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기본 진리 (8)
속죄란 무엇인가?
히 9:11-38
I. 서론
한국 뉴스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 3월 1일이 삼일 독립 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우리 한민족은 일제식민 통치에 항거하고자,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비폭력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도님들 중에서 연세가 여든이 넘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나이에서 20년만 더하면, 100년입니다.
삼일 독립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서 삼일 독립 운동 당시 이화학당 고등 1학년에(현, 이화여자고등학교) 재학 중이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만 16세에 삼일 독립 운동에 참가했고, 일본 헌병대에 잡혀서, 불과 1년 반 만에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한 기록을 보니까, 이화학당에서 유관순 열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체를 달라고 했는데, 그 시체가 얼마나 상해 있었던지 그 시체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깔깔대며 웃을 꽃다운 나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이렇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많은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제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6.25 한국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영적 차원에서 생각해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여기서 “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는 스스로 노예 자신을 해방시킬 수가 없습니다.
노예 시장에서 한 어린 여자 아이가 노예로 팔려 왔습니다. 그 노예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노예 상인이 그 노예의 값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 때, 한 신사가 그 어린 여자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합니다. 이런 행위를 헬라어로 “루트론”(Lutron) 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영어로 “Atonement”, 한글로 “속죄”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고, 죄의 형벌인 사망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심으로 우리의 “루트론”(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9장이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히브리서 9장을 중심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속죄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가지는 두 가지 특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자신의 피를 그 속죄의 값으로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11~12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구약의 속죄 제사와 연결을 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위에다가 그 피를 뿌렸습니다.
레 16:14-15,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속죄소 위와 앞에 짐승의 피를 뿌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먼저, 속죄소 밑에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두 돌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래서 그 돌비 위에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인간의 죄값이 지불되었다는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속죄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지구 상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지성소였고, 그 지성소 중에서도 속죄소였습니다. 이곳에 인간의 죄에 대한 대속의 피를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약시대의 이러한 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나 그림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구약 시대에 있던 대제사장은 모형이고 그림자였는데, 이제 진짜 대제사장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23-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3-24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구약 시대에 있었던 지성소와 짐승의 피는 모형이었고,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실제 지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이고, 실제 사람의 죄를 온전히 속죄할 수 있는 피는 “예수님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 본문을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피를 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앞에 그 피를 뿌린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물론 천국에 눈에 보이는 지성소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국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인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는 정육면체였습니다. 길이, 너비, 높이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 땅에 임할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입니다. 이것은 제가 작년 요한계시록 강해를 할 때, 설명을 드린 내용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 새 예루살렘 성은 디즈니월드 매직 킹덤에 있는 신데렐라 성의 모양이 아닙니다. 네모가 반듯한 정육면체입니다. 계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던 지성소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번에 드리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처럼 매번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5-26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드린 제사는 단번에 드린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Once for all”입니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9장에서 계속 강조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12절 / 28절,) 하지만,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드린 제사는 달랐습니다. 25절에 나오는, “해마다” “자주”가 이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피는 모형이고 그림자였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가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의미는 그 효력 또한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피는 너무나도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처럼 반복해서 속죄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5-26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린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모든 인류의 죄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은 완불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교제 시간 간식을 위해서 제 아내가 어제 식당에 가서 그 값을 모두 완불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그 간식을 픽업할 때, 더 이상 아무런 돈도 지불하지 않고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어제 돈이 모두 완불되었기 때문에, 오늘 식당 주인이 제게 돈을 더 내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값을 완불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이상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여기서 잠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혹은 성전)의 구조를 볼 때에,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 상징했습니다. 제사장인 성소에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지만, 지성소는 일년에 단 하루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도 철저히 준비를 해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왕의 십자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속죄일 일주일 전, 대제사장은 집을 떠나 혼자만의 장소로 들어간다. 부지불식간에라도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먹지 않기 위함이었다. 대제사장은 깨끗한 음식만 먹으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유지했다. 속죄일 전날 밤에는 침소에 들지 않고 밤새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을 읽었다. 그렇게 영혼이 정결해지면, 속죄일 당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목욕재계를 한 뒤, 흠 없이 순결한 백색 세마포 예복을 입었다. 그리고 나서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짐승으로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런 다음에는 지성소를 나와 다시 목욕을 하고 백색 세마포 예복을 새로 입은 뒤 다시 들어가 이번에는 제사장들의 죄에 대한 대속의 제물을 바쳤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제사장은 세 번째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지성소로 들어가 온 백성의 죄를 대속했다.”
왜 대세사장은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먼저,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부정한 것이 발견되면, 시체가 되어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지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2) 둘째, 백성의 죄를 씻기 위해서입니다. 제사를 드리러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살아서 돌아올 때, 비로소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열납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삼일째에 되는 날,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2.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가지고 오는 유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6-17절,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저자가 왜 갑자기 유언 이야기를 왜 할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지만, 그 유언이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2) 둘째는 예수님께서 유언자로서 우리에게 유산을 남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유언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평생 살면서 재산을 저축합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돈일 수 있고, 일부는 주식일 수 있고, 일부는 부동산일 수 있습니다. 유언자가 유언을 남기는 목적은 유언자 사후에 재산을 유언자의 의도에 따라 분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유언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속죄의 피를 흘러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신 유산이 우리에게 상속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롬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누리신 복을 우리도 상속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지상에 있을 때 돌봐주셨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돌봐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듯이, 우리 마음 가운데에도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3)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였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죽어서는 더 큰 유업을 상속받습니다. 1) 예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천국의 집을 상속받습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더욱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 놓으신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하면, 죽은 후에 갈 곳인 천국 비자를 미리 받아 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미국에 맨 처음 들어올 때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것이 이민이든, 주재원이든, 유학이든 상관없습니다. 미국에 들어오려고 할 때,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미국 비자를 받는 것입니다. 비자를 받은 다음에, 비로소 비행기 예약을 하고, 미국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고, 미국에서 살아가야 할 구제적인 정보를 연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비행기 좌석을 예약해 놓고,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하고, 아무리 많은 미국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비자가 없으면, 미국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소용없습니다. “천국을 들어갈 수 있는 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라고 부르시면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천국 비자를 받는 방법은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곧 나의 죄를 위함이라는 것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드릴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기 전에 자신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제물을 죽여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제물로 제사를 드려도 이 과정이 생략되면, 자신의 죄는 자신이 그대로 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손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얹고 나의 죄를 담당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아직까지 나의 죄를 내가 담당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오. 그러면,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