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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3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 이 71 편의 시가 기록된 시기는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라고 전해져 왔다. 과연 다윗이 자기의 늙은 때를 특별히 말하고 있는 귀절을 본다면 이러한 추측은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그
러므로 다윗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항상 사용했던 방법과 같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위선의 기도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간구한다. 마음이 항상 동요하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나, 소망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누어 한편으로는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 의심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자들이나, 초조하여 침착하게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1 절 마지막에 나오는 전치사 (르올람)을 우리는 "영영히"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에는 내가 시편 31 편 1 절에서 설명한 대로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어 현재의 다윗의 고난과 그가 앞으로 내다보는 행복을 암암리에 대조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이없게도 먼지 속에 누워 있으나 주께서 나를 마땅히 구원하실 때가 오리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의 뜻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귀절들은 31 편의 시작과 거의 같으므로 여기서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설명의 반복을 하지 않기 위해서 생략하고자 한다.
3 절에 나오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이라는 말씀은 다른 시편에서는 찾아볼수가 없다. 다윗은 이 말씀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매우 쉽고도 용이하게 접근하여 갑자기 어떤 위험을 당하게 될 때에 하나님 안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짤막하게 기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여, 나로 하여금 항상 주
안에서 쉽게 피난처를 찾게 하시고 내가 주를 의지할 때에 자비와 은총의 웃음으로 나를 만나소서' 하는 의미와 같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라는 표현을 어떤사람들은 기원법으로 해석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천사들의 보호를 명하여 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사를 과거 시제로 보아서 다윗은 과거의 자기 경험으로 용기를 얻어 현재의 고통을 축복으로 바라본다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낫다. "주께서......명하셨으니"라는 동사를 굳이 천사들에게 국한 시킬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기 위해서 천사들을 부리고 계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의 증거를 나타내고자 하실 때는 언제든지 자신이 하시려는 방법대로 자기 종들의 구원을 명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기 마음에 결정하신 것을 때로는 말씀만 가지고 행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을 도구로 사용해서 행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막연히 가르쳐 주고 있다. 동시에 다윗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라고 간주하여 어떠한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명령만 가지고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것이다.
71;4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에서 피하게 하소서. - 다윗은 여기서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모든 원수들을 포괄시켰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완전함을 굳게 확신하고 자유스럽게 하나님께 우리가 원수들에게 부당하고
악한 고난을 당한다고 탄식하게 될 때, 이와 같은 기도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는 확신을 얼마나 강하게 가져다 주는가 하는 문제를 이미 다른 곳에서 살펴본 일이 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압제를 당하는 자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
71;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 시편 기자는 여기서 조금전에 자기의 믿음과 확신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이 그에게 희망과 확신을 주었던 동기라든가 이유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마음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에 의해서 잘 다져진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단순히 자기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고, 이 말을 통해서 자기가 젊었을 때부터 받았던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증거에 대한 경험과 확신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얻어진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지식들을 연결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것을 말함으로써 믿음의 진정한 근거를 나타내고 있다(만약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귀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함이 그의 소망을 일어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이 귀절은 다윗이 그의 믿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앞절과 일치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렸을 때부터 체험했다고 노래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증거를 출생 이전에 받았다고 찬송한다. 거의 이와 비슷한 고백이 시편 22 편 9,
10 절에 들어 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상상할 수 없는 선하심이 나타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 고백을 하나의 사실로서 아주 친밀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 고백의 표현 방법과 태도는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홍수 역사에 대해서 모세가 말한대로(창 8:13)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그처럼 많이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생명
의 호흡을 내뿜는 불쾌한 호흡 속에서 열 달 동안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감탄을 한다면, 이같은 이유에서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소리를 치면서 가장 강한 사람 일지라도 반 시간도 못가서 질식하게 될 그러한 상황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하찮은 행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이 이적들과 친숙해진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출생과 혈통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현저한 실례들을 생각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우리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을 여지없이 꾸짖으신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어머니들이 자기의 할 일은 했으나 산파가 어머니 곁에 있었을 것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와 산파를 도왔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이 우리를 받았으며 그의 배에 우리를 잉태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이 우리를 태어나게 했는가?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계속될 희망이 무엇인가? 참으로 우리의 출생 자체가 수많은 사망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을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라는 말로 최고의 행복이 되심을 말했다. 이 말씀은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한 이 귀절의 결론 부분과 상통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기가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71;7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 그는 이제 논조(論調)를 탄식으로 바꾸어 자기가 당하는 크나큰 이유로 말미암아 거의 세계적인 혐오를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외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상반절에서는 그가 항상 하나님의 축복으로 둘러쌓였다고 해놓고는 하반절에서는 크나 큰 환난으로 인하여 이상하게 여김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귀절을 통해서 매우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그는 자기가 체험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막중한 재난을 당했지만 결코 이러한 재난들로 인해서 압도당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축복을 돌이켜봄으로써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칠흙같이 어두운 그늘에서도 자기 마음속에 믿음을 지키는 한 개의 등불을 밝힐 수가 있었다. "이상함"이라는 표현은 그가 당한 재난이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그가 색다르고 특별한 방법으로 재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 중에서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요, 그에게서 그러한 영광을 탈취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를 그토록 혐오하는 모습으로 바라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의 영혼이 부끄러움을 당함으로써 좌절되거나 나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더욱 세상의 것들을 멀리한 그의 꿋꿋함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그리고 훌륭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 귀절을 반의적(反意的)인 의미로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그를 잔인무도한 사람인 것처럼 혐오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이러한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계속 요동치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큰 자'라고 번역한 (라빔)이란 말을 달리 해석하자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윗의 재난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따라서 그가 매우 나쁜 평판을 들어왔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가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무대에 선 자가 되었고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큰 자' 혹은 '고상한 자들'이라는 말로 이해하는것이 더 타당한것 같다. 지식과 판단력이 뛰어났다거나 권위를 가진 자들일지라도 고난을 당하고, 마치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악한 자들에게 자기의 영광을 빼았는 등의 모욕을
당하게 될 때, 이런 외부적 영향에 큰 상처를 입지 않고 강하고 담담한 마음을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음 귀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의 사례를 드리기로 한 그의 결심을 말한다. 마치 자기 마음에 바라던 것을 얻은 것처럼 자기가 지금 당하는 고난들을 행복이 되게 하리라고 더욱 굳게 확신하는 소망으로 스스로 용기를 얻어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할 것과 이 찬송를 한 번에 그칠 것이 아니라, 계속 중단하지 말고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71:9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 다윗은 지금까지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보호하시는 분이요, 어렸을 때에는 기르는 양부(養父)이시며 그의 지난 모든 세월 동안을 축복으로 지키시는 분이셨다고 말한 후에, 이제 늙어서는 아버지같이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다시금 자신을 의탁하고 있다. 우리의 가진 힘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에는 -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다 - 그 정도에 비례해서 우리를 구하사 강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을 바라보게 된다. 요컨대 다윗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오 주여, 나의 젊음의 꽃을 힘있고 강건하게 지켜 주셨던 주께서는 내가 이제 쇠잔해져서 거의 시들어 죽게 되었으나 버리지 않으시고 내가 주의 도움을 구하면 구할 수록 더욱 나를 긍휼히 여기사 늙어 망령에 들거나 쇠약하지 않게 하소서,' 이 귀절을 근거로 주석가들이 이 시가 취급하는 주제는 압살롬의 반역이라고 결론짓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마치 몹시 극악무도한 사람을 다루듯 왕궁에서 내쫓고 모진 광야에 죽도록 내버려두기까지 하였던 일은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뛰어난 권위를 가진 자도 역시 자기들의 눈을 그에게서 돌이키게 만드는 무시무시하고 비극적인 광경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71:10-11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보여주셨으므로 일어난 사건, 즉 악한 자들이 다윗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 버림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잔인하게 핍박하는 큰 면허증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가장 비열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이것은 전혀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에 더욱 무례하고 파렴치하게 되어 죄없는 자들을 괴롭힌다. 그들은 형벌을 받지 않고 피하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낼 뿐 아니라 자기들의 악한 욕망을 억제시키는 장애물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지난 모든 일이 자기들의 뜻대로 되었다고 자랑한다. 옛날에 다윗에게 일어났던 일은 거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들의 먹이로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라고 한 번 믿게 되면 자기들이 그들에게 제한을 받지 않고 손해를 입힐 수 있는 면허증을 가진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사람들의 현재 상태만 가지고 하나님의 은총의 척도를 계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사 고난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으며 업신여김을 당하며 내쫓김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기를 얻고 자극을 받아 조금도 원수를 갚고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괴롭히고 또 해친다. 그러나 이들의 난폭하고 무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난한 자와 고통을 당하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빈번히 맺어 준신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리라는 희망에 스스로 아첨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은 공상은 결단코 자기들 행위의 죄악을 가볍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음으로써 하나님께 이중으로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71:12-13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 악한 사람들이 다윗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당했던 시험이 얼마나 격렬했으며, 견디기 어려웠는지를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생각없이 이러한 말을 퍼뜨린 것은 아니었다. 모든 형편을 현명하게 살핀 후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관점에서 그들의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 편에서 볼 때는 영웅적인 인내의 증거로서 그들의 사악한 판결보다 더 우월한 것이었으며, 그들 모든 사람들의 면전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로우셨다는 것과 자기를 가족처럼 대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맹렬하고 쓰라린 공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함과 동시에 자기 원수들이(13 절) 멸망당할 때까지 수치로 덮이게 해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미래형으로 읽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표현법은 다윗이 기도를 마친 후에 자기가 원수들을 이기고 일어나서 그들을 승리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데 흔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본문이 의미하는 내용에 보다 일치하는 견해를 따랐다. 이런 적용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귀절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불필요하게 되풀이해서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 다윗은 승리를 획득함으로써 또 다시 감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한 자들이 자기의 단순함을 비웃을 동안에도 틀림없이 이런 고통들을 남자답게 헤쳐 나갔다는 사실을 "소망"이라는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겉르로 보기에는 그가 고통 중에서 구원받을 가망이 없었고,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의 믿음을 득의만만하여 멸시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다윗은 그럴지라도 소망을 항상 품기로 작정했다. 이러한 결심은 가장 어두운 고통의 흑암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본 진실 한 믿음의 증거이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소망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그가 그 당시 당했던 환난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다윗은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라는 말 속에서 자기가 고통에서부터의 바람직한 피함을 얻게 될 것을 확실히 예언한다는 것을 부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주여, 나는 오래 전부터 주님께 항상 은혜를 받았으므로 이육신이 그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아 주의 은총을 찬송하는 새로운 일을 내가 맡게 될 것을 의심치 아니하나이다'와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71:15
내가......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 여기서 다윗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은 그가 결심했던 찬송의 제사가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계속해서 선포하기를 서약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앞에서도 종종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실 때에 그의 백성들을 향해 나타내시는 신실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의와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큰 위로는 마치 하나님의 속성과도 같은 견고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귀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능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시편 기자는 결과를 원인과 관계짓듯이 이 구원을 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은 의롭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거짓말을 (칼빈 사역)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렇게도 빈번하고 수 많은 방법으로, 그리고 매우 놀라운 방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할 것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가 '이는'이라고 번역할 (키)라는 관사를 어떤 사람들은 '비록 - 할지라도'라고 부사적인 의미로 보고 '비록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측량할 수 없는 것이요, 내 이해력을 능가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전하겠나이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 사용된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불태우고 자극시켜 하나님을 찬송하여 노래하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마음은 다윗이 받은 은혜 가운데 겨우 한 두 가지밖에 경험하지 못했고, 또 경험한 은혜가 적어서 냉담하고 감동을 받지 못한 처지에 놓였다고 하지만, 만약 우리가 셀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실 때에도 무감각한 상태나 냉담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배은 망덕한 행위는 그 어떤 말로도 핑계댈 수 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찮게 또는 귀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모든 재능을 다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크게 찬송하도록 하자. 만알 이전 세대의 어떤 광신자들이 자랑하기를 다윗의 본을 받아 모든 지식과 자유 학문을 경멸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이것은 자기들의 무지함을 변명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헬라어 번역가들이 '내가 지식을 알지 못했다'고 이 귀절을 번역한 것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는 오류로 생각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오늘날의 재세례파Anabaptists)가 영적 인격을 자랑할 만한 다른 구실이 없이 모든 학문에 극히 무식한 더욱 놀라운 일이다.
71;16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내가 주 여호와의 능력에서 다니며 - 칼빈 사역) - 이 말씀은 '내가 주 여호와의 능력으로 들어가겠사오며'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 해석은 본문이 택한 번역보다 못하지 않다. 위험을 당할 때 우리가 두려워하게 되고 슬픔에 잠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을 없애 줄 수 있는 유일한 치료 방법은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본문 번역이 나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석가들이 각각 그 의미를 다르게 보기는 하더라도 이 번역이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내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는 싸움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제한된 해석이다. '온다'는 말은 견고하고 안정되며 변함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들의 힘을 발휘할 때는 반드시 어려움이 생기고 따라서 그토록 하늘 가는 길로 빨리 날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지쳐서 신음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무적의 용기로 모든 장애물과 어려움들을 극복함으로써 뒤로 후퇴하거나 정도에서 벗어나거나 아니면 최소한 절망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들 길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자들이라고 불린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표적에 이를 때까지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나약하고 병든 상태에서 계속 머무르는 것 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전적으로 확신하며 의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생각을 집중하고 있다. 다윗은 오직 "주의 의만"진술하겠다고 하여 자신이 모든 세상에 뒤덮여 있는 부패한 신앙을 모두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함으로써 방황하거나 주위에 있는 것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을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행함의 공로를 논박하기 위해서 이 귀절을 백 번도 넘게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들에게 공로가 될 만한 의를 부여해 주셨다는 말을 보기좋게 논박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다윗의 말을 남용했고, 본래의 의미에 색다른 의미를 첨가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의 본래 의미는 다윗도 자기의 지식, 재주, 힘 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재물을 가지고 구원 소망을 확실히 하는 근거로 삼지 않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자기를 버리실 수 없으시다는 것만으로 자기의 구원에 대한 근거를 삼았다는 것을 단순히 나타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여기에서 사용된 "주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화목하시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시키시기 위해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신실하게 지킴으로써 자신이 의로우시며 정당하시고 자기 종들을 진실 함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인은 계속해서 자기 눈앞과 기억 속에는 오직 하나님의 의(義)만을 있게 하겠노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잠시라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게 되면 사단은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들을 유혹하여 헛된 것을 따르게 하여 배반하도록 계속해서 꾈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얻은 소망이 우리들 마음속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넘어지는 것보다 더할 수 없는 위험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보잘것없는 구원을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틀림없이 타락하게될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는 세상과 함께 뒤섞여 보고자 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헛된 일인가 하는 것을 예를 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단순히 외면적 생활 조건에 관해서 말하면서도 다른 모든 확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써만 견고하고 안전할 수가 있었다고 말했다면, 영적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살펴볼 때에 우리가 만일 타락하여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가 어찌 견고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독자들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보여주고 있는 교훈, 즉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 사이에 있어야 할 거룩한
인내를 없애려는 행위는 가엾은 영혼을 멸망에 빠뜨리는 행위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71:17-18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 시편 저자는 또다시 감사함을 격려하는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리라는 소망을 계속 간직하기를 스스로 자극한다는 입장에서 자기의 축복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큰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는 다음 귀절에 나타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되 말씀과 행동 양자를 통하시기 때문에 시인은 여기서 후자를 통한 교훈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다윗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폭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계속적인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런 실제적인 진리를 결코 빼앗기지 않고 이 진리에 매우 능숙하게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행사들을 전하는 자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을 때, 이 약속 아래서 그가 목표하고 있던 것은, 자기가 배은망덕하여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지난 일들을 그르쳐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 다윗은 18절에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 말은 곧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나의 존재가 시작될 때부터 나에게 나에게 주의 선하심에 대한 풍성한 증거들을 주셨사온데, 이제 주께서 내가 늙어 기운이 없어짐을 보실 때에 나를 구하시려고 주의 손을 펴시지 않으시
겠나이까?로 풀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고, 우리가 소년이었을 때 자비로써 우리를 풀어 주셨으며,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계속해서 끊임없이 선을 베풀어 주셨으므로 우리의 마지막 때에도 한결같이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은 매우 명확한 결론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전히'(칼빈 사역)라고 번역한 (감)이라는 전치사가 여기서는 '그러므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윗은 곧 이 말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코 고갈될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마치 사람들처럼 변동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들이 늙었을 때에도 그들이 어렸을 때에 그들을 대해 주시던 것과 똑같이 대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다윗은 다른 주장, 곧 자기가 늙어서 절망에 빠지거나 믿음이 흐려질 때는 지금까지 그에 의해서 자신을 지탱해 왔던 하나님의 은혜도 오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의 기도를 뒷받침한다. 만일 우리가 살짝 맛만 보았을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곧 거두신다면 그의 은혜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너무도 빨리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축복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 후 우리의 생명의 끝날에는 우리를 버리신다면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많은 관심과 매력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늙은 후에도 자기를 돌보사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음을 후손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또 하나님꼐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신실한 자들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자기가 죽는 순간에도 증명할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 "후대"와 "장래 모든 사람"은 자녀들과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증거를 회상하게 될 그 자녀들의 후손을 의미한다. 다윗은 이 말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또 그 과정도 완전해지는 것을 후손들이 전해 듣게 될 것을 간구한다. 다윗은 '힘과 능력'을 하나님의 의에서 나온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말들을 자기가 직접 송축했던 구원의 방법을 노래하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이루신 것들 속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71:19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나이다 -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앞절과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고 '내가 전할 것이다'라는 동사를 두 귀절에 공통적으로 적용시켜서 '그리고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의를 전하겠나이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지 않겠다. 다윗은
앞에서 말했던 것을 더욱 길게 말한다. 그는 첫째로 '하나님의 의가 지극히 높다'고 말하고, 둘째로 주의 의가 능력을 행사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마지막으로는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라고 찬송한다. 하나님의 의는 그 결과가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우리의 눈으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듯하지만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으로는 파악할수 없는 높은 곳에 그 뜻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제한된 표준을 가지고 측량해 보려고 한다면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가장 적은 시험에 압도당하고 삼킴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아무 거침없이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넓고도 포괄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의 충만한 분량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기 위해서는 그 높이와 깊이, 길이와 넓이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중반절에서도 이러한 특징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켜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라고 한다. 설혹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능력에 합당한 찬송을 드려보고다 하는 생각을 하더라도 이러한 우리의 선한 의도은 결코 충족될 수가 없다.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놀라움으로 주게 될 정도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경건치 못한 불안으로 인하여 미혹되기 잘하는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부커 한 마리의 파리를 코끼로 과장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미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지키고 계시는 지극히 높은 산을 향해서 발을 들게 되고, 또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라고 한 다윗의 말은 모든 방해물들을 믿음으로 헤쳐나가는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방해물들보다도 뛰어난 것으로 여겨야 하며, 이렇게 하는 생각이 옳은 것이라는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입으로 아무도 하나님과 같은 자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온전하게 깨닫는 자는 백 사람 중에 하난가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이다.
71;20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 잘 아는 바와 같이 히브리어의 '보다'라는 동사는 다른 의미로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에게 고난들을 '보이셨다'라고 하여 자기가 고난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가 받은 구원에 대한 찬송을 하나님께로 돌림으로써 자기가 당한 모든 환난들이 하나님의 작정과 뜻에 의해서 자기에게 가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것은 다윗이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힘들게 받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자기가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와 비교해서,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항상 일정한 축복의 과정을 좋아했다면 그는 자기가 기뻐 노래할 만한 좋은 근거를 틀림없이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면 다윗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패망에서 구원되는 사실은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보여주실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가져야 한다. 우리는 사상이나 지식을 가지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초반기에 있을 동안에는 우리 존재의 창조주에 대한 감각이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 상태에 누워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상을 볼 수 있는 밝은 거울을 우리에게 부활시켜 주는 것이 된다. 다윗이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대해서 말하기를, 자기가 비록 바닥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구출되고야 말 것이며 기쁨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하게 안전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높은 영광에 오르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왕좌를 회복하게 하는 것과 같다. 다윗은 '하나님의 돌이키심'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함에 이른다. 즉 다윗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환난들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다. 이 사실은 자기의 형편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자마자 뒤집혔다는 사실을 볼 때 명확해졌던 것이다.
71: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 다윗은 또 자기 종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뜻과 하나님의 선하심은 찬송을 받으실 만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를 올리기 시작한다. "비파"와 "수금"으로 찬송하겠다는 말 속에서 다윗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일반적인 관습을 말한다. 수금과 비파로 하나님을 찬송하여 노래한것은 율법이 행해지고 있던 시대, 그것은 그림자와 모형이었던 그 시대에 율법과 하나님 예배에 대한 훈련의 일부분을 형성했으나 지금은 공공 감사 시간에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악기를 사용하는것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악기들은 성령의 분명한 명령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4장 13절에서 이것을 불변의 규칙으로서 중지시키고 오직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고 또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성실"이라는 말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협 가운데서 지켜 주실 때에 하나님안에서 쉬기를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그의 "성실"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이 연합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기로 하신 모든 축복들을 맛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조명을 받지 않으면 기도나 감사를 드릴 마음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더더욱 저리가 나는 것은 만약 믿음이 율법 등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면 기도해야 할 규범을 그르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친 악마같은 사람 세르베투스(Servetus)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음성으로 우리를 자기 에게로 초청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71:23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 이 귀절에서 다윗은 더욱 분명하게 자신의 결의를 나타내기를 자기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위선적으로나 겉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요, 거짓없는 진심으로 이 종교적 행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윗은 자기가 소개한 찬양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의 근원이었다고 우리에게 짤막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다윗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번창할 때에 스스로 자신에게 찬사를 돌리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즐거움을 간접적으로 책망한다. 마지막 절의 내용도 똑같은 결론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기쁨도 자기에게 달콤한 것이나 바랄 만한 것일 수가 없었고, 구속주를 찬송하는 것이 자기의 가장 큰 만족이요, 기쁨이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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