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약속
1.
8만여 관중이 열대수풀보다도 빽빽하게 운집한 브라질 상파울로 월드컵 경기장, 방송국 중계석에는 한국 팀이 결승에 올라온 것은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이변이라며 각국 아나운서들이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독수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는 높은 하늘은 수억 년 지켜온 아마존의 자존심을 상징하고 있는 듯 하였다. 양 팀의 선수들 모두가 살인적인 더위에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렸고 전광판의 시계도 멎은 지 오래여서 주어진 로스타임도 다 끝나가고 있었다. 현대와 원시의 색깔이 함께 어우러진 관중석의 카드섹션도 더 이상 펼쳐지지 않았다.
예상을 깨고 결승에 올라온 한국 팀은 롬멜의 전차부대 같은 독일 팀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끔씩 붉은 악마와 같이 역습을 노려보았지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골 결정력의 부족이었다. 양편 득점 없는 가운데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 쓰러져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골든골로 결정짓는 연장전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이제 팀에는 더 이상 써먹을 작전도, 교체할 멤버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최선을 다하자고 선수들에게 독려하는 것이 감독의 유일한 작전내용이었다. 모두 그라운드로 들어 갈 때 지수도 따라 들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작전 지시도 내리지 않아. 한 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거야.’
그리고 선아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신발은 진열장에 넣고, 티는 내 방에 걸어 놓을 거야, 절대 빨지 마, 오빠의 땀이 물신 배어있는 그대로가 좋아. 오빠가 생각 날 때마다 난 그 냄새를 맡을 거야.’
2.
지수의 무명의 시절, 꿈에 그리던 프로 팀에 입단은 했지만 2년이 지나가도록 두 골밖에 넣지 못해 좌절하고 있던 때였다. 장래가 유망하다던 고교시절의 찬사는 다 어디로 가고 벤치에서 구경만 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만 가는데, 훈련 때마다 감독과 코치에게 모욕적인 면박을 당하면서 하루하루 자존심을 구겨야 했다.
“나이가 벌써 스물 둘인데도 아직까지 감각이 그 모양이냐. 일찌감치 생각을 달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앞길이 창창하니깐 말야.”
도대체 축구만 하며 성장한 자신을 보고 이제 와서 생각을 달리해라 한다면 한강에 처박혀 죽으라는 뜻 아닌가? 하긴 모욕적 언사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면 되니 그래도 연습할 때가 제일 나은 편이었다. 스타가 되지 못한 프로선수가 겪는 고충은 가시덤불로 우거진 정글 속을 헤치는 것보다도 힘든 것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선배들의 짐꾼이 되어야 하고 합숙소의 청소도 도맡아야 했다. 게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무명의 선수는 아예 유니폼을 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연봉만 타먹는 선수를 좋아할 팀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골 못 넣는 공격 선수는 스타는커녕 인간도 아니야.’
그날은 훈련 도중 오른 쪽 발목에 금이 가고 왼쪽 검지손가락이 꺾어지는 부상을 당한 후 병원을 드나들며 한참 치료를 하고 있던 때였다. 진료를 끝내고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계산할 차례를 기다리는데, 뜻밖에도 지수 선수를 알아보는 고등학교 2학년 쯤 되어 보이는 나이 어린 처녀가 있었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저승사자보다도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 군데군데 빠져버린 머리카락 때문에 희끗희끗해진 자국을 감추려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환자복 차림으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천리마 축구단 지수 선수 아니세요? 맞죠?”
동료고 선배고 간에 호의적인 소리를 들어본 지가 하도 오래된 지수는 무명인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반가웠다. 매일같이 병원을 들락거려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들 중에서 여태껏 누구 하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야 드디어 자신을 알아보는 팬이 나타나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였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은 출전을 안 하는데...”
“어머 반가워요. 전 알아요. 지수오빠가 내가 좋아하는 야구선수 최승엽을 닮았거든요. 오빠도 언젠가는 꼭 최고의 스타가 될 거예요.”
“아니 그럼 내 팬이 아니고 야구 최승엽 선수 팬이란 말이야? 어쩐지... 쳇!”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속 있는 그대로 지껄이는 가식 없는 소녀라서 더욱 좋았다.
“야구선수는 아니래도 처음 만난 프로선수신데, 싸인 하나 해 주실래요? 여기...”
“그러지 그럼...”
“전화번호도 적어주시면 안돼요? 핸폰...”
“전화번혼 왜?"
“골 넣는 날 맛있는 거 사달라고 전화 할려구요. 제 이름 ‘선아’거든요. 유명해진 다음에도 잊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그런데 골? 내가 골 넣을 때....?”
지수는 웃음이 나왔다. 프로선수생활 벌써 3년차인데, 지난 2년 동안 넣은 골이 고작 두 꼴, 그러니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교시절엔 그래도 득점왕을 두 번씩이나 했던 유망한 골잡이였었다. 하지만, 프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은 골은커녕 벤치만 지키고 앉았는데 어느 세월에 골을 넣고 맛있는 것을 사줄까마는, 유일한 팬이 하는 부탁이라 못이기는 체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최승엽은 톱스타지만 난 꼴찌선수야, 무명선수라구... 약속은 하겠는데 나에게 맛있는 거 얻어먹는 거 보담은 이담에 시집가서 네 남편에게 얻어먹는 게 빠를지도 모르지...”
“거만하지 않는 꼴찌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일등 하는 사람은 자만하다가 추락하기 쉽지만 꼴찌는 맘만 먹으면 많이 올라갈 수 있어 좋거든요. 오늘부터 꼴찌오빠 지수 선수를 콱! 믿을 게요.”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 새 전자 게시판에 지수의 번호가 깜빡이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후 헤어져 택시를 타고 돌아왔지만 눈만 감으면 선아가 하던 그 말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거만하지 않는 꼴찌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 오늘부터 꼴지오빠 지수 선수를 콱! 믿을 게요.’
그러고 보니 지수는 왜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하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을 넣을 때 팬은 자신을 위해 축하해주는데, 그럼 자신은 단 하나밖에 없는 그토록 소중한 팬을 위해 언제, 무엇으로 축하해주나? 최승엽 선수는 워낙 팬이 많으니까 신경 안 써도 별거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연고 없이 아는 유일한 팬이 하나 생겼는데, 받는 것만큼 주는 것도 소중하게 알아야 진정 프로 아닌가?
코치가 하던 말도 생각났다. ‘넌 항상 핑계가 많아.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야.’ 하던 그 말... 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맞아, 난 너무 건방졌어. 그 고딩 팬이 날 깨우쳐준 거야.’
그러고 보니 갑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진정한 스타가 되려면 그라운드에서 골을 넣더라도 조금은 겸손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자신의 팬 선아를 위해 골을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야 맛있는 거라도 사주면서 진정으로 팬에게 보답할 테니까.
3.
치료와 재활훈련까지 모두 끝나고 팀에 합류한지 만 두 달이 되는 날, 그날은 5월의 시작을 알리는 첫 게임이었다. 지수는 교체멤버로 후반전 25분이 지날 무렵 투입되었는데 정말 운이 좋은 날이었다.
풀백 범근이 형이 패스한 것을 동철이가 받아 드리볼 하며 치고 들어갔다. 지수는 그 오른쪽으로 1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따라가는데 질주하던 동철이가 페널티 부근에서 갑자기 멈칫 하더니 왼 쪽으로 수비를 제치고는 강력한 슛을 날렸다. 놀란 키퍼는 쓰러지면서 황급히 주먹으로 막아 냈으나, 튕겨져 나온 볼은 정신없이 뒤따라 들어가던 지수의 왼쪽 다리에 맞고 때굴때굴 골문으로 굴러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골 세르모니는 생략하였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공로도 아니었거니와 골을 넣은 직후 선아 생각이 떠올라 그만 쑥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난 이제 비록 한 명이지만 팬이 있어. 팬을 가진 스타는 겸손해야 돼.’
그 골은 그날 경기의 승리를 확정짓는 결정 골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난 지수는 선아를 생각하며 꺼 놓았던 핸드폰을 켰다. 예상한대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추카!약속안잊었죠?오늘야구구경시켜줘요.선아가.. 010-xxxx-yyyy’
‘그래, 아무리 허기진 연봉에 시달리는 무명선수라도 그거 하나 서비스 못하겠냐?’
전화를 걸고 약속장소에서 만났다. 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 선아가 좋아하는 야구 경기장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날씨는 제법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오빤 누굴 좋아해요?”
“으... 응?”
사실 지수는 야구에 문외한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대답은 못하고 얼굴을 쳐다보니 선아의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 종전보다 길어진 머리칼이 가끔씩 불어대는 산들바람에 목을 휘감으며 나풀거리는데, 땀방울에 지워지는 화장기 안으로 거친 피부가 군데군데 들어나고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술 안쪽으로 들여다보이는 립스틱 지워진 자리도 파란색에 가까웠다.
“근데 어디 아파?”
“....”
“얼굴빛이 안 좋은데?”
“아니... 괘 괜찮아요.”
“그래? 난 또 어디 아픈가 해서... 덥지? 조금만 기다려”
들었던 부채를 선아에게 쥐어주고 매점으로 달려가 과자와 음료수를 사가지고 다시 왔을 때는 이미 경기가 시작되고 난 후였다. 음료수와 과자를 즐기며 경기를 관람하던 선아는 어느 새 비스듬히 지수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4회전이 모두 끝나고 5회초, 타석에 들어선 5번 타자 심성환, 노아웃, 투볼 투스트라이크, 제 5구... 이때 우익수 박주영 선수는 외야 우측 중간 지점에서 양 손을 무릎에 댄 채 허리를 굽히어 타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오른쪽 펜스를 향해 날아갔다. 순간 수비수 박주영은 공은 쳐다보지도 않고 펜스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펜스에 다가설 즈음 획 돌아서서 기다리니 공이 떨어지는 위치가 정확하게 바로 그 자리였다. 우익수 플라이 아웃! 난생 처음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지수는 눈동자가 커지면서 뒷머리에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힘껏 무릎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맞아, 바로 저거야. 저거...”
깜짝 놀란 선아가 기댔던 지수의 몸에서 떨어졌다.
“뭘요?”
“아... 미안... 놀랬구나. 야구선수들 정말 대단하다.”
“오빠도 야구 좋아?”
“나도 야구팬 될 거 같은데, 그럼 우린 이제 같은 팬인가?”
지수는 자신이 뛰는 그라운드를 생각하였다. 수비수가 상대진영으로 깊숙이 공을 차 주었을 때, 저 선수처럼 차는 순간 떨어질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이후는 공을 보지 않고도 전력 질주할 수만 있다면 열 번 중 일고여덟 번은 상대보다 먼저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공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아군진영에서 패스와 드리볼로 미드필드를 넘어가다 자칫 상대방에게 볼을 빼앗겨 역공을 당하게 되는 것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악의적인 태클에 의한 부상도 예방할 수 있어 일거양득의 아이디어 아닌가.
“맞아, 저걸 연습해야 해. 저걸...”
이어 9회말, 주자 1루 원아웃, 3번 타자 강대구 투 원, 제 3구, 스윙~... 한 방에 끝낼 것처럼 엄청난 힘으로 휘둘렀음에도 배트는 허공만을 갈랐다. 스트락 아웃!
아쉬워하는 어느 팬의 탄식 석인 대화가 들렸다.
“저거 맞았다면 홈런 아냐?”
“안 맞았으니 데드볼만도 못하군.”
다음 타자는 4번 최승엽, 패색이 짙어가는 마지막 공격임에도 펜스 뒤 객석에서는 글러브를 낀 관중들이 넘어오는 홈런 볼을 잡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짧은 예비동작에 이어 투수의 손에서 공이 뿌려지는 가 싶더니만,
‘딱!’
또 다시 공은 경쾌한 음을 터트리며 공중을 향해 올라갔다. 역전 홈런을 직감하게 되는 순간 모든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날아가는 공을 주시하며 함성을 질러댔다. 선아도 일어나 지수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춤을 추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별로 힘들여 치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굽을 줄을 모르는 공은 계속 솟아올라 쭉쭉 뻗어가며 외야석 담장을 훌쩍 넘는 장외 홈런이 되고 말았다.
“됐어, 음흠... 그렇게 공을 넣어야 해.”
“무슨 말이야, 아까부터...”
“죽을힘을 다해 차서 강하게 골을 넣으나, 한 발 빠르고 정확하게 살짝 차서 골을 넣으나 한 골은 마찬가지 아닌가?”
한 편의 역전 드리마가 펼쳐졌던 경기장을 빠져나오니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야구경기는 생각보다 즐거웠고, 기뻐하던 선아의 모습만으로도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함께 잡은 선아의 손은 왠지 차갑게만 느껴졌다.
“오빠, 2026년에 월드컵이 열리지? 오빠 거기 나가면 좋겠다.”
“장난 하냐? 월드컵에 나가려면 국가대표가 되어야 하고, 국가대표가 되는 길은 바늘구멍보다 좁아. 선수들은 각 팀마다 철철 넘치는데 국가대표는 한 포지션에 서너 명에 불과하거든...”
사실 축구선수치고 월드컵에 출전하는 꿈을 안 꾼 자 없고 지수 또한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팀에서 주전 자리를 꿰차는 문제마저도 어려운 지경인데 무슨 월드컵을 꿈꾼단 말인가. 지수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한강에 처박히지 않는 게 다행이지.’
한참을 가다보니 어느 새 한강 둑을 걷고 있었다. 노을 속에 침몰하는 서녘 하늘은 강물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며 알 수 없는 비극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였다. 선아는 지수의 팔을 잡고 매달리듯 한참을 걷다가 침묵을 끊으며 말을 걸었다.
“오빠 저기 풀밭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자.”
쉬었다가자는 말에 얼굴을 쳐다보니 약물 중독자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아까 운동장에서부터 얼굴빛이 이상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아픈가보구나, 그래 여기 잠시 쉬었다 가자. 피곤하면 말 해.”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풀섭에 깔아주고 지수 자신은 그냥 날바닥에 앉았다. 주위에는 철 지난 냉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작은 키에 선아의 얼굴처럼 여리고 하얀 꽃, 그곳에는 여러 마리의 꿀벌들이 잡초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간혹 걸려있는 거미줄을 피해 아슬아슬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빠 저것 좀 봐, 난 냉이꽃이 너무 좋아.”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지수는 쓰러지듯 자신의 가슴에 기댄 선아를 오른팔로 껴안고 재차 물었다.
“안되겠다. 많이 아픈가본데, 근처 병원에라도 가야겠다. 가자, 응?”
“아냐 오빠, 괜찮아, 사실은....”
“사실은...?”
“나 고백할까봐...”
“고백? 뭔데?”
“놀라지 마, 오빠. 약속해.”
“그래 말해봐. 지금 진정하고 있어. 이제 우린 같은 팬이잖아.”
선아의 눈빛은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사실 난 오래 못산데. 얼마 안 있어 죽을 거야.”
“응?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농담을 함부로...”
“난...”
“...”
“난 백혈병에 걸렸단 말이야. 말기라서 이젠 항암치료도 포기했거든. 학교도 힘들어서 그만 뒀구...”
“배... 백혈병?”
“만성 림프성 백혈병 말기.”
지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냥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진심 같기고 한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옳을지 말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두 뺨 위에 홍수처럼 넘쳐나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랬구나. 지금 많이 아파?”
“아니, 지금은 괜찮아. 모처럼 만나 이런 얘기해서 미안해, 오빠”
“아냐 솔직해서 좋아, 아니 좀 더 일찍 말하지 그랬어. 그래도 치료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소용없대. 난 그때그때 응급조치만 하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최승엽 선수가 홈런 치는 광경을 보았거든.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갈 때...”
“올라갈 때?”
“그때 갑자기 머리가 상쾌해지고 힘이 생기는 것 같았어.”
“그래서 최승엽 선수를 좋아하는구나.”
“응, 난 그 후 최승엽이 출전하는 게임이 있을 때마다 가급적 운동장을 찾았어.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있잖아...”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복받치는 설움에 열여섯 어린 소녀의 안타까운 감정은 속일 수가 없었다. 지수는 가슴에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살며시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천천히 얘기 해.”
“의사는 날보고 여섯 달밖에 못산다고 했어. 힘든 일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홈런만 보면 힘이 나고, 운동장에 가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 오빠와 함께 있잖아, 죽을 거라는 때가 1년이 넘었는데두.....”
“그렇구나. 언제 또 야구구경 시켜줄까?”
“아니... 그것두 이젠 별룬가 봐. 이젠 톱스타보다 꼴지가 좋아. 나 하나에게만 관심을 줄 수 있는 오빠 같은 꼴지... 골을 못 넣어도 이 냉이꽃처럼 날 비웃지 않아서 좋구, 골 넣으면 나에게 힘이 생겨서 좋구...”
“힘이 생긴다...? 그래, 다음번엔 선아를 위해 골을 넣을게, 못 넣어도 실망하진 마, 난 어차피 무명 꼴찌니까. 하하하.”
지수의 웃음소리를 들은 선아는 잠시 얼굴이 펴지는 것 같았다. 기댄 몸을 곧추세우고는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눈동자로 지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부딪힐 때마다 지수는 더욱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리고 부상 후유증에 의해 휘어진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꽃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용기를 가져, 선아는 절대 죽지 않아. 저 냉이꽃 좀 봐, 저렇게 가냘퍼도 싱싱하기만 하잖아?”
“근데 오빠, 이담에 유명해져도 날 만나줄 수 있을까?”
“무슨 소리야? 선아는 내 처음이자 유일한 팬이라구. 내가 설령 월드컵에 나가 스타가 된다 해도 결코 선아는 잊을 수 없지.”
“월드컵? 와~ 정말 좋다. 오빠 모습 상상만 해도 날아갈 것만 같애...”
“아 아니 말하자면 그렇다는...”
“그냥 생각인데, 만약 오빠가 정말로 월드컵에 나가 골을 넣으면... 그래도 날 생각할 수 있을까? 왠지 무섭다. 그땐 너무 유명해졌을 텐데...”
갑자기 선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수는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싶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는 없었다.
“걱정 마, 만약 말이야, 만약인데 말이야...”
“만약...?”
“만약... 이건 가정인데 말이야, 내가 월드컵에 나간다면, 게다가 골 까지 넣는다면...”
“야~, 그럼 그 공 나에게 선물할 수 있어, 오빠?”
“아... 아니 그... 공은 선수가 못 가져가고, 그 대신 신고 있던 축구화와 티를 몽땅 벗어서 선아에게 기념으로 줄께. 그건 나의 전부니까.”
“정말? 너무 좋다. 신발은 진열장에 넣고, 티는 내 방에 걸어 놓을 거야, 절대 빨지 마, 오빠의 땀이 물신 배어있는 그대로가 좋아. 오빠가 생각 날 때마다 난 그 냄새를 맡을 거야.”
갈수록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한 지수는 후회하기도 하였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래 좋아, 이번 아니면 다음번, 그것도 아니면 다 다음번 월드컵에 꼭 나가고 말거야. 선아가 있는 한 말이야. 그리고 돌아오는 날 우리 공항에서 만나자, 응? 인천공항 C주차장 건너편 분수대 앞에서 말이야.”
차라리 지키지 못할지라도 우선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야 삶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질테니까. 말을 끝내고 얼굴을 쳐다보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백혈병이라니, 이렇게 착한 소녀가 한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지수는 헤어져 숙소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살고 선아가 사는 길, 우리 모두 사는 길은 내가 스타가 되는 것뿐이야. 난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까 보았잖아, 공이 공중에 솟았을 때 보지 않고 낙하지점을 향해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찾아가 기다리는 것, 힘들여 치지 않고도 정확하게 맞춰 담장을 넘기는 것, 잡초 사이 도처에 쳐놓은 거미줄을 피해 냉이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유연한 꿀벌이 되어야 해.’
눈을 감고 CD나 유튜브로 보았던 세계 스타들의 경기장면들도 떠올렸다. 한 번도 뻥뻥 차는 것 없이 아슬아슬 피해가며 살짝 살짝 밀어 넣던 펠레의 모습, 뒤뚱거리듯 거친 태클을 피하면서 공을 놓치지 않았던 마라도나 선수...
‘바로 그거야. 나에게 프리킥은 필요 없어. 반칙을 유도해서 프리킥을 얻어내는 것보다 태클을 피하면서 공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해. 멀리 날아오는 공은 보지 않고도 먼저 뛰어갈 수 있어야 내 공이 되는 거지.
골문 앞에서는 흥분하지 말아야 해. 공이 골문을 빗겨나가서는 안되니깐 오로지 살짝 밀어 넣듯 냉정을 잃지 말고 정확하게만 차야 해. 그러면 틀림없이 확률은 높다. 확률! 확률! 확률은 높아진다구!!!’
벌떡 일어나 일기장을 꺼내 큼직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래오래 버텨줘, 약속 꼭 지킬 깨.
장소 : 인천공항 C주차장 건너편 분수대 앞.
때 : 몰라,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준비물 : 축구화, 땀에 절은 티.’
4.
‘신발은 진열장에 넣고, 티는 내 방에 걸어 놓을 거야, 절대 빨지 마, 오빠의 땀이 물신 배어있는 그대로가 좋아. 오빠가 생각 날 때마다 난 그 냄새를 맡을 거야.’
지수는 입고 있는 티를 만져보았다.
‘오빠의 땀이 물신 배어있는 그대로...? 더 젖어야 해. 땀을 더 흘려야 한다구. 선아가 맡을 수 있도록 더 흠뻑 적셔야 한다구.’
지수는 선아를 알고 난 이후 지난 3년 동안 누구보다 땀을 많이 흘렸다. 그동안 모든 프로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홈페이지도 없애버렸고 최근엔 컴퓨터 자체를 없애버렸다. 모든 역량을 훈련에만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녁나절 어둑할 때까지도 공중으로 떠오른 공의 낙하지점을 찾아 뛰어가는 훈련을 해왔다. 선아와 야구장을 찾는 것 외에는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훈련을 거듭해 왔다.
강하게 차던 습관을 버리고 오로지 빠르고 낮게, 정밀하게 차는 것만 연습해 왔으며, 뒤뚱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는 오뚝이의 근성은 태클을 피하는 유익한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힘겨울 때마다 선아를 살려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노력한 결과 성적은 나날이 좋아졌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갑자기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꿈에 그리던 월드컵 경기에 참가하여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체력과 개인기가 뒤지는 한국 팀은 연장전에서도 수세적인 입장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지수는 전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왼쪽 중앙선상의 위치에서 준비운동을 하듯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호랑이 감독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손짓을 했지만 본체만체 하였다. 이젠 아무리 지수가 못마땅하더라도 다른 선수와 교체할 수도 없으며, 주심에 의한 퇴장명령만 없다면 그라운드 밖으로 끌어 낼 수도 없었다.
연장전 24분이 지날 무렵, 그때까지도 공격을 지속하던 독일 팀은 너무나 공격에 치중하던 나머지 키퍼와 풀백 1명 도합 2명을 제외한 모두가 중앙선을 넘어 한국 진영에 와 공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키퍼도 페널티 라인 밖 10여 미터 지점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으며 풀백도 중앙선상 가까이 다가와 서 있었다. 변변한 공격이 단 한 번도 없는 한국 팀의 경우 4:3:3 도 4:4:2 도 모두 의미 없는 이론에 불과했다. 그런 일방적인 경기 속에서도 지수는 왼쪽 중앙선상 부근에서 얄밉도록 빈둥빈둥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바로 이때였다.
한국 팀 오른쪽 미드필더가 공을 가로채고서는 상대진영을 향해 정신없이 볼을 걷어찼다. 급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내질러 차버린 것이었다. 공은 독일 팀 왼쪽 풀백이 서 있는 쪽으로 높이 날아갔다. 마치 야구장에서 배트로 친 공이 야외로 날아가듯 쭉 쭉 뻗으며 높고 멀리 날아갔다.
갑자기 두 눈에서 번갯불을 뿜어낸 지수는 기회를 놓칠 새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그러다가 딱 돌아서자 그곳이 바로 공의 착지지점이었다. 등 뒤로 수비수 풀백의 시야를 가린 다음 볼을 받아 다시 돌아서서 페인트모션으로 수비수를 제친 다음 상대 골문을 향해 질풍처럼 나아갔다. 독일 팀 다른 선수들은 이제야 일제히 중앙선을 넘어오고 있었지만, 이미 페널티 라인 가까이 들어선 지수 앞엔 오직 골키퍼 한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지수는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침착해야 해, 잡초 사이를 헤집는 꿀벌처럼... 서둘다간 거미줄에 걸린다구.’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보면 키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 손을 앞세우며 온 몸으로 달려들어 태클을 시도할 것이고 그러면 공격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천천히 접근하면 키퍼도 달려들 기회를 먼저 살필 것이므로 한 템포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페널티 라인 바로 직전에서 골을 정지시켰다. 페널티라인 밖에서는 키퍼도 손을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1대1 상황이므로 한 발짝만 앞에 나가서 차면 페널티킥과 다름없다. 아니 오히려 더 유리하다. 곁눈질로 슬쩍 살피니 어느 새 독일 선수들이 등 뒤 10미터 부근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관중석에서는 꽹과리소리, 북소리, 피리소리 등 온갖 잡소리와 함성이 운동장을 폭파시킬 듯 요란하게 울려댔지만 지수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 온 몸에는 소름이 돋는 듯 하였다.
‘아~, 침착해야 해, 침착!!’
앞에서는 키퍼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퍼컷을 날릴 것처럼 달려들 기세였고, 뒤에서는 수비수들이 자신을 걷어차고 짓밟을 것처럼 8미터, 7미터까지 근접하며 촌각을 다투었다. 이젠 더 이상 찰라 만큼의 여유마저도 남김없이 모두 소진되고 말았다.
5.
입원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니 일시적이나마 회복되는 것도 같았다. 입원한 후로는 한 번도 의식을 잃어본 적이 없고 어제는 코피도 멎었다. 조금 전 의사가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마음을 편안히 하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경기 때마다 승리의 기도를 올리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때마다 조금씩 기운이 나아지는 듯 하였다. 오빠가 뛰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결승에 오른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오늘은 꼭 골을 넣을 거야, 아무도 예상 못했던 한국 팀이 결승까지 올라온 것만도 다행이지만. 그러니 솔직히 져도 좋아, 하지만 오늘은 꼭 골을 넣어 줘. 오빠 부탁이야.’
tv를 보던 선아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기도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귀국할 때 축구화와 티를 싸서 냉이꽃 한 다발을 얹어 주라. 여지 껏 오빠는 나한테 꽃 한 송이 안줬잖아. 여잔 꽃을 좋아 한다구, 바보 같은 지수 오빠야.’
그리고 지수에게 꽃을 받는 장면을 상상하며 빙그레 웃어 보았다.
‘그날은 오빠 품에 안겨볼 거야, 아마도 그날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거야. 그렇지? 유명해져도 날 만나준다고 굳게 약속했잖아. 꼭 지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 더 이상 살 수 없어. 정말 난 살 수가 없다구, 흑흑...’
어느 새 웃음은 사라지고 턱 아래로 떨어지는 뜨거운 기운은 좁디좁은 가슴의 옷깃을 질퍽하게 적시고 있었다. 다시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뜨고 tv를 보니, 아! 이럴 수가...
“오, 오빠...?”
거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관중들의 고함소리에 흥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데, 주위 사람들마저 입을 벌린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키퍼와 1대1로 대치하고 있는 저 선수, 분명한 오빠였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가 크게 떠 보았지만 틀림없는 오빠였다. 뒤에는 하이에나 같은 험악한 야수들이 오빠의 내장까지 갈기갈기 찢어 삼킬 듯 흥분하며 선두를 다투고 있었다. 7미터, 6미터, 5미터....
“믿을 수 없어, 정말...”
드디어 오빠는 결심한 듯 볼을 2미터 쯤 앞으로 툭 내찼다. 그리고 반도의 성난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야~ 아~ 앗!”
왼쪽을 향하여 발질을 하려는 찰라, 이를 눈치 챈 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왼쪽으로 따라 기울며 중심을 잃었다. 오빠는 차려던 발을 재빨리 허공에 휘감아 멈춰선 다음, 반대편 빈 공간을 향해 공을 살짝 밀어 넣었다. 페널티 영역 안에는 우루루 몰려온 악귀들이 오빠를 쓰러트리고 자기 팀의 키퍼까지 뭉개면서 골문 안으로 대시해 들어갔지만, 공은 이미 그물망 안으로 처박힌 후였다.
“고~울 인! 고~울 인!”
tv에서 흘러나오는 고함소리와 이 방 저 방 환자와 보호자들이 질러대는 환호성 소리에 병실은 떠나갈 듯 시끄러웠고, 감격한 선아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또다시 두 눈을 감고 말았다.
6.
환영객과 구경꾼들에 뒤섞여 몰려나오는 선수단을 향해 수십 명의 기자들이 달려들었지만, rbs 방송국 김 기자는 오로지 지수 선수를 찾지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마지막 선수들까지 다 빠져 나가고 뒤늦게 나오는 수행원 한사람에게 따라가 물었다.
“지수 선수는 왜 안보이나요?”
“지수 선수요, 먼저 나갔습니다. 무슨 볼 일이 있다면서 공항요원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먼저 수속을 마치고 나갔습니다.”
이때 기자의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김 기잡니다.”
“나 방 기잡니다. 여기 수상한 사람이 있는데 이리 와 보실래요? C주차장 동쪽 200여 미터 지점 분수대 앞에 차양이 큰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있어요. 왼쪽 검지손가락이 휘였거든요.”
“아,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는 둥 마는 둥 하며 카메라기자에게 눈짓을 하고 달려갔다. 가뭄에 지쳤는지 분수대는 물이 나오지 않았고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기자는 서 있는 청년의 왼쪽 검지손가락이 약간 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짐은 어디다 두었는지 손에 쥔 것은 라면박스보다도 작은 종이상자 하나뿐이었고 그 상자 위에는 소박한 꽃 한 다발이 투명 비닐에 쌓인 채 붙어있었다.
기자는 청년과 약 2미터 거리를 유지한 채 등을 돌려 몇 초 동안 숨을 가다듬은 후 돌아서며 마이크를 들이댔다.
“안녕하세요 지수 선수, 환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혼자 계십니까? 혹시 무슨 급한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먼저 우승 소감 한마디만 부탁합니다.”
비교적 침착하게 행동했으나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던 지수는 질주하던 세계적인 스타답지 않게 흠칫 놀라며 기자를 바라보았다. 옆으로 지나가던 두 젊은 여인도 기자의 말소리를 듣고 놀란 모습으로 수군거리며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수는 마이크에 붙어있는 rbs 방송국 마크를 확인하고는 차양을 올려 시야를 넓게 모자를 고쳐 썼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네... 약속이 좀 있어서요. 사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어느 새 주위에는 구경꾼들과 기자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지수는 군중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자 옆에 있는 화단으로 올라갔다. 그의 눈은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계속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부모님이신가요, 애인이신가요? 만날 사람이...”
“저의 팬입니다, 저의 유일했던 팬. 바로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 했거든요. 조금 있으면 올 겁니다.”
“아, 이건 선물인인가요?”
“예, 비록 약속한 시간은 20여 분 지났지만, 꼭 올 거예요. 몸이 약한 그녀지만 한 번도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이 꽃이 생화거든요. 그녀가 좋아 하는 냉이꽃요.”
7.
선아를 보살피던 가족들도 간호를 잊은 채 tv 화면에 나타나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지수의 인터뷰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떤 여자는 눈시울을 적시며 작은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선아는 비스듬히 누워, 진동을 울리다 끝나버린 핸드폰을 양 손으로 쥐어 가슴에 품은 채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인터뷰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젖어버린 눈동자는 흐릿하기만 하였고, 희미해져가는 의식은 이제 흘러나오는 인터뷰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마저 한참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핸드폰이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모았던 두 손마저 풀어져 옆구리로 흘러내리면서 혈관주사 호스가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안면근육이 풀어지면서 기력 다한 눈까풀도 살며시 내려앉고 말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서녘하늘엔 낙조마저 더 이상 태울 수 없다는 듯 최후의 빛을 발하며 사라져 갔다.
하지만 tv속 지수의 인터뷰는 끝나지 않았다. 꽃을 한 번 바라보고는 갑자기 주위 사람들의 몸을 살피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어느 기자의 주머니에 꽂혀있는 생수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 생수 좀 주실래요? 꽃이.... 아까 까지만 해도 싱싱했는데 자꾸만......”
“......”
그리고 또다시 얼마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수는 희망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시 한 번 힘주어 중얼거렸다.
“그녀는 틀림없이 나타나서 이 꽃을 받아줄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나의 고백을 기꺼이 받아줄 겁니다. 반드시...
저기 보세요. 해는 졌지만 더욱 크고 아름다운 달이 뜨고 있잖아요, 우리들의 앞날을 축복해줄 아주 밝고 큰 둥근 달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