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정태성 목사
<갈라디아서 6장 8절>" 심는대로 거둔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것이라는 이 말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을 따르며 율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종교생활을 하며 “율법 안”에 있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율법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로부터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갈 3: 13>에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 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4: 4~ 5>
“때가 차 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도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행위”에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계속해서 지금도 율법행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마 7: 23)
따라서 이 시간에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으니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 12: 44~ 45>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자들의 그 삶이 무엇이냐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의 그 삶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엉뚱하게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믿고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그 우상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율법행위로 살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사람들이 못 믿는 것입니다.
<갈 4: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라는 이 말이 바로 “있지도 않은 신들”이라는 말인데 “있지도 않은 신들”은 다름 아닌 “우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있지도 아니한 신들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전 8: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율법을 행위로 쫒아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인데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산다는 말에 절대 율법행위를 넣지 마십시오! 그냥 “믿음”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믿음에다가 자꾸 율법을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믿음”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율법으로 자기의 믿음을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율법행위를 말하는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그러하기에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롬 1: 17>에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롬 1: 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지만 죄인은 율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의 삶과 죄인의 삶이 다른 것입니다. 만일 이 말을 뒤 집을 수 있는 근거를 성경에서 가져오면 성경은 가짜이고 하나님도 예수님도 전부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분명히 알라고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고, 오늘날 교회들에게도 이 서신을 보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서신들을 보내어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의 상태, 그들의 믿음 없음을 신랄하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율법행위,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갈 6: 7)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은, 즉 율법행위로 말미암는 그 “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의 그 율법행위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이고, 그런 자는 그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이고, 그런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율법행위의 끝은 썩어질 것을,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끝은 “영생”을 거둔다는 말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행위의 끝은 썩어질 것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그 끝은 영생을 거둔다!
오늘 본문, <갈 6: 8>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있고, 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있으니 너희는 성령을 위해 심으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우리가 심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율법행위에 속한 자의 상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진 자의 상태를 비교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결국 그 율법행위로 썩어질 것, 즉 사망으로 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이 무엇입니까? “말이 없는 상태”, “진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그 속에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곳간입니다. 다만 그 속에 “육체의 일”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갈 5: 19~ 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더럽고 추한 것만 그 속에 가득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 속에 “영생”이 있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요 17: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이 “앎”이 있으면 당연히 성도는 그것을 꺼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내어 보일 것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갈 6: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바울이 자기 속에서 꺼내어 보일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결코 자기의 율법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왜 자랑할 것이 없었겠습니까?
<고후 11: 16~ 27>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고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 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갚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자랑할 것이 이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것 하나로 한정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가진 자의 삶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그리스도 예수의 그 “의”만,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 자랑
그러나 썩어질 것, 썩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것을 결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율법행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율법행위라는 그 배설물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자랑하는데 그 자랑은 향기로운 제물이 아니라 썩은 악취입니다. 율법행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저주 받는 것이 당연 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 율법행위라는 배설물만 내어 놓는 것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길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 끝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 끝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려면 제대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대충 율법 몇 가지 지켜서 가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그 피의 공로에 감사하며 자기의 율법행위는 모두 썩어질 것, 썩은 것으로 아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것을 은혜로 알고, 이것으로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제입니까? 부디 여러분이 이것을 온전한 교제로 알고 그 교제를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기쁨으로 여기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