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독재와 대마초 파동
자주시보/ 한 찬 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2023/12/30
1975년은 시국사건 등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2월 유신헌법 찬반 투표, 4월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집행, 5월에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또한, 석유파동으로 물가 또한 급등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민심과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그 음모가 바로 가요계를 강타한, 유명한 대마초 파동이다.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충직하게도 ‘마약 관련 방송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마초 관련 연예인 명단을 발표하고 이들에게 연예 활동을 중지시키거나 제명 처분하도록 연예협회 및 영화인협회에 통보한다.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1975년 12월 윤형주·이장희 등 포크송 가수들이 습관성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
박정희는 1976년 법무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직접 대마초를 언급하며 “공산당과 싸워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마당에 젊은이들이 대마초를 피우고 있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 …(중략)… 현행법 최고형을 적용하라.”고 지시한다.
대마초 파동은 또한 한국 가요계 판도를 바꿔놓았다. 당시는 통기타 가수의 전성시대였는데, ‘대마초 파동’으로 100여 명의 가수가 고초를 치르다 보니 포크와 팝 장르 자체가 무너져버렸다. 이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나훈아, 남진, 송대관 등을 위시한 트로트 가수였다.
가요평론가 이영미는 대마초 파동 이후 나타난 ‘공백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6, 1977년 두 해를 통틀어 각 방송사에서 뽑은 최고의 가수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이촌향도한 하층민의 정서를 담고 있으되, 하도 절제감이 없어서 당혹스러운 노래 「해 뜰 날」(송대관 작사, 심대성 작곡) 한 곡으로 스타가 된 송대관이라는 점은 이 시기가 얼마나 심한 공백기였는가를 보여준다. 새로운 할 말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정치적 억압기…”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 편 3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2)
또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열기에 힘입어 히트한 것이었는데, 그는 대마초 흡연 혐의로 1977년 제2차 대마초 파동 때 모든 방송에서 출연을 금지당하면서 사라졌다. 1977년까지 연예인 137명이 구속되거나 입건됐다.
흉흉한 민심을 돌리는 데에는 연예인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 .....
이처럼 거의 주기적으로 언론은 정권의 시녀, 하수인, 주구가 되어 연예인의 잘못, 치부가 드러나면 물어뜯는다. .....(하략)
글; 한찬욱(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살인마들아!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중에서
출처; http://www.jajusibo.com/6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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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대마초 사건을 통해 청년문화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일소
1975년 대마초 사건은 청년문화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유신정권이만들어낸 기막힌 사건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포크나 록을 하던 가수윤형주・김세환・신중현・김추자・이장희 등과 영화감독 이장호에 이르기까지청년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던 대중예술인들을, 대마초를 피웠다고 구속하고 공식활동을 완전히 금지해버렸다.
대마초 바람은 1960년대 미국의 히피이즘에서 우리나라 청년문화로 스며들었다. ......
우리의 청년문화가 그다지 높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을 동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전 사회를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싶어했던 유신정권으로서는 그 정도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허용할 수 없었다. 파시즘은취향의 영역까지 파고들어왔으며, 노래나 영화 같은 예술은 물론이고 패션이나언어습관까지 통제하고 싶어했다.
이미 대마초 사건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범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외래어로 된 가수 이름은양파들(어니언스), 토끼소녀(바니걸즈), 김세나(김세레나) 등으로 바꿔야 했고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토요일밤에>)의 가사가 “긴 머리 분홍치마”로 바뀌는 해프닝이 속출했다.
조영남은 <아침이슬>의 “태양은 묘지 위에”를 “대지 위에”로 바꿔 불렀고, 쉐그린은 아예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머리 긴 채로 명동나갔죠.… 바로 그때 이것 참 큰일났군요. 아저씨가 오라고 해요./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짧은 치마 입고 명동 나갔죠.”(<어머님 말씀>) 같은 ‘건전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일찌감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건전가요를 지었던 신중현은 1975년에 나온 음반에서 <뭉치자> 같은 노골적인 건전가요를 지어 부르는‘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그는 대마초 사건의 수괴로 지목돼 구속됐다.
대마초 사건은 1970년대 대중예술사의 전・후반기를 나누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이전까지는 일부 대학생・고등학생들의 전유물이었던 포크와 록이 1974년 드디어 '어니언스'의 <편지>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으로 남진 나훈아를 제치고 최고 인기가요가 되고, 영화계에선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과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 완전히 대세를 장악하던 상황은, 대마초 사건으로 급전직하의 국면을 맞이했다.
상당수의 대중예술인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됐고, 포크와 록은 트로트 등기성의 취향과 결합해 기성 가요계로 편입됐다. 이제 가수들은, 청바지가 아니라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성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정권은 이렇게 대마초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군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
글; 이 영 미(대중예술평론가), < 대마초 사건- 노래 군기, 확실히 잡다> 중에서
출처; <한겨레21> 2005. 2. 18. https://v.daum.net/v/20050218061748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