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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 치세에 이름난 대부 정협(鄭協) 공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명성과 소문이 세상에 자자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언행록에 증거로 삼을 만한 기록이 없고 관직 생활에 대한 기록 또한 잘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에 공의 증손인 현감공(縣監公)이 비석에 새겨 후세에 보여 주기 위해 여러 사람의 기록에서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놓았으므로 생애의 대략이나마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의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이르기를,
“공은 성품이 어질고 도량이 넓으며 급하게 말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는 언제나 온화한 모습을 보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이를 보면 구제해 주었다. 이는 타고난 천성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으로서 억지로 한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길가에서 추위에 떨며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입히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란을 피하여 어느 강가 나루에 이르렀는데 사공이 지나치게 많은 뱃삯을 요구하였다. 왜적들이 금세 들이닥치려 하는 상황에서 늙은 부모를 모시고 강을 건너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는 한 선비를 보았다. 공은 그와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전대(纏帶)를 모두 털어 뱃삯을 함께 치른 다음 그들을 먼저 건너게 하고 자신은 나중에 강을 건넜다. 그러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뱃사공이 이 사실을 선비에게 말해 주자 선비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뱃사공이 공의 의로운 행동에 뱃삯을 돌려주려 하였으나 공이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 공이 쌓아 온 덕망이 세상에 자자하여 모두가 정승까지 오르리라 기대를 하였으나 지위는 그다지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 공이 죽자 길을 가던 사람들까지도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또 이르기를,
“왜적이 발밑까지 쳐들어오자 공이 섬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배가 작아 여러 사람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다투었다. 공이 모두 다 건너가지 못하리라 생각하고는 죽은 아우의 처자들을 먼저 건너게 하고 그런 다음에 자신의 가족들을 뒤따라 건너게 하였는데 다행히 죽음은 면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등백도(鄧伯道)에 견주어 칭송하였다.”
하였다. 이 이야기 역시 임진왜란 때의 일로, 기록에 따라 자세한 정도의 차이는 있다.
조정에서의 활동을 보면, 공이 처음 과거에 급제하자 임금이 참하(參下)인 옥당(玉堂)의 관원으로 뽑으라고 명을 내렸으나 이조에서 의망(擬望)할 사람이 그 수를 갖추지 못해 곤란하다는 뜻을 아뢰었다. 이에 특명으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제수하고 또 지제교(知製敎)에 제수하니, 모두 파격적인 선발이었다.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어도 여전히 삼자함(三字銜)을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이는 문형(文衡)의 후보로 촉망을 받았기 때문으로 정상적인 규례가 아니었다. 왜란이 평정되지 않자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이 사도 체찰사(四道體察使)에 제수되어 당대의 명사들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추천하였는데 공이 그 가운데 들었다. 병란이 지난 뒤에 천문 관측 기기인 간의(簡儀)와 기상을 관측하는 기기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으므로 담당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이를 다시 만들라는 왕명이 내렸다. 공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이를 주관하는 낭청(郞廳)을 겸임하였다. 간혹 다른 관청의 자리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계사를 올려 본래의 직임으로 되돌려 줄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몇 년 사이에 아홉 차례나 사인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공역이 완료되고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얼마 후 우리나라 사람의 시문을 편찬하라는 왕명이 내려져 대학사(大學士)가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공이 문장을 잘하는 몇몇 신하들과 함께 시문을 수집하여 올렸다. 감사(監司) 정백창(鄭百昌)은 나이 열여덟에 향시(鄕試)에 세 번이나 합격하였다. 이미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또 문과(文科)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높은 등수를 차지할 뻔하였는데, 공이 그 당시 시험 답안을 살피다 그가 쓴 답안임을 알아차리고는 너무 일찍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불합격을 시켰다. 이에 감사 또한 평생토록 공의 정성 어린 마음에 감사하였다. 광해군이 혼란한 정사를 베풀게 되자 곧바로 과천(果川)의 집으로 은퇴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정국의 급한 물살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났다고들 말하였다.
이상은 모두 관청의 기록들과 선배들의 문집에서 찾아낸 사실들로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한 말이 아니다.
공의 자는 화백(和伯)이요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고려 시대 좌복야(左僕射) 벼슬을 한 목(穆)이 그 시조이다. 조선에 들어와 예조 판서를 지낸 가종(可宗)이 있으며, 이분으로부터 대사헌 수홍(守弘), 판관 걸(傑), 경력 홍손(洪孫), 좌랑 진(振)을 거쳐 우의정 언신(彥信)에 이르렀는데, 의정공으로 인하여 위 삼대 선조가 높은 벼슬에 추증되었다. 의정공은 유언비어에 걸려 북쪽 변방 지역으로 귀양을 가서 별세하였는데, 그 사실이 용주(龍洲) 조 선생(趙先生)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이분이 바로 공의 황고(皇考)이다. 비(妣)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사직 예(禮)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 16년 신유년(1561) 3월 6일에 태어났다. 문장이 어린 나이에 이미 뛰어나서 주위로부터 세상을 빛낼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연이어 절일시(節日試)에 장원하여 무자년(1588) 문과에 직부(直赴)되었다. 예문관 한림을 거쳐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의정공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누명이 벗겨지지 않아 10년 동안 하위 관직을 전전하다가, 기해년(1599)에 임금이 그것이 무고임을 크게 깨닫고 곧바로 공을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하였다. 홍문관 수찬을 거쳐 의정부 사인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로부터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아장(亞長)을 모두 거쳤고, 얼마 후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이듬해에 그 공로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였다. 성균관과 양사(兩司), 옥당에서 모두 장관을 지냈고, 양관(兩館)에서 모두 제학을 지냈으며, 예조와 이조에서 모두 참판을 지냈으니, 그 영화가 극도에 달하였다. 그 밖의 한가한 관청의 직책은 기록하지 않는다. 신해년(1611, 광해군3) 겨울 12월 20일에 과천(果川)의 시골집에서 별세하였다.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된 것으로 인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규례에 따라 겸직도 추증되었다. 이듬해 봄에 장단(長湍)의 읍치 북쪽 둔전동(屯田洞) 의정공의 산소 아래 묘향(卯向)의 산에 안장되었다.
공은 풍모가 수려하고 마음가짐이 충후하였다. 평소 꾸밈이 없이 소탈하였고 태산처럼 중후하여 사람들이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였다. 아우 율(慄)이 지극한 효성으로 세상을 떠나자 두 조카를 자신의 아들처럼 길러 모두 입신양명하게 하였으니, 이조 판서 세규(世規)와 관찰사 세구(世矩)가 바로 이들이다. 판서 세규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백부의 가르침 덕분이다.” 하였고, 공의 초상을 당하자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나서도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음악을 즐기지 않았다. 어떨 때는 어두운 낯빛으로 “백부께서 화를 내시는 꿈을 꾸었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하였다. 관찰사 세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찍이 공의 훈계를 어기고 술을 심하게 마셨다. 그의 부인이 몰래 술을 빚는 것을 공이 보고는 곧바로 엄하게 꾸짖어 친정으로 돌려보냈더니 수개월 동안 감히 공을 보지 못하였다. 집안의 규범이 이렇듯 엄격하였다.
부인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직장 순명(順命)의 따님으로 계미년(1643, 인조21) 10월 9일에 향년 82세로 별세하였다. 공의 묘소와 같은 언덕에 아래위로 안장되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세미(世美)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또한 내한(內翰)과 남상(南牀)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의 조정에서 흉적들의 미움을 받아 관직이 현달하지 못하고 부사(府使)로 벼슬을 마쳤다. 또 서출의 자녀 3명을 두었는데 모모(某某)이다.
부사는 아들 넷에 딸 둘을 두었다. 장남은 위(偉)이고, 둘째 유(攸)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를 지냈고, 셋째 수(脩)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고, 넷째는 이(儞)이다. 장녀는 응교 윤계(尹棨)에게, 둘째는 정계세(鄭繼世)에게 시집갔다.
위(偉)는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운상(雲祥)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남득로(南得老)에게 시집갔다. 유(攸)는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필상(弼祥)은 군수를 지냈고, 둘째 운상(雲祥)은 백부의 후사로 들어갔으며, 셋째는 일상(日祥)이다. 수(脩)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내상(來祥)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을 지냈고, 둘째 지상(至祥)은 현감을 지냈으며,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정랑 이정만(李庭萬)에게 시집갔다. 이(儞)는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현감 이우익(李宇益)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조원현(趙元鉉)에게 시집갔다. 윤계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현감 윤이명(尹以明)이고, 정계세는 양자 정하천(鄭河千)을 두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나라 안에 덕이 높은 이가 있으니 / 國有長德
그 마음 넓고 어질도다 / 乃心寬仁
열심히 실력 쌓고 후하게 드러내니 / 敦積厚發
그 몸이 여유롭도다 / 克裕厥身
조정에 이름을 드날려 / 載敭王庭
충신이 되기에 충분하네 / 優爲藎臣
높은 자리 올라가 의표가 되니 / 漸逵羽儀
백성들이 만나 보길 갈망하네 / 想望在民
나가서 지방 고을 다스리니 / 出試郡邑
떠난 후에 백성들 그리워하고 / 去思不泯
들어와 나라 정사 참여하니 / 入參大政
차례 맞게 잘 처리했네 / 甄別有倫
즐거운 마음으로 수고를 하니 / 愷悌勞矣
바로 그 적임자로다 / 於斯其人
나라가 위태로울 줄 / 邦之臲卼
귀신처럼 기미 알고 / 見幾者神
말에다 재갈 물려 / 我馬揚鑣
고향으로 돌아가니 / 歸去吾田
죽어서 저승에 편히 가고 / 吾沒吾寧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리 / 不愧于天
아들에게 가르치길 / 有子誨爾
영화를 좇아가되 / 在逐伊榮
일시 영화 좇지 말고 / 無以一時
백세 남을 이름을 구하여라 / 百世之名
[주-D001]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 : 1566~164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에 《죽창한화(竹窓閑話)》와 《송도기이(松都記異)》가 있다.[주-D002] 죽창한화(竹窓閑話) : 이덕형이 지은 일화 만록(逸話漫錄)으로 그의 호를 따서 《죽천한화(竹泉閑話)》 또는 《죽천만록(竹泉漫錄)》이라고도 한다. 자신이 보고 들은 풍속, 제도, 풍수, 점복, 당쟁, 인사, 과거 등에 대해 폭넓게 기록하였다.[주-D003] 유몽인(柳夢寅) : 1559~162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이다. 3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문장과 외교에 뛰어났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고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는 죄로 몰려 사형당하였다.[주-D004] 어우야담(於于野談) : 유몽인이 편찬한 설화집으로, 5권 1책이다. 인륜, 종교, 학예, 사회, 만물 등 다양한 방면의 야사와 민담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성행한 야담류의 효시로 일컬어진다.[주-D005] 등백도(鄧伯道) : 백도는 진(晉)나라 등유(鄧攸, ?~326)의 자이다. 등유는 서진(西晉) 말기에 후조(後趙)를 건국한 석륵(石勒)에게 사로잡혀 그의 아래에서 참군(參軍)의 벼슬을 하였으나 서진이 멸망하고 강남에 동진(東晉)이 세워지자 남쪽으로 도망을 가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의 벼슬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가 동진으로 도망갈 때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갔는데 도중에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을 만나 둘 다 살릴 수 없게 되자 아들은 버려두고 조카를 살렸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끝내 후사를 얻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두고 “하늘이 무지하여 등백도에게 아이가 없게 했다.〔天道無知 使鄧伯道無兒〕”라고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주-D006] 특명 : 대본에는 ‘持’로 되어 있으나, 퇴로본(退老本) 《성호집》에 의거하여 ‘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7] 삼자함(三字銜) : 세 글자로 된 직함이라는 뜻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가리킨다.[주-D008]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 : 서애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호이다.[주-D009] 대학사(大學士) : 대제학의 옛 이름이다.[주-D010] 문장을 …… 신하들 : 이때 함께 참여한 신하는 대제학 유근(柳根)을 비롯하여 윤근수(尹根壽), 이호민(李好閔), 오억령(吳億齡), 신흠(申欽), 이정귀(李廷龜), 한준겸(韓浚謙), 홍경신(洪慶臣)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었다. 《國朝寶鑑 卷33 宣祖朝38年》[주-D011] 정백창(鄭百昌) : 1588~1635.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이다. 1611년(광해군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폐모론에 반대하다 거제(巨濟)로 유배되었고, 이후 경기도 양근(陽根)에 은거하며 임숙영(任叔英), 이식(李植)과 교유하였다. 인조반정 후 도승지를 거쳐 경기 관찰사를 지냈다.[주-D012] 언신(彥信) : 정언신(鄭彦信, 1527~159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이다. 1582년(선조15) 함경도 순찰사에 임명되어 이순신(李舜臣), 신립(申砬), 김시민(金時敏) 등을 이끌고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막았으며, 함경도 관찰사와 병조 판서를 지내며 국방에 큰 기여를 하였다. 1589년 우의정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위관(委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정여립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사퇴하고 정철(鄭澈)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이후 역적들의 집안에서 나온 문서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갑산(甲山)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주-D013] 그 …… 있다 : 용주(龍洲)는 조경(趙絅, 1586~1669)의 호이다. 조경은 남인의 대표적 인물로 허목(許穆), 홍우원(洪宇遠),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남인 사선생으로 불린다. 문집으로 《용주유고(龍洲遺稿)》가 있는데 권21에 정언신의 신도비명인 〈우의정 나암 정공 신도비명(右議政懶庵鄭公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주-D014] 절일시(節日試) : 조선 시대에 매년 인일(人日)인 1월 7일, 상사일(上巳日)인 3월 3일, 칠석(七夕)인 7월 7일, 중양일(重陽日)인 9월 9일에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居齋儒生)과 지방의 유생에게 보이는 시험이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문과(文科)의 전시(殿試)나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주-D015] 무자년 문과에 직부(直赴)되었다 : 정협(鄭協)은 1588년(선조21) 식년시에 을과 4위로 급제하였다. 《國朝文科榜目》[주-D016] 양관(兩館) :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을 가리킨다.[주-D017] 아우 …… 떠나자 : 정협(鄭協)의 아우 정률(鄭慄)은, 기축옥사로 부친 정언신이 갑산으로 귀양 가서 세상을 떠나자 그 슬픔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호곡(號哭)만 하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 《歸鹿集 卷17 吏曹判書鄭公諡狀, 韓國文集叢刊 213輯》[주-D018] 내한(內翰) :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의 이칭이다.[주-D019] 남상(南牀) : 홍문관의 박사, 저작, 정자의 통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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