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1. 박해의 이유
1) 반국가적인 기독교
기독교인들 특유의 일신론(一神論)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었던, 이교적 국가예식에의 참여 거부는 기독교인을 무신론자(多神을 부정하는 것이지 唯一神의 부정은 아니었지만)인 동시에 국가의 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님이요 하나님으로 공경해야 하는 기독교의 절대성은 기독교인에게 황제예배도 금지시켰는데 이 황제예배는 도미시아누스 황제 이래 점점 이상한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주 황제’에 대해 의식적으로 ‘주 그리스도’를 내세웠고, 또한 종교적 기반에서의 황제 예배가 바로 국가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되면 될수록 더욱더 기독교인은 국가의 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로마국가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였고, 비록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예식들을 관용하였다고 하더라도 황제에게 마땅한 경의를 표하고 국가신을 인정하도록 명백히 요구되었다.
2) 로마제국의 토대를 동요시키는 기독교
유대교에 대하여는 그 일신론에도 불구하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한 민족군에 한정된 소수의 신봉자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는 본질상 초민족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었고, 비록 3세기 중엽까지 로마제국 내에서 하찮은 소수집단에 불과했을지라도 바로 이 보편적인 요구는 유달리 보편적인 제국의 토대를 동요시켰다. 그러므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충돌은 2,3세기에 있어서 그 유능한 황제들에 의해 야기되었는데 그들은 종교적인 기반에서 국가적 쇄신과 제국의 내적 강화를 기하려고 노력하였다.
3) 기독교 박해에 대한 제국과 민중의 차이
한편, 기독교인들은 국가를 질서유지의 권력으로 인정하고, 국법을 아주 정확히 준수하고, 황제를 향해서가 아니지만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그들을 간섭할 계기가 거의 없었다. 실제로 박해는 산발적이었고, 그 범위와 기간도 지방에 따라 달랐다. 박해는 특히 2세기에 있어서, 흔히는 조직적이고 오래 전부터 준비된 국가의 기도라기보다는 마치 쌓였던 증오가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과 같이 일어났다. 데키우스 황제에 이르러 비로소 박해가 명백한 계획 하에 추진되었다.
반면 민중은 처음부터 박해에 아주 능동적으로 관여하였다. 사람들은 천재지변, 공중의 재난, 불행, 패전 등을 신자들이 국가의 제신에게 제물바치기를 거부한 탓으로 돌렸다. 또한, 신자들을 모두 인류에 대한 증오죄로 고소하였다. 바로 이 비난은 이미 네로 시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것 같고, 그래서 네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로마시의 방화 혐의를 쉽게 이 논증으로써 기독교인들에게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2. 박해의 진행
1) 제1기(100년경까지)
서기 100년경까지 기독교는 국가로부터 관용되었거나 아니면 무시되었다. 기독교는 유대교파로 생각되었고, 유대교에 대한 국가의 관용(‘허용된 종교’- religio licit로서)을 같이 누렸다. 네로(54-68)가 일으킨 최초의 대박해는 한 잔인한 폭군의 무시무시한 폭행으로서, 그는 64년 7월 자신의 로마 방화죄를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키고자 박해를 연출하였다. 네로는 수많은 로마 기독교인들을 잔인한 고문으로 처형하였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정원에서 일종의 군중유희를 이루었다.
희생자들 중에 베드로와 바울도 있었다. 이 박해는 로마시에 국한되었었고, 법적 근거도 없었다. 네로의 이와 같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인류 증오’란 누명이 기독교인들에게 씌워졌고, 그 후 이것은 근 2백년간 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실적 근거가 되었고, 더욱 적절하게 표현해서 신자 취급의 면허장 구실을 하는 숙명적인 것이 되었다.
2) 제2기(100-250)
이제 기독교는 독립된 종교로 통하였으나 반국가적이요, 반인류적인 금지된 종교로 박해를 받았다. 총독 플리니우스와 황제 트라야누스(98-117) 사이의 서신 왕래가 박해의 원리가 되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적인 것이었으나 곧 플리니우스에 의해 보급되어, 준공문서로 간주되고, 관습법이 되었다. 그것에 의하면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 자체가 처벌의 대상이었다.
* 플리니우스(비시니아 총독)와 트라야누스(황제) 사이의 서신 교환
-- 플리니우스의 서신:
그는 기독교인들이 새벽이 되기 전에 모여 그리스도가 마치 신이기나 한 것처럼 찬양하며, 절도와 간음과 기타 부도덕한 범죄를 범치 않기로 맹세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가 당면했던 문제는 기독교 신자들은 뚜렷한 범죄 사실이 있을 때에만 처벌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트라야누스 황제의 지시를 받기 위해 서신을 띄웠다.
-- 트라야누스의 답변:
황제는 마음속으로 기독교인들이 공인받지 못하고 원칙적으로 위험스러운 단체라는 데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고는 분명히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면 그들을 처벌해야 할 것이지만(만일 신앙을 버리면 용서할 수 있지만) 그들을 적극적으로 찾지는 말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일단 당국자들 앞에 체포되어온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신들을 예배해야 하고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사법 제도가 그 권위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로마의 신들과 황제에 대한 예절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되어야 한다. 우선 법원의 권위가 이를 요구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통치권 자체를 거부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플리니우스에게 보내는 답신에 간결하게 나타난 트라야누스의 정책들은 비시니아의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트라야누스가 죽은 오랜 후에도 계속 성행되었다. 제 2세기, 그리고 제 3세기 일부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체에 걸쳐 기독교인들을 솔선하여 색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당국자들 앞에 소환되었을 때에는 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제국의 공식적 정책이었다.
3) 제3기(250-311)
데키우스(Decius, 249-251) 황제는 로마국가의 내적 쇄신을 추구하였다. 그는 제국의 종교적 기반이 국가예식을 거부하는 기독교 신자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처음으로 전반적인 국법을 반포하였는데, 그 목표는 기독교를 근절하고 모든 제국 국민을 로마의 국가종교로 복귀하게 하는 데 있었다.
박해 중에 허약했던 사람들의 수는 놀랄 만큼 많았다. 일부는 그간 오래 계속된 평온한 시기가 그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제물을 바친 사람들도 있었고, 제신과 황제의 화상 앞에 분향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는 제헌 때에 재빨리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 또한 많은 신자들의 ‘배교’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 실제로 제물을 바치지 않고 제헌위원회에 뇌물을 주고 증명서를 얻어낸 사람들이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의 이름을 제헌자명부에 오르게 한 사람들이거나, 진실한 신자들로부터는 이미 배교자요 그리스도 부인자로 간주되었다.
로마제국의 유능하고 공적이 많은 부흥자인 디오클레시아누스(Diokletian, 284-305)는 오랫동안 기독교를 그의 측근자들에게서까지 관용했었다. 그의 아내 브리스카와 딸 발레리아가 신자로 통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돌연 303년 그때까지의 모든 박해 중에서 가장 피비린내나는 박해를 시도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와 로마제국간의 결전이 되었고,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의 승리로 끝났다.
3. 배교자에 관한 논쟁
배교자(lapsed), 즉 박해기간 동안 어떤 형태로든 신앙을 저버렸던 자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북아프리카 지방(카르타고)의 일부 고백자들(confessors, 박해기간 동안 투옥과 고문을 견뎌낸 이들)이 교회와 의논도 없이 배교자들을 너무나 쉽게 용납하였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250년 초) 직전 주교의 직분에 올랐던 키프리아누스는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여, 서신 왕래를 통해 교인들을 계속 지도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을 비겁하다고 간주하였다. 당시 키프리아누스의 권위가 상당히 실추되었으며, 키프리아누스보다는 오히려 신앙 때문에 곤경을 겪었던 카르타고의 고백자들이 특히 배교자들의 복원 문제에 있어서 그보다 더 많은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되었다.
주교를 싫어하였던 장로들 가운데 일부가 고백자들에게 합세함으로써 카르타고 및 그 주변 일대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251년 5월 키프리아누스는 주교공의회(synod)를 소집하여 배교자 문제를 결정하였다. 그 회의가 내린 결정은 비록 속죄를 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이교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 사람들은 임종 때나 사면을 받을 수 있고, 단지 증명서만 받은 사람들은 여러 속죄 기간을 거친 후에 사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교회 권징(勸懲)의 3가지 중요한 원칙이 세워졌다. 첫째, 죽을 죄, 심지어 배교라도 사면할 권리와 힘이 교회에게 있다. 둘째, 권징 문제에서 최종 권위는 주교들과 성령의 전(殿)인 공의회에 있다. 셋째, 평신도 가운데 무가치한 사람들이라도 교회는 받아들여야 한다.
* 이렇게 기독교는 혹독한 박해속에서, 마치 가시넝쿨속에서 핀 장미 꽃과도 같이 박해를 넘어
그 생명력을 온세상에 전하였다. 이른바 피의 복음이요, 참된 생명의 복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