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신구약 중간사
김성윤: 중간사를 계속 나누겠습니다.
노우호: 예,
신학생들이나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은 중간사는 신약성경의 역사적 배경이 되므로 신약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간사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건들 중에서 유대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역사적이고 보편적이고 윤리적입니다. 윤리가 없다거나 보편성이 없거나 역사성이 없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편성이 없다면 특수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참 진리는 어느 시대에서나 적용되는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은 참 진리만이 살아남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은 한 때 반짝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지만 성경은 어느 시대를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한결같은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구체화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성경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시나리오이고 연출자는 하나님이시고 역사는 드라마인데 드라마는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드라마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처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인데 이 역사를 분별 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천기는 분별 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하면서 작은 것은 분별하면서 큰 것은 분별하지 못한다고 애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유명한 교수인 ‘이에치카’라는 교수가 ‘역사는 어제와 오늘의 대화다’ 어제와 오늘이 성실한 대화를 함으로서 내일을 내다보고 준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성경과 중간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알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세계사도 함께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김동길 교수님이 남긴 글에도 어제와 오늘의 성실한 대화가 없이는 더 나은 미래가 기약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신세대 젊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최첨단 정보의 바다에 헤엄치다가 어느 곳에 빠져버리면 헤어나지 못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역사를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젊어서 가장 많이 읽어야 될 책이 있다면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인물들을 길러내는 곳에서는 통감, 사략, 유사, 사기 이런 책으로 사람을 훈육하였고 어떤 시험이든지 역사 과목이 빠지지 않았는데 오늘날 우리사회는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과거를 알려고 하지 않는 풍조가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의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젊은이들이 과거와 역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문화의 특성은 과거를 부인하고 신앙도 없고 기준도 없고 어른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이데올로기 시대도 지나갔고 마치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방향감각이 없이 속도에만 인생전체를 맡기고 브레이크가 파열된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예, 가치기준이 없잖아요!
노우호: 그래서 그러한 세대들의 삶에는
철학도 없고 가치기준이 없는, 향락만 남아서 순간적으로 즐기는 것에 인생을 맡기고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저질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이런 삶이 자유로 착각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 젊은이들의 문화는 변덕에 제한이 없으며 통제의 기준이 통하지 않고 생떼를 쓰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패역한 아이들처럼 이런 식으로 문화가 파괴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미래 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재 세대인들은 무책임한 세대에 나타난 현실만 보고 과거를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천국으로) 인도하기란 고삐풀린 망아지를 마굿간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부터 역사공부를 착실히 하고 청년들에게는 필독서를 제시하면서까지 꼭 읽어야 될 것은 읽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를 세밀하게 모두 할 수는 없고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부터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천하의 영웅이었지만 생애가 너무 짧습니다. 33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의 휘하에는 알렉산더의 4인방인 4명의 장군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누이동생의 남편(제매)인 카산더 장군이 있었고 (알렉산더이후에 카산더 대왕이 됩니다) 리시마크스가 있었고 애굽쪽의 돌레미 장군과 안티고누스 4사람이 4인방인데 알렉산더가 죽고 난 후 위의 4사람이 집단체제로 갈 것인가? 1인 체제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 하다가 싸움을 하게 됩니다.
바벨론과 앗수르쪽을 차지했던 안티고누스라는 사람이 자신이 1인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머지 3사람이 연합하여 안티고누스를 제거 하고 3인 천하가 될 것 같았는데 애굽의 돌레미 왕조 밑에 군대장관으로 있던 셀루쿠스가 안티고누스의 영토를 차지함으로 다시 4인방이 됩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돌레미 왕조와 셀루크스 왕조가 감정이 좋지 않아 싸움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명한 150년 전쟁입니다.
돌레미 왕조와 셀루쿠스 왕조의 싸움이 너무 오래토록 지속되므로 중간에 있던 유대나라가 죽을 지경입니다. 전쟁하는 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식량문제와 여자 문제인데 모두가 현지 조달로 해결함으로 전선의 길목에 있는 유대인들 땅에서 약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지역(팔레스타인 지역)은 농사지어 놓았지만 셀루크스 군대가 애굽으로 전쟁하러 가면서 빼앗고 애굽 군대가 셀루크스 왕조로 가면서 약탈 합니다.
예수님께서 밭에 감추인 보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시대 상황에 적합한 예화가 된 것입니다. 오랜 전쟁기간에 지나가던 군인들이 처녀를 욕보이고 귀중품들을 빼앗아 감으로 보물들을 밭에 묻어 두게 되는데 주인이 보물을 묻어 둔 채로 죽게 되면 보물은 주인 없는 것이 되어 훗날 밭을 갈다가 발견되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150년 전쟁 당시에 많이 묻어 두었기 때문에) 150년의 지루한 전쟁기간 동안 2나라가 정약결혼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기세를 잡으려고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고 전쟁이 길어지므로 전쟁하는 당사자들은 그럴지라도 전쟁도 해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당하는 유대인들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후회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더라면 이렇게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김성윤: 그러나 이미 때 늦은 후회지요?
노우호: 예,
다니엘서에 보면 어떤 괴악한 왕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안티오크스4세(안티오크스에피파네스)로 궤휼에 아주 능한 자 였습니다. 안티오크스에피파네스가 마지막 전열을 가다듬어 애굽을 치려고 내려갔는데 애굽에 도착해 보니까 이미 로마가 애굽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무 정보도 없이 그 먼 길을 갔다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너무 억울한 나머지 (로마는 너무 강한 함대를 가지고 있으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아주 못된 짓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신상을 세우고 그곳에 돼지피를 흘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억지로 돼지고기를 먹게 하는 아주 성전을 모독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셀루쿠스 왕조의 ‘안티오크스에피파네스’를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 하는데 ‘에피파네스’라는 말은 신의 현현자라는 뜻이지만 유대인들은 ‘에피파네스’를 미친 자로 기억하기 때문에 ‘에피파네스’가 아니고 ‘에피마네스’라고 불렀습니다. (에피마네스 = 미친 자라는 뜻) 이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적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나타난 사람입니다. 그의 신하 '아페레스'라는 사람이 성전에 돼지피를 흘리게 했는데 안티오크스의 만행에 저항하던 경건한 유대인 650명을 길바닥에 눕혀놓고 전차로 깔려 죽게 했고(BC168년경의 일) 이에 대하여 분연히 일어난 사람이 유다 마카비우스의 아버지인 마타디아스인데 의용군을 조직하여 저항 했지만 146세의 고령으로 별세하고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우스가 아버지를 이어받아 저항운동을 하게 됩니다.
이 운동을 유대인들은 마카비우스 독립운동이라고 하지만 세계사에는 마카비 반란이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혁명이 실패하면 반란이 되므로 유대인의 역사에는 마카비혁명 혹은 마카비 독립운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중에 가장 두드려지게 살펴봐야 될 부분이 마카비우스 혁명인데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02. 알렉산더 대왕과 헬라문화
노우호: 오늘은 마카비혁명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정복하면서 전 세계가 헬라의 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팔레스타인 지방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대표적으로 헬레니즘 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 아프리카의 안렉산드리아인데요. 알렉산더의 수명은 아주 짧았지만 그가 전파한 헬레니즘 문화는 오래토록 지속 되었습니다.
에굽과 시리아가 150년 전쟁을 치루면서도 두 나라가 모두 헬라문화였어요. 그리스 본토에서는 오히려 헬레니즘이 침체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와 버가모 이런곳에서는 헬라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김성윤: 헬라문화의 특징은 무엇이죠?
노우호: 예
헬라문화의 특색을 살펴본다면 첫째 공회당을 비롯해서 건축을 하게되는데 건축문화가 아주 발달되어 규모있게 지어졌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하여 연무장(체육관)이 곳곳에 지어져서 강한 체격을 연무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날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를 노래하고 관심이 크지만 헬라인들은 남성의 우람하고 강한 체격의 남성미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남자들이 몸을 드러내고 경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레슬링의 그레꼬로망형은 그 당시부터 있었던 종목입니다. 그리스형과 로마형을 묶어서 선정된 경기 종목인데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아주 망칙한 행동입니다. 남자들이 몸을 모두 드러내고 경기하는 것은 경건치 못한 모습이지만 이런 문화들이 유대인 사회에 파고 들어오는 것이죠.
그리고 민중들이 함께 즐기는 노천극장 같은 것이 여러군데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유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생각을 종교의 틀 속에 고정되어 폐쇄되지 않고 자유로운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문화가 되면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남에게 발표할 수 있으므로 국민의 교양을 높혀갈 수 있었지요.
그리스식의 의상을 즐겨 입게 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앞선 사람으로 인정이 되었고요. 그리고 그리스의 어느 철학 학파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이 큰 자긍심으로 작용하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또 여러 신들이 많아서 신화인지 민화인지 알지 못하면서 복잡한 신화를 이야기하고 이런 신화를 알게 되면 헬라문화에 젖은 사람으로 앞선 문화인이라 여겨지는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는 전적으로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모두 나쁜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닙니다.
이 문화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유시민의 기상을 기르는 계기가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서구시민문화를 길러 내었고 일반 백성들의 의식을 깨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헬라문화가 가는 곳마다 서민대중들도 상당히 문화적으로 눈이 띄이는 모습이죠. 이런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이전의 유혹은 우상숭배가 유대인에게는 큰 문제 였지요.
그러나 바벨론포로 이후에는 헬라문화가 유대인들의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킨다고 생각한 것이죠. 포로기한시에 돌아온 숫자는 10만명 정도이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전 세계 흩어져 버렸거든요. 북왕국 이스라엘이 BC721년에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데 여러 나라에 흩어버렸다고 했는데 그 당시에도 흩어졌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 중에 돌아오지 않고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망하고 메데 페르시아 시대를 지나고 헬라시대를 지나면서 온 세계에 유대인들이 많이 흩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세계에 많이 흩어졌다고 하지만 유대인들만큼 짧은 시간에 많이 흩어져 나간 민족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기로 유명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그 때 당시에 메데, 페르시아, 바벨론, 안디옥, 다마스크스, 브리기아, 에베소, 버가모, 사르디스, 파르티스, 엘람, 메소포타미아, 가파도기아, 폰투스, 아시아, 밤빌리아, 리비아,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이디오피아, 고린도, 데살로니가, 베뢰아, 키프로스 전체 어디를 가도 유대인의 집단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면 다섯 가정만 되어도 시나고게라는 회당을 만듭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를 세우는 것처럼 회당을 세웁니다. 회당에서는 민족교육을 하면서 현지 문화에 동화되면서 헬라문화에 유혹을 받기도 하는데 그 때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상당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명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김성윤: 예
노우호: 70인 역을 셉투아젼트라고 말을 하는데요.
70인 역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이들은 유대인들이지만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모국어인 히브리어로는 읽기가 어려우니까) 히브리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연구에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모세5경은 BC250년경에 이미 모두 번역되었던 것 같고요.
이어서 구약성경 전체가 번역 되었고 외경들 까지도 번역되었습니다. 그 사본 가운데 1부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취되어 있었을 것이고 이 때는 애굽왕 돌레미 필리델푸스라는 왕이 통치했던 시기인데 그는 예술 애호가로 이름을 떨친 계몽된 통치자였지요. 고대 왕국과 같이 폐쇄적이지 않고 애굽 사람이면서 헬라문화의 진취적인 기상에 매료되어서 책이나 문화를 관용하는 정치를 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에 세계사의 불가사의라고 하는 알렉산드리아의 대 도서관이 개관 되었다고 합니다.
애굽의 왕조를 30왕조로 구분하여 정리하는데 마네토의 대역사책도 톨레미 필라델푸스를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합니다. 마네토라는 역사가가 역사를 지필하면서 애굽역사를 30왕조로 나누면서 톨레미 필레델푸스 왕이 역사를 소중히 여기니까 역사책을 헌정하듯이 드렸는가 봅니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정통파 유대인들이라고 생각 했지만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나름대로 열심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아주 진취적이면서 개화되고 경건한 유대인들이라 생각 되어집니다.
그 증거가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의 돌레미 도서관의 사서였던 데메트리우스라는 사람이 유대인의 율법에 관해서 왕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죠. 왕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사절단을 보내서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장로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것은 전설 같기도 합니다만 처음에 72명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고 12지파에서 6명씩을 선출하니까 72명이 되었는데 72명이 번역했으므로 이것을 보통 70인 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학자들 중에서 히브리에도 능통하고 헬라어도 능통한 12명을 보내어 애굽의 파라오섬에 보내어져서 72명이 72일동안 번역을 했다고 합니다.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72명이 72개의 별실에서 72일동안 번역을 하였는데 번역한 것을 대조해보니까 72명이 똑같이 번역되어졌다는 믿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때 당시에 히브리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성경이 세계적인 책으로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죠. 그것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을 다른 나라 말로 최초로 번역한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번역된 70인역에 대하여도 영감설을 적용하려고 이런 전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번역을 시도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후대 연구에 의하면 70인 역의 어투가 그 당시 애굽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어투라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에서 72명을 보내준 것이 아니고 애굽에 있던 사람들이 번역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번역판이 그야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선교가 쉬웠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초창기에 바울이나 사도들이 온 세계에 복음을 가지고 갈 때 히브리어 성경을 가져 간 것이 아니고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가지고 간 것이죠. 아직은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사도시대 속사도시대에는 70인역의 이 구약성경을 활용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구약성경에서 인용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과 정확하게 같지 않는 부분이 간혹 있어요. 이것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니까 전체의 뜻은 같지만 표현에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70인 역을 가지고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부분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를 바로 우리말로 번역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헬레니즘이 화려한 문화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정통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오늘날도 보수주의와 개혁주의가 갈등하고 있는 것처럼 그 당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사상을 고수하던 사람들도 헬라어를 모르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시대이므로 헬라어를 쓰지 않을 수 없고 헬라어를 사용하다보니까 언어에는 문화가 베여 있으므로 결국은 팔레스타인 전체와 전 세계가 헬라 문화에 물들어 가는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실 당시의 모습이고 대부분 사람들이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 이었습니다.
103. 헬라문화와 하시딤
노우호: 헬라문화가 팔레스타인에 밀려오니까 환영하는 세대가 있는가 하면 아주 거부하는 어른들이 있거든요. 남자들이 반 나체로 옷을 벗고 하는 경기(레슬링)를 아주 혐오하면서 경건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시딤이라는 극보수주의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에 가면 까만 모자와 양복과 여름에도 오버까지 입고 옆도 돌아보지 않고 수염양쪽의 머리도 깍지 않고 이런 하시딤 사람들은 인간풍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자신의 신앙과 행동양식은 바뀌지 않는데 이렇게 되니까 보수와 진보가 갈등을 갖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그 당시 150년 전쟁 말기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에 진군해 들어와서 유대인들을 탄압하게 되고 진군해 들어온 이유가 헬라문화를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와서는 유대인들이 신앙하는 것을 아주 원시적이고 야만적 신앙행위로 취급하고 아예 헬라문화를 모르면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야만적인 종교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아주 많은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 때 반발한 사람중에 맛다디아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전말은 모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노 제자장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데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는 사람을 보내서 노 제사장에게 압력을 넣습니다.
이방신상에 제사를 지내어서 모범을 보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이 많은 경건한 제사장이 안티오크스에피파네스가 보낸 사람들의 말을 용납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담력이 없는 겁쟁이 한 사람이 안티오크스에피파네스의 분노가 두려워서 제단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맛다디아스는 겁쟁이 유대인을 죽여버리고 안티오크스에피파네스가 보낸 사절단 마져 죽이고는 5명의 아들과 함께 성전에 세워진 이방신상을 헐어 버리고 산으로 도망을 합니다.
그 때부터 그들은 게릴라전으로 항쟁을 합니다. 안티오크스의 군대로부터 피신하면서 항쟁을 하는데 처음에는 산지에 숨어 있다가 틈만 생기면 기습을 하고 습격을 하여 시리아의 군대를 곤욕스럽게 하고 안티오크스의 관리들을 살해하는데 이것이 마카비우스 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큰 타격을 입은 경우도 있지만 변함없는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만이 열심히 집요하게 이겨 나갔습니다.
한 때 타격을 입었던 이유가 안식일인데 방어도 하지 않고 전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다가 큰 무리가 포위되어 학살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안식일에도 방어하는 것은 하게 되었어요. 유대인 전쟁역사를 보면 이 안식일 때문에 애를 먹습니다. 유대 보수주의자들은 아주 폐쇄적인 생각으로 안식일에는 적이 공격해 와도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것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피해를 봅니다.
얼마 후 유다 맛다디아스는 죽고 그의 아들 마카비우스가 계승을 하여 유격전을 펼쳐 연전연승을 하는 많은 전가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마카비우스 깃발아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안티오크스도 처음에는 하찮은 반란군으로 여기고 하급 장교들과 적은 군사를 파견하여 해결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피파네스가 자신이 제일 신임하는 리시아스장군에게 군대를 출동시켜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파르치아 정벌을 나섰습니다
리시아스 군대가 도착하자 유다 마카비우스의 군대는 야음을 틈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리시아스 군대를 전멸 시켜버렸습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큰 승리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한 마카비우스 군대는 사기가 충천하여 예루살렘까지 진군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신상을 깨끗하게 청소를 했습니다.
이방신상과 안티오크스의 동상이 박살났습니다. 그 때가 주전 165년 12월 25일 이였습니다. 이 때부터 8일간 지키는 유대인들의 명절이 있는데 하누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수전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곧 성전을 수리한 날 유다 마카비우스가 BC168년부터 BC165년 12월 25일까지 약 3년 6개월인데 다니엘에 나오는 한때와 두때와 반때를 말하는 것이죠. 3년반 동안 집요한 독립운동을 통해서 시리아군대를 멸하고 성전을 탈환하여 돼지피를 흘리고 우상신상을 세우고 했던 성전안의 모든 가증한 것들을 깨끗하게 숙청하는 그 유명한 절기를 하누카(수전절)라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후 시리아 군대가 다시 대군사를 이끌고 내려와서 마카비우스 군대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는 그 속의 유대인들을 굶겨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큰 곤경에 빠졌는데 이 때 마침 리시아스의 경쟁자가 수도 안디옥을 향하여 진군해 간다는 전갈을 받게 되면서 리시아스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화해를 요청하게 됩니다. 화해를 요청하면서 리시아스가 제안한 내용은
첫째 앞으로 유대인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겠다. 유대교의식을 억압하는 법령들은 철폐하겠다. 대 제사장은 온건한 헬라주의자 엘리아킴이라는 사람인데 헬라어로는 알키무스라고 합니다. 이 엘리아킴을 대제장으로 세우겠다. 이것은 헬라문화를 인정하기도 하고 유대교도 지켜나갈 적임자로서 온건한 사람 엘리아킴을 교체하겠다고 약속하고 유다 마카비우스의 추종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협상안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조항을 두고 임시정부격인 의회가 하시딤 사람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의 목표인 종교의 자유가 눈앞에 보이게 되자 쉽게 화해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카비우스는 이것에 반대하였던 것으로 전합니다. 대제사장 알키무스가 대제사장으로 취임을 하였는데 이 알키무스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 이었습니다. 알키무스가 제사장이 되면 백성들은 평화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을 하고 취임 후 수많은 하시딤을 처형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지난번 화해에 응하는 것을 반대했던 마카비우스가 옳다고 생각하고 마카비우스에게로 유대인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리시아스는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마카비우스는 전사하게 됩니다. 마카비우스는 이름이 아니고 이름은 유다이고 마카비우스는 철퇴라는 뜻입니다. 유다 마카비우스가 전사하고 나니까 동생 요나단이 독립군을 이끌게 됩니다. 남은 형제들은 시므온과 요나단, 요하난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몇 백명씩 군사를 이끌고 일단 요단강을 건너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요나단을 지휘관으로 모시고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던 중에 시리아는 내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서 유대인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들은 대제사장 알키무스 진영의 헬라주의 자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조직을 가진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요나단은 어느 쪽도 내키지 않았지만 지연작전을 쓰다가 마침내 알렉산더 발락스라는 사람을 지지하게 되지요. 그리고 스파르타와 로마와 조약을 맺으면서 외교적으로 유대인들의 독립정부가 국제적로 신임을 얻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시리아의 내분이 계속되는 동안에 요나단은 유다의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통치자이고 시리아의 귀족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나라 율법에서는 레위지파의 아론의 자손들만 대제사장을 할 수 있는데 하스모니아 왕조는 유다지파였답니다.
이렇게 되니까 종교적으로는 많이 헝클어 진 것이죠. 그리고 요나단의 동생 시므온도 팔레스타인의 해안지역의 통치자가 된 것입니다. 요나단의 외교정책이 유다의 번영을 가져오긴 했는데 요나단이 죽고 난 뒤 시므온이 고령의 나이로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한편 시리아는 다시 내분에 휘말리게 되니까 데메트리우스2세를 지지하는 사람과 트리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편이 갈라져서 세력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남의 나라의 분파에 유대인들이 이쪽저쪽으로 파가 나눠지면서 결국은 중간사 시대는 주변나라에 영향을 받으면서 점점더 힘이 분산되고 어려워 집니다. 알렉산더가 다스릴 때는 거기에 가서 아부하는 사람이 생기고 알렉산더가 죽고 나니까 애굽에가서 아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리아에 가서 아부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리아에서 내분이 일어나니까 내분의 주동자중 이쪽편과 저쪽편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나눠지고 외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작은 이스라엘 나라에 모두 영향을 미치면서 이스라엘 나라는 사분오열이 되는 거죠. 그리고 제사장 요나단이나 시므온은 왕이나 제사장의 자격도 없으면서 제사장이 된 것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바리세파로 갈라져 나가게 됩니다.
바리세파나 사두게파나, 에세네파 이런 사람들은 하스몬왕가의 하는 일이 마땅치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반발하면서 국론이 분열되고 유대인들은 지리멸열(支離滅裂)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 이었습니다.
104. 하시딤과 하스몬
노우호: 시리아 나라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제사장이 되었는데 그가 시리아의 내분의 양쪽 중에 트리폰을 배격하고 디메트리우스를 지지한 것으로 인하여 디메트리우스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호의적이였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완전히 면제하여 줄 것을 약속하므로 유대인들은 이제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와 마찬가지로 되었다고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평화가 정착되는 것은 좋은데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인 시므온의 제사장직에 대한 불만이 하시딤을 중심으로 생겨 나게 됩니다. 하시딤의 주장은 레위지파의 오니아스가문의 한사람을 정식 아론의 자손으로서 제사장으로 추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니아스가문은 마카비혁명 때 애굽으로 도망을 갔던 사람으로 국가가 어려울 때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간 사람을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이지만 제사장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안에서 국론의 내분이 일어납니다.
이에 이스라엘 지도자 헤이가 지혜로운 시몬을 신실한 지도자가 나타날 때 까지는 당분간 영원한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으로 불렀습니다. 이 결의로 말미암아 하스몬 왕조가 생기면서 하스몬이라는 말은 마카비가의 조상의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시몬때부터는 하스몬 왕조라고 부르게 되지요. 전 134년에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이 야심많은 사위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그리고 셋째아들 히르카누스가 피신하였다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을 계승하는데요. 히르카누스가 시리아의 인정을 받게 되자 헬라주의자들이 서서히 히르카누스에게로 다가오게 됩니다.
옛 말에 이기지 못할 바에는 합세 하라는 말이 있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그러면서 돈이 있거나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헬라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이고 이로부터 헬라화된 사두게파와 하시딤 정통을 이어받은 바리세파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헬라문화를 여전히 수용하려고 하는 아주 현실주의자는 사두게파가 되고 하시딤의 사람들은 바리세파가 되는 것이죠. 힐카누스는 죽기전에 자기는 사두게파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요한 힐카누스는 영토라는 책을 집필하여 처음에는 시리아에게 양도했던 팔레스타인 해안지역을 모두 합병하고 다음에는 에돔(이두메) 사람들을 합병했습니다. 힐카누스가 이두메를 침략하여 에돔 사람들을 잡아 강제로 할레를 받게 하여 강제로 유대인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애돔 사람을 유대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피는 애돔의 피가 흐르지만 강제로 할레를 받고 결례를 행하였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는 유대인이 된 것이죠. 그 애돔사람 중에서 헤롯왕이 나온 것입니다. 공연히 요한 힐카누스가 애돔 사람들을 강제로 유대인을 만든 것 때문에 헤롯가문의 사람들이 자신들도 유대인으로 귀화를 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입니다. 이들 두 지역은 팔레스타인의 무역로가 지나가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힐카누스는 영토의 확장으로 인해 때로는 반대에도 부딪치고 했지만 그러나 하시딤의 일원으로 사두개파의 일원으로 적당하게 간격을 유지하면서 양쪽에 비위를 맞쳐 가면서 그런대로 잘 해나갔습니다.
이 요한 힐카누스가 죽고 그의 아들 아리스토블루스(유다)가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는 노골적으로 헬라주의자 였습니다. 헬라주의가 미워서 마카비혁명이 일어났는데 놀랍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은 그 후손들도 헬라주의자들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히브리 언어인 유다로 불리는 것 보다 헬라식의 이름인 아리스도블루스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제 였는데 경쟁이 되는 형제 3명을 옥에 가두었고 그 중 2명은 옥에게 굶어 죽게 만듭니다. 어느 시대든지 권력이라는 세계가 그렇듯이 독립운동하며 어려운 시기에는 단합하여 잘 싸우더니 그사이 권력이 안정되고 편안하니까 정권다툼에 형제까지도 죽이는 끔직한 비정함을 보입니다.
그리고 한명은 왕궁에서 살해 하였습니다. 그는 영토확장 사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음주와 질병과 반란에 대한 공포 등으로 겨우 1년을 통치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었지만 백성들이 아무도 울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아리스토불루스가 죽고 나자 그의 형제는 감옥에서 살아남아 있는 형제 1명밖에 없었는데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나단이고 헬라식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얀네우스라는 사람인데 이 알렉산드리아 얀네우스도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취임하면서 정책의 변화를 기대했던 백성들은 그가 또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해양까지 정복을 꿈꾸는 사람으로 실제로 영토를 많이 확장하여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차지하고 있는 영토를 거의 회복할 정도였지만 국민들의 지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리세인들의 의식을 모독할 정도로 헬라주의자였고 사두게파 였습니다. 바리세인들은 이런 얀네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시리아에게 군대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경우가 있었죠.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의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 반드시 후유증이 남게 됨니다. 사두게파 사람들과 바리세파 사람들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치게 하는 역사가 우리나라 경우와 같은 역사가 있습니다. 바리세파 자손들이 시리아군대를 요청했는데 이것은 하시딤 후손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안티오크스에피파네스의 후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어처구니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시리아군대가 도착하자 얀네우스는 산으로 도망을 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이러다가 나라가 통채로 시리아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얀네우스를 타도하기 위해서 시리아 군대를 불러들여 놓고는 바리세인들이 걱정이 되면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얀네우스에게 합세를 합니다. 얀네우스는 힘을 얻어서 반격에 나서려고 하니까 시리아 군대는 명분없는 싸움을 할 의사가 없다는 판단에 시리아 군대는 철수 해 가버렸습니다.
얀네우스는 시리아 군대가 철수한 후 큰 잔치를 베풉니다. 잔치를 베풀었으면 잔치로 끝이 나야 하는데 이 얀네우스는 보복을 합니다. 잔치자리에서 자신을 타도하기 위해 시리아군을 끌어들인 바리세인 사람들 800명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았지만 잔치자리에서 금방 죽지 않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못 박힌 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자녀들을 데려와서 기구를 사용하여 그들 혀를 뽑아버립니다. 이런 끔찍한 짓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두 지파가 화해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히 없어진 것입니다. 못 박힌 800명의 바리세인들이 처음에 시리아 군대를 끌어들였지만 나라가 위태로워 질 것 같은 판단에 다시 시리아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얀네우스에게 합세를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정치보복을 하면서 800명의 바리세인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자식들을 끌어와서 그들의 혀를 뽑아내는 잔인함이 극에 달하는 이 얀네우스는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악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임종하기 전에 자기의 잘못을 회개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 알렉산드리아 살로메에게 정권을 이임하면서 자기는 바리세인이 늘 두려웠다는 심정을 이야기하고 자기 아내에게 '당신은 바리세인들을 잘 대하여 주고' 바리세인과 가까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김성윤: 예
노우호: 얀네우스가 죽고나서 아내 살로메가 정권을 잡았는데 알렉산더 살로메가 바리세인들의 대표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실 나는 당신들을 괴롭히는 얀네우스의 아내였지만 나는 당신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늘 가슴아프게 생각했다고 하면서 남편 얀네우스의 관을 보이면서 자, 여기 남편의 시체가 있소 쉽게 분이 풀어지지 않겠지만 시체를 불태우던지 보복을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그동안 얀네우스가 한 짓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유화정책을 쓰니까 그렇게 참혹한 변을 당했던 바리세인들이 살로메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하면서 오히려 안정이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살로메는 아리스도블루스와 결혼했다가 다시 알렉산드얀네스와 결혼한 여자인데 얀네우스의 사후에 여왕으로 등극한 것이 계획된 순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때 그녀의 나이가 70세쯤 됩니다.
그녀는 여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직을 맡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의 장남인 히르카누스가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아리스토블루스는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지요. 여왕의 남동생은 '시몬벨세타'라는 사람인데 그는 바리세인들의 지도자 였습니다. 이때부터 양계파의 화해를 위한 노력이 조금 보입니다만 결국은 아리스도불루스와 히르카누스 두 사이에 싸움이 붙게 됩니다.
이 싸움이 붙었을 때 로마가 너희 집에 내분이 있고 집안이 시끄럽다면 좀 도와줄까! 하면서 서서히 개입해 들어오게 되고 그러면서 헤롯이 등장하게 되고 헤롯은 애돔사람인데 이 사람은 로마와 잘 지내는 사람으로 결국은 헤롯이 밀고 들어오고 로마가 진주해 오면서 예수님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 당시 로마는 폼페이우스라는 장군을 앞세우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해 들어옵니다. 지쳐있던 히르카누스는 로마를 지지하면서 마침내 자기 형제인 아리스도불루스를 무너뜨리고 세력을 잡긴 했지만 로마의 힘을 배경으로 잡은 세력은 결국은 로마에게 세력이 넘어가게 됩니다.
폼페이우스장군은 그의 장교들을 이끌고 성전에 들어갔는데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매우 격분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성전에 들어가긴 했지만 성전을 약탈하는 만행은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아리스도불루스의 패배와 함께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로마가 지배하는 시리아영의 일부가 된 것이죠. 로마가 시리아 전체를 수리아라는 1개의 행정도(道)로 지정하고 유다는 수리아에 예속된 작은 지방으로 전략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은 이스라엘은 로마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 이었습니다.
105. 하스몬 왕조의 몰락
노우호: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에는 애돔 족속을 평정하여 요한 히르카누스가 강제로 할레를 받게 하여 애돔사람들을 억지로 유대인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 안티파퇴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히르카누스와 아리스도블루스의 사이가 나쁠 때 히르카누스를 도와서 아리스도블루스를 추방 한 것을 공로로 하여 자신의 세력을 차츰 넓혀 갑니다.
이 사람을 로마에도 로비를 잘 함으로 로마의 비호를 받으면서 정치적 야망을 키워 갔습니다. 히르카누스도 그의 세력을 괄시 할 수가 없었고 그의 세력은 점점더 확대되어 갔습니다. 그의 아들 파사엘과 헤롯을 위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데 아주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쥴리어스시저가 살해되고 카시우스의 정권이 들어서려는 어수선한 상태였는데 안티파퇴르와 그의 아들들은 부지런히 곡물을 징수하여 로마에 바치고 아부를 했습니다.
이어서 안토니우스가 부르트스와 함께 카시우스를 패배시키고 나자 아시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기회주의 자였던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곡물을 바치고 뇌물도 많이 바쳤다고 합니다. 이 때에 파르티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처들어오면서 아리스도불루스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왕과 제사장으로 앉히게 되었습니다. 안티파퇴르가 죽자 그의 아들 헤롯은 로마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안토니우스의 총애를 받으면서 지내다가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 사람이 주전 37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하던 예수님 태어날 당시 베들레헴에서 어린아이를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차마 대제사장직은 할 수 없었던지 바벨론의 하나넬을 제사장으로 임명을 하고 왕권의 합법성을 유대인들에게 주장하려고 하스몬 왕조의 후손인 마리암네라는 하스몬왕가의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마리암네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라는 하스몬가 아닌 사람이 대제사장 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히르카누스2세의 손자인 아리스도블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굽의 크레오파트라에게 편지를 보내서 안토니우스에게 부탁을 하여 안토니우스가 헤롯에게 압력을 가하여서 아리스도블루스를 제사장으로 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헤롯은 알렉산드라를 친근히 하는 척 하다가 후에는 감시병을 세워서 왕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연금을 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위험을 느낀 알렉산드라는 특별히 만든 어떤 관에 숨어서 왕궁을 빠져나오다가 발각이 되는 불운을 격습니다. 따라서 아리스도블루스는 헤롯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죠. 그는 제사장의 혈통과 정통성으로 국민들의 지지기반이 되기 때문이죠. 애돔 출신의 자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자기 부하를 사주하여 아리스도불루스를 살해하고 목욕하던 중에 익사 했다고 소문을 내고는 아리스도불루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척하는 쇼를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알렉산드라는 다시 크레오파트라에게 편지를 해서 헤롯을 소환하여 로마의 안토니우스 앞에서 아리스도불루스의 죽음을 해명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헤롯은 이 일을 난감하게 생각하다가 안토니우스에게 갔다가는 어려워 질것이라 생각하고 애굽의 클레오파트라에게 갈 마음을 먹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자신이 숙부 요셉에게 부탁하기를 자기가 만약 사형선고를 받게 되거든 왕비 마리암네를 즉시 살해 하라는 부탁을 하고는 떠났습니다.
헤롯은 질투심과 의심과 정권욕에 사로 잡혀서 거의 이성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인물 이었습니다. 그 만큼 자신이 생각해도 불안한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얼마 후에 헤롯왕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라는 왕위를 자기 가문의 것으로 만들 것을 꿈을 꾸게 되었죠. 숙부 요셉은 마리암네에게 아첨을 하여서 헤롯이 왕비를 죽이라 했던 것을 토로했습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라의 계획이 차근차근 추진되고 있는 순간에 죽었다고 소문이 났던 헤롯이 버젓이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속임수를 쓴 것이죠,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말 이었습니다. 그는 경쟁적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것이 겁이 나서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학살을 했던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헤롯이 돌아와서 어떻게 했는지는 쉽게 상상이 됩니다. 왕비 마리암네가 모든 것을 고백하게 되자 헤롯은 숙부 요셉과 아내 미리암네가 불륜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고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숙부인 요셉까지 죽였습니다.
알렉산드라도 역시 반역자로 취급하여 감옥에 쳐 넣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권력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자 로마는 옥타비아누스를 로마의 초대 황제로 추대합니다.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란 말이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누가복음]
2: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이 사람이 로마 초대의 황제가 된 사람이죠. 기회주의자 헤롯은 재빠르게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헤롯의 정권은 더욱 강화 되었지만 그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의심과 질투는 더 심해 갔고 그는 거의 병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롯이 나중에 죽을 때쯤 되어서는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죽으면 아무도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는 만약 자신이 죽을 때 백성들이 슬퍼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이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죽을 때 경건한 유대교 지도자 20-30명을 함께 죽여서 온 국민이 슬퍼하는 울음소리가 들리게 했답니다.
이정도로 헤롯은 그야말로 여우와 같은 사람이기도 하고 마귀와 같은 사람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런 반면에 헤롯의 업적도 대단합니다. 순례여행으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어떤 건축물이라든지 수로라든지 요세를 만드는 것에는 헤롯은 탁월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은 거의가 헤롯왕이 남긴 유적이 대부분입니다. 헤롯은 오고가는 시대에 아주 악한 왕으로 정권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버린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보면 예수님이 올 당시의 유대나라 사정을 보면 끊임없이 사두개인과 바리세인의 갈등이 있고 문화는 헬라문화가 온 팔레스타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고 또 실권은 로마가 쥐고 있었고 왕권은 헤롯왕이 가지고 있었고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남은 것이 무엇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도 돈독하냐 하면 신앙도 돈독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워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할 때 '때가 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알지 못하나 그야말로 아무 소망이 이스라엘 나라에는 어떤 구세주가 와서 새롭게 하지 않는 한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실제 권세는 로마가 가지고 있고 문화는 헬라문화가 지배하고 왕권은 헤롯이 가지고 있고 신앙은 4분5열 되어있고 바리세파, 에세네파, 사두게인, 열심당원, 헤롯당원, 로마에 아부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으니까 그냥 그대로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그냥 없어질 그런 때였습니다. 아마 극히 극소수 사람들만 메시야를 대망하면서 간절히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고 있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시므온'이라든지 '안나'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눈이 시리도록 하나님의 돌보심을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면서 주야로 금식하면서 섬겼더라고 기록하고 있지않습니까!
결국은 그러한 때에 백성들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입니까! 언제 구세주를 보내주실 것입니까! 하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말라 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외침이 들리자 모든 백성들이 관심을 가지고 나가 보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이죠. 그래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 왔다'고 하니까 중간사 역사를 모르고 이 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인데 구약과 신약 중간의 유대나라 역사의 비참함을 격은(알고 난) 뒤 만약 그 음성을 들었다면 모든 백성이 마치 7년 가뭄에 단비가 오는 것처럼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 왔다'는 세례요한의 음성이 달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이 요단강에 나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바리세인들이나 서기관 율법학자와 교만한 사람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칭찬하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말씀 하셨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높이 세우시는가! 모세도 있고, 사무엘, 다윗, 다니엘과 같은 쟁쟁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어찌하여 세례요한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가장 위대하게 보시는가 하고 연구도 하고 고민도 하고 책도 보면서 알려고 했지만 만족할 정도의 답이 없어요. 한 가지 있다고 한다면 구약시대에 그렇게 많은 예언자가 나타났어도 백성을 회개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렇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예레미야가 그렇게 많이 울어도 회개하지 않거든요. 이사야와 모세가 능력이 많아도 회개시키지 못했고 엘리야 엘리사가 그렇게 큰 능력을 가지고도 회개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와서 그 짧은 기간인 불과 길어도 3년 안팎 까지도 되지 않을 것인데 그 짧은 기간에 전 유대인들을 거의 모두 세례를 받게 해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하였고 자신이 지도하고 가르치던 제자들을 몽땅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그렇게 하고 그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아주 마음을 비워버린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담대히 헤롯왕의 앞이나 어느 누구 앞에서나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르게 외쳐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평탄하게 했던 세례요한의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말씀한 것인가 봅니다. 지금까지 신구약 중간사의 400년 동안을 너무 짧게 지나와서 상세하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하여 어두운 유대나라 역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희망이 하나도 안 보일 무렵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까지만 살펴보았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08 신약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김성윤: 지금까지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를 시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신약에 들어가지요?
노우호: 예,
드디어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는 군요.
김성윤: 신약은 구약과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지요?
노우호: 예,
구약을 이해하고 난 뒤에 신약성경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가 되지만 구약은 분량이 많고 어렵다고 생각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은 무관심하게 뒤로하고 신약성경부터 보는데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구약을 제대로 알고 난 다음에 신약을 알게 되면 구약과 비교하면서 신약성경이 더욱 감동적으로 마음에 와 닿게 됩니다.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것이고 구약은 옛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앞으로 어느 때가 되면 구약의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을 맺게 될 것 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돌에 새긴 율법이나 종이에 새긴 정도가 아니고 사람 마음속에 새겨지는 말씀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스겔도 이런 예언을 했었거든요. 새 언약은 단지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마음에 심어주는 언약으로 흔들리지 않고 잊어버리거나 버리지 않고 퇴색되지 않는 영원한 언약이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언약보다는 더 좋은 언약이라는 의미로 새 언약, 신약, 영원한 언약, 폐하지 않는 완전한 언약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이 전무후무한 그런 언약이 아니라 오히려 옛적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이고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시내산에서 세운 언약은 당분간만 있던 언약이고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으로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허락하셨던 언약이죠. 즉, 인간의 행위에 비중을 두지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의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가 깨닫고 누리면 되는 언약, 구약시대의 모세가 중제자가 되어서 세운 시내산의 언약은 만약에 행하면 복을 받지만 행하지 않으면 저주가 바로 임하므로 어떤 면에서 위험부담이 있는 언약이죠.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복과 저주가 임하는 언약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나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은혜의 언약으로 인간의 편에서는 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믿고 받아들이고 은혜를 누리면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게 되는 언약이지요. 새 언약이라는 것을 구약을 알고 난 뒤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좋은 언약에 참여하고 있는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김성윤: 신약성경의 형식을 보면
많은 부분이 서신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노우호: 그렇습니다.
신약의 대부분이 문학의 장르 중에 서신형식이고 대상에 대하여 명료하고 쉽고 확실한 언약을 힘차게 토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더욱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김성윤: 예,
노우호: 누가 읽을지 모르고 글을 쓰는 것 보다 읽을 대상을 생각하고 글을 쓰면 더욱 친근감 있게 됩니다. 구약을 공부하는 동안에 우리가 돌아 볼 것이 몇 가지 있는데요. 유대인들은 많은 나라들로부터 지배와 억압을 받았는데요. 예를 들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훈련을 받았고 사사시대는 메소포타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을 8년 동안 섬겼습니다. 물론 못된 짓을 한 결과 이지만 사사시대에 다시 모압왕 에글론을 18년동안 섬겼고 하솔왕 야빈을 20년간 섬겼고 미다안에게 압제당하여 7년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 18년 다시 뒤에 블레셋에게 압제를 40년 받았고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바벨론의 포로
김성윤: 정말 이스라엘 민족도 만만치가 않군요?
노우호: 예,
애굽과 시리아가 150년 전쟁을 하면서 짓밟았고 그리고 로마의 압제가 100년 정도 지속되고 그런 뒤 나라가 망하여 온 열방에 흩어져 AD70년에 온 세계에 흩어졌다가 1948년에 돌아 왔으니까 1878년 동안 온 만국에 흩어져서 방황하며 고생을 한 세계역사에 유례가 없는 아주 독특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소수의 무리는 새 언약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민족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 새 언약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더 좋은 언약이 왔는데도 이것을 거부해 버리니까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어요?
새 언약이 더 좋은 언약인데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자신이 이 백성에서 끊어질지라도 내 동족이 이 언약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안타까워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면에서 비슷한 관점에서 다룬 것이고 제4복음서는 요한복음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복음서가 끝나고 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셨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승천하신 이후에는 사도들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사도들의 행적 혹은 사도들의 발자취인 사도행전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역사서이죠. 그 다음부터는 거의 모두 서신입니다. 대부분의 서신을 바울 서신이 13개가 되므로 바울서신이 제일 많고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바울서신에 포함되어 있고 그리고 베드로 서신과 야고보의 서신, 유다(예수님의 동생)의 서신이 있고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우리가 늘 어렵다고 느끼지만 문학형식이 묵시문학적 형식을 띠면서도 희곡처럼 마치 큰 장면들을 3막 20장처럼 나눈 것처럼 아주 조직적으로 기록 하였는데 대부분 성도님들이 계시록을 어렵다고 느끼고 있습니다만 우리 이야기를 잘 듣게 되면 계시록도 전혀 어렵지 않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신약에 제일 첫 번째가 마태복음이 있고 마지막이 요한계시록인데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인가요?
노우호: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데살로니가 전서가 제일 먼저 쓰여졌다고 하기도 하고 마가복음이 먼저 기록되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쉽습니다. 지금은 대체로 데살로니가 전서가 제일 먼저 쓰여졌고 이어서 데살로니가 후서, 갈라디아서 이런 것들이 초기에 기록된 문서들이라고 봅니다.
맨 나중에 기록된 것은 요한계시록으로 90-96년 정도에 쓰여졌으니까 요한은 천수를 다 누리고 다른 사도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들은 대부분 일찍 순교했는데 사도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에베소에서 오랜 사역을 하시고 그때 이미 나이가 100세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요한계시록 요한에 의해 기록된 책이 5권이 됩니다. 바울과 누가가 만남으로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바울이 쓴 서신 13개와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다녔거든요. 이 두 사람이 기록한 신약성경의 분량이 51%를 차지합니다.
바울과 누가가 만난 것이 역사적인 의미가 대단하죠. 바울과 누가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누가복음의 특색도 있지만 사도행전이라는 것을 남겼기 때문에 선교의 발자취, 선교의 능력 이런 것을 보여 줌으로서 불멸의 가치가 있습니다.
누가라는 말은 루카스(빛나다)란 헬라어인데 의사였고 역사가 였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는 한마다도 하지 않고 사도행전이나 서신서 속에서 바울의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일하지만 그 자신의 이름(루카스)처럼 감출수록 빛이 나는 사람입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09 마태복음 이야기
노우호: 이제 마태복음을 열어서 신약성경의 맨 첫 권을 같이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는 헬라식의 이름인데 유대식의 이름은 레위였다고 합니다.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는데 세리라는 직업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혐오스러운 직업이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사회이므로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바치고 자신은 로마로부터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데 아무리 정직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일반사람들의 판단에는 세금을 과도하게 거둬서 일부는 착복하고 나머지는 로마에 바치는 것으로 오해 받기 좋은 직업입니다.
직업 중에서 죄인 취급받는 것이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녀 였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가장 손가락질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마태는 이스라엘 나라 북부에 해당하는 갈릴리의 가버나움이라는 꽤 큰 마을에 살았는데 그곳의 세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관에서 근무를 하려고 하면 백성에게 세금만 받는 것이 아니고 출입국 관리소처럼 통관 업무를 담당하고 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북쪽으로 부터 많은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그곳에서 일을 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4개 국어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이니까 히브리어는 기본이고 가버나움은 북쪽 갈릴리 지역이므로 대개 아람어를 사용합니다. 아람어가 더 큰 범위에 사용되는 언어로 수리아지방에서부터 바벨론까지 함께 통하는 언어이므로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함께 사용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그 당시에 지식층들은 헬라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으므로 헬라어를 구사 할 수 있어야 되고 또 로마의 지배에 있었으므로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라틴어를 사용 할 수 있어야 하므로 마태는 이렇게 4개 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이만한 인물이 별로 없지요?
제자들 대부분 갈릴리 벳세다 동네의 어부들인데 어부들이 큰 학식이 있다고 생각 되지는 않고요.
김성윤: 마태는 학식이 있었던 사람이군요?
노우호: 예,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지목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기록 할 수 있도록 세금은 돈 관계이므로 기록하는 것은 철저했을 것이고
김성윤: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에 얼마나 꼼꼼히 기록했겠습니까!
노우호: 예,
그런 면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셨는데 예수님 제자들 중에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는 열심당원 시몬이 있었거든요. 셀롯인 시몬이라는 말은 마태 같은 사람을 제일 미워하는 열심당원인데 이 두 사람이 12제자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12제자 중에서 마태와 시몬이 다투었다는 장면은 없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에 대하여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마태는 조용히 지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4복음서 꼼꼼히 살펴봐도 마태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인데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 라고 하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말은 베드로가 다 해버리니까 옳은 말이든 틀린 말이든 말은 베드로가 많이 하는 편이고 도마도 엉뚱한 얘기를 가끔 합니다. 빌립도 가끔 말을 하지만 마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성실히 일을 하면서도 말이 없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 말이 없으면 답답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복음서에서 보면 마태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도 말이 없습니다. 이 분들은 입으로 말 하는 대신에 기록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없고 예수님 이야기만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즐겨듣고 잘 새기고 기록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말을 자꾸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 두 사람은 조용하 듣는 사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제일 달게 들은 사람이 마태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입력된 것이 없으면 출력할 것이 없는 것처럼 input 되어야 output 되듯이 마태의 귀에 예수님 말씀이 달게 들리고 예수님 하시는 모든 일들이 일단 마음에 잘 새겨졌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글로 쏟아내어도 아주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성경이 될 만큼 마태의 가슴속에 새겨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스승과 제자들처럼 필기시간을 주면서 불러주고 받아 적으라고 한 적도 없이 예수님께서 그냥 자유스럽게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받아 적으라고 하지 않았지만 일단 이것이 마태의 마음속에 잘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12사도 중에서 마태가 가장 먼저 듣고 본 것을 문서로 남긴 것은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경우 구약은 두껍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신약부터 읽기를 권하게 되므로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출판 역사상 마태복음보다 사람들손에 많이 만져진 책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보다 더 많이 출판된 책도 없을 것입니다. 참 유명한 책이 되었죠. 그리고 사람들이 읽다가 그만두더라도 마태복음을 읽다가 그만두니까 처음 성경을 접하는 사람들이 마태복음 1장을 읽어보면 흥미가 없는 책입니다. 첫 장부터 '누가 누구를 낳고'로 시작하는 출판 역사상에 책 첫 폐지에 족보이야기를 나열한 책은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특이한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은 유대인을 겨냥하여 쓰여진 책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을 존경하는 사람들이므로 마태복음 첫 부분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이것은 왕통으로 태어난 자손임을 강조하는 것이죠.
예수님에 대한 마태의 관점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가 되지만 마태는 일단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메시야의 대명사)이라고 제일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다윗의 자손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이다! 왕통으로 태어나신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이고 태어 날 때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이가 어디 있느뇨?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오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나시고, 사시고, 죽으시기까지 철저하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인용문이 나오는데 이것은 마태가 구약성경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 되어진 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예수님 오신 것도 예언의 성취고 예수님의 삶도 예언의 성취고 예수님의 죽음도 예언의 성취고 부활과 승천과 다시오실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예언의 성취였다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예수님의 금싸라기 같은 내용을 잘 메모하고 나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이것을 기록으로 옮겨서 성경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는지 말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페트릭헨리 라는 사람이 성경이야말로 인류역사에 출판된 모든 책을 모두 합한 것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 모시고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가장 면밀하고 달게 관찰했던 마태가 12제자 중에서 일찍이 복음과 은혜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라! 유대인에게로 가는 이 편지에 마태가 쓰임 받았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첫째는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을 다루고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에 들어가는 것과 예수님께서 가르친 금싸라기 같은 산상보훈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병고치고, 귀신 쫒는) 예수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맨 끝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부탁하시고 올라가셨는지 지상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탁은 전파하는 것과 함께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를 삼아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이것이 마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가르치라고 한 명령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교육이 있는 교회와 교육이 없는 교회 교육이 있는 민족과 교육이 없는 민족은 역사가 지나가면 현저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복음서를 달게 읽고 가르치는 진리를 배우고 확신하고 또 나가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김성윤: 성경의 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10 예수님의 지상명령
노우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지상명령은
마태복음의 끝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서 가르치고 교육한다는 문제가 중요한데요. 나무라고 해서 모두 집이 되는게 아니고 목재가 있다고 해서 목재자체가 가구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저절로 사람노릇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가르쳐야하고 배워야만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첨단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지구 도처에서 아직도 원시적인 삶을 사는 민족이 있다는 것은 교육의 중요성을 나타나는 것이죠. 교육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은 본능이죠. 그런데 본능적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동물이고 본능위에 교양을 쌓고 품성이 다듬어 지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노릇을 하게 됩니다.
교육의 관점을 몇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첫째는 지능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본능 속에 폐쇄되어 있는데 인간은 지능이 개발 됩니다.
예능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예능 훈련이 필요합니다.
체능이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훈련도 아주 중요합니다. 헬라인들의 사상은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두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육체도 성령의 전으로서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아주 소중하니까 우리의 육체도 고르게 발달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주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품성이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다듬어 지는 품성이 있거든요. 능력과 함께 능력을 바르게 쓸 수 있는 품성까지 훈련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지능훈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능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지능은 판단능력입니다. 진위를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능력이고 선악(善惡)을 분별하는 것 어차피 아담의 후손들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선과 악을 판단하여서 선을 선택해야 하고 판단과 의지가 함께 작용하는 문제가 선악의 문제인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미추(美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추한 것인지 판단해야 되겠고 허와 실 어느 것이 빈 것이고 어느 것이 알찬 것이지 판단해야 되겠고 성속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해야 되겠고 귀천 무엇이 귀하고 어떤 것이 천한 것이지 분별해야 되고 선후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다음차례인가! 선후를 바꾸어 생각하면 안 되죠. 경중 어는 것이 무게 있고 어느 것이 가벼운지 적부 적당한 것과 부당한 것 정오 바른 것과 그릇된 것 본말 근본과 지협적인 것 공사 적인 것과 사적인 것 지위선악미추 진, 선, 미 허실, 성소, 귀천, 선후, 경중, 적부, 정오, 본말, 공사 이런 것을 명확하게 판단 할 수 있는 훈련
김성윤: 이런 것이 모두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군요.
노우호: 예,
그래서 학교에서 지식정보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황을 판단 할 수 있도록 4지선다형의 문제를 두고 학생들이 판단을 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죠. 판단력이 순수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는 것은 지능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죠.
예능 훈련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눈을 뜨면 감각(시각, 청각, 촉각)기관으로 온갖 예술적이고 미술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건축, 조각, 디자인, 의상, 자동차 등 모든 부분에 우리의 아름다운 감각이 필요하거든요. 이런 감각들이 예술적으로 발달하여 색도, 명도, 채도, 균형, 조화, 감각이 발달되어야 하고 음악의 세계에서는 음의 고저, 장단, 화음, 등을 느낄 수 있도록 지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여러 가지 품성을 개발하는데는 교회뿐 아니라 학교에서의 교육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감상 할 수 있는 인격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어린아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그려보고 노래를 불러보고 악기들도 제법 다룰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만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교육이 없이는 동물처럼 살게 되니까요.
체능도 중요합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지요? 어린아이들의 육체적인 발달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신체적, 육체적, 기능적으로 결함이 있으면 그런 결함이 콤플렉스가 되면 잘 하는 것도 잘 못하는 사람으로 자신이 위축되기 쉽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강한 훈련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김성윤: 균형 있게 자라는 것이 참 중요 하군요.
노우호: 체육 선수들을 보면
그 부모님들이 어릴 때부터 육체적으로 강한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육체훈련을 하면 정신적인 강함도 따라 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만 분리되어 있지 않고 정신이 육체와 함께 훈련에 참여하게 되므로 육체훈련은 정신훈련이 동반되는 것이죠. 오늘날 가정에서나 학교와 교회에서 하는 학생들의 훈련은 너무 얕게 하는 것 같습니다. 훈련의 강도가 없고 고난도의 훈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을 위한 민족이 되기 위해 굉장한 연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가정의 자녀들은 한명 아니면 두명이니까 고생스러운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강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아이들이 얼음지치기를 한다고 한창인데 강물에 빠질까봐 밖으로 보내지 않고 지능적으로만 집어넣기 위해 공부만 강조하니까 육체적으로 많이 약해서 하나님 일을 감당 할 수 없지요. 따라서 체능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 다음이 품성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속에 살아야 하니까 품성이 나쁘면 아주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품성 40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다이아몬드 보셨습니까?
김성윤: 예, 봤어요.
노우호: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구슬처럼 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 면이 있는 16면 정도의 각도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품성도 40여가지의 면에서 갖추어 져야만 된다고 봅니다.
1. 착한 것
성경은 착한 것을 중요하게 이야기 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 일꾼을 소개할 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성장의 큰 역할을 감당합니다.
2. 아름다운 것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의 영광을 볼 때 우리가 온 우주 만물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장미꽃, 백합,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3. 온유하고 겸손 한 것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죠.
5. 화평하고 거룩한 것
7. 진실하고 성실한 것
8. 지혜롭고 순결하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 이런 것들이 모두 성품이거든요.
9. 공평하고 정직하게
10. 근면하면서도 열심히 일하지만 검소하게
11. 신중하면서도 담대하게
너무 신중하여 담력이 없으면 곤란하죠.
12. 순전하고 양순하게
13. 풍성하고 충만하게
너무 쩨쩨하고 인색하면 큰일을 못하죠.
다른 사람에게는 인자한 것
14. 부드럽게 사랑하는 것
15. 관대하여 마음이 너그러운 것
사랑을 베풀 때는 은밀하고 친절하게
16. 자유가 있으면서도 질서가 있는 것
17. 충성되고 경건하게
18. 확실하고 분명하게
19. 신선하고 참신하게
늘 고답적이고 진부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신선하고 참신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20. 인내하고 덕스럽게
다른 사람과 함께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21. 민첩하고 슬기롭게
22. 기뻐하면서 기쁘게 즐겁게
23. 조화를 이루기 위해 원만하고 적당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부단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 할 경우는 지능도 갖추어 졌지만 대부분 이런 품성들이 다듬어 졌을 때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다윗, 바울, 사도요한, 누가, 마태 이런 사람들이 왜 친근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이런 좋은 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김성윤: 천부적인 품성도 있지만 교육을 통하여 다듬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죠?
노우호: 그렇습니다.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야성만 남게 되면 속된 말로 야만인이 되는 것이죠.
김성윤: 목사님! 은혜를 받더라도 기질적인 것은 변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잖아요?
노우호: 그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은혜를 받았지만 그의 기질은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기질과 품성은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기질과 품성은 또 다른 것입니다. 품성을 잘 다듬게 되면 교양미가 있게 되고 다듬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야성만 남아서 야성이 지나치면 동물처럼 본능 속에 갇혀 있는 모습은 불행한 일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칠 때 좋은 품성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