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 유럽 책여행을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힌 3년 동안 해외 여행을 나가지 못했다. 짧은 사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이 바뀌었는데 마음은 답답해서 어딘가 내 막힌 가슴을 뚫어줄 곳을 찾고 싶었다. 코로나 이후 세상의 변화를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만 하던 차에 베를린 여행 기회가 생겼다.
최근 10년 동안 유럽에서 가장 뜨거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베를린, 그 젊은 동력을 느껴보고 싶어 나는 베를린 한 달 살기가 소망이었는데 뜻하지않게 '환경과 생명문화재단 이다'가 기획하는 <베를린 기억여행>프로젝트에 합류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일정과 기간이 여러모로 여의치 않았지만 내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기회로 여겨 아쉽지만 보름 동안의 베를린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일주일은 나와 또 한 명의 친구 둘이 함께하는 자유여행, 다음 일주일은 16명의 지인들과 함께 다니는 프로젝트 여행으로 계획하고 길을 떠났다.
4월11일 인천공항에서 밤에 떠나는 핀에어를 예약해 헬싱키를 경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공항에 내린 시간은 4월12일 오전 8:30이었다. 인천에서 헬싱키까지 무려 14시간, 1시간 30분의 환승을 거쳐 베를린까지 두 시간 비행을 마치고 나니 숙소가 있는 '프리드리히 슈트라세'까지 왔을 때는 꼬박 24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 뒤였다.
공항에서 원데이 교통 티켓을 끊어 베를린중앙역으로, 거기서 독일 전철인 S-반으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인 프리드리히슈트라세 역에 내렸다. 단체 일행이 오기 전 나와 친구가 머물 'Maritim proarte Hotel'은 역에서 가까웠고 호텔 바로 맞은 편이 베를린에서 가장 큰 대형서점 '두스만(Dussmann)'이었다.
우와...생각지도 않은 행운? 서점을 가보리라 생각은 했으나 바로 내 숙소 앞이라니...말하자면 광화문 교보문고 바로 맞은편 건물에서 5일 동안 머물게 되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싶었다.
체크인 시간까지 거리를 떠돌아야 하니 서점에서 쉬어야겠다 생각하고 호텔에 짐을 맡긴 채 홀가분한 몸으로 길을 나섰다. 이렇게 내 베를린 첫 여행은 두스만서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두스만 서점은 5층짜리, 2천 평이 넘는 거대한 복합문화센터다. "책"이라는 상품이 주력으로 전시되어 있을 뿐 첫인상은 전통적인 서점의 느낌보다는 거대한 쇼핑센터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의 서점처럼 중후하거나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보다는 실용적 느낌의 북쇼핑센터라는 느낌. 그러나 층을 달리해 위로 올라가면 각종 문구와 잡화로 번다한 1층과 달리 코너별로 정갈하게 단장되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동시에 가운데가 트인 중정형 구조이기 때문에 계단을 싸고 돌면서는 가벼운 잡화를 중심으로 유동인구의 쇼핑을 유도하고, 안쪽 서가에는 책이 중심된 전통적 서가를 배치해 독자들을 배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라는 광고가 무색하지 않게 한국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독일에서 들른 모든 서점들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여있었다. 이외에도 내가 집중적으로 시간을 보낸 곳은 2층 "책에 관한 책"들만 큐레이션해놓은 서가다.
100 books that changed the world), Books and libraries, Revenge of the librarians, Book nerd, Why we read..... 등 책이 주제가 된 화보, 카툰, 저작물들이 모여있어서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엄청 주워담았겠지만, 늙은 나는 더 이상 보따리를 짊어질 여력이 없고 이제 우리에겐 아마존이라는 공룡이 있기때문에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서가별로 전시대와 주제 코너를 꾸미고 있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고...장시간 비행에 지친 여행자를 달래주기엔 창가에 놓인 저 안락의자만한 게 없다.
그림책과 동화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배치하고 크기를 조절해 시각적 효과를 돕고 책을 찾아보기 좋게 꽂아두었다.
서점 1층 안쪽으로는 영어전문서점 코너를 따로 두고 있어서 독일어 문맹인 내겐 이 코너가 유익했다. 어쨌든 두스만 앞집에서 머무는 동안 이곳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렀고 1층 문구 코너에서 라미 만년필과 몇 가지 잡화를 구매했다. 베를린 관광의 중심이 되는 역 앞에 밤 늦게까지 서점을 열고 있어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겐 좋은 서비스 공간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스만 서점에서 한참을 보내고 나와 하릴없이 걷다보니 어느덧 내가 지나는 곳이 베를린 관광의 출발지이자 모든 것인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거리였다. 우리가 "성문 앞 우물가에 서있는 보리수"라고 노래할 때의 그 '보리수나무 아래'라는 낭만적인 뜻을 가진 거리. 지금 이 거리의 가로수들이 보리수나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예전에 이 거리는 보리수나무가 많이 있었던 곳이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테지.
그렇게 나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문...득....브란덴부르크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너무나 높고 푸른 하늘. 광장 앞은 나와 같은 관광객들과 햇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마음은 잠시 울컥했다. 드디어 내가 베를린에 왔구나, 이 거리에 서있구나....한편으론 전혀 현실감이 없으면서 멍한 마음에 광장 앞 벤치에 한동안 앉아있었다.
혼자 앉아있는 벤치 옆에 젊은 여성 관광객이 오더니 너무나 성실하게 셀카를 찍어댄다. 하도 열심히 찍기에 내가 사진을 찍어줄까 물었더니 아주 자세한 구도와 각도까지 설명해주면서 그대로 찍으란다. 그러고는 나도 찍어주겠다 하기에 베를린 도착 첫 사진을 브란덴부르크문은 전혀 나오지 않는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남겼다. 24시간을 꼬박 길 위에서 보낸 지친 여행자의 추레함이 그대로 묻어난 이 사진이 매우 맘에 들었다.
그리고 나의 베를린 첫 맥주!
무슨 메뉴를 시켜야할지 몰라 대충 골라잡아 먹은 나의 첫 식사는 라인계곡 지역의 유명한 향토 요리로 구운 블랙푸딩, 구운 양파, 사과, 으깬 감자, 야생 허브에 겨자를 곁들인 "Himmel un Aad"라고 구글이 말해주었다. 매우 맛있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단체그룹이 합류한 후에 가이드의 설명으로 알게 되었는데 하필 내가 고르고 골라서(사실은 그나마 싸보여서) 들어갔던 이 식당 바로 옆에 매우 고급하게 보였던 레스토랑이 극작가 브레히트가 단골로 드나들던 식당이어서 이름도 "브레히트"였다고 한다. 알았다면 비싸더라도 첫 끼니를 그곳에서 먹으며 오래된 브레히트와 조우했을텐데 말이지....
"NOCH WACH? 너 아직 깨어있니?"
강렬한 물음을 품고 있는 저 건물이 바로 브레히트 극장. 우리 세대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로 너무나 유명한 사회주의 좌파 시인이자 연극연출가 브레히트. 마치 지금 이순간도 눈을 크게 뜨고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 같은 이 카피를 바라보며 이번엔 전쟁과 학살, 고통과 죄의 기억을 따라 베를린 여행을 왔지만 다음번엔 살아남은 이들의 후예가 21세기에 새롭게 만들어가는 문화와 예술의 베를린 여행을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의 베를린"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