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파노라마
배은주 이사악 수녀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몇 권인가? 73권이며 동시에 1권이라 하고 싶다. 어떻게 73권을 1권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여기에 바로 성경의 특성 혹은 신비가 들어있다고 보며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한 성령으로 감도되어 쓰인 책이다. 그러나 한 저자가 많은 책을 썼을 경우, 우리는 그의 책이 한 권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더욱이나 성경의 73권은 몇 천 년에 걸쳐 다른 문화적 배경 아래 수많은 다른 저자들이 쓴 책이 아닌가? ‘성령의 감도’라는 말의 의미가 보다 깊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때 우리는 성경이 한 권이라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2) 성경의 73권은 서로 다르지만 커다란 공유점을 갖는다. 곧 모두가 창조와 구원을 다루고 있다. 죄 지은 인간을 재창조하시는 것, 다시금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창조든 구원이든 하느님의 은총 혹은 자비에서 나온다. 곧, 전체 성경을 ‘은총’이 감싸고 있으며 이는 하느님의 계속적인 창조의 동력이요, 심장이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변할 수 없는 초심이라 하겠다. 이렇게 창조와 재창조가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져 있기에 73권을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3) 전체와 부분이 서로를 반영한다. 동양에서 대우주-소우주라는 말을 한다. 곧, 나는 소우주요 바깥세상은 대우주인데 이 둘이 같은 원리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런 놀라운 원리를 바로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소에 대가 담겨있고 대가 소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73권의 각 권이 전체 성경을 비추고, 때로는 작은 이야기, 구절, 단어 하나가 성경전체의 신학을 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 32,23-33은 전체 야곱이야기를 반영하는 동시에 전체 구세사를 반영한다. 또한 1역대 22,1은 2역대 1-9장의 내용을 함축한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성경의 밑바닥에 인간의 의식적 한계를 넘어선 더 큰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성령의 감도의 한 측면인 것이다.
4) 성경 73권을 잘 보면 전체를 꿰뚫으며 하나로 연결하는 날줄 같은 것이 있다. 같은 종류의 주제나 상징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면서 구약과 신약이, 낱권과 전체가 서로 엮이는 것이다. 마치 같은 멜로디가 때로는 오보에, 때로는 호른, 때로는 바이올린이나 첼로에 의해 전개되는 거대한 심포니와도 같다.
5) 위의 사항들을 넘어, 성경 안에는 인간의 삶에 강력히 작용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삶의 방향을 갑자기 바꾸게 하거나 영육의 치유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또한 성령의 감도의 한 측면이다.
성경 73권을 구약 46권(모세오경[토라],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과 신약 27권(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구약의 핵심은 모세오경(토라)이고, 신약의 핵심은 복음서이다. 이제 ‘토라’라고도 일컫는 ‘모세오경’의 흐름 안에 나오는 주제들을 기초로 하여 전체 성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는 두 개의 창조설화로 시작한다. 두 이야기가 다 인간 창조를 절정으로 삼지만 사실 온 창조계가 하느님의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인간창조의 기쁨은 특별히 2장에서 그림처럼 묘사되는데 하느님은 애정을 가득 담은 채 인간에게 기대하신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 너무 기쁘셔서 얼른 낙원을 만들고 사방에다 강물을 흘려보내신다.
죄: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죄를 짓는다. 창세기 3장은 ‘유혹→ 악→ 죄의 메카니즘’과 이에 관련된 ‘선과 악’이 주요주제가 된다. 하느님은 왜 ‘선과 악을 아는 나무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유일한 금기를 두어 인류에게 불행이 찾아들게 하셨을까? 히브리어로 ‘선’과 ‘악’은 ‘좋음’과 ‘싫음’, ‘옳음’과 ‘그름’, ‘잘 함’과 ‘못 함’ 등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성경에 “~의 눈에 선하다(좋다) 혹은 악하다”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내 눈, 내 욕구, 내 기분, 내 뜻에 달리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공지영의 소설이 있다. 사람들의 눈에 그 남자 주인공은 천하에 고약한 자로서 사형당해 마땅하고 또 마땅하다. 겉으로만 봐서는 정말 그렇다. 인간의 앎의 한계에서 오는 선악의 판단인 것이다. 그런데 그 여주인공은 그 남자 주인공이 왜 그런 짓을 하게 되었는지 잘 안다. 그 사람의 속사정을, 그의 비참한 성장과정과 잘 살고 싶어 했던 그의 발버둥질을 너무나도 잘 안다. 남들이 결코 모르는 따스한 정이 담긴 그의 내면도 안다. 그래서 그 여주인공의 판단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여주인공의 눈은 바로 하느님의 눈을 대변한다. 우리 각자, 아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남에게 판단당하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던 억울한 일들이 다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제 식대로 마구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게 하여 아픈 눈물을 흐르게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 선과 악을 판단할 권리는 오직 하느님께만 속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설화에서 선과 악을 아는 나무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결국 인간과 온 우주만상에 참된 공정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였다. 그런데 인간 본성이 대단하다. 내가 주도권을 쥐고 무대 중심에 서야만 내 존재가 사는 것 같다. 항상 내 뜻을 세상 돌아가는 기준점으로 만들려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거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요?"하는 말조차도 못한다. 왜? 자신이 하느님 자리에 서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를 두 가지 대립 요소로 요약할 수 있겠다.
A B
내 뜻 ↔하느님 뜻
순종 ↔불순종
돌심장 ↔살심장
자기중심 ↔하느님 중심
(결과) 죄, 죽음 ↔생명
내가 판단의 주인이 되는 것, 곧 ‘나 중심성’을 하느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길이다. 그래서 창세기 3장 하나만 잘 읽어도 73권의 모든 것이 들어온다. 이것 하나만 내 삶에서 실천해도 나는 전체 성경을 다 익혀 사는 셈이 된다.
죄의 결과: 금지된 열매를 먹은 후 인간은 하느님과 똑같이 되는 대신에 알몸을 발견했을 뿐이다. 알몸은 히브리어로 ‘아루밈’이고 뱀의 영리함은 ‘아룸’이다. 작가는 히브리어 말놀이를 통해 뜻을 전한다. 인간이 하느님과 같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하느님께서 원래 마련해주셨던 그 높은 품위가 흙 가까이로 실추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하느님의 지혜를 얻는 대신 뱀의 영리함(잔머리 굴리기)을 본받게 되었다. 그래서 남을 고통스럽게 하고 자신도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게 되고 말았다. 창세기 3장 이후 인간 죄의 확산이 보이고 하느님의 반응이 계속 나온다. 하느님의 행동을 전체적인 눈으로 보면 ‘사랑과 기대→ 인간의 죄(배신)에 대한 분노와 벌→ 구원의지’로 이어진다. 첫 인간의 경우도 그렇고, 카인이나 노아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사실 홍수 이야기에서 과연 우리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분은 굉장히 잔인해 보인다. 그러나 그 후회하시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느님은 잘못한 자식을 매로 때리고 돌아서서 우는 부모와 비슷하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으로 기울어지기 마련, 다시는 이렇게 안 하리라 후회하시며 무지개 계약을 세우신다. 다시 끌어안으시는 것이다. 또 살리고 싶으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분노 밑에는 더 큰 사랑이 숨어있고 구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창조 때의 첫 마음이 있다. 바벨탑 이야기(창세 11,1-9)에서 인간의 죄는 극치에 이르고 인간은 땅에 내동댕이쳐진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구원을 작정하시는가? 물론이다. 아브람을 부르심으로써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구원활동을 펼치시는 것이다.
부르심과 소명: 원역사(1-11장)의 광대한 대우주적 세계로부터 아브라함과 그 후손으로 옮겨지는 족장사(12장-50장)의 이야기는 굉장히 소우주적이다. 그런데 아브람을 부르시는 시작점에서 벌써 목적이 드러난다. 그가 축복이 되어 온 세상 모든 이가 그를 통해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12,3). 소우주 안에 대우주를 담아놓으신 것이다. 이는 하나의 맥이 되어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이어지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나이 법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다. 그 작디작은 민족을 뽑으신 이유가 ‘온 세상의 구원’을 그 안에 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성경 안에 소우주와 대우주가 함께 흐르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부르심은 이웃과 세상의 구원을 돕기 위한 소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 하느님과 자신을 조금씩 알아가다가 마침내 창세 22장에서 ‘하느님의 앎’이 자신의 앎이나 감정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외아들을 하느님 뜻에 맡겨드린다. 이는 확실히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죄의 역동성과 반대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의 순종하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브라함은 마침내 믿음의 아버지가 되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으며, 세상에는 구원과 축복이 흐르게 되었다. 야곱도 그리고 그의 열두 아들들도 역시 많은 시련을 겪으며 이스라엘의 성조가 될 소양을 갖추어 나간다. 이렇게 하여 탈출기의 역사가 준비되는 것이다.
탈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 모세의 부르심과 소명, 이집트와 10가지 재앙 그리고 파스카 사건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애초부터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을 계획하셨다(창세 15,13). 왜 그렇게 하셨을까? 고생을 해 봐야 고생하는 이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종살이의 체험을 잊지 말고 고아, 과부, 나그네, 곧 가난하고 약한 이를 잘 돌보아 주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며 세세대대에 걸쳐 울려퍼진다.
파스카: 파스카는 한편에서 다른 한편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노예상태에서 자유인의 상태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런데 파라오는 왜 그렇게나 고집을 부려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방해하고 결국은 자신이 망하고 말았을까? 성경은 그 이유를 파라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음이 완고해지는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탐욕이다. 둘째, “내가 누군데!” 하면서 오직 내 식대로만 밀고 나가려는 고집이다. 셋째, 나의 약점과 잘못을 충분히 인정할 용기가 없는 나약함이다.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주위를 괴롭히고 자신을 망가뜨리는지 우리는 탈출기에서 철저히 본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파라오의 손을 벗어나 갈대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즉시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로 들어가지는 못 했다. 그들 내면에 파라오가, 곧 완고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적 파스카가 최대 몇 달 걸렸다면, 내적 파스카는 40년, 한 세대 이상 걸렸다. 사실 우리에게도 내적 파스카는 죽음의 순간까지 계속된다. 하느님 백성의 최종적 파스카를 그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는 바로 이러한 내외적 파스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들을 통해 나의 파스카를 조명해 볼 수 있다.
시나이 계약: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 결과 그들은 하느님이 아끼시는 보물, 하늘과 땅을 잇는 사제적 백성 그리고 거룩한 민족이 된다. 이는 신약시대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참으로 고귀한 품위이다(1베드 2,9-10 참조). 시나이 계약은 조건부 계약이다. 조건부 계약이란 정이나 끌림(매력)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법에 바탕을 두고 서로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계약으로써 쌍방은 법적으로 묶이게 되며, 이스라엘은 계명을 지킬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노아의 계약이나 아브라함의 계약 혹은 다윗과의 계약과 같이 조건이 전혀 붙지 않는 무조건적 계약도 있다.
계명과 법규: 이스라엘의 주변국가에서는 왕이 곧 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토라라 일컫는 법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십계명과 더불어 안식년, 희년, 그 밖의 보호법과 규정들이 들어있다. 20세기 이후 인권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지만, 수천 년 전에 쓰인 토라는 이미 그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 권리나 생태 살리기 등이 이미 다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살지 못했을 뿐이다. 성경의 정신을 제대로 산다면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를 타파하고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왜 부자와 빈자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만일 모두가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정도의 옷을 입고 같은 정도의 생활을 한다면 그 삶은 어떠할까? 이웃에 아무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고 무엇을 더 잘 할 필요도 없고 긴장도 도전도 없이 마치 전혀 흐르지 않는 물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부자와 빈자가 있어, 부자가 빈자에게 나눔의 삶을 실천할 때 역동성이 생긴다. 마치 폭포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삼투압이 작용하듯 말이다. 장애인이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 많은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다는 고백을 자주 한다. 거기서 생각지도 못했던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빈자 역시 부자의 따스한 도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다. 빈부의 차이란, 요즈음처럼 인간이 탐욕으로 극대화된 경우에는 가공하리만큼 지나치지만, 성경의 근원적 시각에서 보면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할 기회를 마련하는 장이라 할 수 있겠다. 계명을 중력이나 삼투압 같은 우주의 원리로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다. 다시 말해, 계명을 지키다 보면 계명에 담긴 관계의 역동성 안에서 생명이 꿈틀대고, 인간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유배시기와 그 직후, 달라진 환경 속에서 생겨난 다른 종류의 법들이 있다.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던 안간힘 속에 만들거나 강조하게 된 많은 법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상황이 바뀌었을 때에도 그 법들은 그대로 위력을 발휘하였다. 사회가 이런 법 위주가 될 때 사람들의 삶은 팍팍해지고 생명의 흐름은 막히기 십상이다. 예수님은 바로 여기서 사람들을 해방시켜주려 하셨다. 오늘의 나는 사람들을 보호법으로 대하는지 법 위주의 법으로 대하는지 스스로 착각하지 않을 맑은 눈을 가질 은총을 구하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광야: 광야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시련의 장소요, 불평과 분노와 욕심을 거치면서 관대함과 용기, 인내와 신앙을 배우는 곳이었다. “용기를 내어라. 힘을 가져라. 믿기만 하여라.” 광야생활 끝 무렵 신명기와 여호수아기에 자주 나타나는 이 말은 ‘광야라는 학교’에서 배운 결론이다. 광야는 신앙과 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장소이므로 성경 전반에 걸쳐 광야 주제가 나타난다. 그 광야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싸움, 자기 뜻과 하느님 뜻과의 싸움이 치열해진다. 광야생활을 보면 이스라엘이 40년, 모세가 홀로 40년을 하였다. 모세는 합쳐서 80년. 예수님의 광야 유혹은 40일이다. 토비트는 4년 동안 눈이 멀었다. 4 혹은 40이라는 숫자가 고통과 어려움을 표현하는 동시에 이 고통과 시련 뒤에는 하느님의 무한 손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길이 4 혹은 40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집중적으로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 사십일 동안 하느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웠고, 십자가에서 그 배움의 극치를 이루셨다(히브리서 5,8 참조).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광야에 들짐승과 천사가 함께 살았다(1,13). 내 안에도 들짐승이 있어 거친 성격을 드러내며 생명을 잡아먹는다. 반면에 내 안에는 천사 같은 선성도, 하느님의 보호도 있다. 이 둘을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때가 바로 광야 시기이다.
가나안에서의 삶: 가나안에 입주하면서 모세오경은 끝나고 역사서로 넘어간다.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 역대기, 에즈라, 느헤미야, 마카베오까지가 역사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니 삶의 환경이 무척 많이 바뀌었다. 이스라엘이 옆을 보니 다 왕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을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하느님은 그들의 원을 들어주신다. 이전에는 판관이 있었고 판관은 위기상황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이스라엘 형제들 가운데 하나로서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왕이 생기고 그를 모시고 살아가는 관료들이 생겨남에 따라 동등한 관계였던 사회구조가 상하의 관계로 바뀌었다. 또한 왕정과 더불어 상업이 발달하자 유목과 농경을 주로 하던 이들이 땅을 버리고 도시로 모여듦으로써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전에는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하며 약자를 섬기는 것을 의(義), 곧 법(토라)으로 삼던 이들이 이제 국가의 법에 종속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생겨 동족을 헐값에 사서 부리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가난과 굶주림에 내쳐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실 이런 위험을 이미 보셨기에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다른 나라 왕들과 다름을 처음부터 철저히 각인시키셨다(1사무 8-12).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 반드시 토라 밑에, 하느님 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정과 함께 생겨난 특별한 인물들이 있다. 예언자다. 왕이 토라를 저버리거나 잊어버리면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이라 하며 쐐기를 박는 것이다. 이렇게 왕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언제나 계명과 법들(토라)이 먼저였다. 사실 왕이 즉위하자마자 꼭 해야 하는 의무 가운데 하나도 성경필사였다. 형제들을 멸시하지 않는 왕이 되기 위해 성경을 익히고 또 익혀야하는 것이다(신명기 17,18-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현실에 대응하였는가? 대부분 절충주의였다. 이 정도면 하느님께서 봐주시리라 생각하면서 맘몬과 권력 등 우상이 제공하는 가치들과 타협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불행으로 인도하였다. 나라가 망하고 유배의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을 다시 귀환시켰다. 마카베오기는 그 후 다시 혼란한 세상을 살게 된 백성과 토라와의 관계를 기술하였고, 구약의 역사서는 여기서 끝난다.
역사서가 이스라엘 백성이 토라를 어떤 식으로 지키며 살았는지 주로 왕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것을 들려준다. 성문서는 참된 지혜를 갖추고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지혜에 관한 글(=지혜문학)들과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대화를 실은 시서(=시편)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모두가 토라를 주축으로 하고 있기에 이들을 한 마디로 ‘모세오경의 확대요 적용’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538년 유배지에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귀환은 했지만 이국세력들 아래서 혼돈, 투쟁, 빈곤 등 깜깜함 상황의 연속이었다. 말라키 예언자 이후에는 예언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그래도 희망할 수 있었던가? 유다인들은 다윗의 계약을 기억하였다. 오실 분이 오셔야 한다며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말라키 예언자의 목소리를 그대로 본딴 세례자 요한의 사자후가 마르코 1장 2절에서 울려퍼진다. 일부 유다인들이 나자렛 예수야말로 오실 분, 메시아,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부정하였다. 목수의 아들이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졌던 하느님 개념, 메시아 개념으로는 한낱 목수의 아들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화려하고 권력을 휘두르시는 하느님 상을 가지고 메시아를 기다렸다. 이것이 마르코 복음에서 제자들의 실패를 통해 메시아 비밀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의 하느님은 권력을 휘두르는 분이 아니라 섬기는 하느님이시다.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시다. 진짜 메시아는 어린양과 같은 모습이시다. 나자렛 예수 안에서 새로운 메시아 상과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나타났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를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바로 구약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하느님에 대한 이해, 자신에 대한 이해가 구약성경을 새로운 빛으로 읽으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구약성경의 본뜻을 찾아들어갔다고나 할까?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가 바로 이 구약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빛으로 읽은 구약성경 해설이 바로 신약성경이다.
사실 이런 해석 작업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당시 바리사이나 율사들과 달리 율법(토라)을 읽고 해석하셨다(마태 5,17-48; 마르 2,27; 10,2-12 등 참조). 또한 왜곡되게 이해되었던 하느님을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다시 알아듣게 하시며 새 계명을 주고 새 계약을 맺으셨다. 이리하여 ‘구약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당신의 삶을 통해 뚜렷이 드러내신 것이다. 이제 시몬 베드로가 한 고백의 뜻을 알 듯하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수천 년 전해져온 ‘생명의 법 토라’(신명 32,47 참조)가 예수님 안에서 제 의미 그대로 완성된 것이다.
우리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전해오던 구약성경의 모든 주요 요소들이 나자렛 예수에게서 집결되는 것을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왜 구약성경뿐 아니라 신약성경까지 합쳐 이들을 ‘여러 책이면서도 한 권의 책’이라 하는 지도 이해할 수 있겠다. 흐르는 시대의 여건에 따라 인간의 삶은 구체적 현상에서는 다르겠지만,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하나이며 한결같고 모든 것이 같은 내적 역동성 아래 생명의 충만을 향하여 움직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와 함께 이루어 가시는 속 깊은 심층역사,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시고자 하는 것은 복락원이요, 영원한 생명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없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니요, 하느님께서 내 안에 그리고 내가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다(요한 14,23; 1 요한 2,24 참조).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우리에게 약속된 궁극적 거처(약속의 땅)요, 이것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합(合), 곧 완전한 ‘샬롬’인 것이다.
지금까지 나눈 내용을 종합하는 마당에 시편의 영성을 새에 비유해 이야기하고 싶다. 삶은 고통과 기쁨, 탄원과 찬미의 두 날개로 이루어져 있다. 삶은 이 두 날개로써 비로소 날 수 있는 무엇이 된다.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신뢰가 날개를 젓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고통이 올 때 고통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런 경우 새는 영영 날지 못 하게 된다. 새는 이 두 날개로 자기의 갈망인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편은, 마치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진복팔단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미소 짓고 눈물 가운데서도 기쁨과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니, 사실은 찬미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날개의 한쪽 끝에서 시작해 다른 끝으로 연결되며 나오는 것이다, 소위 파스카라고 일컫는. 시편저자의 말을 떠올리자. “내 마음이 속삭이고 있나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말씀을. 주님,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시편 27,8) 우리는 모두 ‘파스카의 새’가 되도록 불림 받았다. 고통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날기를 포기한다면, 곧 십자가와 믿음을 거부한다면, 하늘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새’ 아닌 무엇이 될까? 전체 성경의 영성은 생명에로 건너가는 파스카이고, 성경은 우리 신앙의 삶을 통해서 완성되며, 주님은 그 열쇠를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을 닮고 그분과 그분 말씀 안에서 용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