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 관념의 기원에 대해 논하라.
인간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선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주체이며, 인간이 계시에 의하여 자기에게 도달된 지식을 획득하고 성찰할때만 인간을 위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계시가 없었다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계시하신 후에조차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눈앞에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에 성화된 인간의 이성이 적용됨으로서 인간은 성령의 인도 하에 하나님에 관하여 계속 증가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2. 신 존재증명들에 대한 논의와 각 증명들의 문제점을 논하라.
① 존재론적 혹은 본체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유신논증 중에서 형이상학적 선험적 논증이 본체론적 논증이다. 이는 보편적인 사람이 모두 갖고 있는 절대자에 대한 관념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이 논증은 하나님의 진정한 객관적 존재가 이러한 실유의 개념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헬라철학 중 플라톤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이데아의 세계가 실제하는 것이요, 가시적인 모든 것은 그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속에 그러한 관념, 그러한 "자기보다 더 큰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하면서 그 존재가 하나님이라 말한다(관념에서 실제에로의 전향). 즉, 인간은 스스로를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로 인정하며 아울러 완전하고 무한한 신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관념의 실체인 절대 완전자는 필연적으로 존재의 속성을 지니며, 그러므로 절대 완전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증명은 너무나 사변적이며 추상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관념은 아무리 종합해도 거기에서 실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추상적 관념이거나 관념의 소산이 아니므로 관념의 중점에 신의 존재가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신의 행동의 한 부분을 단편적으로 포착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② 도덕적 논증(moral argument)
이 세계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으나 인간의 양심은 악을 폐하고 선을 행하려는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는 악을 형벌하고 선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양식이 널리 존재한다. 이와 같은 선인적인 양심의 법칙이나 사회적인 도덕의 원리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창조하고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이끄는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를 증거한다는 견해이다.
이 논증의 대표적인 사람인 칸트는 자신의 틀을 세우는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다른 유신논증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는 이성밖에 있는 영역들에 대하여 모든 논증들을 제거시켜 버린 것이다. 즉, 이성의 한계를 정해버렸기 때문에 신에 대한 영역에 대한 논증들이 그의 이론에 따르면 경험 외의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은 성경을 배제하고 자연의 현상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자들에 대한 논증들을 비판하는 공헌을 했지만(공헌), 과학의 영역에서 종교를 배제시킴으로 과학적 종교를 불가능하게 했다(단점).
인간 세상에서 선악의 절대 기준이 되는 도덕을 기대할 수 없다. 시대와 장소와 종족에 따라 선과악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긴 때문이다. 양심 또한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인간의 도덕과 양심을 토대로 절대적인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를 추론하기는 어렵다.
③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결과를 보고 원인을 찾는 방법을 취하므로 '인과논증(aetiological or causal argument)'이라고 도 한다. 즉 어떤 일에는 반드시 그 결과를 선행하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만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을 것인데 우주의 원인자로서 초월적 자존재의 존재가 필연적이라는 견해이다. 이처럼 우주론적 증명은 모든 존재의 제1원인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우주 생성의 원인자로 하나님을 계시히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히3:4, 시19:1).
이에 대표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원인과 결과를 통하여 이를 설명했는데, 결과가 있게 하는 원인을 추적해 가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일원인(부동의 원자)'이 발견되며, 이것을 신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철저한 인과율에 의해 증명되는 신은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적 사슬에 매여 있는 부자유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자 의지를 가지고 공의와 사랑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는 반면, 우주론적 증명에 의해 존재가 증명된 신은 무기력하고 감정이 결여된 추상적 제1원인에 지나지 않는다.
④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
우주론적 증명과 마찬가지로 '인과 논증'인 이 논증은 복잡한 시계를 디자인하듯, 인간의 구조상에 있어서 복잡한 기관 역시 그 어느 누군가에 의해 디자인되었으며, 바로 그 디자이너가 바로 신이다라고 하는 증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라 만상은 혼돈 가운데 있지 않고 질서를 지키며 일정한 자연의 법칙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배후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질서를 부여한 이해목이 있는 의지적 존재가 있는 것으로 보는 정서론이 있다(데오필루스, 클레멘트). 또한 특별히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가 성장,
그러나 모든 존재가 신의 창조물이며 목적을 가진다는 주장은 성립하긴 어렵다. 악이나 병같이 하나님이 작정 창조하지 않는 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며 이러한 것의 존재 목적을 규명하여 신의 존재를 규명하기도 어렵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신적 의와 목적이 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된다는 엉뚱한 결론에 이를 위험도 있다. 또한 신적 목적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하나님이 매순간 인간과 역사를 섭리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단지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만 따라움직이는 것으로 이해되어 이신론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합리적 유신 논증은 절대 초월자로서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직접적 증명이 아니므로 각각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개연성만은 충분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한다. 즉, 이러한 여러 유신 논증을 종합할 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 성경을 읽을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 유신 논증의 결론은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계심을 확인하며 그 성품과 사역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다.
3.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여러 이론들에 대해 논하시오.
A. 무신론
① 철학적 무신론∼유물론(Materialism)은 정신적, 영적인 세계를 부정한다. 따라서 천사나 영혼이나 정신이나 신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고, 기껏해야 물질에 종속되거나 물질 작용의 부산물로 본다.
② 신학적 무신론∼급진신학(Radical Theology)에서는 성경을 신화가 지배하던 고대 세계의 문학적 작품으로 보고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으며, 또는 사신신학처럼 고정 관념에 잡힌 정통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라고 한다(언어분석의 결과).
③ 사회학적 무신론∼에밀 뒤르껭 등 20세기 초의 사회학자들은 하나님이란 사회가 개인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기 위하여 조작해 낸 상상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다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이 자기존속을 위친 신의 관념을 만들었다는 컷이다.
④ 심리학적 무신론∼프로이드는 지진, 홍수, 폭풍, 질병, 죽음과 같은 잔혹한 위협에 대한 심리학적 방어로 생긴 것이 종교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하나님에게 투사시켜서 신의 존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를 직시하면 사라지게 될 환상이라 한다.
⑤ 과학적 무신론∼현대 과학에 비추어 볼 때 성경의 기록은 모순에 가득 차 있고 매우 비과학적이므로 종교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신의 존재는 무지한 고대인들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필요 없게 된다. 이 이론은 고대와 중세기의 무지했던 종교가들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다.
⑥ 실천적 무신론)∼외식하는 신앙인들과 명목상의 종교인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하고 실제생활에서는 하나님 없이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런 유의 유신론자들은 생활 속에서 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B. 오 신 론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하나님을 잘 못 알고 있는 입장이다. 우리 나라의 샤마니즘이나 범신론, 자연주의 등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초월은 무시하고 하나님의 내재만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초자연에 근거를 두고 있다.
C. 초 연 신 론
이 이론에 의하면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나 내재성을 부인한다. 교의학적 의미에서 보면 신의창조를 인정하지만 섭리를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우주의 법칙대로 움직인다는 이론이다. 이들은 칼 바르트의 신학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하나님의 초월인정 하나님의 내재하심은 배제.
4. 하나님의 지식이 지니는 양면성(불가해성과 가지성)에 대하여 논하시오
(1) 불 가 해 성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아시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일 뿐 아니라 벙 죄함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많이 상실되었다. 따라서 성령의 감화하심을 힘입으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자 하나님의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부분적이며 불완전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경 자체가 하나님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2) 가 지 성
이방종교, 신학, 철학은 하나님의 완해 불가에 대하여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완해 불가할 뿐만 아니라 아예 알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완해 불가하시나 자기 스스로를 계시하신다고 한다. 이 계시의 내용은 인격적이시지만 자연 위에 높이 계신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 무한하시고 절대적이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특별 계시로 주어진 성경은 그 자체로는 절대 무오하므로 이를 통하여 얻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항상 바른 것이다. 인간이 갖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 범위에 있어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인간에게 충분할 만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있다. 즉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역사의 주관자되심과 구원의 주체가 되심을 알 수 있음은 물론 하나님의 여러 성품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5.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명칭)에 대해 약술하라.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성경 속의 하나님 이름은 출20:7, 시8:1에서와 같이 가끔 단수형으로 말한다. 이러한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특수한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표시하기 위하여 일반적 의미의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A.구약의 명칭들
(1) 하나님께서는 지고하시며, 들어올리시는 분, 곧 초월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이름들이 있다. "엘"이나 "엘로힘", "일리욘", "아도나이", "여호와"등이 있다.
(2) 이 숭고한 분이 피조물과 친교 관계에 들어가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 다른 명칭들이 있다. 족장 시대의 Shaddai, 흑은 El-shaddai라는 이름이었다(출6:3). 이 명칭도 역시 신적 위대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축복과 위안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의 힘을 지배하시어, 그것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에 공헌케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은 JEHOVAH(JAHWEH)라는 이름에서 자신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계시 하셨다.
이 만군이란, 성군이 아니라, 천사의 많은 수를 가리고는 말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천군 천사에게 호위를 받으며 그의 백성을 위해서 천지를 통치하시며 그의 모든 피조물에서 영광을 받으실 영광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인 것이다.
B. 신약의 명칭들
(1) THEOS(하나님)
이 명칭은 단순히 '하나님'을 위한 용어로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가장 공통적인 이름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소유적으로 사용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녀들의 하나님이시며 또는 그들 각자의 하나님으로 간주될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 관념은 종교에 있어서 개인적인 관념으로 바꾸어 졌다.
(2) KUR1OS(주)
이 명칭은 '주(LORO)'라는 말인데,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사용된 이름이다. 그것은 아도나이나 여호와를 대신한 이름이다. 만물 특히 신민의 소유자요 지배자로서의 하나님, 왕의 권세와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3) PATER(아버지)
구약 성경에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지시는 특수 관계를 표현할 때 이 명칭이 사용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요(신32:6;사63: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출4:22:신14:1;사f:2) 이 명칭은 신약 성경에서 언제나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가끔 그것은 하나님을 창시자 흑은 창조주로 말해 주고 있다. (고전8:6;엡3:14:히12:9;골1:17).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삼위일체의 한 위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지시는 특수 관계를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서의 신자들에 대한 그의 윤리적 관계를 묘사하기도 한다
6.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약술하라
A. 절대적 속성
절대적 속성(흑은 비공유적 속성)이란, 피조물 중에서 그 유사점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신적완전 성 을 의미한다
(1) 하나님의 독립성, 흑은 자존성
하나님의 독립성 흑은 자존성을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존재의 필요성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존재하신다는 것, 그리고 인간과 같이 외부의 어떤 것에 그의 존재를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의 존재에 있어서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덕과 행위에 있어서도 독립적이어서, 전 피조물로 하여금 그에게 의존케 함을 의미한다. 만물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선언에서 밝혀 지기도 하였다.
(2) 하나님의 불변성
성서는 하나님의 독립성만 아니라, 불변성도 역시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에 그의 존재, 완전성, 목적, 그리고 약속에 있어서 변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에게 동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내적 존재에서 속성에서, 목적에서, 행동의 동기에서, 또는 약속에서 불변하시다는 것이다.
변화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무한성
하나님의 무한성이란, 일반적으로 그의 성질의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질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이 존재에 속하는 일체를 인간으로서는 전철 측량할 수 없는 것 이다.
(3) 절대적 완전성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흑은 본질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성으로 하나님의 모든 절대적속성을 자격있겠 하는 속성이다.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에서 선과 사랑에서, 의와 성에서, 또는 주권과 능력에서 무한하시다.
(b) 영원성
하나님의 무한성이 시간과 관련하여 생각될 때 영원성이라 불리워진다. 성서는 보통 그것을 끝없는 연속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시며 그의 전 생명을 순간으로 소유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이다.
(C) 무변성
공간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의 무한성은 무변성이라고 불리워 진다. 이 완전성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공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그의 전존재로 공간의 모든 부분에 존재하신다. 이것을 가리러 우리는 하나님의 편재(OMNIPRESENCE)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전 창조 속에 내재하시지만 그것에 조금도 구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 완전성은 성서에도 명백히 계시되어 있다.
(4) 하나님의 단순성
우리는 하나님의 단순성을 말할 때, 그는 혼성된 분이 아니라는 점과, 어떤 의미에서도 분할할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속성은 신격 안에 있는 삼위가 하나님의 본질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에 첨가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단순성은 그의 자존성과 불변성의 당연한 귀결이다.
B. 보전적 속성
하나님의 보편적(흑은 공유적 속성)들은 인간의 속성들과 어떤 유사점을 띠고 있는 속성들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그의 보편적 속성에 자격을 부절 한다는 정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식과 지혜에서 사랑과 거룩함에서 독립적이며 무한하시며 또한 불변하신다.
(1)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전혀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아시며, 따라서 가능한 그리고 현실적인 모든 사물들을 아시는 완전성이라 정의 지을수 있다. 이 지식은 하나님 안에 고유하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감히 통찰할 수 없는 것들의 숨은 본질을 충분히 아신다. 현실적인 것도, 가능적인 것과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지식의 특수면이라 불리워진다. 그것은 목적에 대한 수단의 적용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지능이라 하겠다. 하나님은 이 지혜로 그가 생칵하셨던 목적을 달성키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을 선택하신다. 이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대 있는것이다.
(3) 하나님의 선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이다 곧 그는 완전히 거룩하신 선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에서 생각하려는 선이 아니다. 행동으로 나달나신 하나님의 선, 곧 타자에 대한 선행에서 자체를 계시하시는 그의 선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게 또는 친절하게 다루시도록 하나님을 자극하는 그의 완전성이라 하겠다. 가끔 하나님의 자비하심, 혹은 일반 은총이라 불리워 지기도 한다.
(4) 하나님의 사랑
오늘날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속성으로 흔히 간주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속성에 비추어서 다른 모든 신적 완전성들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하나님의 자기만족의 사랑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만족의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한하신 완전성과 그리고 그의 도덕적 형상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을 생각할 때 느끼는 기쁨을 의미 한다.
(a) 하나임의 은총
성서의 특수 용어에서 볼때, 하나님의 은총이란, 그것을 상실하고 본래 정죄의 판결하에 있는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말한다. 그것은 아무 가치없는 죄인에게 주어진 모든 영적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b)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면은 긍휼 흑은 연민이라 한다. 그것은 비참과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이 죄의 결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련한 상태로 놓여 있는 자로 본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의 가장 엄격하신 공의와 조화 하여서만 시행 된다.
(c)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사랑이 완고함과 악을 참으시는 것으로 고려 될 때. 그것은 오래 참으심, 혹은 관용으로 불리워 진다. 계속 범죄하고 있는 죄인을 돌보시는 사랑이다.
[5]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성(거룩하심)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절대적으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며 무한한 위엄으로 그들을 초월하시는 신적 완전성이라 하겠다. 이 하나님의 성(거룩하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덕적 탁월성을 영원히 의지, 보존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며, 또한 인간에게서 순결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이라 정의할수 있다.
[6]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에 반역하는 모든 불경에 대하여 자신을 보호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든 면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완전성이라 하겠다.
(a) 정치적 의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과 악과 지배자로 나타내시는 진정성이다.
(b) 보수적 의
이 의는 인간과 천사에게 상을 베풀어 주시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엄격한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약속과 동의에 딸라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c) 응보적 의
이것은 형벌과 관련된 의로 신적진노(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 죄가 충만한 세계에서는 그것이 엄격히 시행되어야 할 것은 필연적이다.
[7] 하나님의 진실성
하나님의 진실성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존재에 있어서, 계시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실하심을 보여 주시는 완전하심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진실성의 이 마지막 면은 흔히 그의 성실성이라 불리워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뢰의 근거요, 희망의 토대요, 환희의 원인인 것이다.
[8] 하나님의 주권
세계와 이성적 피조물들의 사건들을 계획, 지도하는데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 전능, 혹은 그의 의지를 행사함에서 볼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
(a)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의지는 성경에서 만물의 목적인으로 표현되었다. 창조와 보존, 통치, 그리스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중생, 성화, 성도의 고난, 인간의 생명과 운명, 그리고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의 종국적 동인인 것이다
① 은밀한 의지와 계시된 의지
"은밀한 의지"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작정의 의지를 말하며 "계시된 의지"는 율법과 복음 안에서 계시된 교훈의 의지를 말한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효과를 나타내시던가 흑은 허락하기를 원하시는 일 전체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다. 후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의무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이 신적 축복을 즐길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을 헛되게 한다는 법도를 표현해 주고있다.
② 하나님 의지의 자유
하나님에게는 필연적으로 원(의지)하시는 확실한 것들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성을 생각하실 때 자신을 사랑하시며 기뻐하지 않을 수 없으시다. 이 일에 있어서도 그는 강제당하지 않으시고 그의 내적 존재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기를 원하시는 사물과 인간을 자유로이 선택하시며 따라서 그들 생활의 시간, 장소, 환경을 선택하신다. 성서는 가장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③ 죄와의 관계에서 본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와 죄와 관련하여 중대한 문제가 일어난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계획하셨다면 역시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어떻게 설명하실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일없이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은밀한 의지와의 상호관계에서 일어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은 그가 죄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b)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전능
"하나님의 주권"은 역시 그의 의지를 행사하는 신적 권능, 흑은 전능(omnipotence)에서도 그 표현을 찾아볼수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하지 못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거짓말하는 것, 죄를 범하는 것, 자신을 부정하는 것, 등 여러 가지를 그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의지의 단순한 실천을 통하여 그가 이루고자 결정하신 컷은 무엇이든지 다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함이 더욱 정당하다. 하나님의 전능은 EL-Shaddai라는 이름에서 그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7.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의 관계를 논하시오.
'속성(attribute)'은 한 존재로 하여금 그 존재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의 고유한 특성(properties)'을 가르킨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음으로 하나님으로 하나님되게 하는 신적 특성이 된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순결한 영이시라는 것은, 영의 완전한 관념에 속하는 모든 특질들이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자의식적이며, 자기 결정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인격적인 하나님은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시자 지주이며 도덕적인 존재이시며, 그분은 한계나 제한이 없으실 뿐 아니라, 숭고함과 형언키 어려운 위엄 속에서 그의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단일하시다(근본적으로 하나님 의 본질과 특성들은 단일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하나님의 속성의 각각이 그의 실유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바, 하나님의 속성은 그의 본체(본질)와 다르지 아니하고 서로 간에 다르지 않다.
8. 성경의 증거를 들고, 삼위일체 교리를 약술하라.
A. 삼위일체의 교리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삼위 인격체)가 존재한다. 이 삼위는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이며, 각자가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를 이루고 있어, 그것은 위(인격) 밖에서나 위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삼위 일체 교리를 논함에 앞서서 물질계에는 그와 같은 존재 양식을 갖는 개체가 전혀 없는 바 육체를 가짐으로써 시공간의 물질계에 속박된 인간의 용어로는 이를 완전 설명하기에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먼저 각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삼위 일체의 교리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요약될 수 있다.
① 하나님의 본체는 유일 불가분적 본체이다.
② 상호 완전 독립된 세 실체들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실존하신다.
③ 한 하나님의 분리되지 않는 본체 및 그 모든 속성이 삼위 각각 안에 완전한 형채로 공존한다
(각 위에 전 본체).
④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신 동시에 세 분이시긴도 하시다-동등과 종속
⑤ 삼위는 그 존재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를 가진다
⑥ 상이와 구별
⑦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는 신비하나 진리이다.
⑧ 다양유추의 예증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증명해주지 않고 단지 신앙을 보강하는 의미를 가진 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7043∼7647) 제2장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상위일체 교리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한 분 하나님이 세 구별된 격위로 존재하신다는 점, 이 세 격위가 각각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점(하나님의 부분들이 아님), 이 세 동등한 격위들 간에는 위적 구별이 있다는 점" 등이다.
B. 성경의 증거
① 구약의 증거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으며(창1:26: 11:7, 사7:8)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 인적으로 묘사되었으며(창IS:7-13; 18:f-리; 19:1-22),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진다(사48:16; 63:10). 이 외에도 삼위가 다소 명백히 지시된 곳도 약간 있다(사48:16; 61:1; 63:9,10).
a. 한분 하나님에 대한 증거: 신명기 6:4
b. 삼위 하나님에 대한 증거: 상위의 구별에 대한 구약의 증거들은 비교적 희미하나 뚜렷이 이교리를 말하고 있다. 창세기1:26-2741)
② 신약의 증거
신약에서는 삼위일체를 보다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곧, 예수님의 세례에서(눅3:21,22), 예수님의 고별 강화에서(요14-16장), 예수님의 대 명령에서(마28:19), 사도의 축복에서(고후13:13), 또는 그외 구절에서(눅1:35: 고전12:4-6; 벧전1:2) 언급된 것이다.
9. 삼위일체교리 형성과정에 나타난 양대 이단을 설명하고 논평하시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룻된 사상
① 싸벨리우스파(Sabellianism): "삼위는 세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의 세 가지 양식"삼위를 단순히 신적 행위, 흑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수여에서는 성부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주장하였다(삼위를 한 위로 축소-양태론적 견해).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결국 동일한 단일 신론으로 기울어진다.
② 사모사타의 바울, 소씨니안파(Socinian), 유니태리안파(Unitarian), 근대주의자 삼위일체는 성부이신 하나님과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신적 세력으로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도 역시 하나님을 존재에서뿐만 아니라, 위에 있어서도 한분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사실상 삼위일체의 교리를 파괴해 버렸다.
10. 성령의 이중발출에 대하여 기술하라
성령이 성부로부터 만 발출하는가, 아니면 성자에게서도 발출하는가 라는 질문이 오랜 논쟁이 되어왔으나 589년 톨레도 회의에서 "필리오케(성자로부터)"라는 알을 첨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발출을 간략하게 파소이라고도 불리는데 성령의 인격적인 특성이다. 그러므로 삼위 일체의 제1위와 제2위가 신적 존재 안에서 성령의 인격적 실존의 근거가 되며, 제 3위로 하여금 아무런 분할이나 분리 또는 변화가 없이 온전한 신적인 본질을 소유하게 하는 영원하며 필연적인 행동으로 정의 들 수 있다
11. 타락전 선택설(전택설)과 타락후 선택설(후택설)을 논하고, 이에 대한 개혁화 교회의 입장을 밝히라
예정 교리는 언제나 동일한 형식으로 표현되어 온 것은 아니다. 서로 대립되었고, 지금은 병존하고 있다.
A. 타락전 선택파의 순서 -이상적
a.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사랑을 구원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멸망하도록 작정하셨다. 그들은 이 단계에서 다만 가능성으로만 하나님의 의중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b.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은 이미 선택되고 흑은 유기된자들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셨다.
c. 지금까지 세우신 계획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d.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선택자를 위하여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시되 다른 사람을 위하여는 간과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받도록 작정하셨다.
B. 타락후 선택파의 순서 -역사적-
a. 하나님은 먼저인간을 창조하기로 작정하다.
b. 그리고 그는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c. 다음으로 하나님은 일정한 수의 타락자를, 곧 정죄받은 무리를 영생 얻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간과하시어 그들 죄 때문에 영원토록 멸망 받도록 작정하다
d.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선택자를 위하여 구원의 길을 준비하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은 도르트 회의에서 개혁파 교회가 공적으로 채용한 순서이다.
12. 죽은 후 영혼이 귀신이 된다고 하는 가르침에 대해 칼빈주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라.
귀신의 기원은 벧후 2:4 과 유 6절에 보면 범죄한 천사들로 마 12:22-32, 막 3:22-30, 눅11:14-23 나와있는 컷처럼 귀신의 우두머리는 마귀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죽은 후 그의 몸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질 뿐 죽은 영혼이 귀신이 될 수 없다.
13.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 개혁화 교회의 입장을 밝히라.
(1) 계시관 : 예수님과 사도들의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적 계시의 종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사도들의 독특한 사역을 무시한다. 구속 역사 안에서 오순절사건이 이해되어야 한다. 오순절 사건의 기독론적, 종말론적, 교회론적 사건이해가 필요하다.
(단회성에 기초한 연속성)(요 20:3, 3:16 믿음장조 ; 행 2:38 회개 - 세례, 죄사함, 성령)
(2) 성경관 기록된 성경 66권을 인정하는 듯하나, 개인의 체험을 말씀보다 더 중요시한다. John Wimber 의 퀘이커적 배경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3) 신관 성령에 대한 과도한 캉조, 성령의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4) 성령론에 대한 균형상실, 교회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과도하게,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모델화 또는 규범화 하려고 한다.
예)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웃음, 뒤로 넘어짐, 짐승 소리에 대한 관용. 이것은 성령의 은사적 측면과 종말론적, 교회론적, 측면의 균형상실에 있다. " 지나치게 개인의 은사적 측면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5) 성경해석학적 문제 :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수사학적 측면에서 문제.
-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의 지나친 모델화를 강조, 치유사역, 귀신을 쫓아냄, 예언사역
- 이것들은<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과 직결되어 있다. <복음의 선포>. 오히려 치유, 축귀 등은 주변사역이다.
(6) 교회론의 문제
- 381,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내용 "we believe .. one, holy, catholic, apostolic church."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예배 갱신의 이름으로 기성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곤란하다. 기성교회에서 분리현상은 빈야드교회에 속한 목회자들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재범, "물결의 파고 '빈야드 운동', 어떤 것인가," 목회와 신학(1995.6) :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