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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의견>
*전체적으로 글이 늘어지는 편으로 내용을 함축했으면 함.
고향, 세고개의 힘(나의 힘, 고향 세고개)
나의 고향 세고개
(아래 문장을 위로 옮겨옴)
세고개 마을은 주자(朱子)의 후손 신안 주씨의 집성촌으로, 동네의 대소사에 뒷바라지를 해주는 금씨와 전주최씨 한집을 제외하면 30여 호가 되는 가구들이 모두 일가친척들로 이루어져졌으며 주자를 모신 사당 태교사가 있습니다. (주자 32세손)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로 세고개 마을은 임진왜란에서 남편 창도공(昌道公)을 잃은 부인 능성구씨가 병자호란을 피하여 일입, 탁립 등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 곳에 와서 살면서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살지 않았던 이곳은 산골짜기로 논밭이 전혀 없었던 탓에, 살면서 산비탈에 밭을 만들고, 개울가 주변에는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손이 번성하여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제가 태어났던 1955년도에는 30여 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고개 마을에는 논과 밭이 아주 적었고, 밭은 비탈진 산을 일구어 만들었기 때문에 주로 산등성이 있는 게 대부분으로 인근 동네에 비하여 비교적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예전에는 동네 앞에 있는 냇물이 맑아 이른 아침에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올갱이가 많아 냇물과 함께 했던 추억이 많습니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 고기 잡는데 따라가서 펄떡이는 고기를 바구니에 담아보았던 짜릿한 기억과, 올갱이 잡았던 일, 여름에 멱감은 일들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나는 세고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살면서 어릴 적,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하면서 생활했습니다. 이것이 고향이 나에게 준 커다란 힘이었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충북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3구 1285번지 세고개
세고개는 청주에서 버스를 타고 충주 가는 중간에 보천이 있는데, 이곳에서 물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야동, 도람말, 잔갈, 흐니실을 지나 원남면 마지막 동네입니다.
세고개라는 이름은 3개의 고개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었나 봅니다.
동네에서 웃골고개를 넘으면 진천군 맹동면 통동리가 되고, 남쪽방향으로 벼루재 고개를 넘으면 괴산군 도안면이 되고, 동쪽으로 베티고개를 넘으면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가 됩니다.
동네 앞에는 작지 않은 냇물이 있고, 냇물 건너편에는 덜산이 있고, 동네 옆과 뒤에도 바로 산이 있어서, 산속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골짜기였습니다. 집에서 밖을 보면 높지는 않지만, 어느 방향이든 산이 보여, 산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옆집과는 담 너머로 음식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깝기도 했습니다.
세고개 마을은 주자(朱子)의 후손 신안 주씨의 집성촌으로, 동네의 대소사에 뒷바라지를 해주는 금씨와 전주최씨 한집을 제외하면 30여 호가 되는 가구들이 모두 일가친척들로 이루어져졌으며 주자를 모신 사당 태교사가 있습니다. (주자 32세손)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로 세고개 마을은 임진왜란에서 남편 창도공(昌道公)을 잃은 부인 능성구씨가 병자호란을 피하여 일입, 탁립 등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 곳에 와서 살면서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살지 않았던 이곳은 산골짜기로 논밭이 전혀 없었던 탓에, 살면서 산비탈에 밭을 만들고, 개울가 주변에는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손이 번성하여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제가 태어났던 1955년도에는 30여 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고개 마을에는 논과 밭이 아주 적었고, 밭은 비탈진 산을 일구어 만들었기 때문에 주로 산등성이 있는 게 대부분으로 인근 동네에 비하여 비교적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예전에는 동네 앞에 있는 냇물이 맑아 이른 아침에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올갱이가 많아 냇물과 함께 했던 추억이 많습니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 고기 잡는데 따라가서 펄떡이는 고기를 바구니에 담아보았던 짜릿한 기억과, 올갱이 잡았던 일, 여름에 멱감은 일들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세고개 사연내용을 함축 했으면) ?? : 주제정리
여름에 해가 설핏해지면 밭일 하던 걸 멈추고, 냇가에 가서 올갱이를 잡았고, 겨울에도 큰 바위의 움푹 패인 곳에 올갱이가 잔뜩 들어있어 추운 날에도 올갱이를 잡기도 했습니다. 저녁에 삶아 빼 놓았다가 아침에 국 끓여먹고, 나머지는 밤늦도록 심심풀이로 먹곤 했습니다. 바늘로 빼 먹던 올갱이 맛과 국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결혼 후 육거리 시장에서 올갱이를 사다 끓여 보았는데 맛이 없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세고개에 올갱이 많다는 소문이 나면서 올갱이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쉽게 잊혀 지지 않나 봅니다. 시간이 흘러, 남편과 화양동에 갔다가 저는 잠깐사이에 아주 많이 잡았던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냇물에는 농사를 위하여 보가 만들어졌는데, 특히 덜밑보에는 제법 물이 깊어 여름철에 멱감고 놀기에 적당한 장소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들, 언니와 함께 몇 시간씩 물에서 놀며 자랐습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는 밤에 물이 깊지 않은 냇물로 어른들과 함께 저녁 먹고 목욕을 가기도 했습니다. 낮에 일하느라 땀범벅이 된 몸을 여럿이 밤에 가서 씻는 것인데 낮에 데워진 물이 미지근하여 목욕하기에 적당했고, 어른들 틈에서 마음 놓고 장난치며 놀다 와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동네 앞에 있는 냇물이 장마철이나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물이 불어 평소에 편안하게 다녔던 다릿돌로는 건너 갈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책보를 어깨에 메고 어른들에게 업혀서 물을 건너기도 하지만, 물이 많아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럴 때에는 강당(태교사 강당)에 모여 같은 학년끼리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학년에 다녔던 친구들이 남자 넷, 여자 일곱 명으로 그 당시로서는 많은 편이라 여러 가지 추억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6학년 때는 중학교 입시 준비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이라 밤에 집에 올 때는 무서워서 서로 앞에 가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 순서를 정해 번갈아 앞에 가기도 했고, 한 시간여 걸리는 거리라서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복습해 가며 무서움과 지루함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 때 당시 외웠던 세계의 나라와 수도이름은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동네가 워낙 산골이다 보니 산과 함께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봄에는 엄마와 산나물을 뜯으러 가기도 했는데, 나물이름을 가르쳐주시면, 재미있고 신기해서 잘 따라 했습니다. 하얀 앞치마에 한가득 뜯어 오신 연초록의 나물들을 마루에 펼쳐 놓았을 때, 풍겼던 풋풋한 향기는 지금도 코끝에 와 닿는 듯합니다.
동네앞산 덜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이면 알밤을 주우러 다녔는데 특히 알밤 줍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알밤은 비 오고, 바람이 부는 다음 날 아침에 가면 많이 주울 수 있었습니다.
굵고 빛깔이 좋은 것은 엄마가 장에 갔다 팔아서 돈을 쓰시거나 ,학용품을 사 주시곤 했습니다. 결혼 후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데리고 가서 알밤을 줍게 했더니 좋아했던 일도 있습니다.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중 아주 친했던 친구 인희 아줌마와는 마음이 잘 맞아서 소꿉놀이뿐만 아니라 쑥, 미나리 뜯기, 올갱이잡기 등 같이 하는 일들이 많았고, 더욱이 한 번도 토라지거나 싸우는 일이 없이 잘 지냈고 공부도 비슷하게 하였으며, 청주로 진학하여 학교는 같지 않았지만 중학교때까지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지금도 만나면 편안하게 옛날로 돌아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지냅니다.
세고개에 살면서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먹을 것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먹었던 것들이, 지금의 건강에 큰 힘이 되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산속에서 살면서 먼 길을 하루에 두 시간씩 추위와 더위 속에서 고생하며, 걸어서 학교에 다녔던 것이, 산을 좋아하고 지금의 나이에도 힘들지 않게 가고 싶은 산에 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봄에 연한 색의 새잎이 돋아날 때쯤이면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보아야 봄을 보낼 수 있고, 가을에는 산에 가서 윤이 나는 알밤을 주워야 가을도 보낼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맑은 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보면, 고향 덜밑보에서 개헤엄 치며 놀았던 기억에, 한번쯤 풍덩풍덩 헤엄 쳐 보고 싶은 충동에 빠져봅니다.
지금에 와서 고향 세고개를 생각하면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희미해지고 즐겁고 행복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언제나 그리운 나의 고향, 세고개 이름만 들어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눈앞에서 생생히 그려지는 소중한 기억의 공간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살아가면서 제게 큰 축복이고 기쁨이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세고개’소리만 들어도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삶을 키워준 청주 종중집(朱學舍)
청주 종중집(朱學舍)
공부를 해야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시기에 태어난 나에게 절대적인 힘이 되어준 집이 바로 청주 종중집입니다,
충북 청주시 수동 56번지 90-12호
이곳은 청주 대성여상 동북쪽에 위치한 제가 중학교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생활했던 곳입니다.
주씨 집성촌이었던 고향 세고개에서는 일찍이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각 가정에서 쌀을 내어 주씨 대종계를 만들어 운영하였으며, 집안별로 중종계, 소종계도 있었습니다.
대종계를 하는 연초에 공부하는 학생이 있는 집에, 공책과 연필을 나누어 주어, 학용품이 귀하던 시절에 무척 뿌듯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1949년도에는 교육에 일찍 눈을 뜬 몇몇 어른들의 제안으로 청주시 수동에 쌀 70가마를 주고 집을 구입하여 청주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매우 곤궁하던 시기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집을 구입하여 고향을 떠나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마을 어른들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 후 중학교 평준화가 되면서 음성 평곡리에도 종중집을 마련하여 고향에서 가까운 음성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교직에 있을 때 승용차를 타고 백암으로 연수를 가던 중,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학교 다닐 때 어떻게 다녔느냐’는 교감선생님의 물음에 ‘저는 고향에서 종중집을 마련해 주어 그 곳에서 자취하며 10년 다녔다’고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며 ‘아, 그래? 대단하네, 그게 바로 주학사(朱學舍)일세’ 하시며 말씀하셨을 때 은근히 우쭐해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부터 주씨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고, 산골짜기 깡촌이라고만 생각했던 고향 세고개가 너무나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장시절 (종중사에서의 추억) : 주제 정리
퇴직 후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종중집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겨볼 겸 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저보다 먼저 생활했던 아저씨, 조카님, 일가친척 오빠들, 후배들을 만나고, 전화를 하여 그 당시의 얘기들을 들었습니다.
저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생활했지만, 20년 먼저 사셨던 어른들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졸업까지 12년 동안 가장 오랜 기간 생활하셨던 아저씨의 말씀을 들으며, 그 당시 얼마나 어렵게 생활하셨는지 생각을 해볼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고향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을 구입할 당시 초가집으로 방3칸 부엌 3개와 방 사이에는 마루가 있었고 재래식화장실이 마당에 있었습니다.
물은 우암산 산비탈에 공동우물을 이용하였는데, 두레박으로 반정도 퍼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이를 양동이로 길어다 먹는 형편이었습니다. 물이 넉넉히 않아 학교 끝나고 가면 물이 거의 없어 밤중에 가서 길어오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이곳의 물이 부족하면, 우암초등학교 뒤에 있는 집에서부터 10분 남짓 걸리는 영진약국 옆 미나리꽝 부근의 우물을 길어다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이웃집에 펌프가 설치되면서 이웃집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합니다.
종종집의 위치가 오정목(현 방아다리)에서 가까운 곳인데, 집이 초가집이라 가을이면 지붕에 이엉을 엮어야만 했습니다. 동네에서 이엉을 엮어 어른들이 두어 시간 걸리는 도안역까지 지게로 져다 주시면 화물칸에 싣고 갔습니다. 기차가 오정목 근처에 이르렀을 때, 화물칸에서 밖으로 밀어내면 길가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이 받아서 집까지 옮겨 놓습니다. 그러면 고향에서 오신 몇몇 어른들이 지붕을 이어주시고 가시는 것이 연례행사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후 초가집은 제가 살기 시작했을 때 기와집으로 변했습니다.
한편, 고향에서 장작을 작게 쪼개어 포대에 넣어 와서 연료로 사용했는데, 그 때에는 나무 벌채에 관해 단속이 심해 지서를 피해 가지고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쌀과 반찬은 고향에서 가져오는데 반찬으로는 간장, 고추장, 된장이 전부였으며, 가을에 김장을 하면 양철통에 담아 재문지를 덮어 가지고 오는데 차를 타면 김치냄새가 진동을 하여 민망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원서 써 주신 청주여중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학교는 종중집에서 다니면 된다’ 고 하시는 부모님 말씀에 따라 1968년부터 종중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다행히도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 봄에 동네어른들께서 오셔서 마당에 펌프를 설치해 주셔서 물 걱정은 안 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던 해, 중학생, 고등학생, 회사원 등 12명이 종중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막내인 저로서는 잠잘 때 여전히 엄마의 품이 그리운 어린아이였습니다. 주말이 되면 엄마가 보고 싶고, 필요한 물건도 가지러 종종 고향집에 가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용돈이 필요할 때 일일이 집에 가지 않고, 간단히 메모를 해서 고향 가는 사람 편에 보내면, 부모님께서 보내주시는 돈이나 간단한 물건을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일가친척이기 때문에 특별히 어렵거나 불편한 점은 별로 없었고, 공부를 할 때도 웃학년 언니, 오빠들한테 모르는 걸 물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저는 8촌 오빠가 한 학년 위라서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TV는 물론 라디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대부분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였고, 서로가 감시기능(?)을 한 셈이었습니다. 종중집에 살면서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친구들을 절대로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녀가 같이 생활하고, 여럿이 있다 보니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오게 되면 집 분위기가 안 좋을 듯 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대문 밖에서 부르면, 나가서 볼일이나 얘기를 하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시절에는 여름에 석유곤로를, 겨울에는 연탄을 사용했는데, 연탄불을 꺼 뜨려 고생한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불이 꺼졌을 때 옆 부엌에서 얻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겨울에 연탄재 버리는 일이 아주 힘들었는데, 모든 사람이 학교 간 뒤에 연탄재 수거하는 리어카가 오기 때문에 대문 앞에 연탄재가 수북하게 쌓인 적이 많았습니다. 일요일에 빨래를 널면 마당에 있는 줄에 빨래가 가득했고, 학생이 많다 보니 아침에 화장실을 가려면 한참씩 기다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생활이 중학교 다닐 때 보다는 고등학교 때가 나았고, 대학교 다닐 때는 비교적 수월하게 다녔던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가 점차로 발전해 가는 시기라서 그렇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그 때 반찬으로 맛있게 먹었던 감자볶음이나 오뎅조림 등이 생각납니다. 겨울에 된장에 김치를 넣어 끓여 먹었던 것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결혼하고 생각이 나서, 남편한테 얘기하면서 끓였더니 ‘맛이 없다’고 해서 민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방에 들어가시자고 할 수도 없었고, 대접할 게 아무것도 없어서 선생님은 마루에 앉아서 말씀만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했는지 두고두고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골에서 나와 자취생활 하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선생님과는 교직에 있을 때 연락이 되어, 그 때 하지 못했던 것을 조금은 갚아드릴 기회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 이었습니다
고향의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고, 그 당시 여자를 대학 보내는 일도 고향에서는 없었던 때였습니다.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설 명절에 오셨을 때, 대학입학합격증을 보여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사촌(저에게는 5촌아저씨)들한테 얘기하셨다고 하시면서 ‘그 까짓 계집애 시집가면 그만인데 무슨 대학을 보내느냐’ 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하시어 저도 거의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속상해 하는 저를 보신 엄마가 다시 아버지께 말씀드려보라고 용기를 주셔서 서울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꼭 대학에 가고 싶다’고 간곡히 말씀드렸더니 허락을 해주시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공부를 열심히 했기보다는 종중집이 있었기에 감히 시골에서 청주로 쉽게 중학교에 올 수 있었고, 무사히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세고개 고향 어른들이 마련해 준 종중집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껴 봅니다.
현재는 종중집을 마련해 주셨던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초창기에 생활하셨던 분들도 돌아가셨거나, 연세가 80이 넘어 오래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종중집은 공부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편물, 양재 등 기술을 배우거나 직업을 가진 사람도 생활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35년 동안 약 70여명이 이 곳에서 생활했으며, 5남매 모두가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 집도 있었습니다.
전 충북도지사를 비롯하여 은행장, 경찰, 약사 등 휼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던 영광스런 청주 종중집은 주씨 가문의 중요한 교육의 보금자리였습니다.
현재 청주 종중집은 고향이 원남지 조성으로 수몰되면서, 부모님들이 고향을 떠나, 존재이유가 없어져 1984년에 매각되였습니다.
이제 청주 종중집은 없어졌지만 나의 삶을 키워 준 가장 중요한 마음속의 집이 되어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향 어르신들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삐삐 요리방
내용을 함축하여 재미있는 글이되게 하였으면함.
예전에 방송되었던 ‘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가끔씩 ‘내가 저런 프로그램에 나올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999년 3월 3일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이틀 째 되는 날,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중3, 중1의 두 딸들의 인사가 예전과는 다르다. 어제 직장에서 새로운 보직도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퇴근하고 맛사지 받은 후 미용실에 들려서 머리도 자르고 왔다. 등교하기 전에 아이들이 ‘엄마, 오늘 무슨 옷 입고 갈 거야?’ 하고 묻는다. 평소에는 등교하기 바쁜 아침시간에 하지 않던 얘기였고, 싱글벙글 묘한 웃음을 지면서 ‘오늘 학교 갔다 와서 봐요’ 하면서 학교에간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바빠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출근을 했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그 당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학교에서도 선택과목으로 환경관련교과가 신설되었고 ‘환경 과학’ 교과를 3학년 12학급에 1시간씩 3년째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자연스레 ‘환경’에 대해 관심도 많았고, 또한 재미있게 열심히 하던 시절이라, 학습자료도 다양하게 만들어 가르치고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서 동영상 CD를 동료교사와 만들어,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환경’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늘 귀담아 듣는 편이었다.
어제 시업식을 했으니 오늘이 수업 이틀째다. 그런데 수업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웬 낯선 남자가 와서 ‘환경’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얘기를 하자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예쁘게 생긴 여자가 하는 말이 ‘오늘 수업에 같이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다른 사람과 같이 들어가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이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업종이 울리면서 같이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내가 자부심을 가지고 가르쳤던 과목이라 ‘그냥 수업하는 거 보여주면 되겠지’라는 마음이었다. 그 짧은 순간, 지난 해 가르쳤던 학생들이라 얼굴과 이름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뒤에 앉아서 수업을 참관하라’고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00학생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 그러자 뒤에 있던 다른 학생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고, 여기저기서 엉뚱한 질문을 하며 분위기 갑자기 이상해졌다.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학생들의 태도에 놀랐고, 순식간에 수업은 엉망이 되어 수습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때 갑자기 교실에 있는 TV모니터가 켜지면서 요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리사 옆에 내가 예전학교에서 가르쳤던 모델이 된 제자가 나왔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화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보니, 내 얘기를 하면서 요리를 같이 하는 내용으로 전개가 되었다. 학교 다닐 때 가르쳤던 나를 위해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리가 완성되자 갑자기 모델이 된 제자가 나한테 편지 쓴 것을 읽는 게 아닌가! ‘외국에 행사가 있어서 찾아뵙지 못하는 대신 선생님을 생각하며 만든 요리를 전해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수업에 같이 왔던 예쁜 여자가 요리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제자한테 영상으로 답장을 하라고 한다. 나는 고맙다는 얘기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요그 후 요리를 맛보니 또 요리가 어떠했는지 얘기하라고 하면서 마이크를 들이댄다. ‘아주 맛있고 특별한 요리였다’ 고 말했고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수업에 같이 들어 온 여자가 ‘지금까지는 연출이었다’고 실토를 한다. 한바탕 속아 넘어간 것이 어이 없었지만, 학생들과 같이 바닷가재 요리를 나누어 먹으면서 수업은 끝이 났다.
수업에서 나오니 현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방송국에서 탤런트가 왔다고 하여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던 것이다. 그 일로 어느 여학생이 오디션 보러 서울 간다고 결석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어서 학교에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TV를 자주 안 봐서 예쁜 여자가 탤런트라는 사실도 몰랐고, 평일 낮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없어서 ‘삐삐 요리방’ 이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삐삐 요리방’은 요리를 만들어 은사님을 찾아 전달하는 내용으로 예전에 KBS1에서 방송되었던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구성이었다.
깜찍하게 나를 속인 그 제자는, 청주 인근 고등학교 근무할 때 2,3학년 담임을 했었는데, 얼굴이 조그마하고 키가 커서 눈에 띄는 학생이었었다. 장래 희망이 모델이라고 해서 긍정적인 얘기를 많이 해 주었고, 학교행사가 있을 때는 사회를 본다거나 앞에서 설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 후 모델이 되어 방송에도 종종 나오는 걸 보았고, 졸업 후에도 집으로 찾아와 진로에 대해 상의한 기억이 났다.
나중에 듣고 보니, 본에서 학교로 전화가 왔을 때 교장선생님의 배려가 있었고, 후배교사가 중간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프로그램 촬영할 때까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비밀을 지켜 준 두 딸이 있어 감쪽같이 속아넘어 갈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방송이 나온 후에 동네 슈퍼마켓에 갔더니 ‘어제 방송 보았다’면서 ‘출연료를 얼마 받았느냐’고 물어보며 아는 척을 하여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촬영된 프로그램은 1999년 3월 9일 KBS2에서 10시 15분부터 방영되었고, 내용을 남편이 녹화를 해 주어 3월 말에 있었던 어머님 생신에 오신 친척들이 모여서 다 같이 보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행복을 만나는 경우도 있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남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행복한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모델이 되어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제자에게 축복과 발전이 함께 하라고 기원하며, 가끔씩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추억을 곱씹어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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