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선암사와 작설차
바람일어 벽 스치니 연무 흩어지고
갈가마귀 울며 갈 제 석양 해 저문다
어스레한 연못에 차 달이는 연기 멈췄고
문 닫는 소리 그치니 들닭도 잠들었네 . . .
1) 선암사의 연원과 작설차
전라남도 순천시에는 호남이 명산 중의 하나인 해발884m의 이 있다.
이 산중의 곳곳에는 여러 갈래의 깊은 계곡이 있으며,
그 계곡에는 일 년 내내 흐르는 맑은 물이 주위의 숲 및 바위 등과 어울려
자연스러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조계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와 더불어
이 지역은 일찍부터 명승지로 손꼽히고 있다.
선암사로 들어서는 초입에 세워져 있는 표주석에는
, 이라고 새겨져 있고,
바로 앞 비전에는 선암사 출신으로 이름을 널리 떨친
선조사 스님들의 비석이 나열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 이백여 보쯤 걸으면
조계산의 동쪽 기슭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계류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 천년 고찰인 선암사의 관문인 와 가 있다,
강선루에서 차 한두 잔 마실 시간쯤 걸으면 아담한 못 과 일주문이 나오고
이어서 종각과 함께 선암사 40여 동의 가 옹기종기 조계산 품속에 안긴 듯
자리하고 있다. 특히 2개의 인 승선교를 지나 강선루에 이르는 진입 부분은
선암사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이러한 진입과정은 속계의 온갖 번뇌와
오욕을 씻고 천상의 성스러운 곳으로 오르는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자신의 영육을 청정케 하는
사찰의 처음 진입 단계에서 거쳐야 할 과정적 공간인 것이다,
깨끗한 계류를 보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선경에 몰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불심으로 인도되어 이윽고
부처이 경지에 이른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선암사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엄숙한 예배사찰이자
선승의 수행 요람으로 비쳐지고 있었고, 조선 말기에는
1 4대 강백의 출현으로 교학의 이 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고려시대 김극기 선생은 선암사의 숙연한 분위기를 이렇게 읊었다,
선암사
적적한 산골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 스님일세
마음속의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도 용하네
팔천성인에게 예배 올리고
담담한 사귐은 삼요의 벗일세
내 와서 뜨거운 번뇌 식히니
마치 옥병 속 얼음 대한 듯하네
또한 조계산은 풍수학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는데,
선암사에 본사급 사찰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천왕문이 없는 이유는
풍수학적으로 조계산 사대 봉이 선암사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여 수호신의상징인
사천왕문을 건립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또한
조계산의 우백호 산줄기와 좌청룡 산줄기는 군왕지지인 명당으로 알려져 있어
암장도 심했다고 전한다.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조계산에서 생산되는
닥나무와 산뽕나무의 껍질을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공납하도록 로 지정하였고,
홍릉관에서는 을 공물로 상납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입산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강학이 융성하여 의 이 되기도 하였던 선암사는
도선과 대각국사의 유적등 문화재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소장된 국가지정 문화재로 우선
대웅전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삼층석탑과
고려시대 석탑 내 유물(3종3점),
동쪽과 서쪽(대각암),
북쪽에 건립된 3부도(도선국사가 선암사 창건 시 산천 배역을 진압하기 위해 세움), 그리고
조선시대에 축조된 승선교와 동시대에 제작한 대각국사 . 도선국사 진영,
석가모니 괘불탱화, 서부도암 감로왕도, 33조사도 동종 2점으로
이상 147점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적 제 507호 선암사 일원은 명승 제 65호로,
선암매는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가사탁의는 중요민속자료 제244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지정 문화재로는
고려시대에 제작한 금동향로와 도선국사 직인통, 그리고
조선시대 건축물 팔상전, 일주문, 원통전, 불조전, 중수비, 금동관음보살좌상, 이렇게
유형문화재가 8점이고,
삼인당은 기념물로,
마애여래입상과 각황전, 측간(해우소)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의 형국이면서 의 지세에 자리한 선암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사찰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1759년에는 40여 채의 전각이 불에 타버려
1761년 화재예방 차원에서 산명을 으로 복칭하고
선암사를 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823년 모든 건물이 다시 불에 타 버리는 대화재가 발생하였고,
이후 중건한 전각을 화재와 대비되는 뜻으로
, 당, 당, 당, 으로 명명하였고,
타 전각의 에도 글자를 거꾸로 써 붙였다. 대웅전의 부연 사이
수십여 개의 에도 단청 시 자를 써넣어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각황전은 우물 자 형으로 중건하였다, 또 크고 작은 연못과 석조를 만들어
늘 물이 넘치게 하였으며, 이외에도 간이 소방차도 곳곳에 비치하는 등
화재예방 차원이 모든 방편을 동원하였고 화재에 대비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선암사의 가람배치는 에 따르는 으로 웅장한 기상을 보인다,
이 중 북쪽 끝에 위치한 전을 두르며 자리 잡은 전은
저자가 성장하고 공부하고 수행하는 한편 차를 배우며 알게 되어
차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선친인 용곡 스님께 차일과 제다법을 전수받은 곳이다,
무우전 바로 옆 들이 칠전선원인데, 칠전이란 일곱 개의 불당이
응진당을 중심으로 서로 엇물려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것이다,
호남 제일선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응진당,
그 좌우에 벽안당과 미타전, 그 양 옆에 달마전과 진영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암사 차 유적지 중 핵심이자 라 할 수 있는 곳이 달마전이다.
달마전 안쪽으로 출입할 수 있는 조그마한 문은 폐쇄적으로 보이나
그 문을 통과하면 너른 마당과 이 있어 개방적이다,
달마전 부엌에는 차를 덖을 수 있는 가마솥과 차 탕을 끓이는 차 부뚜막이 있고,
후정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석제 수조가 차례로 놓여 있어
상탕. 중탕. 하탕이라 하고 땅 속의 수로와 상탕을 연결하는 밤나무 홈대를 타고
흐르는 물은 중탕 하탕을 채우며 흘러내린다.
이 달마전은 바로 뒤편에 선암사의 자랑인 일만여 평의 차밭이 있어 언제든
찻잎을 따서 바로 법제하여 우려 마실 수 있는 완벽한 요건을 갖춘 선원으로
이곳에서는 선 수행의 동반자로 규칙적인 차 생활이 가능하도록 배려되어 있다,
또한 달마 전에는 선객들이 필히 지켜야 할 수행 중
금기사항이 열두 항목 [ ?]의 조례로 제정되어 있다.
선원 출입문 뒤편에 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이다,
‘세계일화’의 의미는 석가모니가 제자들 앞에서 연꽃을 들어 어떤 뜻을 암시했으나
아무도 모르고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아 혼자 미소로 답했다는 염화미소 즉,
이심전심의 전법이 조종육엽 즉, 선이 초조 달마 이후 혜가. 승찬. 도신. 홍인에 이어
육조혜능에 이르러 선종이 성립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또한 과 과 같은 추사 필흔 편액들도 이곳에서는
차와 선이 둘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1759년 선암사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97년 다시 복원된
칠전선원의 상량문에는
“호남의 삼백 사찰 중 물자 풍부하기로 세 번째요,
깊고 그윽한 곳에 있어 인재가 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찰 중에서 제일 명승지로 꼽는다.“ 라는 내용이 있고,
동년 윤유월 낭월섭련이 짓고 쓴 다음 차시도 기록되어 있다.
바람 일어 벽 스치니 연무 흩어지고
갈가마귀 울며 갈 제 석양 해 저문다
어스레한 연못에 차 달이는 연기 멈췄고
문 닫는 소리 그치니 들닭도 잠들었네
고승 면벽수행 침식도 잊었고
스님 나갈 일 없으니 길에 이끼만 끼었네
정처 없이 떠다닌 인생 스스로 옳고 그름 없고
본심 청정커늘 근심걱정 있으랴
현재 조계산 중군봉을 주봉으로 한 동쪽을 조계산이라 한다. 그리고
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계류가 섬진강 줄기와 합치는 곳에 송광사가 있고
연산봉을 중심으로 송광사가 위치한 서쪽 산을 송광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1158~ 1210)스님이 이니 사를 지리산 에서
로 옮긴 후, 고려 희종이 조계산 로 개명하라는 을 내렸는데,
이후 송광사로 개명한 시기 알려지지 않았다. 이 고장에서 수령을 지낸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의 []에는 송광사와 선암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순천 송광사에는 몇 백 년 된 지 알 수 없는 마른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색은 백철처럼 희고, 향과 냄새가 강하다.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나 백단이라고도 한다.
선암사에도 북쪽으로만 자색 꽃이 피어 북향화로 불리는 나무가 있다.
관음죽이라 하는 대나무도 있는데 가지 없이 곧게 자라며 잎은 끝부터 시작된다.
이 역시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승주군사]에는
“선암사 일대는 비자나무 숲이 9만여 평에 3천여 주가 수림을 이루고 있으며,
그 열매는 구충 특효약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고,
선암사 의 높이 9m, 흉고 둘레 5.6m의 비자나무는 약 800년 생으로
주민들이 을 비는 신목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고로쇠나무 수액이 예부터 널리 약소로 사용되었으며 약용식물도 비교적 풍부하다.“ 라는
내용과 조계산 일대 약용식물의 목록도 수록되어 있다.
한편 조계의 는 이 머물렀던 중국 광동성 아래
가 자리했던 곳의 지명로 의 시내[?]라는 말인데,
이곳에 육조가 머물러서 선종을 크게 일르켰기 때문에 그를 조계(대사)라고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말 이래의 우리 에서는 조계를 육조헤능의 통칭으로 삼다시피 하였다.
선암사의 에 대해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선암사의 (절자취)과 사적비, ,
[]등에 의하면 선암사의 창건 주는 와 으로 나누어진다.
구전으로도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선암사는 대웅전 앞의 보탑이나
사찰 뒤편에 흩어져 있는, 우수한 솜씨와 조성시기 또한
통일신라말기로 추정된 3기의 부도 등으로 보아
매우 역사가 깊은 사찰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선암사에 언제 차밭이 조성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빙자료는 없으나
다만 전해 내려오는 바, 도선국사(827~898)가
호남에 과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명산에 절을 세워
국운을 돕는다는 풍수지리학 상의 사찰인 량[?]으로 을 창건하였다.
그 삼암은 영암군 월출산 , 광양현 백계산 , 승평부 조계산 선암사이며,
이 세 사찰의 산천배역을 진압하기 위해 모두 사탑을 건립하고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또한 이 삼암사에 도선국사가 차씨를 심었다고 하는데
현재 용암사와 운암사는 폐허가 되었지만 저자가 답사하여 살펴본 바,
피폐된 폐사 주위에 차밭 흔적과 오래된 차나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차 관련 구전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 도선국사와 관련된 비보사찰 중
영암 도갑사, 화순 운주사, 순천 향림사, 광양 옥룡사, 경남 다솔사 등에
차밭이 있지만 조성연대를 입증할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저자는 국내 유명사찰 주위의 차밭 현황을 파악코자 노력하였으나
개인적으로 여의치 못하여 용곡 스님게 말씀을 드렸고,
스님께서는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1929년에 제작 출간한
[조선사찰 31본산 사진첩]을 보여주시며, 옛날에 경운 스님을 모시고
31본산 순방길에 나섰을 때
영호남 사찰에서 직접 법제한 차를 접대 받은 일이 있었다는 말씀과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일러주셨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영호남 20여개 사찰을 찾아다니며
차밭의 실태와 제조법을 알아보기도 하였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고,
다만 10여 개 사찰 주변에서 수령이 오래된 차나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암사와 인연이 깊고 차와 관련이 있는 스님으로는 우선 대각국사를 들 수 있다,
(1055~ 1101)은 1094년 5월부터 1095년 10월 까지
남쪽 지방을 하던 중 머물던 곳에서 크게 했다, 하여
붙여진 선암사의 에서 한동안 주석하며 선암사의 를 중창하였는데,
이 불사의 원만성취를 위해 다례를 행하였다고 전한다.
현제 선암사에서는 대각국사의 영정과 3기의 대각국사 부도가 있고,
국사의 인 이 국사를 위해서 하사한
와 [조계산선암사대각국사중창건도]가 전해지며,
음력 9월28일 대각국사탄신기념일행사 때 다례도 행하고 있다. 당시 왕자이자
승려의 신분으로 송나라에 다녀와 송의 문물과 특히 차에 대해 익히 알았으며,
차 관련 여러 시와 [차를 보내준 임금께 올리는 감사의 표]{ ??}외
국사의 묘지명에도 차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등
고려의 대표적 차인인 대각국사는 송의 용봉단차에 필적하는 차로 당시에 유행하였던
를 이곳 선암사에서 직접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수도성이 차를 마시는 일은
공양 후 소화를 돕고 입안을 청결케 하여 개운하게 하는 효과
이외에도 수행하고 좌선을 행할 때 화두에 집중하고 몰입하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꼭 필요로 했던 절차로서,
불가에서는 이를 과 더불어 향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차의 산지가 지리산 이남이 사찰에 국한되고 좋은 차의 생산도
사찰 주변의 환경과 토양 등의 여건이 맞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만큼 차를 소중히 여기게 하였던 것이다.
개개인에 따라서 의 정도도 달랐을 것이고 일수록
머무는 전각과 수행처, 혹은 문파와 문중에 따라서 마시는 차의 종류와
마시는 법, 그리고 차를 법제하는 방법 또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큰스님 모시고 상좌들과, 혹은 큰스님, 작은 스님들이 좌선 전후에
끼리끼리 모여서 차를 마시며 선문답을 나누고, 때로는
불가의 일과 공동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를 지으시는 스님은 때로 차에 대해 시를 지어 서로 감상하며 품평도 하고,
선조사 및 선인들의 차에 대한 시와 문, 그리고 우리나라와 이웃인
중국의 다경과 다록 등의 다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을 것이다.
또 차를 좋아하시는 선조사를 위해서 차가 올려졌을 것이며,
이러한 차를 즐겨 마시는 분위기와 차를 의 대상으로, 수행에 동반되는 존재로,
선조사와 부처님께 바치는 특별한 헌물로 여기는 풍속이 특정된 한곳에서
대대로 이어 전해져 내려옴을 다풍이나 다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를 이어 선암사에 전해져 오는 작설차 관련 문화와 음다풍을 선암사의
다맥이라 칭함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차인 혹은 차승이라 함은 차를 즐기고 차나무를 재배하며 법제도 하는 등의 생활양식 외에 시와 문의 기록 등을 남긴 분을 말하지만, 차를 마시며 즐기는 일상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분들도 많았을 것이다.
(1342~ 1398)선생은 많은 사대부와 선승과의 교류를 통해 차를 즐기고
수준 높은 차생활을 영위했지만 그 자신 특별히 차 관련 시문 등은 남기지 않았으며,
도은(이숭인) 선생의<차일봉병안화사천일병정삼봉> 시와,
목은(이색) 선생이 시에 언급된 내용으로그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타인의 간찰이나 시문 등에 언급된 내용으로 차인으로 유추할 수 있는
선인도 많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딱히 눈에 보이는 증거 외에 정황으로
차를 알고 즐겼을 것이라고 되는 분 역시 차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유흥준 교수는 가람의 배치가 자연과 탁월하게 조화되었고,
또한 전통의 보전이 가장 잘된 사찰이 선암사라고 하였다.
또한 선암사는 이른 봄, 눈을 뚫고 노랗게 피어나는 복수초, 소식과 더불어
차 아궁이, 돌확을 비롯한 차 관련 유적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고
또 언론에 소개된 적도 많다, 그 중 차 문화지 월간 [차의세계]에서
선암사를 특집으로 취재한 기사 [절 그대로가 차실인 선암사]가 있어 그 내용을 한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자는 바른 생각에 머물러 진실을 아는구나,
차 한 잔 마시며 문득 ‘법구경’의 한 게송이 떠오른다면 그 찻자리는 명선의 세계리라
“오호라 흰 구름 밝은 달을 두 손님으로 모시니, 도인의 찻자리가 이보다 더 좋을 손가,”
동다송에서 노래한 초의선사의 심경이 그대로 전해지는 찻자리가 있다면
선암사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조계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에 화상이 창건하였으나 처음엔
암자 규모였다, 그 뒤 도선국사가 서기 742년에 다시 크게 중창하여 선암사라 불렀다 한다. 고려 선종 9년에 대각국사가 다시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다시 만들었고
그 뒤로는 또 불에 탔다고 하니 참으로 우여곡절도 많았던 고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그 어느 사찰보다 운치 있는 곳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절집 중 하나다.
정교한 수법으로 만들어진 승선교를 건너 수홍문(강선루인 듯)을 지나면
선암사 경내에 이른다. 강선루는 또 어떤가 선암사는 차와 꽃이 돋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봄에도 좋고 가을에도 좋다, 아니 사철 모두 나름의 멋을 지니고 있으며
아늑한 고향처럼 푸근하다. 오래된 차나무를 비롯해 산철쭉, 연산홍, 동백, 매화, 왕벚꽃,
부용화, 수국, 상사화 등 온통 꽃밭이다, 마치 자연스럽게 잘 짜여진 정원을 보는 듯하다.
선암사를 찾을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다선의 향기가 짙은 까닭이 비단 절 주위의 질 좋은 차나무 숲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주변 경관도 운치를 더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P176
“작설차는 순천산이 으뜸이고 다음이 변산이다.”
<누실명>을 노래한 차인 허균의 말처럼 선암사 주변 순천지역 당의 힘은 대단하다.
언젠가 또 다른 차밭을 조성하기 위해 심은 지 고작 두 해밖에 안 되었다는 다원에서
그 지역의 차 명인이 심은 차나무의 뿌리는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그 차나무 뿌리와 긁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무엇보다도 선암사의 차 이야기는 조왕 단지를 모셔놓은 차 부뚜막과
삼탕이라 부르는 찻물을 받는 샘물에서 시작해야 하리라.
본당 뒤 응진당 부엌에 조왕을 모신 제당과 차 부뚜막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옛적엔 보통 밥 짓는 큰 솥을 중심으로 그 솥 뒷벽에 부엌과 음식을 관장하는
조왕신을 모신다, 그리고 큰 아궁이에서 쓰던 숯불을 넣고 그 위에 재를 덮어
불씨를 살려 두곤 언제나 물을 끓일 수 있는 부뚜막을 두는데,
이것이 찻물을 끓이는 차 부뚜막이다, 선암사 차 부뚜막은 차 유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부엌 밖 뜰의 소담한 마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차실이 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골을 쪼아 만든 물받이 돌확 곧 상, 중, 하탕이야말로 차샘의 백미다.
이곳에서는 석간수가 흘러 와 처음으로 물이 모이는 돌확, 즉 상탕의 물을
찻물로 사용하고 있다. 찻물로 쓰지 않더라도 그 물맛은 일품이다.
차실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이다. 봄날의 아침도 좋고, 여름의 한낮도 좋으리라,
문득 차 한 잔 생각나면 선암사에 가자. 그곳에서 그 어떤 꽃이라도 좋으리
그 꽃향기에 취해 꿈결처럼 찻자리를 펴리라.
(P177)
2) 선암사 용곡 스님의 법맥과 다맥
저자은 일찍 선암사의 재적승이었으나 피치 못할 사유로 선암사를 떠났고,
따라서 지금은 의 신분이지만 선암사에서 선친이신 용곡 스님으로부터
구증구포작설차의 제다법을 한 후
국가로부터 작설차 명인의 명예와 지위를 수여 받았고,
그 법제를 행하고 전수하고 있기에
선암사 구증구포작설차가 전승되어 온 내력에 대하여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저자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 선암사의법맥은 고려말기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하여
오늘날까지 단일 법계로 이어져 오고 있지만, 작금의 불교계는 불교사의 긴 흐름 속에서
수많은 문류가 생기고, 또 그 에서 다시 많은 가 생가고 보니
본래의 과 의 법계를 소홀히 여기거나 잊어버릴 수 있다 하겠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 간행된 불교출판사의 [](증보판)에는
종조 이후의 법계와 이 법계를 이은 청허휴정과 부휴선수 이후
분류되는 20여 파의 문파별로 한국의 승려들이 수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계보서로서는 가장 기준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승가에는 의 이 있는데 하는 와 하는 를 말한다.
득도사와 사법사를 겸하는 경우도 많지만 양종사가 다를 경우 사법사를 더 중히 한다.
이는 출가의 목표가 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 계보는 을 위주로 하는 법맥종통만이 존속하니 이를 이라고 한다,
이 사법전등은 을 생명으로 하여 하고
속가의 부자 상속제처럼 스승과 제자 당사자 간에서만 결정되므로
혈맥상승의 법맥종통은 제 3자가 바꿀 수 없다, 이렇게 이어온 법맥종통으로
현재 법계를 이은 한국의 승려는 모두 부용영관의 양대 제자인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법손으로
청허휴정의 법손이 창성하여 약 90여 세파로 나뉘고
부휴법손이 왜소하여 40여 세파로 나뉘지만, [불조원류]에는
청허 이후 19개 문파와 부휴의 1개 문파로 분류하여 법계를 정리 수록하였다.
속가에서 세보, 즉 족보를 보고 문중의 선조들을 찾아보듯이 불가의 승려들은
[불조원류]를 보고 어느 선조사 스님의 법손인지 확인 할 수 있다.
선암사의 3대 문파인 . . 파 중에서
저자의 선친 용곡 스님께서 이어오신 법맥과 다맥은 선암사에 전해 내려오는 승보 및
사적과 [], 스님 저 [한국불교의 법맥]에 의하면
태고보우를 로 중흥조인 6세 , 7세인 를 거쳐 8세 ,
9세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20세 , 21세 , 22세 로 이어진다.
속가에서 종가는 종손들로 이어지지만 불가에서는 가장 출중한 상족제자가 법을 잇고
법을 이은 분들 중 상월새봉과 함명태선, 경붕익운, 경운원기, 금봉기림 그리고
저자의 선친 용곡정호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암사 재적승이고
대승암에서 주석하며 참선과 교학에 정진하시 분들이다.
“ 이요 이라 .” 이렇게
청허휴정으로부터 선친 용곡 스님까지 법을 이어온 분들의
법호 첫 글자를 따서 이은 문장을 저자는 칠언절구의 게송처럼 외우며 지내왔으며,
청허 이후 19개 문파 중 가장 한 월저파로 저자의 선친께서는 되었다. (P179)
고려말의 고승 (1301~ 1382)선사가 장년이 나이에 중국으로 구법이 길에 올라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서 (1272~1352)을 만나 인가의 법을 받으므로
우리나라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때 법과 더불어 및
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와 도 같이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 조선시대 혹독한 척불의 시기를 겪는 동안
선종의 계통과 불가의 차문화는 흥하고 쇠퇴하기를 반복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저자의 선친 용곡 스님께서는 태고종조의법통을 이은 청허휴정의 법손이시고,
현재 저자가 선친으로부터 전승하여 행하고 있는 구증구포작설차 법제문화는
선친의 16세 선조사 이신 청허휴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늘 말씀하셨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에서 의 , 의 잎()차, 백차에 의한 차,
차 및 대차와 같은 차등 수입된 차와 차, 차 등의 토산차 외에
정제되지 못한 차와 를 만들어 마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찻잎을 솥에 볶아 뜨거운 물에 침출하여 마시기 시작한 것은
태고보우 때부터 라고 전한다, 태고보우 스님은
고려말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한국불교 임제종(현 태고종) 종조로 추앙받는 스님이다,
태고 스님은 구법차 석옥청공선사를 찾아 하무산 천호암에 머물면서
법과 더불어 차와 선에 몰입하게 되어 차와 선이 둘이 아닌 차삼매가 곧 선사매요
차와 선이 하나로 인식되는 깨달음으로써 이후 임제종맥을 이어가는 법제자들이
하나의 차맥을 형성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1348년 귀국하여 소설산 소설암(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직접 농작물을 경작하며 생활하였고 1382년 입적하였다. 스님께서 주석하던 소설암은
지금 터만 남아 있으나 많은 시문과 차시를 남겼고, 스님이 차를 우려 마시던 우물은
아직 남아 마을 사람들에게 보허(태고부우 속명)샘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걱ㄴ국의이념인 숭유배불의 정책을 태종대(때)부터 본격적으로 감행되었고,
이후 은 더욱 심하여 교단은 종명을 빼앗기고 승니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어
깊은 산속이 아니면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른바 불교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종조의 법맥을 이은 태고 제1세 (1320~1392)는 1383년 국사가 되었으나
“항상 왕명을 피해 종적을 감추며 산에서 나오는 것을 원치 않고
이름을 숨기는 데 급급하였다”라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수난시대임을 알 수 있다. 환암혼수의 법을 이은 태고 2세 역시
이름을 숨기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므로 호를 이라 하였고,
태고의 3세가 되는 은 구곡각운에게 법을 이었으나 불법에 대한 탄압으로
머리를 기르고 처자를 거느리며 황악산에 들어가 그 이름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가
임종에 임해서야 벽송지엄에게 법을 전하였다.
4세 (1464~ 1534)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속성이 송씨이며
벽계정심의 법을 이어 태고의 4세 법손이 되었다.
청허휴정이 지은 대사의 행장에는 시자에게 차를 청하여 마신 뒤에 문을 닫고
단정히 앉으신 뒤 한참 후 문을 열어 보니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태고 법손 제5세인 (1485~1571)은 삼천포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하였고,
벽송지엄을 찾아 20년 동안 가졌던 의심을 풀고 법을 이었으며 한 잔의 차를 마신 후
“부질없는 세월 소림을 생각하여 머뭇거리다 지금에 머리까지 쇠했네” 라고
한수를 크게 써 붙였다고 전할 뿐이다, 따라서 태고보우로부터 시작된
다선일여의 다맥은 5세 손인 부용영관까지 200여 년 동안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작설차 법제에 대한 자료나 구전도 없으며, 이후
청허유정에 와서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흥조 청허휴정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의 승병장이 되어 나를 구하였으며,
한편 의 참담한 시대에 출가자의 본분을 지켜 본연의 법풍을 확립하여
함으로써 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불교의 중흥조로 자리매김하였다.
청허휴정이 어릴 적 이름은 운학이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이때 로 와있던
이 슬픔에 잠긴 고아의 소문을 듣고 운학을 자기 처소로 불러 한 수
지어 보겠느냐 묻는다. 제가 어찌 감히 하고 겸양해하는 소년에게
멀리 눈 덮인 소나무 숲을 가리키면서 비낄 자 운을 떼자 즉석에서
“: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비끼니)” 라고 응대하였고,
이어 꽃 자를 부르자 소년은 또
”:(온누리를 덮은 눈이 꽃처럼 곱구나)“라고 읊었다.
안주목사는 운학의 비상한 재주에 탄복하며
“너는 내 아들이로다” 하며 양아들로 삼았다.
얼마 뒤 으로 들게 되자 서울로 데리고 가 성균관에 시켰으니,
이때 나이 12세였다, 15세 되던 해 에 응사했으나 낙방하여
큰 자극을 받게 되고 몇몇 들과 함께
호남지방에 내려가 있던 스승 을 찾아갔다.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간 스승은 을 당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갔으므로
의 산천이라도 유람할 생각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6개월 동안
화엄동, 연곡동, 칠불동, 의신도, 청학동 등 크고 작은 절들을 찾아다니다
한 암자에서 승인 노승으로부터 “과거급제에는 낙방했지만 하면
영원히 세상의 명리를 끊고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감수성이 예민한 운학은 불교의 심원한 세계에 마음이 끌려 공부를 시작했고,
운학의 범상치 않음을 간파한 승인 노승은 지리산에서 크게 선풍을 떨치고 있는
부용영관에게 운학을 소개하였으며
영관은 한번 보고 큰 그릇이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들인다.
행자 생활 6년 만에 삭발수계 하여 휴정이라는 법명을 받고 부용영관의 법을 잇게 되었다.
이후 지리산 과 등의 암자에서 다섯 해를 정진하였다.
선암사에 전해지는 구전과 용곡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청허휴정은
지리산 대승암에서 수행하던 때 가마솥에 찻잎을 덖어 우려 마시는 법을 알게 되었으며.
이후 을 하고자 운수행각으로 전국 곳곳의 수많은 산천과 명산대찰을 순유하다가
38세 되던 해 지리산으로 돌아와 내은적암과 칠불암 등에서 지내는 6년 동안
구증구포작설차 법제를 완성하여 이윽고
가마솥에 덖어 만든 잎차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 대사는 이시기에 가장 많은 을 지어 남김으로써
한국불가와 차인의 세계에서가장 추앙받는 인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청허휴정이 총 20여 년 동안 지리산에서 머물며 완성한
구증구포작설차와 법제는 중국의 그 어떤 차를 모방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덖음 차로서 이후 스님은
가마솥 덖음차 문화의 중흥조가 되었으며, 이로써 지리산은 조선조 500년간
최고봉의 승려이자 우리 차의 새로운 장을 연 차의 성현을 배출시킨 명산이 되었다.
지리산에서 수행과 더불어 차 생활을 하는 동안
구증구포작설차를 완성한 휴정 스님은
빼어난 치인이기 이전에 격조 높은 시인, 또한
수행승으로서 지극한 이기에
차가 선의 경지에 이르러 가히 선차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스님의 발길이 미쳤던 선암사 등에서 차를 오랫동안
선차라고 불러왔음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할 것이다.
선은 스님들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며
이를 위해 가장 보편적이며 소중한 동반자로 차가 선택되었다.
선은 차분하므로 깊고 그윽하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으므로
구애됨이 없고 거리낌도 없다. 흔들리지 않으므로 가식도 없고 꾸밈도 없다.
자연스러움으로 탈속하고 깨끗하다, 간결함으로 불필요한 것이 일체 배제되어
절제의 극치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다
, 이 로 와 닿는 스님의 선시, 차시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스님의 시에서는 차와 선이 다르지 않는
다선일여, 다선일체의 깊고 그윽한[ ?? ]한 경지가 느껴진다.
청허의노래
그대 거문고 안고 장송에 기댔거니
장송은 변하지 않는 마음이로세
나 또한 푸른 물가에 앉아 노래하노니
푸은 물은 맑고 빈 마음l로다
마음 마음이여 나 더불어 그대로다
행주선자에게 보임 3
흰 구름 벗 삼으니
밝은 달이 생애로세
깊고 깊은 산 속에서도
사람 만나면 차부터 권한다네
천옥선자
낮이면 차 한 잔의 차
밤 되면 한바탕 잠이거니
청산 백우니
무생을 이야기하네
낮이면 차 마시고 밤이면 잠잔다고 함은 차를 단순히 즐겨서 마신 것이 아니라
음다를 좌선에 수행되는 승려의 공부로 여겼음을 나타내고,
차와 선은 마음의 상태, 느끼는 경지,
명상하고 깨우치고자 하는 목적이 같다는 뜻일 것이다,
선사에게 , , 자연과 , 그리고
도 다 선에서 비롯되었음이고,
또 청허휴정에게는 차와 선, 승과 속, 있고 없음의 유무까지도
둘로 보지 않는 사상이 있었다.
이 사상은 훗날까지 계속 이어져 용곡 스님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평소 스님은 언행으로도 보이셨지만 모든 것은 인연이 있고 연결고리가 있어
이것, 저것으로 쉽게 분별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거울이 물체를 바로 비추듯,
대승의 깊고 묘한 교리를 듣고 단번에 깨닫는 것을 라 하며,
과일이 익어가는 과정이 있듯이 단계적으로 차례를 밟아서
점진적으로 해탈에 이르는 가르침을 라 하는데
청허휴정은 점교를 깨달음의 지침으로 후학들을 교화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깨달음의 과정을 방해하는 요소는
.. (탐욕/성내다/어리석음)과 집착을 말하는데
이 요소를 소멸시키는데 차가 크게 기여함으로 평생 반복 되는 차 생활은
마음을 다스려 생각의 폭과 깊이를 늘려 점진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깨달음의 세계는 그 내용이 인간의 풍부한 언어로도 적절한 표현이 지극히 어렵고,
더구나 깊은 사유를 거치지 않는 저자와 같은 범부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하겠다.
이는 깨달음이 언어와 일치되지 않고,
우리의 경험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인이 얻은 도의 원형이 그 자신이 머릿속에만 있어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수도자를 단순히 일깨우고 각성하게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유일한 선의 동반자로 각성의 효능이 있는 차는 선과 함께 이 땅에 들어와
그 맥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청허휴정 스님이 아무 걸림 없는 , , 으로 생활하며,
때로는 시로써 후학을 교화하신 것을 깨닫고 청허유정의 차 시문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으며, 때때로 스님의 발차취를 찾아 그다지 멀지 않은
화개동천 등지의 행적지를 다녀오곤 한다.
서산대사는 조선조의 사회적. 정치적 악조건을 극복하고 선사상을 다시 정립하여
대승적 로 문도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고 많은 고승들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는 임진왜란 중 의병으로 활약한 승려들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대사의 사상은 임제종과 간화선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특히
간화선은 일상생활에 대한 적극성과 실천이 강조되었고, 차생활과 차시문을 통한
대사의 은 이후 문도의 수양과 행동지표에 긍정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어둡고 험란한 시대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이 땅에 불교를 살린 대사는
진정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며 선승, 차승이었다,
청허휴정은 세조가 편찬한 에서 조를 삭제함으로써
불교교단의 존립근거가 사라진 척불의 시기에 출생하여 잠시 선교양종이 부활 되는 때
1555년 승직의 최고 지위인 에 임명 되었고,
1784년 청허휴정의 분신이라 하는 상월새봉도 같은 직에 임명되었다.
청허휴정은 1594년(선조27) 나이 들어 사직을 청원하자 선조는
국일도대선사선교양종도총섭부종수교보제 등계존자 라는 호를 내렸고,
묘향산 원적암에서 1604년 1월 23일 열반에 들었다.
또한 청허휴정은 의 개조이시기는 하지만
부처의 마음인 선과 부처의 말씀인 교를 둘로 보지 않았고 을 중시하여
유교. 불교. 도교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하여 삼교통합론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청허휴정이 지리산 대승암에서 경전의 심오한 의미를 탐구하며 대승의 법을 세웠던 것처럼
청허의 법손인 여훈 스님은 조계산 선암사에 대승암을 창건하여 청허의 법손들이
대승을 실현하는 도량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대승적 사상의 영향으로 선암사는
선교양종 대본산으로 자리하여 선원에서는 선학에, 강원에서는 교학을 정진하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내우외환으로 무너져가고 있을 때 숭유억불정책으로 핍박받던 불교계도
내외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였고
선암사는 어느 사찰보다 뛰어난 강학활동으로 교학이 융성하였다.
한편 임란 순국공신으로 저자의 선조 되는 신여량(1564~ 1604)공은
아호가 으로 1564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출생하셨다.
그 450여 년 후인 1911년 저자의 선친이신 용곡 스님께서는 같은 집인
에서 봉헌공과 12세 종손으로 출생하셨다.
청허휴정과 봉헌여량 두 분은 임란을 맞이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워 국난의 극복에 헌신하였고, 출생 시기는 다르지만
1604년 같은 해에 임종을 맞는다.
봉헌여량 공은 1583년 무과에 급제, 익년 정9품인 선전관이 된 이래
초대 거북선 선장으로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는 등 큰 공을 세워 를 받았으며
1604년 전라병사로 되었으나, 같은해 7월 7일 왜잔 적과의 전투에서 순국하였고
이후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청허의 법을 이은 서산의 (맏이), 기(1581~ 1644)의 속성은 장 씨이고
경기도 안성군 죽주 출신이다,
11세에 출가하여 19세에 깨달음을 얻었으며 대승을 깊이 탐구하였고,
또한 선과에 통달하여 도를 이룬 뒤 당을 열어 개강하니
문화생이 신발이 뜰에 가득하였다 한다.
양치는 스님으로 유명한 스님은 십 수 년간
평양성 안 모란봉 기슭에 움막을 짓고 살며
임진왜란으로 집과 부모를 잃어버린 수많은 아이들을 거둬 보살피기도 했다.
스님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성안을 돌아다니며 숯과 물을 팔고
또 탁발을 해가며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었고,
법문과 기도로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중생교화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1644년 5월 스승의 뒤를 따르듯 묘향산 내원암에서 입적했다,
스님의 저서로 [편양당집] 3권이 전하며
그 1권에는 90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유가의 선비와 속인에게 전하는 시이므로
승속을 떠나 마음을 주고받는 시로 승화시켰음을 알 수 있으며,
아래의 차시에서는 스님이 차밭을 손수 조성하고
차생활을 하였음과 차승. 선승으로서의 훌륭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산살이
통성암에 머무른 뒤
그윽한 일 날마다 이어진다
밭을 일구어 향기로운 차 심고
정자 지어 먼 산 바라보네
밝은 차에서는 패엽경 읽고
밤에는 걸상에서 깨달음 궁구하네
변화한 세상 사람들이야
어찌 세상 밖 한가로움을 알리
법륜총섭이 운을 따라
해가 바뀌어 흰 털이 늘어도 깨닫지 못하고
변방에서 스님 만나 굳이 반겨 웃어 보네
정성으로 작설차거듭 거듭 권하고
봄바람은 예와 같아 새벽 창이 차구나
편양언기의 법을 이은 풍담의심(1592~ 1665)스님은 속성이 문화 씨이며
경기도 사람으로 16세에 스님에게 출가하여
스님에게 계를 받고 공부했으며, 뒤에
묘향산으로 편양을 찾아가 불법이 오묘한 가르침을 전수받고
깊은 뜻을 철저히 깨달아 법을 이어 받게 된다,
청허 – 편양 – 풍담 – 3대는 승속을 구분하지 않고 크고 넓게 교류하였으며,
불법은 물론 학덕도 높아 당시 선비들이 흠모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배불척승의 시대에 선조대의 4대 문장가이며
좌이정을 역임하고 탁월한 외교관으로 유생을 대표하는
월사 이정구가 청허당의 비명을 짓고,
월사의 아들 백주 이명한이 편양당의 비문을 짓고,
백주의 4남 정관재 이단상이 풍담이 비명을 찬함으로써,
불가의 서산 3대 비명을 유가의 이씨 3대가 지었음은
그 인연과 정의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직 할 수 있다.
1665년 봄 금강산 정양사에서 풍담은 미질을 보이더니
제자들을 불러 모아 임종 게를 읊고 태연히 입적한다.
기이하여라 이 영묘한 물체는
죽음에 이르러 더욱 쾌활하나니
나고 죽음에 달라지지 않도다
가을하늘 달이 밝고녀
풍담이 법을 이은 (1638~ 1709)스님은 속성이 유 씨이고 관향이 평양이며
12세에 출가하여 20년 동안 스승 풍담대사에게 수학하고 의발을 전해 받는다,
청허로부터 63세 법손이 되는 월저는 스승으로부터 청허의 중요 가르침을 모두 전해 받고
승속을 초월하여 많은 시문을 사대부들과 주고받으며, 한편으로
묘향산에서 화엄경을 강론하니
청중은 항상 수백 명이 넘어 법회의 성대함이 근세에 없었다고 한다.
월저 스님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왕이 팔도선교도총섭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저술로 [월저당대사집] 2권 []를 남겼고
1709년 묘향산 진불암에서 입적한다.
[월저당대사집 상권]에 수록된 수많은 시에서는 일상의 쉽고 평범한 언어를 구사하여
상대 혹은 읽는 이에게 격의 없는 소탈함의 느낌을 받게 하며,
또한 스님이 차시에서 격조 높은 선과 차생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조용히 살며 동파의 뇌주 운에 따라 읊다 5
홀로 한 영대에 앉았으되
삼신산의 선약 굳이 구하지 않네
밝고 또 밝음은 본시 굴레를 벗어남이니
하물며 적적하기만 한 절집에서야
문득 떠오르는 근체시 읊고
홀로마시는 차 한 잔에 마음 씻노라
섣달이 다 가고 한 해가 저물어도
봄이 오면 꽃들은 터질 듯 피어나리
우차팔운 3
그대 아시는가
동해의 봉래산
일만 이천 봉우리
눈과 달빛 옥 같은 계곡에 쏟아지고
솔바람은 진나라의 아름다운 거문고
배고프면 나물 뜯어먹고
목마르면 산 차 마시네
하는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았어도
봄이 오면 숲에 꽃이 가득하리
월저의 법을 이은 설암추붕(1651~ 1706)스님은 속성이 김씨이고
관향은 원주이며 10세 원주 법흥사에서 삭발한 뒤 월저대사에게 참학하여
10년 만에 선과 교를 모두 졸업하였다. 스님이 시문집[설암잡저]에는
시문 806편이 있고 시는 13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탈속 적이며 승속을 초월한
고매한 사상의 내용으로 당시 승속 간에 추앙되는 바가 많았다 전한다,
스님은 불행하게도 1706년 8월 5일 묘향산에서 스승보다 먼저 입적하여
스승이 그 비명을 애통한 마음으로 손수 쓰게 되었는데,
이를 보면 스승이 제자를 얼마나
아꼈으며 사제관계의 우의가 얼마나 돈독하였는지를 짐작 할 수 있다.
스님의 시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서정적으로 표현하면서
탁월한 시적 연어를 절묘하게 구사하여 선승. 차승으로서
전문시인 못지않은 격조 높은 를 남기기도 하였다.
유거
사는 곳 그윽함에 일 없고 오가는 이 드물어
마음가는대로 행하며 신령한 품성 기른다
과일 따러 숲 헤치니 가을 이슬 방울방울
계수로 불 피워 차 달이니 저녁연기 모락모락
들물 끌어온 못에 오리들 북적이고
산구름 뜰에 깔리니 사슴도 찾아들어
가만가만 느껴보는 자연의 이치
풍성한 만물 저절로 나고 저절로 크누나
산방에서 문득 읊다
정하고 삼가는 날 빈 방은 밝은데
한가로이 떨어지는 꽃잎 뜰을 반쯤 덮었구나
늙은 스님 차 구실 게으름 피우더니
바람 불어 예주경 덮어버렸네 (p 191)
청허. 편양. 풍담. 월저. 설암에 이어 청허의 5세 법손으로 적사인
상월새봉(1687~ 1767)스님은11세에 선암사에서 출가하였고,
1704년 설암추붕에게서 불법을 닦고 법을 이어받는다.
청허스님의 분신이라 불리는 상월 스님께서는 청허당이 왕래했던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의 사암들을 답사하는 등 대사의 행적을 좇아 그의 법과 불성을 구했으며 ,
이윽고는 대사의 대승사상으로 후학들을 교도하였다.
스님이 입적한 후에는 제자들이 청허당이 임종을 맞았던
묘향산으로 유골을 가지고가 초제를 지내려 할 때
구멍 뚫린 구슬 세 개가 나와
하나는 그곳 묘향산 오도산에 다른
하나는 해남 대흥사 (청허휴정은 임종시 제자들에게 자신의 유품을
두륜산 대둔사에 보내 보관하라는 당부를 하였음)에,
또 하나는 조계산 선암사에 각각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1782년 선암사 비전에 건립된 스님의 비 방향이 남향인 다른 비와 달리
전면은 대승암을 향하고 뒷면은 상징적으로 묘향산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청허휴정이 법통이 자신이 을 폈던 대승암에서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하였다 한다.
실제로 이후 대승암은 함명, 경붕, 경운과 선친의 스승이신 금봉 스님의 대를 이은 출현으로 조선후기 한국불교 최초의 1문4대 을 배출시킨 유명한 암자로 이름을 남기게 됨으로써 선암사가 한국불교에 교학의 됨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상월새봉의 영향이 컸음이다.
선암사에는 칠전선원 뒤 차밭과 일주문 앞 차밭에 있는데
칠전선원 차밭은 중창건주 도선이,
일주문 앞 차밭은 상월 스님이 지리산에서 차나무를 옮겨 심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선암사 차밭의 현황을 살펴보면
천불전과 장경각, 칠전선원 뒤편에 도선국사가 차씨를 심었다고 전해져
해방 이전까지 군생하고 있는 면적이 1만여 평이었고,
일주문 앞에는 17세기 초 상월새봉 스님이 지리산에서 차나무를 100여 주쯤
옮겨 심은 것이 인근 죽학마을 까지 점차 확산되어 그 면적이 무려
10핵터아르(3만평)에 이른다고 [승주군사]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심근성인 재래종 차나무를 이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고
이식 후 생존율도 낮으며 잘 성장하지도 못하므로 파종하여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월새봉 스님은
차에 과한 식견이 높고, 평생 차와 더불어 생활하셔서 차 도인으로 불렀다 하고,
차 관련 내용의 [다오기]를 저술하셨는데 1970년대 분규의 심화로
사찰의 재산관리가 허술했을 때 다른 고서들과 함께 도난당한 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현재까지 찾지 못하였다.
스님의 사후, 스님이 지은 수많은 시문이 되었으며,
현존하는 상월 스님의 시문집에 수록된 차시 2수는
청허휴정이 주석하며 차를 법제하기도 하였다는 칠불암에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경월 근원대사를 기리다
선학에서 밝은 달빛 헤치며 석장 휘두르고
용산에서 납이 떨치니 보랏빛 노을 밀려드네
방장산에서 몇 번씩 향적반 나누었고
도림에서 조주 차 서로 권 하였지요
연화정토 향한 참되 염원 굳건해지고
패엽경 존귀한 가르침으로 화엄경 즐기셨지요
법계 인연 절로 있어 왔으니
맑고 환한 대낮에도 흥겨움 끝이 없다오
청암 혜연대사께 드리다
갑술년 봄 화엄경 즐겨 읽고 있었는데
청암 스님께서는 법회 돕느라 바쁘셨다지요
편지에 답신 없어 걱정스럽더니
다행히 참모습 뵙고 가없이 즐거웠지요
쌍계에 물 넘쳤어도 선차 있어 족하였고
칠불사에서 부는 바람 나그네 흥 더했답니다
멀리 낙동강 위로 가야 하거늘
헤어질 때 마음 어떠냐고 묻지 마소서
상월스님은 밀양 손씨로 선암사에서 지척인 승주 월계리 출신이다.
사적으로는 저자의 어머님 선조가 되시며, 저자는 스님의 후손으로
월계리에서 살다 돌아가셨던 외조부께 명절과 생신 때면 선친을 따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고 1970년엔 상월 스님 비문을 탁본하여 외숙께 전해드리기도 하였다.
또한 별칭 차도인이라 하였던 상월 스님의 고향이자 밀양 손씨의 집성촌인
월계리의 부녀들을 차 생산 작업에 동참하도록 하여 인연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이 지역에는 조상의 묏자리를 잘 잡아서 상월 스님과 같은 훌륭한 스님이 나왔다는
이야기와 순천 부사를 도술로 혼내주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구전되어 전해지며
[선암사지]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선암사지]에는 상월새봉이 둥근 얼굴에 큰 귀였으며,
그 목소리가 홍종과 같았고 앉음새는 이소와 같아 흔들림이 없었다. 하고
자정이면 반드시 일어나 북두에 절을 하였으며, 명료한 강론, 군더더기 없는 풀이,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실천지혜로의 입증을 가르침 삼았다 한다.
그리고 선친을 모시고 그 묏자리 터를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선친께서
그 묘 터는 마치 학이 비상을 위해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막 날개를 펴는 모습인데
학 머리에 묘를 써서 학이 날아오르지 못한 형국이라는 설명을 해주신 기억이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청허휴정이 머물렀던 대승암을 비롯한 지리산 곳곳을 답사하며
시문을 지었고, 구례 화엄사에서 강석을 펴고 수년 동안 수많은 학인, 납자들을 지도하던 중
1722년 조을 만나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용담은 수년간 스승을 모시며
선과 교를 겸해 수업하였고, 1749년에는 상월의 법통을 잇고 의발을 전해 받았다.
청허의 6세 법손인 용담조관 스님의 속성은 김 씨이고 관향은 남원이며
출생일이 4월8일 석가탄신일로가 같았음이 우연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p195>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나 9세에 배움의 길에 들어서 한번 본 것은
무엇이나 기억해 내지 못 하는게 없어, 15세 전에 유가의 경전을 모두 섭렵하여
시문이 모임에서 항상 제일의 자리를 차지하니 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1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스픈 마음으로 3년상을 지내고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19세에 출가한다. 이 소문을 들은 향리의 유생들은
“빈 숲에 범이 들어갔으니 점차 큰 울림이 있겠다”며 장차 큰 인재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
용담 스님은 지리산 견성암에서 좌선하며 을 읽고 크게 깨달은 뒤,
1721년 지리산에 을 짓고 심원사, 도림사 등에서 20년 동안 강석을 열었으며
1762년 6월27일 부안 실상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대사의 저서인
[]에는 199편이 시와 3편이 문과 2편의 편지가 있다, 그 중
산중생활에서 하며 차를 즐겼던 차승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차시도 읊었다.
느낌을 읊다
산중 자미를 세속의 누가 알랴
홀로 숲에서 나물 캐 물가에서 씻네
돌아와 돌솥에 차 달여 달게 마시고
덩굴 창 보고 높이 누우니 이 무슨 시절인가
선암사 비전의 상월스님 비문에는 자신의 법을 이은 용담과
용담의 법을 이어 청허의 7세 법손이 되는 규암낭성,
규암의 법을 이어 청허의 8세가 되는 서월거감 까지 문인의 법호가 새겨져 있다. 이후
서월의 법을 이은 회운진환은 원담내원에게 법을 전하였다.
회운의 법을 이어 청허의 10세 법손이 되는 원담내원은 오랫동안 무등산 원효암에 주석하였다. 그림의 대가로 알려진 스님은 화가로서
당 오도자 미불을 연상케 한다 하여 배우려는 사람이 삼대처럼 줄을 이었다 한다.
이들 중 , 단청, 도금 등으로 떨치는 사람도 있고 병풍을 솜씨 있게 치는 사람 등
그 문하에는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듯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동사열전]에는 의 철학적 체계를 세워 송나라 때 이름을 날린
정호, 정이, 주희와 같은 들을 연상케 한다 하였으며,
문장에서는 반고와 사마천, 병법에서는 손무와 오기가 연상된다 하였으니,
그 명성을 짐작케 한다고 하였다. 제자들 중 법을 이은 상족제자가 풍곡덕인이다.
풍곡덕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으나
제자 함명태선(1824~1902)이 화순 적천리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화순 나한산에 있는 만연사에서 풍곡덕인 스님에게 출가하였고
25세 때 서석암에서 풍곡의 법통을 이어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풍곡의 법을 이어 청허의 12세 법손이 되는 함명태선(1824~ 1902)은
속성이 밀양 박씨이고 화순의 적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동복 오씨인데
인도스님을 만나는 꿈을 꾸고 나서 옥동자를 분만하였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비린 음식을 싫어하고 성장해 가면서 스님이 되기를 소원하더니 마침내 14세 되던 해에 화순 만연사 풍곡덕인 스님을 만나 의탁하게 된다.
이 인연으로 장성 백양사에서 삭발수계하고 풍곡 문하의 스님이 되었고, 이후
선암사에서 개당하고 있는 침명한성(1801~ 1876)에게 했는데 침명은
함명을 한 번 고고 임을 알았다고 한다.
선암사에서 5~ 6년간 을 두루 섭렵하였고 불교 내외의 학문과 사물의 이치에 대하여
두루 잘 알았고 깊이 통달하였다. 침명은 더욱 감탄하여 를 주었고
1849년 함명이 26세 되던 해 봄 서석산(무등산)에서 건당하고 풍곡의 법을 잇게 되었다.
선암사의 요청에 의해 운수암에서 개당하니 제방에서 학인들이 몰려와 배웠는데,
스님의 강의규칙은 엄격 명백하였으며 역시 엄숙 조용하였다. 또한
법을 부탁한 지 30여 년이 지나 늙어서도 경전과 계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더욱 정근하여 쇠하지 않자 스님을 뵙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다.
스님의 명성에 각처의 많은 스님이 찾아와 한마음으로 공부한 것을 보고
이는 선조사 설암추붕과 상월새봉의 영향인 것 같다고 평하였다.
고종 3년 (1866) 가을 경붕익운에게 하고 법인을 전수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제 다리를 펴고 잠잘 수있겠다” 하여 이 전법은
고려말 중국의 석옥청공이 고려의 태고보우에게 을 전하면서
“도승은 오늘에야 두 다리를 쭉 뻗고 편히 담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던
옛 일을 생각하게 한다고 하였다,
함명태선 스님은 대한제국 광무 6년(1902)에 입적하니 세수 79세 법랍 65세였다.
갑인년(1914)봄에 여규형이 찬하고 중국 사람인 제갈 경이 쓴
[화엄종주 함명당 대선사비] 가 선암사 비전 상월새봉비 곁에 건립되었다.
선암사 성보박물과넹 보존되어 있는 함명태선의 백학계 는
학계의 계원들의 명단을 적은 이다.
첫 장에 전강 스승인 침명한 성이 쓴 [함명강백객학계서]가 있고, 그 뒤에는 계원들 명단
[학계좌목]으로 이어지는데, 학계에 가입한 승려들을 연도별 법명과 소속사찰 그리고
법호를 적었다. 서문의 내용은 공자와 수제자 안연(B.C.521~490)의 사제관계를 말하여
함명이 침명의 강설을 듣고 상재한 일에 비유해서 기술하고,
모습과 소리가 진실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이 학계열록은 선암사가 교학의 연원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함명태선의 법을 이어 청허의 13세 법손이 되는
경붕익운(1836~ 1915)은 속성이 김씨이며 순천군(지금의 순천시) 주암면 접치리에서
출생하였다. 인 가 선암사에 출가를 했는데 이를 따라가서 책을 읽다가
방외의 뜻이 있게 되었고, 화산당이 하자 입산하였는데 이때 나이15세였다.
다음 해 은사를 함명 스님으로 정하고 호운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고,
19세 되던 해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면서 능엄, 기신, 반야, 원각경을 웅월화상에게,
화엄.염소을 설두화상에게 배워 익혔다. 25세에 선암사에 돌아왔으며 1868년 가을에
무등산 원효암에서 건당하였고, 이후 1870년 35세 되던 해 함명태선의 교편을 받아
대승암에서 10여 년간 설법하고, 3년여에 걸쳐 대승암을 중건한다.
대승암은 초창건주
여훈 이후 환성, 상월, 봉응, 와월, 침명, 함명, 경붕, 경운, 금봉 스님까지
근 2백 년 동안 강론이 끊어지지 않아 한말로부터 일제로 이어지는 시기에
이곳 대승암(남암)에서 1문 4대 강백을 배출하여 선암사가 교학의 근본임을 보여주었다.
경붕익운의 출생지인 주암면 접치리는
저자가 30여 년간 찻잎을 생산해온 죽로차밭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다,
1980년 이 마을 노인들은 300여 년 전부터 차나무가 있었고 해방 까지
이곳의 찻잎을 선암사에서 사갔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선암사에서 자체 생산량으로 소비량을 충당하기 어려웠다는 말이므로
경붕당에게 배우려고 모여든 사람이 산처럼 줄을 섰고,
교류하고자 찾아온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경붕익운 스님의 법을 이어
청허의 14세 법손인 경운원기(1852~ 1936)스님은
속명이 김원기이며 17세에 출가하였고 30세에 선암사 대승암에서
경붕익운의 강석을 물려받았다. 일찍이 29세 때 명성황후 민비의 뜻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금자법화경을 하였으며, 한국불교교계의 거목으로
고종으로부터 의 교지를 받았고,
스님의 열반 시 사용하라며 내린 을 하사받았다.
스님께서는 시.서.화에 능하여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으며 남기신 유물은
선암사 성보박물관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특히 스님의 에 대하여 범해선사는 [동사열전]에서
“스님이 글씨를 특별히 잘 쓴 것은 전생에서의 숙련 덕택이지
금생에서의 노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루 수 없는 경지다. 이는
하늘이 도와서 되는 것이지 가르치고 인도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 . .
문장과 글씨가 아울러 능한 자가 드문 법인데 스님은 문장과 글씨에 아울러 능하였으니
법명 원기는 자연스럽게 예언적 이름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스님께서 경한 [화엄경] 서문을 당대의 석학 아홉 분이 쓰셨는데
첫째, /여규형, 둘째 /황현, 셋째 /김효찬, 넷째 /윤익조, 다섯째 , 여섯째 /정만조, 일곱째 염/송태회, 여덟째 /김윤식, 아홉째 /혜근 이다.
한편 경운 스님께서 의 믿음으로 사경한 [화음경] 전질을
광주의 (1904~ 1989)선생은
선암사를 방문할 때면 꼭 용곡 스님에게 청하여
세 번의 큰 절로 스님을 뵙는 듯 지극한 예를 갖춘 후 펼쳐보곤 하였다.
그리고 불심이 두텁고 원력이 높은 스님은 승속을 불문하고 추앙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추우나 더우나 사철 두터운 누비옷을 걸치고 삼복더위 때도 뜨거운 차를 마셨다.
가끔 한여름에 스님을 찾아온 불자들이나 유가의 선비들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두터운 누비옷을 입으신 채 미동도 않고 지극히 단정한 모습으로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을 보고 경외감과 함께 온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평생 차와 더불어 수행생활을 한 스님은 역시 자신의 산거생활의 동반자로
차와 함께 재냈던 석옥청공선사의 차시 <>를 차운하여 칠언절구를 지었다.
석옥청공선사의 선거시를 차운하여 지은 시를 자가취지로 삼는다
종이 주머니에 조금 남은 지닌해 묵은 차를
또다시 강남의 귤 유자꽃과 함께 달이니
피어오르는 한 줄기 향 부득 감추고 싶건만
솔바람 불어 석옥선사 계신 곳으로 보내누나. (원본사진 p201)
여기에서의 (원문)란
석옥선사가 호주 하무산 차밭 주위에 천호암을 짓고 산전을 개간 경작하며
의 수행생활을 하던 중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병을 칭하고 응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이곳을 이렇게 불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석옥청공의 법을 이어 한국불교 임제종 종조가 된 태고보우는 이 땅에
임제종(선종)의 차풍을 전파하였고 태고- 청허 –상월을 거쳐
석옥의 21세 법손이 되는 경운 스님의 이 시에는
선사를 추앙하는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한편 경운 스님에게는
한국불교계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출중했던 4대 제자가 있었는데,
석전 박한영(1870~ 1948)스님, 혜찬 진진응(1873~ 1941)스님,
금봉 장기림(1869~ 19169)스님과 원제봉 스님이 그들이다.
근대 한국불교의 거봉인 박 스님의 본명은 호는 이며,
후일 를 라 하였다, 한영은 이다,
이 아호는 추사 김정희가 일찍이 정해둔 것이었다. 추사는 백파 스님에게
석전, 안암, 설두, 다륜, 환응이라는 글씨를 적어주면서 훗날
도리를 깨친 자가 있으면 이로써 호를 삼으라는 부탁을 했고
이것이 에게 전해졌다가
마침내 박한영 스님에게 전해지면서 이름의 주인이 정해진 것이다.
1886년 17세에 출가해 승려로서 배워야 할 바를 익히기 시작한 스님은
1890년 장성 백양사 운문암 김환응 스님 문하에서 를, 그리고
1892년 당대 최고 강백으로 손꼽히던 선암사 경운스님에게 경학과 대교를 배우고
건봉사와 명주사에서 여러 경전을 연찬했다. 평생 4만 권에 이르는 도서를 섭렵한
석전 스님의 장서는 우리나라 고서. 중국 및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 등을
아우르고 있어 독서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학문은 물론 교와 선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내 외전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그 어느 학자보다 앓의 깊이가 깊었고 표현해 내는 방식도 뛰어났다.
석전 스님은 경운 스님의 뒤를 이어 한국의 화음종주로 일컬어졌으며 근대
불교교육의선구자로 추앙받는 인물로서 1913년에는 []를 창간하여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29년부터 1946년 까지 조선불교 교정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지도하였고,
1931년에는 현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8,15해방 이후 조선 불교중앙총무위원회 제 1대 교정으로 선출 되어
불교계를 이끌었으며 금봉. 진응 스님과 함께 근대 불교사의 3대 강백으로 추앙받았다.
많은 문하생 중에는 미당 서정주도 포함되어 있다, 1948년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석전 스님이 선암사에 입산하여 처음 공부할 때의 일들을 기억하여 쓴 시가
[영호대종사어록]에 한 수 전한다.
눈비를 바라보며
저물어 가던 경인년 봄
운문으로 환응 스님 찾았네
한 여름 능엄경 읽노라
쌍계언덕 내려갈 줄 몰랐고
8월에 조계 건넜더니
세 노장 스님 편히 자리하셨네
경운 스님 자리 베푸시고
벼루 앞에는 빼어난 일곱 스님
제봉과 금봉 스님 마주하고
재민과 찬의 스님은
법석의 앞자리
글과 뜻 모두 나무랄 데 없었네
진응 스님은 끝에 자리하고
화산 스님도 계셨네
일찍 나의 스승 금산 스님 금강산 가시는 길
봄바람에 천 리 길 따라 나셨다네
계사년 스승께서 저세상 가시니
나도 석왕사 떠나
느지막이 신계사로 왔었네
한여름 깨달음 구하고자
건봉사와 명주사 거쳐
구름 다라 강원 찾았더니
눈앞 가리는 건 온통 대발에
귀에는 그저 경 읽는 소리뿐이었네
위 시의 노스님 중
함명은 경운 스님의 법조 ,
경붕은 법부, 금봉은 경운 스님의 법자로 이 네 스님은
한국불교의 1문4대 강백으로 칭해지고 추앙 받고 있으며.
4대의 이 한데 모인 에서 시 문답하는 정경을 읊은 뜻 깊은 시라 하겠다.
혜찬진응 스님은 구례 출신으로 15세에 출가하여
화엄사 응암 스님과 선암사 경운 스님께 수학한 뒤
1910년 원종 종무원 종정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하려 하자
석전한영, 만해 용운 스님들과 함께 이를 저지했다.
금봉스님은 순천 출신으로 14세에 출가 ,1893년 경운 스님의 법을 잇고
대승암에서 10년 동안 많은 후인들을 지도하였으며,
왜래문물이 치성함을 보고 을 배우는 한편 에 힘썼으며
선암사 주지직에 봉직하다. 1916년 세수 48세로 일찍 입적하셨다.
이후 경운 스님의 뜻에 의해 선친이 법을 잇게 되었다.
원제봉 스님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는 바가 없으며
영남 출신으로 경운 스님께 수학한 제자였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경운 스님은 때가 이르매 상족제자를 선정하기 위한 공안을 내렸고,
답을 올린 제자들 중
원제봉 스님에게는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하였고,
혜찬 스님에게는 “너는 나의 피를 얻었다” 하였으며,
석전 스님에게는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하였다, 마지막
금봉 스님에게 “네가 나의 골수를 얻었다” 하여
금봉 스님이 법을 잇게 되었는데,
이 전법은 536년 임제선의 초조 달마대사가 자신의 임종 시기가 다가오자
제자 4인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 상태를 점검한 뒤
도부에게는 나의 피부를,
총지에게는 나의 살을 ,
도육에게는 나의 뼈를 얻었다 말하고
에게는 나의 를 취하였다고 하여
혜가가 전법의 증표로 를 받게 되었던 일을 연상케 하며,
이후 석전 스님은 경운 스님께 하직인사를 올리고 조용히 선암사를 떠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는 조선조 오백 년간 척불숭유정책으로
참담한 침체기를 겪은 데 이어 을사늑약 이후 일제 강점기의 사찰령으로 인해 국운과 함께
자율적 종권을 송두리째 잃게 되어 한국불교의 기틀이 풍전등화에 처한 상황이었다.
이에 경운 스님을 주축으로 분연히 일어선 한용운, 장금봉, 박한영, 진진응 스님 등이
중심이 되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을 바로 세워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경운 스님은 85세를 일기로 1936년 입적하셨고,
정인보가 찬한 비문과 오세창이 쓴 글이 새겨진 비가 1940년 경붕대사비 곁에 건립되었다.
한편 용곡 스님의 족형이 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항일 독립투사이며 사학자 언론인으로
잘 아려진 분인데 독립운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1936년 2월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용곡 스님은 평소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대승기신론을 깊이 연구하기도 한 족형을
존경해왔는데 뜻밖의 사망 소식에 마음에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p 205)
그 아픔이 채 가시기 전에 경운 스님께서 입적하셨기에
1936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되었다.
1912년 3월 경운 스님께 올리다
진흙 깊 헤매다 스님 방에 올라가
큰스님 살림살이 즐겁게 살펴봅니다
제비는 옛정 입에 물고 재잘거리고
꾀고리는 속절없이 지저귑니다
세정 향함 괴이하고 물길은 가이없어라
차와 향의인연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아득하게 이어진 맑고 선명한 빛 부디 발하소서
위 시를 서서 경운 스님께 바친 송광사의 금명보정 스님은
경운 스님보다 9세 연하였고, 이 시를 쓸 때는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하여
조선불교계를 구조적으로 장악하고 지배하기 시작하였는데,
보정 스님은 “세정 향함 괴이하고 종소리 끊어져도” 라고 표현하여
조선불교의 자주성이 말살됨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정스님은 경운 스님을 믿고 따르며
조선불교의 “물길은 가이 없어라” 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리고 그는 경운 스님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의
그런 맑은 빛을 계속 유지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시 외에
보정 스님이 경운 스님에게 바친 시는 4수가 더 있다 . 또한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불교계가 처한 어려운 상황과
조선불교 임제종 교정으로서의 경운스님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경운 스님의 법을 이어 청허의 158세 법손이 되는 금봉스님은
1869년 12월24일 <지금의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고 자랐으며,
일찍 유학을 공부하여 13세에 와 를 두루 통달하였다.
14세에 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원력을 세워
여수 영취산 흥국사의 경담화상 에게 출가한다. 출가한 후 10여년간 오직
을 터득하는 데 몰두하고 경학을 연찬하며 출가사문에 기초를 닦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 당대의 강백들인 화엄사의 원화, 선암사의 경운, 대흥사의 범해, 원응의 문하에서
, 등의 경전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스님은 또한 유교에도 심취하여
영제 이건창, 매천 황현, 하정 여규형 등과 학문과 종교를 논박하고 하며 교류하였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조선이 독립을 꿈 꿨던 인물들이다.
금봉 스님은 1895년 3월 27세 때 선암사 대승암에서 경운 스님의 법을 이어
하고 을 잡자 의 구도자가 하고 이 하니
모두 승전의 라 하였다.
이 시기에 세상물정을 풍문으로 들은 스님께서는 상경하여 급박한 국내외 정세를
면밀히 점검하고 또한 서양에서 들어온 서적들을 구해 상세히 읽으며
서구사회에 대한 지식을 접하기도 했었다. 한 스님은 청년도제들에게
. 을 겸비하고 신문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8년 3월6일 각도 대표 승려 50여 명이 서울 동대문 밖 원흥사에 모여
원종 종무원을 설치하고 여기에서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하였다.
원종 종무원이 설치된 지 2년 후 즉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강압에 의해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를 재빠르게 탄 이회광과 그 일파는
조선불교와 연합할 수 있는 일본불교는 밖에 없다고 보고 교섭대표로 이회광이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과 대등하지 못한 7개조의 연합조약을 체결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7개조의 내용을 공개하면 찬성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비공개로 각도의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평등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속인 뒤
찬성 날인을 받았는데, 원 종무원 서기의 손에서 7개조 전문이 통도사 승려에게 누설되었다.
이 내용을 알게 된 조선승려들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에게 팔아넘기는 매종 행위라고
이회광을 규탄하면서, 태고 이래 면면히 계승되어온 임제계통의 법맥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조동종으로 개종됨은 를 뒤바꾸는
반종교적 행위라고 주장하고, 비밀리에 체결한 7개조의 협약에 결사반대하였다.
이 반대세력을 대표한 선암사의 장금봉, 김학산과 백양사의 박한영, 화엄사의 진진응,
범어사의 한용운, 오성월 등의 청년 승려들이 임제종을 표방하면서
이회광 일파의 연합에 대응하여 격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정월 158일, 영. 호남의 승려들을 모아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어임제종이 수호를 결의하고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치하였다.
초대 종정에 선암사의 경운 스님을 선출하였으나 하여 나오지 못하였으므로
범어사의 청년승 한용운이 대리로 송광사에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전국 각지에 임제종 포교당을 설치 운영하여 종세를 확장하였다.
일본과의 연합은 속가에서 보면 시조와 선조를 바꾸는 행위이므로 한일 강제병합 후
민족적 적대감정도 가세되어 연합조약 반대운동은 초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이렇듯 경운스님의 뜻을 이어받은 금봉 스님은 시대적 상황이 불교계의 일대개혁이
함을 강조하고 조선불교 수호와 후학양성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금봉 스님이 48세의 한창 나이로 입적한 후, 이듬해 열린
추도회(1917년 11월5일)에서 경운 스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깨달음을 겨루었던
영호(석전)스님과 10세 연배였던 금봉 스님을 추앙했던 만해 스님은
너무 빨리 떠난 금봉 스님을 아쉬워하면서,
지난 일을 회상하며 다음 추모시를 지어 금봉 스님의 원적을 추모하였다.
금봉 스님을 추도함 9월
강남에 가을 깊으니 나뭇잎 성글고
임공 가신 뒤 빈 달만 휘영청
조계의 바른 법 위라서 이을손가
책상 위 갖은 책 흩어져 어지럽다오
못엔 흰 연꽃 고목 하나뿐
홍매 피던 안뜰도 황량하기만 ㅎ니
27년 이어온 정 구름처럼 허망하여
서릿발 첫 새벽에 하염없이 울었다오.
영호.금봉 두 선사와 종무원에서 시를 짓다
지나날 일마다 소홀했더니
만겁도 한바탕 꿈인 듯 적막하고 공허하다오
이제 강남의 이른 봄빛 보려도 않고
성동의 눈바람 속 누워 책만 읽는구려
또 당시 총과 칼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 한민족의 얼과
조선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임제종 중흥운동을 펼치는 등 동지적 관계였던
만해 한용운, 영호 박한영, 금봉 장기림, 세 스님의 투철했던 민족애와
조선불교 수호의 결연함으로 똘똘 뭉쳐 의기투합했던 각별한 인연을
짐작할 수 있는 시들이 만해 스님의 “님의 침묵”에 여러 수 수록되어있다.
서울에서 영호. 금봉 두 선사와 함께 읊다 2수
짧은 머리 흩날리며 속된 세상 들어오니
인생의 덧없음 날로 새삼 느껴지네
눈 내린 천산 모두가 꿈이거늘
머리 들어 유조 옛일 얘기함도 우습다네
시는 볼품없어지고 치하면 객기만 느는데
하룻밤 새 영웅들 모두 나뭇꾼 되었다 한들
설마 두려울까 더없이 고운 이 강산
푸르른 산 적요 속에 묻힘도 한바탕 꿈이련가
선암사에 머물면서 매천이 시에 차운하다
불만 가득한 채 반년 지나
하늘 아래 홀로 떨어져 깊은 곳 찾았네
앓은 뒤 흰머리 가을이면 더욱 성기리
큰일 후 국화 피고 풀 또한 무성해
무상 말씀에 구름 흩어지고 물소리 들려
경 듣던 사람 돌아가니 상서로운 새소리
온 세상 풍진을 당하매
하릴없이 두보 시 읊조리고 앉았다네
후일 용곡 스님은 일제 강정기가 종식되고 해방이 된 후에도 시국의 어수선함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시작된 불교분규로 인한
사찰의 황폐화와 경제난의 가중으로 스승의 비조차 건립하지 못한 안타까움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그 와중에 스님의 탄강 (120년)이며,
입적 72년에 해당되는 1988년 선암사 비전 경운 스님비 곁에
스승의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상월새봉 이후 1문4대 강백인 함명. 경붕. 경운. 금봉의 비가
나란히 비전에 자리하게 되었고,
1994년 용곡 스님의 입적 후 18주기 되던 2012년 정월
태고종 종정 혜초 스님 []가 용곡 문도회 주관으로
스승인 금봉 스님비 옆에 건립되어 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