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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1-44절) 진짜 죽은 자를 살리심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풀어야 하는 많은 숙제가 있습니다. 숙제(宿題)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하는 과제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하기 싫어도 꼭 풀어야 하는 숙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이제껏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죽음의 문제입니다.
만일 가족 중의 누가 돌아가지 않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가족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 자신이 죽지 않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암에 걸려도 약(藥)을 먹으면, 나을 수 있고, 심근 경색이 와도 죽지 않고 다시 살고, 높은 데서 떨어져도 뼈만 부려지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노인(老人)인구가 늘어나면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것이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잠을 자는 것으로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을 자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죽은 것처럼 누워있지만, 그때도 심장(心臟)은 뛰고 있고, 내장(內臟)은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잠을 자야 살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매일 잠을 잡니다. 그렇지만 아침이 되면, 모두 잠에서 깨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활동을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나 자녀들이나 어른들이나 잠을 자는 것으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직 죽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얼마나 달라지게 되었든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의 인생은 엄청나게 달 라 지게 되었습니다.
Ⅰ.멀리 떨어져 계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셨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라는 사람의 식구들이었습니다.
그 집에는 나사로라는 남자가 있었고, 누이가 두 명 있었는데, 하나는 마르다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였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香油)를 부었던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 식구들과는 허물없이 대하시고, 식사도 함께하시고,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세 식구 중에서 나사로가 그만 갑작스러운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이 사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盲人)으로 태어난 사람을“실로 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면서 고치셨는데, 그 문제로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험악(險惡)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안식일(安息日)에 병자들을 고치실 뿐 아니라, 자신이 양들의 “선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냥 믿으면 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외모(外貌)나 자신들의 사상(思想)까지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사칭(詐稱)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되는데, 많은 가정(假定)을 세웁니다.
즉“만일 이것이 안 되고 저것이 안 되면 어떡하나?”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祝福)하시고, 인도(引導)하시는 데도 맨날 걱정하고, 죽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믿어버리고, 그냥 살아가면 되는데, 우리는 미래까지 확실하게 해놓으려고 하니까 믿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응급(應急)환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응급 환자는 나사로였는데 당시는 병원(病院)도 없었고, 예수님은 먼 곳에 계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이 얼마나 좋았는가 하면,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예수님이 다 고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유대인들 때문에 먼 곳에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실 줄 알고, 사람을 급히 보내어서“나사로가 죽게 되었는데, 빨리 와 달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말씀만 하셨습니다.
11:4절)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하시더라”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메시야(messiah)이시기 때문에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 한, 무슨 병이든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가까이에 안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연락을 했지만, 예수님이 빨리 안 오시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아, 내가 사랑하는 가정에 응급환자가 생겼구나. 빨리 가야 되겠다.”라고 하시면서 거의 뛰다시피 해서 나사로의 집에 가면, 충분히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락을 받고서도 가시지 않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동안에 나사로는 병으로 죽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이 여기에 안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을 고칠 수 없고,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며, 전쟁을 걱정하고, 지도자들의 결정을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우리에게는 더 손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는 병”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사로는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려고 하는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위로가 되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도 병이나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하나님은 말씀만 하십니다. 그동안에 우리는 아프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부러 이틀을 더 계신 후에 제자들에게“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안 가신 것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기 때문인 것을 알고“예수님, 유대인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데, 또 거기에 가시려고 하십니까?”하고 만류(挽留)했습니다.
11:9-11절)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낯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은“낮에는 열두 시간이 있지 않느냐? 낮에 다니면 넘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면서“밤에 다니면 그 사람에 빛이 없기 때문에 넘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낮”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시간입니다.“낮”에는 전쟁(戰爭)도, 망(亡)하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어둠, 즉 사탄(詐誕)의 세력을 다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낮을 계속 연장(延長)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살아 있으면, 낮만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중단 되면, 그때부터 어둔 밤이 오게 됩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사탄(詐誕)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되고, 사기(詐欺) 당하게 되고, 멸망(滅亡)을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곧바로 달려가지 않으시고, 빛이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마리아나 마르다 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사로는 죽어버렸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슬퍼하면서 장례(葬禮)를 치러야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시체(屍體)가 부패(腐敗)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장례(葬禮)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상(問喪)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 나사로는 죽었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말씀만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의 현실(現實)이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매일 생명의 말씀만 주시는데, 아픈 사람은 계속 아프고, 돌아가시는 분도 있고,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아서 믿는 것이나, 믿지 않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3월 12일 어떤 사랑하는 팬 카페는 거짓이름(假名)“해바라기”라는 자는 마귀(魔鬼)의 사주(使嗾)를 받아 댓글로“아-멘”이 아닌,“작작 올려라”로 순진한 회원들까지 믿지 못하도록 비겁하게 충동질하기도 했습니다.
Ⅱ.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라는 동네에 와보니까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장례(葬禮)를 치른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동네에는 오셨지만, 마리아의 집에는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동네 입구에 서서 마리아와 마르다 에게 자기가 온 것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곧바로 가시지 않은 것은 그 집에 손님이 많이 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 에게 따로 하실 중요한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영접(迎接)하러 간 사람은 마르다 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손님이 많이 와 있었기 때문에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마리아가 총알같이 먼저 뛰어갔을 텐데, 나사로가 죽고 난 후에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信賴)가 좀 흔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미래(未來)를 이미 예수님에게 다 맡겼습니다.
예수님이 빨리 오셨더라면,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뭐라고 해도 안 가시고,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가족이 죽지 않았을 텐데, 왜 예수님은 멀리 가 계시고, 사람을 보내도 오시지 않고, 나사로는 죽게 하셨을까?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迎接)하러 나가서“너무나도 아쉬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모든 병을 다 고치실 분인데, 하필이면, 나사로가 아플 때, 예수님이 안 계시는 바람에 나사로가 죽어버렸다는 아쉬움의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여기 계시기만 했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애석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을 마르다 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11:25-2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곧“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고, 죽지 않은 자는 계속 안 죽게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고, 살아 있는 사람은 안 죽게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人類)에게 가장 중요한 발표(發表)를 기자(記者)들 앞도 아니고. 가족이 죽은 한 여성(女性)앞에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禮拜)에 대해서도 가장 중요한 발표(發表)를 우둔한 남자에게 하지않고 몇 번씩 이혼(離婚)당한 감수성이 예민한 수가 성 여자(女子)앞에서 하셨습니다.
요4:24절)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려움을 당한 여성(女性)과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한 가지 중요한 발표(發表)를 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부활이요 생명”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만 하면, 어떤 죽은 자도 다 살릴 수 있고, 산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로 오실 때에도“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 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진짜 잠을 자는 줄 알고“자고 있으면 깨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나사로가 잠든 것이지만, 제자들에게는 나사로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잠자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사람이 불면증(不眠症)으로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약(藥)이 좋아서 잘 맞으면, 몇 년씩 약(藥)을 먹으면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잠을 자는 분은 다 자고 나면, 저절로 깨어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우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픈 것도 아니고, 휴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잠이 보약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 믿는 자들은 죽는 것이 보약(補藥)을 한 사발씩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에게“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니까 마르다는 그 말을 아주 신학적(神學的)으로 해석(解釋)했습니다. 즉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날 때, 그때 나사로도 살아난다는 것으로 해석(解釋)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解釋)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으면,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자는 죽어도 즉시 천국(天國)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변화된 육신(肉身)을 가지고 또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에게“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동생인 마리아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고, 단지“주님이 너를 부르신다.”고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도 와서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 울었습니다. 즉 마리아는“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부활(復活)과 생명(生命)에 대한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집에서 급히 나가니까 마리아가 무덤에 가는 줄 알고, 같이 울어주려고 많은 사람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께 달려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울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도 함께 우셨습니다.
11:33-35절)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고, 또 죽으면서 너무나도 고통을 받고, 또 살아남은 가족도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마음이 슬프고, 아프셔서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시는 것을 보고, 사람 중에는 맹인(盲人)도 고친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느냐? 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Ⅲ.나사로야 나오너라.
이제부터는 예수님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족(遺族)들에게“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유족(遺族)들은 고인(故人)의 무덤 앞에 가셔서 기도를 해주시려는 줄 알고 예수님을 나사로의 무덤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유족(遺族)에게“무덤의 돌문을 옮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마르다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사랑해서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시체(屍體)가 심히 부패(腐敗)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은 더운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시신(屍身)이 부패(腐敗)해서 엄청난 악취(惡臭)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 정도 지나면, 시체(屍體)썩은 물이 흐르고, 구더기가 들끓고, 썩는 냄새가 그야말로 진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제발 참으시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11:40절)...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조건 어떻게 되든지 믿고, 예수님에게 맡기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어쩔 수 없어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11:41-44절)...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덤 안을 향해서“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때 나사로가 죽은 사람을 염(殮)할 때, 해 놓은 상태로 수의(襚衣)를 입고, 손발을 동인 채로 무덤에서 쿵쿵 뛰어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나도록 심폐(心肺)소생술을 한 것도 아니고, 주사(注射)를 놓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시고“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고 있던 사람이 말짱하게 살아서 나왔습니다. 즉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기 전의 상태로 살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내 남편과 내 아내와 내 자식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와 세상이 지어준 가명(假名)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직 해결(解決)하지 못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죽기 전의 상태로는 살리실 수 있지만, 죄(罪)를 없애고, 영생(永生)할 수 있는 상태로는 아직 하실 순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완전한 죄(罪)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영생(永生)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얼마 안 되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보좌(寶座)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이 먼 곳에 계시고 안 계신 것처럼, 하루하루 살기 위해서 싸워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모든 숙제(宿題)를 다 마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靈光)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는 것이 잠자는 휴식(休息)인 동시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휴식(休息)없이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좀 쉬어야 하고, 잠을 좀 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이해(利害)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미래(未來)를 책임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에게 실망(失望)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믿으시고, 육체(肉體)의 남은 때까지 주님께 충성(忠誠)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544장 *울어도 못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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