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서오릉의 입구 |
그림 2 조선왕릉 세계유산 |
서오릉에는 경릉(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 · 창릉(조선 제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 명릉(조선 제 19대 숙종과 제 1계비 인현왕후, 제 2계비 인원왕후의 능) · 익릉(조선 제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 · 홍릉(조선 제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외에도 수경원(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묘), 순창원(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빈 윤씨의 묘), 대빈묘(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서오릉의 시작은 세조가 1457년(세조3) 세조의 원자였던 장(덕종으로 추존)이 죽자 길지를 물색케하였고, 지금의 서오릉터가 길지로 간택되어 세조가 직접 답사한 뒤 경릉 터로 정하면서 조선왕족의 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전한다.
내가 답사한 서오릉은 수많은 조선왕릉의 터 중 한 곳이지만 서오릉 자체의 가치를 떠나서 우리나라 전국에 퍼져 있는 조선 왕족이 무덤들의 그 자체적 가치는 매우 높다.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3. 왕릉기행의 시작
⑴ 경릉
그림 3 덕종릉을 뒤로하고 |
그림 4 거의 보이지 않는 소혜왕후릉 |
위 사진 뒤에 보이는 능이 바로 추존왕 덕종이 잠든 곳이다. 세조 때부터 시행되었다는 동원이강식의 쌍릉인데 사진에서 보다시피 매우 멀리 또 높이 자리잡고 있어 사실 능의 자세한 형태를 보기는 어렵다. 안내책자와 책을 참조해 보면 덕종의 능은 왕비와 왕의 능을 착각할 정도로 덕종릉의 석물이 간소하고 왜소하다고 한다. 실제로 보면 소혜왕후릉은(그림 4 & 그림 3의 왼편에 위치)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석물들의 종류나 화려함이 느껴지는 데 이는 덕종은 당시 추존되기 전이어서 대군묘제도를 적용한 것이고, 소혜왕후는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뒤 왕비로 책봉된 후 세상을 떠나 왕릉의 예를 따랐기에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한다.
⑵ 창릉
그림 5 창릉에 들어서며
창릉은 예종과 그의 계비인 안순왕후의 역시 경릉과 같은 동원이강식의 쌍릉이다. 위 사진이 참도로 들어섰을 때 보이는 전체 모습인데 왼쪽이 예종릉, 오른쪽이 안순왕후릉이다. 창릉은 서오릉의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또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능의 형태는 다른 왕릉들과 유사했으며 역시 가까이 가서 자세히 석물이나 능 형식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책자에 의하면 창릉은 상, 중, 하계가 명확하여 왕조국가의 위계질서를 엿볼 수 있는 능 형식이라 한다.
⑶ 명릉, 익릉 그리고 대빈묘
그림 6 익릉으로 들어서면서 |
그림 7 대빈묘 |
명릉은 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잠들어 있는 능이다. 숙종와 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에 나란히 누워 있고, 제 2계비인 인원왕후가 이들을 내려다보면서 왼쪽 위편에 자리잡고 있다. 쌍릉의 왼편이 숙종릉, 오른쪽이 인현왕후릉이다. 책을 참고해보니 인원왕후는 평소 숙종과 함께 묻히기를 소원해 미리 명릉에서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두었는데 소원대로 하자면 정자각을 따로 세우고 벌채를 해야 했기에 영조가 고민하다 지금의 위치대로 능을 쓰고 한 정자각의 제사를 받게 했다고 전한다. 명릉에서 조금 멀리 벗어나 언덕 높이 자리한 익릉은 숙종의 첫번째 비였던 인경왕후릉이 있다. 인경왕후는 답사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생소하였는데 이는 20세에 요절한 탓인 것 같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두 공주가 있었으나 두 공주 모두 인경왕후보다 일찍 죽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구한 팔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서오릉을 답사하며 가장 놀라웠던 점이 숙종과 그의 비들이 모두 서오릉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에 소개할 대빈묘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숙종의 넷째 부인 희빈 장씨의 묘인데 전체 서오릉을 조감해서 보았을 때 명릉와 대빈묘의 배치가 거의 끝과 끝인 점이 인상깊다. 답사 중 대빈묘를 가장 가까이서 자세히 볼 수 있었으나 왕릉이 아닌지라 석물도 봉분도 확실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⑷ 홍릉
그림 8 홍릉의 입구
홍릉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소생 없이 66세에 승하하였으나 평소 영조가 왕비를 아껴 왕후의 묘자리를 정할 때 장차 함께 묻히고자 하였고 능 위의 석물을 쌍릉을 예상하여 배치하였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정조가 영조를 동구릉의 장릉으로 모심으로써 왕의 능침공간이 영영 비게 되었다. 죽은 이는 모를테지만 남겨진 이의 또 여자의 입장에서 이 능을 보고 있으니 다른 경릉, 창릉, 명릉에 비해 유난히도 쓸쓸하게 느껴진다.
4. 마치며
답사를 다녀오면서 문득 왕릉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던 가를 회상해보았다. 안타깝게도 나의 마지막 기억은 초등학교 때 경주 수학여행이 마지막이었다. 단 한번도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닐 만큼 대단한 유산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다녀오고 살펴보고 또 보고서를 쓰기 위해 책을 참고해보니 왕릉 하나를 모시기 위해 들어간 정성과 후대 사람들의 노력이 엿보여 매우 감탄할 만한 문화재라는 것이다. 왕릉 하나하나마다 각 공간적 성격과 시대에 부합하는 건축물, 조형물, 전체적 조경 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게 매우 놀라웠다. 수업시간에 간간히 듣던 ‘풍수’라는 용어도 더 살갑게 느껴졌다. 기가 머무는 물을 중시하는 경향에 따라 능 앞에 흐르는 묘내수 위에 장대석을 깔아 특별히 만들었다는 금천교를 보아도 그러했다. 금천교, 참도, 배위 등 조금 더 미리 조선왕릉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고 갔더라면 더 많이 배우고 왔을 거란 생각에 아쉬웠다. 내가 왕릉을 살펴보며 가장 신기하게 생각한 점은 소나무였다. 왕릉 주위에 무성한 소나무들이 이상하게도 다 왕릉을 향하여 굽어 자랐다는 점이었다. 위의 그림 8도 그러한 점이 신기하여 찍은 사진인데 마치 나무들 조차 왕과 왕비를 기리고 모시는 느낌이었다. 과학을 공부한 나로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아마도 빛을 따라 자라는 게 나무의 습성이므로 왕릉에 해가 잘 들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에 또 얼마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 깊은지 감탄할 따름이다. 답사보고서를 쓰며 참조한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문화재는 감상하기가 꽤 까다로운 것에 속합니다. 아무런 지식이 없이 바라보면 그냥 잘 지은 옛 건물이거나 멋들어지게 쌓은 탑이었던 것이 내막과 유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알고서 보면 보이는 것이 생기고, 보이는 것이 있으면 문화재와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왕릉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써 찾아갔다 하더라도 준비 없이 보면 어느 왕, 어느 왕비의 능쯤으로 아무런 느낌 없는 석물들로 보이지만 조금만 주의깊게 내력과 사연, 제도를 알고 나서 다시 살펴보면 능에 안장되어 있는 왕과 왕비의 일생과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1]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처럼 이처럼 공감 가는 글귀를 읽고 나니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주변에 무지하였으며 조선왕조 500년사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지, 그러나 한 편으로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처럼 이번 답사를 통해 적어도 다섯 개의 왕릉을 알게 되고 그 왕릉의 구조와 그 배경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배울 수 있어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다.
5. 참고문헌
1. 한국문원, 『왕릉-왕릉 기행으로 엮은 조선왕조사』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 여행의 길잡이 9 (경기 북부와 북한강)』, 돌베개
3. 문화재청, 『서오릉 참고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