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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다 씽(인도의 성자) 스크랩 인도의 사두 썬다싱의 명상[4]
초대짱 추천 0 조회 14 15.04.13 11: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도의 사두 썬다싱의 명상[4]


 

301. 사람은 자기의 존재를 완전히 파괴하여 신의 불씨마저 파괴(존재 자체가 완전 소멸되어버리는 것)할 만큼 저 자신을 끝까지 훼손할 수는 없다. 창조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창조주도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다. 창조주가 그것을 완전히 파괴되도록 놓아둘 수 있다면 그것을 지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파괴할 수도 없다.


302. 하나님은 모든 선의 원천이기에 그분은 모든 도덕의 기본이며 생명이 되시기도 한다. 하나님 없는 도덕생활은 아름답게 보일지는 모르나 돌멩이와 같아서 차갑고 생명이 없다. 하나님과의 접촉을 깨뜨리지 않는 것만이 진리요 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정체는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303. ......


304. 진정한 영적 아름다움은 한없는 사랑과 찬미와 선이다. 하나님은 항상 그 피조물에 임재 하시는데 하나님의 간섭 자체가 모든 형태의 자연계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자연계의 아름다움은 내적이며 잠재한 영적 아름다움의 반영이나 그림이다. 모든 자연의 모습은 그 어떤 심적 상황에 상응하는 것이며 그 심적 상황은 자연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제시함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꽃이나 과실, 산, 호수, 시, 산문, 미술, 음악 또는 뜻 있는 활동 등 이 모든 아름다움에 속하는 것은 참과 선의 표현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우리의 잠들고 억압된 충동에 닿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선과 진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 진가를 음미할 능력을 갖는 한계에서만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음악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로 돌아가도록 인도하기에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감수성이 있는 자들에 그 영감이 앙양되도록 도움을 준다.


305. 도덕과 아름다움과의 관계는 근본적인 것으로 진리는 양자의 원천이기에 양자는 그 속에 진리가 살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아름다움은 생명이 있는 것에나 없는 것에나 존재하기에 이것이 다른 피조물보다 속성이 뛰어난 사람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서글픈 일이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선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진리가 살고 있다.


306.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도 없다. 육체의 눈은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볼 수 있으나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려면 영에 의하여 새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의 영은 그 속에서 역사하고 그는 거듭나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가 되며 낙원이 그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307. 주님은 유다가 어떠한 종류의 인간이고 또 그가 주님을 어떻게 배신할 것인가를 알고 계셨을지라도 그를 호되게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지옥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그 자신 속에 고통의 상황을 만들어낸 상태를 의미한다. 지옥은 어떤 장소가 아닌 이유는 그곳이 장소라면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지옥에도 임재하여 계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에 이는 있을 수 없다. 지옥은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308.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나 하늘 나라인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로 하늘 나라 역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상황이 괴로울지라도 그는 하늘 나라 속에 있음을 지각하고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주위 상황을 초월하기에 그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 안에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309. 지옥도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자체 속에 있다. 그가 아무리 외면적으로 평안 속에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죄 속에 있다면 그의 마음은 지옥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가 하늘 나라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곳은 하늘 나라가 아니고 지옥인 것이다. 이는 하늘 나라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고 하나님 없는 마음에 일어나는 고통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310.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다. 또 하나님 나라는 눈물이 없고 고난도 없는 나라이며 끝없는 행복과 기쁨의 상태인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기에 참 신자는 상황의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 속에 있는 것이다.


311.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끝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생물 속에서 끊임없이 행하여지는 혈액 순환이나 호흡에서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그러한 일을 피조물의 운행 속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공기나 물, 지구, 태양, 별 등 창조주의 목적 속에 계속 불변하는 질서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312. 이브를 타락시킨 뱀은 지금도 손발이 없는 채 얼마나 기어다니고 있는가. 이와 같이 사단은 대의 명분을 잃어 그 힘을 빼앗긴 채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다. 그는 이미 손발을 잃었으므로 자신이 아무리 공포스럽거나 또는 달콤한 몸짓으로 다가올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저를 이기셨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의 커다란 몸짓에 정신을 잃고 만다.


313. 어느 가난한 프랑스의 조각가가 저가 만든 조각품이 춥고 습기 찬 까닭에 파손될 것을 우려하여 자기가 덮고 있던 모포를 둘러 조각품을 보호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자신은 얼어죽고 조각품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손수 열정으로 하는 일이나 생명 없는 것에는 그 생애를 바치면서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제 목숨을 아끼고 있다.


314. 소금 덩어리는 녹지 않고는 맛을 낼 수 없고 산 속의 눈도 녹지 않고는 메마른 평야를 적실 수 없다. 우리 인간도 의의 태양에 의하여 자기 부정과 희생으로 연단되지 않는다면 영적 기갈을 멎게 할 수 없으며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없다. 고난과 유혹을 겪지 않고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위해 일할 수 없으며 영적 진보도 이룰 수 없다. 고난과 유혹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유혹을 받지 않는 자는 짐승이거나 하나님 그 어느 쪽에 해당한다. 새는 날개를 움직이지만 역으로 날개 역시 새를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가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때 십자가는 그를 보호하여 최후의 목적지까지 인도해 줄 것이다.


315.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남을 돕는 것은 나 자신을 돕는 것이고 남을 해하는 것이 자신을 해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법칙이다. 이 봉사의 법칙이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황금율이다.


316. 옛 사람들은 오늘날의 미개한 야만인과 같았다. 그들은 영적 욕구를 의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목적 의식만을 가져 하나님 대신 해, 달, 별 등의 피조물을 숭배하게 되었다. 히브리 민족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민족도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육체의 요구나 이익을 원하고 악을 두려워하는데서 보이는 것을 형상화한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 후 저들은 신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 제물과 희생을 바쳤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여 선 또는 악의 영과 조상의 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들의 안계가 넓어짐에 따라 영과 육, 원망과 욕구 전부를 만족시킬 영적 실재자를 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저들의 영적 요구와 수용력에 따라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 분이 예수시다.


317. 옛 사람과 지금의 사람 사이에는 생활 방법의 차이가 있듯이 사고의 차이도 있다. 인간 본래적인 욕구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 욕구의 수단은 달라졌다. 신은 바로 이 부분을 만족시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점차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점점 더 뚜렷한 계시를 인간에 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옛적보다 지금은 더 많은 선과 악의 혼란 속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가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기에 이는 곧 풍족한 지성과 그러나 더 부패한 인간의 심성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상황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예전의 방법과는 달리 모든 사람과 모든 시대의 수용량의 발달에 따라 더 진보된 계시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저 옛날 선지자로부터 그리고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지금은 우리 속에 계신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그러나 진리는 실존자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국민이 나타나도 실존은 그대로 존속한다.


318. 각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신앙 경험이나 지식으로 신의 실존을 이해하기에 남의 것이 합해져야 더 온전한 실존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실존의 모습은 여러 사람 중에 한 사람 또 여러 진리 중에 한 부분으로 제한이 되어 각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것에 매료되어 다른 진리는 하찮게 취급되어 버림을 깨닫지 못한다. 한 진리는 그 근본에 있어서 항상 동일하나 각 사람의 상태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여러 사람이 각기 여러 색깔의 안경을 끼고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은 여러 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각자 보이는 대로 그 사물의 색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각자가 자신의 이성으로 신앙을 바라볼 때는 각자의 성질 여하에 따라 여러 빛깔과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그것의 원래 모습은 위로부터 참 빛이 비췰 때에야 비로소 그 형태는 어둠 속에서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319. 처음에는 우리가 멀리서 사물을 보듯 작고 어렴풋이 보여서 그 진정한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참고 한 발자국씩 주님과 교제하며 그 앞으로 나아갈 때 아주 가까이서 사물을 똑똑히 보듯 이해가 증진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처음에 비해 많이 진보된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멀리서 본 사물을 표현하느라 진리를 잘못 인식한 채 주장하는 어리석음의 때가 있었다.


320. 사과나무를 본적이 없고 오직 씨만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작은 씨 속에서 그렇게 큰 사과가 열리리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종자에 필요한 조건이 구비되면 자라서 숨어있던 참 성질이 나타나 완전에 도달한다. 신자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처음에는 숨겨져 있기에 모든 일에 불분명하나 점차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자라 그 속에 숨은 나라의 비밀이 겉으로 나타나는 생활에까지 자라난다.


321. 나무는 공간을 향하여 자라지만 중력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지혜나 이해력 등은 세상이라는 육체 속에 갇혀있기에 한계가 있으나 이 육체를 벗는 영의 세계에서는 무한대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보다 저곳은 더욱 뛰어나고 완전에 도달케 되는 것이다.


322. 다른 사람을 떠나 고독 속에 홀로 활동하고 있는 사상가 중에는 종종 이미 그들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극히 국한적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극히 변화가 많은 박물과 같은 곳이어서 그 물건을 본 자마다 서로 자기의 관점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그 지적 시력에 결함이 있어서 영적 경험의 깊은 체험이 없는 채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 자기의 사상으로 진리를 색칠하여 그릇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모두 목표로 삼는 실존은 한 가지이다.


323. 육체의 감각이나 영혼의 지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 양자 모두 영혼과 외부와의 통역자로 활동하는 것이다. 과자의 단맛이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것같이 감각이 느끼는 것도 감각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 몸 자체로 사는 것이 아닌 이유는 두뇌와 신경 계통은 그 자체가 사상이나 이상을 지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관이라 부르는 이 기관의 활동은 다만 영혼의 도구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사상은 손발이 있어서 우리의 생활을 변하게 한다.


324. 우리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속 사람과 의식의 세계가 몸과 두뇌보다 훨씬 넓기 때문이다.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해를 초월한 이상의 것은 아니고 깊이 사색하면 알 수 있는 당연한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직각을 통하여 깊은 사상이 문득 마음에 느껴질 때가 있다. 이는 누가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고 배워서 가진 것도 아니다. 또 감각을 통해서 오는 이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얻을 수 없다.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볼 수 없는 영적 세계와 접촉하고 있어 그 빛이 비록 우리 속에서 보거나 의식하지 못해도 속 사람에게 비친 것이다. 어떤 진리는 영적 세계로부터 우리의 내적 지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스며든다. 이는 경험으로서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는 희미한 거울로서 보고 있다.


325. 개미와 벌은 저들 작은 세계 속에서는 부지런하고 영리한 종족이다. 그러나 저들의 세계를 넘을 때 더 우수한 동물과 인간을 본다. 저들은 겨우 작은 저들의 척도만을 가지고 남의 생활과 성질을 잴 수 있을 뿐이다. 이같이 우리도 영계의 최고 영적 존재들과 비하면 하등 차원 속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미를 완전히 알지 못하듯 저들도 우리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와 저들의 세계를 완전히 아신다.


326. 생물과 무생물이 창조되기 전에 공간이 있었다. 우주가 만약 멸망해도 이 공간은 짙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멸망하고 공간만 비며 짙어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물질이 그 자체의 힘으로 공간 중에 나타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생명 있는 조직체가 생명 없는 물질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의 질서와 구성을 발견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을 아는 무한한 실존자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유형 무형의 양자를 창조하고 이것을 공간 중에 충만케 한 것이다.


327. 신 밖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주가 만약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우주는 피조물이어야 한다. 신이 존재물을 창조하였다면 그때 신 안에 한 변화가 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불변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이 가운데 발견된다. 즉 우주가 존재하도록 출생하기 전에 신의 지식 중에 존재하였다. 외적으로 존재하거나 지식 중에 존재하거나 그에게는 한 가지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객관적으로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나 한 편으로는 그에게서 나와 그 안에 있고 영구히 그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 계속 그로부터 유지되기 때문이다.


328. 하나님의 영이 물 표면을 덮고 있었다. 그래서 무수한 피조물의 종족이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 이 같이 하여 더욱 주의 영은 무한한 공간 중에 사람의 영혼의 위를 날개로서 덮으셨다. 신만이 위대하고 영광된 자신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아신다.


329. 신은 창조자이나 악의 본질은 악의 힘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신은 모든 영혼의 창조주이시나 인간 속에 있는 타락한 성질은 그들의 자유의지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신은 죄와 악을 짓지 않으셨다. 신은 다만 저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을 뿐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서 악한 성질과 영적 병을 영원히 제거하고 이것을 기록하고 온전케 하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죄의 뿌리가 제거될 때 모든 피조물에게서 악의 결과는 소멸되고 다만 슬펐던 경험의 회상이 장래 생활에 죄에 대한 큰 경계를 생각게 할 뿐이다. 무엇이나 신의 성질과 속성에 거스르는 자는 신의 지배 하에 영구히 존재하기는 불가능하다. 종국에 선으로 변화되거나 소멸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된다.


330. 사람들은 항상 과실, 꽃, 냇물, 호수, 산등과 같은 자연의 미를 보며 애착을 가질 줄은 알지만 그 배후의 창조주를 발견하고 느끼지는 못한다. 우주가 이같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 원천인 신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가 주신 선물이 이같이 달콤하고 매력적이라면 그의 임재는 그 얼마나 즐겁겠는가.


331. 잔잔한 수면에 물결이 일 때 우리는 그 가운데 비친 얼굴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없는 것같이 우리 마음 속에 세상의 물결이 잔잔해지기까지 영혼의 진상을 볼 수 없다. 고요한 묵상 중에 자신의 무력함과 죄성을 느낄 수 있다.


332. 마음이 고요하고 세상 혼란에서 떨어져 있으면 지남철이 북극에 끌리듯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끌리어 그에게 향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성정은 무한한 사랑과 성결에 영향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 치고 하나님 없이 산 사람은 없다.


333. 기독교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모든 종교는 의식과 교훈에 기초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토대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에게 자기 손으로 써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그 자신이 저들과 늘 함께 있고 그 안에 있고 그들에 의하여 그의 사업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나는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주님 외에 어디 있겠는가. 오직 신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은 오늘날까지 그 백성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후에도 일하시면서 만사 만물에 계실 것을 우리는 안다.


334. 그리스도는 단 6시간 뿐 아니라 전 생애를 십자가 위에 있었다. 만약 청결한 사람에게 불결한 물과 때는 견딜 수 없고 선인에게 악인과의 교제는 몇 분간이라도 견디기 어렵다면 하물며 거룩한 이가 33년 동안 죄인과 함께 있는 생활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죄 많은 인간에게는 이 수난의 고통을 측량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십자가의 비결이 이해된다면 신의 놀랄만한 사랑 즉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알 수 있고 그가 사랑의 화신으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죄악된 세상에 오신 것을 알 수 있다.


335. 그리스도의 고통은 특히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받으신 신의 고통이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관계와 결합에 의하여 신 안에 살고 있다. 신은 그가 창조한 자와 산 결합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고통의 감각을 지으신 신이 자기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이었다.


336. 영원 전부터 보이지 않던 한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그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 죄인을 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은 끝이 아니고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과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것만이 고통이요 죽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337.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 두 가지 세계가 여기 모여 있었다. 곧 모든 나라와 여러 지방 사람들이 유월절 절기로 함께 모여 마치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함께 모여 서서 자신들의 죄의 입증자가 된 것처럼 영의 세계에서는 천사들이 거기 함께 있어 그들의 죄가 심판 당하는 것을 증거자로 보고 있었다.


338.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육체로 다시 부활하셨다. 육체는 상하였으나 하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죄도 흠도 없기에 죽음을 정복한 후 영광의 몸으로 변하여 신과 함께 그 보좌에 앉으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받은 그 상처는 영광에 들어간 그 영체에도 영광스런 흔적으로 남아있고 구속받은 자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그의 한없는 사랑을 상기케 한다.


339. 신은 영이지만 영 뿐 아니라 생명 없는 물질도 창조하셨다. 신이 그 본성에 관계없는 물질을 만드셨다고 해도 신이 그 물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이 영이므로 영이 아닌 물질을 창조할 수 있다면 그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육을 가진 몸을 만들어 이것을 영광있는 영체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340. 우리는 깨기 위하여 잠드는 것 같이 부활하기 위해 죽는다. 밤이 만물을 덮을 때 피곤과 무기력 중에 우리는 잠들지만 아침에는 상쾌함에 넘쳐 일어난다. 이같이 우리는 쇠약과 부패 중에 죽으나 생명과 영광 중에 부활하여 죽음도 죄도 없는 생명과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


341. 사람은 영혼이 육체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도 육체를 입는 것은 그리 어렵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에게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이 육체를 입은 것이 무엇이 불평의 대상이 되겠는가.


342. 기독 신자의 힘은 신과의 교제에서 나온다. 이것이 영적 양식이다. 보상을 바라는 것만으로는 고통을 참고 인내할 수 없다. 인간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힘으로는 신의 완전에 이를 수 없기에 우리의 신앙은 신의 도움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여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 우리를 도우신다.


343. 신의 속성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신과의 교제를 즐겨 원하는 요구를 가진 자들을 위해 존재하신다. 이는 맛있는 음식의 맛이 그 물건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맛을 보는 사람을 위한 것과 같다. 신은 사람과의 교제를 계속하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으므로 실재를 지각하는 힘과 신을 즐겨하는 능력까지도 사람에게 구비하여 주셨다. 이것이 영적 지각이다. 이 영적 지각은 사실과 허위,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시금석으로 양심 속에 넣어져 있다. 인간은 이것을 죄로 인해 잃어버렸으나 신의 은총으로 깨어날 때 그는 자신의 일상 경험 속에 신과의 교제를 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이 경험이 있다면 세상의 어떠한 논리와 철학과 증거로 그를 설득하려 해도 그의 사상은 결코 흔들림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논리와 철학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실재의 지식이 마음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좋은 맛을 알기 위해 필요한 식별력은 책 속에 있지 않고 혀끝의 맛의 실재에 있기 때문이다.


344. 히말라야 산 중에서 벌거벗은 채 구멍에서 사는 한 들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과자를 먹어본 일이 없고 본 적도 없었다. 그가 과자 한 개를 받고서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고 있다가 먹어보고는 놀라며 기뻐했다. 맛보기 전에는 맛이 있는지 없는지 그에게 관계가 없었으나 이 때도 좋아하는 맛의 감각을 느끼는 혀는 그에게 있었다. 과자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나 그 맛의 성질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는 이유는 그 맛을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같이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실존은 저들에 떠나 있는 상태이지만 신의 실재를 지각하는 힘은 그에게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345. 사람이 신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죄로 인해 그 지각이 죽은 까닭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신다. 이런 후에도 벙어리와 같이 그 기쁜 상태를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생활과 행동이 하나님의 실재를 계속 증거하며 그 맛을 누리는 것이다.


346. 로마 시대에 사람들은 맹수와 죄수와 싸우게 하는 잔인함으로 그 마음이 물들어 있었다. 이 때 기독 신자로 테레 마커스라 하는 은자가 있었다. 그는 수난자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바 이 야만적인 행위를 종식시키려 하다가 성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 당시 하찮은 것이었으나 후일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그 잔인한 풍습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 신자가 가진 놀라운 힘인 것이다.


347. 지식은 상상과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나 참된 사실(경험)에는 근거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때로 하늘에서 오는 것 같으나 또 지옥의 반사일 수도 있다. 이 지식은 때로 사람의 오해와 착각에 의하여 곤란을 당하게도 한다. 이성과 지식은 때로 성서를 이해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하나 한 편으로는 성령의 계시로 된 성서의 깊은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껍질을 자세히 조사한다. 예를 들면 문제와 시일에 대하여, 사건과 저자의 특색을 조사하고 파악하며 정작 중심 핵이 되는 실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서있는 자는 언제 누가 복음서를 썼는가 하는 점등에는 관심이 없고 실존과 친하는 것에만 애정을 둔다. 이 진리의 증거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이나 논리적일 필요는 없고 설명을 요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것에 정력을 쏟을 필요는 없다. 진리는 낡고 새로운 것이 없이 예전부터 영원한 까닭이다.


348. 일을 하는 노동자의 먹는 것은 쌀 우유 야채 같은 단순한 것이므로 저는 항상 건강하지만 상등 요리 식사를 하고 사무소와 서재에 잠겨있는 사람은 소화 불량과 비만에 걸리기 쉽다. 이와 같이 단순한 신앙의 사람은 단순한 영의 식물을 먹는다. 그들은 이성과 지식보다는 성령에 의지해 영적 직관에 의해 신앙을 유지한다. 이성과 지식은 매우 유혹적이고 매력이 넘치기에 쉽게 말씀을 이해하고 감동을 받기 쉬운 듯 보이지만 이로 인해 영은 쇠태하고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신앙을 유지하게 되어 결국은 사망에 이른다. 말씀을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요 신앙에 힘이 되지만 그 지식이 선과 결합하지 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되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를 가리는데 쓰이게 되어 결국은 독이 되어버린다.


349. 우리는 성경의 적용을 너무도 단편적으로 하기에 때로 실수를 많이 하면서도 그것을 모른다. 만일 탕자가 직접 아버지께 갔다는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주장하기를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것도 중간의 중재자가 필요 없다고 한다면 이는 겉으로는 맞는 듯 보이나 사실은 부분적으로 껍데기만 옳을 뿐 그 내용물은 틀린 것이다. 성경의 한 말씀 속에는 무수히 깊은 뜻이 있는데 그 껍데기만 보고 또 부분적으로만 보고 그 의미의 진정한 뜻을 놓치고 잘못 적용시키는 사례가 허다하다. 탕자는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는 자이기에 중재자를 경험한 자와 같다. 비록 그의 생활이 비참하게 되었을 때 그는 지난날의 경험을 상기하고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다. 이런 자는 중재자가 이미 그 마음 속에 있기에 그도 역시 중재자에 의해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없는 자라면 새로운 경험으로 중재자를 만나야 아버지께 갈 수 있다. 결국 양자 어느 것이든 중재자 없이 아버지께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350. 성경은 지식의 책이 아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사도들은 성경의 주요 사항을 단계적으로 분류하여 더욱 뛰어난 해석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단순하고 지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문체의 형식이나 첨가도 없이 그대로 기록하였다. 우리도 이것을 읽을 때 성령의 도움으로 단순한 직관에 의해 읽는 법을 배우고 지식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


351. 그리스도의 선구자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한 말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땅의 고통이나 번민이나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과 분리되는 일이나 지옥 그 자체도 다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죄의 회개 없이 분리와 파멸에서 건짐을 받지 못한다. 마음 속에 천국을 얻고 싶으면 자유의지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면 성령은 새 생명을 주시고 마음 속에 천국을 열어주신다 회개는 신앙의 근본적인 것이다.


352. 그리스도는 행한 것을 말하고 말한 것을 행했다. 그는 증거와 모범을 보이지 않고는 일생 중에 어떠한 교훈도 말하지 않았다.


353. 어린이는 저들의 요구를 표현할 수 없으나 더듬는 말로 뜻을 나타내려 하며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눈물로 그 소원을 호소한다. 발로 걸을 수 없을 때는 손과 무릎으로 기어 어머니 무릎에 가서 먹을 것과 깊은 사랑을 받는다. 저들을 벌하려고 책망하거나 때리면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달라붙는다. 참으로 우리가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어린애와 같이 되어야 한다.


354. 유리 뒷면에 수은을 바르면 자기 얼굴을 반사하는 거울을 만들 수 있으나 수은이 없으면 유리는 투시된다. 이같이 우리 생명의 배후에 자기를 세우면 우리는 자기의 반영만 보게되고 자기를 제거할 때는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355.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쁨에는 두 가지의 것이 있는데 한 가지는 그 기쁨으로 더욱 영적인 나라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이런 합리적인 기쁨은 필요한 것이요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달픈 삶에 휴식을 취하여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빛이 강하면 눈이 상하나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어둠에 있으면 그 영혼이 지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쾌락적인 기쁨이 있는데 이는 우리를 창조주에게서 떠나게 하고 더욱 자신의 안락만을 취하게 하여 눈멀게 만든다. 이는 영적인 행복을 찾는데 방해가 되고 우리 마음을 미혹하여 병들게 하고 귀신의 불빛을 쫓아가게 한다.


우리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데는 중용이 필요하다. 한 쪽에 너무 치우치든지 일정한 한도를 넘는 것은 오히려 신앙에 방해 요소가 된다. 추위나 더위나 도를 넘으면 해가 되기에 보통 온도에 있는 것이 필요하고 기분이 좋다. 너무 낮은 음은 들리지 않고 답답하고 또 너무 높은 음은 귀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적당한 범위 안에서는 음악적이요 유쾌한 음이 된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정도에 맞는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자기의 한도를 넘는 너무 높은 곳을 일시에 올라가려는 욕심보다 지혜로운 것이다. 그러나 또한 신앙은 자라지 않으면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추락하기에 너무 높은 이상은 아닐지라도 한 단계씩 높은 곳을 이상하는 것은 필요하다.


356. 과학자나 철학자나 지식자는 모두 물질이란 티끌에 가리어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이나 물질 저편의 다른 세계는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들은 인격을 형성하고 있는 육적 영적 요소가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줄로 안다. 그들은 오관에 관계되는 사실에만 치중하기에 그들의 사고에는 한계가 있다. 저들은 어떤 범위 내에서의 과정은 설명하지만 그 원인은 설명하지 못한다.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되는 과정은 해결하지만 원인은 설명하지 못하기에 혹 넷보다 많을 수 있는 가능성은 검토할 수 없다.


둘과 둘의 밀알은 넷이지만 그 네 개의 밀알을 심으면 수 백 수천의 밀알이 되는 것은 취급하지 못한다. 곧 네 개의 밀알 속에는 이미 수 천 수백의 싹이 존재하는 것에는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싹이 있는 곳에 식물은 항상 숨어 있다가 정한 때가 오면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넷이라는 숫자 속에는 수천의 수가 존재하고 또 둘과 둘의 합은 넷 이상이라고 결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왜 나오느냐에 대한 것은 설명하지 못하고 또 어떤 생명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357. 신앙인 중에 어떤 이는 세상을 황폐케 만드는 악한 자는 벌을 받아 격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용서와 이해와 돌이킴에 관한 것은 오히려 악에 더욱 대담하게 하는 방종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거하는 편이 고치는 편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만약 고통과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신은 약에 고치는 특성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은 어느 악한자라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지독한 악을 행하는 자를 볼 때 우리 마음은 그를 자기 곁에서 제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그를 고치고 싶은 것이다. 크리슈나는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선한 자를 구원하고 악한 자를 멸하기 위함이다'고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358. 사람은 물에서 나는 독인삼 같은 존재이다. 이 식물은 건조한 땅에서는 해가 없으나 습지에서는 독이 있다. 사람도 악한 환경이나 불량한 상태에 있으면 악에 감염될 우려가 있으나 하나님과 친할 때에는 거룩하고 순진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이름을 붙여주시는 것을 성경에서 본다.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인다는 뜻은 인간을 창조하신 이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고 그를 용납하며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와 함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모르기에 사람이 지어준 이름에는 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 나는 스스로 있는 자 ( 여호와 )'라고 말씀하신 것 외에는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


359. "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히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는 이 땅과 하늘에서조차 진행되는 인간의 진보의 과정이다.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자도 하늘에서 또한 씻기고 가르침 받고 더 나은 상태를 향하여 진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의 정지는 곧 부패와 멸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종국은 있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히 될 때 더 이상의 자극은 필요 없고 목적이 달성되어 생명의 원천이요 생명의 생명인 사랑은 영구히 보존된다. 그때는 떨어지는 것이 없다.


360. 사람이 탐색과 실험으로 신체에 힘이 나고 장수하는 방법을 얻는다면 하물며 영적 생명의 근원 속에 영원의 생명과 강건의 힘을 얻지 못할 리 없다. 물질계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이 영계도 다스리시는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의 생명을 얻은 때 그전까지와는 달리 온전을 향한 진보는 속도가 붙을 것이다. 이 땅위에서도 역경과 장애를 뚫고 진보를 거듭한다면 이 땅의 제약을 벗는 하늘에서는 그 진보가 얼마나 빠르겠는가 에덴 동산은 진보와 정지를 결정하는 시험무대였다.


361. 우리의 지혜가 진보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기에 우리는 충분히 지혜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랄 수 있다. 이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의 것을 받는 것은 물론 깨달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감추지 않고 방해하지 않으시나 인간이 영의 눈이 멀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 부여한 자유의지는 그것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라는 것인데 인간은 자꾸 기계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 자유의지를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계처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팔을 벌려주기를 바란다. 이러고서 어디 인간이 되겠는가.


362. 우리가 신같이 되면 오히려 신을 반역하겠는가. 신같이 되지 못하였기에 반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같이 완전에 도달하면 이미 반역의 성질은 소멸되는 것이다. 만약 반역하려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 완전이 아니다. 더욱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에 충만함으로서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무한한 것이 된다. 이 사랑의 화신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같이 완전케 하려는 신의 목적인 것이다. 이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하다. 아직 날개 없는 병아리가 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날을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조금씩 주어진 그 때의 영적 운동에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병아리가 아무리 빨리 날기를 고대한다 해도 그것은 사육사에 달린 것과 같이 우리의 신앙도 거시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363. 종교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인증하려는 자연적이며 보편적인 하나의 요구이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전심을 다하여 경배하며 전능하사 영원토록 계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생명의 무한한 원천인 그분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의 제 1원인이 되는 실제 그것이다.


364. 피조물은 신 자체는 아니나 신을 떠난 독립적 존재도 아니다. 신의 임재가 곧 모든 우주에 있는 것들의 생명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고 활동하고 존재하고 있다.


365. 고행자와 헌신자들 중 '요-가'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 요가가 일정한 자세를 취하고 앉아 숨을 끊고 콧등을 응시하면서 명상하는 것은 요가 법식의 결점이다. 이같이 하여 저들은 황홀 상태에 빠지고 그 가운데서 거꾸러진 세계를 본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 진리를 찾아내기 보다 기만당할 염려가 있다. 자기의 코끝을 응시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366. 불교가 말하는 열반이라는 것은 선하든 악하든 모든 욕구를 소멸시키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 욕구는 모든 고통과 번민의 원인이기에 그것만 인간이 뿌리칠 수 있으면 열반의 상태 곧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불교도들은 말하기를 좋은 욕구라 하더라도 그 내용을 면밀히 살피면 자신의 이기적인 기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어떤 선한 잃을 할지라도 그 속에는 자신을 기쁘게 하려거나 보상을 바라는 목적이 있기에 좋은 욕구라도 사악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결코 채울 수 없는 삶에서는 결국에는 갈망과 번민만 만들어 내기에 그것마저 제거하는 것이 곧 열반이라 한다.


그러나 선다싱은 다르게 말한다. 사는 자는 지각없이 살 수 없는 것같이 욕구 없이 살 수 없다. 존재가 있다면 욕구는 생명과도 같이 항상 따르므로 감각이 있는 곳에는 그 욕구는 일어나는 것이고 그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영과 육의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키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다. 만약 욕구를 완전히 죽인다면 욕구를 가진 생명까지 죽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욕구를 죽이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파괴인 것이다.


367. 욕구와 존재를 창조하신 이는 욕구에 따라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재료를 미리 마련해 두셨다. 만약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재료가 없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기갈 시에 물을 준비하신 것과 같고 굶주린 자를 위해 양식을 마련하신 것과 같다. 또 누구든지 고통 속에서는 그것을 피하려는 욕구가 있는 것을 보아도 신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욕구를 그 마음에 넣은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슬픈 자는 그 상태를 피하여 기쁨의 상태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모든 욕구를 버리려는 그것조차 또 하나의 욕구인 것이라면 인간은 욕구 속에서 영원히 탈피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욕구를 버리려는 것은 불을 가지고 불을 끄려는 것과 물을 가지고 물을 말리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다.


368. 창조자가 우리에게 영적 육적 지각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보이는 것에도 관계가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다른 피조물과 우리가 관계가 없다면 그는 우리에게 영적 물질적 실재와의 친밀한 결합과 지각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와 이에 응할 많은 재료가 주위에 있다는 것은 창조자의 높은 계획을 보여주는 동시에 창조자의 목적과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자가 준비한 것을 취하려는 욕구를 모두 버리는 것은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재료들을 사용하는데 적당을 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369.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채울 재료가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아울러 따가 오면 그 욕구는 만족될 것이므로 영혼의 갈망은 그 만족의 예언처럼 미리 증거되는 창조주의 계시와 같다. 우리 생의 걸음을 따라 갈 때 더하는 것은 불안보다는 욕구의 증가이다. 왜냐하면 불안 속에는 욕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을 처리하기보다는 욕구를 처리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다. 불안은 욕구의 결핍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간다면 선하신 신은 그 계획에 따라 더하여 가는 욕구를 차츰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는 꼭 이 세상에서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은 이 세상보다는 저 하늘이 더 본질인 것이다. 우리의 욕구가 아무리 크다해도 그것을 부여하신 자가 그 욕구를 주신 것이기에 능히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악한 욕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370. 어떤 행승이 검정 담요를 두르고 쥬나이드의 승원에 들어갔다. 그 이유를 물은 즉 " 나의 신이 죽은 때문이다 나는 내 육체적 자아가 신의 진리 표현임을 모르고 그것을 못되게 산 때문에 내 몸을 죽인 것은 곧 신을 죽인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371. 이기심을 제하고 모든 죄에서 나오는 사욕을 멸하는 것은 자기를 멸하는 참 의미는 아니다. 죄와 세속에 대해 죽고 생명에 들어가 영원히 신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자기를 소멸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요 실존이다 곧 죽는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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