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이재의 가고시마 통신 제65-1신>
사쓰마야키의 심수관 옹을 만나다
2009년 7월 5일 일요일(음력 윤5월 13일)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2.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1%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13%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심수관 옹과 함께 기념촬영
왼쪽부터 김영선, 근이재, 심수관 옹, 아내, 허봄안, 윤중근
오늘은 미야마(美山)에 있는 심수관요(沈壽官窯)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내는 茶具나 茶?에 관심이 많다. 그러니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인 사쓰마야키의 본산이 지척에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나 또한 심수관요의 사쓰마야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언제든 한번 찾아볼 생각이었다. 다만 나는 아내와 같은 ‘차 선생’은 아니기 때문에 찾아가는 목적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도자기보다 단지 미야마의 산과 들, 시내, 나무, 돌, 바람, 집이나 마을 등 그런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혹 도공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더 좋고...
황 군은 수업이 많아 동행하지 못했고, 대신 유학생 중에서 윤중근 군과 허봄안, 김영선 양이 같이 가게 되었다. 황 군의 제안도 있었고, 길 안내나 통역이 필요할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출발은 예정보다 좀 늦어져서 10시 30분이 다 되어서 길을 나서게 되었다. 게다가 네비게이션 작동법이 미숙하여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학생들은 오랜만에 여행길에 나선 것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운전사가 고생하는 것은 아랑곳 없다. 도와줄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11시 30분이 다 되어서 도향(陶鄕) 미야마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2.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2%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8%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심수관요의 진입로 입구에서
미야마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 작은 마을이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쓰마야키의 본 고장 도요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을은 조용하였다. 그러나 미야마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조용한 마을만은 아니다. 미야마는 임진왜란 때 납치돼 온 조선의 도공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마을의 내면 깊은 곳으로는 고단한 역사의 아픔과 소용돌이가 아직도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야마의 사쓰마야키는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 불과하지만, 그릇의 세계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 담겨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쓰마야키에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조선 도공의 혼이 살아있다. 사쓰마야키는 조선 도공의 한과 삶이 승화되어 이루어진 結晶이다.
지금까지 400년 전의 마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미야마는 납치된 조선 도공의 기구한 사연으로부터 시작된 마을이다. 그래서 그런지 산 밑으로 펼쳐진 논과 밭과 집들이 한국의 여느 시골마을과 닮았다. 집 뒤의 우거진 숲은 마을의 분위기를 한적하다 못해 고적하게 만들고 있다. 문득, 숲 속을 오르내리는 흰 옷을 입은 도공들의 환영이 보인다. 7월의 뜨거운 햇빛 때문이 아니다. 시간의 영원한 현재성에 아련한 현기증이 인다. 저토록 무성한 숲 속을 헤매어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흙을 찾아냈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흙을 찾으며 도자기를 구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일들은 생각한 대로 이뤄졌을까? 고향 생각이 나면 어떻게 했을까? 언제까지 고향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2.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7%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1%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히바카리(火ばかり)
심수관요 제1대조 심당길(沈當吉)의 작품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 한다.
이 도자기의 이름을 히바카리라고 한 것은
흙, 유약은 물론 빚은 사람도 조선의 도공이고,
단지 그릇을 구운 불만 일본의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미야마에는 수십 개의 도요(陶窯)가 있지만, 사쓰마야키를 대표하는 심수관요가 가장 유명하다. 심수관요의 역사는 400년이 넘는다. 심수관요의 제1대는 조선 도공 沈當吉이다. 심당길은 1597년 정유왜란 때 왜적(사쓰마의 시마즈 군)에게 남원에서 납치되어 80여명의 도공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왔다. 이들이 처음에 정착한 사쓰마의 해변은 농사도 짓기 어려운 황무지였다. 조선에서부터 본업이 도자기 굽는 일이었던 만큼, 이들은 연명을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도 새로 가마를 만들고 백자를 구울 흙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철분이 많은 화산재로 덮여있는 큐우슈우에서 백토를 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당시 일본 도공들이 만들고 있던 철분이 많아 검은 빛을 띠는 흑자기와 질그릇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 도공들의 질시와 박해가 더욱 심해진다. 이와 같이 온갖 고초를 견디며 백토를 찾아 헤맨 끝에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서 백토를 찾아내게 된다. 1603년 심당길 등 납치된 조선의 도공들은 마침내 집단탈출을 감행하여 나에시로가와에서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이 뒤로 조선 도공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알게 된 사쓰마 번의 시마즈가에서도 이들에게 사무라이 신분을 인정하고 보호해 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사쓰마야키로 이름난 도향 미야마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3.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9%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6%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도향(陶鄕) 미야마(美山)의 안내도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왜적이 중국의 경덕진과 더불어 당시로서는 세계 최첨단 기술을 구사하던 조선의 도자 기술을 탐내서 도발한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다. 수 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납치되었던 것도 다 이런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쓰마야키 뿐만 아니라 일본 제일의 도요지가 된 아리타야키도 납치된 조선 도공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왜적이 조선으로부터 도둑질한 첨단 도자 기술은 후일 일본의 근대화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근대 초기 사쓰마 번은 심수관요의 사쓰마야키를 통해 유럽에 그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 사쓰마는 어렵지 않게 일본 제일의 웅번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쓰마의 자신감은 명치 유신까지 이어져 전 일본의 근대화를 이끄는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도공들의 기구하고 슬픈 삶에서 비롯된 사쓰마야키는 오히려 그들을 유린하였던 사쓰마 번의 성공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술국치는 어떤가? 왜적들이 조선으로부터 도둑질한 기술이 끝내 그 도적들에게 도움이 되어 또 다시 주인을 더욱 핍박하게 된 셈이 아닌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론으로 말하는 역사나 책으로 보는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이나 이론이 으스대는 거대담론에 옮겨 담지 못하고 역사의 현장에 남겨진 채, 과거의 늪으로 소멸되어가는 작은 것들 하나에도 다 그만한 이유는 있는 법이다. 아무리 스케일이 큰 거대담론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실체를 있었던 그대로 다 전하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작은 것들과 마찬가지이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스러기로 치부하여 버리면 안 된다.
각설하고, 꼬리를 무는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작품진열소에 들어갔다. 접수대 옆의 조그만 책상 앞에서 한 노인이 글씨를 쓰고 있었다. 제14대 심수관 옹이다. 처음이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들어온 학생들이 진열된 도자기를 구경하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내가 학생들을 제지한 다음, 심 옹이 글씨를 다 쓰기를 기다려서 인사를 나누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3.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6%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5%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심 옹이 작품도록에 휘호 마치기를 기다리면서
심 옹이 차를 마시자고 하며 앉기를 권한다. 자리에 앉은 다음 우리 일행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통역은 허봄안 양에게 부탁했다. 심 옹과 차를 마시며 30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기념 촬영도 했다. 기념 촬영을 마친 뒤에 심 옹은 일정이 있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심 옹은 현재 대한민국 명예총영사라고 한다. 사랑채에는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라는 현판도 있고, 대문 앞에는 일장기와 함께 태극기도 게양하고 있다. 이렇게 바쁘고 귀하신 분이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려 30분 이상 시간을 내어준 것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2.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8%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5%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심수관요에 있는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관 앞에서
사실 우리는 방문한다는 기별을 한 것도 아니고, 또 기별을 할 만큼 비중이 있는 손님도 아니다. 특별한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단순한 관광객일 뿐이다. 기별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운이 좋았다. 마치 심 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다. 어쨌든 심수관 옹을 만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귀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사진을 같이 찍었다고 해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거인을 직접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몇 권의 책을 읽은 것 이상의 경험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보다도 우리 젊은 유학생들이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더욱 흐뭇하였다.
심 옹은 젊은 시절에 도자기 공부를 하려고 한국에 갔었다고 한다. 심 옹은 400년 전의 고향인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를 회상하면서 감개무량해 했다. 그때 심 옹이 경험하였던 도공과 감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도공과 감나무에 대한 심 옹의 이야기에서는 평범하면서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묵직하게 울리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3.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3%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6%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심 옹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
심 옹은 한국의 어느 도자기 가마 근처에 감나무가 많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왜 그럴까 궁금해서 알아보았다고 한다. 감은 당분이 많아 피로회복에 좋고, 따라서 감나무는 힘든 일을 하는 도공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가마에 불을 지필 때도 감나무는 때지 않게 되었고, 자연 그 가마 주변에는 감나무가 많이 남게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담담하게 전하는 심 옹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가 가난한 도공의 삶과 장인정신에 대해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2.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4%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9%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심 옹의 파안대소
‘도공과 감나무’ 얘기를 마친 다음, 심 옹은 우리 일행 다섯 모두에게 일일이 근황을 묻고 또 각자에게 꼭 맞는 격려의 말을 빼놓지 않는다. 실제로는 10년도 더 넘게 젊어 보이는데, 86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기억력이요 저절로 우러나오는 세련된 배려다. 온화하고 자상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풍모에서는 권위라든가 위압감과 같은 것은 냄새도 나지 않는다. 심 옹의 정신세계는 잡티 하나 없는 흰 비단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한다. 심 옹이 말하는 중에 ‘가마’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한국에서 도자기 굽는 시설을 가마(窯)라고 하는데, 혹시 일본에서도 가마라고 하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일본에서도 가마라고 하며, 이 말은 조선의 도공들이 사용하던 그대로 일본에서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일본의 도자기 문화나 산업은 조선 도공을 납치한 뒤로부터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쇠’(스에, 須惠)라는 말에 대해서도 심 옹이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는데,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했다. 언젠가 다시 듣거나 확인할 날이 있을 것이다.
심 옹의 자리 뒤편에 있는 글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정확하게 통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최근 자신의 심경이나 생활철학을 적어놓은 것이라 말한 것 같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2.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1B33l%26fldid%3DLkUt%26dataid%3D80%26fileid%3D5%26regdt%3D20090812154423%26disk%3D3%26grpcode%3Dydaru%26dncnt%3DN%26.jpg)
심 옹의 좌우명(?)
실례를 무릅쓰고 찍은 사진이다.
昨日在苑 : 어제는 동산에 있었고
本日不在 : 오늘은 자리에 있지 않으며
明日他出 : 내일은 다른 곳에 간다
세속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자연을 가까이 하며, 유유자적하는 평이한 삶을 지향하는, 어쩌면 도가적인, 그러면서도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는 심 옹의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다. 심 옹의 설명을 들으면서 ‘每日如如’라는 말이 그 아래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每日如如’는 말하자면 ‘늘 한결같이 그렇게 지내기 바란다’는 의미의 덕담이다. 이런 덕담은 스스로는 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제격이다. 하지만 제대로 통역이 될 것 같지 않아 그만 두었다. 일본어가 좀 나아진 뒤에 여기를 들르게 되어 심 옹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 못한 덕담을 꼭 전하고 싶다.
첫댓글 학생들은 오랜만에 여행길에 나선 것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운전사가 고생하는 것은 아랑곳 없다. 도와줄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 부분 !! 한 말씀 하시지 그러셨어요~~~ 아무튼 심수관 선생님 만나게 되어서 정말 좋으셨을 것 같네요 ~~ ^^ 그 안에 전시실도 들어가셨나요?
ㅎㅎㅎ 이 동지! 두 문단 밖에 읽지 않았다는 것이 다 탄로납니다.^^ 당연히 전시실 들어갔지요. 나는 보지 않았지만 수장고도 들어갔답니다. 두 사람은...
ㅎㅎㅎ 이 동지! 달구어지지 않은 쇠를 두드리면 쇠도 망가지고 대장장이도 힘만 든다고 하는 얘기 기억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짐작이 될 겁니다.^^
교수님 !! 작품진열실이라고 해서 몰랐던 거였어요 !!
수장고에는 허봄안양과 저만 들어가서 실컷 호강했답니다. 땀 흘리며 400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감동 그 자체였는데 밖에서 땀흘리는 분들 생각에 아쉽게 돌아나왔답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가서 서럽고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달래보고 싶습니다.
'히바카리'라는 도자기 이름 하나만으로도 아버지께서 적으신 그 현기증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번엔 꼭 덕담도 전하시고 더욱 깊은 이야기 나눌 기회 가지셨으면 좋겠네요.
글쎄 나도 그렇구나. 헌데 일본어가 받쳐줘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