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하는 날

[김국자안젤라]

김장하는 날

김 국 자

요즘엔 사시사철 채소가 풍성하여 김장철이 따로 없지만, 우리 아이들 자랄 때만 하더라도 입동이 가까워지면 동네 공터마다 김장시장이 열렸다. 그땐 일 년 농사라며 집집마다 김장을 많이 담갔다. 짠지, 동치미, 깍두기, 총각김치 등 무 김장은 많이 담그지 않아도 배추김장만은 다음해 김장철이 돌아올 때까지 먹을 만큼 넉넉히 담갔다.

철따라 오이지 열무김치 소박이 등 제철김치를 담가먹지만, 짠지는 짠지대로 입맛을 돋우는 여름반찬이다. 어릴 적 잔병치레가 잦던 내게 할머니께서 짠지를 권하며 “인삼김치 좀 먹고 입맛 좀 잡아라.” 하시면 그땐 진짜 인삼으로 담근 김치인 줄 알았다. 나중에 비로소 소화가 잘되는 음식이라는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노년으로 접어들어 짠지의 참맛을 느끼며 젊은이들에게 권하면 젊은이들은 짠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 반찬거리가 마땅찮을 때, 납작납작 썰어 쫑쫑 썬 실파를 얹고 고춧가루와 얼음을 동실동실 띄워 먹으면 시원하고 상큼하다.

짠지 담그는 방법은 간단하다. 단단한 무에 굵은소금을 듬뿍 뿌려 한 사나흘 지나면 무 자체에서 수분이 우러나온다. 절여놓은 무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고 무에서 나온 물을 부은 다음 양파 망에 고추씨를 넣어 눌러놓는다. 고추씨로 눌러놓으면 노르스름한 색깔에 먹음직스럽고 맛도 칼칼하다.

동치미 담그는 방법 역시 어렵지 않다. 소금에 굴려놓은 무와 갓, 쪽파, 마늘, 생강, 절인배추, 삭힌 고추를 항아리에 골고루 넣은 다음, 국물은 금방 먹기에는 약간 짠 것 같아야 익은 후에 간이 딱 맞는다. 동치미를 담글 때마다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친정어머니 시집살이 시절, 동지섣달 기나긴 밤 베틀에 앉아 베를 짜다가 배가 고파 어른들 몰래 동치미 꺼내먹다가 들킨 이야기다. 충청도 사투리로 동치미를 싱건지라 부른다. 그렇듯 맨 입에 먹어도 될 만큼 싱거워야한다.

동숭동 한옥에 살 때만 해도 배추김치를 한 접씩 담갔었다. 배추 한 접이면 포기수로 100포기다. 그 동네에서 배추 한 접 들여오는 집은 우리 집 뿐이었다. 김장한다는 소문을 내지 않아도 이웃이 먼저 알고 “김장하세요?” 물으면 굳이 속일 필요가 없었다. 고향에서 김장하는 날은 동네 잔칫날처럼 푸짐했었다. 이웃이 함께 깔깔거리며 재미있게 김장했던 추억이 그립고 이웃과 정도 나눌 겸 “네! 김장 맛보러 오세요.” 했다.

김장하는 날 매우 바빴다. 굴을 씻고, 수육 삶고, 고깃국 끓이고. 팥을 삶아 찰밥 짓고 과일에 차를 준비했다. 김장에 신경 써야하는 날, 음식 장만하느라 더 바빴다. 부지런히 배추를 씻어놓고 양념을 버무리기 전에 대문빗장을 열어 놓았다. 양념 묻은 손으로 일일이 대문 열어주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다. 누가 초인종을 누르면 ‘대문 열렸습니다.’ 대답까지 준비했건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웃과 재미있게 김장하려던 꿈은 사라지고, 혼자서 배추 속을 다 넣었다. 괘종시계가 땡 땡 땡 열두 번 울렸다. 정오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고무장갑을 들고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준비해놓은 음식을 차려놓고 점심식사를 마쳤다. 후식까지 즐긴 아줌마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란다. 겉절이를 한 그릇씩 담아주며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서운했다.

초등학생 큰아이는 학교에 가고 네 살배기 작은 아이는 그날따라 징징거렸다. 우유 달래서 우유를 주면 집에 없는 바나나우유를 달라는 등 요구조건이 많았다. 어린아이 달래랴, 전화 받으랴, 그래서 김장하는 날은 심부름 할 조수가 필요하다. 기왕 올 바엔 조금 일찍 와서 거들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파트로 이사한 후부터 김장을 많이 하지 않는다. 시동생들이 결혼하고, 두 아들 역시 결혼하여 분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김장거리를 시장에서 사지 않고 직접 가꾸어 먹는다. 깻묵과 한약찌꺼기를 발효시켜 거름으로 활용하고 농약을 치지 않아 배추에 벌레구멍이 숭숭 뚫렸어도 고소하고 맛있다.

며느리들이 “김장 언제 하세요?” 물으면 “며칠 더 있다가 할 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따로 사는 며느리들도 손님이나 마찬가지다. 살림하랴, 직장 생활하랴, 아이들 뒷바라지하랴 바쁜 며느리들 불러보았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파트로 이사 와서도 김장하는 날 이웃을 초대했었다. 여럿이 왔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김장을 망쳤다. ‘젓갈 더 넣어야 해! 고춧가루 더 넣어야 해!’ 모두들 입으로만 거들었다. 사돈댁 오이 먹는 풍습도 각각이라는데, 남의 김장 참견할 필요가 없다. 생강과 마늘을 넣지 않고 김치를 담갔다는 집이 있는가하면, 일 년 먹을 고춧가루를 몽땅 넣어 매워서 먹을 수 없다는 집도 있다. 양념을 많이 넣는다고 맛있는 게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간이 맞아야한다.

이제 나는 김장하는 날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남의 간섭 받지 않고 우리 식구들 식성에 맞게 차근차근 혼자서 한다. ‘우리 할머니 표 김치가 최고’라는 손자 손녀들 생각하면 힘든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