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이 화가
그림을 그리다말고 풍경화는 여전히 어렵다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무리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는 몇 해 전 전시회에서 알게 된 각설이화가다. 최근 어느 행사에 그를 강사로 초빙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작업도중 도움을 청할 만큼 사이가 가까워졌다.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이 숱하게 있었기에 조금 도움이라도 될까싶어 보내온 그림 이미지를 보고 내 느낌을 말해 주었다.
형제가 여럿인 집에서 태어난 그는 노다지를 캐는 아버지로 인해 어릴 적부터 한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면서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겨우 거머쥔 그는 가정형편상 상급학교는 엄두도 못 내고 공장에서 돈벌이를 하고자했다. 신체는 훤칠하나 나이가 어리니 취직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큰형님의 출생기를 빌려 서류를 제출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비록 편법으로 취직을 하기는 했지만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니 아무도 그가 서류상나이보다 훨씬 어리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임금을 조금 더 준다는 공장을 몇 번이나 옮겨가며 어렵사리 번 돈을 저축해 나갔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는 주변인의 권유로 일회용 나무젓가락공장을 차렸다. 말이 공장이지 기계 한 대에 아내가 조금 도와주는 가내공업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 수입은 엄청났다. 지금껏 살아 온 것에 비하면 하루생산량으로 업소에 납품을 하면 하루수입이 거의 한달 월급이나 맞먹을 정도였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사업을 하는 구나’하고 생각하며 날개를 단 나날이 꿈인 듯 행복했다. 두둑해져가는 통장을 바라보며 얼마 안가서 큰 부자가 될 거라는 상상에 젖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행복하면 신이 질투한다는 설이 실제인 듯 비싸게 들인 기계 값도 다 뽑기 전에 정부에서 일부품목에 한해 일회용품 사용 금지령이 내렸다. 그동안 힘들게 번 돈을 전부 투자한 사업이라 그로서는 다시 밑바닥으로 내쳐지는 삶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한동안 망연자실해져 있던 그는 비싼 기계를 고물 값에 팔아넘기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할 가장이니 살아갈 궁리를 모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 수가 없어 고민 끝에 각설이 행세를 하며 엿을 팔아 보기로 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는 과연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각설이 분장을 하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더라는 것이다. 행사장이나 시장 통에서 인간적인 하대를 하며 무시하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었지만 내가 다시 일어 설 때 까지는 오직 ‘나는 없다. 내 자신은 버려야 된다’ 는 일념뿐이었다고 했다. 각설이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재미난 공연에 따뜻한 정으로 엿을 팔아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힘이 되어 점차 공연도 수준을 높여갔다. 악기도 처음엔 한두 가지에서 서너 가지로 종을 널려가며 익혔다. 공연을 재미있게 펼쳐가니 동네행사나 칠순잔치 같은 경사에 섭외가 들어와서 점차 먹고사는 일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자 비오는 날이나 공연행사가 거의 없는 시기에 무작정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품삯을 받고 미술공모전 작품을 옮겼을 때 멋진 풍경화에 반해 나도 저렇게 한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선생님이 내 그림을 반 친구들에게 보이며 칭찬을 해준 기억도 떠올랐다. 그렇게 하여 시작한 그림이 벌써 이십년이 다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모작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공모전에 출품되었던 큰 작품 떠올리며 자신도 공모전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가 택한 소재는 경주남산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 삼불이었다. 암벽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두텁게 마티에르를 올리고 또 올렸다. 바위색은 실제보다 더 사실감을 주기위해 오묘한색들을 점묘로 채워갔다. 하던 일을 해가며 쉬엄쉬엄 일 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형태가 드러났다. 점차 원하는 대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림그리기의 묘미랄까, 마애삼불을 2년쯤 매만지고 있을 즈음 친한 화우가 화실에 들러 그림을 보더니 공모전에 지금 내어도 입상은 확실하니 내어보라고 했다. 그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는 뭔가 아쉬움이 남아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좀 더 공을 들이기로 했다. 마무리를 앞두고 삼불의 형상이 아닌 느낌을 담기위해 남산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부처님 앞에 좋은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불전을 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3년이 되던 해 그림의 주제와 성격이 잘 맞는 어느 공모전에 출품하였고 당당하게 입상의 기쁨을 누렸다. 그 후 그는 크고 작은 여러 공모전에 열 번도 넘게 도전했는데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달리 말해 그는 그 어떤 그림도 자기가 만족 할 만큼 집요하게 만지고 또 만졌던 것이다.
삼년이나 공을 들인 마애삼불은 그 작품에 매료된 어느 스님이 몇 번이나 전시장를 찾았다가 소장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림을 팔고 한 참후에 생각해보니 공들인 시간만큼이나 애착이 많이 가던 작품이었는데 그냥 가지고 있을 걸 하는 늦은 후회도 된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는 한 번도 내 그림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본적이 없는 것 같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때로는 전시일정에 맞추느라 급급해서 마무리도 덜된 그림을 대충 급마무리해서 전시장에 내걸기도 했다. 그런 그림들은 전시장에서 눈에 걸림돌이 되어 전시가 끝나자마자 재차 손을 보기도 했다. 아마 전시장을 찾은 손님들 중엔 나의 미완숙 그림을 보고 아직 갈 길이 멀다하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질보다는 양에 비중을 두고 1년에 몇 번씩 형식적인 전시를 하며 프로필 쌓기로 자기를 포장하는 사람들과 나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맹이보다 겉치레를 우선하면 뒤끝이 허하다. 그림초창기에는 서툴지만 사실적인 묘사로 정성을 담아 그렸다면 갈수록 건방지게 붓을 휘둘러 작품이 완성단계에 까지 이르지 못하고 숱하게 종이와 물감을 낭비하기도 했다. 머릿속에는 계획적인 작품의 구상보다 세속의 잡다한 일들이 꽉 차 있으니 어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겠는가. 먼저 심신이 안정되고 정화되어야 좋은 그림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당분간 화실수업을 멈추고 작업에 좀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어설픈 조언 몇 마디 해 준 나보다 부끄러운 나를 돌아보게 하고 깨닫게 했으니 그가 오히려 진정한 스승인 셈이다. 혼을 담은 작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쯤 충분한 숙성의 과정을 거쳐 푹 무르익은 작품을 내놓고 관람객들의 입맛을 돌게 할 수 있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