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전해주
군대 안가는 방법이 있을까를 늘 궁리하던 아들은 걱정하는 나에게 내일 입대 한다고 했다. 반갑고 대견했지만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무척 섭섭하였다. 내 마음을 더욱 서운하게 한 것은 엄마와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바이 바이하자는 것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이의 입대 때 의정부까지 따라 가보고 싶었는데 한사코 친구들이랑 같이 간다며 못 오게 하였다. 녀석은 아침이 되자 떠났다. 훈련소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아들이 군대 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잠시 외출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휑하게 가버린 녀석이 캄캄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잘 가기는 갔나보다. 서운한 생각과 허전한 마음에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한테 실컷 수다를 떨거나 지방에 가 있는 남편에게라도 하소연을 해야겠는 데 밤은 이미 너무 깊었다. 한밤중이 되도록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이불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야." 낮게 가라앉은 남자 목소리가 친숙한 척 속삭였다. 내가 혼자가 된 첫날밤을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을까. 느끼하고 음흉하게 들리는 그 소리에 가슴이 콩닥거리고 무섬증이 일었다. 나는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전화벨은 곧바로 다시 울렸다. "나야. 나라니까." 놈은 더 은밀하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한밤중에 이렇게 전화질 하면 안 되지!" 몹시 떨렸지만 무섭게 호령을 했다. "아니. 나라니까." 새털같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귓볼을 간질이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저절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소리 지르지 마. 살살해. 살~살~ " 놈의 기세는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 이도 지금의 나처럼 이불을 끌어안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웬만큼 남자의 속성을 아는 나이가 되었건만,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어떤 놈이냐? 나를 만만하게 보면 안 돼. 순진한 줄 알지만 나도 알건 다 안다구!" 다시는 이런 얄궂은 짓을 못하게 할 요량으로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앙칼지게 소리치자 전화가 뚝 끊어졌다. 상대방은 포기를 한 것 같았다. 뚜우 뚜 띠…. 캄캄한 정적과 떨리는 가슴에 기계음만 점점 크게 울렸다.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를 노리는 욕정에 눈이 먼 이가 누굴까. 평소에 내가 어떤 허점을 보였던 것일까. 아들 생각은 간데없고 이제는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무장했다. 거실로 나가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목이 타서 부엌으로 가 냉수를 한 잔 들이켰다.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본 듯한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별로 싫지도 않았다. 외간 남자와의 통화는 모험적이고 설레임 만점이었다. 나는 지금 떨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다. 은밀한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을 거절하고 싶지 않은 아리송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왜 이러나 싶어 나를 나무라고 다독거려 보지만 들뜬 마음은 좀처럼 가라 앉지 않았다. 나도 언제부턴가 일상의 탈출을 그리고 있었나보다. 혼자 짝사랑하며 나를 주시한 남자가 있었다니! 왠지 기분이 좋아지며 전화선을 타고 온 그의 체취가 향긋하게 느껴졌다. 간지러운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해 무척 자상할 것 같았다. 진정 나를 알아주는 진짜 내 연인이 이 세상 어디엔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치미 뚝 떼고 살았던 나는 이제! 점점 그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내 속에 잠재된 바람기를 통째로 잡아 흔드는 묘한 목소리. 그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모두 채워 주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다 이해해 주는 포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주는 불만과 장벽에 위로가 되는 뭔가를 얘기해 주고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 줄 것만 같았다. 울적한 날, 밤새 붙일 수 없는 편지를 쓰게 했던 그 사람이고, 언제부턴가 이 세상엔 없다고 포기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그를 내쫓고 말았다. 다시는 전화가 안 올 거야. 소리 좀 쳤다고 전화를 끊나. 으이 바보 같이. 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남성상이 배어 있는 그이가 아깝기도 하고 몹시 아쉬운 맘이 들었다. 한숨을 쉬고 있는데 또 전화가 울려 화들짝 놀랐다. 그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의 심장은 묘한 파장으로 출렁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벨소리는 너무 요란해서 숨이 턱턱 막혔다. "여보세요." 나는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말했다. < 소망 . 8F . Jeon Hae Ju 作> “엄마! 나야.” “어머머, 너니?” 두근거리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어색했다. 공중을 날아다니던 형형색색의 무지개 비눗방울들이 일제히 부딪히며 사라졌다. 핸드폰을 못가지고 가게 되어 있는 군대에 아들이 엄마와 마지막 통화를 위해 숨겨 가지고 들어가 동료들이 잠든 사이 모포를 뒤집어쓰고 몰래한 전화였다.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했을까. 녀석도 참! 동창회도 포기하고 따라나서려고 했는데 못 오게 하더니 서운할까봐 신경이 쓰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반한 남자의 목소리가 아들이라니. 갑자기 누군가에게 내 것을 빼앗겨 버린 것 같이 허전했다. 이 자식은 언제부터 이렇게 좋은 목소리를 갖게 되었지? 그래, 바로 네가 내 심정을 제일 잘 헤아려 줄 가장 가까운 남자일지도 모르지. 내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이상적인 남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아쉽고 혼란한 이 마음은 도대체 뭔가. 오늘 같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면 가끔 이런 감미로운 목소리가 기다려진다. 나야. |
첫댓글 이세상 그 누구보다도 멋지고 사랑스럽고 없으면 못살... 그런 남자에게 제대로 딱 걸려버렸네여. 두 아들이 군대 간후 내 마음엔 오매불망 작은 놈보단 큰 놈이 자리하고 있던차 수신자 부담 전화만 오면 화들짝 놀라며 <태경이니?>하는 반가운 소리 뒤에 좀 서운 한 듯한 <우경인데..>하는 소리. 큰 아들은 평생 연인같을텐데 해주님은 나는 둘 가진 아들 하나밖에 없으니 그 마음 이해 하겠네여.
아들은 내게 영원한 짝사랑이지요....
다시 읽어도 풋풋하고 정겹고 재미있습니다. 봄비처럼 촉촉이 젖어드는 아름다운 산문입니다.
군대 이야기라면 나도 쓸 것이 있네요... 3년 갔다와서 평생 울궈 먹는 것이 군대 이야기 일 것 같아요...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제일 멋지고 사랑스러운 존재인데 반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ㅋㅋ 하마트면 바람(?) 날 뻔 하셨네요 ^^
이토록 노골적이고 폭풍 같으니 다들 무서버서 대피해버렸엉엉..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수만 있다면 미친척 하고 한번 다이얼을 돌려보는 건데... 하여'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는 무지개빛 비누방울'이 아니라 '한아름 빨간 장미다발'이 되게 했을텐데.ㅋㅋㅋ. 아, 긴 세월의 간이역과 간이역 그 사이가 아쉽구료.ㅎㅎㅎ. 좋은 글 거듭 읽고 흐뭇한 미소 띄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전해주!
어제 어느 글벗님이 말하기를 삶에서 어려웠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은 세월은 나이에서 다 빼 버렸다네요. 시어머니 수발 3년, 친정 어머니 간병 5년, 딸 아기 뒷바라지 4년등... 그녀 나이 갓 마흔! 그러기나 말기나.... ㅋ
나를 위해 살지 않은 세월을 나이에서 빼고 나면 저는 이제 막 서른살이네요.ㅎㅎ
에구구~ 류영하에게로 다이얼이 돌아가 버리겠네.
순진한 줄 알지만 나도 알건 다 안다구! 이히 이 궁색한 호령 넘 귀엽다. 아무두 안 무서워 할 거야. 앞으로 아드님에게 단호하게 이르세요. 엄마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나야!가 뭐니? 어머니 접니다. 이렇게 전화 하거라. 나 헷갈렸느니라. 이게 가정교육-
군대 생활 할 때 부터는 깍듯이 어머니라고 부르며 어찌나 예의 바르던지요...지금은 너무 말이 없고 점쟎아 어릴 적 늘 웃고 까불던 장난꾸러기 시절을 그리워 합니다.
ㅎㅎㅎ 보통 아들의 목소리는 아버지 목소리와 많이 닮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음색이 달라도 전화상으로는 거의 비슷하게 들려 해프닝이 있는 경우가 다반사죠^^) 사랑하는 낭군밈의 목소리와 더욱 흡사한 관계로 더 착각하지 않았을까요^^(연애시절 지금의 남편에게 전화를 받앗을 때의 그 두근거림으로...하하하)
김샘. 저의 이 글은 독자를 향한 서비스가 한 70%쯤 되는 것입니다.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내 수필읽기라는 영역에 가두어 두고 싶어스리...ㅋ 아들과 아버지의 그 미묘한 차이와 순간포착의 영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구!
그 "엄마! 나야." 란 밝힘 일찍 하지 않았더라면...정말 아쉽다. 역시 아들은 아들로서의 마땅한 도리(효도) 다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모자간 짙은 사랑 여실히 보인 한 편의 글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드님의 멋진 군대 생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