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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물소가 새끼를 낳았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 입니까?”
“물소(水牯牛)가 새끼를 낳았으니 잘 돌봐줘라.”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른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에 대하여,
교종(敎宗)에서 3승(三乘)의 '승(乘)'이란 타는 수레를 뜻하는데, 성문(聲聞)승, 독각(獨覺)승, 보살(菩薩)승의 3가지 수레(乘)를 타고 난 뒤에 일승(一乘)인 부처의 세계에 이른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12분교(分敎)는 붓다의 가르침을 그 성질과 형식에 따라 12부로 분류하여, 경(經), 중송, 문답, 시게(詩揭), 감흥게, 여시어, 본생담, 환희문답, 희유(稀有)법, 인연담, 비유담, 논의 등으로 나눈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등을 통해 참고삼아 공부해 보십시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 달마대사가 그 먼 인도에서 무엇을 전하기 위해 단신으로 중국으로 건너왔는가? 이것은 많은 수행자들이 근본으로 삼았던 화두이다. 결국 불교의 선(禪)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뜻을 묻는 질문에 조주는 “수고우(水牯牛)가 새끼를 낳았으니 잘 돌봐줘라.”고 대답했다. '수고우'는 물소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물소가 새끼 한 마리 낳았으니 잘 돌봐 줘라' 이다. 이런 표현이 되겠다. 무슨 뜻일까. 다른 비유로, '너의 집 암탉이 허공의 병아리를 깠으니 잘 키워 잡숴라!' 라고 한다면 이해가 오는가? 의심해 보시기 바란다.
이 스님,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조주 자신도 몰라. 이건 말로서는 세울 수가 없어 그냥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거라 했다. 마음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까?
212. '만국이 조공할 때’
“만국(萬國)이 와서 조공을 올릴 때는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도 부르지 말라.”
옛날에 중국은 힘으로 사방을 제압하여, 매년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각국의 사신들이 몰려 왔다. 우리나라도 비단, 산삼 등 조공 바치느라 많이 갈취 당했다. 이렇게 많은 사신들이 귀한 것을 바치러 올 때 황제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뿌듯하다 못해 거드름을 피울 정도로 목에 잔뜩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마음에 비유하면 어떻게 스토리가 전개될까. 깨달음에 좋은 징조가 되는, 공중에 달이 걸리고,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고, 매화 향기가 짙게 풍길 때에는 어떠하겠는가?
조주선사는 답하기를, “사람을 만나도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다. 좋은 일엔 마(魔)가 많이 끼는 법이라 입조심 하라 이 뜻인가. 나도 살짝 헷갈리는데 모든 것을 허깨비처럼 보고 일심(一心)을 지켜야 한다. 자기 성품을 보아도, 깨달음도 아는 체해서는 안된다.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213. '서쪽의 물이 급하다’
“하루 스물 네 시간에 어떻게 깨끗이 씻어냅니까?”
“내하(柰河)의 물은 흐리고, 서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급하다.”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습니까?”
“이 멍충아! 어디 갔다 오느냐?”
이 질문도 물음 가운데 답이 있다고 할 만하다. 하루 종일 어떻게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야 좋을까? 조주는 '내하(柰河)'라는 강의 물은 흐리고, 서쪽으로 흘러가는 물은 급하다고 말한다. 이런 암호화된, 선(禪)적 법어에 토를 달려고 하니까 참 거시기 하다.
그냥 '거시기가 그러니 거시기를 거시기해야 한다'고 해석하면 내가 뺨을 맞더라도 이게 좋을 듯 싶다. 거시기가 급하다고 하니 깊이 의심해 보시기 바란다. 농담 삼아 말했는데 세월은 빨리 흐르고, 시간은 부족한 것이다. 이미 늙어 죽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마음공부를 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 스님, 하루라도 급하다 하는데 얼토당토않게 무슨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묻는다. 조주는 너무나 화가 났다. "요놈의 눈감은 화상아! 어딜 왔다 갔다 하는고!기껏 세월이 덧없이 빨라 깨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가르쳐 줬는데 문수나 찾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닭울음 소리 들을래?“
214. '눈 앞의 도량’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량(道場)입니까?”
“그대는 도량에서 와서 도량으로 간다. 전체가 다 도량인데 도량 아닌 데가 어디냐?”
우리가 마음공부하는 수행 도량(道場), 이곳은 어디에 있는가. 꼭 좌선의자(禪床)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지그시 반쯤 감고,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참선을 해야 도량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사전에 이런 도량은 꿈속에도 없다. 우스갯 소리로 옛 사람들은 '해우소'가 가장 좋은 도량이라고 했는데, 해우소가 뭔지는 알 것이다.
여하튼 조주도 말한다. 우리 모두 도량에서 와서 도량으로 간다. 사방팔방 시방이 도량 아닌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움직이는 곳, 머무는 곳, 앉는 곳, 눕는 곳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풍기는 냄새, 입 맛, 느낌, 생각 어느 하나라도 도량 아님이 없다. 번뇌가 바로 도량이요, 해탈이요, 깨달음이요, 부처이다. 바로 눈앞에 도량이 있으니 바라보라! 저기에 도(道)가 일어서고 있구나! 보아라!
215. '싹 트기 전'
“새싹이 트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깨진다.”
“냄새를 맡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그같이 한가로운 공부는 없다.”
'새싹이 트기 전'의 싹도 마음 깨달음의 싹이 트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마음 깨달음의 싹일까. 싹이 나기 전에는 잘 모를 것이다. 조주는“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깨진다.”고 말했다. 깨닫기 전에는 참 골치가 많이 아프다. 선(禪)의 기초적인 가르침도 익혀야 하고, 선지식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알아듣지는 못하고, 골은 때리지, 어떨 때는 울화통이 나서 다 걷어치우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장좌불와니 하여 등을 벽에도 붙이지 않고 꼿꼿이 하여 아예 한잠도 자지 않는 수행까지 하면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일어날 것이다. 조주의 말씀처럼“그렇게 한가로운 공부는 없다.”고 할 만하지만 재미나게 할 수는 있다.
그렇게 어렵게 마음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쉽게, 조주와 그냥 산보하듯이 노닐면서 공부하고 있지 않는가? 다른 가르침은 깨치고 나면 나중에 술술 알게 되어 있다. 지금은 나와 함께 그냥 거닐면 된다. 때때로 마음으로 깊이 의심만 하면 된다.
216. ‘수량을 벗어난 일’
“어떻게 수량(數量)을 헤아립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수량에 구속받지 않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어떻게 수량(數量)을 헤아립니까?” 여기에도 무엇인가 깊은 뜻이 있을 듯한데 아리송하다. 초기 불교의 명상법 중에 수식관(數息觀)이라는 게 있다. 요즘 우리나라도 위빠사나 명상수행이 유행이라던데, 그 중심 되는 수행방법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무척 간단하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하나, 둘, ...열까지 세는데, 세는 도중에 잡념이 일어나면 처음부터 다시 하나, 둘..열까지 세어가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마음을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가끔씩 재미삼아 해볼 만은 하지만 확실한 깨침은 보장하기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량을 헤아리는 것은“하나, 둘, 셋, 넷, 다섯.”수량에 아무 구속을 받지 않는 것은“다섯, 넷, 셋, 둘, 하나”라고 하면 아니 되겠는가. 조주의 말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 도(道)는 남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며, 한 길도 아니다. 사방팔방에 널려 있으니, 아무렇게나 골라 쓰면 된다. 그래도 쓰기에 합당한 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하나, 둘, 셋, 넷, 다섯”까지 마음속으로 세어보고, 가만히 있어 보라. 이 셈 끝에 내면을 살펴보면 고요하고, 텅 빈 자리가 느껴질 텐데,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자성법신, 열반묘심, 안신입명, 적멸, 온갖 이름을 나열해 보지만 한 마디로 본래 마음(本心)이다. 이것을 보는 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너무 쉽지 않은가?
이 자리에 항상 머물려고 노력하라. 많은 사람들이 불법은 무위(無爲)이니, 인위적인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런 사람은 정말로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능엄경을 한번 살펴보면, 관음보살, 문수, 보현보살 등 붓다 초기의 수십 명의 깨친 자들이 깨달은 것은 모두 소리 등 바깥 경계를 잘 관찰하고, 몸에 배이도록 철저히 파헤쳐 도(道)를 얻은 것이다. 무위(無爲)는 깨달음 후의 이야기이다. 이때는 유위, 무위가 없다. 유위가 무위요, 무위가 유위이다.
깨닫기 전에는 유위(有爲)의 수행을 통해 열심히 공부하고, 화두도 열심히 들어야 정혜쌍수를 닦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유위행을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무위에 도달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무위로 가만히 있으면 언제 도달하지 아무도 기약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붓다도 금강경에서 '불법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는 법(無有定法)'이라고 했다. 어느 길이든 굳센 믿음과 분투심, 중생 구원심으로 열심히 가다 보면 구경에 도달할 것이다. 그 길에 유위, 무위는 걸림돌이 아니다. 유위(有爲)도 깨달음을 촉진하는 보조 수단이다. 어렵게 생각되면 능엄경을 잘 숙독해 보기를 권한다. 깨달음의 이치가 모두 잘 밝혀져 있다.
217. '밤낮이 없는 곳’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세계에 밤낮이 없습니까?”
“바로 지금이 낮이고 밤이다."
“지금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난들 어찌하겠느냐?”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마음의 세계는 낮이고 밤이고 없다.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했잖은가. 밤에 잠이 들더라도 원래 항상 깨어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꿈속에서라도 항상 행동하고 있다.
그대의 지금은'낮인가? 밤인가?' 영원히 깨어있는 그것을 두고 이 스님은 ‘지금에 대하여 물은 게 아닙니다’ 라고 답한다. 이럴 땐 조주도 어쩔 수 없다. 이 조주록을 읽다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참으로 가련한 조주여!
218. '가섭의 옷'
한 스님이 물었다.
“가섭의 가사는 조계(曹溪)의 길을 밟지않았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입을 수 있습니까?”
“허공은 세간에 나오지 않고, 도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인도의 마하가섭 존자는 석가모니로부터 법(法)을 이어받았다. 선종의 1대조 할아버지이다. 석가-가섭-아난...달마...를 거쳐 육조혜능은 조계(曹溪)산에서 가르침의 터전을 잡았다. 우리나라 조계종의 할아버지는 신라의 도의국사라 하는데 그 위로 선조를 찾아가면 육조혜능이 나온다. 그런데 법을 전하는 징표의 상징이라 할 가섭의 가사는 어디서 분실된 모양인가. 듣기론, 오조홍인은 육조에게 다툼의 대상이 되는 가사와 발우는 더 이상 후손들에게 전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최근에 우리나라 신라시대 왕자 출신의 무상(無相)선사의 이야기를 읽어보니, 측천무후가 육조혜능에게서 이 가사를 받아 보관해 오다가 나중에 법통(法統)으로 무상대사의 조부격인 지선(智詵)선사에게 하사하였고, 그의 제자인 처적(處寂)선사를 거쳐 무상선사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그후 무상선사는 제자인 무주(無住)선사에게 물려줬다고 하는데 그 뒤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한다.
‘그 가사는 어떤 사람이 입을 수 있습니까?’ 그 가사를 입는다는 말의 뜻을 이 스님은 알지 못하지만, 아는 사람은 깨달음의 눈을 뜨는 것임을 안다. 조주선사는“허공이란 세간에 나오지 않고, 도인이라고 해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는데, 진여자성(眞如自性)인 우리 마음이 바깥으로 나온 걸 본 사람이 있을까?
허공처럼 텅 비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가르침 때문에 굳이 없다고 할 뿐이다. 진공묘유이다. 이건 도인이라고 해도 보지 못하고, 워낙 신비스러워서 그 정확한 정체를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219. '채식만 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섞여도 잡스럽지 않은(混而不雜) 것입니까?”
“나는 오랫동안 채식만 해왔다.”
“그것만으로 초연할 수 있겠습니까?”
“공양을 다 마쳤다.”
이 선문답도 질문에 답이 나와 있다. 우리 마음은 아무리 무엇으로 섞어도 잡스럽게 섞이지 않는다. 섞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여러분의 잡생각이다. 근본 마음은 항상 투명하고 티끌이라곤 없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채식만 해왔다.” 신체도 채식만으로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깨끗하게 티끌 하나 섞이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그것만으로 초연할 수 있겠습니까?” 채식만 해가지고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뜻이다. 조주선사는 “공양을 다 마쳤다.”고 했는데, 진정한 깨달음이란 채식만 해도 공양을 다 마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채식은 고기반찬 없이 야채만 먹는 것이겠는가.
헛된 것에 전혀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도를 닦는 데만 온 정성을 다 쏟은 것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이 채식으로 공양을 마쳐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경지에 올랐으니, 이제 여러분인들 죽이면 아니 되겠는가? 죽이는 게 진실로 살리는 길이다.
220. '옛 사람의 말씀’
“무엇이 옛 사람의 말씀(古人之言) 입니까?”
“잘 들어라, 잘 들어라(諦聽諦聽)!"
'옛 사람(古人)의 말씀'이란 보통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내 말을 자세히 잘 들어라! 부처(古人)는 현재 사람이고, 또 앞으로 올 사람이다. 내 말을 듣는 자가 부처고, 말하는 자도 부처고, 듣는 것이 불법이고 말하는 것이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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