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의 진수, 절골로 기억될 주왕산
1. 일자 : 2013. 11. 3(일)
2. 장소 : 주왕산 (721m)
3. 행로 및 시간
[주산지(05:50-07:10) -> 절골탐방소(07:45-50, 338m, 가메봉 5.7km) -> 신술골 갈림(08:18) -> 대문다리(08:52, 가메봉 2.2km) -> 이정표(09:03, 가메봉 1.5km) -> (된비알/무덤) -> 가메봉 삼거리(09:52) -> 가메봉(10:00-13, 882m, 주왕산 4.4km) -> (칼등고개) -> 이정표(10:50, 주왕산 2.6km) -> 후리메기 갈림(11:34, 주왕산 0.6km) -> 주왕산(11:47, 대전사 2.3km) -> 대전사(12:45) -> 상의주차장(13:00)]
4. 동행: 홀로, 28산악클럽
< 주왕한 산행을 준비하며 >
5년 가을 이 무렵 강형과 함께 주왕산에 올랐다. 당시 산행일기의 제목은 “단풍과 협곡, 기암의 앙상블, 명불허전 주왕산을 오르다.” 좀 구구절절 하지만 제목만으로도 당시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옛 기록을 살피며 주왕산에 빠져든다. [(중략) 그야말로 장관이다. 협곡을 이룬 바위 음영 지역을 빠져 나오자 바로 ‘학소대’라는 예사롭지 않은 바위가 주위를 끈다. 모습이 학의 둥지 모양이라는 것인지 학의 둥지가 있던 곳인지는 몰라도 웅장한 모습이 압권이다. 이제 더 이상 주왕산 ‘국립공원’에 대한 의구심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중략) 주왕굴은 주왕과 관련된 전설로 인해 소위‘기도발’이 잘 듣는 곳이라 하였더니, 우리의 강형 뒷태가 어여쁜 여자를 보며, 얼굴도 바쳐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기도발을 시험해 보자고 한다. 속도를 내어 앞질러 걸으며 확인한 결과 A+급이다. 기(氣)가 넘치는 곳임에 틀림없다. 선경(仙境)을 감상하고 속세(俗世)에 내려오니 마음속에 흑심이 솟는다. 대전사에 도착하여 기암을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으며 아리따운 처자들도 프레임에 넣는다. 바로 확인해 본다. 잘 나왔다. ‘흑심’을 품어보다 이내 포기한다. 나이를 생각하셔야지요. 아저씨들!] 산행 초보 시절의 흥겨운 날들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흔히 주왕산을 한국의 장가계라 한다. 산 이름도 산 밑 전 대전(주왕의 아들)사라는 절 이름에도 주왕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선생은 이 산을 평하기를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는 산” 이라 했다. 하기야 예나 지금이나 오지인 청송에 이런 멋진 산이 있다는 것은 기대를 많이 넘어선다.
산악회에서 제시하는 코스를 둘러 본다. 절골-가메봉-후리메기-폭포-대전사 길이다. 예전에 올랐던 월외-금은광이-폭포-대전사 길과는 다르나, 주왕산의 정상을 거치지 않는다. 나름의 코스를 정한다. 절곡-가메봉-주왕산-대전사 길이다. 예전에는 가메봉에서 주왕산으로 통하는 길이 없어 후리메기를 거쳐야 했으나 최근 소로가 개척되었다 하니, 행락객과 엉키지 않고도 주왕산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주왕산 정상은 숲으로 둘러 쌓여 별 풍광이 없다고는 하나, 어찌 산을 풍경 감상만으로 가겠는가? 거리나 코스의 난이도를 고려할 때 여유 있는 6시간의 산행을 예상해 본다.
< 2008년 산행의 추억 >
< 희망사항 >
주왕산의 명물은 기암과 협곡 그리고 연달아 이어지는 3개의 폭포다. 지금은 숫자가 아닌 이름이 생긴 1폭포(용추폭포), 2폭포(절구폭포), 3폭포(용연폭포)를 돌아 나오면 마주치는 이국적 풍광의 협곡과 대전사 앞 마당에서 바라보는 기암의 절경 앞에 시간조차 숨을 멈춘다. 오늘 산행에서는 이와 버금가는 감동을 느낄 곳을 한 곳 더 들른다. 바로
주산지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장소인 그윽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명소다. 그곳에서 새벽 여명에 젖은 호수를 감상하고 입산할 생각이다. 작년
가을 우포늪과 화왕산에서 맛 본 만추의 산과 호수를 다시 감상한다는 흥분에 마음은 벌써 청송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떠나는 일요 산행이다. 새벽에 길을 걷는 행위는 연이은 무박
대간 산행으로 단련되어 별 부담이 없지만, 다음달 출근을 고려하면 일요일 저녁에 귀가하는 사실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예정대로 오후 2시 이전에 청송을
빠져 나온다면 늦어도 8시까지는 귀가가 가능하니, 시간 차질이
없기를 바래본다.
사진으로 본 절골의 단풍이 그윽하다. 계곡과 어우러진 색색의 단풍이 참 곱다. 설렌다. 이번 산행이 만추를 즐기는 여정이었으며 좋겠다. 굳이 색이 화려한 단풍이 아니더라도 낙엽 수북한 한갓진 길을 걸으며, 가을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
< 청송 가는 버스 안에서 >
늦은 밤, 청송으로 가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올해 들어 14번째 무박산행이다. 훗날 2013년을 되돌아 보면 ‘무박’이라는 말이 또렷이 기억될 것이다.
오늘 무박은 색다른 느낌이다. 익숙지
않은 토요 무박이다. 밤 공기가 금요일과는 다르다. 무언가
조금 더 무거운 느낌이랄까. 버스가 지나는 반대편 육교를
가로지르며 또 조바심이 번진다. '육교를 건너는 사이 차가 지나가면 어쩌나 막차인데' 극히 낮은 확률에도 조바심이 번지는 걸 보면 지난 한 번의 트라우마가 깊게 상처를 남겼나 보다.
금요일 밤보다 훨씬 한적한 토요일 늦은 밤, 차가 줄어든 도로가 낯설다. 자정 복정을 떠난 버스는 단양에서 잠시 정차하더니 이내 밤을 질주한다. 비몽사몽간에도 톨게이트를 지남을 느낀다. 이곳은 어딜까? 어둠 속에서 커다란 시계탑이 보인다. 스마트폰에서 현 위치를 확인한다. 안동역이다. 광장 시계의 침은 2시 45분을 가리킨다. 빨리 많이도 왔다. 안동과 청송의 국도를 거쳐 4시에 주산지에 도착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니 잠이 밀려든다. 시동을 꺼 엔진을 멈춰주면 좋으련만, 약한 멀미가 난다. 5시 30분 대장의 안내가 있다. 코스는 각자 알아서 하고 3시에 대전사를 출발한다는 말만 머리에 들어온다. 젠장, 너무 늦다. 시간 관념이 확실한 윤대장이 그립다. 멀쩡하던 무릎이 배낭을 메자 저려온다. 이 역시 트라우마 인가?
< 희망사항 >
주왕산의 명물은 기암과 협곡 그리고 연달아 이어지는 3개의 폭포다. 지금은 숫자가 아닌 이름이 생긴 1폭포(용추폭포), 2폭포(절구폭포), 3폭포(용연폭포)를 돌아 나오면 마주치는 이국적 풍광의 협곡과 대전사 앞 마당에서 바라보는 기암의 절경 앞에 시간조차 숨을 멈춘다. 오늘 산행에서는 이와 버금가는 감동을 느낄 곳을 한 곳 더 들른다. 바로
주산지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장소인 그윽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명소다. 그곳에서 새벽 여명에 젖은 호수를 감상하고 입산할 생각이다. 작년
가을 우포늪과 화왕산에서 맛 본 만추의 산과 호수를 다시 감상한다는 흥분에 마음은 벌써 청송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떠나는 일요 산행이다. 새벽에 길을 걷는 행위는 연이은 무박
대간 산행으로 단련되어 별 부담이 없지만, 다음달 출근을 고려하면 일요일 저녁에 귀가하는 사실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예정대로 오후 2시 이전에 청송을
빠져 나온다면 늦어도 8시까지는 귀가가 가능하니, 시간 차질이
없기를 바래본다.
사진으로 본 절골의 단풍이 그윽하다. 계곡과 어우러진 색색의 단풍이 참 곱다. 설렌다. 이번 산행이 만추를 즐기는 여정이었으며 좋겠다. 굳이 색이 화려한 단풍이 아니더라도 낙엽 수북한 한갓진 길을 걸으며, 가을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
< 청송 가는 버스 안에서 >
늦은 밤, 청송으로 가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올해 들어 14번째 무박산행이다. 훗날 2013년을 되돌아 보면 ‘무박’이라는 말이 또렷이 기억될 것이다.
오늘 무박은 색다른 느낌이다. 익숙지
않은 토요 무박이다. 밤 공기가 금요일과는 다르다. 무언가
조금 더 무거운 느낌이랄까. 버스가 지나는 반대편 육교를
가로지르며 또 조바심이 번진다. '육교를 건너는 사이 차가 지나가면 어쩌나 막차인데' 극히 낮은 확률에도 조바심이 번지는 걸 보면 지난 한 번의 트라우마가 깊게 상처를 남겼나 보다.
금요일 밤보다 훨씬 한적한 토요일 늦은 밤, 차가 줄어든 도로가 낯설다. 자정 복정을 떠난 버스는 단양에서 잠시
정차하더니 이내 밤을 질주한다. 비몽사몽간에도 톨게이트를 지남을 느낀다. 이곳은 어딜까? 어둠 속에서 커다란 시계탑이 보인다. 스마트폰에서 현 위치를 확인한다. 안동역이다. 광장 시계의 침은 2시 45분을
가리킨다. 빨리 많이도 왔다. 안동과 청송의 국도를 거쳐 4시에 주산지에 도착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니 잠이 밀려든다. 시동을 꺼 엔진을 멈춰주면 좋으련만, 약한 멀미가 난다. 5시 30분 대장의 안내가 있다. 코스는 각자 알아서 하고 3시에 대전사를 출발한다는 말만 머리에 들어온다. 젠장, 너무 늦다. 시간 관념이 확실한 윤대장님이 그립다. 멀쩡하던 무릎이 배낭을 메자 저려온다. 이 역시 트라우마 인가?
< 주산지에서 >
5시 40분, 별 하나 없는 길을 따라 주산지로 오른다. 포도를 15여분 걸어 왕버들이 보이는 전망대에 닿았다. 놀랄 만큼 많은 인파가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빛을 갈망하고 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 주산지의 아침 1 >
주산지, 김기덕 감독과 뗄 수 없는 곳이다. 그의 영화는 낯선 파격 속에서 보편을 찾아간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무대로 왕버들이 핀 이곳 호수에 떠 있는 암자 풍경과 감독 스스로가 연기하는 자기 학대적 고행은 낯선 파격이었다. 기이한 상황 설정과 스토리 전개는 피하고 싶다가도 중독성 강하게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호수를 배경으로 계절이 흐르고 인간의 고뇌가 진행된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용서하고, 결국 죄 값을 치르고. 겨울이 가고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다시 봄이 오고, 윤회는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 주산지의 아침 2 >
오랜 기다림 끝, 6시 50분 무렵 일출의 기운이 감지된다. 날이 흐리고 비도 흩날려 빛은 좀처럼 호수로 내려 앉지 않는다. 사진꾼 몇 몇은 '물안개는 없겠군' 하며 서둘러 자리를 뜬다. 그 빈 자리에 서서 왕버들이 단풍과 어우러진 풍경을 하념 없이 바라본다. 내 작은 똑딱이의 렌즈로는 빛을 모으는데 한계를 느낀다. 차라리 스마튼폰이 나아 보인다. 몇 장의 그럴싸한 사진을 찍고는 나도 자리를 뜬다. 호수 수문 부근에서 걸음을 멈춰서 여명이 밝아오는 물가를 감상한다. 또 하루의 아침이 이렇게 시작된다.
< 주산지에서 가메봉 >
절골로 향한다. 그 많던 인파가 어디로 흩어졌는지 주차장을 지나 절골 길로 향하는 이는 나 밖에 없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단풍이 물든 너른 포장도로 비를 맞으며 홀로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바람이 된 느낌이다. 과실이 떨어진 들녘 사과 밭은 허전했다. 주산지 출발 30분이 지나 절골탐방센터에 도착했다. 모던한 탐방센터 건물이 이국적이다. 본격 산행이 시작된다. 행장을 정리하고 절골로 들어선다. 주산지에서 절골 입구까지도 경치가 그만이었는데 절골의 풍광은 차원이 다르다. 계곡 물이 흐르고, 기암괴석이 지천이고, 색색의 단풍이 화려하다. 게다가 인적이 드물어 주위 풍경이 다 내 것인 냥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세상은 온통 노랑과 붉음의 잔치다.
평탄한 계곡은 끝없이 이어진다. 곳곳에 다리가 놓여져 있다. 다리 위에서 돌아보는 가을이 머무는 자리는 몽환적이다. 절골에서 대문다리까지 3.5km 길의 소요시간은 한 시간, 고도 차가 거의 없는 평지 길이다. 굳이 속도를 낼 필요는 없다. 부러 게으른 산행을 한다.
< 절골의 가을 1 >
오늘 산행을 오기 전 주왕산 최고의 산행코스는 대전사에서 이어지는 폭포 길이라 여겼는데 오늘 절골을 걸으며 생각이 바꿨다. 절골계곡은 그 길과 동급이다. 물 많은 여름에는 더욱 장관이겠다. 곳곳에 산재한 소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다. 단풍 색은 물가에서 더욱 곱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커플 몇 쌍을 만난다. 연인이 같은 취미를 즐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들 덕에 멋진 사장 몇 장을 건진다.
< 절골의 가을 2 >
절골탐방소 출발 1시간 만에 대문다리에 도착했다. 걷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 길이 끝남이 못내 아쉽다. 고도는 여전히 400미터 어름이다. 하지만 이곳을 기점으로 길이 좁아진다. 500미터 정도 완만한 길을 더 오르자 비탈이 시작된다. 이제 가메봉까지 나머지 고도 400미터를 치고 올라야 한다.
< 절골의 가을 3 >
때마침 비가 시작된다. 조금 내리다 그냥 그칠 기세가 아니다. 비 준비를 안 했는데 걱정이다. 무작정 걸을 수 밖에. 언제부턴가 풍경은 한가지 모습만 하고 있다. 노랑, 붉음, 갈색의 앙상블 구성비만 다를 뿐 그들이 어울려 만드는 숲의 풍광은 비슷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갈색 낙엽이 두터워진다. 가메봉 1.5km 이정부터 시작된 된비알은 40분 동안 계속되었다. 아침 겸 간식을 먹으며 속도를 조절한다. 그리고 이내 가메봉 안부 삼거리에 도착했다. 가메봉은 0.2km 거리에 있다. 내원마을로 하산하자면 이곳으로 돌아 가야 한다. 가메봉으로 향하는 마지막 오름을 탄다. 가메봉 정상이 멀지 않았다. 묵직해진 발걸음에 힘을 실어본다. 멀게만 보이던 산정이 올려다 보인다. 오늘도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 가메봉에서 >
10시 정각 가메봉에 도착했다. 가메봉은 정상석은 없으나 바위 지대로 탁 트인 전망이 그만이다. 때마침 내린 비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굽어 보는 풍경에 무리진 고운 색의 향연이 들어온다. 몰려 오는 구름이 산 능선과 어우러져 긴 산그리메를 만들어 낸다. 기막힌 풍경들이다. 작은 바위 협곡을 뛰어 넘어 난간에 서 아찔한 고도감을 즐긴다. 산은 공평하다. 길의 난이도와 풍경의 질이 정확히 일치하니 말이다. 비를 맞으면서도 10여분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보냈다. 산악회 일행들은 떠나고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나를 발견한다. 가메봉에서의 우중 풍취 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노고를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으리라.
< 가메봉에서 주왕산 >
일행들은 계단을 내려서 다시 왔던 길로 간다. 홀로 주왕산으로 길을 튼다. 초입 긴 계단을 내려서자 낙엽이 짙게 깔린 능선 길이 쭉 이어진다. 비는 조금 더 거세진다. 하산 완료 시간은 3시,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져 걱정이다. 내가 너무 일찍 하산할까 바, 혹 여유를 제어 못하고 만용을 부리는 자들이 있을 것 같아서다. 빨라지는 걸음을 여러 번 붙잡아 멘다.
< 가메봉 능선의 가을 1 >
홀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다. 산에서 하는 생각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수면파인 알파파의 특징인가 보다. 아님 실제로 고민이 많턴가. 가메봉에서 주왕산 가는 길은 좁고 단조롭지만 걷기에는 더 없이 좋다. 누군가 세심한 손 길이 참 순한 오솔길을 길게 늘여놓았다. 능선 길은 다 그러하듯 작은 오르내림이 있고 가파른 봉우리를 치고 올라야 하나 이곳에서는 거친 봉우리 마다 산 어깨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숨을 헐떡거리지 않고도 긴 호흡으로 능선을 즐길 수 있다. 가메봉-주왕산 4.4km가 거의 한결 같다. 도중에 칼등고개란 험악한 이름의 구간을 지나게 되어 있으나 부지불식간에 지나쳐 버렸다.
< 가메봉 능선의 가을 2 / 주왕산 정상에서 >
정상 밑 후리메기 갈림까지 오랜만에 홀로 한갓지게 걸었다. 1시간 20분을 걸으며, '왜 이 좋은 곳을 짝 없이 혼자 걷냐'며 농을 하던 여자분을 포함하여 10명 정도의 사람과 조우했을 뿐이니, 그 한적한 정도를 알 수 있으리라. 후리메기 갈림부터 부지불식간에 인파에 휩싸였다. 처음엔 사람이 반가웠으나 이내 공포의 대상으로 변한다.
주왕산 정상에 섰다. 명산 치고는 정상 경치가 별로다. 애초부터 풍광을 그리며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간다,“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산정에 올랐으면 충분하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정상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는 이제 자리를 떴다. 시간은 이제 막 12시를 지난다. 우보 산행이 다시 전투 모드로 변했으나 일단 서둘러 하산 하기로 한다. 내려 가서 샤워를 하고픈 마음이 앞선다.
< 주왕산에서 대전사 >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곳곳에 정체가 생긴다. 오전에 온 비가 몰고 온 안개란 놈이 풍경을 망쳐 버렸다. 작은 바위 전망대에서 굽어 보는 눈 길에 기봉과 이웃한 기암들이 희미하게 들어오나 감질만 난다.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잠시 안개가 걷혀 기봉을 배경으로 인물사진 한 장을 얻었다.
< 기암을 배경으로 >
산 밑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119 구조대가 서두르며 산을 오른다. 누군가 사고가 났나 보다. 밑창이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신발을 신고서 나도 오늘 자빠졌으니 산에서의 사고는 장담할 수 없나 보다. 인파에 쌓여 어느덧 대전사 앞 뜰에 도착했다. 행락객들로 길은 발디딜 틈도 없다. 떠 밀리듯 주차장까지 내려와 버렸다. 산악회 버스는 문만 열린 체 비어 있다. 시계가 막 1시 시보를 한다. 5시간 50분의 잔치는 이렇게 끝이 났다. 2시간이나 먼저 내려 왔으니 이제 뭘 하나! '2시에 귀경 버스가 출발한다고 했으면 얼마니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식사를 하고 휴대폰 메모장을 끄적였다. 지금 이 글이 결과물이다.
< 기봉을 배경으로 >
긴 기다림
끝에 버스는 3시 15분 대젼사 주차장을 나선다.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보람찼다. 새벽을 주산지에서 시작했고, 비록 물안개는 없었지만
왕버들과 단풍이 어우러진 호수를 감상했고, 절골계곡의 절경을 보았고,
가메봉에서 우중산행의 정취에도 취해 보았고, 흔치 않게 편한 낙엽 능선 길을
원 없이 걸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 에필로그 >
늦가을 추수가 끝난 휑한 들녘은 볏 집을 싼 둥글고 흰 공들이 있어 아직은 그나마 덜 쓸쓸하다. 볕이 좋은 일요일 오후, 버스 차장을 바라다 보며 생각에 잠긴다. 지금 이 계절의 느낌과 오늘의 산행이 언젠가는 아련한 추억으로 돌이켜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등 뒤로 사라진 모든 시간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아둔한 내 눈이 보지 못한 사이에 피고 진 가을 꽃들, 한 줄기 자유로운 바람, 가을의 빛깔과 옷을 갈아 입는 숲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