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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5]*복음이 가능
로마서 1장15–17절 / 이찬수목사
[써시봉]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뭐 제목 그대로입니다. 이 [써시봉] 이라는 음악 감상실을 배경으로 1960년대 후반 또 70년대 초반의 그 젊은 남녀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청춘영화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영화를 보니까 참 특이한 게 그 영화에 등장하는 상당수 인물들이 ‘교회에서 만나 가지고 이제 친해졌다, 뭐 인연을 맺었다.’ 이런 이외에 내용이 참 많이 나오는 겁니다. 대사 중에 우리는 교회에서 만났지! 성가대 하다가 만났지! 뭐 이런 식의 표현들이 참 많은 겁니다.
‘왜 70년대에 그 청춘영화에 이런 대사가 많을까?’ 생각해 보니까? 그게 그 당시 70년대 “교회가 없고, 교회를 빼고, 중 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을 이야기가 하기가 어렵다.” 할 정도로 교회가 삶 중심에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저희 또래 치고 교회 한 두 번 안 다녀 본 사람 아무도 없을 거예요. 무슨 문학의 밤이다. 또 크리스마스 무슨 행사다. 그러면서 그때는 워낙 문화도 없고, 또 학교도 뭐 크게 공학 이런 게 아니다 보니까 이성 친구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데가 교회니까 많은 분들이 교회를 들락날락 했던 그게 60년대, 70년대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그 영화를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던 게 뭐냐 하니까 그렇게 그 영화의 그 교회랑 연관되는 대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예요. 그 영화를 그렇게 만들어서 마음이 아픈 게 아니고요, 이게 실제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 아닙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예전에 중 고등학교 때 교회를 들락날락 거렸던 사람들이 이제 이렇게 저렇게 해서 교회를 떠나고, 지금은 이제 ‘넌 크리스쳔’이 되셨다고 한다면? 그분들이 중 고등학교 시절 또는 대학생 시절 자기가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떠올렸던 기억이 전부 어떤 것들입니까?
‘아! 그때 그 여학생도 여전히 잘 있나? 우리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새고 놀던 그때 그 사치기사치기사뽀뽀 아! 그거 참 재밌었지?’ 교회랑 연관되는 기억이란 게 전부 이런 거지 어떤 사람도 ‘그 때 내가 진리를 가지고 고뇌 하면서 복음이 뭔지를 씨름하면서 우리가 밤을 세워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해서 토론 했지!’ 이런 걸 떠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50대, 60대 되셔 가지고, 10대 때 자기가 교회 다녔던 것을 생각 하면, ‘아! 그 문학의 밤 할 때 정말 재미있지! 또 연말에 우리 회비 걷어 가지고 밤기차 타고 춘천에 놀러갔던 것, 아! 유난히 추웠던 그 날 잊지 못해!’
복음이 없는 교회당 행사
교회와 연관되어 가지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그런 어떤 문화적인 거지 이 복음의 실제적인 것들을 떠올리는 사람 거의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대답은 간단해요. 교회가 그것을 안 가르쳐서 그래요. 저도 모태신앙 아닙니까? 제가 어린 시절의 교회로 떠올리면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 가지고 진지하게 그랬던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이게 참 마음이 아팠던 건요, 이게 60년대 70년대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분위기는 오늘 그대로 이것이 지금 이어져 가지고, 지금도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성가대 찬양을 들으면서 얼마나 저 찬양이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문득, 문득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렇게 주옥같은 찬양을 매 주일 부르는 성가대원들 안에 이 복음이 뭔지 모르고 부르는 노래를 부르는 분들이 분명히 여기 있을 텐데? 그런 분들이 많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복음이라는 것이요, 우리가 뭐 전도지 들고 서현역 앞에 가서 열심히 “예수님 믿으라.”고 복음을 전해야 되지만, 진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 믿으라”고 전해야 되는 장소는 교회예요. 이 교회 안에 이 복음을 모르고 복음과 무관하고 복음이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까마득히 모르는 분들이 생각보다 너무나 많으신 거예요.
이제 교회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게 됐습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캠퍼스 사역을 하는 그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교 캠퍼스에서 옛날처럼 막 그 사영리(四靈理, The Four Spiritual Laws)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결신하고, 이건 눈 씻고 봐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오히려 지금 이 복음이 부끄러운 게 돼 가지고, 안 믿는 애들이 막 그 예수님 믿는 친구들은 그런 얘기를 한 대요. “너 아직도 교회에 나가니?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런 것에 대하여 대응할 수 있는 배운 게 하나도 없으니까 복음이 부끄러운 게 돼 가지고 지금 이 캠퍼스에서는요 자기가 교회 다닌다는 것을 대부분 다 숨기고 다닌다는 거예요. 부끄러운 게 돼 버렸어요. 제가 그것이 참 마음이 아프면서 문득 생각난 게 뭐냐면 사실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도 복음이 부끄러웠던 시대였거든요.
➤고린도전서 1장 22-24절를 보십시오. “22. 유대인들은 표적(表迹)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宣布)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24.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오,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복음이 부끄러운 거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살던 그 시대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나 공통적인 게 이 복음이 부끄러운 시대예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대처하느냐? 바로 그 다음 24절을 한번 보십시오.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오,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그 시대나 우리 시대나 공통점은 이 복음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던 시대인데, 그거에 대체하는 바울과 우리의 차이는 뭐냐면 우리는 교회 다니 것을 숨겨요. 회사 다니면서도 크리스천인 척을 안 해요. 술자리에 가서도 표 안내고, 회식 가서도 표 안내요.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표를 안되는 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그 복음을 몰라서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안 그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야!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야! 너희들이 몰라서 그런데 복음이 너희들 심령 속에 자리 잡으면 그 인생을 얼마나 바꾸는 능력인지 몰라.”
이 차이가 바울하고 우리의 차이 아닙니까?
✚빌립보서 2장12절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12. Wherefore, my beloved, as ye have always obeyed, not as in my presence only,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당신이 구원받은 것을 숨기지 마십시오. 개역개정에는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번역했지만 “구원받은 것을 숨기마라. 라는 것” 일하여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바울이 본문 [16절]에서의 이 놀라운 선포! ➤“16.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다.”
우리 확신을 기왕 예수님 믿고, 교회를 떠날 수 없다면, 우리도 바울과 같은 이 복음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하여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이론만이 아니고, 삶 속에서 이것을 맛보아야 된다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실(査實)이 있다면 숨기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 제가 로마서 설교를 결심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인데요.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제 이 로마서를 비장하게 이제 마음으로 준비하고 가던 그 당시엔 하나님께서 참 제 마음에 그 확정된 마음을 주시는 한 일을 주셨는데요.
한창 이런 설교를 비장하게 준비하고 있을 때인데 그 [코스타]라는 그 해외에 있는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코스타]라는 단체가 있는데 거기서 총무로 일하는 제 후배가 놀러 온 거예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뭔 얘기를 하는 거 하니까? 자기가 최근에 귀국한 한 선교사님 아는데 그 선교사님이 대단한 분이다.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니까요. 이 선교사님은 터키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붙잡혀 가지고, 재판받는 과정에서 사형선고 직전까지 갔다는 거예요.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담담하게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추방을 당해 가지고, 영국을 거쳐서 최근 한국으로 들어오셨다는 거예요. 이분이 해외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보니까 한국교회 안에 드리워져 있는 이 패배 의식! “이제 전도 안 된다. 복음 전해도 소용없다. 이 교회는 숫자가 줄고 있다. 유럽처럼 이제 교회가 이제 점, 점, 점, 점 쇠퇴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난무하는 거예요. 자기는 터키에서 목숨을 걸고 능력 되시는 복음을 전했는데 그래서 이 선교사님이 오기가 생겼다는 거예요.
‘진짜 오늘 대한민국에 복음이 안 전해 진다고?’ 무슨 씨름을 했냐하니까, 그때부터 이분이 승용차 안타고 다니고, 택시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택시 안에서 운전하시는 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지고.. 한참 그러고 있는데요, 부산에 있는 어떤 교회당에서 이 목사님을, 이 선교사님을 초청한 거예요. 강의를 들으려고. 그 강의가 다 끝나고 당연히 초청한 교회에서 역으로 가서 강사님을 모시고, 또 끝나면 역으로 모셔다 드리고, 이게 예의 아닙니까? 교회안의 그런 의전 팀이 다 있거든요.
그런데 이 선교사님이 이제 강의를 다 끝내고 당연히 이제 차로 모시려고 하니까 “자기는 택시 타고 가겠다.”고 또 부득, 부득 택시를 타고 가겠다니까 어떡합니까? 그래서 이제 그 의전팀에서 택시를 잡아 드리고, 손님 혼자 그 부산역으로 가시는 걸 차마 그렇게 못해서 예의를 갖추느라고 의전팀이 그 택시를 같이 동승 해대요. 뭐 분명히 장로님, 또 그 담당 부목사님, 그런 분들 아니겠습니까? 의전팀이. 그렇게 택시를 타고 가다가 보니까 이 의전 팀이 보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 선교사님이요, 그 교회에서 부산역까지 뭐 택시로 3-40분 걸리는 거리인데요, 택시기사에게 복음을 전하는데요. 그 짧은 30-40분 사이의 그 복음을 듣고 그 택시 운전하시는 분이 펑펑 우신다는 거예요. 부산역에 내려가지고는요, 길모퉁이에 차를 세워놓고 막 우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복음을 봤는데 이 택시기사 분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 주변의 친지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많대요. 목사님도 있대요. 그런데 자기한테 한 번도 이 복음을 들려 준 사람이 없대요.
고작 만나면 보통 교회 다니는 분이 하는 분들 얘기가 뻔해요. “이제 나이도 들었는데 너도 교회 나가야지? 우리랑 같이 교회 가자.” 뭐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왜 교회로 나가야 되는지? 교회 가서 들려주는 복음이 뭔지? 이것을 전해 주는 사람 한 명도 없었대요.
십자가를 알아야 전하지?
질문! “왜 그분 주변에는 이 복음을 들려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요?” 정답! “알아야 전하지. 알아야!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냐고요. 교회 가자! 이거는 할 수 있는데, 그 다음, 교회 가면 그 결혼 안 한 사람들 예쁜 여자들 많다. 또 결혼한 사람들을 교회 가면 그 사업 연결도 잘되고, 그 좋은 사람이 참 많아! 이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그제가 그 선교사님의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참 무능한 현실교회를 보여주는 같아서 마음이 아팠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것이 저에게 희망이 되는 거예요.
왜? 복음이 무능한 게 아니고, 우리가 몰라서 우리가 무지해서 그런 거니까 그 선교사님처럼 복음을 제대로 알고 복음을 제대로 경험하고, 그것을 교회에서 잘 가르치면, 이 복음은 아직도 역사 아는 능력이 되겠구나! 로마서를 제가 비장하게 꺼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저는 지금 너무너무 가슴이 설래요. 이번 설날에요 꼭 인사를 드려야 되는 것만 빼고는, 4일 내내 저는 집에서 나가지를 많았어요.
계속 로마서를 들여다보면서 마음에서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지금 전국으로 다 지금 뭐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다 흩어져 있을 텐데, 곳곳에서 그들이 이 복음이 뭔지를, 복음의 능력이 어떤가를, 맛볼 수 있도록 종이 설교를 잘 준비해서 이 복음으로 무장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에 그런 소원이 생기니까요, 얼마나 제 마음이 벅차 왔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로마서 공부를 통해서 붙잡아야 될 이 복음! 이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능력을 주는가?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떠한 걸 알기 위해서 여러분 우리가 회복하고, 붙잡아야 될 복음의 능력! 한 5가지 정도로 제가 정리를 해봤는데요.
첫째로, 여러분 우리가 붙잡아야 될 복음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가 ‘복음의 실제성’입니다 실제성! “이 복음의 능력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작동되고 있다.”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울이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무얼 주십니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러는데 이 복음이 줄 수 있는 ‘구원이 뭐냐?’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기억으로요. 교회에서 가르쳤던 구원은 거의 대부분 ‘미래적 개념’ 그 죽어서 천국 가는 자격을 얻게 하는 데 필요한 그런 차원으로서의 복음을 가르쳤던 기억이에요.
그게 틀린 건 아니에요. 그러나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협의적이고, 좁은 차원에서의 구원관만 가르치면요, 우리가 잃는 게 너무 많아요. 복음은 나중에 막연한 언제? 죽을 때 지옥 보내지 않고, 천국 가는데 쓰는 도구로 장롱에 넣어 두는 이게 복음이 아니고요, 복음은 바로 오늘 시간 꺼내 가지고, 내 어려운 삶 속에 내 답답한 삶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거예요.
<톰 라이트> 라고 영국의 신학자인데요, 이분이 구원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이것을 저는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내용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구원의 완전한 영광은 미래의 나타나겠지만 바울은 자주 이 구원이 단지 미래의 일만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구원은 현재를 향하면서 사람들을 죄의 상태에서 구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로움과 박해에서 구출한다.” 자! 그 다음에 이런 표현을 합니다. “구원은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의 실제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이 사람들의 삶에서 삶으로 침입할 때, 그 구원은 그들이 뒤돌아 볼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이 된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구원받고 있으며, 구원받을 것이다.” 이게 ‘구원의 3시제’, 과거, 현재, 미래적인 구원을 설명하는 건데요, 이 <톰 라이트>가 설명하는 그들은 구원받았고, 구원을 받고 있으며,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이 ‘구원의 3 시제’를 보통 신학용어로 ‘칭의, 성화, 영화,’ 이런 용어들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먼저 이 ‘칭의’라는 것은 구원에 과거적 개념인데요.
쉽게 말하면 ‘칭의’란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통하여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입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이미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여러분! 못 보시지만 제 원고는요, 여기에 “이미” 라는 곳에다가 이 ‘따옴표’로 이것을 강조해 놨습니다. 보는 분들은 없지만 제가 이것을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쓴 거예요. “이미” 여러 분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이미” 이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에요. 그런가하면 ‘성화’는 뭐냐? 이건 구원의 현재적 개념인데요. 제가 이렇게 한번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내내 죄의 유혹과 싸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이 성화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내야 되는데 이걸 저는 이 물 컵을 가지고 종종 설명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제가 의도적으로 물을 지금 한 3분의 2만 지금 여기에 부어 달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지금 물이 한 30% 되었고요, 공기가 70%요. 그런데 여기에 있는 이 공기를 이제 점점 줄이고 이제 물 이물이 이제 ‘구원’이라고 우리가 표현한다면, ‘성화’라고 표현한다면, 여기에 물을 한 절 반 정도 부으면 저절로 세상으로 상징되는 공기는 빠져나가고, 거기에 주님의 복음! 이것이 채워져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의 과거적인 개념인 칭의 있어서는 여기 모든 분들에게 차이가 없어요. 똑같습니다.
그러나 현재적 구원의 현재적 개념인 ‘성화’에 있어서는 어떤 분은 물이 10%, 공기가 90%, 하나님의 은혜에 영향 10%, 세상에 영향 90%, 어떤 분들은 물이 90%, 공기가 10%, 하나님의 영향 하나님에 도달 해 살아가는 게 90%, 세상에 영향은 10%, 뭐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적은 먼저 되는지 아십니까? 여기에 지금 5대째 예수님을 믿는데 복음의 물은 10% 밖에 없고, 세상에 공기가 90%나 되는데, 여기에 예수님 믿은 지 6개월밖에 안 되는 어떤 분은 복음의 상징인 물이 90%이고, 세상의 악한 영향 공기는 10%밖에 안 되는 이런 역전현상이 교회마다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구원의 현재 적 개념인 ‘성화’ 이것을 추구해 나가기 위하여 이 땅에서 이악한 죄와 죄악을 부추기는 세력과의 날마다에 싸움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가 하면 ‘영화’라는 개념은요, ‘구원의 미래 적 개념’인데요, 이렇게 이 땅을 사는 내내 우리가 ‘예수님 인격 닮은 성화’를 위하여, 죄와 싸우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런데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이 집요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나 구원받는 그날이 온다는 거예요. 이게 ‘영화’에요. 이렇게 구원의 3시절을 ‘칭의’, ‘성화’, ‘영화’라는 신학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갈 때만 쓰는 복음 그래서 내 삶 속에 하나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런 복음을 우리가 붙잡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오늘 현재,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내가 죄와 싸울 의지만 가지고 나가면 그것을 끝내 이길 수 있도록 해주시는 복음의 능력! 이걸로 무장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우리가 붙잡아야 될 복음의 능력이 뭐냐? 복음의 희망성입니다. 앞에서 제가 “이 복음이라는 것이 죽어서 천국 갈 때 이 복음의 미래성만 붙잡아서는 안 되고, 복음의 현재성을 잡아야 된다.” 그랬는데, 그런데 반대로 어떤 분들은 복음의 현재성만 붙잡고, 복음의 미래성을 하나도 붙잡지를 않아 가지고, “천국이고 뭐고 죽으면 어떻게 알아? 나는 이 땅에서만 잘 살면 돼.” 이것도 ‘치우친 거’ 라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 종종 사용하는 [시편 23편 6절] 다 기억하시죠?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러분! [시편 23편에서 6절]이 없으면 그건 시도 아니에요. 아무리 뭐 이 땅을 사는 동안 {창조주}가 나의 목자가 되어가지고, 복음의 현재성으로 “난 부족한 게 없어요.” [2절]에 있는 고백처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다. 또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 아무리 그렇게 복음의 현재성으로 마음이 편해도, 여러분에게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창조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복음에 희망성이 없다면요, 그건 건강한 신앙이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구원의 3 시제]를 ‘칭의’, ‘성화’, 또 ‘영화’ 이런 신학용어로 설명해 드렸는데요. 또 이 구원의 개념을 ‘Alread but not yet’ 우리말로 하면 무슨 뜻입니까?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게 구원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에요. 저는 미국의 신학자 <알리스터 매끄레스> 교수가 쓴 책인데요. [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 라는 책에서 ‘Alread but not yet’ 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걸 보고 이 이상 잘 된 설명을 저는 지금까지 못 봤습니다.
자 한번 들어보십시오. ‘Alread but not yet’ 이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죄’라는 외국 주둔군의 그늘 안에서 살고 있다. 아무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다. 그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멀리서 전투가 있었고 전세가 뒤바뀌었다. 이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주둔군은 혼란에 빠졌다.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나치는 유럽 전역에서 축출될 것이다. 다만 그들은 아직, 이게 “not yet”입니다. 아직 이 나라에 주둔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승리와 해방의 기운이 퍼져나간다. “이미, Alread” “이미 해방된 듯한 기분이다.”
그러면서 아주 흥미로운 예를 하나 거기에 드는데 들어보십시오. “언젠가 싱가폴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다는 한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적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형소 내에 분위기가 일시에 돌변했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1년 만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 전엔 유럽 전역에서 “이미, ‘Alread”, 이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직, not yet’, 아직 승리가 도래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이미, Alread” 승리했다. 적들의 등뼈는 부서졌다. 이제 우리는 승리의 감격 속에서 적들의 기나긴 압제에 밤이 끝날 것을 기대하면서 살면 된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눈으로 보이는 이 세상은 악한 것들이 득세하는 시대에요.
눈으로 보기에 나는 여전히 적들에게 잡혀 가지고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신세에요. 그런데 단파 방송을 통해 내가 들은 게 뭐예요? ‘연합군의 승리 소식’이에요. 몸은 지금 눈을 떠보면 적들에게 잡혀 있는 포로 신세 같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단파 방송을 통해 내가 깨달은 건 뭐예요? “연합군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이겼다.”는 거예요. 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이게 복음의 희망성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매일 그렇게 우울하고, 매일 그렇게 마음이 답답하고, 그 복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 [요한1서 3장2절 말씀] ➤“2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이게 복음의 희망성이에요. 현실에 무슨 일로 답답하세요? 절망하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이에요. 이 ‘복음의 희망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사람 앞에서 비굴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은 우리가 회복해야 될 복음의 능력 세 번째, ‘복음의 윤리성’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현재성과 복음의 미래성의 균형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게 복음의 윤리성이에요. 제가 어느 날 운전을 하면서 어디를 가고 있었는데요, 이제 기독교 방송에서 이제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세요. 이게 참 반갑더라구요. 그래서 제가그 설교를 듣는데요, 그 목사님이 그 날 그 설교 가운데, <달라스 신학교 교수>인데 이 기독 기독교 그 교육학에서는 이분을 거장이라고 부릅니다. <하워드 헨드릭슨> 교수가 있거든요.
이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참 흥미로웠습니다. <하워드 헨드릭슨> 교수님이 이제 시카고에 있는 ‘위 턴 대학교’에서 이제 공부 할 때인데요, 이게 우리로 말하면 교육전도사 같은 거예요. 이분이 이제 초등학교 부스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데요, 이 교수님이 가르치는 아이 중에 천재가 있습니다. 성경을요 600 구절을 암송하는 애가 있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 교회야 뭐 기본 600구절 정도는 다 외우시고 그러니까 아무도 놀라시지 않으시는 데요, 놀라운 거 아닙니까?” 그 어린 꼬맹이가 600 구절을 줄, 줄, 줄, 줄 성경을 막 외우는데요, 뭐 교회가 그 주목하는 기대 받던 아이였대요. 그런데 참 불행하게도요.
이분이 지도하는 그 주일학교에 헌금이 자꾸 도난을 당하는 거예요. 자꾸 헌금이 없어져요.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니까 나중에 범인을 잡았는데 보니까 놀랍게도 성경 600구절을 줄줄 외우는 얘가 헌금 도둑이더라는 거예요. 얘가 1불짜리를 내고, 10불짜리를 가져가고 이런 짓을 한 번만 한 게 아니에요. 황당한 일이 벌어졌잖아요? 그래서 그 전도사님이 우리로 치면 그 전도사님이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 가지고, 그 녀석 붙잡혀 와 가지고, 고개 푹 숙이고 있고, 그래서 이 전도사님이 황당해 가지고, 그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야 너 성경을 그렇게 많이 외우는데, 너 [출애굽기 20장 16절]에 ‘도적질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그 부분 모르냐?” 이 말을 했더니, 그 기 죽어있던 애가 살아났어요.
갑자기 풀이 죽어있던 애가 고개를 딱 쳐들면서, 그 전도사님 보고 하는 이야기가 “전도사님! 그거요 출애굽기 20장16절의 아니고 15절인데요.” 자기 장끼가 나와 가지고 살아났어요. 그러니 이 전도사님이 너무 답답해 가지고, “야 이 녀석아 그걸 아는 녀석이 그러느냐? 너 뭘 잘못 했다고 생각하니? 그랬더니 여러분 600구절을 외우는 이 아이가 뭐라고 대답한 지 아십니까? ”너!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니?” 그랬더니 “들킨 거요.” 저는 라디오에서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게 오늘 우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중직자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이게 우리 장로님, 이게 우리 권사님, 심지어 이게 오늘 우리 목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물론 저 같은 목회자들에게 설교를 못해서 상처를 받기도 하시겠지만, 여러분이 우리 같은 목회자들에게 상처받는 게 뭐예요? 분명히 강단에서는 복음을 전하는데, 강단을 내려오면 이 복음이 그 사람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가지고, 인간적인 편법 쓰고, 세상적인 방법 동원하고, 그러면서 목회하는 걸 보면서 상처받는 거 아닙니까? 오늘 한국교회가 이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복음이 살아나야 되는데, 복음이 균형 있게 자리 잡으면, 이 아이와 같이 여러분 말씀 외우는 것하고, 그 삶이 통합되지 않는 이 가슴 아픈 현실이 복음의 능력으로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회복해야 될 복음의 능력이 뭐냐? ‘복음의 감격성’입니다. [로마서 1장21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이런 묘사를 합니다. 한 번 보세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놀랍게도 복음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생의 특징은 “이렇게 생각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운 상태” 라고 특징을 짓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감옥에 있던 사도 바울이 생각이 났습니다. [빌립보서 1장18절] 보세요. 감옥에서 쓴 거예요. ➤“18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
바울이 지금 감옥에서 뭘 기뻐하는가보니까 배경이 이래요. 지금 똑같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 중에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바울을 라이벌로 생각해서 어떻게 해서든 바울을 눌러 꺾어 이기기 위해 다 바울을 비열한 방법으로 헛소문을 내고, 모함하고, 그런 일들이 바울의 귀에 들려질 때 바울이 감옥에서 우울증 와서 죽겠다는 게 아니고, 왜 기뻐하고 기뻐한다고요? 그들이 그런 잘못된 동기로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전해지는 것이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앞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그 마음이 미련해 어두워졌다는 이거 하고 너무 대비 되는 거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 정직하게 자기를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어느 쪽이에요? 왜 매일 그렇게 우울하세요? 매일 왜 교회 안에서 매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이 자꾸, 자꾸 늘어나요. 매일 마음은 그렇게 허망해지고, 마음은 우울하고, 매일 마음은 그냥 텅 빈 것처럼, 왜 그렇게 어두워졌냐고요? 왜요? 복음이 없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바울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더니 감옥에서도 제가 목회하면서, 너무, 너무 슬픈 현실이 뭔지 아세요?
저를 모함하고, 저를 죽이려고, 과장해서 헛소리 퍼뜨리고, 스님이 그렇게 하는 건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신부님의 저에게 그렇게 모함해서 제 가슴을 찢어놓는 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전부 크리스찬들이요. 전부다. 저는요 교회에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정도가 아니고, 없는 굴뚝도 만드는 게 교회예요. 매일 교회 안에서 서로 모함하고, 밟고, 밟히고, 죽이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허망해져 있는 이유가 뭘까요? 복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교회 공동체 안에 복음이 없어서 용서도 안 되고, 매일 복음적 열심을 낸다 하면서 막 성가대 아아아~ 노래하는 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저 김 집사보다 내가 더 뛰어나야 된다고 하는 이런 동기로 열심히 노래를 하고 있다면, 이게 이제 분당우리교회 이야기가 아니고, 너희 교회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심각한 이야기 아닙니까? 저는 복음이 주는 이 감격성! 이건 다음 주일날 제가 좀 더 이 부분은 다시 이제 말씀을 드릴 예정인데, 여러분 내면의 마음이 허망해지고, 자꾸 허무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화가 나고, 이런 우리의 삶의 형태를 복음이 가져다주는 능력으로 치유함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될 복음의 능력이 뭐냐?
‘복음의 타인 지향성’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얼굴도 모르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한 큰 애틋한 사랑, 그런 마음에 뜨거운, “그래 내가 가서 너희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이런 태도가 어디서 나왔느냐? 이 복음의 타임 지향성이에요. 복음이 내 안에 자리 잡으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 설날 기간 동안에 이번 주 설교에 굉장히 고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참 응원해 주셨어요. 너무, 너무 고마운 우리 교회 복지재단 담당자가 저에게 예화거리 메일을 보내 왔는데요.
지금 저희 교회에서 이웃 사랑부하고 또 복지재단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저희가 참 감사하는 게 ‘애즈 투게더’ 경제적으로 어려워 가지고, 과외를 받을 수 없는 이런 아이들을 여러분들이 헌금해 주셔가지고, 지금 성남에다가 센터를 만들고, 거기에 지금 여러분 우리 중고등학교 아이들 무려 90명이 와서 무료 과외를 받아요.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십니까? 그 가난한 90명의 아이들을 무료로 도와주는 봉사자들이 선생님들이 75명이에요. 그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향하여 지금 수년째 그렇게 섬기고 있는데, 이번에요 고3 아이들 에즈 투게더에서 공부하는 고3 아이들 여섯 명이 수능에 영시를 했는데, 너무 기쁜 소식! 5명이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중에는 할머니가 폐지를 주워 가지고 생활하는, 부모님은 안 계시는 걸로 알아요. 그 할머니와 같이 사는 여학생이 있는데요. 이 여학생이 이번에 대학에 합격을 했다는 거예요. 더 기쁜 소식은요, 신앙생활을 안 하던 이 아이가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교회를 그냥 다니는 게 아니고요. 우리 고등부에서 지금 찬양 팀에서 찬양인도를 하고 있답니다. 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 복음의 타인 지향성의 능력 때문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 어려운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주는 그 선생님들 봉사자들의 모습 속에 복음의 빛이 드러난 거예요. 여러분! 이 복음이 안 전해 진다구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복음의 타인 지향성을 회복하게 될 때, 그래서 여러분! 저는요 <토니와 그느> 라고 [그 이노베이트에 탄생] 이라는 책을 쓴 교육 전문가예요. 이분이 그 책에서 한 말을 저는 참 의미 있게 생각해요. 한 번 들어보세요. “세상은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당신이 아는 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세상은 여러분이 제가 얼마나 복음으로 가슴이 뜨거운지 관심 없어요. 세상은 단지 우리가 복음으로 이 ‘타인 지향성’ 어떻게 우리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그것으로 복음의 능력을 가늠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제가 설날인데 미안한데, 우리 복지 담당 교역자 이웃 사랑부 담당 교역자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사실을 쉬는 날 메일 잘 안 보내는 데, 마음이 뜨거워져서 “지금 우리 교회 복지재단과 우리 이웃 사랑부에서 봉사하고 있는 성도들 현황을 좀 보고해 달라” 그랬더니 아! 너무 감사하게도요, 지금 우리 교회 복지재단과 이웃 사랑부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요. 이쪽저쪽 다 합쳐 가지고 1,100명이 넘는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지금 여기 한마음 복지관, 저 장애인복지관, 우리교회 아닌 다른 봉사자들까지 합치면? 1600~700명이 지금 봉사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숫자 아닙니까? 저는 1600~ 700명의 봉사자들의 ‘복음의 타인 지향성’으로 통하여 오늘도 그들이 섬기는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실력 그렇게 탁월하지 않아도 돼요. 에즈 투게더에서도 봉사하시고, 장애인 복지관에서 그 연약한 우리 이웃들을 섬기는 과정에서 내가 은혜를 받고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 [복음의 속성 5가지]를 말씀드렸는데요.
복음의 실제성, 복음의 희망성, 복음의 윤리성, 복음의 감격성, 복음의 타인 지향성, 아까 일부 예배 마치고, 교역자 한 분이 저한테 와 가지고, “목사님! 이 5가지가 너무 중요한데, 그냥 우리 성도들이 흘려버리지 않도록 우리 홈페이지에 하루, 하루, 이 한 항목, 한 항목씩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습니다. 글쎄 시간이 임박해서 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시도해 보려고 해요. 이번 한 주간 동안 복음을 살아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다섯 가지 복음의 속성이 내게 어떤 능력을 가져주는가? 이제 복음의 능력을 [로마서]를 통해 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들의 삶 속에 은혜로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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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