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배우는 역사공부> 야은 길재의 생애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등을 통해 사림파로 학맥이 계승되었다.
길재의 초상
생애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감시에 합격했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했다. 1387년 성균관 학정이되고,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나라가 망할것임을 알고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를 아껴서 사직서를 반려하였다.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년(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문하에 김숙자, 배인경(裵仁敬), 최운룡(崔雲龍) 등의 문하생을 길러냈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사상과 영향
비록 그는 조선의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으나 그의 동문들, 그가 후에 길러낸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도전
→이숭인 →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백인걸→이이(율곡) →성수침→성혼(우계) →이연경 →김안국 →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
저작 《야은집》 《야은언행습유》(冶隱言行拾遺) 《야은속집》 고려의 옛 도읍지 송경(지금의 개성)을 찾았을 때 읊은 시조 〈고려 유신 회고가〉는 유명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 있다가 8살에 외가에 머물렀으며, 혼자서 시냇가에 놀면서 가재 한 마리를 붙잡아 가재를 삶아먹고 싶지만 그 가재도 자신처럼 어머니를 잃은 것이 같다면서 가재를 놓아주면서 슬프게 울었다. 이를 듣고는 온 고을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후에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박대해 어머니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자식이 어버이에게 불의한 일이 있을 지라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되고 바르게 행동해 정상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린다고 했으며, 이에 어머니는 감동해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집이 매우 가난해 말, 종도 없었고 어머니에게 하직해 아버지를 두고 뵙지 못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개성으로 갔으며, 아버지를 섬겨 효성이 지극했고 계모 노씨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경, 효도를 다해 노씨가 자신이 낳은 자식과 같이 대접해 이웃 마을에서도 칭찬할 정도였다.
1374년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1383년에는 사마감시에 합격했으며, 1386년에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벼슬을 받지 않았고 이 때 훗날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과 같은 마을에서 살아서 그와 교류했다고 한다. 1387년에 드디어 성균학정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388년에는 순유박사, 성균박사, 1389년에는 문하주서에 임명되었다가 1390년에 고려의 사정이 안습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해 낙향했고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우왕의 죽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채, 해장을 먹지 않는 등 3년상을 지내면서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봉양해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장만했으며,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늘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에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세자[1] 이방원이 태상박사에 임명했지만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면서 이를 거절했으며, 이방원은 이를 가상히 여겨 그의 집에 세금을 면제하도록 했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주자가례에 의거해 제사를 지냈다.
이방원은 길재에게 태상박사(太常博士) 벼슬에 임명해 관직에 나와 줄 것을 수차례 권유했으나 길재는 끝내 사양했다. 이 때문에 이방원은 늘 대신들에게 길재의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인품을 본받으라고 강조했다. 길재의 청렴결백함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져 오는데, 한 번은 이방원이 길재가 산골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백 섬을 보냈으나 길재는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길재의 명성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절의와 인품에 감복한 군수 이양(李揚)이 율곡동(현재 도량동 밤실마을 일대)에 전원을 주고 좋은 전답으로 바꾸어 주었으나 ‘무릇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한들 그 종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기증 받은 전답을 그 가용에 준하여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뒤에 세종이 자신의 자손들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이 후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며, 길재는 제사를 당하면 나물밥으로 공양하고 우는 것을 초상 때와 같이 했다. 밤에 조용히 앉았다가 밤중이 되면 잠들거나 옷깃을 여미면서 날을 세우기도 하며, 닭이 처음 울 때 의관을 갖추고 사당, 조상에게 절을 하면서 자제들과 경서를 강론했다.
병이 들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병으로 죽기 전에 장사 지내는 것을 주자가례에 의거하도록 했다. 세종 1년(1419년) 4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금오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길재의 후학들이 훗날 조선의 사림파를 이루기에 나중에 사림파들에게 시조 대접을 받는다. 바로 사림의 시작점인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손제자이기 때문.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숙자가 바로 길재의 제자이다.
저서로는 야은집, 야은속집이 있으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조가 길재가 지은 것이다.
사극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인지도가 좀 떨어지긴 했지만, 조선 500년 내내 길재는 충절의 교과서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고려를 그리워하며 조선에게 협력하지 않은 사대부는 길재 말고도 더 있었지만, 길재의 이름이 남게 된 건, 1400년 주어진 봉상박사 벼슬을 거부하고 집에 돌아간 사건 덕분이다. 이방원은 길재를 천거해서 왕이 벼슬을 내리도록 했는데, 이 때 길재는 이전의 인연을 생각해 불러준게 고마워서 온거지, 벼슬하려고 온 건 아니라고 말했다. 이 때 이방원은 좀 뻘쭘했는지 벼슬을 내린게 자기가 아니므로 왕에게 직접 가서 말하라고 보냈다.
결국 길재는 왕에게 상서를 올려,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왕을 섬기지 않으니, 자기도 고향으로 내려가게 해달라며, 벼슬을 거부한다. 집이 가난한데도 벼슬을 거부한 게 정종이 보기에도 괴이했는지(...) 신하들에게 길재가 누구냐고 묻기까지 했다. 당시 신하들은 한미한 유자라고 답한 걸 보아, 확실히 집이 가난했던 모양이다. 정종이 어찌 해야 하는지 권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권근이 벼슬을 더 올려주거나, 아니면 두고, 두고 이름을 남겨 모범으로 삼으라고 해서, 결국 정종은 권근의 조언으로 길재를 충절의 아이콘으로 삼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왜 그 많은 사대부 중에서 길재가 뽑혔는지 알 수 있다.
1. 신씨 왕조(우왕과 창왕)가 정통한 왕조가 아니며, 이미 망했는데도 절개를 지켰다. 2. 문하주서가 높은 벼슬이 아닌데도 그 작은 은혜조차 저버리지 않았다. 3. 다른 사대부야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잘나가는 집안이지만, 길재는 집이 가난한데도 벼슬을 거부했다.
사실, 고려의 충신하면 생각나는 정몽주도 처음에는 충신으로 쳐주진 않았고, 길재 혼자만 고려 충신으로 쳐주었다. 1430년 11월 23일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만들 때, 충신으로 누굴 써야 하는지 묻자 신하들이 '고려 말에는 길재 밖에 없음'이라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길재는 1431년 11월 11일에 삼강행실도에 충신의 대명사로 기록된다.
다만 여기에는 정치적인 고려도 작용했다. 처음부터 길재가 고려충신이라고 조선왕조에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제로 고려에 충절을 지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가 그렇게 추켜세워줘도 부담이 없을 만큼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고려가 멸망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들을 적극적으로 표창하기에는 크게 부담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거나 핍박을 받았던 정몽주, 이색 등은 그 영향력이 거대하고 남긴 업적이나 학맥등이 대단했던 탓에 도리어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추숭하기에 망설일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조선의 태조와 태종에게 살해당하거나 핍박받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표창하는 것은 태조와 태종에게 허물이 돌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당장 정몽주는 후에 문묘에 배향되면서도 당시 왕인 중종이 '이씨의 원수'라고 할 정도로 공양왕 시절에 정권을 잡은 뒤, 개국 공신인 정도전을 유배 보냈고 이 후에 트집을 잡아 매질로 죽이려는 시도를 했으며 권력 기반이 약해진 태조와 태종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숙청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으니, 조선왕조 개국 최후의 큰 걸림돌 이었다. 세종대왕 시절에 씌여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아예 주적으로 묘사될 정도. 이에 반해 길재는 가문과 벼슬도 별 볼 일이 없었고 여말선초에 학문적 업적을 빼면 사실 한 것도 거의 없다. 한마디로 정치적 영향력이 없고 이성계에 맞서 대항한 적도 없었으므로 그를 추켜세워 줘도 아무런 부담이 없었으므로 살아있을 때에조차 충신대우를 해주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상기 사유에서 나온 세 번째 이유도 달리 말하면 고려 충신으로 명문가 출신인 인물을 표창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위험하기도 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김숙자의 아들이 바로 사림파의 시조로 꼽히는 김종직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여하튼 그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좌사간대부의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를 세웠다. 그리고 현종 10년(1669년)에 금오서원(金烏書院)이라는 사액서원이 그를 위해 세워졌다. 또 영조 17년(1741년)에는 그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서 그의 절의를 기리었다. 또한 위에 언급했듯이 물질적인 보상도 주어졌다. 물론 길재 본인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결국 길재는 정쟁에 한 번 휘말리지 않고, 피 한 번 흘리지도 않고 실질적인 이익, 명예와 목숨을 모조리 챙긴 것이다. 나중에 그가 길러낸 사림이 조선을 이끄는 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야말로 여말선초의 숨겨진 승리자(...)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도전,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 숱한 사람들이 전부 다 어떻게 되었는지 고려하면, 정말 대우가 좋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으로 사실 여말선초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평가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채미정. 1768년 영조 44년에 지었다.
구미 해평현(지금의 해평면)에서 태어난 야은 길재(吉再·1353∼1419)는 고려말 조선초의 성리학자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삼은은 고려조에서 벼슬을 했지만, 이성계의 조선 건국 당시 ‘불사이군(不事二君·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을 주장하며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충절의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한 길재는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가 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고려말 창왕 때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나라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400년(정종 2) 세자 이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려 했지만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후 고향인 구미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419년(세종 2)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특히 그는 효행(孝行)으로도 후세에 모범을 남긴 사람이다. ‘논픽션 구미史’ 6편은 야은 길재의 효행과 충절에 대한 이야기다.
“자라야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
고려가 망한 후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걸 몸소 보여주며 절개를 지켰던 야은(冶隱) 길재(吉再). 그는 효행(孝行)으로도 후세에 모범을 남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좋았다. 성격은 온화하면서 영리했고, 책읽기를 즐겼다. 여덟살 때 아버지 원진(元進)이 지방관인 보성대판(寶城大判)이라는 벼슬에 올라 전라도 보성으로 부임을 갔다. 그러나 워낙 녹봉이 적어서 온 가족이 옮겨가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얘야, 너를 데려가고 싶으나 내가 받는 녹봉으로는 우리 식구를 감당하기 어렵구나. 힘들겠지만 남아 있거라. 외롭더라도 글공부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결국 어머니만 함께 가고 그는 외가에 맡겨졌다. 혼자 외로이 떨어진 소년 길재는 어머니가 그리워 자주 눈물지었다. 하루는 냇가에 나가 놀다가 자라처럼 생긴 돌을 주워 문득 ‘석별가(石鱉歌)’라는 시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鰲兮鰲兮·오혜오혜) 너도 어머니를 잃었느냐(汝亦失母乎·여역실모호) 나도 어머니를 잃었노라(吾亦失母矣·오역실모의) 너를 삶아 먹을 줄 알지만(吾知烹其汝食·오지팽기여식) 네 처지가 나와 같은지라 놓아 주노라(汝之失母猶我也·여지실모유아야)
그리고는 돌자라를 물속에 놓아주었다. 이 사실을 이웃에게 전해들은 외조부는 “참으로 효심이 깊고 사려가 깊은 아이가 아닌가. 어린 것이 얼마나 부모가 그리웠으면 이런 시를 짓는단 말인가?”하고 눈물지었다. 어린 소년의 시는 이내 고을 전체에 퍼졌다.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주(善州-지금의 구미)로 돌아와 노모를 봉양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어머니 연세가 예순을 넘었을 때는 저녁에 손수 잠자리를 보살피고 새벽이면 꼭 들러 다시 보살피곤 했다. 어머니가 쓰시던 방의 청소며 이부자리 간수도 몸소 했다. 늘 하는 일이지만 할 때마다 정성을 다했다. 아이들이 대신 하려해도 “어머니께서 늙으셨으니 훗날 어머님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싶어도 그때는 할 수 없게 될 것이다”하고는 직접 했다.
채미정 경내의 북측 비각 내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길재의 유허비(遺墟碑). 비의 앞면에는 ‘고려문하주서야은 길선생유허비(高麗門下注書冶隱 吉先生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공양왕 서거에 마음으로 삼년상 지내
남명 조식이 쓴 길재의 행장을 보면 간략하지만, 효도뿐만 아니라 매사에 정성을 다했던 지극함이 잘 드러나 있다. 다음은 그 일부다.
“길재의 자는 재보(再父)로 선산의 해평 사람이다. 열여덟 살에 상산(상주)에 거주하던 사록 박분(朴賁)에게 나아가서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배웠다. 또 부친인 원진(元進)을 따라 송도에 가서 이색(李穡, 1328∼1396) ·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권근(權近, 1352∼1409)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비로소 성리학에 대해서 들었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했고, 또 서모 노씨를 잘 섬겼으며, 부자 아내를 거느렸으나 검소하고 부지런하였다.
과거에 올라 문하성주서가 되었고, 홍무 23년 경오(1390)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봉계에 물러나 살았다. 그 후에는 벼슬을 제수해도 부임하지 않았고 공양왕이 서거하자 방상(方喪: 신하가 임금의 상에 부모의 상과 비교해서 복상하는 일) 삼년상을 지냈다. 조선 태종 때 태상박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두 성씨를 섬기지 않는 의리를 지켰다.
길재는 상례에 엄하여서 불교의 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매양 한밤중에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사당과 앞 시대 성인들의 화상을 배알하였다. 서당으로 물러나와 책상 앞에 꿇어앉아서 학문을 강습하되 종일토록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양촌 권근이 별세하자 삼년을 심상(心喪: 상복은 입지 않고 다만 마음으로 복상하는 것)하였고, 박분이 죽자 또 그와 같이 하였다. 배우는 자들이 야은선생이라 일컬었고, 원근의 학도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선비의 분명한 뜻을 뺏어선 안 됩니다”
젊은 시절 길재는 태종과 한 동네서 살았으며, 성균관에서도 같이 공부했다. 태종 이방원이 세자가 된 뒤 함께 젊은 날을 보냈던 길재를 자주 그리워했다. 새 국가가 세워진 후 여러 모로 인재가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뛰어난 인재들은 나라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죽거나 낙향하여 문을 닫아걸었다. 길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길재의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좋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세자는 어쨌든지 그를 불러 일을 맡기려 했다.
하루는 세자가 서연(書筵)에 들어 최근의 시국과 참된 선비의 도리를 논하게 되었다. 얘기는 차츰 숨은 선비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발전했다. 세자가 문득 말했다.
“숨은 선비라면 길재 같은 이가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함께 자리한 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는 감회가 깊은 얼굴로 말했다.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오. 내가 일찍이 함께 배웠는데 보지 못한 지 오래 되었구려. 누가 길재의 소식을 아는지요?”
“제가 길재와 같은 고향 사람입니다.” 정자(正字)인 전가식이 아뢰었다.
“그래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요?”
“집에 있으면서 효도를 지극하게 다해 이웃이 다 칭송하고 있습니다.” 전가식은 길재의 효행이 친모와 서모에게 두루 지극함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그래, 여전히 잘 지내고 있군? 내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소.”
세자는 삼군부에 지시하여, 공문을 띄워 그를 불렀다. 1400년 7월이었다.
길재는 세자가 보낸 서찰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동문으로 호형호제하던 세자의 호탕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망한 왕조에 충성을 다하기로 작정하고 물러난 몸이었다. 세자가 서울로 올라오라는 건 길재에게 무엇인가 일을 맡기려는 심사라는 게 너무나 뻔했다. 주저되지만 세자의 부름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세자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다만 세자를 뵙되 자신의 소신을 아뢴 다음 곧바로 내려오려고 마음먹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향했다. 역마를 이용하는 편의를 봐주어서 빠르게 서울에 당도했다. 그를 본 세자가 반색을 했다.
“재보(길재의 자), 얼마 만에 다시 보는가? 참으로 오랜만이오.”
“오랜만입니다. 밝은 얼굴을 뵈오니 감격스럽습니다. 강녕하신지요?”
“나야 매일 바쁘게 지내니, 마음 편할 날이 있겠소. 그대가 옆에 있으면 한결 마음이 편해질 것을.”
길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세자는 바로 임금에게 청해 길재를 봉상시(奉常寺·조선시대 제사와 시호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청) 박사(博士)에 임명했다. 길재는 마음이 답답해왔다. 바로 입궐해서 사의를 표해야 했으나, 동궁(東宮)에 편지를 먼저 올렸다.
“옛날 저하와 더불어 성균관에서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신을 부르신 것은 옛 정을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씨 조정(고려의 공양왕이 신돈의 아들이란 의미) 에서 과거에 올라 벼슬하다가 왕씨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 평생을 보내려 했습니다. 세자께서 부르셨으나 올라와서 뵙고 곧 돌아가려 했을 뿐, 벼슬에 종사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자가 말했다.
“그대가 말한 것은 실로 가벼운 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강상(綱常)의 도리라 할 것이다. 그러니 의리상 뜻을 빼앗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준 이는 주상이니, 주상께 사면을 고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어쨌든 일을 어렵게 만들어 길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재의 굳어진 마음은 그런 일에 현혹될 리 없었다. 바로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신은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신씨 조정에 벼슬해 과거에 뽑히고 문하부 주서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발 시골로 돌아가도록 풀어주셔서, 두 성(姓)을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하고, 늙은 어미를 효도로 봉양하며 남은 생애를 마치게 하소서.”
정종이 그의 글을 읽고 좌우 대신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주는 벼슬도 마다하고, 이런 고루한 생각을 펴는가?”
좌우의 대신들이 말했다. “이미 오래전에 전조에 벼슬하다 물러난 한미한 유생(儒生)일 뿐입니다.”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튿날 경연에 나가 왕은 권근에게 물었다.
“길재가 절개를 지켜 벼슬하지 않겠다는데, 예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는지 모르겠소. 짐이 알기로 그대는 길재를 가르치기도 했다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소?”
“글공부에 특출하고 늘 앞서가는 이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정에 남도록 청하고 벼슬을 더해주어 뒷사람에게 권장해야 합니다. 청해도 굳이 간다면 자기 생각을 펴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광무제는 한나라의 어진 임금이지만, 엄광(嚴光)이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비가 분명한 뜻이 있으면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길재를 사랑하는 간곡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정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재에게 향리로 돌아가도록 허락하고,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주도록 했다. 길재는 돌아오는 길에 폐허가 된 개경의 옛 궁궐터를 돌아보며 눈에 아프게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회고를 애끓는 노래로 풀어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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