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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화산. 높이 1281m로, 용암으로 뒤덮인 등산로가 완만하게 이어져 있다. photo 게티이미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세 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다. 모나리자가 있는 느농관, 함무라비법전이 들어선 리슐리외관, 그리고 밀로의 비너스가 있는 슐리관이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루브르의 중심인 피라미드 동쪽의 슐리전시관이다. 이집트·그리스·로마 유물 천국이지만, 프랑스 낭만주의 유화도 슐리의 주인공 중 하나다. 특히 슐리 2층 927호실은 18세기 말 프랑스 낭만주의 유화의 주된 공간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 나아가 자연 자체만을 표현한 명화들이 즐비하다.
베수비오만 그린 화가 볼레르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힘을 믿으며, 자연이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고도 밝은 세계로 이끌어줄 것이라 확신하는 사상이 바로 낭만주의다. 과학·사상·신·종교와 같은 ‘중간 단계’를 통한 만남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 직접 하나로 연결되면서 창조할 수 있는, 간단하고도 소박한 세계가 18세기 말 낭만주의의 핵심이다.
역설적이지만, 1789년 프랑스혁명은 그 같은 낭만주의 사상의 출발점이다. 이성주의·과학주의가 프랑스혁명의 동기이자 배경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혁명의 광풍이 피바람으로 변하는 동안 사상이나 과학이 갖는 한계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너무도 당연시했던 ‘평화로운 자연’에 대한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낭만주의가 불타기 시작한다. 이성과 과학에서 출발한 혁명이지만, 결론은 낭만주의다.
흥미롭게도 낭만주의는 나폴레옹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 신고전주의 양식과 결합한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구축했던 구제도(Ancien Régime)의 ‘휘황찬란’한 성형미인 로코코 양식을 버리고, 순수 민낯의 그리스·로마 세계로의 회귀가 신고전주의다. 그리스·로마가 그러했듯이, 신화에 근거한 순수예술이 신고전주의의 목적이자 탐구대상이다. 그 같은 배경하에서 보면, 슐리 1층이 신고전주의 모체인 그리스·로마 전시관, 2층이 18세기 말 낭만주의로 채워진 의미를 알게 된다.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화산(Le Vésuve)이 낭만주의 화가들의 주된 소재였다는 것을 안 것은 5년 전이다. 루브르 927호실에 들러 낭만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던 중 피에르 자크 볼레르의 작품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란 유화를 만났다. 붉은 용암이 흐르는 산과 피난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뒤섞인 그림이다.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멸망한 고대 도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걸린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별로 큰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다. 18세기 중엽부터 나폴리에 살면서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 특화한 프랑스 화가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처럼 평범하게 대했던 그림이 유럽 낭만주의 화풍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화산 폭발=낭만주의’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묘사한 벽화. 나폴리 시내 곳곳에 이런 벽화들이 있다. photo 유민호
귀족들의 ‘그랑투르’ 인증용 그림들
볼레르가 활동한 시기의 나폴리는 ‘그랑투르(Grand Tour)’ 종착점에 해당한 곳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교양과 문화적 수준을 높이던 장기 여행이 그랑투르의 내용이다. 21세기 관점으로 보면, 리버럴 아트 체험의 일환으로, 당시 영국·프랑스·독일 귀족이나 지식인들의 필수 여정이기도 했다. 그리스·로마의 문명·문화 흔적을 이탈리아에서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파생 예술들도 창조된다. 1770년 아버지 레오폴드와 함께 폼페이를 여행한 뒤 작곡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와, 1786년부터 3년간의 그랑투어 기록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도 그중 하나다. 괴테가 남긴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는 말은 그랑투어의 결산이자 정신이라 볼 수 있다. 죽음도 불사할 만큼 그리스·로마와 같은 아름답고도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볼레르의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는 그랑투르 ‘특수’에 맞춰진 그림이다. 폼페이 유적지에 들른 당대의 부자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 인증서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 그림이다.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지도에서 지워진다. 이후 흔적이 발견된 것은 16세기 말부터다. 1748년에는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과 같은 유적이 발굴되면서 고대도시의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폼페이 유적지 발굴은 그랑투어 종점이 로마가 아니라 나폴리까지 이어진 가장 큰 이유다.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여행 붐이 일기 시작할 즈음 때맞춰 고대도시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당시 여행은 엄청난 돈이 필요한 부자들만의 특권이었다. 현지에 가는 즉시 고유의 특산물이나 풍경화 구입에 나섰다. 사진이 없던 당시 그랑투르의 추억을 간직할 최대의 물적 증거는 바로 그림이었다.
화산 폭발의 의미는 사랑과 희생
한국인이 볼 때 화산 폭발의 이미지는 ‘지구 종말, 세기말 비명’ 정도로 이어질 듯하다. 필자의 어릴 때 기억이지만,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 관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끓는 용암 속에서 타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과 귀를 막았던 기억이 새롭다. ‘화산 폭발=죽음 지옥’ 정도로 해석해온 필자에게 ‘베수비오=낭만주의 주제이자 소재’라는 점이 너무도 기묘하게 와닿았다. 당연하지만, 볼레르를 낭만주의 선구자라 부르는 프랑스 화단의 해석도 도가 지나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같은 필자의 생각은 너무도 단순한 한국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프랑스·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체에서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사랑과 희생의 재확인’으로 해석한다. 화산 폭발로 인해 사람들이 죽고 도시도 사라지지만, 그 속에서 창조되는 사랑과 희생의 부활이 베수비오 화산 그림에 드리워진 진짜 코드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영화 소재이기도 하다. 최근 작품으로는 2014년 폴 앤더슨 감독의 ‘폼페이’와 2021년 나폴리 출신 감독 파피 코르시카토의 ‘폼페이 죄악의 도시’가 있다. 하지만 이전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1958년부터 5년간 무려 170편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 관련 영화가 제작됐다. 수많은 영화 가운데 1913년 제작된 무성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s of Pompeii)’은 왜 화산폭발 영화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지, 왜 베수비오가 낭만주의의 소재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모범답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
화산 폭발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남녀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폼페이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다는 것이 영화 속 핵심 메시지다. 죽고 사라진 유령 도시가 아니라, 사랑과 희생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새로운 미래로서의 폼페이다. 무서운 자연의 힘이 스크린 전체를 채우지만, 고귀하고도 품격 높은 인간애의 재발견이 베수비오 화산 관련 영화의 일관된 주제다. 지옥·죽음·폐허가 아니라 희망과 부활로서의 화산폭발인 셈이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묘사한 기념품들. photo 유민호
나폴리가 한눈에 보이는 산 정상
베수비오산에 오르기로 결심한 것은 나폴리에 온 지 일주일 만이다. 나폴리 시내를 걸어다니면 대략 30m에 하나씩 화산 폭발 관련 벽화를 볼 수 있다. 산의 얼굴은 보는 각도에 따라 전부 다르다. 자신만이 본 다양한 베수비오 모습에 기초한 화산 폭발 거리 벽화가 넘치고 넘친다. 루브르에서의 볼레르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호연지기나 신년 결의와 무관하게, 낭만주의 산실인 베수비오에 오르고 싶었다. 당초 걸어서 등정하려 생각했지만, 멀리서 보는 것과 달리 깊은 산이란 것을 알게 됐다. 높이는 1281m에 불과하지만, 용암이 길게 퍼져나가면서 등산로가 완만하게 길게 이어져 있다. 등산화나 등산복 등 완전무장을 하지 않는 한 등정이 어렵다. 자동차들이 다니는 좁은 도로를 통해 올라갈 수도 있지만, 시끄럽고 위험하다.
일단 자동차로 올라간 뒤 적당한 선에서 등산로를 찾아 내려오자고 마음먹었다. 보통 베수비오 등산의 출발은 폼페이와 함께 화산재로 사라진 또 다른 도시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에서 시작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작은 폼페이’에 해당하는 고대 도시다. 보통 나폴리에서 2.4유로 지하철을 타고와 헤르클라네움을 살펴본 뒤 10유로 관광버스에 올라 베수비오로 향한다.
베수비오에 다시 오라는 의미일까? 버스에 오르자마자 산 정상 출입이 통제됐다는 말을 들었다. 궂은 날씨로 인해 잘못하면 미끌어져 추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략 1년에 절반 정도는 정상 출입이 제한된다고 한다. 베수비오 체험이라지만, 소요 시간은 1시간30분에 불과하다. 찍는 것이 남는 시대다. 버스가 산 위로 올라가는 도중, 이른바 인증 명소에서 사진을 찍도록 배려해줬다. 산 아래로 나폴리 시내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폴리에서 보면 멀게 느껴지지만, 베수비오에서 본 나폴리는 너무도 가깝다. 화산이 폭발할 경우, 곧바로 도시 전체가 사라질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폼페이는 인증 명소의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베수비오와 가까운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도로 보면 나폴리보다도 폼페이가 베수비오에서 한층 더 가깝다. 서기 79년 폭발과 함께 화산재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가스가 유출되면서 폼페이 전체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출발 30분 뒤 산 정상 앞에 도착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 앞에는 굵은 철책이 드리워져 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한 1유로짜리 기념품 가게가 전부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모양의 기념품은 하나에 5유로다. 뒷면을 보니 ‘메이드 인 차이나’로 재료도 중국산이라고 한다. 나폴리는 유럽으로 향하는 중국발 수입품의 전방위 창고로 활용되고 있다. 유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 대부분이 일단 나폴리에 내린 뒤 분산된다. 정상 출입을 막는 사람에게 ‘날씨가 나쁘지도 않는데 왜 막는가’라고 물어봤다. 너무도 이탈리아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노동조합이 결정한 사안이다.” 이탈리아 도착 즉시 전국의 교통파업으로 인해 고생한 기억이 남아있기에 노동조합의 위력을 새삼 절감했다.
흘러나온 용암의 부산물이지만, 산은 전체적으로 검다. 베수비오 용암은 건축 대제국 고대 로마를 창조해낸 원동력이기도 하다. 21세기 콘크리트보다도 강력한 ‘포촐라나(Pozzolana)’ 탄생지가 바로 베수비오이기 때문이다. 화산 폭발이 있기 이전부터 베수비오 화산재는 초대형 건축재료로 활용됐다. 포촐라나는 베수비오 화산재와 석회, 바닷물을 조합해 만든 로마식 콘크리트다. 그 자체로 활용된 것은 물론, 벽돌과 벽돌을 잇는 강력 시멘트 역할도 가능하다. 특이한 조합비율과 다른 재료들도 섞인 비밀스러운 제조법으로 인해 21세기 현재도 재현 불가능한 고대의 수수께끼로 통한다. 포촐라나는 바닷물 속에서도 침식되지 않는 강력한 재료다. 필자도 지중해 곳곳에서 봤지만, 바닷물에 잠긴 채 아직도 활용되는 로마 항구 주변 방파제의 재료도 포촐라나다.
베수비오 정상은 직경 450m, 깊이 300m의 분화구로 이뤄져 있다. 출입이 허용된다고 해도 분화구로의 접근은 금지다. 그냥 외곽에서 빙빙 돌면서 1시간 정도 산보하는 식이다. 베수비오는 1944년에도 용암 유출이 발생한 활화산이다. 언제 다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화산폭발에 따른 인적 피해는 용암이 아니라 유독가스에서 비롯된다. 폭발 전후에 발생하는 가스가 저기압을 동반할 경우 피해자가 속출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적 장비와 예고 시스템 덕분에 가스 유출을 사전에 알고 피신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마음 깊이 공포를 숨기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나폴리타노의 운명일지 모르겠다.
베수비오의 선물, 로마식 콘크리트
정상에 도착한 지 15분 만에 베수비오 레몬과 와인 시음회 카페로 옮겨 갔다. 산 중간부분에 위치한 전문업소로, 10유로 관광버스의 또 다른 수입원이다. 시내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니 대략 산에서 절반은 내려온 듯하다. 운전사에게 혼자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얼굴을 찡그리는 듯하다가 2유로 동전을 건네주자 금방 웃음으로 변했다. 친절하게 자동차 도로가 아닌 등산로까지 가르쳐줬다. 대략 2시간 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엉성한 신발 탓이지만, 내려오는 데 3시간 정도 소요됐다. 날카롭게 각이 진 용암 길을 걸어야만 했다. 도중에 1944년 흘러내렸다는 용암 분출 현장을 만났다. 당시 1분에 10m 속도로 흘러 내려갔다고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빠른 속도다. 시간당 6㎞ 속도로, 만약 지금도 용암이 분출한다면 불과 반나절 만에 나폴리에 도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서기 79년 폼페이를 덮친 용암 분출은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화산구에서 시작됐다. 추측건대 1분에 15m 속도로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 주변에는 포도밭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 베수비오 토양은 유기물질이 많기 때문에 농사에 적합하다. 베수비오 와인은 강하고 뜨거운 맛으로 유명하다. 베수비오 와인에 빠질 경우 다른 것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출발지였던 헤르쿨라네움 주변 도시가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낙서와 쓰레기로 범벅이 된 전형적인 나폴리 위성도시다. 웃고 넘길 얘기지만, 헤르쿨라네움이 내세우는 자랑거리 중 하나로 거리의 옷가게가 있다. 어디 있는지 몰랐지만, 우연히 발견했다. 그냥 공짜로 줘도 외면할 옷들이 거리 곳곳에 걸려 있다. 전부 중고품으로, 평균 가격이 5유로 이하다. 누가 구입하는지, 어디서 저 많은 중고 옷들을 가져오는지, 수많은 옷가게 주인들을 먹여살릴 밥벌이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베수비오 아래서 만난 도시의 모습은 너무도 어둡다. 그러나 5유로 중고 옷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라지만, 찌들리거나 남을 탓하는 모습은 전혀 없다. 정반대로, 밝고 유쾌하며 친절하다. 동양인을 오랜만에 본다면서 에스프레스 한잔과 목도리까지 선물로 받았다면 믿겠는가?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눈을 들어 베수비오를 올려보자 어느 틈엔가 붉은, 아니 오렌지색 석양이 산 주변에 드리워져 있다. 서해로 내려가는 바다의 일몰에 맞선 산이 베수비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하루의 임무를 끝낸 태양이 베수비오에게 매일 던지는, 황금빛 뜨거운 일몰 인사가 산 아래서 위로 퍼져나간다. 나폴리 앞바다도 경쟁을 하듯 뜨겁게 달아 있다. 왜 베수비오가 낭만주의 징표가 될 수 있는지, 왜 프랑스 화가 볼레르가 화산 폭발 그림만 그리다가 나폴리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왜 언젠가 다시 한번 베수비오에 들러야만 하는지, 모든 답이 태양빛에 물든 베수비오 얼굴에 드리워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