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여우 > 팀 마이어스 글. 한성옥 그림 .보림 - 서평 : 김경은
늦여름 시인의 집 앞에 탐스럽게 열린 달고 맛난 버찌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 입니다. 버찌를 소재로 한 여우의 일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교활한 여우가 어떤 갖은 꾀를 부려 또 누구를 괴롭힐까 하는 것입니다.
팀 마이어스가 쓰고 한성옥 작가가 그린 <시인과 여우>는 여우가 꾀를 내고 상대가 속아 넘어가 맛있는 버찌가 여우의 차지가 되는 단순한 우화가 아닌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예술성을 겸비한 수준 높은 시 그림책입니다.
누구라도 시인이 될 것 같은 아름다운 늦여름 달밤입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마츠오 바쇼 (松尾芭蕉, 1644-1694)와 그새 버찌를 어찌나 맛나게 먹었는지 주둥이가 빨갛게 물든 여우가 자신을 인간보다 더 뛰어난 시인이라 자부하며 버찌나무를 사이에 두고 거래를 합니다. 인간 세계의 훌륭한 시 몇 편은 여우들끼리 즐기고 남은 것들을 인간이 자고 있을 때 귓가에 속삭여 준 것이라고 여우는 말합니다.
후카가와의 깊은 산 속에서 신선처럼 살아가며 자기 먹을 것에 자기 잘 만큼 자고 자기 시를 쓰며 조용히 자기 삶을 살았던 바쇼 역시 스스로를 위대한 시인 이라 자부하며 보잘 것 없는 여우와의 내기에 내심 고민을 합니다.
바쇼는 열일곱 음절의 짧은 시 안에 자연을 담고 계절을 노래합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에 독자들은 마치 정말로 연못에 뛰어드는 개구리의 날렵한 모습과 고요한 적막을 깨우고 들려오는 청량감 있는 물소리를 상상합니다. 하이쿠의 생명인 극단적인 생략과 침묵, 여백을 통해 느껴지는 무한 상상의 세계가 고스란히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조금 낫 군” “하지만 그 정도는 새끼 여우들도 할 수 있어”
바쇼의 시를 들은 여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입니다.
그 후로 바쇼는 최고라고 자부하던 자신을 내려놓고 ‘좋은 시는 아니지만 들려줄 만은 하겠지’ 생각하며 마지막 시를 완성합니다. 번번이 퇴짜를 놓는 얄미운 여우와 무엇보다 뛰어난 시를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바쇼의 창작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독자들은 더더욱 바쇼의 편이 되어 응원을 하게 됩니다.
여름 달 위로
여우 꼬리 끝처럼
흰 산봉우리
바쇼가 입을 떼는 순간, 여우들이 벌떡 일어서며 바쇼의 시를 찬탄하고 온 산의 버찌는 영원히 바쇼의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번 시들과 다를 것 없는 이 시에서 도대체 여우는 무엇을 느낀 걸까요?
그 답은 단순하고 또 단순합니다. 단지 이 시에는 여우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허무맹랑한 결말에 헛웃음이 나며 꾀나 어리석은 여우라 생각되지만, 여우의 답 또한 강렬한 울림으로 남습니다.
여우와의 교감, 그것이었습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교감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마음, 도도한 여우와 은둔의 시인에게서 한 수 배웠습니다.
글을 쓴 팀 마이어스는 5.7.5 세줄 17음절의 하이쿠란 어떤 시인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편의 멋진 하이쿠만으로도 시란 무엇이고, 어떠한 창작과정과 전달방식을 가졌는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절로 느끼게 합니다.
또한 일본의 전통 시 하이쿠에서 고스란히 일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은 한성옥 작가의 그림 덕분입니다. 후카가와의 멋진 숲과 달콤한 버찌나무 그리고 시인과 여우 이 모든 것을 수채화로 화려한 듯 정적인 듯 다채롭게 표현했습니다. 글마저도 일본 문양의 패턴이 담긴 각각의 테두리를 두어 마치 액자 속의 멋진 그림을 감상하는 듯합니다. 작가의 정성이 가득 담긴 섬세한 그림책인 만큼 볼 때마다 새롭고 깊은 향기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