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예산 수덕사 템플스테이 참가기|마음 나누기
관산 | 등급변경▼ 준회원 정회원 우수회원 임원회원 | 조회 138 |추천 0 |2010.06.25. 14:33 http://cafe.daum.net/ynbculture/8c5x/86
제 37회 영남불교문화연구원 삼국유사유적 답사회
2010년 6월 -예산 수덕사 템플스테이 참가기-
지난 5월 셋째 주말.
부처님 오신 날 연휴. 1박2일 일정으로 땅끝 마을과 보길도 여행은 박기옥 부회장님의 안내로 영남불교문화연구원 삼국유사유적 답사회를 따라 옛 정취에 흠뻑 젖었다. 김재원 원장님의 깊은 내공에서 나오는 문화유산의 해설이 초심자에게도 쉽게 이해되었다.
더구나 6월은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템플스테이 행사에 답사회를 초빙하고 그 비용은 수덕사와 예산군에서 지원함을 알려 주셨다. 원장님은 창립 후 답사회가 현재까지 성장하도록 한 공로를 임원과 회원 모두에게 돌리셨다.
템플스테이는 하루를 절에서 묶으며 속세에서 바라보지 못한 자아(自我)를 찿아 가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 그 과정이 늘 궁금하여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첫째 날. 6월의 19일 토요일.
아침 8시.
대구 어린회관 앞에서 기다리는 희성고속관광을 오르며 회원들은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이번 답사는 장맛비가 예보되고 간간히 비를 뿌리며 날씨가 변덕스럽고 더운 여름의 길목이지만 많은 회원이 참여하였다.
가까운 구미를 지나며 김재원 원장님은 금오산에 얽힌 설화부터 풀어 놓으셨다.
금오산을 바라보는 고을마다 금오산 봉우리는 형상을 달리하고 그에 상응한 지명으로 불리며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우리 고장의 명산이다. 예로 선산은 금오산의 문필봉을 바라보고 길재 김숙자 김종직 등 영남 학자의 절반을 배출한 곳이다. 김천은 노적봉이라 부르며 만석지기 거부가 많고 성주는 옥녀봉이라 부르며 여걸이 많이 배출 되었다.
답사를 가는 충청도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는 길목이고 한반도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요충지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순응하며 삶을 이어 가는 힘없는 민초들은 번쩍거리는 칼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가 다가오면 천천히 대답하며 판단을 보류하고 행동을 민첩해야 생명을 보존 할 수 있었다. ‘아버님 도~ㄹ 굴~러 가~유~라.’는 충청도 양반의 특유의 느린 말투보다 행동은 행정복합도시를 꿰어 차듯 실 속 있고 아주 민첩하다.
대전의 대덕연구단지을 지나 대전-당진 간 고속도로를 달려 청양T/G로 나오니 곧 예산의 예당저수지에 도착하였다. 시골 밭길을 잠시 걸어 끝이 보이지 않는 국내에서 가장 큰 예당저수지에는 소금쟁이가 노는 청정수로 물가에는 낚시 좌대가 여럿 있었다.
예산군과 당진군에 걸쳐 있는 예당저수지는 칠갑산에서 내려오는 무한천을 안고 내포평야로 물을 보내 농민에게 풍년을 낳는다.
저수지를 접한 봉수산에는 백제부흥 운동을 펼쳤던 임존성이 낮은 비구름 속에서 푸른 자태를 잠시 보였다.
점심은 예당저수지에서 잡아 올린 민물고기로 만든 향토음식인 어죽으로 하였다.
궁핍하던 시절의 정(情) 겨운 이웃 이야기를 나누며 복분자 술로 건배까지 하니 더욱 맛있었다.
예산 수덕사 초입은 수덕여관을 배경으로 김일엽 스님과 이응로 화백의 사랑과 낭만을 담고 옛 모습으로 복원 되어 있었다. 동백림 사건에 얽힌 사건은 예술과 지식인의 안타까운 고뇌를 반추하게 한다.
수덕사의 입구에 우뚝 선 일주문은 ‘여기서부터 부처님의 성지니 인간의 욕심을 버리라.’한다. 금강역사상을 모신 금강문, 부처님의 우주세계를 나타내는 사천왕문은 김재원 원장님의 해박한 역사적 고증으로 한층 쉽게 이해되었다.
오후 2시.
성보박물관에 근접한 백운당에 템플스테이 플러스원 프로그램을 신청하였다.
우리 일행 24명은 참여 동기 등을 쓴 원서를 작성하였다. 곧 절 생활을 안내하는 이일선 보살님은 개량승복을 내 주셨다. 엷은 황토색 상의와 보라빛이 감도는 회색바지로 갈아입었다.
모든 회원이 밝고 맑은 부처님 같다. 보살님은 백운동에서 생활하도록 지정되었고, 건너편 심연당 큰 강단의 서쪽 벽면에 처사님의 짐을 두고 함께 산사 생활을 체험하게 되었다.
안내하는 보살님은 사찰생활의 예절, 절(拜)의 방법과 의미 순서와 템플스테이 플러스원의 일정을 설명 하였다.
우리나라의 절은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무릎 팔꿈치 이마가 바닥에 닿는다. 순서는 차수, 합장-저두, 절, 고두레의 순으로 한다.
차수란 단전에 손을 가지런히 하며 마음을 모아 절을 하려는 시작단계이다.
합장-저두란 두 손을 모아 위 가슴까지 올리고 머리를 숙여 예를 표시한다. 이는 절의 처음과 마침에 동일하게 한다.
절(拜)은 바닥에 한 손을 먼저 짚고 나머지 한 손을 짚는 경우도 있으나 규정 된 예는 아니며 오체투지로 자신을 낮추는 하심의 표현이다. 바닥을 짚은 두 손은 손바닥을 부처님을 향하여 작게 펼쳐 양 귓불에 살짝 붙인다.
고두레란 상대에게 절을 끝냄을 알리는 신호로 오체투지의 절을 한 상태에서 바닥을 짚은 두 손을 합장하여 이마에 잠시 두는 것을 말한다.
안내보살은 ‘절에 와서 절만하면 절로 잘 풀린다.’고 얘기하며 보살님의 마음은 ‘어떤 일에도 모두 감사하다.’고 하였다. 염원을 담은 마음이 정말 소중하구나 생각된다.
곧 주강(主講)이신 중현스님을 모시고 입회식을 갖자 수덕사의 옛 자취를 더듬어 주셨다.
가장 큰 자랑은 대웅전으로 국보 48호로 지정 되었으며 1308년(고려 충렬왕34년)에 창건 되어 현재 702살의 나이지만 수많은 전란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현재도 그대로 사용 중이니 ‘내일 새벽 예불을 올리며 마루바닥을 직접 체험해 보라.’ 하신다.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는 가야산 오서산 용봉산 등이 마치 연꽃모양으로 감싸 안은 지형으로 현존하는 백제 유일의 사찰이다.
조선말기 침체된 불교계에 선을 부흥시킨 경허스님과 문하에 근대 한국불교 선문을 빛낸 만공 탄허 혜월 벽초스님 등이 있다
첫 수업은 소원염주 만들기이다.
일주일배(一珠一拜)로 108염주를 궤며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수덕사라고 새겨진 주불모주를 시작점으로 한 번 절을 하고 염주 한 알씩을 궤었다. 지도보살의 ‘탁’하는 주삐소리에 맞추어 절을 하며 염주 한 알에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갔다. 절반도 못하여 굶은 땀방울이 흐른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 한사람씩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소망을 담은 108 염주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우리 일행 24명과 개별로 참석한 사람, 한국의 유치원에 근무하는 미국인 아가씨 3명을 포함한 모두가 일주일배를 마친 108염주를 목에 걸게 되니 차츰 산사의 생활이 몸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저녁 5시.
저녁 공양을 한다. 식당에서도 묵언수행이라 조용하다.
뷔페식으로 차려 1식3찬의 식판에 소채류 반찬으로 소식하여 속을 가볍게 하니 육체의 욕심은 줄어들고 정신은 차츰 맑아진다.
저녁 6시.
저녁 예불시간이라 법고각 앞에 모여 법고 소리를 듣고자 기다렸다.
법고는 가죽으로 만든 큰 북을 쳐 먼 산의 들짐승을 부처님의 법어로 제도한다. 법고의 울림은 사람에게도 마음의 울림이 저절로 나오도록 3명의 스님이 번갈아 장단과 리듬을 넣으며 약 20분간 두드린다.
곧 목어(木魚)도 두드리는데 이는 물고기 모양을 한 나무 고기 배 속을 두드려 물속에 사는 물고기를 제도한다.
이어 구름 모양을 한 철로 된 운판을 두드려 날짐승도 제도 하신다.
부처님은 법어로 삼라만상을 모두 제도 하셨다.
맞은편 법종각에 울리는 청동대종의 종소리를 들으며 대웅전으로 향하였다.
대웅전에는 삼세불인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신 제단의 서쪽은 스님이 동쪽은 우리일행이 저녁예불을 올린다.
큰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추어 합장하였다. 목에는 일주일배로 만든 108염주가 드리워져 있다. 향 내음이 그윽하니 마음이 저절로 엄숙하여 진다. 나의 간절한 소원을 빌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다.
밤 7시.
달빛참선 시간이라 우리 일행은 백운당 앞에 모였다.
지도보살님은 몸에 바르는 모기약를 나누어 주며 노출 된 신체부위에 골고루 바르도록 하고 1인용 작은 방석을 나누어 주었다.
달빛 참선을 하기 위하여 수덕사의 경내에서 좀 떨어진 건너편 산언덕에 있는 연화대로 안내한다.
산허리를 지나자 종현스님은 일행을 잠시 멈추게 하여 사람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신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 갈 때 눈물 흘리며 느릿느릿 걸어가듯 현재 자신의 삶에서 죽음을 맞을 준비로 자신을 되돌아보라 하신다. 그 때부터 우리 일행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으며 각자 생각에 잠겼다.
연화대는 입적한 스님들의 화장터이다.
화장(火葬)을 위한 거치대는 우거진 수풀 속에 있고 그 반대편 언덕에는 소나무 등걸이 쌓여 있다. 일몰시간이라 어둠이 내리고 산 속의 적요가 우리 일행을 감싸 평온한 마음을 안겨 준다.
종현스님은 “하늘 위 그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한 올의 실이 천천히 내려 와 깊은 바다의 바닥에 닿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쉬어라.”고 하신다. 그 후에 찿아 오는 마음의 평온을 가져야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하고 얼굴에 미소가 머금어 진다고 한다.
하늘에서 간간히 비가 내려 달빛은 숨어 버렸다.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각자 편한 자리를 잡고 어둠 속에서 자아를 찿는 참선에 몰입한다. 깨달음은 마음에 있는 것이라 표현 할 수 없지만 짧은 일정 속에서도 체험 할 수 있으리 믿으며. 돌아오는 길에 어둠을 밟히는 작은 반딧불에게도 고마운 마음 가득 하다.
밤 9시.
산사의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는 시간이다.
오늘 심연당에서 일주일배로 시작한 고운 마음을 잘 갈무리하리라 다짐한다. 하루를 반추하며 일기를 쓰고 내일 새벽 예불에 참석하고자 일찍 잠자리에 든다.
산사는 깊은 밤이라 고요하여도 구도의 무수한 염원이 쉬지 않고 쌓여 가리라.
풍경소리가 내 가슴에 조용히 안겨 오는 행복한 밤이다.
둘째날. 6월 20일 일요일.
새벽 3시.
스님이 부처님 계신 도량을 돌며 읅는 청아한 도량경 독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어둠을 깨고 들려온다.
부처님이 계시는 산사를 깨끗이 하여 하루를 맞을 준비를 한다.
밤사이 비가 많이 내렸나 보다. 큰 나무에서 굶은 빗방울이 바람과 함께 떨어진다.
새벽 3시 30분.
대웅전에서 새벽예불이 시작 된다.
스님과 신자님도 어제 저녁예불보다 참여자가 적다. 큰 스님의 독경과 목탁소리에 맞추어 예불을 올린다. 삼존불 앞에 합장을 하고 간절한 소원을 빈다.
절을 할 때마다 702살이나 된 대웅전 마루바닥의 옹기가 내 손과 발에 닿으니 긴 세월의 향내가 고고하다. 전깃불을 켜지 않고 삼존불을 밝힌 촛불에 의지한 깊은 산사의 기도라 어둠 속에서 정신이 더 맑아진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스님들이 먼저 대웅전을 나가자 큰 스님은 곧 템플스테이 참석자를 위한 특별 기도를 해 주셨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 이였다. 나를 올해 미수(米壽)에 가까운 어머님이 건강하게 내 곁에 오래 계시길 간절히 빌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부모 곁을 떠나 멀리서 재학 중인 3남매를 한사람씩 부르며 108배를 하였다. 기도가 끝나고 대웅전에 혼자 남아 어머니 은혜를 조용히 불러 보았다. 매일 새벽운동 후 집으로 오면서 부르던 노래가 오늘은 눈가를 젖게 한다.
숙연한 마음으로 닿은 심연당 안에는 일행이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참선을 마무리하고 종현스님과 대화가 진행 중이다.
참선(參禪). ‘내가 누구냐?’를 찿는 것.
각자 참선을 하며 생각한 자아에 대해 발표하였다. 모두가 자기중심에서 생각하기에 풀 수 없는 문제인 듯하다. 마치 눈이 내 얼굴에 있어서 나를 못 보듯... 소를 타고 소를 찿는 어리석음에 대한 심우도의 깊은 법문도 들려 주셨다.
아침 8시.
스님의 청으로 심연당에 걸려 있는 불교탱화인 노사나불 괘불에 대해 김재원 원장님의 해설이 있었다.
원장님은 불교탱화에 조애가 깊으시고 박사학위를 받으셨기에 모두가 이해하게 쉽게 설명하신다. 수덕사의 괘불은 보물 제 1263호로 1678년(현종 4년)에 만들어 졌으며 크기가 가로 7.3M 세로 10.6M이다.
괘불은 대웅전 삼존불단 뒤에 보관하며 행사 시에 장정 30명이 운반하여 절의 당간지주를 세워 걸어두고 불단을 만들어 불법을 설파하는 야단법석(野檀法席) 때 사용한다. 괘불의 신광을 오색무지개로 표현 하는 것과 시대구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오전 9시.
밤새 내린 비로 안전을 위해 등산길에 있는 가람 내 암자 탐방일정은 취소되었다. 템플스테이 참여반에 25인승 중형 버스 2대가 제공 되었다. 답사회원은 한차에 탑승하고 내포의 역사문화생태 사단법인의 사무처장인 김종대님이 동승하여 안내하였다.
수덕사가 있는 주변의 자연 생태와 역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우리 일행을 타임머신을 타고 백제시대로 데려 가는듯 하다. 해미읍성과 기호학파, 추사 김정희, 고운 최치원, 동학농민 난, 내포지방의 장례풍습 등을 안내하는 충청도 특유의 느린 사투리가 더 구수하게 들려 온다.
오전 10시.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백제의 미소를 마주한다.
국보 84호로 높이 2.8미터이며 600년대에 백제 석공이 높은 바위에 새겼다. 당나라로 불경을 공부하러 떠나는 승려는 삼존불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현재는 바위의 균열을 보존처리하고자 단을 높게 쌓아 삼존불을 마주 대하듯 한다.
현재불인 석가모니여래불을 중심에 두고 과거불과 미래불을 양 옆에 두었다.
가운데 여래불은 둥근 얼굴로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두툽한 입술로 벙글벙글 웃고 있다. 옛 백제인이 다가와 웃는 듯 하다.
오전 10시30분.
서산 보원사지 절터 발굴현장을 답사하였다.
이 곳은 가야산 정봉인 석문봉에서 발원하는 용현계곡이 흐르는 넓은 지역으로 백제 금동불상이 출토 되어 최근 발굴조사 중이다.
발굴 안내문에서 멀리 고려양식의 삼층석탑이 보인다. 고려 광종의 왕사인 탐문스님의 비석과 부도가 옛 명승지를 애처롭게 지켜며 세월의 무상을 말 없이 전한다.
오전 11시.
홍선 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답사하였다.
대원군은 25세 때 연천에 있는 선친의 묘를 2대 천자 자리인 이곳으로 이장한다. 본래 가야사라는 대가람과 5층 금자탑이 있었으나 천자에 눈이 먼 대원군은 이를 모두 불사르고 부수어 버렸다.
둘째아들이 고종황제로 등극하고 자신은 대원군에 올랐으니 천자가 나는 명당자리임이 분명하다. 허나 그 과정의 험난함은 고종황제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서양인이 우리 문호를 개방 할 것을 요구하러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고 많은 천주교 신자가 죽임을 당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야산 석문봉을 주산으로 옥양봉 만경봉 원효봉 용봉산 등이 겹겹이 둘러있고 앞으로 탁 트인 시야가 한 눈에 명당자리인 듯 하다.
지기(地氣)가 센 곳으로 무더위도 많은 사람이 풍수 답사를 온다. 나무 그늘 아래서 지기를 받으며 참선하는 현대의 도인도 볼 수 있었다
낮 12시.
금강산도 식후경.
산사의 공양이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는 에너지를 다 충당하지 못하였는지 점심이 기다려진다. 가야약선마을에서 약초뷔페로 점심이 준비되어 있었다
생명의 근원인 햇볕, 달빛, 별빛 힘으로 길러진 산야초로 차려진 뷔페식단이 맛깔스럽다. 가야산에서 사람의 발길이 한적한 3만평의 농장에서 야생으로 나오는 오가피 참죽 엄나무 산초 옻나무 황기 두릅 가죽 등의 새순과 유기농으로 재배한 곰취 취나물 참나물 등이 입맛을 당기게 한다.
약초뷔페 점심 후 주인 박광수님은 반주로 인삼주까지 권하여 자리를 머뭇 거리며 일어섰다.
오후 1시 30분.
수덕사에서 템플스테이 과정을 마무리 하였다.
산사 생활 중 입었던 개량승복을 반납하고 지도보살님에게 합장하며 “성불 하십시오.”라며 인사를 나눈다. 짧은 시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주강이신 종현스님에게 인사를 하려 대웅전에 가니 다른 단체에 법문 중이라 대웅전 밖에서 합장하였다.
하룻밤을 절에서 묶으며 내 몸에 묻힌 부처님의 향내가 오래 간직되길 바라며 대웅전을 천천히 3번 돌아 돌계단을 내려 왔다.
원장님은 계단 옆에 있는 관음바위에 기도를 하면 소원이 성취 된다 하시며 수덕사 창건 설화와 버선꽃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고색 창연한 대웅전 계단아래의 마당에는 고려 3층 석탑이 고즈넉히 자리잡고 있다. 한 계단 더 아래에 있는 현대식 금강보탑과 코끼리석등은 700년 고찰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듯하다.
금강보탑을 설명하는 게시판에는 전탑좌대가 현 위치에서 발견 되어 그 자리에 고증을 통하여 최근에 세웠다 한다.
대웅전 주변 건물보다 비례에 맞지 않게 너무 높고 하늘을 향해 번쩍이는 황금색 탑두가 왠지 우리에게 익숙한 양식이 아니라 어색하다. 1988년 스리랑카 불교계와 우호를 위해 세웠다니... 국적불명의 양식이다.
차라리 전탑좌대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였다면 오늘 날 우리는 옛 선조의 문화유산을 마음으로 그려 볼 것인데 하는 미련이 남는다.
오후 2시 30분.
우리 답사회원 일행은 의사 윤봉길 영정을 모신 충의사를 답사했다.
1908년 에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난 의사는 일찍 한학을 익혀 일제치하의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타개하는데 헌신하였다.
22세가 되자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다.
24세 때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여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 축하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수행하여 일본 파견군 사령관 등을 즉사 시킨 의사이시다. 주민은 열사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생가와 유품 등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길 건너편의 보부상 박물관도 관람하며 역사 속의 평범한 민초의 삶을 만날 수 있었다. 보부상이란 가벼운 상품을 머리에 이고 이동하는 봇짐장수와 무거운 등짐장수로 고대부터 민초의 생활 속에서 자체적 규율과 조직으로 이어 진다.
국난인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전투에 보부상의 결집된 힘으로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고 전투에도 참여한 공로도 있다. 근대 개화기에는 그 보수성으로 독립협회를 분쇄하는데 앞장서도 했다.
오후 3시.
우리 일행은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치고 타고 온 버스에 오르니 시원한 냉방 속에서 지친 여정의 피곤함으로 곤한 잠이 들기도 했다.
차장에 스치는 짙은 녹음의 산야가 여행 중임을 알려준다.
저녁 6시.
대구에 들어서니 총무님의 답사여행을 마침을 알리며 여름 해외답사에 대한 공지가 있었다. 9월이 오기 전 우리 문화에 대한 해외답사여행이 있으면 하는 바램 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템플스테이가 주는 진한 여운과 아쉬움을 안고 회원 각자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며 정겨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답사여행은 내 삶에서 아주 소중한 시간 이였다.
이를 준비해 주신 김재원 원장님과 임원진 참여한 회원 여러분 참으로 고맙습니다.
2010. 6. 25. 금요일.
관산 유 명 종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