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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의 꿈
임회숙
가슴이 요동을 쳤다. 하지만 손은 난쟁이 인형을 거머쥐고 있었다. 화단에 놓여 있는 발그레한 난쟁이 인형을 주머니 속에 감추고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마. 아무 일도 없어. 마을을 향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길모퉁이를 돌아 아스팔트 길로 접어들었다. 난쟁이가 있던 빨간 집 지붕이 손톱만 하게 보였다.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그러자 등 뒤에서 들려오던 내 발자국 소리도 사라졌다. 뒤돌아보지 마. 아무 일도 없었어. 길을 보며 걸어. 하나, 둘, 하나, 둘. 장단을 맞춰야지. 도로를 건너 언덕길로 내려섰다. 버스 한 대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출발하고 있었다. 버스가 사라지자 오르막길로 접어드는 독일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멈추지 마. 걸어야 해. 독일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저녁노을을 받아 노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순기는? 짓 물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시나 뭐 하노? 대답이 없자 엄마가 방문을 열었다. 순기 왔나? 되묻는 엄마에게서 생선비린내가 났다. 나는 대답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없으면 없다고 하던가. 엄마는 혼잣말을 하고 부엌으로 나갔다. 팔다리를 움직여.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었다. 주머니에 숨겨 두었던 난쟁이 인형을 꺼내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스락거리는 파카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 생리혈흔이 묻은 팬티를 벗고 새 팬티를 꺼내 입었다. 벗은 팬티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팔다 남은 아까무스 지지는 소리가 목욕탕까지 들렸다. 가족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 옆에 잠든 순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코를 골았다. 할머니와 엄마가 잠든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속에 있는 난쟁이 인형을 꺼냈다. 가로등 불빛이 방으로 스며들었다. 난쟁이 인형을 창문 쪽으로 들어 올렸다. 난쟁이 인형의 입술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그만 자야지. 그리고 꿈을 꿔야지. 빨간 모자의 난쟁이 인형은 허공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독일 할머니는 난쟁이 인형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가소 마. 엄마의 크고 두툼한 입술이 연방 실룩 거렸다. 해질녘이면 가끔 물건리 어판 장으로 장을 보러 오는 독일 할머니가 함지 앞에 서있었다. 떨이 해 주이소. 엄마는 펑퍼짐하게 늘어진 콧잔등에 가느다란 주름을 잡아가며 웃었다. 너무 많다. 두 식구 먹을 만큼만 팔아라. 독일 할머니도 볼 가득 주름을 잡아가며 흥정을 했다. 할매요, 그러면 두 마리 삼천 원, 됐지요? 엄마는 생선 두 마리를 들어 올렸다. 곁에 앉아 있던 나는 검은 비닐봉지를 뽑아 들었다. 그래 하자. 흰머리의 할머니는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냈다. 고맙습니다, 할매. 독일 할머니가 엄마의 손에 돈을 건넸다. 아이고 어쩌겠노. 이거는 우리가 먹자. 엄마는 독일 할머니가 건넨 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나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사라지는 독일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배가 먹성도 좋게 생겼더라마는 손바닥만 한 아까무스 두 마리 누구 입에 붙일라고. 곁에 앉은 동수 엄마가 생선 내장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있는 사람들이 더 하다고 독일 마을에서도 제일 큰 집에 산다 하든대. 동수 엄마가 멀어지는 독일 할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뭐 아끼려고 그러겠습니까? 자식도 없는 두 늙은이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요. 엄마는 벗은 고무장갑을 손에 꿰며 그렇지 않겠냐는 듯 말했다. 하기야. 서양 사람들은 고기도 접시에 한 마리씩 놓고 포크로 이래 찍어 먹는다면서? 손시늉까지 해 가며 엄마를 위로하려던 동수 엄마의 얼굴빛이 샐쭉해졌다. 안나 엄마 네 고향에서도 그래 먹는다면서? 손을 감아 들인 동수엄마의 눈빛이 엄마를 살폈다. 엄마는 펑퍼짐한 콧잔등에 실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그녀들의 수다는 언제나 엄마의 고향으로 향했다. 베트남 어딘가에 있다는 엄마의 고향은 물건리 마을 아낙들의 수다거리였다. 쉼 없이 들었던 엄마의 고향 이야기 중 내가 기억하는 것은 메콩델타와 아오자이 뿐이었다. 흰머리의 할머니가 독일 마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던 그날도 엄마는 동수 엄마의 수다 속에 있는 베트남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화장실 물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손에 난쟁이 인형이 들려 있었다. 순기는 온몸에 이불을 감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벌써 해가 떴어. 자리에서 일어나 난쟁이 인형을 가방에 넣었다. 발아래 너부러진 이부자리를 걷어 올렸다. 생리혈흔이 잉크자국처럼 번져 있었다. 순기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이불을 걷어 목욕탕으로 갔다. 맨 날 그게 뭐고? 가시나가. 좀 조심성이 있어야지. 변기에 앉아 일을 보고 있던 엄마가 내 엉덩이를 '툭'쳤다. 한 달에 한 번 몸속에 저장되었던 영양분이 몸 밖으로 빠져 나와 팬티를 적시고 이불을 적셨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생리는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잊지 않고 내 몸 밖으로 흘러 나와 흔적을 남겼다. 생리혈흔이 묻은 자리에 비누를 묻혔다. 이불자락을 즈려잡고 문지르자 선명했던 자국이 옅어졌다. 짙은 붉은색이 옅은 선홍색으로 변하는 동안 코끝으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불에 남아 있던 혈흔을 헹구어 마당에 있는 빨랫줄에 널었다. 멀리서 불어오던 바람이 이불을 너풀거리며 지나갔다. 불룩한 배에 안경을 쓴 수학 선생님은 유리수와 무리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숫자들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놓고 그것들을 서로 더하거나 빼는 동안 칠판은 흰색으로 변해갔다. 칠판 가득 들어찬 숫자들 위로 난쟁이 인형이 풍선처럼 떠올랐다. 빨간 모자를 쓴 난쟁이 인형은 선생님이 눌러 쓴 숫자 위를 폴짝거리며 뛰어다녔다. 난쟁이 인형은 필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지나 내 노트 위로 날아왔다. 종이 울리자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수업시간 내내 인형을 쥐고 있던 왼손이 축축했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바지에 문질렀다. 인형이 들어 있어 불룩해진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빨리 집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 집으로 가는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인형을 쥐고 있었다. 네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버스가 언덕으로 올라서자 독일마을 이정표가 보였다. 삼동리 정류장까지는 세 코스를 더 가야 했지만 독일마을 정류장에서 일어났다. 생리통이 시작되던 날 처음으로 독일마을 어귀까지 가 보았다. 그날 처음 빨간 지붕은 붉은색 기와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문이 열리고 길 위로 내려서는데 독일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할머니는 구슬 달린 지갑을 손에 들고 버스에 올랐다. 잠시 후 버스가 멀어졌다. 언덕을 올라가야지. 난쟁이 인형을 쥐고 있는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독일마을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인기척이 뜸한 독일마을은 언제나 그림 속 풍경 같았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멈춰버린 듯 조용했다. 붉은 벽돌 길이 내 발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안녕 안나? 벽돌 길의 인사를 들으며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디뎠다. 마을의 세 번째 집 테라스 앞으로 다가가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지나가면 돼. 세 번째 집 지붕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테라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산타할아버지 수염을 한 독일 할아버지가 테라스에 나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할아버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테라스 밑에 있는 조그마한 화단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빨간 모자의 난쟁이 인형이 서 있던 자리는 폭파인 채 텅 비어 있었다. 이젠 초록 모자야. 초록 모자. 어서. 빨리. 화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가슴이 답답했다. 심장이 달아나야 한다고 말하는 듯 했다. 하지만 난쟁이 인형을 거머쥐고 싶은 손은 심장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낮은 담장 안에서 빙긋 웃고 있는 난쟁이 인형을 주머니 속에 감추고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마. 아무 일도 없었어. 길을 보며 걸어. 하나, 둘, 하나, 둘. 장단을 맞춰야지. 잰걸음으로 돌아온 집 마당에는 아침에 널어 두고 간 이불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지만 아침의 흔적만 흥건할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닫고 주머니 속에서 초록색 모자의 난쟁이 인형을 꺼내 들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난쟁이 인형은 허공을 향해 웃고 있었다. 반대편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빨간 모자의 난쟁이 인형도 꺼내 들었다. 손바닥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난쟁이 인형 두 개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제 됐어. 왼쪽과 오른쪽 주머니에 난쟁이 인형을 하나씩 넣고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싸늘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자 소름이 끼쳤다.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한 엄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버지의 발바닥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파리하게 변한 아버지의 발바닥을 발견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난 가을 사흘 만에 해경 경비정에 실려 온 아버지의 입술은 물건리 앞바다의 푸른 물결처럼 파랗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본 엄마는 알아듣지 못할 베트남말로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엄마의 읊조림이 내 몸을 휘감았다. 순기 아버지. 낯선 목소리와. 순기 애비야. 거친 숨소리가 물건리 바닷가 바위틈으로 사라졌다. 장례가 끝난 날 밤 엄마는 잠이 든 순기와 내 머리맡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엄마가 읊조리는 베트남 말이 내 얼굴로 기어올랐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흘러내려 아랫배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엄마의 슬픔을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신음 소리에 엄마가 몸을 움직였다. 안나야. 왜 그러는데? 어눌한 경상도 사투리가 푹 삶긴 우거지처럼 귓가에 와 얹혔다. 안나야. 왜? 어디 아프나? 허깨비 같은 엄마의 손이 내 이마에 닫는 순간 통증이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안나야!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이부자리에 생리자국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때 엄마의 그림자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배의 통증은 허리를 지나 허벅지 어딘가를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그날이네. 옷 갈아입고 약 먹어라. 엄마가 알약과 물 컵을 내밀었다. 검게 그을린 엄마의 팔이 눈앞에 나타나자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고통이 엄습해 온 것은 엄마의 베트남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그랗게 말리기도 하고 매끄럽게 기어 다니다 중간 중간 끊어지는 단어들이 내 몸 어딘가를 끝없이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그게 그런 거다. 생전 없다가 있기도 하고. 있다가 없기도 하고. 엄마는 서랍에서 내의를 꺼내주고는 방문을 닫았다. 통증을 견디기 위해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다. 잠들어 있는 순기의 얼굴이 어슴푸레 보였다. 두 다리를 뻗고 잠들어 있는 순기의 얼굴에도 그것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엄마가 내뱉은 혼잣말은 순기 얼굴을 파고들어 납작하게 눌어붙었다. 순기 얼굴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아버지가 베트남 단어로 뒤덮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순기의 얼굴을 숨죽이며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의를 갈아입고 다시 누웠다. 곁에 누워 새근거리는 순기의 변해버린 얼굴, 아니 처음부터 그랬던 얼굴이 어둠 속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꼬리가 내려앉은 큰 눈, 낮고 펑퍼짐한 코, 꼭 다물고 있어도 불룩하게 튀어나온 입술. 그런 순기의 얼굴 위에 내 얼굴이 겹쳐지자 심한 오한이 들었다. 온몸에 이불을 감고 오한을 이기려 애쓰는 동안 머릿속에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툭 불거진 눈자위가 옴폭한 종지처럼 얕아지더니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졌다. 금산 봉우리를 닮았던 콧방울도 일렁이는 파도에 씻겨 내려갔다. 주머니 속 난쟁이 인형의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며 선잠이 들 무렵 마루에 걸려 있던 벽시계가 5시를 알렸다. 엄마와 할머니가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어판장으로 가는 동안 빨간 난쟁이 인형과 초록 난쟁이 인형은 파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주머니 속 인형을 꼭 쥐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그것들이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어판장 곳곳에 버려진 생선찌끼들을 피해 엄마와 할머니 곁으로 갔다. 춥다. 대강 팔고 와. 할머니는 고무장갑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생선이 가득한 함지를 들고 앞장서 걸었다. 나는 바닥에 고여 있는 구정물을 피해가며 엄마의 뒤를 따랐다. 긴 머리를 한 가닥으로 묶은 엄마의 뒷모습은 빛바랜 아오자이를 닮았다. 아오자이를 입은 엄마는 15년 전에 찍었다는 사진 속에 있었다.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아오자이를 입은 인형 같았다. 아오자이 대신 푸른 몸빼 바지를 입고 있는 엄마가 동수 엄마 옆에 자리를 잡고 꽃게 사소를 외쳐댔다. 난 주머니 속 난쟁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엄마 곁에 앉아 있었다. 3월이라지만 저녁 바람은 차가웠다. 어판장 뒤로 길게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일렁거렸다. 방풍림은 육백년이 넘도록 물건리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방풍림이 해풍을 막아 주어 마을이 안전한 것이라고 했다. 방풍림은 큰 바람과 작은 바람,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을 골고루 섞어 부드럽게 뭉치고 으깨며 그 세월을 버티고 있었지만 내 안의 베트남과 엄마의 베트남은 쉬 뭉쳐지지 않았다. 엄마의 흥정이 끝나는 것을 보고 있던 내가 비닐봉지를 열었다. 꽃게 한 무더기가 검정 비닐 안으로 쏟아졌다. 독일 할머니가 지갑을 열어 돈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엄마가 돈을 받아 들며 웃었다. 오늘은 많이 사 가네요. 동수 엄마도 바지락 한 바가지를 비닐봉지에 여미며 거들었다. 오늘 이웃끼리 저녁 모임이 있어서. 독일 할머니는 묵직한 비닐봉지를 받아 눈대중을 했다. 몇 명이나 자실라고? 동수 엄마가 애살스럽게 물었다. 한 네다섯 명 될라나……. 이만하면 될 것 같네. 그럼 많이 팔아. 할머니는 난전에 널린 생선 더미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만하면 먹고 살만 하다 더만 할매가 그리 볼멘소리를 한다네. 독일 할머니가 멀리 사라지자 바지락 한 바가지를 퍼 담으며 동수 엄마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했는데 형님. 할머니에게 받은 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엄마가 말했다. 뭐, 남해 군수가 고향에서 돌아 가시야 안 되겠냐고 그래서 자식이고 뭐고 다 버리고 왔는데 밤이고 낮이고 외지 사람들이 기웃거려서 통 살 수가 없다고. 동수 엄마는 비밀스러운 무엇인가를 알려 주기라도 하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함지에 붙어 있는 꽃게 부스러기를 쓸어 바닥에 버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할매가 독일로 갈라 한단다. 동수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을 알려주는 듯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이고, 그라면 우리는 어짜노. 우리 단골인데. 엄마는 동수 엄마를 향해 흥감을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우리는 인자 가요. 장사 마저 하고 오세요. 엄마가 함지를 머리에 이며 동수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방풍림이 끝나는 언덕 모서리에 있는 우리 집 마당에 어느새 밤이 찾아 들었다. 저녁을 준비하던 할머니가 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뭣이 왔다. 전화기 옆에 놓여 있는 흰 봉투에 둥글고 납작한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엄마는 손도 씻지 않고 봉투를 들어올렸다. 고향 소식에 함박웃음을 짓는 엄마를 뒤로하고 방문을 닫았다. 순기는 컴퓨터 오락을 하는 모양인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파카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주머니에서 난쟁이 인형을 꺼냈다. 고개를 하늘로 처 들고 있는 빨간 모자의 난쟁이 인형과 허리를 굽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초록 모자의 난쟁이 인형을 가방 속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마루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천장을 콩콩 울렸다. 뭐고? 할머니가 물었다. 어머니 우리 동생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나를 닮았다고 친정엄마가 그랬다네. 엄마의 어눌한 경상도 사투리가 통통 튀어 방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이모가 있다고 했다. 삼촌도 있다고 했다. 모두 합쳐 8명이나 되는 형제가 있다는 엄마는 순기와 나를 보며 그들을 떠올리곤 했다. 아이고, 사돈이 얼마나 좋아하겠노. 할머니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엄마의 부모님을 언제나 사돈이라 불렀다. 저녁 밥상 앞에 앉은 엄마는 아오자이를 입었던 사진 속 그때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엄마에게서 이모 이야기를 듣던 순기가 외갓집에 언제 가냐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나중에. 순기 장가갈 때. 엄마는 밥상을 물리고 나란히 앉은 순기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 속에 둥글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베트남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갔다. 방문을 닫고 가방을 열었다. 초록 모자의 난쟁이 인형은 얼굴 칠이 조금 벗겨져 있었다. 밝은 살구색이 벗겨진 곳에 검고 딱딱한 나뭇결이 드러나 있었다. 비바람에 벗겨졌을 그 자리를 어루만지자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아오자이를 입었던 그날 내 머릿속에서도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엄마의 고향에 가고 싶어 했던 어린 나를 물건리 방풍림 밖으로 내몰았다. 옷장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아오자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한 옷감에서 눅눅한 좀 냄새가 났다. 아오자이를 입으면 사진 속에 있는 엄마처럼 예뻐질 거라 생각했다. 툭 불거진 입술이 얇고 가늘게 펴질 거라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바지 단은 발목 위에 볼품없이 늘어졌다. 억지로 끼어 입은 상의는 어깻죽지가 미어졌다. 아랫단에서 허리까지 이어진 슬릿은 내장을 꺼낸 생선 배 모양 볼품없이 벌어졌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오자이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마치 할머니의 파자마와 몸에 작은 원피스를 억지로 껴입은 꼴이었다. 친구들이 기다리는 마루로 나가야 했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안나 엄마는 완두콩, 강낭콩, 베트콩. 동수가 놀려댔다. 난 아이들을 향해 우리 엄마는 너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기한 옷을 가지고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순 거짓말이다. 안나 엄마가 그 옷 입은 것 본 사람. 동수는 모여든 아이들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있다니까. 나는 그런 동수를 향해 암팡지게 내질렀다. 그러면 한 번 가져 와 봐. 동수의 말에 아이들은 보여 달라며 성화를 부렸다. 그래. 우리 집으로 가자. 큰소리치며 앞장서 걸었다. 엄마의 아름다운 베트남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거울 속에 비친 모습 그대로는 아이들 앞에 나갈 수가 없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마루로 나가자 아오자이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몰려 나갔다. 동수는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향해 혀를 날름 하더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골목에서 안나 엄마는 완두콩, 강낭콩, 베트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구석에 허물처럼 늘어진 아오자이를 보자 목구멍이 따가웠다. 펑퍼짐한 콧등 옆으로 골 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엄마는 거짓말만 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소리쳤다. 사과를 먹을 때마다 엄마가 들려주던 스타애플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두리안도 모두 거짓말일 거라고 고함쳤다. 아무도 없는 집이 쩌렁쩌렁 울렸다. 나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펑퍼짐한 코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외국인이냐고 질문 하는 사람들 앞에서 유창한 경상도 사투리로 남해 물건리에 사는 김안나라고 대답했다. 순기와 나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은 엄마의 어눌한 말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줌마 아까무스 사소. 멸치 털러 안 가요.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어판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내뱉는 엄마의 헝클어진 음절들이 거머리가 되어 내 온몸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비행기를 타고 베트남으로 가리라던 내 꿈은 그날이후 사라졌다.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섰다. 독일마을 언덕의 햇살은 일주일 전과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버스를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방 속에 넣어 둔 인형이 달그락거렸다. 멀리 보이는 울창한 방풍림이 바람을 이기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가방을 고쳐 메고 길 위로 내려섰다. 유난히 선명한 검은 아스팔트의 매끄러운 촉감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나를 내려준 버스는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안녕 안나. 마을의 빨간 벽돌길이 인사를 했다. 장난감 같은 집들이 반짝이는 햇살 속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세 번째 집 테라스가 보였다. 테라스의 창문은 닫혀 있었다.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서 빨리. 길 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화단 쪽으로 돌아섰다. 화단에는 삼지창을 쥐고 엉덩이를 삐죽이 내민 노란 모자의 난쟁이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두 개의 인형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었다. 삼월의 바람이 일주일 동안 남긴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한 것이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작은 잎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놀라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어. 빨리. 파카 주머니에서 꼼지락거리던 손을 꺼내 난쟁이 인형 쪽으로 가져갔다. 심장이 달아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은 심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낮은 담장 안에 있던 난쟁이 인형을 주머니 속에 감추고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마. 아무 일도 없었어. 길을 보며 걸어. 하나, 둘, 하나, 둘. 장단을 맞춰야지. 마지막 집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언덕을 따라 걸어오고 있는 독일 할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괜찮을거야. 심장은 엄청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나냐? 독일 할머니가 할아버지 뒤에서 나타났다. 여기는 무슨 일이냐? 할머니는 구슬이 달린 지갑을 들고 할아버지 곁에 나란히 섰다. 나를 향해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보드라운 미소가 난쟁이를 닮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인형을 힘껏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집에 가 보자. 할머니는 내게로 다가오며 할아버지를 향해 무어라 말을 했다. 한 동안 할머니 말을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끝에 붙어 나온 안나라는 소리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가 길을 안내하겠다는 듯 앞장서 걸었다. 할머니와 나란히 걷고 있는 내 몸이 조금씩 굳어졌다. 친구 집에 온 거냐? 할머니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긴 했지만 손바닥은 벌써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세 번째 집 테라스 앞에 멈춰 선 할머니는 어서 따라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곧이어 테라스 창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난쟁이 인형을 움켜쥐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 아래 화단의 빈 자리가 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야트막한 거실이 나타났다. 할아버지가 열어 놓은 창으로 물건리 앞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고 앙증맞은 장식품들이 거실 곳곳에 놓여 있었다. 낮은 탁자와 붉은 색 소파, 화려한 촛대까지. 할머니 집 창밖으로 보이는 물건리 앞바다만 아니라면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주머니 속 인형 때문에 굳어 있던 몸이 스르르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왜 그러고 있니? 이리 앉아라. 할머니는 장미가 그려진 접시에 비닐포장이 된 사탕 뭉치를 내어 놓았다. 소파에 앉아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 있던 손을 뺐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연방 말을 걸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손자 생각이 난단다. 우리 자식들은 다 독일에 있는데 내가 고집을 부려서 왔기는 왔다만….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고향이라고 찾아오긴 했는데…. 할머니는 혼잣말을 돼내며 멀리 수평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나야 엄마가 베트남에서 왔지? 그래서 내가 네 엄마에게 정이 간다. 내가 독일 갔을 때 생각이 나서. 할머니는 껍질을 벗긴 사탕 한 알을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내 목에서 흘러나오는 경상도 사투리는 납작하지도 둥글지도 않았다. 테라스 밖을 내다보던 할아버지가 소파로 다가와 앉자 의자가 살짝 기울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무어라 말을 했고 할아버지는 대답을 했다. 네가 참 예쁘게 생겼단다. 할머니가 나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난 입안에 든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자식이고 손자고 독일에 다 두고 왔는데 내가 할아버지한테 미안해서…. 할머니는 말을 멈추고 소파에 기대앉은 할아버지를 향해 살짝 웃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찻잔을 기울이던 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주머니 속 난쟁이 인형의 삼지창이 옆구리를 '콕' 찔렀다. 순간 입에서 '읍'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가슴이 떨렸지만 조심스럽게 손을 주머니로 가져갔다. 작고 앙증맞은 삼지창이 옷섶으로 파고들었다. 손을 움직여 옷섶으로 파고든 삼지창 방향을 돌려놓았다. 우리는 여기서 편안히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할머니는 잠시 말을 끊었다. 순간 무엇인가 내 등을 지그시 눌렀다. 가방 속에 넣어 둔 빨간 모자와 초록 모자 인형이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가방을 메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할머니가 말을 멈춘 순간에 가방을 벗어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하나 더 먹어라. 할머니는 사탕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속은 것을 생각하면…. 어서 독일로 가야지. 할아버지가 내려놓은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집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볼 가득 터져 나왔다. 속았어. 그래서 독일로 돌아가려고 한단다. 주머니 속 난쟁이 인형의 삼지창이 다시 엽구리를 찔렀다. 아무 말 없이 할머니와 나를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더 놀다 돌아가도 되는지 물었고 나는 이제 가 보겠다며 일어섰다. 곁에 내려 두었던 가방을 조심스럽게 어깨에 울러 메고 계단을 내려서는데 할아버지의 근심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현관 입구에서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 뛰었다. 가방 속 난쟁이 인형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렁거렸다. 현관문을 열자 엄마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가시나 어딜 그리 돌아 다니노? 순기 숙제 좀 해 주지. 엄마는 빨래를 손질하며 늦게 돌아온 나를 책망했다. 오늘은 장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섬유린스 냄새가 마루 가득 퍼졌다. 방으로 들어와 인형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순기 숙제를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에 대해 조사를 해 가야 한다는 순기는 컴퓨터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리기라도 한 듯 무심했다. 순기의 노트를 펼쳐 놓고 엄마에 대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향은 베트남, 나이는 38세, 이름은 콩씨앙 란.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앉아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난쟁이 인형처럼 작아 보였다. 연필을 들고 노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순기 가방에 노트를 밀어 넣고 자리에 누웠다. 가방 속에서 숨죽인 난쟁이 인형들이 검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 위로 얼굴을 내민 악어는 육백년을 버티고 선 플라타너스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악어는 큰 입을 벌리고 나무 위에 앉아 잠이 들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온 난쟁이 인형 삼형제는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악어 등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난쟁이의 뾰족한 고깔모자 위에 스타 애플과 두리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물건리 앞 바다에 불던 바람이 향긋한 과일 향을 몰고 독일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난 그 향긋한 바람을 잡아타고 독일 마을 세 번째 집 테라스로 갔다. 엄마는 테라스에서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검고 탐스러운 엄마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둥글납작한 엄마의 콧방울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촉촉하게 젖은 엄마의 머리카락에서 호아마이방 향기가 났다. 순기는 거실에 앉아 난쟁이 인형이 들고 있던 삼지창으로 파파야를 찍어 먹고 있었다. 테라스 아래 화단에는 독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울타리 안에서 난쟁이들처럼 환하게 웃으며 허공을 보고 있는 할머니는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노부부의 모습 뒤로 짧고 앙증맞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거 어디서 났는데? 난쟁이 인형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잠이 덜 깬 내 눈 앞에 웃고 있는 난쟁이 인형은 초록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누가 준건데? 순기는 난쟁이 인형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빨리 도! 잠이 덜 깬 목에서 마른기침이 났다. 누가 준거냐니까? 순기는 무엇인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방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났으면 밥 먹지 뭐 하노? 엄마의 눈이 순기 손에 들려 있는 난쟁이 인형에게로 갔다. 이게 뭐고? 엄마는 순기 손에 들려 있는 난쟁이 인형을 뺏어 들었다. 누나 가방에 있던데. 순기는 이부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마루로 나가 버렸다. 난 엄마의 질문이 시작되기 전에 이부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초록 모자를 쓴 난쟁이 얼굴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어디서 났노? 엄마가 뱉어낸 단어들이 둥글고 납작하게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앞에서 흔들리던 초록 모자가 잠시 사라지는가 했더니 이내 빨간 모자와 노란 모자의 난쟁이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언제부터고? 엄마는 다짜고짜 물었다. 왜 남의 물건 가지고 그러는데! 나는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의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엄마의 가느다란 허리는 늘어진 몸빼 바지에 가려져 있었다. 어쩌면 엄마는 서랍 속에 아오자이가 들어 있다는 것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빛바랜 아오자이를 닮은 엄마의 모습을 노려보는 것은 숨차고 힘든 일이었다. 짧고 볼품없는 아오자이를 닮은 엄마의 베트남이 나에게 준 것이라곤 넓고 펑퍼짐한 코와 얼룩덜룩 볼품없는 얼굴뿐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나는 알록달록하고 예쁜 인형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냐고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소리는 몸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갔냐고! 엄마의 고함 소리가 방을 울렸다. 엄마가 무슨 상관인데! 난 엄마 손에 들려 있던 난쟁이 인형을 뺏어 들었다.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검고 거친 엄마의 손이 뺨에 와 부딪쳤다. 한 쪽 뺨이 얼얼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는 바다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방풍림처럼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한 번에 토해낸 오물처럼 엄마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 동안 말없이 서 있던 엄마가 방문을 닫고 마루로 나갔다. 그동안 주머니 안에서 말을 걸어 왔던 난쟁이 인형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빨간 모자와 노란 모자 그리고 삼지창을 들고 있는 난쟁이 인형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고 깊은 눈동자 속 어딘가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테라스 안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던 녀석들이 내 손 안에서 멋쩍은 미소를 짓는 동안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밀고 들어 왔다. 밥 먹고 학교 가라. 문 밖에서 엄마가 소리쳤다. 저녁노을 속의 독일마을은 조용했다. 인적이 드문 길에서 바라본 세 번째 집 테라스의 창이 열려 있었다. 그림자를 드리운 테라스 아래 화단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 온종일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난쟁이 인형을 꺼냈다. 가자. 물건리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이 삐걱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화단으로 들어서자 퍼석한 흙무더기가 힘없이 바스러졌다. 화단 가장자리로 발을 옮기고 가슴에 끌어안은 난쟁이 인형을 화단에 내려놓았다. 앙증맞은 노란 모자와 얼굴이 벗겨진 초록 모자의 난쟁이 인형을 내려놓자 가슴이 아려왔다. 구멍 뚫린 가슴으로 가느다란 바람이 '쉬'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그 틈으로 비집고 나온 아쉬움이 가슴 한쪽을 콕콕 찔렀다. 화단 밖으로 나서자 방풍림에서 시작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갑갑함을 달래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하고 길 위로 내려섰다. 제 자리로 돌아간 난쟁이 인형의 앙증맞은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창문이 열린 테라스에서 독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어오던 바람이 잦아들고 창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벽돌 길에 길게 드려워졌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당선소감
지난 밤 소금에 절여 둔 배추를 헹궈냈다. 배춧잎 사이에 엉겨붙어 있던 흙덩이들이 떨어져 나와 맑았던 물이 탁해졌다. 탁해진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받아 다시 한 번 헹궜다. 그렇게 헹궈내기를 서너 차례. 깨끗한 물 속에 뽀얀 속살을 들어낸 배춧잎 하나를 잘라 입에 넣고 씹어보니 달큰하고 고소했다. 하얗고 노르스름한 그놈들에다 속을 넣고 버무리면 마침맞은 맛이 날 것 같다. 내게 글쓰기란 이런 것이다. 흙 묻은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버무리는 것. 탁했던 물이 맑아질 때까지 씻어내고 맛을 보는 것.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 묻은 흙을 털어내기 위해 글을 썼다. 이제 겨우 맑은 속살을 드러낸 배추가 된 기분이다. 깨끗해진 배춧잎에 버무릴 양념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이번 당선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시간들을 잘 섞어 맛있게 버무리라는 뜻일 것이다. 졸작을 읽고 낙점해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한다. 그리고 흙을 털어내듯 습작을 해 오는 동안 곁에서 지켜봐 준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한다. 책장을 넘기도록 격려해주신 선생님들과 습작 원고를 꼼꼼히 읽어준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임회숙
1971년 전남 구례 출생.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동아대 시간강사.
심사평
예심에서 넘어온 11편 중에서 5편을 논의 대상으로 하였다. 최종미의 'TV보는 여자'는 복지시설에 맡겨진 아이에 대한 끌림을 전체이야기의 흐름과 제대로 연결 짓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권의 '스쿠티카'는 양식장 환경문제를 능란한 이야기솜씨로 보여주고 있지만 단순한 사회고발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시켰다. 남편의 죽음을 수용하는 여인의 내면을 그린 이미경의 '희고, 푸르나, 검은'은 회상구성의 단조로움과 우주팽창론으로 위안을 얻는 결말부분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김인경의 '그림을 그립시다'는 우리 인생의 마멸을 우화로 그리고 있다는 점과 사물을 카메라시점으로 설정한 방법까지 만만찮은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시간의 집중성이 약점으로 눈에 띄었다. 우리의 현실이 된 혼혈문제를 다룬 '난쟁이의 꿈'은 방풍림과 독일마을이 있는 어촌을 소설공간으로 소화하면서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어머니와 만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파독간호부 할머니의 대비적 인물설정, 인형이라는 소도구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녀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심리 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했다. 응모한 분들과 당선자의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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