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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렁 씨리므엉 Maj Gen CHAMLONG SRIMUANG
한국에서는 짬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이름은 짬렁이다.
1935년 짬렁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에서 이민 온 생선장수로 그가 태어나고 머지않아 죽었다.
짬렁은 12살 때, 어머니가 우체부와 재혼을 하면서 좋은 아버지를 얻었지만 가난은 계속되어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었다.
어릴 때부터 짬렁은 가난했지만, 영특하고 노력하는 소년으로 항상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래서, 입학하기 힘들다는 좋은 중학교에 가장 높은 성적으로 입학하여 전교 1등을 차지했다.
가난한 짬렁은 일반 대학보다는 어렵다는 쭈라쩜끄라오 사관학교(Chulachomklao Royal Military Academy)에
입학하기를 원했는데, 이유는 학비와 생활비가 없는 것과 장학금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짬렁은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생도의 대표가 되면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에 짬렁은 육군사령관에서 수상이 된 쁘렘의 비서장관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5년에는 첫 민선 방콕시장으로 선출되면서 솔선수범하는 업무와 청렴 결백함이 알려지면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2기 방콕 시장에도 재선되었다.
남색의 검소한 농민복장과 뚝뚝을 타고 출근하는 그의 모습은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공무원의 모범으로 인식되었다.
1992년에는 자신이 신앙하는 신흥 불교 종파인 싼티아쏙을 바탕으로 한 파랑탐마(불법의 힘)당을 창당하여 총선에서
35석을 획득했다.
그러나, 쿠테타를 일으키고 수상이 된 쑤찐다 육군 사령관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비판 집회를 계속하면서 군경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수십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1992년 5월 유혈혁명이다.
이런 혼란을 푸미폰 국왕이 개입하여 두 사람을 불러 중재를 시켰다. 결국, 쑤찐다 수상은 사임하고 은퇴하였다.
이후 짬렁씨는 중앙 정부에 부수상까지 올라갔지만,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주도했다는 나쁜 이미지 때문에
수상까지는 이르지 못 했다.
결국, 1996년에 3번째의 방콕시장에 도전하지만 실패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짬렁은 국가를 사랑하는 민족주의자로 최근에는 깐짜나부리에서 농업을 하면서 후진양성을 위한 교양강좌를 열고 있다.
짬렁은 종교적이 이유로 성 생활을 하지 않고 채식주의로 하루 1식을 하면서 나무 판자 사이에서 자는 스님과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창 맥주가 주식 시장에 상장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면서 다시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짬렁씨는 자신이 파랑탐마당의 총재 시절에 정치에 입문시킨 탁씬이 타이락타이당을 만들어 수상에 취임하자 수상 고문을
맡기도 하면서 탁씬 수상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탁씬수상이 너무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더 이상 짬렁의 충고를 듣지 않으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졌다.
탁씬 수상이 친코퍼레이션을 싱가폴 회사에 매각하면서도 한 푼의 세금도 납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짬렁씨는 260억 바트를
빈민구제을 위한 기금으로 내라고 공개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탁씬 수상에 대해서 사임하라는 요구를 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연대”의 공동 대표로 합류 하면서
탁씬 사임 시위의 선봉장을 맡고 있다.
첫댓글 잠롱(잠렁)은 우리의 모범 답안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사실 그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자신의 생활에 반영시키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가 존경을 받고 있는 태국은 아직 양심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다. 물론 권력욕으로 물든 천마의 가족은 제외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