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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유형문화재80호(여계 묘역 구로구)
여계 묘역 시도유형문화재80호(구로구)
구로구 고척 2동에 있는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묘역이다.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시조는 중국 내주 사람인 여어매(呂御梅)이며, 본관은 경상남도 함양이다. 여어매는 원래 당나라 사람으로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는데, 황소의 난을 피하여 통일신라 헌강왕 3년(877) 신라에 귀화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하여 살았고, 고려시대에는 공조전서를 지내었다. 묘역에는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선조인 숭의랑공(崇義郞公) 여계(呂稽)(?~1421년)의 묘가 윗쪽에 있고 그 아래쪽에 그의 부인의 묘가 있다. 숭의랑공(崇義郞公)은 조선 전기의 인물로 태종 때에 호조좌랑(戶曹佐郞),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3년(1421)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종 10년(1428)에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부인은 당시 정승을 지낸 심백덕의 손녀이며, 판사를 지낸 심의구의 딸인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묘역의 총 면적은 1025㎡이며, 봉분 2기, 묘비 1개, 상석 2기, 문·무관석 2기가 있다. 조선 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분묘 양식으로, 지석과 기단석 등은 물론 묘비와 문·무관석의 양식 연구에도 가치가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80호(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반야바라밀경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80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읽혀졌던 대표적인 불교 경전 중의 하나로서, 금강경(金剛經) 또는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고도 불린다. 대승불교과 소승불교가 대립하기 이전에 형성되어 ‘공혜(空慧)’를 근본으로 삼고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이치를 요점으로 무집착(無執着)의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이 경전은 제5조 홍인(弘忍)과 제6조 혜능(慧能) 이래로 선종에서 특히 중시되고 있는 경전이며,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되던 초기부터 전래되어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권장에 의해 널리 유포되었다. 범어사(梵魚寺)에는 6종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판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 1415년에 간행된 이 책은 아주 오래된 판본으로 조선시대 목판본으로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공민왕 6년본(1357년), 공민왕 12년본(1363년), 우왕 13년본(1387년), 14세기 전기 고려본(高麗本) 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범어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도 이들에 못지않은 제작 년대와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강원도 유형문화재80호(강릉 오규환 가옥 강릉시)
강릉 오규환 가옥 시도유형문화재80호(강릉시)
강릉시의 중심부에 있는 초가지붕집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왼쪽으로 2개의 방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부엌이 있다. 겹집양식으로 뒤쪽에 안방과 골방을 배치하였고,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네귀퉁이에 있는 기둥은 안으로 기울어지도록 세웠으며, 못을 사용하지 않고 이음·새끼줄 등을 이용하였다. 특히 부엌쪽은 초가지붕이 땅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다. 흙벽으로 되어있고 목재의 가공 등이 거친 편이다. 흙과 돌로 된 담이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평면 양식은 田자에 가깝지만 움집과 같은 느낌을 주는 특이한 집으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옛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80호(이원익 선생 영정 광명시) 이원익 선생 영정 시도유형문화재80호(광명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원익(李元翼)(1547∼1634) 선생의 초상화이다. 선생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시킨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가는 데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에 오르기도 하였다. 호조·이조판서(判書)와 영의정까지 역임한 문신이다. 오사모(烏紗帽)에 정장 관복을 입고 호피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우안교의좌상(全身右顔交椅坐像)이다. 전체적인 형식에 있어서 공신도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호성공신상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가슴에 부착된 단학(單鶴)흉배는 이 초상화가 당하관(堂下官)재직시에 그려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로 70㎝, 세로 150㎝의 크기이다.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오른손에 부채를 쥔 채 왼손에 대를 잡고 있는데 손의 표현이 미숙하다. 얼굴에는 음영효과를 주었으며, 수염·눈썹·뺨 등은 묵으로 엷게 칠한 후 묵선으로 다시 덧칠하였다. 눈은 금가루에 아교를 개어 칠한 것으로 보일 만큼 눈동자 주위에 금니가 남아있다. 선생이 공신의 서열을 받기 전인 선조 13년(1580)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이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데 비해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경북 유형문화재80호(난포 고택 경산시) 난포 고택 시도유형문화재80호(경산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전주(全州)를 방어했던 난포(蘭圃) 최공철(崔公鐵)이 지은 집이라고 전한다. 명종(明宗) 원년(元年)(1546)에 지은 것이라 한다. 『난포공실기(蘭圃公實記)』에 의하면 임진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았다고 전하였으나 건축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서는 대략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집으로 보인다.『가경(嘉慶) 14년』(1809)이라고 쓰여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어, 순조 9년(1809)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정침·아랫사랑·중사랑·방아실·행랑채와 마루 그리고 사당 등이 고루 갖추어진 집이었으나, 지금은 정침·행랑채·사당만 남아있다. 정침은 앞면 7칸·옆면 1칸 반의 규모로 ㅡ자형이며 지붕이 특이하다. 가운데 5칸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하고, 양쪽 1칸씩은 눈썹지붕을 덧달아서 팔작지붕처럼 만들었다. 또한 대청은 문을 달아 막았으며, 뒤쪽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방과 이어지도록 하였다. 부속건물은 앞면 4칸·옆면 1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안정사 대웅전 시도유형문화재80호(통영시)
벽방산 기슭에 위치한 안정사(安靜寺)는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원년(元年)(654) 원효대사(元曉大師)가 37세 되던 때에 창건(創建) 하였다고 한다. 1309년(충선왕1년)에 회월선사가 중건한 뒤 1626년(인조 4년)과 1733년 (영조 9년)에 중수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영조 27년(1751)에 다시 지었고, 대웅전(大雄殿)도 이 때에 다시 지은 것이다. 1841년(헌종7년), 1880년(고종 17년)에 중수가 있어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정사 대웅전(安精寺大雄殿)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기둥 사이에는 각각 2구의 포를 배치하였다. 단청으로 채색한 화려한 공포는 일반적인 다포계 후기의 경향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에는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조성한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안정사 대웅전(安精寺大雄殿)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법당건물이다.
우화교 신사비 시도유형문화재80호(단양군)
조선 영조 29년(1753) 단양군수(丹陽郡守)였던 이기중(李箕重)이 단양천(丹陽川)에 돌다리를 만든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다리는 ‘우화교(羽化橋)’라 이름지었는데, 큰 홍수로 인해 파괴되고 현재는 이 비만 남아 있다. 비는 네모진 받침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비몸을 세웠다. 비문에는 다리를 설치할 때 참여한 사람들과 목공, 토공, 석공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다리를 놓은 그 이듬해인 영조 30년(1754)에 이 비를 세웠다.
신원사 대웅전 시도유형문화재80호(공주시)
신원사(新元寺)는 계룡산 기슭에 있는 절로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11년(651)에 보덕(普德)스님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도선(道詵)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은 절을 중창하였고, 고려시대인 1298년 무기(無奇)스님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1394년 무학(無學)대사가 중창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다. 지금의 대웅전(大雄殿) 건물은 조선 고종 13년(1876)에 보연화상(普延和尙)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처마의 끝을 살짝 올려 우아한 멋을 나타내었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며, 연꽃을 조각하여 장식하였고 매우 간략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주존으로 하여 좌측에 관음보살(觀音菩薩), 우측에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 위에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다.
전주부 지도 시도유형문화재80호(전주시)
조선시대에는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로 부(府)가 쓰였는데, 전주부(全州府)는 지금의 전주시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지도는 전주부(全州府) 성(城) 내부를 중심으로 부내의 전 지역을 그린 것으로서, 4폭의 대형 병풍식으로 되어 있다. 지도에는 성의 표시와 성문, 관가의 배치 향교, 서원, 수목 등을 표시해 놓았고, 성밖은 산천의 지형을 그린 후 각 면의 이름을 써 붙여 놓았다. 귀퉁이에는 전주부(全州府)의 사방 거리와 이웃 군현으로 부터의 거리를 표시해 놓았으며, 부내 4면의 가구수 3783호, 부외 각면의 가구수 12215호 등 총 31개면의 15998호를 기록해 두었다.
낙안 금둔사지 삼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80호(순천시)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2km 떨어진 금전산(金錢山)의 무너진 절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금전산(金錢山)에 금둔사(金芚寺)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절터를 금둔사(金芚寺)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는 조그마한 암자가 지어져 금둔사(金芚寺)의 명맥을 잇고 있다. 석탑의 후편(동편)에는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탑의 전면(全面) 서편(西便)으로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는데 각면에는 2추(樞)씩의 안상(眼像)이 조각되었다.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79년 7월 10일 복원하였다.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2중기단(重基壇)의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양식(典型樣式)을 따르고 있다. 기단부(基壇部)에는 하층기단(下層基壇) 면석(面石)둘레에는 장대석(長臺石)8매를 돌려 지대석(地臺石)을 이루고 있다. (문경의 봉암사(鳳岩寺) 3층석탑에서도 이 예가 보임)) 하대중석(下臺中石)은 하대석(下臺石)과 한 몸으로 조성(造成)되었는데 5매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주(柱)씩이 모각(模刻)되었으며, 하대갑석(下臺甲石)은 4매로 구성되었으나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으므로 상면(上面)에는 원호(圓弧)와 각형(角形)의 상대중석(上臺中石)받침이 각출(刻出)되었다. 상대중석(上臺中石)은 4매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撑柱) 1주(柱)씩이 모각(模刻)되었으며 이들 기둥사이 즉 8면에는 8부중상(部衆像)을 강하게 양각(陽刻)하였다. 상대갑석(上臺甲石)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으며 하부에는 부상(副橡)이, 상부에는 각형(角形) 2단의 탑신(塔身)받침이 각출되었다. 탑신부(塔身部)에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매석(枚石)으로 되었으며, 1층탑신(層塔身)은 우주(隅柱)가 모각(模刻)되었고 전(前) 후면(後面)에는 문비(門扉)와 자물쇠가 조각되었으며 좌우면에는 다과(茶菓)를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 양각(陽刻)되어 특이한 수법(手法)을 나타내고 있다. 2, 3층탑신(層塔身)은 우주만 모각(模刻)되었으며, 각 층(層) 옥개석(屋蓋石)은 층급(層級)받침이 각각 5단씩이며 낙수면(落水面) 하단선(下端線)은 수평(水平)으로 되었다. 낙수면은 평박(平薄)하여 완만(完滿)하게 경사지었으며 네 귀에서 반전(反轉)이 강하게 나타나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면에는 각형(角形)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현재 3층 옥개석(屋蓋石) 정부(頂部)에 찰주공(擦柱孔)이 보이며 그 이상은 전실(全失)되었으나 암자 앞마당에 복발(覆鉢)과 앙화편(仰花片)으로 추정되는 부재(部材)가 있는 바 이 석탑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복발(覆鉢) 융기(隆起)된 2조의 횡선(橫線)이 각출되고 4면에 연화문(蓮花文)이 양각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전체 높이는 4m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양식을 갖추고 있는 9세기경의 작품으로 특히 1층탑신 좌우면에 불상을 향하여 다과(茶菓)를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특이한 예(例)로 주목되며 각부의 비례(比例)도 좋고 조각수법이 세련된 수준급의 석탑이다. 보물 제945호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1988년4월1일 해지. |
종 목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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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북정록 (北征錄)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일기류 |
수량/면적 | 1책 |
지 정 일 | 2017.01.31 |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 (신당동,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계명대학교 |
관 리 자 | 계명대학교 |
설명
이 책은 신유(申瀏, 1619-1680)가 조선 효종 때 제2차 나선(Russian)정벌의 조선군 사령관으로 참전했을 때인 1658년 4월6일부터 8월27일까지 115일간 기록한 원정일기의 원본이다. 해외파병 관련 기록으로 외교와 군사연구의 중요한 문헌일 뿐만 아니라, 출정의 전말, 각지에서 차출된 명단, 날짜별 날씨·행군‧야영·러시아군과 벌인 전투상황 및 부하의 상태 등을 기록한 점에서 국방과 관련된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북정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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