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① 관구검 기공비(동천왕, 245, 246년)
동천왕 때 고구려를 침입하였던 위나라 장군(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 전공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에서 발견되었다. 비문 가운데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 등 6행만 알아볼 수 있다. 위나라는 244년 관구검을 시켜 고구려를 침범하여 환도성(丸都城)을 점령하고, 245년에도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시켜 다시 침공하였었다. 이 비를 세운 사실을 <삼국사기>는 ‘이 전역(戰役)에 위장(魏將)은 숙신(肅愼)의 남계(南界)에 이르러서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고, 환도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동수 묘지(3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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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二十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兎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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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무덤인 안악 3호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묘지 형태로 별도로 석관이나 묘지석을 남기지는 않고, 벽화가 그려져 있는 벽면에 묵서(붓글씨)로 묘지를 적어 놓았다.
모두 68자로 확인된 이 글은 동수라는 사람의 생애에 대해 적고 있다. 첫번째 구절의 영화 13년은 동진의 연호로 357년, 고구려 고분 벽화로는 드물게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연대가 나온 것이다 . 두 번째 구절은 동수라는 사람이 지낸 관직에 대해 열거하고 있다. 평동장군을 비롯해 여러 지방의 태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동수의 출신을 밝히고 있는 세번째 구절에서 동수는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요동 출신의 중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묵서명은 주인공이 있는 방 입구를 지키는 장하독이라는 관직을 가진 인물의 머리위에 써있다 .
③ 광개토 대왕비(장수왕 2년, 4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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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날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시조는 북부여에서 나셨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태어나셨는데 태어날 때부터 거룩한 덕성을 가지셨다. 왕업을 계승하여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광개토 대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왕위에 오르시니, 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39세에 돌아가시니, 비를 세워 그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다.
(2) 영락 5년 을미년에 왕께서 비려가 도발을 그치지 아니하므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시니 부산을 지나 염수가에 이르러 3개 부락 6, 7 백의 영을 깨뜨리고 수많은 소, 말, 양들을 획득하였다.
백잔(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이름)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었기 때문에 조공을 하여 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하였다. 이에 왕께서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3) 왕께서 생전에 말하시기를, “선왕들께서는 다만 구민으로 하여금 묘를 지키고 청소케 하였으나, 나는 구민들이 약하게 될까 염려되니 내가 몸소 다니며 약탈한 한, 예에서 새로이 뽑아 이들로 하여금 묘를 지키고 청소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에 한과 예에서 새로 220가(호)를 뽑고 묘지기의 규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뽑았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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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는 사후 2년 뒤(414)에 장수왕이 국내성(통구)에 건립한 것으로 비의 높이는 6.39m, 무게는 약 37톤이며, 장방형 기둥의 4면에 예서체로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① 건국의 시조인 추모(주몽)의 이야기, ②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 ③ 광개토 대왕의 무덤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④ 모두루 묘지(5세기 중엽)
고구려 대사자였던 모두루 가문의 내력과 활동상을 전하는 묘지이다.
1935년 광개토 대왕릉비가 있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의 고분 내에서 발견되었다. 모두루 묘지는 전실의 정면 위쪽에 길게 회벽을 바른 위에 쓰여져 있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80행 800여자에 달하는 내용을 묵서(비문과 같은 금석문이 아니고 실제로 쓰여진 묵서라는 점에서 엄격한 형식적 규율보다는 자유롭게 서사된 느낌이 강하며 개성적인 필치가 많이 가미되어 있다.)하였으나 결락된 부분이 많아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250여 자에 불과하다.
'대사자 모두루(大使者牟頭婁)'라는 제하에 "하백의 손자이시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께서는 본디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고구려의 건국 신화가 실려 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후로 결락된 틈으로 보이는 비문의 내용은 모두루의 선조가 북부여에서부터 (추모)성왕을 따르며 반역 사건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그의 노객(奴客)이 되었고, 고국원왕으로 추정되는 국강상성태왕 때에는 북부여를 침입한 북방의 선비족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대대로 관은을 입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묘지의 당사자인 모두루는 광개토 대왕 때에 선조의 공에 힘입어 북부여 수사(守事)로 파견되었으며, 이 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부음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였음을 적고 있다. 이로써 모두루는 광개토 대왕 시절인 5세기 전반에 생존하며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묘지에서 왕의 호칭을 '추모성왕(鄒牟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 공통적으로 성왕(聖王)이라 칭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묘지를 통해 4~5세기 고구려 왕권과 그에 대한 도전의 양상, 그리고 지방 통치와 씨족 계승 의식 등을 살필 수 있다.
⑤ 충주(중원) 고구려비(5세기 건립, 정확한 연대는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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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에 고구려 대왕이 상왕공(相王公)과 함께 신라의 매금(寐錦‧왕) 만나 영원토록 우호를 맺기 위해 중원(中原)에 왔으나, 신라 매금이 오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고구려 대왕은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于桓奴)를 이 곳에 머물게 하여 신라 매금을 만나게 하였다. ‧‧‧‧ 2월 23일에 신라 매금이 신하와 함께 고구려의 대사자 다우환노를 만나, 이 곳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당주(幢主)인 발위사자 금노(錦奴)로 하여금 신라 국내의 중인(衆人‧여러 사람)을 내지(內地)인 우발성 부근으로 옮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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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비는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 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 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2. 백제
① 무령왕릉 지석(무령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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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왕비의 지석 뒷면
‘돈 1만닙, 다음의 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에 든 돈으로 토지신 토왕, 토백, 토부모, 연봉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료에게 나아가서 서쪽 땅을 사들여 묘을 만들었으니 문서를 만들어 남긴다. 현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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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는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 넣은 매지권이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 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 풍습이 담겨져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② 사택지적비(의자왕, 6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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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峨峨悲, 含聖明以
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지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을 슬퍼하여, 금을 캐어 진당(珍堂)을 짓고 옥을 캐어 보탑(寶塔)을 세우니, 그 웅장하고 자애로운 모습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여 구름을 보내고, 그 우뚝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런 빛을 머금어 햇빛을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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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지적(砂宅智積)이라는 사람이 인생의 덧없음을 서글퍼하며, 금으로 법당, 옥으로 탑을 세운 후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비에 56자가 남아 있는데, 문체는 4.6변려체이고, 글씨체는 구양순체이다. 현재 국립 부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3. 신라
① 영일 냉수리비(눌지왕, 지증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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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사부지왕(斯夫智王:실성왕?), 내지왕(乃智王: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다. 계미년(503년?) 9월 25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부 대표(칠왕(七王):사훼부(沙喙部)의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사덕지아우지(斯德智阿于支), 자숙지거벌우지(子宿智居伐于支), 훼부(喙部)의 이부지일우지(이夫智壹于支), 지심지거벌우지(只心智居伐于支), 본피부(本彼部)의 두복지우지(頭腹智于支), 사피부(斯彼部)의 모사지우지(暮斯支于支))가 모여 중신 회의 개최하고 전대의 두왕이 절거리에게 재물을 얻도록 왕교(王敎)를 내린 것을 의논하여 이를 다시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교시(別敎)를 통해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아우인 아사노(弟兒斯奴) 혹은 아우의 아들인 사노(斯奴)}가 상속하게 되며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재물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것을 명령하였다. 만약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게는 중죄에 처할 것이다. 전사인(典事人)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물어 이 사실을 기록한다. 촌주 두 사람(유지우지(臾支于支), 수지일금지(須支壹今智))이 이해의 일을 마치고 그 사실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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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나오는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등 각종 신분명칭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으로 추정되나 학자들간의 이견(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이 있어 좀더 구체적인 고증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재산권 분쟁을 각부의 귀족들이 참여하는 중신 회의에서 합의하여 처리한 내용으로 볼 때 법흥왕이나 진흥왕 때처럼 왕권이 강화되기 이전 신라 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으며 당시 화백 제도의 구성 및 운영, 6부 체제로 확립되어 가던 정치 제도,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 의식을 행하던 풍속 제도의 실상 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의 성격, 형태, 글자의 새김이 신라가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생기는 토지와 재산권 분쟁에 관련된 기록을 담고 있는 울진 봉평 신라비와 매우 유사하며 일반적인 비(碑)라기 보다는 재산 분배를 확인해 주는 증명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삼국 시대 금석문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단양 신라 적성비, 충주(중원) 고구려비, 울진 봉평 신라비, 영천 청제비 등 매우 드문데 이 영일 냉수리 신라비는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비문을 거의 판독할 수 있어 신라사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비(碑)는 국가에서 세운 것으로 당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언급하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 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방증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다.
② 울진 봉평 신라비(법흥왕 11년, 524)
신라가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당시 신라가 영토 확장으로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 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 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이다.
③ 영천 청제비(법흥왕 23년, 536년) : 신라의 역역 동원 기록
영천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기록한 내용과 중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라 법흥왕 23년(536)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 때 새긴 것이고, 반대면의 신라 원성왕 14년(798)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때 새긴 것이다. 각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영천 청제비는 신라 수리 시설의 실태와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④ 울주 천전리 서석(법흥왕 23년, 536년)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서 2km 떨어진 천전리 계곡의 바위 면에 동물·인물·추상무늬·글씨 등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는데, 신라 왕족들이 중요한 제의식 또는 외유를 위해 이곳에 다녀간다는 기록이 선사 시대의 암각화인 울주 천전리 각석(암각화)의 빈곳에 새겨져 있다.
여기 새겨져 있는 글씨들은 '천전리 서석(書石)'이라고 불리는 금석학의 중요한 유적으로 되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그중 하나는 을사(乙巳·525년)로 시작하는 긴 글로 그 내용을 보면 신라 법흥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 갈문왕(葛文王)이 예쁜 용모를 갖춘 여동생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을 벗 삼아 이 계곡에 놀러 왔는데 이 아름다운 계곡에 이름이 없다고 하여 글씨를 새겨놓고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짓는다는 내용이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 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 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법흥왕을 성법흥대왕이라 하여 대왕 등 왕의 지위가 초월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하나는 영랑(永郞), 수품(水品) 등 문헌사에 보이는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여기가 한때 화랑들의 심신 수양처였고, 그들이 다녀간 기념으로 이름을 새긴 일종의 낙서가 오히려 문화재로 된 셈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⑤ 진흥왕이 세운 비석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이 기록된 비석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은 대개 비슷한 내용을 보인다.
-단양 적성비(진흥왕 551년 건립)
-4개의 순수비 : 창녕비(진흥왕, 561년), 북한산비(진흥왕, 555년경), 황초령비(진흥왕, 568년), 마운령비(진흥왕, 568년)
단양 적성비(충북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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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 (년) …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豆弥智) 피진간지(佊珎干支),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礼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군주(軍主)들인 탁부(喙部) 출신의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噵設智)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 : 城 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둘째) 이 때에 적성(赤城) 출신의 야이차(也尔次)에게 교(敎)하시기를 … 중에 옳은 일을 하는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처(妻)인 삼(三) … 에게는 … 利를 허(許)하였다.
(세째) 사년 소녀(小女), 사문(師文) … 공형(公兄)인 추문촌(鄒文村) 출신의 파진루(巴珎婁) 하간지(下干支) … (전(前))자(者)는 다시 적성연(赤城烟)으로 가게 하고 후자(後者) 공형(公兄)은 … 이엽(異葉)이건 국법(國法)에는 분여(分與)하지만 비록 그러하나 伊 … 子, 도지(刀只) 소녀(小女), 오례혜(烏礼兮) 찬간지(撰干支) … 법(法)을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으로 만들었다.
(넷째) 별도로 관(官)은 … 불혜(弗兮) 여(女), 도두지우열리파(道豆只又悅利巴) 소자(小子), 도라혜(刀羅兮) … 합하여 5인(五人)에게 … 를 내렸다.
(다섯째) 별도로 교(敎)하기를 이후로부터 나라 가운데에 야이차(也尒次)와 같이 … 옳은 일을 하여 힘을 쓰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나이가 적건 (많건) … 형제이건 이와 같이 아뢰는 자가 대인(大人)인가 소인(小人)인가 …
(여섯째) … 部 출신의 나불탐학실리(奈弗耽郝失利) 대사(大舍), 추문(鄒文)(촌) …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은 나리촌(那利村) … 인(人)은 물지차(勿支次) 아척(阿尺), 서인(書人)은 탁부(喙部) 출신의 … 인석서립인(人石書立人)은 비금개리촌(非今皆里村) … 지(智) 대오(大烏)이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해석자 : 주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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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충북 단양군 단성읍 하방리 성재산의 적성(赤城)을 점령한 후 세운 비석이다.
이 비의 발견으로 산성의 이름이 적성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곳은 남쪽에서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직전에 위치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부근에는 고구려 장군 온달의 전설이 전해 오는 온달산성이 있다.
단양 적성비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며, 진흥왕이 세운 다른 순수비와는 다르게 영토 편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척경비이다.
이 비는 이사부(伊史夫)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뒤, 그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老次)와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을 포상하고 적성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에서 세웠다. 이는 장차 여이차와 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이 비에는 신라의 새로운 관등과 관직명, 율령 반포에 대한 중요한 사실 등을 담고 있어 학술적인 자료로 중요시되고 있다.
창녕비(진흥왕 22년, 561년)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下州)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 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 행정조 직, 신분제 및 사회 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기사를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현재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음), 555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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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제왕은 왕위를 계승하고 스스로 삼가며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이 왔다. 이에 관경(管境)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펴서 백성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며 충성과 신의를 갖추고 재주를 다해 나라에 충절한 공을 세운 자가 있다면 벼슬을 올려주고 공훈을 표창코자 한다. 이때 왕의 수레를 따른 이는 법장(法藏) 혜인(慧忍)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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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령비와 마운령비 같은 시기(568)에 세워졌기에 다음 비문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그 내용도 비슷하다.
황초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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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계미에 진흥태왕이 관경(管境)을 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로 제왕(帝王)은 연호를 세워 스스로를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짐은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고 스스로 삼가면서 할까 두려워하였다.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보여, 명명(冥冥)한 중에서도 신지(神祗)에 감응되어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호(和好)를 요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하여 신·구민을 육(育)하였으나 오히려 왕도의 덕화가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무자년 가을 8월에 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살펴서 노고에 보답하고자 한다. 충성과 신의에다 정성을 갖추고, 재주가 하고 나라를 하여 충절을 다해 공을 세운 무리가 있다면 벼슬을 올려주고 상품을 더하여 공훈을 표창하고자 한다. 수레를 돌려감에 14 에 경계를 이 때에 왕의 수레를 따른 자는 사문도인(沙門道人)으로는 법장(法藏) 혜인(慧忍)이고, 대등(大等)은‘탁(喙) 부(夫) 지(知) 잡간( 干), 탁부(喙部)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미지(未知) 나말(奈末), 혜대사(兮大舍), 사탁부(沙喙部) 무지( 知), 대사(大舍)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탁부(喙部) 혜차(兮次) 탁부(喙部) 여난(與難) 대사(大舍)이고, 약사(藥師)는 사탁부(沙喙部) 독형(篤兄) 소(小) 이고, 나부(奈夫) 전(典)은 탁부(喙部) 분지(分知) 길지(吉之), 애공흔평(哀公欣平) 소사(小舍), 말매(末買) 탁부(喙部) 비지(非知) 사간(沙干), 조인(助人) 사탁부(沙喙部) 윤지(尹知) 나말(奈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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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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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하늘의 은혜를 입고 ……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을 청하는 사절이 서로 통하여 오도다. 스스로 헤아려 옛 백성과 새 백성을 두루 어루만지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의 덕화가 고루 미치지 않고 은혜가 베풀어짐이 없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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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남산 신성비(진평왕 13년, 591년)
모두 6기가 발견되어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각각의 비문은 모두 3가지 내용을 취하고 있다. 첫째는 축조 연월일과 서약문, 둘째, 축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책, 출신지, 이름, 관등명, 셋째, 축성 거리를 명시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신해년(辛亥年)에 남산 신성을 쌓았으며, 쌓은 뒤 3년 이내에 성이 붕괴되면 벌을 받을 것을 서약하고 있다. 이 비는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사회 제도 등을 보여 주고 있다.
⑦ 임신서기석(진평왕 6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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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서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맹서)을 잃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서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 것을 받아들임을맹서한다.
또 따로이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서하였다.
시경(詩經)·상서(尙書;서경書經)·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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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유교 경전을 학습할 것과 인격을 도야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이 새겨진 비문으로, 현재 경주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임신서기석은 비석의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고, 또한 그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자주 보이고 있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이라 호칭하고 있다.
한자·한문을 받아들여 우리의 표기수단으로 삼을 때 향찰식(鄕札式) 표기, 한문식(漢文式) 표기 외에 훈석식(訓釋式) 표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유일한 금석문 유물로 세속 5계 중의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신라 젊은이들의 신서(信誓) 관념의 표상물(表象物)이고,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 중 ‘천(天)’의 성격의 일단을 시사해 주는 자료이다.
명문의 임신년(壬申年)은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의 어느 한 해일 것으로 보이며 서예사적 측면에서도 자형과 획법,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에서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金石文)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정리한다고 고생하셨어요^^ 잘봤습니다!ㅎㅎㅎ
아 많다....
너무너무 감사해요!!!
도움이 많이됬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문도 싹 정리됬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때 쓰는 한자하고 지금쓰는 한자하고 거의 차이가 없나 보네요.. 참 신기하네요 ^^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 감사합니다 *^^*
어제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천전리 각석에 고등학생이 낙서한 걸 잡았다는데요, 각석과 서석은 다른거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봤어요 ㅎㅎ
역시 고급은 어려워!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열공할게요.
우..비문내용까지..완전 감사합니다!
비문 정리가 잘되어있네요~~ 잘보고 갑니다.
와우 이건 대박 ㅎㅎ
와 감사합니다ㅎㅎ
와우~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당
앞의 것들은 첨 보는 것들이네요. 오~
항상 헛갈렸는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당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의 달인 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더 많네요
유용한 지문이 많네요... 사진사료들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도움 감사합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