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선생 문현록 권1
선생 행장
선생의 휘는 성룡(成龍)이고 자는 이현(而見)이다. 성은 류씨(柳氏)로 대대로 풍산인(豐山人)이다. 처음 대부인이 임신을 하였는데 한 노인이 꿈에 고하여 말하기를, “부인께서 훌륭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 했다. 얼마 후 선생이 태어났는데, 이 해가 가정(嘉靖) 21년(1542) 임인년(壬寅年) 10월이었다.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6세(1548)에 대학(大學)을 배웠고, 몸가짐[擧止]이 마치 어른과 같았다. 한번은 강가에 나가 놀다가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다른 아이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었는데, 갑자기 물결이 크게 일더니 잠깐 사이에 이미 선생은 언덕 위에 나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8세에 맹자를 읽었다. ‘백이(伯夷)는 눈으로 일체 나쁜 것들을 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귀로 음탕한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을 읽고, 두려워하며 그 사람을 사모하여 마음속으로 잊지 않고 간혹 꿈속에서도 만났다. 9세에 논어를 읽었다. 16세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관악산(冠嶽山)에 들어갔다. 절의 후미진 곳을 좋아하여 다만 밥 짓는 어린 한 명의 종과 머물렀다. 굽어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잠자고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밤이 깊으면 간혹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적이 있었지만 선생은 듣지 못한 척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어떤 스님이 앞에 나타나 말하기를, “혼자 깊은 산속에 있으면 도둑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였다. 대개 스님이 선생이 학문에 돈독하다는 것을 듣고, 밤이 되어 좀도둑의 형상을 하고 지조를 시험한 것이다. 선생이 웃으면서, “네가 도둑질 안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며 태연히 책을 읽으니 스님이 탄복하며 나갔다.
얼마 후 계상(溪上)에 퇴계 선생을 찾아가서 이락(伊洛)의 학문과 절문근사(切問近思)를 수업받았다. 그 강명(剛明)과 실천은 반드시 성현(聖賢)이 되는 것을 지향하여 퇴계 선생이 늘 칭찬을 하였다. 갑자년(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병인년(25세)에 급제하여 선발되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고, 정묘년(26세)에 예문관 검열을 제수받았다. 기사년(28세)에 상소하여 인종을 연은전(延恩殿)에 부(祔)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일이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 해는 선조 즉위 2년이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옮겼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성절사 서장관(聖節使書狀官)으로 연경에 갔다. 태학생(太學生) 수백 명이 몰려와 구경하였다. 서로 모여 함께 학문을 논하는데, 선생이 “요즘 중국에서는 어떤 사람을 도학의 종주로 삼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대부분 왕양명(王陽明)과 진백사(陳白沙)라고 대답하였다. 선생이 “백사는 도(道)를 보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였고 왕양명의 학문은 오로지 선학(禪學)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문청공(文淸公) 설선(薛瑄)이 꾸밈없이 솔직하게 한결같이 바른 것에서 나온 것만 같겠는가?”라고 하였다. 오경(吳京)이라는 신안(新安) 사람이 기뻐하며 앞에 와서 하는 말이, “근래 학술이 분명하지 못하여 거짓된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데 그대들이 바른 의론을 들어 배척하였다.” 하였다.
서열에 따라 줄을 설 때 승려와 도사 두 부류들이 앞 줄에 섰다. 선생이 앞줄 선 사람에게, “그것이 황조(皇朝)가 바른 것을 숭상하고 사특한 무리들을 내쫓는 뜻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예관(禮官)이 명하여 그들을 사신의 뒤에 줄 세웠다. 모든 제후들이 예를 갖추고 서로 보았다. 돌아올 때 오경(吳京)이 편지를 보내어, “만약 공자의 문하에 있었다면, 곧 칠십자(七十子)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대부(大夫)와 예부(禮部)의 무리들은 언급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하였다.
퇴계 이 선생 역시 편지를 보내와서, “육선(陸禪)이 온 천하에 회양(懷襄)했는데(육구연의 선학이 천하에 흉흉한데), 공이 수백 명의 제생들을 대적하고, 그 미혹됨을 점검할 수 있었던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29세)에 부수찬과 수찬에 제수되었다. 매번 경연에 들어가서 임금 앞에서 진달 할 때는 논리가 명백하고 절절하였으며, 정밀히 분석하여 당시 강관 중에 제일 뛰어나다고 하였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이조(吏曹) 좌랑(佐郞)을 지냈다.
신미년(辛未年, 30세)에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 임신년(壬申年, 31세)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으로 돌아왔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준경(李浚慶)이 임종할 때 올린 유소(遺疏)에,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붕당이 점점 일어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그 상소를 보여 주며 묻기를, “조정에 신하 가운데 붕당이란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한 말이오?” 하였다. 외부의 흉흉한 의논들이 “이준경이 선비들에게 화를 입히려 한다.” 하였고, 삼사(三司)와 호당(湖堂)의 관료들이 모두 제가끔 차자를 올려 논박하여 관작을 삭탈하고자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은 그 말에, “대신이 임종할 때 올린 말이 맞지 않으면 변론할 따름이오. 죄를 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조정이 대신의 몸을 대우하는데 손상이 될까 염려가 되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따랐고, 더는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
이 해에 만력황제(萬曆皇帝, 신종(神宗))가 등극하였다.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의주(義州)에서 반조사(頒詔使)를 맞이하였다.
계유년(癸酉年, 32세)에 다시 이조 좌랑(吏曹佐郎)에 제수되었고, 7월에 의정공의 환후가 악화되어 늘 환부(患部)를 빨아서 고름[膿血]을 뽑았다. 밤에 의대(衣帶)도 풀지 않은 것이 거의 한 달이나 되었다. 상을 당하게 되자 몸이 수척해져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는데, 아침저녁으로 성묘하였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최질(衰絰 상복과 머리, 허리 띠)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고, 상사(喪事) 이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상복을 벗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이조 정랑(吏曹正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35세) 봄(1월)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되어 소명을 받고 부임하다가 도중에 사양하고 돌아왔다. 여름에 사헌부 헌납(司憲府獻納)에 제수되어 조정에 나아갔다. 당시 대관에서 심의겸(沈義謙)을 논계하자, 이조에서는 곧바로 대관들을 외직으로 추천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언관이 한번 입을 열어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에 대한 것을 논계하였다고 갑자기 쫓아내고자 한다면 언로가 막히게 되고 척리만 횡포를 부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이조에서 논의하여 모두 교체하였다. 의정부 검상(檢詳)에 전임되었고, 다시 홍문관 전한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겨울에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제수되었고 상소하여 노모의 봉양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정축년(丁丑年, 36세)에 휴가를 얻어 안동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서 뵈었다.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상소를 올려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공양할 수 있게 되기를 청하였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어 조정에 돌아와 을사(乙巳) 위훈(僞勳, 功臣錄)을 삭제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승하하였다. 예관들이 상에게 기년상(朞年喪)을 주청하였다. 선생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명종(明宗)이 인종(仁宗)에 대해서 대통을 이은 것은 부모와 자식의 도가 있는 것이니, 주상께서 마땅히 적손(嫡孫)으로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조모를 위하여 승중복(承重服)을 입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힘써 논의하였다. 예관(禮官)에게 다시 의논하라는 임금의 유지가 내려졌으나 대신들은 전자의 견해를 고집하였다. 선생은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밤새도록 논계(論啟)하여 새벽닭이 울 무렵에서야 결국 윤허를 받았다.
졸곡(卒哭) 후에 경영을 열고, 시전(詩傳)을 강독(講讀)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시전(詩傳)은 노래 가사에 불과하니, 춘추(春秋)로 바꿔서 하옵소서.”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36세)에 군기시 정(軍器寺正),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38세) 봄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옮겼고,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승배(陞拜)되었다. 얼마 후 체임(遞任)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었다.
경진년(庚辰年, 39세)에 또 상소를 올려 부모의 봉양을 비니, 사양하는 뜻이 슬프고 절박하여 임금이 허락하였다. 때마침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결원이어서 특명으로 제수하였다. 아침에 사례하러 가자 “힘써 편안히 봉양하라는 뜻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여러 고을들도 본받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하였다.
상주에 도착하여 몸을 바르게 하여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더욱이 학문의 진흥에 뜻을 다하였다. 매월 초하루에 공자 신위에 참배하고 유생들을 모아 통독(通讀)하여 재주에 따라 가르쳤다. 또한 상숙(庠塾)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을 두고, 아이들을 훈계하는 글을 지었다. 대략 오륜(五倫)을 우선으로 삼고, 학문을 처음 배우는 이들을 독려하여 지성(至誠)으로 인도하는 뜻이 정성스럽고 간곡하였으며, 학정(學政)이 다시 새로워지고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꿨다. 상주를 떠날 즈음에 백성들이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비를 세워 표현하였다.
신사년(辛巳年, 40세) 봄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겨울인데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 열 가지 일[十事]에 대한 차자(箚子)를 지어 임금에게 올렸으니 그 내용은,
‘실재의 덕을 닦아 천심(天心)에 보답하고, 대궐의 안과 밖을 엄격히 구분하여 궁중 출입을 엄숙히 할 것. 정치의 대체를 가다듬어 규모를 수립하고, 공론을 중하게 여겨 조정의 기강을 정비할 것. 겉 이름과 실상을 밝혀서 인재를 등용할 것. 공도는 넓히고, 요행을 찾는 문을 막을 것. 염치를 배양하여 흐려진 풍속을 맑게 하고, 정치 체제와 법률 제도를 밝혀서 간사한 것을 막을 것. 쌓인 폐단을 제거하여 국민 생활을 높이고, 학문을 숭상하여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을 것.’ 등이다.
임오년(壬午年, 41세)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다가 겨울에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제수되었고, 특명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승진되었다. 왕(王)·황(黃) 두 명나라 사신이 오자, 예의를 살피고 언어로 인도하는 일도 법도에 맞게 하니, 명나라 사신이 크게 존경하고 감탄하였다. 말할 때마다 꼭 선생이라 부르고 작위를 부르지 않았다. 임금이 입고 있던 어포(御袍)를 벗어 하사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승진되었다.
계미년(癸未年, 42세) 이탕합(尼湯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선생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임금의 뜻에 따라 다섯 책문[五策]을 지어 올렸는데, “화의 근원을 막고, 싸우고 지키는 규정을 정하고,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 군대에 보급품을 충분히 주고,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를 닦아야 한다.”였다.
사론(士論)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선생은 이미 크게 근심하여 뜻이 맞는 동지들과 힘써 평화롭게 진정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부터는 붕당들이 더욱 심해져서 서로들 편들어가며 후원을 하였다. 선생은 조정에 있고 싶지 않고 대부인도 병중이어서 뵈러 온 김에 물러나 시골에 머물렀다.
특명으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환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어려운 일은 사양하고 쉬운 일은 나아가고자 하여 부모님 봉양하는 것을 핑계 삼아 물러나 쉬고자 하는 것’으로 상소를 올린 것은, 경안령(慶安令) 요(瑤)가 시류에 편승하여 배척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내 일찍이 한마디 말도 의심해본 적이 없고 지금 사직하고자 하는 상소가 이와 같으니, 남의 말을 듣고 속으로 불안을 느낀 데 불과하다. 류성룡은 참으로 훌륭한 학자로서 조정 신하들 가운데서도 아주 뛰어난 인물이다. 다만 늙은 어머니 때문에 번번이 부를 수가 없을 뿐이었다.” 하며 온화한 유지로 윤허하지 않았다. 결국 임지에 나아가니 풍기(風紀)가 크게 진작되고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조심하여 스스로 법을 어기지 않았다.
갑신년(甲申年, 43세) 가을에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체임을 사양하였다.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선생이 “작위(爵位)를 베푸는 것은 애초에 한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작위는 덕망, 그다음은 재능, 그다음은 공로, 그다음은 근속 연한에 의하여 주는 것이옵니다. 만약 이러한 몇 가지에 해당하지도 않는데 까닭 없이 작위가 주어지는 것은 정치 체제에서도 잘못 주는 것이고, 개인 신상에 있어도 상서롭지 못합니다. 보잘것없는 관직도 그런데 하물며 육경(六卿)의 중한 작위는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손수 공문을 보내어,
‘옛 임금이 그 신하에 대하여 신하로 여긴 이도 있고, 벗으로 여긴 이도 있으며, 또한 스승으로 여긴 이도 있었다. 이런 의리(義理)가 비록 후세에 전하지 않더라도 그대는 10년 동안 경연에 있으면서 한결같은 덕으로 아무런 하자도 없었으며, 의리상 임금과 신하라고는 하지만 정의는 친구와 다름이 없다. 그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하여, 이에 거듭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태학관 유생들을 깨우치는 글을 지었고, 또 전국에 향약(鄕約)을 반포하여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고 본실(本實)에 힘쓰고 예양(禮讓)을 일으켜 풍속을 바로잡는 기본으로 삼았다.
이때 부마를 간택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동성(同姓)이라도 본관이 다르면 구애받지 말라고 하였으니, 대개 기대하는 바의 마음이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예에 동성(同姓)에게 장가들지 않는 것은 혐의를 멀리하기 위해서이다. 유총(劉聰)이 유은(劉殷)의 두 딸을 비(妃)로 맞이하였는데, 출계(出系)가 완전히 다르지만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는 그것을 ‘개와 염소가 뒤섞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唐)·송(宋) 이후로 공주에게 장가든 이는 모두 이성(異姓)이었습니다. 오직 당나라 소종(昭宗)만이 이무정(李茂貞)의 아들을 부마로 삼았는데, 이것은 권신(權臣)들의 협박에 의한 것이니 본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여 결국 일이 중지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임금이 왕자 의안군(義安君)을 복성군(福城君)의 후계자로 삼을 것을 명령하였다. 선생이 “예에 ‘후사를 잇는 것은 아들 항렬에서 취하고 손자 항렬에서 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안군이 복성군을 잇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복성군은 의안군에게 종조(從祖)입니다. 제후(諸侯)의 서자(庶子)가 종(宗)이 되는데, 다음날 사당을 세우게 되면 할아버지는 있고 아버지는 없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종실 중에서 아들 항렬을 취하여 후계자로 삼아야지 왕자로 삼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다. 참판 황정욱(黃廷彧)이 찬성하자 선생이 힘껏 해석하였다.
을유년(乙酉年, 44세)에 의주 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정여립(鄭汝立)이 이이(李珥)에게 보낸 글에 ‘세 사람이 비록 숨었으나 크게 간악한 자가 아직 있다.’라는 말이 있으니, 크게 간악한 자란 대개 류성룡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찰(御札)을 내려 말하기를, “류성룡은 군자다. 당대의 대현(大賢)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면 저절로 진심으로 감복하게 되는데, 어느 간 큰 자가 함부로 이런 말을 하였는가?” 하였다. 선생이 소(疏)를 올려 자신이 마땅히 물러나야 할 다섯 가지를 피력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떠나고자 하는 뜻이 더욱 견고하여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모시고자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거듭 글을 올려 해직(解職)을 청하였다. 거듭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은 것이 3년이나 되었다.
무자년(戊子年, 47세) 겨울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를 겸하게 하였다. 거듭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기축년(己丑年, 48세)에 사헌부 대사헌,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겨울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옥사가 일어났다. 이전에 선생이 병으로 인해 오랫 동안 밖에 있었다. 백유양(白惟讓)이 조정에 나오도록 권하라는 뜻으로 정여립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가 이르자 그 글이 조정에 입수되었다. 선생이 거듭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결국 상소하여 스스로의 죄상을 말하였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신의 평소 발자취는 서로 크게 멀리하고 막혀 있었는데, 거취(去就)의 구속(久速)을 어찌 이런 적들이 권면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백유양의 말이 이와 같으니, 화환(禍患)이 장차 이르지 않았다면 앞날을 보는 식견이 먼저 깜깜해져 이런 그릇된 말을 만들고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겠습니까? 신하가 몸을 세워 임금을 섬기면서 몸과 명예를 모두 온전히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고, 몸과 명예를 모두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만약 둘 다 온전하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몸을 욕되게 할지언정 명예는 온전히 해야 합니다. 신은 역모 옥사에서 그 기미를 엿보았지만, 조정에 들어가서 말을 함부로 하여 행적을 혼탁하게 하거나, 일찍부터 한 마디도 그 간사한 짓을 널리 알리지 않았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식견은 옛날 장구령(張九齡)에 부끄럽고, 사악함을 억누르는 힘은 근래 이경중보다 한 수 아래입니다. 이 때문에 나라를 저버렸으니 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여립이 세상에 아첨하고 명예를 팔아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함께 교유를 맺고자 하였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이경중이 전랑(銓郞)으로 있으면서 그가 바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청선(淸選)에 뽑히는 것을 자주 억눌렀다. 당시 정인홍은 이경중이 방현(妨賢)한다고 하여 그를 탄핵하였다. 옥사의 화(禍)가 일어나게 되자, 선비들이 육당(陸棠)을 잘못 알고 억울하게 법망에 걸렸다고 대부분 여겼는데, 선생만이 정여립의 간사함을 아는 자는 오직 이경중뿐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여겼다. 어찌 한두 번 봤다고 해서 모두 수사(收司)의 법률에 연루되었겠는가.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이 자못 넉넉하게 받아들였다. 옥사(獄事)가 대부분 평반(平反)되었고, 사림(士林)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특별히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에 이경중이 증직되었고 정인홍은 관직이 삭탈되었다.
하루는 정철(鄭澈)이 빈청(賓廳)에 있으면서 선생에게 “듣자니까 영남 선비들이 역적을 억울하다 하여 심지어 신원하여 구제하려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대로 두고 불문에 붙일 수 없소.” 하였다. 선생이 “그대는 동한(東漢) 때의 당고(黨錮)처럼 유생들을 불행하게 하고자 하오? 옥사를 살핌에 밝게 하고 삼가면 깨우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복종할 텐데 어찌 집집마다 한 사람씩 보내어 설명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정철의 뜻이 좌절되었고 구당(鉤黨)에 불행이 파급(派及)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경인년(庚寅年, 49세)에 휴가를 얻어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임금이 왕비[內殿]의 옷을 내려 주며 정경부인에게 가져다주게 하여 한 때의 영화를 누렸다. 여름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어 힘껏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종실(宗室)의 계통을 바로잡은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올라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신묘년(辛卯年, 50세) 봄에 특명으로 이조 판서를 겸하였는데 선생이 사양하기를, “우리나라가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이런 일이 있은 적이 없습니다. 훗날 만에 하나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이 신으로 구실을 삼는다면, 이는 국가의 무궁한 화근이 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조정의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흔드는 행동을 한 사람이 하나뿐이 아닌데, 그대가 이조 판서를 겸하였기 때문인가? 그대는 직무에나 충실하고 사양하지 말며, 인재의 등용에 적격자를 잘 가려 조정의 기풍을 맑게 하라.” 하였다. 이에 좌의정(左議政)에 승진되었고 판서(判書)를 겸하는 것은 전과 같았다.
이때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일본에서 받아 온 답서에 “한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겠다.” 하는 말이 있었다. 이에 선생이 “마땅히 천자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이산해가 “명나라에서 만일 일본과 상통하였다고 우리에게 죄를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테니, 차라니 숨기는 편이 낫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사신의 왕래는 나라마다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화(成化) 연간에 일본이 우리에게 ‘중국에 공물을 바치도록 해 달라.’ 하였을 때도 사실대로 알렸더니 명나라에서는 칙서를 내려 주어 그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지난날 일도 그러하였는데 지금 이 편지를 보고도 보지 못한 척 숨긴다면 대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적이 만약 실지로 중국을 침범할 의도가 있어서 다른 나라를 통하여 이 사실을 듣게 된다면 명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의심하는 것이 반드시 더욱더 심할 테고, 더욱더 우리 스스로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솔직하게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복건(福建) 사람 허의후(許儀後)·진신(陳申)이 일본에 잡혀 있으면서 벌써 일본의 정세를 몰래 보고하였다. 유구국(琉球國) 역시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보고하였으나 우리나라 사신이 아직 도착하지 않자, 명나라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내통하면서 두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였다. 유독 각로(閣老) 허국(許國)만이 지난날 사신으로 온 적이 있어 우리나라가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기고 있어 반드시 배반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주문(奏文)이 이르게 되자 황제가 매우 기뻐하였다. 황제가 포상을 내렸고 돈독함이 더해졌다.
이때 일본의 소식이 날이 갈수록 다급해졌다. 상이 비변사(備邊司)에 명하여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자 선생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교지에 응하였다. 또 조종조(祖宗朝)의 진관법(鎭管法)을 다시 쓰자고 주청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겸하게 명하였다.
임진년(壬辰年, 51세) 4월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왔다. 특명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여 군사 일을 총괄하였다. 이일(李鎰)을 보내어 순변사(巡邊使)로 삼고, 성응길(成應吉)과 조경(趙儆)을 각각 좌방어사(左防禦使)와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세 길로 나누어 내려가게 했다. 변기(邊璣)와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두 고개를 각각 나누어 지키게 했다. 또 신립(申砬)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이일을 후원하게 했다.
또 세자를 책봉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자고 주청하였다. 임금이 “중궁(中宮)이 만일 원자(元子)를 낳게 되면 처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다.” 하였다. 선생이 “송나라 인종(仁宗)은 나이가 서른에도 사마광(司馬光)과 여러 현인들이 빨리 세자를 세우자고 주청하였습니다. 어찌 예측한 바가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이일과 신립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도달하고 적병은 충주(忠州)에 이르렀다. 임금의 행차가 장차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선생은 남아서 경성(京城)을 지키게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항복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서쪽으로 행하였다가 변경의 끝에 이르게 되면, 강물 하나 건너편이 바로 상국의 강토입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마땅히 수작(酬酌)하고 응변(應變)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인데, 현재 조정에 있는 신하들 가운데 명민하고 숙달되어서 고의(古誼)를 잘 알고 사명(辭命)을 잘 짓는 자로는 오직 류성룡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니 청컨대 행차를 따라가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진(臨津)에 이르러 임금이 선생을 불러 함께 배에 탔다. 이에 선생에게 술을 내려 말하기를, “국가가 다시 중흥된다면 마땅히 경의 덕분일 것이다. 부디 몸을 아끼시오.” 하였다.”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러 임금이 어가(御駕)가 머물 곳을 물으니 이항복이 의주로 향할 것을 청하면서, “만약 팔도(八道)가 모두 함락되면 곧바로 중국 조정으로 나아가 하소연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선생이 “대가(大駕)가 만약 우리 동방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난다면 조선은 우리의 땅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중국 조정에 의지하자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다.” 하였다. 선생이 “지금 동북쪽의 병력이 지난날과 마찬가지이고, 호남과 영남의 충의로운 선비들이 하루도 못 가 곧바로 봉기할 텐데 어찌 이런 일을 급히 논의하겠는가.” 하자 이항복이 마침내 깨닫고 중지하였다.
물러 나올 즈음에 선생이 이성중(李誠中)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해서 이 승지(李承旨)에게, ‘어찌하여 가볍게 나라를 버리라는 의론을 표현하겠는가? 공이 비록 치마를 찢어 발을 싸매고 따라가다가 길에서 죽는다고 해도 이는 아녀자나 내시의 충성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말이 한번 바깥으로 퍼져 나가면 인심이 와해될 것이며, 어느 누가 수습할 수 있는 책임을 맡으랴.’라고 말해 주시오.” 하였다. 얼마 후 양궁(兩宮)이 서로 나누어 머물렀고 거짓된 말이 크게 퍼져 인심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된 후에 이항복이 선생의 고견에 더욱 탄복하였다.
호가하여 송도(松都)에 이르렀다. 영의정으로 승진했으나 곧바로 파직되었다. 신잡(申磼) 등이 죄를 얽어맨 것이다. 평양에 이르러 다시 부원군에 서용되었다.
임금이 처음에는 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뒤에 적병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임금이 성 밖으로 나와 피하고자 하였다. 먼저 재신(宰臣)들로 하여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받들고 성 밖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그러자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떠들며 칼을 뽑아 들고 길을 오가면서 공격하였다. 재상들에게 욕하기를 “너희들은 국사를 그르쳤고 이미 이 성을 버리고자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꾀어서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우리를 적들의 칼끝에 어육이 되게 하였는가?” 하자, 조당(朝堂)에 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실색을 하였다. 선생이 나이가 든 몇 명의 노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온 힘을 다해 성을 지키고자 하니 충성스러운 면은 있지만, 어찌 궁문(宮門)을 진동시켜 놀라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제 조정에서 성을 지킬 계책을 의논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그만두지 않는다면 죄를 용서할 수 없게 된다.”하였다. 평소 그 지방 사람들이 선생을 믿고 있었기에 복종하고 곧바로 병기를 버리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분기(憤氣)에 편승하여 함부로 행동한 것은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하고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물러갔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 일의 형세는 지난날 경성(京城)에 있을 때와 다릅니다. 이 성 앞에 강이 막혀 있고, 서쪽 가까이 중원(中原)을 견고하게 버틴다면 얼마 되지 않아 명나라 구원병이 와서 서로 의지해서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정철이 강력하게 불가(不可)하다고 말하였고 이에 성을 나가기로 의논이 정해졌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는 정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도(北道)로 갈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고집스럽게 다투며 말하기를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가는 것은 본래 명나라 병사에게 의지하여 회복을 도모하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이미 청병(請兵)해 놓고 우리가 도리어 북도(北道)로 깊이 들어간다면 의리상 이같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깊이 들어갔다가 적병에 갇혀 버린다면 명나라의 소식마저 끊어져 통할 수 없으니 어떻게 회복하는 일을 도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형세가 궁해지고 땅이 줄어들고 난 뒤에는 또다시 오랑캐들이 있는 북쪽으로 달아날 것입니까? 이것보다 더 잘못된 계책은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 어가는 영변(寧邊)으로 행차하고 선생은 중국 장수를 접대하기 위하여 평양(平壤)에 머물러 있었다. 얼마 뒤에 중국 장수 역시 제 때에 이르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드디어 어가를 뒤쫓아 의주(義州)에 이르러, 싸우고 지킬 계책 열여섯 조목을 진달하였다.
당시에 중국 조정에서는 우리나라가 왜적들과 공모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요동(遼東)에서 보낸 자문(咨文) 가운데 힐책하는 말이 있었다.
이에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본래 우리나라가 도리를 잃어 병란을 불러일으킨 일이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을 위하여 의리를 지키면서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지신명께서 실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신 바입니다. 오직 요즈음의 사정이 사신의 말에 응대하는 중에 사실을 다 말할 수가 없어 매번 숨기고 덮어 두려고만 하고, 말하고 싶어도 다 말하지 못해 우리나라의 실정을 다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처음부터 가상하게 여기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뜻은 없고, 도리어 허물을 책망하는 말만 있었던 것이니 참으로 통분스럽습니다. 그리고 중국 조정에서는 앞으로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자로 하여 곧장 평양(平壤)에 가서 왜놈들과 직접 대면해 쳐들어온 연유를 캐물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교활하고 사특한 무리가 교묘하게 헛말을 만들어 이간질할 계획을 세운다면, 중국 조정에서 사자(使者)로 온 자가 충신(忠信)스럽지 못하거나 생각이 깊은 자가 아니라면 혹 달콤한 말과 후한 뇌물에 흔들린 채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나라가 아래로는 왜적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위로는 중국 조정에 변명할 수가 없게 될 테니 더욱더 낭패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근래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변고를 통보함에 느슨하게 하였다는 것이 첫 번째 의심입니다. 군사를 보내 줄 것을 일찌감치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 두 번째 의심입니다. 상황을 탐색하러 온 중국 군사들을 제대로 접대하지 않아 그들을 굶주리고 고생하게 하였다는 것이 세 번째 의심입니다. 이미 군대를 보내 달라고 청하고서는 또 군량이 다 떨어졌다고 한다는 것이 네 번째 의심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향도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당시에 한 명의 장수나 군졸도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다섯 번째 의심입니다. 예로부터 아무리 위란(危亂)이 극도에 달하였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탄 어가가 머무르는 곳에는 반드시 호위하는 군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없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평온하기가 평상시와 같다는 것이 여섯 번째 의심입니다.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때는 반드시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몸을 잊고 국난에 달려 나오는 신하가 있는 법인데도, 지금의 기상이 느긋하고 느슨하기만 해서 응대하고 보좌하는 것을 대부분 뒤늦게 하고 있다는 것이 일곱 번째 의심입니다. 무릇 이와 같았으니 어찌 중국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그들의 꾸짖음과 힐책을 불러오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 자문에 대한 회답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으니, 해당 관서로 하여 제 때에 속히 회보하되, 통렬하게 진달하여 명백히 밝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 시대의 역사를 두루 보건대, 무릇 오래도록 국록을 누린 나라치고 중간에 쇠하였다가 다시금 일어나서 떨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두터운 은택을 입어 종묘사직이 오래도록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니 어찌 미치광이 같은 왜구에게 한 번 업신여김을 당하였다고 해서 끝내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에야 이르겠습니까. 용렬한 사람들의 천박한 견해로는 나라를 위한 장구한 계책을 세울 수 없어서, 한갓 적병들이 매우 예리하다는 말만 듣고 국사를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에 팽개쳐 버린 탓에 앞으로 진작시킬 기운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성상의 마음을 굳게 정하신 다음 쇠퇴한 것을 흥기하고 어지러움을 평정하는 곳에서 신하들을 채찍질하여, 조금도 해이한 뜻이 없도록 하여 죽음 가운데에서 살아나기를 구하는 계책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7월에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나왔다. 당시 선생의 병세가 위독한 것을 염려하여 윤두수(尹斗壽)에게 명하여 밖으로 나가 군량(軍糧)에 관한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선생은 “행재소에 대신(大臣)이 단지 한 사람밖에 없으니 외방으로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밖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말을 달려 소관역(所串驛)에 이르니 촌락이 한결같이 텅 비어 있었다. 선생은 군교(軍校)들에게 수색하도록 하여 몇 사람을 찾아내고는 직접 대면하여 타이르기를, “나라에서 평소 너희들을 어루만져 주고 길러 준 것이 매우 지극한데 지금 어찌하여 차마 도망쳐 숨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중국 군대가 이르게 될 것이다. 국사(國事)와 정치가 급한 때이니 이에 너희들이 수고를 바쳐 공을 세울 때이다.” 하였다. 책자 하나를 꺼내어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고 말하기를, “이 뒷날에 마땅히 이 명부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가지고 논상(論賞)할 것이며,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처형할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는 와서 이름을 기록해 주기를 청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공은 인심을 단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바로 각처에 공문을 보내어 고공책(考功冊 공적을 살펴 적는 책)을 예치해 두고 그들의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서로 더불어 달려 나와 열흘도 채 못 되어 관소(館所)와 곡식(穀食)과 여러 가지 도구가 모두 갖추어졌다.
조승훈(祖承訓)이 평양성(平壤城)에 있던 적을 공격하다가 불리하여 물러났다. 선생은 안주(安州)에 머물러 있으면서 인심을 진압하였다. 또 후군(後軍)이 이르러 오기를 기다렸다.
11월에 경기 일원을 삼도로 나누는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빨리 앞뒤로 서로 응하여 적을 견제하는 형세[掎角之勢]를 이루게 하고, 혹 위험한 데 처하게 되면 매복을 하게 하고, 혹 병사를 합하여 공격하도록 하소서. 또한 중신(重臣)들에게 통행을 절제하게 하고, 의병과 관군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게 하고, 나아감과 물러남, 늦춤과 서두름에 서로 차이가 없게 하소서.” 하였다. 상벌을 분명하게 하고 사풍을 일으키고, 군량미와 군대를 훈련하는 방법 등을 갖추어 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2월에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에 제수되었다. 사방에 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급히 일어나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공문이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제독 이여송이 5만 병사를 거느리고 안주에 오자 선생이 들어가 그를 맞았다. 선생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어 형세와 군사들의 진입로를 지시하자 제독이 크게 기뻐하며 관심을 기울여 듣고 그곳마다 붉은 붓으로 표시를 하며 말하기를 “적이 내 눈에 환하게 보인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병사가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적에게 포로가 된 자들이 왜적들이 물품을 후하게 주는 것을 이롭게 여겨 사방을 오가면서 우리 군사의 모든 동정을 적들이 먼저 알게 하였다. 이런 지경에 이르자 선생은 간첩 가운데 우두머리 김순량(金順良)이란 자를 체포해 심문하여 그들 무리 수십 명을 알아내어 각 진(陣)에다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하였으며, 김순량의 목을 베는 것으로 군령을 세웠다. 이로부터 그의 잔당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많은 중국 군대가 이르렀는데도 왜적들은 모르고 있었다.
계사년(1593년, 52세) 정월에 제독이 평양성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이보다 먼저 선생은 안주에 있을 적에 몰래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 이시언(李時言)과 김경로(金敬老)에게 격문을 보내 적들이 도망가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섬멸하게 하였다. 당시 유영경(柳永慶)이 황해도 감사가 되어 김경로에게 격문을 보내 불러들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으나, 김경로가 달려왔다가 해주(海州)로 되돌아 가버렸다. 이때 적장(賊將)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현소(玄蘇), 평조신(平調信) 등이 야밤에 남은 졸개들을 거두어 도망쳤는데, 굶주림으로 인하여 더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시언(李時言)이 약한 군사들을 가지고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뒤떨어져 있던 왜적 60여 급(級)만 목 벨 수 있었다. 선생은 김경로의 죄상을 행재소에 아뢰어 장차 참수하려고 하였으나 제독이 무사를 애석하게 여기고 저지시켰다.
이달에 호서(湖西)·호남(湖南)·영남(嶺南) 삼도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제독이 파주(坡州)로 진격해 주둔하고 있다가 부총병(副摠兵) 사대수(査大受)가 벽제역(碧蹄驛)에 있으면서 왜적들을 많이 죽이고 생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장정 천여 명만 거느리고 달려갔다가 왜적들에게 요격당해 패하고서 동파역(東坡驛)으로 되돌아와 있다가 개성부(開城府)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쟁론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홀로 동파역에 머물러 있었다.
제독(提督)이 장차 물러나 평양으로 돌아가고, 또 우리나라 군사들을 모두 강의 북쪽에 물러나 있게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에게 제독을 만나 퇴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 다섯 가지를 진달 하였는데, “선왕(先王)들의 분묘(墳墓)가 모두 경기지방에 있어 왜적의 수중에 들어 있는데, 신인(神人)들의 소망이 간절하여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경성(京城) 이남의 유민들이 날마다 왕사(王師)가 내려오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퇴각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다시 굳건한 뜻이 없게 되어 서로 이끌고 왜적들에게 가버릴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의 강토는 비록 한 자 한 치의 땅이라고 해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장사(將士)들이 비록 힘이 약하긴 해도 마침내 중국 군대에 의지하여 함께 진격하기를 도모하고 있는데, 한번 철수해 퇴각한다는 명령을 듣는다면 반드시 모두 원망하면서 흩어질 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한 발자국을 물러났다가 왜적들이 그 뒤를 쫓아 올 때는 임진강 이북 역시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하였다.
제독이 그 말을 듣고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가버렸다.
선생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왜적들의 공격을 막게 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이시언(李時言), 조방장(助防將) 정희현(鄭希賢)·박명현(朴名賢)으로 하여금 좌익(左翼)이 되어 해유령(蟹踰嶺)을 막게 했다. 의병장(義兵將) 박유인(朴惟仁)·윤선정(尹先正)·이산휘(李山輝)에게 우익(右翼)을 맡게 하여, 창릉(昌陵)과 경릉(敬陵) 사이에 매복해 있다가 적이 출몰하면 죽이고 공격하여 왜적들이 성 밖으로 나와 나무하고 풀을 베지 못하게 하였다. 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 등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적들의 세력을 분산시키게 하였다. 충청 순찰사(忠淸巡察使) 허욱(許頊)에게 본도(本道)로 돌아와 지키도록 하였다. 경기 이남에 있는 각 도(道)의 관병(官兵)과 의병(義兵)에게 공문을 보내어 좌우에서 왜적의 퇴로를 끊게 하였다.
공은 또 유격(遊擊) 왕필적(王必迪)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제 왜적들이 험한 곳에 주둔해 있어 쉽게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병(大兵)이 마땅히 동파역과 파주로 나아가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들의 뒤를 쫓고, 남병(南兵) 1만 명을 뽑아 강화(江華)를 경유하여 한강 남쪽으로 나아가 왜적들이 생각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 충주(忠州) 이상의 여러 진지를 격파하게 된다면, 상주(尙州) 이하에 있던 왜적들은 중국 군사가 대거 출병한 게 아닌가 의심하여 풍문만 듣고서도 도망쳐 숨을 것입니다. 경성(京城)에 있는 왜적들은 귀로(歸路)가 끊어져 반드시 용진(龍津)을 향해 도망칠 것입니다. 그때 후군(後軍)이 공격한다면 한 번에 섬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필적이 무릎을 치며 기이한 계책을 칭찬하고 장차 거사를 기약하였으나 이여송은 북쪽 지방 출신 장수라 남병(南兵)이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 저지하였다.
당시 왜적을 염탐하던 병사가 ‘사 총병(査摠兵)과 류 체찰사(柳體察使)를 잡으려고 한다.’고 보고하였다. 사대수(査大受)가 이를 선생에게 알리고 함께 퇴각하려고 하자 공이 답하기를, “왜적들이 어찌 함부로 가볍게 군사를 움직이겠습니까. 특별히 헛된 말을 퍼뜨려 우리를 협박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만약 우리가 한번 움직이기만 하면 백성들이 동요하게 될 테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낫습니다.” 하니, 사대수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옳습니다. 가령 왜적들이 나온다면 나는 공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용사(勇士)를 나누어 보내어 여러 달 동안 공을 호위하게 하였다.
당시 왜적들이 경성에 주둔한 지 이미 2년이나 되었다.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거의 대부분 굶어 죽었다. 살아남은 백성들은 공이 동파역에 와 주둔하고 있다고 듣고 노인네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 와 살려 달라는 백성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이에 선생은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삼고 다양한 방법으로 구휼하여 생활할 수 있게 하였다. 때마침 호남에서 모집한 곡식 수천 섬을 실은 배가 도착하였다. 선생은 곧바로 왕에게 급히 서면으로 장계를 보내고 구휼하였다.
적들이 글을 보내 화해를 청했다. 제독이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해 적중(賊中)으로 들여보내고 “왕자(王子)와 모시는 신하들을 돌려보내고 부산으로 퇴각한 다음에는 강화를 허락하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군사를 거느리고 개성(開城)으로 진격하였다. 선생이 정문(呈文)에 “화친하고자 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니 공격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제독의 비답(批答)에 “우선 이는 내 마음과 똑같은 것이다.” 하였으나, 실제로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에 또다시 유격 진홍모(陳弘謨)를 파견하여 왜적의 군영으로 들여보내고자 했다.
선생은 당시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파주에 있었다. 진홍모가 도착하여 선생에게 기패(旗牌)에 참알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왜적들의 군영에 들어가는 기패이며 우리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또 송 시랑(宋侍郞)의 왜적 죽이는 것을 금하는 패문(牌文)이 있으니 더욱더 들어가서 참알할 수가 없다.” 하였다. 홍모가 서너 차례 강하게 말하였으나 끝내 선생은 답하지 않고 곧장 동파역으로 돌아갔다.
제독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기패는 바로 황제의 명이다. 어찌 참배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내가 마땅히 군법을 행하고 병사를 철수시키겠다.” 하였다.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이 급히 선생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조회하는 날에 와서 사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선생은 어쩔 수 없이 김명원과 함께 문에 나아가 사죄하고자 하였으나 제독이 화가 나서 보지 않으려고 하였다. 선생이 비가 오는데도 문밖에 서 있으니 한참이 지나서야 허락을 받고 들어갔다. 선생이 사죄하여 말하기를 “제가 비록 어리석고 아는 것이 없지만, 어찌 기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기패 곁에 우리나라 사람이 왜적 죽이는 것을 금하는 패문이 있었기 때문에 사사로운 마음에 절통하여 참배하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제독이 부끄러운 얼굴빛을 띠면서 말하기를, “이 말이 과연 옳다. 이것은 바로 송 시랑의 명령이었고,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후 며칠이 지났다. 또다시 유격 척금(戚金)과 전세정(錢世禎)이 와서 화친을 허락하는 것이 편하다는 말을 하였으나 선생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고집을 하였다. 전세정이 화를 내면서 욕하기를 “그렇다면 너희 국왕은 어찌하여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는가?” 하니, 선생이 천천히 말하기를 “도성을 옮겨 보존하기를 도모하는 것 역시 한 가지 방법입니다.” 하였다.
전세정 등이 떠난 후 선생이 다시 편지를 보내어, “왜적들이 좋은 말로 우리를 회유하면서, 첫 번째는 동래(東萊)에서 편지를 보냈고, 두 번째는 상주(尙州)에서 편지를 보냈고, 세 번째는 평양(平壤)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작은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절박하였는데도 끝내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천하의 대의를 위한 것에 불과했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되게 할 수는 없었을 따름입니다. 이번 달에 송도(松都)에 있으면서 왜적들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두 왕릉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원수 이하 제관들을 거느리고 만월대(滿月臺)에 올라 망곡(望哭)하고, 군관 이홍국(李弘國) 등을 파견하여 가서 두 능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또 박유인(朴惟仁) 등을 보내 정릉의 시체를 옮겨 송산리(松山里)에 안장하게 했습니다.” 하였다.
4월에 왜적들이 물러났다. 선생이 천병(天兵)을 따라 경성으로 들어와서 종묘(宗廟)에 도착하여 곡을 하였다. 여러 재상들과 함께 정릉(靖陵)으로 가서 시신의 진가(眞假)를 살폈다. 당시 조정의 대신 가운데 오직 송찬(宋贊)이 일찍이 중묘에 도착하여 일을 하고 있었다. 옥체를 살펴보니 평일과 같았는데 등에 부스럼 흉터가 더욱더 분명하여, 유독 성혼(成渾)만은 전과 같지 않다는 소견이라 선생은 마음을 아파했다.
당시 선생은 왜적들을 급히 추격하기를 청했다. 제독이 말하기를, “한강에 배가 없는데 어찌하랴.” 하였다. 이에 앞서 선생은 이미 이빈(李蘋)에게 왜적들이 퇴각하는 틈을 타서 강가의 배들을 급히 모으도록 하였고 이때에는 이미 묶어 놓은 배가 80척이나 되었다. 제독이 영장(營將) 이여백(李如栢)을 파견하여 1만여 명의 군사들이 왔으나, 군대가 반 정도 건넜을 즈음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돌아가 버렸다. 제독은 본래부터 왜적을 추격하고자 하지 않았고 다만 헛된 말로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왜적들은 물러났지만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사이에 오히려 한가하게 주둔해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갈 뜻이 전혀 없었다. 선생은 서장을 올려 아뢰기를, “이 왜적의 배들이 뱃속에서 근거지를 마련해 있고, 또한 중국 군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쯤에 상하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우리 스스로 강성해질 계책을 마땅히 세워야만 합니다. 급히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왜적들과 싸우면서, 마음과 담략이 견고한 이들을 맹장(猛將)들에게 나누어 주고 조련(操鍊)하게 하여 불시에 쓸 수 있게 대비하시길 청합니다. 아울러 왜적들이 믿고 지금까지 전승(全勝)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조총일 뿐입니다. 우리나라도 밤낮으로 군사들에게 훈련시켜 쏘는 법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 없게 한다면, 왜적들의 장기(長技)를 우리도 역시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절강(浙江)의 군사들이 돌아가기 전에 대포, 낭선(狼筅), 창검(槍劍) 등의 무기를 하나하나 익히게 하십시오. 한 사람이 열 사람을 가르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을 가르치고 백 사람이 천 사람을 가르친다면 몇 년 사이에 수만 명의 정예병을 얻게 될 것이며, 왜적들이 쳐들어와도 그들을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장정을 뽑아 절강 참장(浙江參將) 낙상지(駱尙志)에게 보내 화포(火砲)와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게 하였다.
당시 기근이 날로 심해져 굶어 죽은 이들이 뒤엉켜 서로 베개를 하고 있는 듯했다. 선생이 소금을 굽고 기아(飢餓)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강화도(江華島)와 자연도(紫燕島) 같은 섬의 백성들에게 농사짓기를 권장하여 곡식을 구할 방법을 찾게 해 줄 것을 청했다. 또 요동(遼東) 경계에 국경 무역[互市] 공간을 개장할 것을 청했다. 면포(綿布) 한 필(匹)이 쌀 20말 값이며 은(銀)과 동(銅)을 이용한 이들은 더욱더 열 배의 이득을 취했다.
경성의 백성들도 뱃길로 서로 유통함으로써 몇 년 사이에 무역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은 또 남쪽 변경의 일이 급하다는 이유로 병든 몸을 이끌고 영남으로 내려갔다가 9월에 행재소로 소환되었다.
10월에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당시 가시덤불이 성에 가득하였고 모든 관서가 담벼락에 의지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기근마저 겹치고 도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했다.
선생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세워서 근본을 중하게 여길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선생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선생은 이에 당속미(唐粟米) 1만 섬을 풀어 사람들을 모집했고, 모집에 참여한 이가 구름처럼 모여 얼마 되지 않아 건장한 장정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들에게 조총과 창검의 기법을 가르치고,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을 세웠다. 절강 군사들의 법처럼 당번을 나누어 숙직을 하다가 임금이 행차하면 이들이 호위하였다. 이에 백성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곧바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가 쇠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이에 대한 논의가 매우 많았다. 급사중(給事中) 위학증(魏學曾)이 글을 올려 나라를 나누고 임금을 바꿀 것을 청했다. 이 일을 병부(兵部)에 내리자 병부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사헌(司憲)을 사자로 파견해 칙서를 받들고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아울러 그에게 우리나라 사정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칙서에 담긴 뜻이 아주 엄하였다. 내용 가운데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 은혜와 의리는 이제 이 정도에서 멈출 테니, 이제부터 왕은 서울로 돌아가서 스스로 나라를 다스려라. 만약 다른 변화가 있다고 해도 짐은 국왕을 위해 계책을 세워줄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칙서(勅書)를 받고 궁(宮)으로 돌아와서 곧장 선생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오래전부터 이런 일 있을 줄 알고도 일찍 피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내일 내가 조사(詔使)를 만나 장차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 줄 것을 청할 것이다. 그러니 경과 서로 볼 날도 그저 오늘 하루뿐이다. 그래서 비록 밤이 늦었지만 공을 부른 것이다.” 하였고, 이어 탄식하기를 “경과 같은 재주를 가지고 나 같은 임금을 만나 제대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도다.” 하였다.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임금님께서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를 걱정해 주는 것이 아주 지극한 것입니다. 칙서의 뜻은 경계하고 단단히 타이르는 것일 뿐입니다. 신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가 있는데 재주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사(子思)는 위(衛)나라에 살면서 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구할 수 없었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은 한(漢)나라 황실을 부흥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성패(成敗)를 가지고 사람을 논할 수 없다.” 하고는 술을 하사하여 마시게 하고, “이것으로 서로 이별할 따름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아뢰기를, “내일의 일은 절대 이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감히 죽음을 바랍니다.” 하였다.
다음 날 임금이 조사(詔使 중국 사신)가 있는 남쪽 별궁으로 가서 소매 속에서 첩(帖) 하나를 꺼내 ‘국사를 감당할 수가 없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바란다.’라고 간절하게 뜻을 펴 보였다. 중국 사신이 곧바로 손수 글을 써서, “지금 이런 국가의 회복이 사실 국왕의 복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아서인 것입니다. 전위(傳位)하는 일은 예부터 당(唐)나라 숙종(肅宗)의 고사가 있습니다. 국왕께서 이미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주본(奏本)을 갖춰 황제께 올려 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아울러 말하기를, “류모(柳某)는 충성스럽고 강직하며 인의가 독실하고 믿을 만하여 중국의 장수와 관리들이 왕이 어진 재상을 얻었다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당시 유격(遊擊) 척금(戚金)이 아침저녁으로 조사의 곁에 머물며 조사와 아주 비밀히 모의하였다. 이날 밤 척이 선생에게 서로 만나기를 요구하였다. 좌우를 물리치고 글씨를 써 가면서 서로 문답하였는데, 척이 예닐곱 조항을 써서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한 조항에, ‘국왕께서 전위하는 것은 빨리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선생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일은 답하지 않고 곧장 글로 써서 말하기를, “제3조에서 논한 바는 왕을 모시고 있는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노야께서는 만 권의 서책을 읽어 고금의 일에 대해 어찌 듣지 않았겠습니까. 소방(小邦)의 국가 형세가 마침내 위급하게 되었는데, 만약 또 군신 부자 관계에서 조처함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잃게 된다면 이는 재앙을 더 크게 불러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척이 “그 말이 옳다.” 하고는 곧바로 쓴 것을 촛불에 태워 버렸다.
다음 날 선생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조사에게 정문(呈文)을 올려, ‘주상께서는 본래 왜적들이 쳐들어오게 할 만한 실책이 없었고, 변란이 일어난 뒤에는 왜적을 막는 일에 있어 조처한 것이 아주 상세하였다.’라는 내용을 힘껏 전달하여 조사가 믿고 받아들였다. 이날 밤 척 유격이 또 공을 불러 말을 나누면서, “조사의 뜻이 이미 완전히 돌아섰으니, 달리 우려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조사가 임금을 만날 때 예를 갖춘 외모가 더욱 공경스러웠다.
하루는 정사를 맡은 여러 사람을 불러 일을 의논하려는데, 오직 선생만 불러 말하기를, “윤두수 형제가 일을 하면서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는데 믿을 만합니까?” 하였다. 선생이 “이 사람은 저와 한 조정에서 함께 일한 사람입니다. 일한 것마다 공로가 있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사가 말하기를, “군자는 편당을 짓지 않는다는데, 군자 역시 편당을 짓습니까?”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만약 일에 잘잘못이 있다면, 다만 우리 임금께 아뢸 수 있습니다.” 하자 소사가 웃었다. 돌아갈 즈음 자문을 보내어 타일러 경계하고, 또 차부(箚付 공문서)를 공에게 부쳤는데, 그 속에는 다시 국학를 재건하라는 말이 있었다.? 有再造山河之語
처음에 조사가 도착하기 전,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접반사(接伴使) 윤근수(尹根壽)에게 차부(箚付)를 한 통 주면서 대신에게 전해 주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경략이 만약 국사(國事)에 대해 공적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주상께 ‘자문(咨文)’으로 보내야 한다. 지금 자문은 보내지 않고 다만 ‘차부’만 보내왔으니 그가 말한 바는 조정의 신하들이 반드시 처리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고,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조사가 도착하자 공이 벽제역(碧蹄驛)으로 가서 맞이하였다. 조사가 선생에게 이르기를, “내가 서울에 도착하면 마땅히 새로운 거조(擧措)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개 그 당시 위태롭고 절박한 상황은 숨 한 번 쉴 틈조차 용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광해군(光海君)이 왕세자로 있으면서 아름다운 명성이 있어 사람들이 임금을 바꿔 세우는 것에 대해 놀랍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선생만이 그 분위기에서 정색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 주선하여 임금 자리가 흔들리지 않았고, 나라의 명이 다시금 공고해졌다. 훗날 되돌아본다면 당시 선위를 하고 안 하고에 따른 득실과 이해가 과연 어떠하였는가. 선생의 높고 원대한 식견은 미연에 일을 헤아려 알고 묵묵히 일의 기미를 주간하였으니 참으로 사직(社稷)에 공을 남겼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대해 스스로 말한 적이 없으며, 아울러 세상 사람들조차도 아는 이가 없었다.
11월에 시무(時務)를 아뢰었다. 장차 청컨대, “1년 경비를 계산하여 열읍(列邑)에서 받아들일 물자를 정해야 하고, 조정의 혜택이 아래로 미치게 해야 합니다. 금년에 신이 오랫동안 동파(東坡)에 머물면서 형세를 대강 살펴봤습니다. 가을쯤 경상도로부터 원주로 가는 길을 택하여 지평(砥平)·양근(楊根)에서 용진(龍津)을 건너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이에 지형이 막히고 험한 것도 몸소 두루 보았습니다. 만약 상류에서 강을 따라 책(柵 성채)을 벌려 놓고 많은 기계를 설치하여, 목숨을 다해 죽을힘으로 지킨다면 적병이 반드시 쉽게 곧바로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의당 계획과 생각 있는 중신(重臣)을 급히 파견하여 충주와 원주 아래쪽의 물 형세가 얕고 깊음을 순시하여, 긴요한 곳을 살펴 구획하고 경략하여 뒷일을 잘 처리할 계책을 구하게 하소서. 한강 이남에 이르면, 이천(利川)·여주(驪州)·광주(廣州)는 서울을 왼쪽에서 돕고, 수원(水原)·남양(南陽)·부평(富平)·인천(仁川)은 오른쪽에서 막게 됩니다. 이런 고을들에 만약 병사를 잘 거두고 군량미를 쌓아 요새와 험한 곳을 잘 가려 지키게 한다면, 서울의 형세가 그나마 지키고 막을 수 있고 위급함을 줄일 수 있어 거의 믿을 수 있겠습니다. 광주 남한산성은 바로 부여 시조의 온조성(溫祚城)입니다. 중간에 샘과 밭이 있어서 수리하여 지킬 만합니다. 이 외에도 수원의 독성(禿城), 금천의 금지산(衿芝山), 인천의 인성(仁城)은 다 험준하고 좁아서 반드시 지켜야 할 땅입니다. 만일 편의에 맞게 수선하고 군대를 모아 험준한 데에 주둔시켜 근거지로 삼고 서로 엇갈리게 바라보며 형세를 이룬다면, 품은 지세가 견고하고 조밀하여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믿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적병이 있어도 앞뒤에서 서로 견제하여 곧장 함부로 돌진하지 못합니다. 영남에 있는 적의 기세가 날로 급합니다. 이제 들으니 중국 조정이 이미 조공을 허락해 달라는 왜적의 청을 끊게 되자, 화를 내며 짓밟는 근심이 아침저녁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굶주리고 파리한 오합지졸을 모아 산골짜기에 숨어서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지만, 서로 교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다시 1월이나 2월이 되면 식량이 더욱 바닥나고 군사들이 더욱 흩어져 비록 군사들을 수습한다고 해도 그들의 기세는 어렵게 될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와 영남(嶺南)의 3도에 따로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군사 동원과 양식 지급 등을 주관하게 하고 명나라 군사의 뒤를 잇게 하되, 장준(張浚)이 독부(督府)를 개설하고 소하(蕭何)가 관중(關中)을 수리하여 기지로 삼은 것처럼 한다면, 거의 인심이 흩어지지 않고 호령이 잘 먹힐 것입니다. 근래 사명을 띠고 가는 신하의 왕래가 앞뒤로 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리를 더욱 많이 배치하고도 일은 더욱 다스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조정에서 지휘를 통제하려 하지만 기회가 어긋나서 번번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그 잘못은 오로지 사람을 제대로 임용하지 못하여 체통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12월에 시무(時務)를 아뢰기를, “대략 왜적은 경상도에 주둔해 있으면서 군사들을 쉬게 하고 군량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내년 봄 3월이나 4월쯤이면 다시 함부로 삼키고 물어뜯을 것이고, 전라도가 가장 먼저 분명히 적의 침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 진주는 성지(城池)가 자못 완전하고 군졸도 아주 많이 모였으며 맹장들도 많이 있었으나, 모략과 계책에 약간의 차질이 생겨 오히려 함락되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형세는 또 절대로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한 번이라도 움직이기만 한다면 다시 전라도 이북은 승세를 몰아 들어올 지경이 될 것입니다. 전라도를 보전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은 언제나 요해처(要害處)를 선택하여 방비를 설치하고 굳게 지켜 유사시(有事時)에 들어가 보전하고, 전쟁이 없으면 나가서 농사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적이 진격하여도 소득이 없고, 후퇴하면 뒤를 밟는 군대가 있으니, 며칠이 되지 않아 멈칫거리다가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 이는 지금 상황에서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신이 금년 봄 초기부터 포루(砲樓)는 성의 수비에 이롭다고 자주 아뢰었습니다만 지금에 이르도록 한 곳도 이를 실행하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마음은 지난 습관 따르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일 만들기를 꺼립니다. 일의 기미가 날마다 멀어지는 것이 날마다 더욱더 심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짧은 시간이라도 그저 아깝기만 합니다. 이렇듯 머뭇거리다가 벌써 한 해가 저물 즈음에 이르렀으니, 내년에 닥쳐올 일을 또 앞으로 어찌하겠습니까. 대저 머뭇거림은 일의 도둑입니다. 옛사람이 어려운 시기에 경영할 때에는 비록 좋은 모략을 중하게 여겼지만, 또한 반드시 잘 결단하는 것으로 뒷받침을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살펴보니 왜적은 바로 섬에서 꾸물거리는 벌레 같은 종족입니다. 처음부터 깊은 꾀와 먼 식견이 없었으나, 용병에는 제법 익숙하여 부산으로부터 천 리에 군영을 연결하여 깊이 남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 1둔(屯)의 졸개가 많아야 1천 명이고, 적으면 혹 수백 명이어서 중간에 한 길을 열고 개미처럼 왕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편이 서로 바라보는 곳은 대부분 우리 땅입니다. 하지만 우리 군대가 가운데 끼고 서서 관망만 한 채 2년이 지나도록 하나의 적둔(敵屯)도 격파하지 못한 것은, 용맹한 자와 겁 있는 자의 형세가 다를 뿐만 아니라 대체로 왜적이 형세를 잘 파악하고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을 칠 적에는 반드시 좌우를 돌아볼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에 두고, 아울러 목책도 견고하고 참호까지 주위에 빙 둘러 반드시 흙을 발라 화살과 돌을 막을 수 있게 하였고, 구멍을 많이 뚫어 총을 쏘기에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평양의 모란봉(牧丹峰)·중화(中和)·황주(黃州) 같은 곳도 지나가는 곳마다 대부분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도성 안에 근거지를 둔 적들도 성의 주위가 너무 넓어 수비에 어려움을 알고서 남산의 여러 기슭마다 그물처럼 실을 연결하였습니다. 축조한 토굴 역시 구비 마다 반드시 서로 마주 보게 하고, 지키는 숫자가 비록 적다 해도 총의 사정거리는 매우 멀리 미칩니다. 이는 왜적의 꾀가 교활하여 여러모로 헤아려 우려와 환란을 다 갖추었지만, 이른바 우리나라의 장수라는 부류들은 전혀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 형세가 있는 곳을 전혀 살피지 못하고, 한갓 몇십 명 내지 몇백 명 정도의 오합지졸만 모아 팔뚝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면서 싸울 만하다고 외치다가, 적을 만나면 딴 길로 달아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질까 두려워합니다. 먼저 정해진 계책이 없고 꼭 지켜야 할 곳도 없습니다. 떠돌아다니며 왕래하기를 마치 부평초가 강과 호수에서 서로 밀려다니듯 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릅니다. 이런 것으로 적을 방어하는 것은 비록 어린애도 오히려 불가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병법(兵法)에, ‘땅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 있고, 성에는 반드시 의거해야 할 곳이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마진(白馬津)을 지키고 비호구(蜚狐口)에 웅거하면 천하의 형세가 한(漢)에 있고, 동관(潼關)을 지키지 못하면 장안도 보전하지 못합니다. 백마강과 탄현(炭峴)을 지키지 못해 백제가 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지난날 그랬던 증험인데, 오늘날 서울과 지방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소홀히 하여 살피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호남(湖南)의 어떤 길도 지난날 직접 밟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경상우도로부터 서쪽으로는 남원과 순천이 모두 큰 진(鎭)이고, 그다음으로 전주와 나주 등도 모두 반드시 지켜야 할 땅에 속합니다. 대개 지금의 형세는 재물이 바닥나고 힘이 미약하여 죽은 백성들이 대부분이라 적이 오가도 이미 이를 지탱할 형세조차 없습니다. 만약 구획하여 싸우며 지키고자 하는 계획을 조금이라도 세우지 않는다면, 앞으로 몇 개월 뒤에는 살아있는 백성들이 없을 것이고 국사(國事)도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 호남을 온전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 방수(防守)는 마땅히 경상우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우도(右道)를 한 번 잃으면, 호남은 막을 곳이 없게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충돌하는 적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도의 의령·삼가(三嘉)·단성(丹城)·안음(安陰) 등은 지세가 험난하여 대부분 옛 성이 있습니다. 만약 차츰 이를 수축하고 백성에게 살아갈 방법을 권한다면 마땅히 백성들도 즐거워하며 따를 것입니다. 신이 지금의 인심을 가만히 보니, 왜적의 토벌을 오로지 명군(明軍)에게만 책임을 맡기는 것은 비록 행할 만한 책략이 있다 해도 조치하려는 뜻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타국에 군대를 요청하여 국가를 회복하려는 것은, 주장이 우리 쪽에 있고 타국의 군대는 우리를 위하여 그저 원조할 뿐이었습니다. 병을 치료하는데 비유한다면, 우리는 바로 원기(元氣)요 타국의 군대는 바로 약석(藥石)과 같습니다. 약석으로 치료할 때엔 반드시 원기를 바탕으로 삼습니다. 만약 우리 쪽에 원기가 전혀 없으면, 비록 만금(萬金) 가는 약이 있더라도 어디에다 이것을 처방하겠습니까. 지금 온 천지가 진흙탕이고 재물과 곡식은 다 바닥이 나서 근심해야 할 일은 외적뿐만 아니옵니다.” 하였다.
호서(湖西)의 역적인 송유진(宋儒眞)이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선생에게 명하여 금중(禁中)으로 들어와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렇듯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에 이르러 갑자기 들어와 호위하게 하신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더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卿)을 의지하여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데, 경은 전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있소. 무원형(武元衡)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느 날 저녁 임금이 내관을 보내어 선생을 엿보게 하였다. 깊은 밤에 선생이 등불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옛 사서(史書)를 읽고 있었다. 임금이 따뜻한 술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왜구들이 내홍(內訌)이 일어났다. 위사(衛士 관아(官衙)·군영을 지키던 장교)가 외롭고 약하여 도성이 놀라서 아침저녁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선생이 위의(危疑)를 진정시키고 대응이 어긋나지 않게 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의지하고 존중하였다. 이미 역적들이 체포된 뒤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평반(平反)하여 체포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석방될 수 있었다. 여러 대(代)를 거쳐 내려오면서 죄인을 신문할 적에 형장(刑杖)이 점점 무거워져 거의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선생이 건의하여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에 정해 놓은 척촌(尺寸)으로 일정한 규격을 삼을 것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함부로 죽는 이가 없었다.
갑오년(1594, 선조27) 2월에 서울에 방어막을 설치하자는 청을 올렸다.
“앞과 뒤가 긴 강이고, 왼쪽은 높은 산을 지고 오른쪽은 큰 바다가 둘러 있습니다. 천하에 이보다 더 험한 곳이 없을 텐데, 충주(忠州)가 상류에 있고 국가의 문호(門戶)가 됩니다. 충주를 보호하려면 마땅히 조령(鳥嶺)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만약 조령의 험지를 잃는다면 충주는 뛰어난 장수와 굳센 군사가 있다 해도 도저히 지킬 수 없습니다. 조령 위는 여러 길로 나누어져 막아 지킬 수 없습니다. 영동(嶺東) 아래 10여 리쯤에 두 언덕이 깍아지른 산비탈이 있는데 ‘응암(鷹岩)’이라 부릅니다. 가운데에 개울물이 있고, 오가는 행인들이 나무를 가로질러 다리로 삼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있습니다. 만약 이곳에 무기를 설치하고 적병이 이르게 되면 다리를 철거하고, 또 시냇물을 가로막아 두 골짜기 사이로 큰물을 흐르게 한다면, 사람의 발이 닿지 못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활, 쇠뇌, 마름쇠, 화포 등의 무기를 사용하여 지킨다면 100여 명에 불과한 날랜 군졸만으로도 조령 길의 파수는 저절로 견고해집니다. 그리고 문경의 서쪽으로부터 연풍현의 동쪽으로 나오는 길 역시 아주 험합니다. 약 수십 명에게 이곳을 지키게 한다면 적이 함부로 넘어 들어오지 못합니다. 고갯길이 끊어지게 되면 비록 다른 길에서 나와도 우리 군사들이 온 힘을 다하여 파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이해(利害)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3월에 진관(鎭管) 제도의 정비를 청하는 계사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조종의 제도에 팔도의 각 기관에 진관(鎭管)을 모두 두고, 그것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라 했습니다. 평소에는 곧 진관의 고을이 주진(主鎭)이 되어 소속된 고을을 단속하여 훈련·군오(軍伍)의 일을 대부분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일이 있을 때는 진관이 또 각각 소속된 군사를 거느려 차례대로 정제(整齊)하여 주장의 약속을 들으니, 그 형세가 마치 몸이 팔을 움직이고 팔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아서 조종(操縱)과 신축(伸縮)을 오직 장수가 합니다. 한 진관의 군사가 비록 혹시 달아나 무너진다고 해도 다른 진관의 군사가 각각 큰 군사를 이용하여 차례대로 굳게 지켜서, 혹은 그 앞을 막고 혹은 그 뒤를 치며 혹은 그 좌우를 에워싸게 될 것입니다. 잠시 영남(嶺南)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동래진(東萊鎭)에 소속된 고을에서 공사천(公私賤)과 잡류(雜類)를 막론하고 모두 뽑아서 군사를 만들면 그 수가 앞으로 7, 8만 명이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 패한다고 해도 또 대구 진관의 군사가 있어서 중간에서 막고, 경주(慶州)와 진주(晉州)의 군사가 좌우의 날개가 되어서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불행히 대구의 군사가 또 불리하게 되면, 아울러 상주의 진관이 많은 병사로 굳게 지키고, 충청도의 충주 진관이 소속된 군사를 모두 거느려 조령을 지켜 뒤를 받치며, 청주 진관도 소속 군사를 거느려 황간·영동·추풍령의 사이로 나아가서 오른쪽 날개가 되어 경기 등의 고을에까지 미칩니다. 한결같이 모든 군사를 엄하게 하고 정돈하여 막으면 국가의 형세가 문과 담장을 겹겹이 설치한 것과 같습니다. 적이 비록 한 겹을 뚫더라도 또 한 겹이 있습니다. 어떻게 열흘 사이에 천 리를 함부로 오가며 도성에 곧바로 나아가 무인지경을 밟는 것같이 하게 되겠습니까.
대개 조종(祖宗)의 먼 앞날을 자세하게 계획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중세(中世) 이후로 좋은 법과 훌륭한 제도가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사대부는 문장의 화려함을 다듬고 헛된 말만 꾸미는 것을 일로 삼았고 세상을 다스릴 생각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울러 쉽게 생각하고 얄팍한 꾀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뜻을 자랑하여 조종의 제도를 다 허물고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고 이름하고, 이에 온 세상이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과 같다고 높게 평가하여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개 제승방략이 그르친 것입니다.
청컨대 신이 그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제승방략의 큰 요점은 미리 한 도의 군사를 순변사·방어사·조방장·병수사에게 나누어 주둔시켜 뒀다가, 잠시라도 적이 온다는 정보를 들으면 적의 무리가 많고 적음이나 지세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살피지 않고, 한결같이 군사를 불러내어 모두 그 장소에 소집합니다. 얼마 후 조정에서는 천 리 밖에 장수를 보내되 아침에 듣고 저녁에 출발해도 장수 없는 군사가 곳곳에 모여 약속과 기율도 없이 벌판 가운데서 번잡하게 비바람을 맞게 됩니다. 하루나 이틀 동안 장수를 기다려도 오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 3, 4일 후쯤에 도착하면 적의 칼날이 이미 급박하고, 굶주림과 목마름이 계속 이어지면 새와 짐승이 깜짝 놀랄 때처럼 서로 이어서 무너져,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는 것처럼 수습할 수 없게 된 연후에야 이른바 서울의 장수들이 단기로 달려옵니다. 이미 흩어진 군사는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니 그 누가 불러 모을 것이며, 적의 선발대가 이미 가까이에 도착할 테니 패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하겠습니까? 임진년에 적에 대한 보고가 서울에 이르러 이일(李鎰)이 문경에 도착하니 문경은 이미 비었고, 상주에 이르니 상주도 벌써 비어 있었습니다. 흩어진 군사 가운데 와서 모인 자가 겨우 수백 명이었습니다. 대오를 미처 나누기도 전에 적은 이미 10리 밖에 이르렀습니다. 앞일을 징계하는 것은 뒷일을 삼가는 방법이고, 옛일을 거울로 삼는 것은 지금을 도모하는 방법입니다.” 하였다.
4월에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논하였는데, 공물로 작미(作米 양식을 만드는 것)할 것을 누누이 수천 마디 말로 청하였지만, 당시 중국 조정에서는 왜적들이 오래도록 물러나지 않자 중국의 병력을 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왜적들이 강화를 요청해오자 이를 허락하여 군사를 해산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상서(尙書) 석숭(石崇)이 그 의론을 주도하자 과관(科官)이 이를 논박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이 이 때문에 파직되어 돌아갔고, 시랑(侍郞) 고양겸(顧養謙)이 와서 대신 맡았다.
이달에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파견해 차부(箚付)를 보내어 본국의 대신들에게 유시하였다.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자신을 굽히고[屈己] 스스로 자강(自强)한 일을 예로 들며 책망하였으며, 또한 왜적들을 위하여 조공을 허락하고 왕을 봉하는 것 [封貢]을 청하도록 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이 눈을 흘기고 반대하여 한참 동안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택이 몹시 화를 내어 빨리 회보를 보내라고 독촉하였다.
당시 선생은 폐가 쪼그라드는 병[肺痿]을 앓고 있어 거의 한 달 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왜적들을 대신하여 책봉(冊封)해 주기를 요청하는 한 조항에 대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참으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역시 왜적들의 실정을 상세하게 갖추어 써서 말하고 중국 조정의 처분을 마땅히 따라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스스로 떨쳐 일어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저 대국(大國)에 의지하여 다시 회복되기를 도모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 경략이나 이 제독은 이미 모두 파직되어 떠났고, 고 시랑(侍郞 고양겸(顧養謙))이 겨우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바의 일을 또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기만 하다가 일을 맡은 사람이 발끈 노하여 등을 돌리고 앉아 우리와 한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결국 우리나라의 형세는 더욱더 고립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호택(胡澤)이 주본(奏本)의 초고를 구해서 보고 끝머리에 책봉해주기를 청하는 일을 분명하게 쓰고자 하였으나, 선생이 이를 거절하며 단지 이르기를 “위엄을 가지고 떨게 해서 그 완악함을 깨우치고, 계책을 가지고 얽어매어 그 화를 중지하게 한다는 이 두 가지가 옛날 제왕들이 오랑캐들을 제어하는 대권(大權)이었으며, 흉악하고 포악한 짓을 금지하고 생령들을 곡진히 보전하는 데로 한결같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시기에 따르고 형세를 살피는 것은 오직 성조(聖朝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조정)에서만 택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호택이 말을 만든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싫어하여 ‘계(計)’ 자를 ‘관(款)’ 자로 바꾸어 써서 가지고 갔다. 당시 화친을 허락하자는 의론은 그 주도권이 중국 조정에 있었고, 우리나라는 명을 받는 형편이었으므로 마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뒷날 선생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에 주화(主和)하였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았으니, 그 기금(箕錦)이 매우 심한 것이다. 선생의 병이 위독해지자, 네 차례나 차자를 올려 사면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6월에 조목별로 전수(戰守)의 기의(機宜)를 진달하였다. 대략, 적의 길을 차단한다면 주사를 크게 펼치는 것으로 근본 삼고, 적들을 앞뒤에서 몰아치려면 험악한 곳에 웅거하여 맞아서 공격하는 것을 위주로 하며, 그 나머지 산성의 설치, 강진의 수비, 군량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는 일 등이 대부분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7월에 군사 훈련을 청하는 계(啓)의 대략에,
“옛날 명나라 정통(正統)의 난리에 중국의 정세(政勢)가 또한 몹시 위태롭고 급했는데, 우겸(于謙)은 병부(兵部)가 되어 정병(精兵)을 불러 모아 도성에 12영(營)을 설치하였습니다. 재주와 용감함을 갖춘 이들을 가려 뽑아 군사를 나누고 통솔하여 밤낮으로 훈련시켜 결국 강한 적을 꺾고 부수어서 천하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의논하는 사람들은 혹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을 급히 힘쓸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으로 생각도 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운행과 변화를 주장하여 날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흥기하게 하고, 군정(軍政)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은 바로 병조(兵曹)의 책임입니다. 병조에 책임을 맡겨 훈련으로 효과를 거두고, 병조에서는 장수에게 책임을 맡긴다면 체통(體統)이 설 것입니다. 마음과 힘이 한결같이 된다면 무엇을 한들 이루지 못하며, 무엇을 시킨들 행해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9월에 계청하기를,
“널리 인재를 취하여 어지러움을 평정하는 곳에 이용하소서. 지금의 쓰임에 절실한 자를 열 조항으로 나누고 재신(宰臣)과 삼사(三司)의 관원들로 하여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인재를 천거하게 하되, 귀천은 논할 것도 없고 오직 실제 재주가 있는 이를 천거함에 힘쓰소서. 그리고 포부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던 사람을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령(守令)에게 직접 찾아내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이같이 하고도 또한 빠진 인재가 있으면 스스로 천거하는 것도 허락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군량을 미리 갖출 것을 청하였다. 대략에,
“지금의 위태한 형세가 진실로 복잡하지만, 그중 팔짱을 끼고 아무 계책도 세우지 못하는 것은 군량에 관한 것이 유일한 일입니다. 경성에 비축한 군량은 겨우 두어 달을 버틸 수 있고, 지방의 창고도 한결같이 고갈되었습니다. 공사(公私)의 형편도 위태위태한 것이 이와 같은데, 오늘날 의논하는 사람들이 혹 은(銀)을 캐서 곡식과 무역하라고 하니, 그 실제의 쓰임을 구하면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대개 은이 비록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긴 하지만 생산되는 소출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힘은 많이 들지만 채취할 수 있는 양은 매우 적습니다. 오늘날 재물을 생산하는 방법은 별도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아뢴 바와 같이 각도의 공물과 진상할 물건을 다 쌀로 내게 하고, 또 번 드는 군사가포(軍士價布)와 각 관청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을 모두 쌀로 내게 하여 서울에 모으면 십여만 석의 쌀을 모을 수 있으니, 안팎의 군량을 그것으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밖에도 소금을 만드는 것도 재물을 모으는 중요한 방책입니다. 옛날에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말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주 나라[成周] 시대에도 염관(鹽官)의 말이 나오며, 제 나라에 태공(太公)을 봉한 것도 곧 물고기와 소금의 이로움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뒤에 제 나라 환공(桓公)이 나라 다스림을 관중(管仲)에게 묻자 관중이 염책(鹽策)으로 답하였습니다. 그 뒤에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부터는 다 특별히 사(使)를 두어 거느렸습니다. 쓰임의 간절함이 오곡과 서로 같습니다. 전국 팔도의 경계에 곳곳마다 모두 소금을 생산하여 이익을 얻는 데에는 특별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염호(鹽戶)들을 먼저 불러 모아 그들을 편안하게 모일 수 있게 하고, 그 잡역을 덜어서 동요하지 않게 하고, 때를 따라 피차 팔고 사기를 옛날의 법처럼 한다면, 군량(軍糧)과 종자(種子)를 천만 섬은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또 둔전(屯田)이 있으니, 더욱 마땅히 때에 맞게 힘써 행하고 권과(勸課)할 정사를 힘써 실행하여 조금이라도 지연시켜 기회를 놓치지 마소서.” 하였다.
겨울에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와 관련된 책자(冊子) 하나를 올렸다. 그 조목은 ‘척후(斥候)’·‘장단(長短)’·‘속오(束伍)’·‘약속(約束)’·‘중호(重壕)’·‘설책(設柵)’·‘수탄(守灘)’·‘수성(守城)’·‘질사(迭射)’·‘통론형세(統論形勢)’였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다. 또 강변에 작은 성(둔보 屯堡)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일에 대해 청하였다. 그 대략에,
“동진(東晉)과 남송(南宋)은 강 왼편으로 끼고 나라를 세운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진(晉)은 오히려 장강으로 유석(劉石)을 방어하였습니다. 송이 몽고를 방어하지를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개 진나라는 번진(藩鎭) 제도를 두고 여러 고을을 합하여 하나의 큰 진을 설치하여 대장(大將)에게 그것을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병력이 분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력이 한 지역의 적군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환충(桓冲)과 도간(陶侃) 같은 사람은 모두 천 리를 통제하였습니다. 송나라가 처음 건국할 때 당(唐)나라 말기와 오대의 미대(尾大)를 근심하여 번진의 권한을 없애고 모두 군현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망할 무렵에 군사는 나뉘고 세력은 약해져, 적군이 한 군에 오면 한 군이 패하고 한 현에 오면 한 현이 패하여, 오랑캐가 안으로 침범해오는 근심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입신(汪立信)이 건의하여 양자강과 회수 사이의 여러 고을을 합하여 4개의 큰 진을 만들어 내지(內地)의 군사를 모두 출정시켜 힘을 합해 오랑캐를 방어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진관(鎭管) 제도도 대개 이러한 뜻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권한이 무겁지 않아 호령을 행할 수 없었고 태평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지나치게 해이해졌기 때문에 떨쳐 일어날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우리나라의 형세는 서울만큼 험한 곳도 없습니다. 대체로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앞뒤로 둘러 있고, 동북으로 높은 산과 큰 고개가 가로막고 있으며 서쪽에는 큰 바다가 둘러 있습니다. 바로 천연의 요새[天險]라는 것입니다. 경기도에 네 진관(鎭管)을 두었습니다. 수원(水原)과 광주(廣州)는 한강의 남쪽에 있으면서 그 문호가 됩니다. 양주(楊州)는 서울의 오른쪽에 있으면서 오로지 동북(東北)을 가리고 있고, 장단(長湍)은 뒤에 있으면서 오로지 북쪽을 방비합니다. 강화(江華)와 교동(喬桐)은 바다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예속된 곳 없이 오로지 바다를 방어하는데 힘을 쏟게 하였습니다. 대략 그 배치한 규모를 역시 알 수가 있습니다. 다른 도를 미루어 봐도 모두 그렇습니다. 사실 군사 정책의 큰 강령은 바다를 방어하는 훌륭한 계획입니다. 참으로 이 제도가 실추되지 않게 진관에 사람을 배치하여 각각 그 소속을 통솔하고, 각각 믿을 만한 땅을 지켜 대장의 명령을 들어 싸우고 지킨다면, 국가의 안팎 형세가 반석같이 안정될 것입니다. 어찌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부서지는 듯한 변란이 있겠습니까. 또한 땅은 반드시 웅거해야 될 곳이 있고 성은 반드시 지켜야 될 곳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송나라는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중요하게 여겼던 곳이 양양(襄陽)과 번구(樊口)였습니다. 처음에 악비(岳飛)가 수리하여 중요한 진으로 삼았습니다만, 원나라 군대가 남하할 무렵에는 양양이 함락되어 임안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형세를 모르면 그 노력이 헛수고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도성은 한강 때문에 견고합니다. 그러나 만약 충주를 잃게 된다면, 적군이 상류를 따라 내려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모집한 군사를 연습시켜 상등과 하등으로 점수를 부과하고, 아울러 조령 부근의 기름진 땅을 경작할 수 있게 하여 둔전을 한다면, 1, 2년 사이에 관문의 방어가 자연스럽게 견고해질 것입니다. 둔보(屯堡)를 함에 있어서 군사가 없고 양식이 없으면 쉽게 할 수 없습니다. 비변사의 계청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난리를 겪은 후로 백성들이 흩어져 머물러 정착한 곳이 없기 때문에 단결하여 모이기가 쉽습니다. 형세가 농사를 짓고 지킬 만한 곳을 택하여 거주하게 하십시오. 생업을 경영하게 하고 농번기에는 농사일을 권장하고 농한기에는 군사를 연습시킨다면, 안으로 지방 도적을 막고 밖으로는 외부의 적군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한 곳에 이렇게 하고 다른 곳도 그렇게 하여 기맥을 연결되게 하고 형세를 의지하게 하소서. 지난해 환도할 즈음에 경기의 백성으로 강한 자는 도적이 되고, 약한 자는 구렁에 뒹굴어 도로가 통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용진(龍津)에 둔전이 설치된 뒤로부터 동쪽 길이 통하였으며, 독성(禿城)·양지·용인·경안·죽산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도적이 그로 인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적군이 지나간 곳은 모두 이렇게 경영하면 배치가 고르고 조리가 사방에 미치게 되어, 이른바 ‘생민을 모아 훈련한다’고 한 것은 다 이러한 것에 있습니다. 강을 따라 둔보(屯堡)를 설치하는 곳은 흥원창(興元倉)으로부터 서울까지 겨우 수백 리일 뿐인데, 용진(龍津)이 바로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 용진 위로는 변응성(邊應星)에게 요해를 뚜렷하게 살펴서 분포를 지휘하게 하십시오. 용진 아래도 이렇게 조치할 수 있습니다. 서울 밖 삼강(三江) 백성들도 더욱더 잘 보살펴 살아갈 방법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또 말하기를,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혀 병사를 뽑아 장수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대개 사람을 쓰는 방법은, 널리 취함을 소중하게 여기고 좁게 취함을 소중하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어진 이를 세움에는 출신을 가리지 않는다.[立賢無方]’ 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이 선비를 천거할 때 반드시 초라한 집안 출신을 우선으로 삼았고, 관중(管仲)은 제(齊) 나라 때 재상이 되어 도둑 2명을 천거하였습니다. 안영(晏嬰)은 한마디 좋은 말을 듣고 자기의 말 모는 이를 천거하여 대부로 삼았습니다. 서한(西漢) 때 인재가 융성했던 것은 군현(郡縣)의 서리들을 많이 뽑아 썼기 때문입니다. 위·진(魏晉) 이래로 비로소 문벌과 지위를 논의하게 되어 정교(政敎)가 무너지고 퇴폐한 것은 이에 맞춰 직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은 이에 더욱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세상이 다스려지면 어진 인재가 위에 있으니 초야에 버려지는 현자(賢者)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업적이 모두 빛나고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납니다. 난세에는 위에 있는 자가 모두 반드시 현인이 아니고, 아래에 있는 자가 반드시 다 어리석지만은 않습니다. 춘추(春秋)에 무씨(武氏)·윤씨(尹氏)·잉숙(仍叔)의 아들을 기록하였는데, 모두 문벌과 지위가 높이 드러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때 의봉인(儀封人)·장저(張沮)·걸익(桀溺)·하궤(荷蕢)의 무리는 모두 비천한 자리에 머물러서 밭두렁 가운데서 탄식만 했습니다. 세도의 흥망은 이것이 그 큰 기틀이요 대개입니다. 역사서에서 조조(曹操)는 어진 인재를 발탁하되 미천함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 것은 재능에 따라 소임을 맡겨서 각자가 그 능력을 다하게 한 것입니다. 그가 한때 거짓으로라도 나라를 평정한 것은 오직 이런 장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인재는 남쪽 지방을 많이 썼고 서북은 거의 없고 조금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서북이라 해서 인재가 없지 않습니다. 다만 지역이 멀어 당겨 주고 밀어주는 형세가 적을 뿐입니다. 변고 이후 7방[七方]이 와해되어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가니, 평안도 사람들은 바삐 달려 나와 임금께 조아리고 마음과 힘을 다해 군병을 조발하고 양곡을 날라다 명나라 군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여러 도를 수복했으니 그 공로가 매우 큽니다만, 지금 한 사람도 조정에 벼슬한 자가 없습니다. 가끔 희망과 기대를 하고 왔던 이도 실망하여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개 이같이 하고서 어떻게 한 지역의 민심을 달랠 것이며, 아울러 장래에 권면하겠습니까.
널리 쓸 만한 자를 간간이 발탁하여, 인재들로 하여 다투어 권면하도록 하되 남북을 가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왜적은 우리에게 있어서 만세를 두고 꼭 갚아야 할 원수입니다. 지금 비록 세력이 오므라들어 쇠약함을 면치 못하지만, 와신상담하여 꼭 갚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잠시도 풀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수도 빈말과 하는 일이 없이는 될 수 없습니다. 안으로는 굳게 참는 의지가 있고 밖으로는 유구한 정치가 있어, 군신 상하가 단단히 한 마음으로 먼저 규모를 세워 먼 장래를 기약해야 합니다. 예컨대 월(越) 나라는 10년간 출산을 장려해서 인력을 모으고, 10년을 가르치고 훈련 시켜 20년간을 일념으로 멈춤 없이 때를 기다려 움직였습니다. 이는 얼마나 정성스러우며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만약 의지가 굳게 서지 않고 먼저 계획이 정해 있지 않으면, 이리저리 옮기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귀결처가 없게 됩니다. 아침에는 갑의 말을 따라 한 가지 일을 행하고 저녁에는 을의 말을 듣고 그 일을 폐지합니다. 오늘은 이쪽으로 내일은 또 저쪽으로 가면, 실제의 공은 뜬소문에 가리고 작은 절차가 대체를 방해하여 움츠렸다 폈다 일어났다 엎어졌다 하게 될 테니, 비록 세상이 다하고 해가 마치도록 한 가지 일도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호남(湖南)의 사인(士人) 나덕윤(羅德潤) 등이 상소하여 기축년(1589, 선조22)에 원통하게 죽은 자들을 신원(伸冤)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이로 인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기축년 옥사(獄事)가 처음 일어날 때, 임금께서 파급되는 우환을 염려하여 옥석을 모두 불살라 버리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만약 그때 옥사를 맡아 처리하는 신하가 지극하신 뜻을 미루어 넓혀 심문(審問)을 잘하고 변별을 분명히 하여 실정을 파악함으로써,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그 사이에 개입하지 않게 하였다면, 원흉과 대악, 그리고 율법에 연좌된 자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평소 그들과 교유하면서도 역모를 몰랐던 자와, 한두 번 얼굴을 맞댔거나 한두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던 자, 그리고 모함에서 나온 자, 또는 풍문에 따라 나온 자 등은 마땅히 모두 차례로 원통함을 풀어 실제의 정상과 죄상이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크게 따르게 되고 원통하게 쓴 누명을 벗을 것입니다. 대개 이를 가리켜 ‘천토(天討 하늘이 악인을 침)’라 하며, 또한 이른바 ’왕법(王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렇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한쪽 사람들이 이미 여기에 가탁하여 수사연좌(收司連坐) 하는 계책을 꾀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호오에 투합하거나 태도와 의지를 엿보고 소를 올려 죄 없는 자를 얽어매는 일이 관서(官署)의 앞에 서로 잇달았습니다.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선비에 이르기까지 발을 움직이고 손을 흔드는 것조차 모두 지목하는 대상에 들어가 사소한 말이라도 반드시 역적을 두둔하는 죄목에 빠뜨렸습니다. 3년 동안의 큰 옥사에 원통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만 가지인데, 한 사람도 이 같은 사실을 임금 앞에 아뢰는 자가 없습니다. 이는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저버린 죄가 심한 것이니 모두 죄가 있는 것입니다. 석방의 문을 모두 열어 원통함을 모두 풀어주었으나, 유독 이미 죽은 최영경(崔永慶)·정개청(鄭介淸)·유몽정(柳夢井)·이황종(李黃鍾)과 같은 사람은 일시도 누명을 벗지 못했습니다. 대개 큰 옥사(獄事) 후에 반드시 대병란이 있음은 사리가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인심이 기왕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국가의 천명을 한번 새롭게 하려는데, 만약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원한을 품고 땅속에 묻혀 누명을 벗지 못하게 된다면, 그 억울한 원망의 기운이 또한 위로는 천화(天和)를 범해 국가의 형정(刑政)에 허물이 될 테니 작은 일이 아닐 겁니다. 정개청 등의 원통함을 풀어주시고, 이 밖에 차(箚)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사람도 역시 있습니다. 의금부(義禁府)로 하여 자세히 기록하여 경중에 따라 석방하여 용서하고 그물을 풀어주는 은혜를 어두운 황천(黃泉)의 끝[覆盆]까지 넓게 펴시면, 유신(惟新)의 정치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9월에 해직시켜 주기를 청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10월에 휴가를 받아 귀성(歸省)하였다. 여주(驪州)에 도착하였을 때 도로 소환되어 경기, 황해, 평안, 함경 등 네 도(道)의 도체찰사[京畿黃海平安咸鏡四道都體察使]에 제수되었다. 공문을 보내어 사도(四道) 감사에게 군병들을 조련하라고 유시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군병들을 조련하는 규식(規式)을 정하고, 이를 사도(四道)에 반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 조정에서 이종성(李宗誠)과 양방형(楊方亨)을 책봉사(冊封使)로 삼아 보냈는데 이는 앞으로 평수길(平秀吉)을 책봉하여 일본 국왕(國王)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심 유격(沈遊擊)이 항상 왜적의 군영을 오가면서 그 일을 임시변통으로 처리해 나가고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책봉사가 장차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심 유격이 우리나라에 자문을 보내어, 중신(重臣)을 파견해 책봉사를 따라 함께 바다를 건너게 하라고 하니 조정의 의론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를 몰랐다. 선생이 아뢰기를,
“지금 평조신(平調信)이 돌아온 것은 그 형색(形色)이 의심스럽습니다. 만일 평수길이 중국 사신을 기쁘게 맞이하면서 단지 우리나라 사신과 동행하기를 요구하는 것일 뿐이라면, 평조신이 어찌하여 날마다 그 무리들과 몰래 의논한 연후에야 비로소 심 유격을 만나고, 심 유격 역시 어찌하여 병을 핑계 대면서 문을 닫고 들어앉은 채 천사를 직접 만나 보지 않고 그저 하인들로 하여금 전달하게 한단 말입니까? 신은 매번 이 왜적들이 끝에 가서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하여 혼란을 일으킬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지금 일의 형세가 점점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그들의 요구가 단지 통신(通信)하는 데만 그칠 뿐만 아니라, 또한 혹시 약속을 어기려고 이를 핑계 삼아 말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심 유격 역시 이 일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더 이상 계책이 없자 우리에게 허물을 돌리고 스스로 모면할 방법으로 삼으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지금 곧바로 말하여 거절하게 된다면 정치적으로 심 유격의 농간에 빠지게 됩니다. 만약 그가 말한 것을 따라 하고자 한다면 이는 또 인정과 의리에 있어서 차마 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록 우리가 사신을 보낸 뒤에도 왜적들이 머물지 떠날지 또한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땅히 회답해야 한다면,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일본과 조그마한 원한이나 틈도 없었다. 뜻밖에 일본이 천리(天理)를 어기고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백성을 살해하거나 우리의 종묘사직을 불 지르고 우리의 능묘(陵墓)를 파내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피눈물을 머금고서 차라리 죽음이 있을지언정 어찌 감히 강화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있다. 지금 중국 조정에서 남북의 백성들을 겸애(兼愛)하여 훈척대신(勳戚大臣)을 시켜 헤아릴 수 없는 위험한 땅에 보냈는데, 이는 난을 해소하고 군사를 쉬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인은 어명(御命)을 띤 당사자로서 우리나라에 교계(敎戒) 하면서 심지어 예의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견책하고 있는데, 이는 실로 중국의 체통에 관계되는 것이다. 다만 일본 사람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말을 번복하여 믿고 신뢰할 수 없다. 비록 조사(詔使)가 황명(皇命)으로 왔는데도 아직 그 요령을 얻지 못하여 기장(機張), 죽도(竹島), 안골(安骨)에 있는 왜적들은 둔결(屯結)이 여전히 예전과 같다. 그런데 또다시 우리나라에 요구할 것이 뭐가 있다고 일개 사신을 보내고 안 보내는 것으로 경중(輕重)을 삼겠는가. 만약 이같이 한다면, 우리나라는 한갓 치욕만 더하게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테고, 대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서 한 일이 끝내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대인은 다시금 저들의 실정을 살피고 아울러 책사(冊使)와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되, 눈앞에 놓인 일만 구차하게 해결하려고 하거나 구차하게 목전의 일만 미봉하려 들지 말고 멀리 앞날을 보고 계획을 세우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해야 합니다. 이렇듯 말을 만들어 보내어 그 답을 봐야 합니다. 한마디 말을 하는 틈에 쉽게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아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유격이 독촉을 끝내지 않아 황신(黃愼)을 심 유격의 접반사(接伴使)로 부산에 파견하였다.
4월에 이종성(李宗誠)이 왜영(倭營)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도성[都下]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얼마 되지 않아 도성을 떠나가는 자가 거의 반도 넘었다. 또한 재상(宰相)과 대시(臺侍)들도 몰래 가속(家屬)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자가 있었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상사(上使)가 왜영에서 나왔다는 보고가 막 이르렀으며, 부사(副使)가 아직 왜영에 있어 조처한 것에 대해서는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만약 적병이 결국 움직인다 해도 어찌 하루 이틀 사이에 도성까지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먼저 민심이 무너져 쉽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이 없습니다. 이런데도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금성탕지(金城湯池 방비가 견고한 성)와 같은 요새나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가 있다 해도 역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조정 신하들 가운데 먼저 가속을 성 밖으로 내보내어 백성들의 본보기가 된 자들은 법관(法官)을 시켜 조사해 내어 아뢰게 하고, 도성 사람으로서 성 밖으로 나간 자는 한성부(漢城府)로 하여 이름을 기록해 두어 뒷날 조처를 기다리게 하라.’고 명하고, 또한 방문(榜文)을 내걸어 효유(曉喻)하여 진정시켰다.
또 아뢰기를, “삼군(三軍)과 만백성의 마음이 한 사람의 진퇴(進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근본이 되는 곳을 지키지 못하는 계책을 세운다면, 지엽적인 지역은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도성을 옮겨서 보존하려는 것은 한때의 급박한 사정에서 나온 설이니, 사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7월에 호서(湖西)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켜 잇달아 두 고을을 연이어 함락시키고 진격해 홍주(洪州)를 포위하였다가 목사(牧使) 홍가신(洪可臣)에게 사로잡혀 서울로 올려 보내졌다. 사대부들 가운데에도 체포된 자가 있었다. 선생은 한결같이 아주 공정하게 옥사(獄事)를 다스려 한 사람도 억울하게 걸려든 사람이 없으니 원근 사람들이 모두 다 승복하였다.
윤8월에 임금이 대신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에게 청정(聽政)하게 하였는데, 참소하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거의 수십 일 동안 간쟁하였는데, 임금의 뜻은 더욱더 굳어졌다. 복합(伏閤)한 지 거의 한 달쯤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9월에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손수 글을 내려 타이르기를,
“지금과 같은 때를 당하여 경은 하루라도 재상의 지위에서 떠나 있어서는 안 된다. 경이 아니면 누가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 도탄에 빠진 이 백성들을 건져 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 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기보(畿輔 경기지역에 있는 진영)와 관방(關防 방비 요새)을 순시하였다. 2월에 조정에 돌아와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이 우병사(右兵使) 김응서(金應瑞)에게 몰래 말하기를,
“나는 가등청정(加藤淸正)과의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책봉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역시 가등청정이 저지한 것이다. 가등청정이 가까운 시일에 일본에서 나올 텐데, 만약 수군을 출동시켜 사로잡는다면 내 원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에서 크게 승리하여 그의 위세가 일본에 떨쳐 행장이 걱정거리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수군의 허실(虛實)을 엿보고자 해서 한 말이었다. 김응서가 그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니, 이순신에게 명하여 대양에서 요격하게 하였으나 가등청정이 이미 돌아와서 배를 정박시키고 있었다.
당시 원균(元均)이 이순신의 공이 높은 것을 꺼려서 아첨으로 권귀(權貴)를 섬겨 이순신을 모함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순신은 선생에 의해 추천을 받아 충직하여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때 선생을 꺼리는 사람들조차도 이순신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생을 두고 적을 보고 두려워하며 피하고 나아가지 않는다고 서로 입을 모아 훼방하려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금이 법에 따라 이순신을 다스리고 원균으로 하여 대신 맡게 하고자 하였다.
선생이 비국(備局)에 있으며 논계(論啓)하기를 “한산도는 이순신이 아니면 지킬 수 없습니다. 한산도를 지키지 못한다면, 호남(湖南)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을 테고, 국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더욱더 화를 내며 비변사(備邊司)가 비위만 맞추면서 곧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선생은 오히려 국사의 성패가 달린 일이라고 하면서 온 힘을 다해 간쟁하였다. 임금이 선생에게 경기 고을로 나가서 순시할 것을 명하고, 내직에 재신(宰臣)을 데려와서 이순신의 죄를 논하였는데 최황 등이 그 결정에 동조하였다. 그 후 결국 원균이 크게 패전하고 호남이 와해되었는데 이는 모두 선생이 언급한 것과 같았다. 선생은 병을 핑계로 모두 네 차례 차자를 올리고, 네 차례 사유를 아뢰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선생은 평생 말투와 얼굴빛을 구차히 하여 다른 사람을 따른 적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국정을 맡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원망을 도맡아 받으면서도 돌아보지 않으니 이러한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8월에 선생에게 명하여 기호(畿湖) 지방에서 왜적을 막게 하였다. 공은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떠나갔는데, 참소하는 자가 ‘온 가족을 데리고 갔다.’고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듣건대 대신이 자신의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하는데도 대간이 한마디 말도 없으니, 대신이 과연 권세가 있다고 하겠다.” 하니, 대사헌으로 있던 이헌국(李憲國)이 선생 및 다른 대신의 가속이 있는 곳을 일일이 들어 변론하였다. 이에 상의 뜻이 풀어져서는 곧바로 선생을 소환해 불러들였다. 미처 명을 듣지 못하고 스스로를 탄핵하는 차자를 올리니, 임금이 글을 내려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당시 왜적들의 형세가 아주 급박하여 인심이 모두 흩어져 거의 텅 비게 되었다. 드디어 선생이 관할하고 있는 사도(四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도성으로 들어온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경기(京畿)의 병사를 활용하여 강변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삼도(三道)의 병사들에게 성을 지키게 하였다. 병사들의 기율(紀律)이 엄숙하여 함부로 도망쳐 흩어지는 사람이 없었다.
9월에 임금이 강탄(江灘)으로 나가 순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고 위문하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선생을 불러 말하기를,
“병사들의 용모가 엄숙하고 완급(緩急)을 믿을 만하구나.” 하였다.
11월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영남으로 내려가서 군량을 조치하였다.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앞으로 군사를 출동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 경리가 처음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일은 마땅히 류모(柳某)와 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어찌 환란을 다스림에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경리에게 모함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류모는 공을 보잘것없게 여기면서, 공은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없다고 한다.” 하였다. 그래서 거짓으로 모함하는 일이 많았고, 심지어는 경리의 관소(館所) 문에 비방하는 글을 붙이기도 하였다.
하루는 경리가 접반사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적으로 말하기를, “류모가 형 군문(邢軍門)에게 죄를 얻어서 형 군문이 장차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곳에 도피해 왔다고 한다. 그러니 군량 등에 관한 일을 윤승훈(尹承勳)에게 완전히 떠맡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역관(譯官)을 통해 이 소문을 듣고 함부로 믿을 수 없어 이덕형에게 물으니 그런 말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도사(都司) 백황(白璜) 역시 경리의 뜻으로 남이공(南以恭)에게 분부하기를 한결같이 이 말처럼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비로소 그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장계를 올려 상황을 말하고, 직명을 삭제시켜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술년(1598, 선조31) 봄에 소환되었다. 수차례 사직하려는 차자를 올렸다. 임금이 답하기를, “이같이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에 즈음하여 대신이 어찌 사퇴하는가. 비록 헐뜯는 말이 있다고 해도 더욱더 국사에 온 힘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지, 쉽게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다.
9월에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양 경리의 20가지 죄목에 대해 탄핵하는 내용을 임금에게 올렸다. 임금이 좌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보내어 상소문을 심리하게 하였다. 정응태가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우리나라가 중국을 기망했다고 아울러 탄핵하였으며, 또 왜적들과 내통하여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임금이 흥분하여 화를 내며 국사를 돌보지 않고 왕의 직위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백관을 거느리고 쟁론하였고, 마침내 의논하여 대신을 보내어 모함을 변론하였다. 이덕형을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지평(持平) 이이첨(李爾瞻)이 선생이 스스로 중국으로 가기를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대신으로서 나라에 봉사하는 의리가 없다는 것으로 탄핵하였다. (李山海自以所行陰邪。爲淸議所不容。蓄怨於心。爾瞻。山海之孚也。又謂鄭仁弘曾有仇於先生。起其門客文弘道爲臺諫。相與捃摭罪過 不可得則始以規避赴燕爲題目。以動上心。橫羅豎織。)이에 앞서 이산해는 몰래 간사한 일을 행한 까닭으로 청의(淸議)에 수용되지 않자 마음속으로 원망을 두고 있었다. 이이첨은 이산해의 하수인으로, 지난날 정인홍(鄭仁弘)이 선생에게 원한이 있다고 하여 문홍도를 대간으로 삼아 서로 함께 허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마침내 부연(赴燕 중국으로 사신으로 가는 것)으로 규피(規避)하는 것으로 제목(題目)을 삼고,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이리저리 죄를 얽어 꾸며대었다. 끝내는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쳐 극단적인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유생인 홍봉선(洪奉先), 최희남(崔喜男) 등이 간사한 인간들의 지시를 받고 상소를 올려 근거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생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장차 거짓말로 군문(軍門)에 정문(呈文)을 작성하고자 하였다. 유생들이 모였으나 무고임을 알고 모두 흩어져 갔다. 투서를 한 사람은 오직 이호신 등 몇 명뿐이었다.
선생은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였으나, 청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곧바로 성 밖으로 나가 있으면서 명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또다시 세 차례나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조정이 대신들을 대우함에는 대신들의 체모가 있으니, 유죄와 무죄를 따라 나아가고 물리칠 적에는 예의로써 대우함이 마땅하고 소나 말을 매듯이 하여서는 안 됩니다. 대신이 된 사람도 또한 조정의 체모를 생각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조금 염치를 차려서 자기의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마구간의 머슴이나 천한 종놈과 같이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신은 조정에서 일한 지 30여 년에 한 가지 일도 국가에 보답하지 못한 데다가 말로에 ‘간(奸)’이란 글자를 얻어 평생토록 해 온 일을 다 버리게 되어 성상의 지우(知遇 인격·학식을 알아서 후히 대우함)의 은혜를 배반하고, 군부가 길러 주신 덕택을 저버렸음을 오히려 무엇으로 말씀드리겠습니까. 어제 해 저물 무렵 유생들의 상소를 보았는데, 말을 하자니 입이 더럽고, 보자니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신은 외람되이 외로운 뿌리로서 못 있을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비록 부승(負乘)의 재앙이 치구(致寇)할 날이 머지않을 줄을 알았지만, 또한 사람들의 노여움이 이런 극단적인 지경에 이를 줄 몰랐습니다. 신은 교외에 엎드려서 거적자리를 깔고 처벌을 기다리겠으니, 영해(嶺海) 밖으로 보내 주실 것 이외에는 결코 거듭 도성의 성문에 들어갈 의리가 없습니다. 신이 바라건대 여론을 굽어살펴 신의 직위를 삭탈하도록 속히 명령을 내리소서” 하였으나, 윤허 받지 못하였다.
10월에 체차(遞差)되고서 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1월에 파직되어 돌아갔다. 말하는 사람들의 논의가 끝없이 이어져 노기(盧杞)나 진회(秦檜)로 비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부제학 김우옹, 참판 김륵이 글을 올려 힘껏 말렸으나 답하지 않았다. 선생이 남쪽을 향해 내려가다가 도미협(渡迷峽)에 이르러 삼각산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네 번 절을 하니, 이는 대개 여기를 지나면 다시는 서울의 산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있다.
전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3천 리인데, 田園歸路三千里
유악의 깊은 은혜는 40년 동안이었네. 帷幄深恩四十年
도미천에 발을 멈추고 되돌아보니, 立馬渡迷回首望
종남산 빛은 여전히 그대로구려. 終南山色故依然
운암(雲巖)을 경유하다가 「단양행(丹陽行)」 한 편을 남겼다. 선생의 행리(行李)는 소박하였고 자제들이 모두 같이 걸었다. 십여 일이 지나서 마침내 도착하였는데 오는 길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스러웠다. 12월에 관작을 삭탈 당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 6월에 직첩(職帖)을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삼사(三司)에서 또 논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을 논함에 있어서 실정에 지나치게 되면 비단 당사자만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곁에서 보는 자도 역시 승복하지 않는다. ‘주화(主和)’라는 두 글자를 말꼬투리 삼으면서 심지어는 류성룡을 진회(秦檜)에 비유함에까지 이르렀다. 진회는 남몰래 오랑캐의 지시를 받아 처자식을 보전하고자 송(宋)나라에 잠입하여 금(金)나라 사람들을 위해 계책을 써서 화의(和議)를 힘써 주장하고 악비(岳飛) 등을 죽였던 것이다. 지금 류성룡 역시 왜적과 남몰래 내통하면서 음모를 꾸민 일이 있는가? 이런 주장으로 인심을 복종시키고 국시(國是)를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대개 그의 마음은 종묘사직이 장차 망할까 걱정되던 판에 중국 조정에서 이미 화의를 허락하였기 때문에 임기응변책으로 그 일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 일의 실정이 이와같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아, 그 당시 누구인들 그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와서는 다투어 서로 벗어나려고 하면서, ‘나는 이런 적이 없어. 나는 이런 적이 없어.’ 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우상(右相 우의정)의 죄인이다. 그리고 뭇사람들의 의론을 무시하고 밤중에 사신을 보냈다는 말은 더욱더 말이 안 된다. 그 당시 널리 조정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한 일로, 그 당시의 조정 논의는 지금도 정원(政院)에 남아 있어서 상고할 수 있다.” 하였다.
아, 위대하도다. 왕의 말이여. 훗날 선생의 심사를 알고자 하는 자는 여기에서 보면 그 대강의 내용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 대간들이 화의(和議)를 주장했다는 내용으로 선생을 공격할 적에 우의정으로 있던 이항복(李恒福)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중(南中)에 있을 적에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시사(時事)에 대해 말하게 되었는데, 신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국세(國勢)는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목구멍 사이에 기(氣)가 꽉 막히어 모든 맥(脈)이 곧 끊어지려는 것과 같다. 그러니 반드시 먼저 이 기를 급히 내린 다음에야 살리는 방도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오직 이원익만이 들었고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하여 함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 숨기겠습니까. 지금 이미 이런 내용으로 류성룡을 죄주었으니, 차례차례 제거해 나간다면 신의 몸에도 닥쳐올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비답으로 특별히 이를 거론하여 삼사(三司)를 부끄럽게 하였다. 그러나 끝내 삼사의 의론에 따르고 말았다.
아, 송(宋)나라 때 선왕의 능침이 오랑캐의 영토로 떨어지고 중원의 적자(赤子)가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나라가 원한을 갚을 재력이 충분히 있으면서 오랑캐의 뜰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신하를 자처하며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진회(秦檜)의 죄상이 위로 하늘에까지 통할 것이다.
우리가 왜와 더불어 강약이 판연히 다르고, 당시의 사태는 군사가 이미 목전에 이르러 조종하는 형세가 저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았다. 또 강화(講和)하는 것은 잠시 출사의 기일을 늦추어서 뒷날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일 뿐, 송나라처럼 신하를 자처하고 폐백을 바치지는 일이 없고 오히려 진회(秦檜)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에 비겨도 일이 서로 비슷하지 않은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적이 이윽고 바다를 건너 전쟁의 재앙이 비로소 완화되었는데, 병오년(1606, 선조39) 이후로 통화(通和)에 대한 말이 지난날 화의를 공격하던 자의 입에서 자주 나오니, 그때 일은 화의를 공격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선생을 공격하는 데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이 선생(李先生)의 연보를 지었다. 11월에 직첩(職牒)을 돌려줄 것을 명하였다. 12월에 예부(禮部)의 통보로 인하여 성(城) 동쪽의 교외에 이르러 길가에서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을 곡하면서 전송한 후, 그날 곧바로 남쪽으로 돌아갔다. 당시 이준이 편지를 보내어 출처를 여쭈었다.
“조정의 예는 엄함을 위주로 한다. 절제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나가는 곳이 아니다. 나는 조정의 반열에도 없고 맡은 일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곳에 함부로 참여할 수 없다. 무릇 상사(喪事)에 있어서 그 정해진 분수에 지나치거나 해서는 안 될 것을 범하는 것을, 옛사람은 ‘아첨하며 슬퍼하는 것’이라 하였다. 근래의 일이 이것을 닮지 않았겠는가. 퇴도 선생이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상에 외직에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지 못했는데 이 또한 하나의 예이다. 이미 조정의 논의가 매우 엄하니 감히 어길 수 없다.” 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 8월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상을 당하여 전례(典例)의 상례(喪禮)와 같이 매우 슬퍼하였다.
12월에 서용(敍用)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임인년(1602)에 조정에서 청렴한 관리를 선발하였다. 영의정 이항복이 가장 먼저 공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노인네는 한 가지의 덕행으로 말할 수가 없지만, 다만 미오(郿塢)와 같다고 한 모함은 씻고자 한다.” 하였다. 문홍도가 무술년(1598, 선조31)에 올린 계사를 두고 한 말이다.
계묘년(1603, 선조36) 정월에 식물(食物 식량과 물자)을 지급해 주라고 명하였다. 10월에 상복을 벗었으며,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갑진년(1604) 3월에 고신(告身, 직첩)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선생은 즉시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고, 이어 치사(致仕)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7월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소명(召命)이 내려졌다. 상소를 올려 사양하고, 또 녹권(錄券)에서 이름을 삭제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9월에 재차 소명이 내려졌으나, 또 사양하였다. 충훈부(忠勳府)에서 화사(畫師)를 내려보내어 화상(畫像)을 그리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마침 녹훈을 사양하고 있는 중이라는 이유로 사양하면서 되돌려 보냈다.
을사년(1605, 선조38) 정월에 회맹제(會盟祭)의 예(禮)가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교서 및 은, 비단, 마필을 내렸다. 또 본도에 명하여 장리(長吏)를 보내어 식물(食物)을 지급해 주었다. 3월에 봉조하(奉朝賀)의 녹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은 하는 일 없이 녹봉을 받아먹는 것은 마음에 편치 못하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려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정미년(1607, 선조40) 2월에 또 소명이 있었다. 당시에 선생은 이미 오래도록 병을 앓고 있었기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병중에도 오히려 관대(冠帶)를 하고 앉아서 자제들과 함께 경사를 강론하거나 혹은 경치를 접하여 시를 읊조렸는데, ‘관화록(觀化錄)’이라고 이름하였고, ‘살아서 순리대로 하면 죽어서는 편안하다.’라는 뜻이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덕을 닦고 정사를 세우며, 공정하게 듣고 두루 보며, 백성을 기르고 어진 자를 등용하며, 군정(軍政)을 닦고 뛰어난 장수를 가려 뽑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소(疏)를 남겼다. 또한 예장(禮葬)을 받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경계하는 유언을 남겼다. 아울러 손님을 사절하도록 명하면서 말하기를, “안정(安靜)을 취하면서 조화(造化)를 따를 뿐이다.” 하였다.
5월 정묘(丁卯)에 다른 사람의 부축을 의지하지 않고 앉았다. 신기가 환해져서 마치 병이 나은 듯하다고 하며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篇)」을 끝까지 다 읽었다.
무진일 아침에 급히 내의(內醫)를 앞에 데려오게 했다. 손을 잡고 영결을 고하면서 말하기를, “멀리까지 와서 병을 보살펴 주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망극하도다. 며칠이면 경성(京城)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말이 겨우 끝나자마자 시중을 들고 있던 자에게 명하여 당(堂) 가운데에 자리를 펴게 하고, 북쪽을 향하여 정좌하고는 태연히 돌아가셨다. 향년 66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이 몹시 애도하면서 조회를 폐하고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의식에 맞게 행했다. 원근에서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애석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은 서로 이끌고서 선생의 옛 집터에 자리를 마련하고는 몹시 슬퍼하며 곡(哭)을 하였다. 시장 백성들은 백건(白巾)을 쓰고 모여 곡을 하였다. 나흘 동안 시장을 닫고 앞다투어 부포(賻布)를 보내며 말하기를, “선생이 없었다면 이미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 하였다.
7월에 풍산현(豐山縣) 동쪽의 수동리(壽洞里)에 있는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모인 사람이 400여 명이나 되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6) 여름에 선비들이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사당을 세우고는 제사를 지냈으며, 뒤에 여강(廬江)에 있는 퇴계 이 선생(李先生)의 사당에 합부(合祔)하여 향사(享祀)하였다.
선생은 정신과 풍채가 맑고 밝아 마치 가을 하늘에 뜬 밝은 달과 같아서 바라보면 세속의 먼지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총명한 자질은 비슷한 또래에서 빼어났다. 어린 나이에 육상산어록(陸象山語錄)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 학문이 불교에서 나온 것을 알고는 스승의 말을 돈독히 믿고 우뚝하게 설 수 있었다. 변론은 명확하고 지킴이 견고하였으며, 평소에 심성을 기름이 넉넉하여 터득함이 더욱 깊었다. 일용(日用)의 사이에는 주경궁리(主敬窮理)에 공력을 쏟아 조금도 쉼이 없었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탐색하고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였다.
늘 말하기를 “성문(聖門)의 학문은 생각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생각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 세상 학자들의 병폐는 문장의 뜻에만 몰두하고 반대로 자신의 마음에서 구함을 알지 못하여 한갓 공언(公言)만을 이해하니, 비록 날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한 책을 외워도 또한 어찌 배움에 이익됨이 있겠는가?” 했다.
또한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정전(程傳)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을 사덕(四德)이라 하고, 본의(本義)에서는 점서(占筮)를 주관하였다. 상(象)에 나아가 이(理)를 밝힌 것이니, 이른바 기(器)도 또한 도(道)이고 도(道)도 또한 기(器)이다. 대학의 한 책은 모두 격물치지(格物致知)이고, 그 요점은 그칠 지(止)라는 글자 하나에 있다. 뜻은 마땅히 정성스러운 데 그쳐야 하며, 마음은 마땅히 바른 데에 그쳐야 하며, 집안과 나라와 천하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제(齊)·치(治)·평(平)에 그쳐야 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그칠 데를 알아서 그치려고 하는 것뿐인 것이다. 주역 설괘(說卦)에 ‘만물을 마무리하고 만물을 시작한 것은 간(艮)보다 더 성(盛)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간(艮)이란 그치는 것으로 일에 종시(終始)가 있다는 뜻과 일치한다.” 했다.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을 논하기를, “자사(子思)가 도리란 없는 곳이 없음을 설명한 말이니, 곧 시경(詩經)에서 말한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했다.
다른 경전에 대하여도 또한 모두 변석(辨析)이 정미(精微)하고 세밀히 낱낱이 분석하여 활연(豁然)히 밝고 정당한 이치를 알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유학의 정대(正大)함을 좇았다.
경전을 공부하는 여가에 또한 사학(史學)에 힘써 고인(古人)의 사적(事跡)에 나아가 그 숨겨진 뜻을 표출하였다. 「관사려측(觀史蠡測)」을 지었는데, 선유(先儒)들이 아직 드러내지 못한 견해가 많다. 서법(書法)의 억양(抑揚)과 인물의 출처(出處)에 이르기까지 그 줄기와 조목을 정리하여 마치 하나의 저울을 잡은 듯이 그 경중(輕重)을 예측했다.
「병법(兵法)」을 논하기를, “예악(禮樂)일 뿐이다. 일이 그 질서를 얻은 것을 예라 하고, 물(物)이 그 화(和)를 얻은 것을 악(樂)이라 한다. 백만의 군사를 수(數)로 나누어 정리되는 것은 예(禮)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만(萬) 사람이 한마음이어서 틈을 탈 사이가 없으니 화(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했다.
또한 “삼대에는 토지에 군비를 매겨 군사를 내었으나, 지금은 모름지기 부병(府兵)을 회복한 뒤에 군사는 농사에 붙어 있게 되어 금일(今日)에 양병(養兵)의 폐단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 교학(敎學)에 있어서는 “참됨을 알아 실천함을 귀하게 여기니, 만약 오랫동안 공부하는 공력이 없이 다만 배움에만 뜻을 둔다면 기욕(嗜欲 좋아하고 즐기려는 욕심.)의 치우침과 염습(染習)의 폐해가 있게 되어 선심(善心)의 발로가 잠깐 사이에 밝았다가 잠깐 사이에 사라져 다리를 붙이고 몰두함이 없게 된다.” 하였다.
그 치도(治道)에 있어서는 반드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맑게 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매번 입대(入對)할 즈음에 반드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알차고 깨끗한 한 마음[精白一心]으로 하였다. 그 성의(誠意)를 쌓아 의리(義理)를 개진하고 간절하고 가엽게 여겨 슬퍼하는 마음을 가졌다.
무릇 자신을 닦고 남을 등용하는 도(道)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나아가 정치하는 법도로 경훈(經訓)에 들어가 논설(論說)에 힘쓰니, 성상(聖上)께서 칭상(稱賞)하기를 “바라보면 공경심을 일으키게 된다.”라고 하며 감탄을 여러 차례나 하였다.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서 백관에게 모범이 되었다.
스스로 경세제민할 책임과 믿고 의지함의 중함으로 일시(一時)에 발탁되어 성대하지 않음이 없었으나(높이 올랐으나) 은총 받는 자리를 두려워하고 영예를 우려로 생각했다. 매번 관직에 제수되면 반드시 관직은 남의 호의를 그저 받을 수는 없으며 재능은 외람되게 자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러 차례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으나, 두터운 은총만 더하게 되었다. 물러날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배운 바를 모두 펼치며 치체(治體)를 넓히게 되니, 이는 실로 선생의 마음이고 또한 선생의 일이었으나, 불행히도 뜻을 펼칠 수 있는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
피눈물을 옷깃으로 닦으며 삼군(三軍)을 인솔하기를 제갈양(諸葛亮)같이 하였고, 사방을 경영하기를 주 선왕(周宣王) 때의 소호(召虎)같이 하였다. 내외를 출입함에 이해를 조리 있게 처리하니 일에는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었고, 말에는 반드시 이치에 합당했다. 그 정신과 문장의 기품은 모두 일세에 듣는 이를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인재(人才)를 수용할 수 없음을 걱정함에 이르러서는 등용의 길을 넓힐 것을 청했고, 군율(軍律)이 통솔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진관(鎭管)의 법을 펼 것을 청했다. 군향(軍餉)이 이어지기 어려워지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청했고, 백성이 굶주려 진휼하기 어려우면 염리(鹽利)를 강구할 것을 청했다.
가구 수를 파악하기 위해 시행하는 비려법(比閭法)을 시행하면서 5가를 1비(比)로 삼아 시행하였다. 지휘명령이 정명(精明)하여 부역을 징발하는 일이 가능했고, 험준한 곳에 의지해 방위 요새를 설치하자 형세가 견고하여 외적을 막을 수 있었다.
밖으로는 명나라와의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으로는 군국(軍國)의 모든 시정을 마련하고 추진하여, 뒤섞인 사무(事務)의 성패(成敗)를 즉시 판가름하였다. 이리저리 바쁘게 응수하며 시기적절한 대책으로 마음을 태우고 입이 마르도록 소리치며 쉴 겨를이 없었다.
비록 유언비어(流言蜚語)로 중상(中傷)을 당하여 고립되어 위태롭더라도 마침내 능히 홍수의 거센 물결 속에 기둥을 세우는 절조를 지켜 북극성의 지도리를 돌려놓았으니, 어찌 나라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고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자기를 돌보지 않는 순수한 충의로써 국가의 맥을 세워, 빼어난 계책으로 당시의 어려움을 구제한 것이다.
선생의 학문이 세상에 쓰인 것은 단지 한 두가지 뿐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거두어 세상의 도로 나아가도록 도왔으니, 중대한 사업에 그 커다란 쓰임이 드러난 것으로 이러한 위대함이 있었다.
만약 왕의 재주를 보좌하여 세상을 경영하는 뜻을 모두 펼쳐 방해함이 없게 할 수 있었다면, 장차 옛 성왕의 시대처럼 위대한 다스림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중흥의 업적이 당대에만 그치지 않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일을 처리함에는 생각이 깊고 원대하여 미리 밝게 처리하였다.
신묘년(1591)에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1536 ~ ?)이 일본에서 받아온 왜서(倭書)에 ‘군대를 인솔하고 명나라에 들어가겠다.’라고 하는 내용을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는 견해를 아뢰지 않았다면, 당시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각로(閣老) 허국(許國, 1527~1596)을 만났을 때 믿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명(明)나라의 신하 정응태(丁應泰)의 참소가 마침 적중한 바가 되었을 터이니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받기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동남쪽을 보장(堡障)하고 권율(權慄, 1537~1599)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실로 선생의 발탁에서 나와 끝내는 중흥의 으뜸 공로가 되어 마침내 적병(賊兵)을 핍박하게 되었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중국에 들어가 의탁할 것을 건의하여 청하였으나 선생이 힘껏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다투어 임금의 거가(車駕)가 의주에서 멈추었고, 한준창(韓準倡)이 함경도로 행차할 것을 주장했으나 유일하게 선생만이 그 불편함을 말했다.
그 나머지, 일에 앞서 예언한 것은 마치 좌계(左契)가 맞듯이 들어맞았으니, 헛된 논의는 두 세 가지도 열거할 수 없다.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은 실로 헤아리고 증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단정한 자세와 엄정하고 삼가는 법도가 있고, 질서가 정연하여 행동이 고요하고 말씀은 묵묵하여 스스로 법도를 이루었다. 온화하면서도 의연하여 범접하기 어려운 기상이 있었고, 권면하면서도 향기로워 친할 만한 뜻이 있었다. 선생과 마주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사념(邪念)이 없이 자연히 녹아내린 까닭은 선생이 학문을 터득한 바 있어도 경솔하게 남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예(造詣)가 깊음을 비록 쉽게 엿보지 못하나 관리로서의 처신과 행동거지가 반드시 예(禮)로 말미암았고, 몸을 받들고 관직에서 물러남에 반드시 의(義)에 합했다.
자신을 규율함의 준엄함과 일을 결단하는 바름으로 그 시종(始終)을 탐구한 것은 모두 경(敬)의 한 글자를 넘지 않았고, 마음을 맑게 하여 이치를 완미함에서 터득함이 더욱 많았다. 대개 그 이치에서 얻은 것은 반드시 마음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익힌 것은 또한 몸으로 실천했다. 긍지(矜持)가 익숙했고, 포용하고 어울림이 깊었다. 보존함은 덕(德)을 온전히 함이고 비축함은 도량을 넓게 함이다. 기상을 크게 하여 바르게 드러내고, 재능을 넓혀 두텁게 사용했다. 일을 처리함에 간혹 성질이 굳세고 과격한 자와는 뜻을 끊어버리고 아예 하지 않았다.
을축년(1565)에 관(館)을 비우자는 논의를 하였지만 제생(諸生)들이 ‘당적아세(黨賊阿世)’의 약속을 ‘점신오명(玷身汚名)’으로 바꾸어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기사년(1569)에는 고인이 된 재상의 공을 파하자는 논의를 하였는데, 일시(一時)의 견해로 함께 하지 않았다. 죄지은 자를 너그럽게 처리하기를 초목에 껍질이 터져 생장하는 것같이 하였고, 산악(山岳)이 말은 하지 않으나 공리(功利)가 저절로 넓혀짐과 같이 하였다. 오직 대체(大體)를 힘써 잡으려고 하면서도 곧은 절개로 명성(名聲)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을 때 논열(論列)을 함에 있어서 말의 뜻이 충후(忠厚)하여 애군(愛君)의 정성을 드러내었고, 남의 비밀을 들춰내어 헐뜯음을 부끄럽게 여겨 임금에게 알림에 체통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선생의 평생 덕업(德業)을 쌓은 개요이다.
집안이 깨끗한 물과 같아 빈객의 왕래가 전혀 없었다. 때로 조정의 의논이 둘로 갈라지면, 능히 후덕(厚德)과 진부(鎭浮)로써 저울로 달고 자로 재어 공평함을 잡아, 옥 같고 눈 같이 결점 없이하여 사람들을 등용하는데 막힘이 없어서 조정에 인재의 부족함이 없기를 기약했다. 그 교제(交際)하는 바에 같은 덕을 가진 이를 벗(朋)으로 삼았으니 실제로 붕(朋)이 아니요, 같은 도(道)를 가진 이들을 동아리(黨)로 삼았으니 실제로 당(黨)이 아니었다.
조정을 협화(協和)하고 함께 국사(國事)를 구제하였고, 종묘사직의 맥을 배양하고 천신(薦紳)의 유풍을 두터이 했다. 논의(論議)의 정대(正大)함과 용사(用舍)의 공평함은 나아가 저술한 「붕당설(朋黨說)」과 「광취인재양차(廣取人才兩箚)」에서 볼 수 있다. 일종의 부박(浮薄)한 논의는 감히 배척하려는 계획이 컸다. 이에 혹은 겁쟁이라 놀리기도 하고, 혹은 그 붕당이 있음을 의심하였으니, 이는 다만 비루한 이들이나 어리석은 아이의 견해일 뿐, 어찌 족히 함께 군자(君子)의 도를 논하겠는가?
선생은 감식(鑑識)이 남보다 뛰어났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 일찍이 문 앞에 이르러 뵙기를 구했는데 병이 있다고 사양하였고,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 태학생(太學生)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비명(碑銘)을 지어 줄 것을 청하며 여러 번 납배(納拜)를 요청하였으나 끝내 보지 않았다. 이러한 간신을 분별하는 밝음으로써 기축년(己丑, 1589)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의 화(禍)를 면했다. 마침내 이로 인해 무술년(1598)에 이이첨(李爾瞻)에 의해 배척되었으니, 그 배척된 바는 참으로 선생에게는 다행이었지만 곧 나라의 불행이었다.
선생은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인자(人子)는 일각(一刻)에도 어버이를 잊으면 효가 아니다.” 하였다. 벼슬 생활을 할 때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루라도 비울까 염려하여 그림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고향을 그리게 하고 출입하며 우러러보았다. 부친께서 돌아가심에 「신종록(愼終錄)」과 「영모록(永慕錄)」을 지어 삼가 유체(遺體)를 받들어 모시며 한 번 발을 뗄 때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않았다.
임금 섬기는 일을 어버이 섬김과 같이하여 한 번 식사할 때도 잊지 않았다. 만년에 참소에 걸려 비록 버림을 당해 내쫓긴 가운데도 매번 “신(臣)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했다.
비록 자제(子弟)에게 말할 때도 부족하여 서운한 뜻이 있어도 원망스러움을 말이나 안색으로 드러냄이 없었다. 간혹 임금의 교지를 보다가 백성을 걱정하는 내용이 있으면 이를 벽에 걸어두고 소리 높여 읽으며,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라 했으니, 무릇 그 읊조림으로 드러낸 것은 애군(愛君)과 우국(憂國)의 말이 아님이 없었다.
마침내 병이 위독해지자, 조정의 실책을 듣고는 얼굴에 걱정하는 모습이 수일 동안 풀리지 않았다.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붕우에게 신의가 있었음을 미루어 보면 선생의 독실한 충성심은 지극한 효에 근본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심(誠心)이 환히 드러나고, 그 도(道)는 지극하였으니 부친인 목사공(牧使公)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이 병이 들자, 조석으로 돌보며 약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올렸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는 도의(道義)로써 교제하였다.
의심스럽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강론함에는 얼음이 녹아 깨어지는 듯이 하여 반드시 바름에 귀착한 이후에 그만둘 뿐이었다. 지난날 말하기를 “지식이 부족하면 큰일에 처할 수 없고, 재주가 국한된 바가 있으면 통유(通儒)라고 할 수 없다.” 하였다. 육예(六藝)의 문장과 백가(百家)의 학문을 겸비하여 두루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귀착함은 간략함에 있으니 삼대(三代)의 제도와 용병(用兵)을 행사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또한 반드시 강구(講究)하여 그 귀착되는 취지(歸趣)를 다하였다.
선생의 심중에 쌓인 것은 모두 순수하면서 크게 넓었으니, 밖으로 나타나는 것도 또한 정밀하고 심오하면서 자상하고도 세밀하였다. 일에 응하고 사물을 접할 적에는 그 쓰임이 무궁하였고, 변란을 겪고 위험을 겪을수록 그 지킴을 바꾸지 않았다. 관대(寬大)하여 사물을 수용하여 그 막힘을 보지 못했으며, 잠깐 사이에도 일에 대응하는 데 있어 얼굴빛을 바꾸지 않았다. 어찌 성명(誠明)의 학문에 실로 연원(淵源)이 있고, 곧은 행실이 규구(規矩)에 합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하여 처리하는 공(功)은 있으나, 한 터럭만큼이라도 공명심과 이득을 취함은 없었다. 바람이 쌓인 것이 두터웠기 때문에 붕새의 큰 날개를 짊어지기에 힘이 있었음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다.
문사(文辭)가 흉금(胸襟)에서 흘러나와 처음에는 의중(意中)에 경험하지 않은 듯하였으나, 차츰 이룸에는 구름이 흘러가고 물이 흐르듯이 하였다. 도와 덕이 가득한 말 사이에 여사(餘事)로 나온 시와 문장은 담백하고 질박하여 꾸밈이 없었다. 그 시문(詩文)의 체재는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당(唐)나라 위응물(韋應物, 737~804)에 연유된 것이 많았으니, 세상에서 구차하게 시를 읊조리는 자와는 견줄 것이 못 되었다.
평소 산수를 좋아하였다. 거처했던 집의 서쪽에는 푸른 절벽이 강에 임하여 곧게 천 길의 높이로 서 있었다. 이로 인하여 자호(自號)를 ‘서애(西厓)’라 하였다. 매번 이곳에 돌아와 쉼에 한 방에 편안히 자리하니, 그 자득(自得)의 취향은 대개 일반 사람들이 얻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벼슬길에서 벗어나려는 뜻을 평생의 한(恨)으로 여겼다. 그곳의 당(堂)을 이름하여 ‘원지(遠志)’라 한 것에서 그 은미한 뜻을 볼 수 있다.
하루는 노닐러 나갔다가 복숭아 꽃이 만발함을 보고 “이 물건이 대체 나의 무슨 일과 관계가 되는가? 마음과 몸을 맑게 비워 두고 집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외물(外物)을 좋아하지 않아 의복과 음식은 다만 편안함을 기약하고 맛있는 음식을 구하지 않았다. 재물과 이익을 보기를 몸에 묻은 때와 같이 여겼고, 재물과 이익을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여 남에게 오염되는 것 같이 여겼다. 만년에 집안 양식이 죽을 먹기에도 충분하지 못했는데도 거처하는데 태연하였다. 낙천적인 바탕과 의리(義理)를 진실하게 알아서 즐기는 자가 아니라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선생이 돌아가신 뒤, 집안 형편이 더욱더 보잘것없는 처지가 되자, 여러 자식들이 머무를 곳이 없게 되었다. 그 청고(淸苦)함이 이와 같았으나 그 당시 대평(臺評, 臺論 사헌부,사간원에서 하던 탄핵)으로 교활하게 헐뜯는 자가 있었으니, 홀로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뒷날 간사하게 헛소문을 만들어낸 자가 입에 종기가 나서 죽으니, 사람들이 “선(善)을 무고(誣告)한 것에 대한 보답이다.” 하였다.
처음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선생을 보고 말하기를 “하늘이 이 사람을 내려 주셨으니 앞으로 나라에 쓰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아! 선생이 국가에 충성을 다한 바는 실로 하늘이 선생을 내려 준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어찌 때가 있으나 수명을 짧게 하여 마침내 능히 재앙을 삭이고 나라를 화평하게 할 수 없었으니, 장차 하늘이 국가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았음인가? 아니면 주고 빼앗는 권병(權柄)을 하늘이 오로지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어, 한 번 조물주의 명을 들은 자가 스스로 자기들끼리 서로 알력이 생기게 한 것인가? 선생의 심사(心事)로 옛것에서 구하면 반드시 백세(百世)를 지나도록 함께 돌아감이 있을 것이다.
경여(敬輿) 육지(陸贄, 754~805)는 당나라 덕종(德宗)이 정원 연간(貞元年間)에 정사를 맡을 즈음에 겨우 봉천(奉天)이란 곳으로 피난하였다가 임금으로부터 자기의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조서를 받았고, 송(宋)의 백기(伯紀) 이강(李鋼)은 건염 연간(建炎年間) 초에 몽고족이 송나라를 침입하자,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나라를 옮겨와서는 누구보다 먼저 그를 불러 제상 자리에 앉혔다. 이는 참으로 국가의 치란(治亂)이 달린 문제였다. 어찌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의 배연령(裴延齡, 728~796)·두참(竇參, 733~792)과 송 고종(宋高宗) 때의 왕백언(汪伯彥, 1069~1141)·황잠선(黃潛善, 1078~1130) 같은 간신들이 물들일 수 있었겠는가?
선생이 돌아가신 지 7년(1614, 광해군6) 후, 선비들이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신유년(辛酉年) 겨울에 여강서원(廬江書院)에 합부(合祔)하여 향사(享祀)하였다. 신미년 가을에 도남서원(道南書院)에 배향하였다. 평생 창작한 시문은 병화(兵火)로 잃었고, 지금 남은 것은 문집(文集) 10권이며,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징비록(懲毖錄) 등은 집에 보관되어 있다. 선생 6세조 휘 종혜(從惠)는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이며, 전서가 낳은 휘 홍(洪)은 우군사정(左軍司正)이며, 사정이 낳은 휘 소(沼)는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贈通訓大夫司僕寺正)이며, 사정이 나은 휘 자온(子溫)은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贈資憲大夫吏曹判書)이며, 판서가 낳은 공작(公綽)은 통훈대부 간성 군수(通訓大夫杆城郡守)를 지냈고 거듭 추증되어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을 지냈다. 찬성이 휘 중영(仲郢)을 낳았고, 통정대부 황해도 관찰사(通政大夫黃海道觀察使)를 지냈고 거듭 추증되어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을 지냈다. 이 분이 선생의 부친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며,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진사(進士) 광수(光粹)의 따님이다. 선생은 현령(縣令) 이경(李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18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들 여(袽)는 장수 찰방(長水察訪)을 지냈고, 단(褍)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를 지냈다. 모두 현명하였으나 일찍 돌아가셨다. 막내 진(袗)은 진사시(進士試) 장원에 합격하였고, 도(道)가 있다고 조정에 추천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따님은 진사 이문영(李文英)과 현감(縣監) 조직(趙稷)에게 각각 시집갔다. 여(袽)는 1남을 두었는데 원지(元之)로, 지금 관직은 감찰(監察)이다. 진은 2남 8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천지(千之)이다. 따님은 김시민(金時敏),신숭구(申嵩耉),금처겸(琴處謙), 이상일(李尙逸),김종준(金宗準) 등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렸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행장을 부탁할 곳이 없었다. 지평공(持平公)께서 준(埈)이 지난날 문장(門墻)를 출입한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하여 저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아! 선생의 도는 이미 옳은 것을 거짓으로 할 수 없었고, 아울러 준의 식견은 미천하여 보잘것없고, 언어가 비약하여 만에 한 가지도 비슷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평소 어리석은 저를 인도해 주신 것이 매우 지극하셔서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 감히 그 큰 것만을 기록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린다. 문인(門人)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이준이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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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