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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白堂 金係行先祖의 行狀과 精神的인 敎訓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先祖의 行狀 신라의 宗姓(종성:왕가의 성)이며 고려개국공신 金宣平(김선평)시조 후손으로보백당 김계행 선조의 자는 取斯(취사)이며, 호는 寶白堂(보백당)이다. 1431년인 세종13년 2월 9일 미시에 안동군 풍산현 남불정촌리에서 출생하셨다. 先考(선고 :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는 현감을 지내신 삼근(三近),祖父의 諱(휘 : 돌아가신 어른의 생전이름)는 革(혁)으로 通仕郞閤門奉禮(통사랑합문봉례),曾祖는 諱(휘)가 得雨(득우) 中顯大夫 典農正(중현대부 전농정), 高祖는 諱(휘) 義(의)로 正義大夫 禮賓寺事(정의대부 예빈사사)의 명문에서 태어나셨다. 14세(세종26년, 1444년)에 아버지인 현감공이 比安縣(비안현)에 부임할 때 따라가서 향교에 입학하여 15살에 사서삼경을 공부하시고 16살에 생원시를,17살(1447년) 생원회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문종이 승하한 해인 1452년에는 增廣東試(증광동시)에 제28자로 입격하시고,31세(세조6년, 1462년)에 비로소 東堂初試進士科(동당초시진사)에 합격,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세조 7년인 1463년에 星州敎授(성주교수)로 계시면서 성종 2년(1471년)에佔畢齋 (점필제) 金宗直(김종직) 선생(1431~1492)과 교류하시고,忠州敎授(성종5년, 1474년)를 역임 하시면서 주역과 근사록을 강론 하였으며 49세(1479년, 성종10년)에 東堂初試(동당초시)를 거쳐 성종 11년 3월 50세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많다하여 바로 그해 12월에 6품직인 사헌부 감찰로 공직을 시작하였다. 이때에 佔畢齋는 서울까지 와서 축하해 주었다니 두 분의 교분 또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성종13년(1482년) 고령현감, 15년에 弘文館 副修撰 知製敎(홍문관 부수찬 지제교)겸 經筵 檢討官(경연 검토관), 春秋館 書史官(춘추관 서사관)에 임명되어 비로소외직에서 경관(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관원)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에 司諫院(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시고 성종 16년에는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성종 23년에는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셨다. 1495년 성종승하와 연산군의 등극으로 안동 묵계로 낙향하였으나 67세에 도승지와 대사간에제수되어 몇 번을 사양의 소를 올렸으나 워낙 강경하게 종용하여 벼슬에 나가셨다. 그러나 대사간으로 계실 당시 천재, 시정의 폐단, 인사문제를 거론하고,척신들의 잘못을 논박했으나 시정이 되지 않고 도리어 파직 당하는 등역경을 겪으시다 벼슬을 버리고 70세에 중앙정계에서 은퇴하시어 안동 길안 묵계촌에 귀향하여후학 양성에 헌신하시다가 중종 16년(1517년) 향년 87세의 천수를 누렸다. 돌아가신 후 숙종 32년(1706년)에 영남사림의 발기로 안동군 길안면 묵계서원에불천위(나라에 끼친 큰 공훈으로 사당에 영구히 모시기를 허락한 신위)로 모시도록 재향되고,철종 10년(1859년)에 와서야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현신이나 유현들이 죽은 뒤에그 생전의 공적을 기리어 임금이 추증하던 이름)는 定獻公(정헌공)으로 내려졌다. 純行不爽曰定 순행불상왈정:순행하여 어긋나지 않았으니 정(定)이요,嚮忠納德曰獻 향충납덕왈헌:충성을 다하여 덕을 쌓았으니 헌(獻)이다. 즉 바르게 살아서 높은 덕으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이끌어 나갔던 덕행을 높이어 내려진 시호이다. 참으로 만학으로 급제하여 공직생활에 누구보다도 파란만장의 생활을 영위하여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후생에 남기고 있다고 하겠다. 모두가 체험과 역경 속에서 얻은 것이다. 특히 연산조에 점필재와 친숙하다는 이유만으로 戊午士禍(무오사화)와甲子士禍(갑자사화)에 연유되어 태형(笞刑)을 받기도 하였으며,감옥살이도 하였으나 청렴결백으로 일관하신 분이었기에 생명보존에는 지장이 없었다. 보백당 선조의 생애는 한마디로 청렴(淸廉)과 걸백(潔白)으로 점철된 점이라고 하겠다. 시대적 상황으로 조선 개국초기이며 혼란기인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을 마치 공자의 말씀에“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고 사람이 살핌이 많으면 따르는 벗이 없다 (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는 수지청칙무어, 인지찰칙무도 평범한 섭리를 터득하여 후손에게 가훈으로 청렴과 결백을 전하도록 유언할 정도로 삶의 실천을 통한 진리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는 정신적 교훈이 되어 다음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時代를 살아가는 精神的 敎訓 보백당 선조께서는 87세(1517년 12월 17일)의 천수를 누리셨으며 돌아가시기 이틀전에從孫(종손 : 계권의 장손)인 三塘公(삼당공) 瑛(영)에게 유언을 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선대의 소중한 교훈을 준수해서 교만하거나 경박한 행동으로 집안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실추시키는 일을 하지 말고, 장례와 제사를 올리는 데는 정성과 경건함으로 하고, 낭비나 허례에 치우치지 말라. 임금을 바르게 돕지 못하고 시정의 폐단에서 구하지 못했으니 검소하게 장사를 지내고 다만 성명이나 써서 무덤만 표시하라.또한 거짓으로 찬미하는 비문을 청하여 허명을 들어내지 말아야한다. 별로 한일도 없는데 명예를 얻으려는 것은 감히 부끄러운 짓이다. 우리 집에 보물은 없으나 보물이 있다면 청렴과 결백이로구나.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이라는 뜻에서 호를 보백으로 하였고 “가훈으로 전할 것은 청렴과 결백이니 후손들은 지켜라. 또한 남을 공경하고 몸을 삼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고, 집안간에 화목하라” (家傳淸白世守恭謹, 孝友, 敦睦)라고 하셨다. 가전청백세수공근, 효우, 돈목 연세 81세(중종 6년, 1511년) 獻壽(헌수:장수를 비는 뜻에서 술잔을 올림)때에는 대소과에 오른 內外孫 10명(관직에 있는 자가 7명이었고 특히 둘째사위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증조부인 柳子溫(류자온)이다. 었으며 堂室(당실)을 축하객으로 가득 매우자“주위의 향인들은 나를 가르켜 복이 많은 늙은이라고 하겠지만 나로서는 집안이 번창함이 두려움을더할 따름이다. 너희들은 명심하여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고 또 삼가하라, 또한 사람을 대할 때는 정성을 다 하여라 (持身謹愼, 待人忠厚), 지신근신, 대인충후 경박하고 늙은이에게 걱정을 끼치는 짓을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보백당 선조께서 사신 연산군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하여 서로가 정적이 되어 이전투구(泥戰鬪狗) 하였던 염량세태(炎凉世態)였다. 당시를 살아가는 비결로는 토정비결에서 교훈을 주었던 오수철학(五守哲學) 즉 입조심, 마음가짐, 집단속등이 있었다. 이런 어려운 세태일수록 수신제가가 더욱 필요하게 되었음을 느끼신 것 같다. 조의제문(弔儀祭文)이라는 사초(史草)로 인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여 사림학파의 많은 선비가 희생을 당하였다. 보백당 선조께서도 점필제 김종직 선생과의 교분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고초를 당하셨다는 것은 앞에서 논한 바가 있다. 공께서는 1506년 연산군이 무도해서 폐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는 분명히 종사대계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10년 이상 섬긴 신하로서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보필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슬퍼 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연산군으로 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고 혹독한 옥살이 후에도 인간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보백당 선조께서 성주교수(星州敎授)로 있을 때 당시 국사(國師)인 학조대사(學祖大師) (보백당 큰형님으로 한성판윤을 지낸 계권 5형제중 장남이며 호는 등곡(燈谷)가 성주(星州)를 방문하였을 때의 일화가 있다. 왕의 총애를 믿고 벼슬에 추천하려고 의사를 물었으나 보백당 선조께서는 “너는 王恩만 믿고 교만을 자행하느냐, 노숙(老叔)을 찾아와서 보지 않고 도리어 오라고 하니 무슨 말이냐 하고 크게 진노하며 너로 인하여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을 보겠느냐” 라고 꾸짖자 학조대사는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많은 세인들은 세칭 백(background)을 동원할 것인데 公께서는 그처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행하지 않았고 사리가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효심이 지극하여 公의 연세 34세때 부친인 현감공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몇 달 동안을 의관을 풀지 않고 간병을 하시고 다음해 8월 현감공께서 돌아가시자 장례전에는 조석으로 죽만 드시고 기년이 되도록 육식과 과일을 금하여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여막에서 묘소살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이셨으며 원래 성품이 침작하고 과묵하시고 또 사간은 목숨을 걸고 바른말을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 이므로 공께서는 연산군의 폭정과 권신과 궁녀로서의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자에 대하여 논소하기도 하는 등 참으로 대담하게 간언 하였던 것이다. 도승지에서 과감하게 사임하는 등 부정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간언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국정방향을 잡아주고 국민의 복리를 도모하고자 하는 충정에서 상소 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개인의 영달을 초개처럼 버리고 민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고자 하는 선비의 정신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표상으로 “선비는 평소 의복이 남루하다, 음식이 거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자신의 덕망을 닦고 민복에 정진할 뿐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사이 염불보다 잿밥에 정신을 쏟는 공직자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또한 늘 학문을 위하여 정진하였고, 민복을 위하여 개인의 영욕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또한 공직에 있을 때나 퇴임 후에도 학문에 소홀함이 없었다. 만년에 만휴정에 은둔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던 것이다. 요즘말로 한다면 업무의 전수라고 하겠다. 즉 자신의 맡은 업무를 부단히 연찬하고 후세에 도움이 되게 저술까지 하였다. “선비는 행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학문을 하라 (行而餘力卽以學文)”행이여력즉이학문 선비의 도를 몸소 실천 하셨던 분이시다. 結 論 오늘 시대에서나 옛날이나 공직자뿐만 아니라 사회의 공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는 높은 도덕성과 청렴성 윤리관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덕망을 부단히 쌓고 정진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업무에 끊임없는 연찬을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고 나아가서는 국민을 위하는 것이다. 투철한 윤리관의 실행에는 무엇보다도 공직자에겐 청심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청렴해야 하는 것은 공직자의 기본도리며 청렴하지 않는 참다운 공직자는 이제까지 없었다. (淸心也牧民之本, 不廉以善牧者 未知有也)”고 단언 하였다. 청심야목민지본, 불염이선목자 미지유야 사회가 어수선 하면 공직기강이 흔들리고 각종 부정부패가 자생하고 국민의 복리 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된다. 청탁이 통하고 청렴한 공직자가 도태 되는 때가 되면 곧 사정의 척결에 호된 희생을 치루고 말 것이다. 실례로 고려말 사회가 혼란할 때 “나의 한스러움은 그 당시 개구리 두 마리가 없어서 (我限 當時 無二蛙)”아한 당시 무이와 라는 말이 조선조에 와서야 없어졌고, 월지상견(月地喪犬 : 벼슬에 있을 때 공산명월처럼 땅땅거리더니 이제야 상가집 개처럼 발길에 차이는 신세)이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끝으로 공인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에 대한 봉사자라는 소명을 갖고 밤낮으로 복리증진을 위하여 공사 생활에 성실, 근면, 검소을 일상생활 신조로 실천하여야 하겠다. 개인의 한사람 영달은 잠시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후손이 욕되게 살아야 하겠는가. 공직자가 청렴한 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잠시 유혹에 못 이겨 평생을 욕되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다가 간 선조의 지혜를 본받아 살아감이 값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참고문헌 :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경산집(經山集) 보백당 선조게서는 佔畢齋 (점필제) 金宗直(김종직)선생(1431~1492)과 매우 교분이 깊으셧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은 아버지가 강호 김숙자이고 그의 스승은 려말의 삼은 (三隱)의 한사람인 야은 길재이다. 야은 길재선생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선생에게 사사받은 성리학을 후대에 전하신 분이다. 조선 성리학은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정암 조광조, 한원당 김굉필로 이어지며. 회재 이언적으로 거처 마침내 율곡 이의와 퇴계 이황으로 조선 성리학을 꽃피우게 된다. 보백당 선조께서는 이런 어른과 교우하시며 청렴결백을 몸에 읶히셧고 후손에게 전수하셨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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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