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Kim
3시간 ·
- 10.26에 즈음하여 -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떼었던 김재규*
대한민국의 민주회복을 위해 김재규는 독재자 박정희를 죽인 사람이다. 18년도 모자라 영구적 총통제 군사독재를 유지하려던 유신의 물줄기를 돌린 역사적 인물이 김재규이며 그의 인품과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재규(金載圭)는 1925년 10월 4일(음) 경북 선산군 선산면에서 부친 김형철(金炯哲)과 모친 권유금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녕김씨이다.
천성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던 부친 형철씨를 닮아서 김재규는 어린시절부터 인정이 많았고 의협심과 정의감이 특별했다. 김재규의 어린시절을 회상해보도록 하자.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일본인 순사(경찰)가 나무꾼에게 발길질을 하면서 당시 15전하던 나무를 5전에 팔도록 강제로 빼앗아 순사의 집까지 갔다달라는 요구에 나무꾼이 거절하여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어린 재규는 순사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도둑놈 자식”이라 소리치니 그 순사는 재규를 경찰서로 끌고가 유치장에 가두어버린 일이 있다.
어린 시절 재규는 고집이 너무 세서 어머니의 체벌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어린 재규는 집안의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정돈하고 품행이 단정한 학생이었으며 초등학교 1학년에서 3학년까지 다리미로 잘 손질된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 다녀 자신의 품위에 신경을 썼던 학생이었다. 그는 품행이 방정하고 명석한 소년으로 당시 주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4살 손위인 재규는 소심한 성격의 동생 항규를 자주 때리곤 했는데 하루는 항규에게 “사나이는 간이 커야한다”면서 항규에게 메모지를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어린이들이 근처에 가기도 무서워하던 상여집 문앞에 갖다놓고 그 메모지위에 돌을 얹어놓고 오라는 지시였다. 항규는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해 재규로부터 많이 맞기도 했다.
김재규는 어린 시절 체구는 작았으나 육상, 높이뛰기 등 운동을 잘했다. 재규 소년이 좋아했던 놀이는 전쟁놀이로 항상 자기편의 대장을 맡아했다고 동료들은 회상하기도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재규는 전쟁놀이에서 붙잡아온 포로들 중 큰 애들만 때리고 작은 애들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의협심과 정의감과 지도자 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규 소년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은 철저히 무시하는 성격을 그의 학업 성취에서 엿볼 수 있다. 음악과 체육에는 우수한 성적이지만 다른 과목은 중상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인 6세 때 재규는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공부했는데 너무나 잘하여 “천재‘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재규 학생은 일본식민사회의 폐쇄적이고 경직된 형식적 규범을 몹시 싫어했던 일면을 읽을 수 있는 일이 있다. 그의 졸업앨범을 보면 바지 끝부분을 약 20cm 정도 잘라서 속 내의가 훤히 보이도록 입고 다녔고 모자도 똑바로 쓰지않고 비슷듬하게 쓰고 다녔다고 그를 기억하던 동창생들의 증언이다. 재규는 구두 뒤축을 접어 신고 배낭의 끈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등교하곤 하였다. 김재규의 9회 동기생인 김근은 ’재규는 항일정신으로 일제식 교육에 대한 불만을 흐트러진 복장으로 표현하여 학교에서 낙인이 찍혔다‘고 전한다.
당시 일제 치하의 엄격한 제복규율의 기존 질서에서 해방하려는 그의 혁명적 성격을 읽을 수 있음에 틀림없다. 재규는 지나가는 일본 순사에게 “일본이 망하면 너도 망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당시 유행하던 노래 가사의 일부인 “양복입고 칼 찼다고 유세 말아라. 우리 나라 독립되면 너도 당한다” 등의 구절등을 일본 순사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말하곤 했다.
재규는 15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무선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어릴적부터 고구마, 김, 인절미 등을 좋아하여 유학생활에서는 이같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어 식사때면 항시 짜증을 내곤 했다. 어느날 재규는 같이 유학갔던 임명수를 찾아가 “야, 난 더러워서 학교 못 다니겠다”며 홀연히 귀국해 버렸다. 이 일을 두고 일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이 심했는데 하루는 일본학생과 싸워서 공부를 포기했다고 전한다. 재규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반일감정이 대단했지만 소년기로 성장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반일사상이 싹튼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귀국하여 안동농림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면접시험관이 재규에게 일본 갔다 온 감상을 얘기해 보라고 하자 재규는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조센징이라고 불러서 듣기가 싫었다”고 대답했다. 이같은 불온한 대답을 들은 면접시험관으로서 재규는 당연히 불합격 되었으나 부친이 안동농림중학교의 교사를 하는 사위를 둔 선산 우체국장인 소림에게 부탁하여 그의 사위 히구찌 선생이 보증서를 쓰고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면접시험 사건으로 재규는 민족정신이 강한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고, 농림중학교 3년을 감시하에서 어렵게 보내다가 4학년 초에 특별(을종)간부 후보생으로 강제 차출되어 일본에 가서 항공기 조종사 양성소인 하사관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돌아오지않은 용사란 의미의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김재규의 일생을 조사해보면 그는 청렴결백한 삶을 산 사람이며 단종복위를 주도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며 삼군도진무이자 공조판서를 한 김문기의 후손이고 10.26 거사후 육군교도소에서 강신옥 변호사에게 밝힌 것처럼 “나는 명예욕은 있을지 모르나 지위욕은 없다. 사나이 대장부로서 죽을 명분을 잘 찾았다”고 말한 사람으로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에 솔선한 명예를 목숨과 같이 중시하던 인물이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19시 40분부터 20시 5분 사이 유신의 핵 박정희를 사살했다. 당시 소수의견을 냈던 대법원 판사 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등의 판결문 중 특히 양병호 대법관의 장문의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재규는 “민주회복을 위해 대통령직에 있는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것”이며 10.26으로 인하여 유신독재가 철폐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김재규의 10.26 총성이 아니였다면 어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민주회복의 혜택을 가장 많이 입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지만 43년이 지난 지금, 즉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는데도 김재규의사를 복권시키지 못한 졸장부들에게 심한 배신감과 정책수행의 무능함을 느끼는 바이다. 그러나 김재규의 숭고한 사상과 민주회복혁명 정신은 4심인 역사속에 분명하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김태영, 『사근경』 역사는 모든 학문의 뿌리, 서울: 세계출판사, 2021, pp.61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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