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원 세계는 직선위의 세계이다.
날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배를 땅에 붙여 직선 앞뒤로만 움직일 수 있는
전설속의 동물이 있다면 그는 일차원세계에 살고 있다.
날지도 걷지도 못하고 전후좌우로, 즉 평면위에만 다닐 수 있는 동물이 있다면,
요놈은 이차원 세계에 살고 있어, 아메바나, 달팽이, 뱀 같은 놈들 말이야,
전후좌우로 움직일 수 있음은 물론이고, 공중으로 껑충 뛸 수도 있어,
말하자면 사람이나, 개, 소, 조류, 이런 것들은 삼차원 세계에 살고 있다.
입체공간에 살고 있다면 되겠네.
그런데 사차원 세계는 아주 단순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는 세계야.
마치 만화책 속의 세계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어,
지금 여기서 마음만 먹으면 금방 바다 속에 다녀 올수도 있고, 달나라, 별나라에도 갔다 올수가 있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되돌아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몇 십대 조상님들 까지도 만나
볼 수가 있고, 100년 뒤 1000년 뒤의 미래에도 가 볼 수가 있는, 말하자면 이런 세계가
사차원 세계인데 나는 요즘 사차원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가 있어.
그날 3월 14일이었지 너희들 동창회 하던 날, 지금도 바쁘지만 그날도 선생님은 좀 많이 바빴어.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 시차를 두고 내 일정에 맞게 적당히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 좋은 일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중복되어 일어나니 남들이 볼 때는
행복한 고민이고, 하기야 나도 즐거운 생활의 연속이지만 욕심을 부리자니
아이들처럼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시차를 두고 일어났으면 좋겠다하고 투정을 부리는 거지 뭘.
요즘 밖에는 꽃들의 세상이지.
개나리가 피더니, 목련이 피어나고, 산자락마다 참꽃이 붉게 피어나더니,
요즘은 온천지에 벚꽃이 만발하다. 창 밖에는 눈처럼 펄펄 날리는 꽃잎을 보면서
집안에 가만히 있기가 아까워 강가에 흐들어지게 핀 벚꽃길을 걷다 들어오니
등기 우편물이 하나 배달되었어. 정영호가 보내준 USB 나는 그것을 보면서 그 시간부터
사차원세계로 진입을 했어.
선생님이 용문중학교에 갔을 때가 1980년도,
그 때 내 나이가 30대 중반 아직은 젊었을 때였지, 너희들은 10대 중반 철부지 소년소녀 시절이었겠다.
학교 다녀오면 숙제하기 바빴고, 가슴 두근거리며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했었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청운의 꿈을 키울 때였지.
어느 학교나 가면 학생들 있고 선생님들 계시고, 출근해서 가르치고, 때 대면 월급 나오고 .....
뭐 그렇게 평범한 월급쟁이 선생으로 근무를 했었는데, 그리고 삼십 수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때 그 시절 가난하고, 눈망울 크고, 어리숙하게만 보였던 그 철부지 소년, 소녀들이 성장을 하여
이제 사회 각계각층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오십을 바라보는 어엿한 중년의 신사, 숙녀들이 되었다니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흘렀나 싶기도 하고, 나처럼 하잘 것 없는 월급쟁이에 불과했었던 사람을
스승이라 찾아주니 반갑고 고마운 마음뿐이었지,
그것도 너희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환대를 받았으니 그냥 부끄러웠을 뿐이었어.
그 후 며칠 동안은 너희들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했었네, 시공을 초월하는 사차원 세계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지.
학교 옆으로 서 있었든 울창한 송림,
옛날에는 몰랐어,
그 소나무 숲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생각할수록 그 소나무에 매달린 솔잎처럼 추억도 많이 있어.
삼십 수년 전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해 어디 나다니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어서,
선생님들 대부분이 사시사철 금당실에 있었거든, 달 밝은 가을 밤
아예 막걸리 술통을 솔숲아래 가져다 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며 인생이 어떻고, 문학이 어떻고,
철학이 어쩌니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토론을 한 적도 있었고,
여름 날 교실 안 찜통더위를 피해 가끔씩 이동식칠판을 송림에 가져다 놓고 수업을 하기도 했었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유치하도록 아름다운 추억의 한편이었어.
들국화와 코스모스가 피어나고 들판에 무서리가 내리던 늦가을 어느 날 아직은 가을인가 싶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온 천지에 첫 눈이 하얗게 덮혀있었고,
학교에 출근해 보면 흰 눈을 뒤집어쓰고 고고하게 서 있는 그 소나무의 모습이
신비스럽게 보일 때도 있었어.
길고 긴 겨울 방학동안 할 일이 없으니 마음 맞는 선생님들끼리 날이면 날마다
학교 숙직실에 모여 늦은 시간까지 모여 놀 때가 많았어.
정적이 흐르는 산골동네, 밤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 올 때 보였던
그 칠흑같이 어두운 겨울 밤, 하늘엔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만 만난다는 전설의 강,
희뿌연 은하수가 흘렀고,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 사이로 별똥별들이 주욱 사선을 그으며 사라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밤을 보낸 적도 있었지.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은 바람에 떨며 윙윙 소리를 내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두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오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내지리와 두인 쪽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합해져 금당실 앞을 흐를 땐 제법 많은 물이 흘렀고,
목 좋은 곳에 어항을 놓으면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파르르 꼬리치던 피라미와 버들뭉치를
기분 좋게 잡았고, 그물을 끌고 다니며 꿕지와, 떵어리, 꾸구리 같은 같은 물고기를 잡았던 기억도 나고,
선동에서 내려오는 뒷내에도 물고기들이 참 많았어.
여름날 오후나 방학 때는 집사람과 아이들 데리고 그곳에서 시원한 물에 들어가
그물로 물고기 잡으며 세월을 보냈어.
그 때 우리 아이들은 아주 어렸거든 큰 아이는 앞에서 걷고,
작은 아이는 그늘에서 잠이 들어 내 등에 업고,
서산머리에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며 집으로 오곤 했었어.
저녁을 먹고 우리가 거처했었던 단양할메네 마루에 앉아 있으면 불어오는 바람이
에어콘 바람보다 더 시원했었던 여름이었지.
교문 앞에는 창호네 집이 있었고,
그 옆에 분홍집이라는 작은 술집이 있었어.
거긴 언제나 우리 젊은 선생님들의 아지트였지,
다른 놀이 시설이 없었으니 시간이 있으면 항상 배구를 했고,
그것도 신명이 나서 해가 떨어지고 날이 어둑해 지면 창호네 전깃불을 운동장으로
끌고 와 불을 밝혀놓고 인이니 아웃이니 다투면서 배구를 했어. 운동 시합이 끝나면
땀에 젖은 지친 몸을 쉬면서, 분홍 집 뒷방 그곳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웃고 떠들고 정을 나누었었지.
파랗게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날 교문을 나서면 들판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금빛 물결로 출렁거렸고,
초간정 가는 길, 길가 양쪽으로는 봄 날 너희들과 함께 씨 뿌려놓은 코스모스가
수줍은 소녀처럼 고개를 숙이고, 애잔하게 핀 꽃잎은 나비처럼 팔랑거렸지,
지금은 없어졌지만 개가 우는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 명구바위가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초간 권문해 선생이 글공부 하시던 초간정,
조금 더 올라가 왼 쪽으로 가면 내지리 용문사, 왼쪽으로 가면 언제나 푸른 물이 출렁거리던 두인 못,
아 그렇지 그 곳으로 우리는 자주 소풍을 갔었고,
그리고 그 못가에는 봄부터 가을 까지 물속의 고기들을 엿보는 강태공들이 들락거렸어.
학교 옆을 흐르던 작은 내를 건너면 길섶에는 초여름부터 늦가을 까지
밤마다 달 마중 나온다는 껑충하게 키가 자란 달맞이꽃이 피어있었고,
비포장이지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옆으로는 달구지 한 대가 가까스로 다닐 수 있는 농로가 있었고,
좁은 길가 무성한 잡초 속에는 망초 꽃, 달맞이꽃, 달개비 꽃, 민들레꽃들이 가지각색으로 피어있어서
한웅큼 듬뿍 쥐고 흩뿌려 놓은 듯한 야생화들이 수를 놓은 곳이었어.
먼지가 풀석풀석 나는 비포장 자동차 길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구계, 방송, 노사동네가 나오고,
왼쪽으로는 덕신, 직동 이란 동네가 있어 가끔씩 저녁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보며
너희들 가정 방문을 간 적도 있었네.
교문 앞에는 작은 교회당이 있었고,
교회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다녔고, 우리집 아이들도
그 교회에 나가서 크리쓰마쓰에는 연극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했었던 기억이 나.
거기서 조금 아래쪽이 금당실 장터였지.
장날에는 각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콩이나, 쌀 같은 농산물을 가져와 팔고,
참깨를 가져와 기름도 짜고, 고추도 빻고, 필요한 공산품과 반찬을 사 가든 조금은 시끌벅적한 곳이었어.
예천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매표소 집에는 윤준호 라고 하는 아주 얌전한 우리학교 학생이 있었고,
그 여동생 경빈이는 오빠보다는 조금은 더 활발한 소녀가 있었지.
정류소 앞에는 아주 오래된 큰 버드나무가 있어 여름철에는 그늘이 아주 좋았는데,
그곳에서 앞들과 산 쪽을 바라보면 손끝에 잡힐 듯이 갂은 산자락 근처를 슬금슬금
지나가는 계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지.
조선 중엽 양반계급, 세도와 권력의 화신 양주대감이 살았다던
구십아홉간 저택 뒤를 돌아 올라가다 보면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이 담긴 선동이란 곳이 있어.
언젠가 한번 우리 선생님들이 수업을 마치고 이 동네 가정 방문을 했었는데
어떤 집에서는 오래 담구어둔 값진 과일주를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닭을 잡아오기도 하고 하여튼 걸판지게 신나게 대접을 받고
어두운 밤길을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며 내려왔었던 기억도 나네.
용문 초등학교 본교와는 거리가 멀어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었고,
분교장 옆 가게에는 우리학교에 다니고 있는 정선희 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란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정 선희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 참 거기엔 많은 전설을 가진 청룡사라는 절이 있었지.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제 멋대로 지명을 바꾸었지만
용문에는 아직도 우리말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지명이 많이 있어.
똑바로 곧게 뻗은 골 안에 동네가 있다고, 곧은 골 (직동)
능수버들 늘어진 내가 있다는 능내 (능천)
대나무 숲이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 대숲(죽림)
어딘가에 금이 나올 곳이라 예측하고 동네 이름을 붙인 금당실
신선들이나 살았을 것 같다는 선동,
버드나무가 많이 있다고 붙여진 버들 밭,.....동네 이름만 들어보아도 정감이 가는 곳이 많이도 있지.
사실 동창회 전 날 동준이하고 종하하고 내가 살고 있는 영주에서 만났고,
다음날 동창회하는 날 종하가 영주에 와서 나와 함께 안동으로 가서 석 수진 선생님하고 같이
금당실로 갔는데 가는 도중 병암정에 들렸어,
선생님이 용문중학교에 근무 할 때 말고도 이곳을 여러 번 지나쳤지만 병암정에 들려보긴 처음이었고,
이렇게 오래된 아름답고 유서 깊은 문화재가 있었나 놀랐고,
용문중 뒷산 오미봉에서 내려 본 금당실 동네는 넓은 들과 주변을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이 태조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고려말, 조선초기 보수파의 거두 정몽주와, 진보파의 거두 정도전의
우정과 이념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이성계도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몸서리를 쳤나봐.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철원, 송도(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을 찾아 한세상 살다 가려고
새 도읍지를 찾아 조선 팔도를 헤메다 지금의 금당실과 맞질로 오게 되었어.
이성계는 “여기야! 이곳이 내가 원하는 새로운 도읍지야!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 하고 크게 외쳤는데
동행한 무학도사 왈 “전하! 아니 되옵니다. 이곳은 아닙니다.” 하는 거야.
이성계 “뭐! 뭐라고 왜! 무엇 때문에. 안된다는 거야!” 화를 벌꺽 내자,
무학도사왈 “도읍지는 지세도 중요하지만 수세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
“이곳 지세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수세 즉 물이 부족합니다. 전하!”
그 후 도읍지는 현재의 서울 한양으로 옮겨졌고,
이때부터 금당맞질 반 서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네.
물론 정사는 아니고 야사이긴 하지만 금당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장인가.
실감할 수 있었네.
종하와 석수진 선생님과 초간정 위 체험마을에 도착했을 때 펼쳐진 내 눈앞의 믿을 수 없는 풍경들,
삼십 수년전 우리가 가르친 제자들이 몰라보게 성장을 하여 꾸벅꾸벅 절을 해대니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어.
오기 전에 옛날의 사진과 지금의 모습을 매치시켜 놓은 정영호가 보내준 사진첩을 보았지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그 기나긴 세월을 어떻게 찾아갈 수가 있겠나.
너희들과 만나서 시간이 흐르고 나니 하나씩 기억이 떠오르는 거야.
그러나 선생님이 너네들 하나하나 일일이 다 기억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나 좀 더 만나다 보면 기억되리라 생각한다.
너희들의 잘 계획된 프로그램대로 선생님들이 120 여명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식장에 입장을 할 때 선생님 가슴은 터질 것 같은 감동이 요동쳤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너희들 학창시절에 있었던 학교와 사회의 큰 문제들을 영상으로 올렸을 때
그 시간에도 선생님은 사차원 세계를 헤메고 있었어.
세월의 흐름따라 너희들의 어른스러움이 선생님에게는 더 재롱스러워 보였고,
석선생님이나, 전선생님, 배선생님 모두 너희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옛날을 회상했었다.
우리 모두 손뼉을 치면서 <고향의 봄> 노래를 끝으로 너희들과 작별의 시간이 왔을 때,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아쉬움을 남기고 선생님들도 모두가 헤어졌어.
얘들아!
너희들과 함께 있는 동안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행사에 앞장서 힘을 쓴 집행부에 고맙게 생각을 하고,
참가해준 모든 용문중 10회 미루나무 회원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음 만날 때 까진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안녕!
첫댓글 인사가 좀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만물이 시작되는 계절인 봄과 어울리는 마음 한켠이 따스해지는 책인거 같습니다.
미루나무 친구들과 다 같이 보고싶네요..ㅎ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꼭 한번 다시 뵙고싶습니다.
행복한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래 고맙다.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책 여유가 있었더라면 다 한 권씩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미안! 미안!
선생님!!!!!!!!!!!!!!!!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어 내려가니 옛날의 그 아련한 추억이 또한번 떠오르게 만드네요.
글쓰시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위에 사진처럼 수필집도 내셨겠지만요..
그리고 또 다음을 기약해봅니다.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
선생님의 한 편의 수필같은 아름다운 글과
용문 이 곳 저 곳의 추억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는 아주 정감있는 글이었습니다.
어떻게 용문에서 살고 있는 저희 들 보다도 더 자세하게 알고 계시니
그저 감탄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또 뵙겠습니다.
선생님의 진솔한 마음이 묻어 있는 글 가슴 뭉클하게 잘 보았습니다
동창회 때 잠시나마 뵙게 되어서 반가웠으며 늘 건강하시고 다시 또 뵙는 그 날까지~~~
선생님, 감사합니다. 세파에 찌든 머리를 맑게해주는 글이니다. 선생님은 행사에 참석하셔서 옛기억을 떠 올리시고, 우리들은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옛 추억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하시는 군요,.항상 건강하시고, 또 뵙겠습니다.
반성합니다~~
선생님보다 못한 기억력을 지니고있는 저를 반성합니다^^
어찌그리 세세히 기억을 다하시는지 그져 감탄일뿐입니다~~^
멋지신 모습만큼이나 멋지신기억을 다하고 계시는 울 쌤이시네요~~
담번엔 소주라도 한잔 올리겠습니다~
글보면서 뭉클 했습니다
항상 건강유념하시고요~~
저두 책한권 주십시요~~^^
돈내야하나요?ㅎㅎ
저희들 인생에 한 획을 그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