 '발송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7.blog.daum.net%2Fimage%2F14%2Fblog%2F2008%2F03%2F05%2F21%2F39%2F47ce945121b8b%26filename%3D4.jpg)
중국 요서에서 출토된 '임둔(臨屯)' 봉니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
|
|
|
2007년 02월 16일 |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
|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ongascience.com%2Fimage%2FNews%2Fmark.gif) | |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
|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