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허준(許浚) 第92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免賤 第六
산실청의 곡소리가 아무래도 불길했다.
왕자면 더 바랄 나위 없되 설사 옹주라 할지라도 군왕의 핏줄을 이은 자식이면 다다익선이라는 것이 왕실의 소망이다.
그건 항간에서 해석하듯 군왕이 호색해서가 아니라 정통 왕자는 서열을 따라 보좌를 잇고 여타 왕자, 공주와 서계의 군과 옹주까지 명문거벌들과 사돈이라는 혈연으로 엮어 왕실의 울타리를 삼는 왕가의 전통은 자식의 생산은 곧 보좌를 이어받은 이의 첫째 가는 의무요 왕실의 첫째 가는 관심사인 것이다.
그 축복받은 산실청에서 누가 감히 곡성을 터뜨릴 수 있단 말인가. 잠시 곡성이 멎었으나 그 정적은 오히려 더 불안했다.
산실청 앞 얕은 담 너머로 김병조의 모습이 비쳤고 공빈의 생부 김희철도 보였다.
그 주위에 어의 양예수와 조산 수발을 맡은 여의 몇 사람과 제조상궁과 경사방대감의 우람하고 껑충한 모습도 나타나 구수회의를 하는 모습이다가 흩어졌다.
뒤이어 담을 돌아서 산실청으로 건너온 내시 두 명이 세 사람을 발견했으나 그대로 화원 쪽으로 사라졌다.
잡인의 근접을 금기하는 산실청 가까이 선 세 사람이 눈에 익은 내의원 사람들이기에 지나쳤으나 그 내시 또한 경황이 없는 걸음걸이였다.
"돌아가세."
이공기가 말했다.
그 길밖에 없다. 문밖에 정판관이 있다면 사행의 회정 인사 겸해 공빈의 차도를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나 해산에 얽힌 병인데야 소임도 없는 그들이 더 이상 기웃거릴 핑계도 없다.
그러나 허준은 선뜻 그 자리를 못 떠나고 있었다.
산병에 관해서라면 자기의 소관사도 아니요 그 일에만 전념하는 이들이 줄을 선 터에 섣불리 끼일 수 없다.
그러나 공빈이 잠시 자기를 찾은 연유가 심하통 때문이란다면 그녀의 병세를 짚어보고 싶은 것이 반드시 의원의 입장에서만도 아니다. 사행을 떠나며 노자를 도움받았대서도 아니다.
다섯 달 전 사행을 떠나면서 본 그녀의 모습, 완연히 불러온 배를 안고 세상 더없이 행복해하던 그녀가 지금 곡성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연해서였다.
초산도 아니다. 이미 건강한 두 왕자를 생산한 여체가 새삼 세번째 출산이 죽을 고비일 수 없다.
하기야 속말에 여자에게 있어 해산은 사잣밥을 떠놓고 치르는 행사라고도 한다.
허준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마 두 친구 앞에서 말을 못 꺼내나마 지금 공빈에게 닥친 저 난산의 원인은 다른 데 있을 터이다.
"정녕 심하통이라 하던가?"
허준이 다짐하듯 이명원에게 물었다.
이명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신 '가세' 하고 돌아가는 발길에 앞장을 섰다. 그도 공빈의 난산의 이유를 아는 기색이었다. 위병을 일러 고서는 심하통이라고 부른다. 생략하여 심통이라고도 부르되 심자가 붙어 있다 하여 심장병이 아니다. 심장병은 진심통이라 표현하며 때로 용렬한 의원이 그 양자를 혼동하기도 하나 약이든 의원이든 무엇하나 아쉬울 바 없는 공빈이 왜 그 병을 감추어왔단 말인가.
허준은 고개를 저었다. 공빈이 정녕 일상에 자신도 모르는 위병을 앓았는가는 시위상궁들로부터 그녀가 평소 먹고 마시는 음식의 내용을 물어보면 짚어질 일이다.
역사 속에 그 심하통으로 죽음에 이른 두 유명인이 있다.
남자는 제갈 공명이요 여자는 오왕 부차의 여인 서시다.
월의 저라산 아래 한낱 헐감나무를 해 이어다 팔던 절세의 미녀 서시의 병세는 심하작통 봉심무위라는 것으로 심장 아래가 수시로 뜨끔거려 항시 심장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그 아픔을 달랬는데 그 한손을 허리께에 얹고 서거나 걷는 모습이 너무도 아리따워서 때의 궁정과 세상 여자들은 모두 허리에 한손을 얹고 서거나 걷는 모습을 흉내냈다고 사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 공빈은 그 심하통의 고통으로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허준은 그것을 확신했다.
어쩌면 심하통이라는 병명이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급한 지경에 온 것을 안 왕실 내부에서 짐짓 만들어낸 병명이라고... 또 한번 곡성이 터지며 산실청 쪽에서 궁녀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진숙궁을 호위한 내시들의 움직임도 혼란했다. 경사방대감과 제조상궁이 상감이 납실 적이면 좌정하던 별채 쪽에서 산실청 쪽으로 두세 번 오가더니 마침내 경사방대감의 영을 받은 키 큰 내시가 다시 구를 듯이 달려와 산실청의 호위상궁에게 무엄하도록 큰소리를 냈다.
"두 분 왕자께선 어디 곕시요!"
호위상궁도 마주 소리쳤다.
"마마의 용태가 어떠하시오?"
내시가 신경질적으로 또 고함쳤다.
"두 분 왕자 곕신 곳을 속히 대오!"
"화원 쪽에 곕시오."
내시가 그쪽으로 달렸고 뒤이어 제조상궁이 울고 있는 시위상궁을 데리고 나와 침착하게 일렀다.
"거 지체하지 말고 너는 즉시 달려 공빈마마의 본곁 분들께 급히 예절하도록 여쭈어라."
공빈을 모시던 시위상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하오면! 공빈마마께오선 정녕 가망이 없사오니까?"
제조상궁이 짧게 대답했다.
"이미 편안하오시다."
시위상궁이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산실청 내외가 곧 울음바다로 바뀌었다.
"마마 눈을 뜨소서. 두 왕자분을 보고 갑소서."
외마디소리와 울음소리가 잇닿고 시위상궁들도 산실청 툇돌 아래로 몰려들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돌아가던 허준 들의 눈에 화원 쪽에서 세 살, 네 살 두 왕자를 안은 내시와 늙은 궁녀가 엎어질 듯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두 품 속에 안겨 달리며 어린 두 왕자는 손을 휘저으며 웃고 있었다.
공빈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인은 사관에 의해 산병으로 기록되었음을 허준은 정작에게서 들었다.
산병이라는 막연한 병명 뒤에 왕가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모체의 생명조차 앗고 스스로도 죽은 두 왕자의 누이가 될 태아의 모습은 역산의 형국이었다.
역산이란 산도로부터 먼저 발을 드러내는 것이요, 횡산이란 먼저 손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 그런 형국은 순산으로 이끌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건 부인병에 전문이 아닌 허준도 아는 일로 만약 발을 먼저 드러내는 역산이면 세침으로 발바닥을 일이푼 들어가도록 3, 4차 찌르고 소금으로써 그 위를 바른 뒤에 가볍게 천천히 밀어넣으면 아이가 아픔을 느끼고 놀라서 몸을 한번 굴리고 오므리며 이때 다시 소금으로써 아이의 각심을 바르고 또 소금으로써 산모의 배 위를 마찰하면 태아는 신기하도록 정상분만 체위로 바뀐다.
허준은 처음 공빈의 증세가 난산이라 불린 것으로 다시 상기했다.
해산의 모습은 열둘로 나눈다.
정산, 좌산, 와산, 횡산, 역산, 편산(태아의 머리가 편벽스럽게 한쪽으로 기우는 형태), 의산(머리가 나왔는데 몸이 못나오는 형태), 반장산(자장이 먼저 나오고 아이가 따라나오는 형국), 열산(더위 타는 체질에게 방안을 시원하게 해주는 법), 동산(추위 타는 체질에게 따뜻이 몸을 살펴주는 법), 상산(1년 혹은 심하면 3,4년씩 해산하는 일), 최산(해산달을 넘겨 약으로써 해산을 재촉하는 법) 등이다.
그러나 이중 어느 산법도 내의원이 감당하지 못할 해산은 없다. 오히려 내의원에서 난산이라 지칭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묻어 있다. 그건 항용 젊은 부부가 빠지기 쉬운 탐색 즉 해산 한두 달을 앞두고도 그치지 않는 성행위의 결과를 이르는 말이다.
성행위라 하여 그것이 반드시 호색도 탐음도 아니다. 더구나 그 남녀가 부부라면 아름다운 사랑의 다짐 등도 있으리라.
또 그것은 열이면 열 모두가 죽음과 태아의 사산에 직결되는 행위라 단정할 순 없다.
그러나 -
허준은 생전의 공빈의 그 기품 있고 아름다운 또 때로는 더없이 화사한 얼굴을 떠올렸다.
선조 10년 5월 공빈이 죽었다.
15살에 시집와 8년 동안 태기 한번 보이지 않는 왕비를 보며 후사 보기를 단념한 왕실에 임해군, 광해군 두 왕자를 연년생으로 낳고 세번째 포태한 그녀의 말년의 몇 달은 표현 그대로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도 두렵지도 않는 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양주 진건 군장이라는 곳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눕고서는 그녀가 생전에 누리던 세상의 선망이나 영화도 한낱 덧없는 물거품 같은 것임을 세상 사람에게 일깨웠을 뿐이었다.
생전엔 두 왕자의 생모로서 대궐 3백 궁녀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모았고 대권 안 오로지 유일한 남성인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생전의 화사한 모습에 비해 너무도 쓸쓸했다.
양주 군장골에 조성된 그녀의 유택은 그녀가 왕비가 아님에서 능이라는 이름이 붙지 못했으며 그저 양지바른 언덕 위에 성묘라는 생소한 이름이 지어졌을 뿐 규모라고도 이를 수 없는 좁은 그런 무덤의 모습으로만 남은 것이다.
아직 생모와의 사별의 아픔을 다 알지 못하는, 때에 세 살이던 광해군은 뒤에 보좌에 오르자 어머니의 무덤이 너무 초라한 것을 슬퍼하여 그 즉위 5년에 성릉이라 무덤이름을 높여 어머니를 기렸으나 인조반정을 만나 그 성릉은 다시 성묘로 강등당하고 유배지 제주에서 그 소식에 접해 대성통곡하던 광해군은 그 자신도 한라산 아래서 숨을 거둔 지 21년이 지나 군장골 어머니의 낡은 무덤 곁에 이장되어 백골이나마 함께 누울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공빈에게 얽힌 후일담의 하나이고 아직 울 줄도 모르는 세 살 네 살 두 어린 상주를 뒤로 공빈의 상여가 대궐을 떠날 때 잠시 눈물을 뿌리며 애도하던 민심도 곧 그녀의 죽음을 잊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의 원인을 두고 내의원 일각에서는 자주 화제로 되살아나곤 했다.
특히 그녀를 죽음으로 몬 원인을 왕실은 산병이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흘려버렸으나 그것이 산병이랄 때 그녀의 조산과 구명에 참여한 인물들의 책임이 따라야 하고 그건 그녀의 왕실에서의 위치, 임금 선조의 깊은 사랑으로 해서 당연한 후속 조치여야 했고 내의원 또한 자체 기강을 위해 묵과할 수 없는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산병이라는 흔하고 막연한 병명 외 더 추궁의 말이 없었고 잠시 이명원의 입에서 나온 심하통이라는 병명도 허준이 관심하여 살펴본 처방전에선 엉뚱하게도 심하통과는 상관없는 천골을 주로 쓴 약이름 두 가지였다.
얕은 개울이나 늪에서 자라는 다년초인 그 천골은 가을에서 이듬해 2월 중순까지 파낸 뿌리 줄기를 잘라 그늘에서 말려 끓여 마시면 임산부의 산전 산후에 보양제로 쓰이는 것이니만큼 임부였던 공빈의 처방에서 의심스러울 것이 없다.
하나 동행한 이공기와 허준이 놀란 것은 또 하나의 약방문 내용으로 그 약들은 음양곽을 주로 한 것인데 효능은 강정과 최음촉진에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일명 삼지구엽초 또는 선령비라고도 불리며 산간의 응달에 자생하는 다년초인 이 풀은 봄에 꽃이 피되 아래로 향해 피는 것이 특징인데 이 음양곽이 주조가 된 약은 한결같이 방사를 촉진 하는 데 쓰여 의원들 사이에서도 약이름을 숨기고 쓰는 것이다.
특히 이 풀에 음양곽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가 옛날 중국 사천지방에 음양이란 동물이 있었는데 하루 능히 37여 회의 교합을 하는데 그 정력의 출처가 이 풀을 뜯어먹기 때문인 걸 알고 시험한 결과 사람의 경우에도 현저히 약효가 있다 하여 이름이 음약곽으로 바뀌었으나 그 쓰는 방법이 고도로 정교하지 않으면 여자를 버린다 하여 양가의 부녀들에게는 애써 이 약재의 사용을 기피하는 것이다.
"여자가 아름다워지려는 욕망과 남자의 관심을 이끌 양으로 더러 밝히는 기집들이 사향 주머니를 숨겨 차고 다닌단 말은 들은 법하지만 음양곽을 주로 하는 약을 상용한다는 건 의욀세."
"누군가 전해줬겠지. 그보다 ...?"
"그보다?"
"내 알기 사람의 정욕이란 대차가 있는 게 아닐세. 젊은 체력에 오가는 마음이 풋풋하면 더 좀 만족하고 즐거운 것이지. 약으로 일구는 강정이란 말도 실제 몸속 어느 부분을 부서뜨려 가능한 것이고 더구나 최음이란 신체 일부분의 이상을 촉진하거나 마비를 혼합한 현상인데 그것이 쌓이면 독성을 뿜는 것이지."
"몸에?"
"몸에도 마음에도."
허준의 대답에 이명원이 말했다.
"심각할 것 없네. 유념할 거리도 아니고."
"무슨 말인가?"
"내국에 있어 보면 용색 아리따운 젊은 궁녀일수록 은밀히 그런 약을 청하지. 찾아오는 구실은 배앓이니 어지럼증이니 하지만 증상을 묻노라면 슬며시 헝겊쪽에 음양곽 이름 따위 쓴 것을 내밀어."
"궁녀란 모두 처년데 왜 그런 약이 필요한가. 또 용색 아리땁다는 궁녀란 말은 그대가 직접 봤단 말인가?"
"문밖까진 함께 오되 내국 안엔 의녀들을 대신 들여보내지."
"의녀?"
"늙은 의녀 중에 궁녀와의 한통속이 많아."
"그렇게까지 해서 약을 구하는 이윤 뭔가?"
"기회를 기다리는 걸세, 일생에 한번 있는 기회를."
"알겠군 ..."
이공기가 웃었고 허준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알 것 같았다.
대궐의 엄격하고 온갖 세심한 법도도 인간의 숨은 욕망조차 일일이 묶고 엮을 순 없을 것이다.
더구나 대궐 안에 사는 그들에게 자기 인생이 피어날 방법이 외가닥 단 한길뿐이라면 목숨 걸고 그 외가닥길을 건너려는 마음을 대궐 밖에 사는 인간들의 자로 잴 순 없을 것이다.
말없는 허준에게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긴 이명원이 한마디 보탰다.
"상궁들도 나인들도 여자지, 임금도 남자이듯 ..."
"그 대궐 안 여자들이 기다리는 생애를 건 단 한번의 기회란 뜻을 아직 모르겠는가?"
"아니 아네. 허나 그것이 공빈의 죽음과 어떻게 연관지어진단 말인가?"
"그분의 죽음은 산병으로 하세. 그밖의 궁 사람들의 여러 모습이야 우리가 입에 올릴 일은 아니잖는가."
허준은 침묵했다.
먼저 화제를 담은 이명원도 동의의 뜻으로 입을 다물었다.
허준은 이미 임자가 없는 진숙궁으로 두 왕자와 함께 하루 한 번씩 소요삼아 들른다는 젊은 임금의 슬픈 모습을 떠올렸다.
자의나 무소불능과 구별되는 절대 권위가 물론 임금에게 붙어 있는 것이나 특히 여자 문제에 있어 임금은 부자유하고 외롭다.
얼핏 보기 대궐 안 3백여 여자들은 임금의 재량 속에 생사여탈이 맡겨진 자기의 여자이되 임금에게 있어선 그 여자들이 결코 환락의 대상만일 수 없다.
왕실의 혈통을 이어가야 하는 절대의 의무와 적통이 아니라도 보다 많이 낳아 그 왕자녀를 때의 명문과 거족과 대벌들에게 고루 혼척을 맺게 하여 왕실에의 충성기반을 확대해갈 정략이 따른다.
이 혼척의 확대는 역대 왕실이 최중요시하는 정책으로 조선의 국기를 다진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이 왕비 소헌왕후와 너무나 다정하여 후궁을 들이지 않자 앞장서 다산하는 가문을 뒤져 미색의 잉첩(가까이서 시중드는 시녀)을 뽑아 아들에게 맡기는 극성을 떨었고 그 세종은 왕위 32년 수 54년의 생애 중 왕후 심씨와 다섯 빈 사이에서 18남 4녀를 낳아 왕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그 왕가의 전통이 이 대에 와서 퇴색한 게 아니다.
물론 그렇게 맺어진들 남녀의 교접이 어찌 의무만 있고 욕망은 없었으랴만 그러나 욕망과 환락만을 추구할 수 없도록 임금의 용종을 뿌리는 침전의 규범은 엄격한 감시 속에 놓여 있으니 동온돌이라 불리는 왕의 침전의 구조부터가 우물 정자로 된 한복판 방이며 주변 장자로 가로막힌 사방 여덟 개의 방마다에는 상궁들의 우두머리인 제조상궁을 위시, 연로한 상궁들이 각방마다 한 사람씩 들어가 앉아 신시(오후 4시)부터 진시(아침 8시)까지 꼬박 눈을 뜨고 호위하는 속에 임금의 방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뿐이랴. 날짜 또한 자신이 선택하는 재량 없이 대개 이레에 이틀을 일관이 일진을 짚어 길일을 가리어 지정하는데 이 일진과 길일이란 것은 여체가 가장 임신의 가능성이 있는 날로 연구된 것이다.
엷은 장지문 너머 사방 여덟 개의 방에서 호위하는 타인들의 포위 속에서 치러지는 남녀의 가쁜 숨소리가 대궐의 일상성의 관행으로 받아들여지기야 하겠지만 그러나 남녀의 행위가 오로지 핏줄을 퍼뜨리려는 미물들의 생식본능과는 확연히 다른 것. 애정의 교감이란다면 왕의 침실의 이 비인간적인 구조는 임금이 여자를 보는 눈을 더더욱 메마르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또 이 왕의 침실의 살풍경한 광경.
왕을 가해하는 흉기로 쓰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간살이는 일체 놓여 있지 못하며 오로지 밤의 어둠을 밝히고 끄는 촛대와 요강과 타구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다.
적어도 그것은 여자 남자가 서로의 사랑을 북돋고 확인하는 정서적 조건과는 일체의 상관도 없는 비정하고도 살풍경한 것이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
<小說 허준(許浚) 第93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免賤 第七
물론 임금의 잠자리가 반드시 동온돌에 한정된 것일 수 없고 궁중 법도라 하여 임금의 자유로운 사랑의 편력조차 모조리 막는 것은 아니다.
궁중에서 벌어지는 여러 행사와 모임에서 혹은 뜰을 소요할 제 해당 처소의 상궁과 나인들은 임금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마련이고 그 말씨 그 맵시 그리고 눈빛들이 임금의 거동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남성이요 자신의 운명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임금인데야 그 가까이 다가서는 기회에서 그의 관심을 자신에게 모으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욕망이다.
그 기회가 어떤 기횐가....
아무리 바쁘고 안타까워도 조용히 움직여야 하며 함부로 목청도 높이지 못하며 시선 또한 상감마마의 어깨 위로 쳐드는 것은 방자에 속한다.
게다가 임금이 새 여자를 찾을 때 자칫 임금이 방탕에 빠져 함부로 정기를 허비할까 경계하여 애초부터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는 젊거나 아리따운 궁녀들의 배치가 허락되지 않으니 그 수많은 감시의 틈새에서 임금에게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또 설사 그 천신만고의 기회를 잡았다 한들 '아까 그 아이가 어느 처소에서 무슨 소임을 맡아보는 아이냐' 이런 지명이 떨어졌다 한달 때 그러나 그녀들은 몸떨리는 환희보다도 결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되리라는 긴장으로 숨을 삼키기 마련이다.
우선 지목된 여인은 근무하는 처소에서 격리되어 제조상궁과 경사방대감 지휘 속에 넘어가는데 비녀를 포함, 흉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쇠붙이며 옷섶에 매달았던 노리개, 몸에 붙은 옥이나 유리장식까지 떼어낸 뒤 여의를 시켜 지병을 앓고 있는 것이 없는지를 살핀 후 자장에 월경 유무를 확인하고서 몸을 씻기고 실오라기 하나 감기지 않은 알몸인 채 천에 싸여 임금에게 인도되어 시침케 한다.
그리고 승은이라 일컫는 하룻밤의 교접이 이루어진 것만으로 그녀들이 곧 후궁의 지위에 오르는 것도 아니다.
승은을 입어 다행히 왕자녀를 가질 때야 그 태어나는 아기가 왕자냐 왕녀냐에 따라 또 때로는 왕의 총애의 깊고 얕음에 따라 숙원인 빈(정1품)으로 봉해지기도 하고 귀인(종1품), 다시 더 아래 소의(정2품), 숙의(종2품) 등으로 봉해져 처소에서 해방되어 독립된 처소를 하사받아 따로 임금과의 사랑의 보금자리를 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에 임금의 눈에 띄지 못한달 때 그녀들은 대다수 궁녀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소속된 처소의 잡일을 하며 고스란히 처녀로서 늙어죽을 수밖에 없다.
또 일차 승은을 입고도 임신하지 못한 여체도 운명은 마찬가지 ... 궁녀들에게 봉사한 연공의 연수를 따져 지체의 상승은 있을지라도 함부로 임금과의 재회를 기약할 수도 없다.
이런 비정한 대궐의 법도이기에 3백여를 헤아리는 대궐 안 궁녀들이 하늘 아래 단 한 사람 온전한 남성인 그 임금의 눈에 들고자 향을 구해 몸에 바르고 자며 살결을 가꾸는 등 보다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고자 결사적인 것이다.
'딸 덕에 부원군'이라는 속담이 있듯 뽑히기만 하면 부모에의 영광은 물론 집안 일가의 운세를 일변시킬 수 있고도 남으나 그 기회를 기다리는 나날들의 참담함은 상상을 절하는 고역인 것이다.
그 모든 난관을 뚫고 승은을 입고 다행히 왕자녀를 생산했다 한들 그 날로부터 그녀들은 그 어렵사리 얻은 사랑을 이젠 잃지 않기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공빈으로서는 주위의 질시나 암투가 아무리 치열하다 한들 대궐을 떠받드는 두 가닥 대들보와 같은 두 왕자를 연년생으로 생산한 그녀이기에 자신의 장래는 탄탄하게 보장받았다 여겨 의심할 바 없다.
자신과 동갑네기 왕비는 15살에 왕비 책봉된 분이나 8년이 지나는 오늘까지 태기 한번 소문내지 못한 불임의 몸으로 더러 서온돌에 군불이 지펴지고 향을 피운다는 소문이 들려오지만 그것은 임금이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 지금 임금의 사랑이 함빡 자신에게 쏟아져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더구나 연년생 두 왕자에 이어 세번째 임신에 성공한 그녀는 혹여 거푸 출산으로 아름다운 몸매를 망가뜨리거나 가슴이 처져 임금의 사랑이 떠날까 저어할 뿐이다. 더구나 두 아이를 낳고 더욱 무르익는 그녀의 뜨거운 여체는 이미 남자 없는 독수공방은 지옥이라 여기기에 ...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행복에 자만하지 않았다. 저마다 지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자 발돋움하는 경쟁자들 ... 또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남자의 속성과 왕자녀 생산을 위한 잉첩이 허락된 왕실이기에 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영원히 내 것으로 하기에 더더욱 게으르지 않았다.
더구나 왕비 박씨가 임금의 사랑이 공빈 한 사람에게 쏠리는 것을 분산하고자 주위로 하여금 천거케 하여 의안군 성을 낳은 인빈 김씨라는 빼어난 미인이 같은 대궐 안에 살고 있고 보면 공빈은 자기의 남자를 잠시라도 인빈에게 빼앗기지 않기에 신경썼다.
혈기와 기력이 왕성한 25세의 임금 선조에게 자신이 당월이라 하여 남자의 욕망을 소홀히 하도록 그녀는 바보스럽지 않았다고 할지 ...
그러나 궁궐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끊임없이 긴장 속에 살아야 했던 그녀의 과다한 욕망이 산병이라는 이론으로 마침내 그녀의 목숨까지도 앗아가고 만 것이다.
설왕설래하던 공빈의 죽음에 얽힌 여러 내의원의 추측들이 한낱 옛얘기로 접어지고 세월이 흘러갔다.
임해군, 광해군 두 왕자를 데리고 궁정을 소요하며 쓸쓸해하던 선조는 새로 사랑을 쏟기 시작한 인빈이 부를 낳고 의안군 성과 그토록 기다리던 딸 정신옹주와 정혜 옹주 등 다산하니 왕실에 있어 공빈은 완전히 과거의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맞은 어머니의 죽음과 그리고 비록 왕실의 허락된 광경이요 법도라 하나 시앗 본 아버지가 그 몸에서 난 자식들을 싸고 도는 모습은 점차 철이 들어가는 임해군, 광해군의 눈에는 감당키 어려운 번뇌로 커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인빈에게서 난 어린 왕자 의안군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듯이 귀여워하니 9살 자기 생각을 갖춘 소년이 된 임해군이나 광해군의 눈에는 날로 고독의 빛이 짙어갔다.
그 외롭고 쓸쓸한 나날들 특히 어린 광해군은 형 임해군과도 떨어져 늙은 보모상궁의 손을 이끌고 자주 내의원을 찾아왔다.
여성들로 둘러싸인 대궐에서 자란 광해군은 그 어린 나이에도 흔치 않은 남성 출입자 속에서 아바마마를 호종해 다니던 대전별감이나 내시들도 인빈 김씨의 궁으로 떠나버리고 모습이 뜸하자 대궐 안 그나마 남자들의 집단인 내의원을 자신의 가장 마음 편한 놀이터로 정한 듯하다.
그리고 특히 어마마마의 신뢰를 받았던 허준을 기억해내고 따랐다.
또 사포서 별제를 지내는 외조부 김희철이나 외숙 김병조가 들어와 말동무가 되어주다가 지난날 허준과의 인연을 옛얘기나 하듯 들려준 뒤론 허준의 남매 겸이, 숙영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소인의 자식들은 지체가 미천하와 함부로 대궐에 드나들지 못하옵니다." 하고 달랠라치면 "보모상궁 치마폭 속에 숨어서 들어오게 하라." 며 어린 꾀를 내기도 했다.
형 임해군에 비해 광해군은 총명했다. 그리고 양주 진건 어마마마의 산소에 데려가 달랄 때도 없이 조르다가 허준이 왕가의 법도를 차근차근 일러주노라면 입술을 문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아쉬움을 참는 숙성함도 있었다.
그 허준이 임금이 특히 귀여워해 마지않는 그러나 광해군이 턱없이 미워해 마지않는 의안군 성의 병을 맡은 건 선조 21년 2월 봄의 일이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프다던가?"
허준이 열한 살 의안군의 와병에 대처할 의원의 특명을 태의 양예수로부터 받아 여러 날 못 뵐 것을 아뢸 겸 처소에 들르자 임해군이 되물었다.
열다섯 살이라 하나 이미 2년 전에 부제학 허명의 딸 그 3살 연상의 아내를 둔 몸이요, 유난히 껑충한 키와 궁중 법도에 익은 언동이 나이보다 숙성해 뵜으나 의안군을 비롯해 이복들의 얘기가 화제속에 묻어나을 제는 임해군의 눈속에 질시가 이글거리는 것을 허준은 가슴 아파했다.
아직 정통 왕자의 탄생이 없고 봄에 서장자인 임해군은 부왕 선조의 대통을 이어받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서계가 아니라면 의당 세자 책봉이 있고도 남을 나이라는 것쯤 주위에서 귀엣말을 속삭이지 않더라도 그도 안다.
그리고 아직 여자에 관심이 일기 전인 어린 나이에 혼례가 서둘러졌을때 임해군은 그것이 대통을 이을 왕세자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요식행위로 지레 짐작했고 주위의 인물들 또한 불임의 왕비를 두고 그리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음에서 "아마도 어의가 그러한 줄 아옵니다." 하고 넌지시 맞장구쳤을 때 어린 임해군의 마음은 자신이 정통 왕자가 되었다 믿어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내가 임금이 된다!'
'나는 곧 이 나라 억조창생을 호령하며 살 사람이다!'
그러나 책임보다 환희부터 맛본 열세 살 소년의 그 순진한 꿈을 산산이 부순 건 부왕 선조의 행각이었다. 왕자의 도리나 의무를 일일이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인 그에게 궁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생전의 어마마마를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아바마마였건만 어마마마의 죽음 이후 인빈 김씨에게 정을 쏟아 저경궁이란 궁호를 내려주고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정신옹주, 정혜옹주 등을 낳고 다시 순빈 김씨에게서 순화군, 정빈 민씨에게선 인성군 등을 줄줄이 낳으니 왕실에서는 경사가 잇따른 셈이지만 임해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고 섭했다.
그 모든 왕자녀들의 서열이 모두 자기와 아우 광해군의 뒤로 태어난 아우들이긴 하되 생모 공빈이 없는 지금 부왕이 저경궁에 온갖 정을 쏟는 소문이 들릴 적마다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에게 흠뻑 빠져서 잇따라 아이를 낳는 아버지가 도덕적으로 너무나 천박해 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아우 광해군은 그런 부왕을 이해하는 눈치였으나 임해군은 지난날의 어마마마 대신 오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인빈 김씨가 밉고 일찍 죽은 어머니가 새삼 너무나 불쌍했다.
그후 장가 들고 철이 든 지금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많이 사라졌으나 다시 임해군을 긴장시킨 것은 부왕 선조가 인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익애였다. 특히 넷째아들 신성군에게는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랑이었다.
서장자인 자기로부터 세 차례나 뒤에 태어난 그 엄연한 서열과 관계없이 부왕 선조는 저경궁에 조석으로 드나들며 일곱 살짜리 신성군에게 영특하다, 잘생겼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과 귀여움을 보태는 그 모습은 마치 신성군은 군이 아닌 정통 왕자인 대군으로 치부하듯한 격차가 있었다.
더구나 불임의 왕비조차 신성군을 귀애하여 자주 자신의 처소로 데려오게 하여 사랑해주는 것을 보면서 임해군은 저 왕비가 영영 왕자를 낳지 못하더라도 여러 군 속에서 대통을 이어받을 지명은 반드시 자신에게 떨어지리란 자신이 날로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요즘이었다.
"왜 말을 않소? 태의가 오라 했을 전 무슨 병에 어느만치 아프다는 귀띔은 있었을 텐데."
병자가 부왕이 사랑해 마지않는 신성군의 형임에도 그 미움은 다를 바 없다는 투의 임해군의 눈빛이었다.
"아직 병증을 짚어보지 아니했사와 가봐야 아옵니다."
"들으니 허직장이 우리 형제에게 드나드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자들이 많다면서?"
"모르옵니다."
"왜 모르오?"
"형님." 하고 광해군이 만류했으나 임해군의 눈빛은 허준에게 박힌 채 집요했다.
"소인은 두 분 왕자분에게 할일없이 드나든 적이 없사옵고 심병을 청하기 오는 것이라 사사로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러운 것들이 우리 형제에 대한 아바마마의 정이 뜨아하다 여기고 공연히 트집거리를 차는 건 나도 알아. 지난번 허직장을 아예 내 처소에 붙박이로 배치해달라 했을 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거든. 우(신성군) 아이가 배앓이라도 했는가 하면 온통 내의원이 소란해하면서."
아우 광해군이 형의 그 투정 섞인 말을 철없는 동생을 무마하듯 하하 웃었고.
허준이 임해군을 달랬다.
"본시 관원이 된 자는 왕자궁에 무시로 드나들지 못하는 법도이옵고 설사 호명을 받자온다 할지라도 직무 이외의 언동은 금하는 터인데 저로서는 누가 무어라 여기건 저어할 바 없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내의원 숱한 의원 중에 하필 허직장을 저경궁에 데려가는 까닭이 뭔가 말이지. 그 모두 우리 형제가 친하게 지내는 말동무조차 데려가는 그런 저의가 아니고 뭐냐고."
"다른 인간이야 백 명이 찾아와도 반가울 것 없어. 그러나 허직장조차 부르지 못하면 우리 형제 허구헌날 서로 얼굴이나 쳐다보며 너무 외로워."
광해군이 대범하게 말했다.
"형님 말씀이 허의원 없으면 종일 아무 할일없는 사람처럼 들립니다."
"그럼 달리 무슨 할 일이 있느냐?"
"공부 많이 합시고 사이사이 적적하면 이 아우가 찾아와 말동무하옵니다."
"네 얘긴 백 번도 더 들은 얘기들뿐이고 새 얘기가 있느냐."
"하하 ... 그럼 아주머님과 투호(화살같이 만든 청홍의 긴 막대를 일정한 거리에 놓인 단지 속에 던져 꽂는 놀이)라도 합소서."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그리고 ..."
"공부 많이 하라지만 그 공부한들 아마 우리가 쓰진 못할 게다. 난 알지. 세상 돌아가는 일 ..."
"...!"
왕좌에 대한 위협을 예감하고 있는, 차마 함부로 해선 안될 말이었다.
"이만 물러가게 해주소서."
허준이 다시 청했건만 가타부타 임해군은 말이 없고 광해군이 다시 허준을 도왔다.
"돌아가오. 그리고 그 아우의 병이 다 고쳐지면 그전 다시 우리가 병을 칭탁해 부를 테니 꼭 오오."
허준이 조용히 웃었다.
"병을 칭탁하신다 하오면 올 까닭이 없사오나 진실로 앓으신다면 남먼저 달려오옵니다."
"좋아."하고 광해군이 웃으며 일어섰다.
곧 저경궁으로 달려가야 할 허준의 입장을 이해하는 어른스런 행동이었다.
일어선 두 사람에게 아쉬운 듯 임해군이 따라 일어섰으나 그 말은 또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허직장이 병든 몸만 낫우는 의원이 아니라 마음을 앓는 병도 낫우는 의원이면 일년 내내 우리 형제 곁에 있어야 할 거요. 우리 형젠 다 병자거든."
"소인이 보기엔 두 분은 모두 튼실하시옵니다."
"아니야. 어머니 없는 모든 자식은 다 병자야."
인빈이 있는 저경궁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임금의 사랑이 비록 신성군에게 쏠려 있어도 그 신성군의 형 의안군은 인빈이 낳은 첫 왕자니만큼 그 관심과 사랑도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경궁 안은 병자가 있는 그 수심도 부산함도 보이지 않았다. 태의 양예수를 비롯, 특히 소아의 병을 전담하는 의원들이 병자가 누운 방의 안팎에 서성이며 열한 살 어린 왕자의 이마와 목 부위에 느껴지는 미열을 강 너머 불처럼 한가한 얼굴로 몇 마디씩 했다.
모두 낙관적이었고 허준도 긴장하지 않았다.
자기의 전담이 침구이기에 더욱 그랬고 저경궁 분위기로 보아 오히려 갑자기 불린 까닭도 의아했다.
그러나 곧 양예수와 정작에게 따로 불려간 방안에서 양예수로후터 허준에게 내려진 임무는 뜻밖의 것이었다.
즉시 발정하여 평안도 방면 '구황경차관'을 따라 떠나 있는 이명원을 불러오되 그 평안도 일대에 치발하고 있다는 역질에 대한 모습을 알아오라는 명령이었다.
"하오면?"
허준이 의아하자 양예수가 냉담하게 말했다.
"아직 발성할 계제가 아니나 조짐이 심상치 않아."
"어떤 조짐 이오니까?"
"역질에 관련된 여러 증상 중에 그 하나와 비슷하이."
이번에는 정작이 아직은 알려선 안될 일이라는 듯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 낮은 소리를 냈다.
"평양에는 파발이 달려갔으니 그대가 당도할 제는 이미 이명원이 인근 현지에서 돌아와 귀경의 차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을걸세. 종친부에 파송의원으로 있는 남응명과 병조의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은즉 속히 떠나게. 그대를 선발하는 것은 그대가 의원으로서 승마에도 능하다기 뽑은 걸세."
병조란 말에 허준이 긴장했다. 병조가 직접 띄우는 파발자 동행이란다면 촌음을 다투는 급선무일시 분명하고 그 임무에 종친부의 파송의원이 동행하며 역질 운운은 또 불안했다.
양예수가 말했다.
"다시 한번 의안군의 증상부터 상세히 살피고 떠나게."
정작이 앞장섰고 허준이 의안군이 눕혀진 방에 다시 들어섰다.
열한 살 어린 병자는 칭얼거림도 없이 늙은 보모상궁과 두 사람 시위 상궁의 주시 속에 누워서 무시로 드나드는 의원들이 귀찮은 눈치일 뿐 병이 깊어 보이지 않았다.
허준이 그 의안군의 가슴을 헤쳐보았다. 열은 아직 미열이었으나 그 가슴 부위에 좁쌀만한 붉은 반점과 물집이 10여 개 열을 지어 돋아 있었다.
순간 허준의 가슴에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예감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황열병 아닌가!'
10년 혹은 15년 주기로 이 나라의 생명을 무수히 죽이는 병,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그 돌림병의 병명이 허준의 머리를 때렸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
<小說 허준(許浚) 第94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免賤 第八
출정의 행장을 갖추자 허준은 일행에 잠시의 말미를 청한 후 다시 한번 의안군의 병증을 확인하고자 저경궁 인빈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특히 승마의 술이 있어 자신을 선발했다는 어의 양예수와 정작의 긴장된 목소리가 허준의 귓전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병자가 병자인만큼 어찌 긴장되지 않을까만 어린 왕자의 가슴팍과 목줄기에 줄을 이어 돋아난 열증은 성홍병을 닮았으나 그 두번째의 심병에서 처음 짚었던 황열병은 아니라고 허준은 생각했다.
열에 떠 말을 잇지 못하는 푼수로는 황열병이되 황열병이면 고열에 돋는 반점이나 입속에 탄 검은 오물을 토하고 간헐적인 오한에 떨다가 수시로 토혈의 충동이 잇따른 후 마침내 토혈에 이르면 중증으로 본다.
그러나 호위해 앉은 세 궁녀도 왕자가 오한을 느끼는 증상은 없다고 입을 모으고 허준의 손끝에 뒤집어지는 의안군의 안저에는 고열의 핏발만 핏물이 괸 듯 괴었을 뿐 황열병에 수반하는 황달의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 '
허준은 서둘러 달려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적어도 하루이틀 병자의 곁에 수발을 들며 더 좀 확실한 것을 지켜본 후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 자신이 맡은 침구 분야의 병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고 그 분야의 의원들을 모아 그 투약에 대한 최종 검토를 거친 사항에 임의로 끼여들 수는 없음도 알고 있었다.
"왜 다시 왔소?"
빼어난 미모가 이젠 오남매를 낳아 선정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보다 온 후 자애로운 모성으로 더 돋보이는 인빈이 어느새 건너왔는 지 병자의 방을 나서는 허준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눈의 횐자위가 푸른 빛이 돌도록 횐, 그래서 더욱 심성이 맑아 보이는 여자였다.
"어의와 제조도 마마에게는 따로이 왕자의 증상을 아뢴 듯한데 들락날락 심병하고 거푸 숙의만 할 뿐 내겐 병명도 이르지 않고 안심하라는 말뿐이니 오히려 더 불안해서 묻는 게요."
"소인은 왕자의 병을 맡을 의원을 데리러 가는 길이옵니다."
"그러니 묻는 말이오. 불러올 의원이 평소 무슨 병을 잘 보는 사람인가는 알 터이고 보면 왕자의 병명 또한 짐작이 가리라 믿소만."
허준의 뇌리에 구황경차관을 수행해 떠난 이명원의 조예를 떠올렸다.
"...!"
이명원 뜸, 탕약 조제의 천재다. 탕약의 재료가 꽃(씨앗)과 잎새와 줄기와 뿌리로 형성되었고 그 4분된 한 부분이 하나의 약효를 발생한다면 이명원의 재능은 그 각 약재의 여러 부분을 혼합하여 최대의 약효를 우려내는 귀재로 인정받는 터였다.
"대답을 감추려 하는 뜻이 아니오라 부르러 가는 의원은 이명원이라는 의원이온데 여러 병에 투약이 능하고 그 범위는 딱히 어느 병 어느 증상이라 사뢸 수 없습니다. 확실한 점은."
"말씀하오."
인물만이 빼어난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지체가 빈에 이르렀음에도 어린 궁녀나 무수리들에게도 함부로 명성을 높이지 않는 인덕에 대한 칭송이 궐내에 자자한 여자였다.
"분명한 것은 왕자의 병증이 침이나 뜸과는 상관이 없는 병인 듯하옵니다."
인빈은 더 채근치 않았다.
그리고 하직의 눈빛을 보이는 허준에게 한숨 섞인 독백 한마디 를 했다.
"마마께는 분명 병명이 어떤 것이다 아뢰었을 법하건만."
그리고 다시 말없이 돌아서 가는 허준의 귓가에
"참말 답답도 한지고."
인빈의 수심 묻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무슨 병일꼬?'
의안군의 병증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은 채 어의가 꾸며 줄 서찰을 가지러 내의원에 들어섰을 때 막 양예수가 손수 서찰을 들고 정작과 함께 급히 나오고 있었다.
받아든 봉함된 서찰은 간략한 요지 몇 마디만 적힌 듯 서찰의 부피가 엷었다. 그리고 다시 저경궁에 다녀온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레 꺼내려는 허준에게 양예수가 명령했다.
"서둘러 떠나게. 그리고 이직장이 경차관과 함께 벌여놓은 일이 있어 미처 회정이 지체될 듯하거든 그대가 그쪽 일을 대신 맡고 이직장 일랑 촌시도 지체치 말고 돌아오라 해야 하리."
"분부 거행하겠사옵니다. 하온데 ..."
"알고픈 말이 많을 터이나 그건 함께 떠나는 남응명이 가는 도중에 논의할 것인즉."
양예수의 말도 오늘 따라 평소의 위엄보다 긴장에 굳어 있었다.
그 내의원이 초긴장한 모습에 해답의 실마리가 허준에게 잡힌 것은 도성을 벗어난 일행이 자정 이전에 임진강 도선장까지 닿아야 하리라는 선도하는 병조의 관원의 말에 따라 쉴 새 없이 달리는 파주 경계에서 남응명의 입에서 였다.
"오히려 내의원에서 소식을 듣고 있는 줄 알았소만."
"어떤 소식을 이르시오니까?"
"의주 가도에 여역이 번졌다는 소식 모르오?"
"여역?"
"그렇소."
놀란 허준이 말고삐를 채며 속도를 떨구었다.
"여역이라했사오니까?"
"겪어본 바 있소?"
"말은 무성하게 들었으나 아직 겪은 바는 없습니다. 하온데 남주부께서는?"
"겪었소. 겪었다뿐이 아니라 곡산에서 처가가 함몰하는 것도 겪었소."
"처가가 ..."
"여섯 식구 모두."
"...!"
"처가의 여덟 식구 중에 여섯이 물고(죽음)가 났고 둘째 처제가 겨우 살아남았소. 그 여섯 식구는 넉 달 틈새에 잇따라 죽어갔고 ... 앓는 사람도, 수발들며 간병하던 사람도 모조리 잔인하고 ... 정말 무서운 돌림병이오."
"집사람은 한양에 나와 있었으니 목숨을 부지해 있소만 부모형제가 모두 그 역질에 죽고 나선 이젠 식솔 중에 누가 기침 하나 우습게 해도 숨을 삼키고 바라보곤 하오!"
"의주 지방 ..."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건 전쟁이오. 그 퍼지는 속도가 바람결 같아 한 고을이 앓는다 하면 벌써 다음 골도 죽어가오."
"병의 발생이 꼭 봄철에 생기는데 특히 갑인, 을묘년간의 봄에 더 치성하고 돌림병 중에 치사량이 그렇게 참혹할 수가 없소. 낫고 안 낫는 병자가 아닌 무리무리 떼죽음으로만 번지는 게 그 여역이란 돌림병이오."
"하오면 지금 혹 왕자의 병세가 그 여역과 동일하다고 여겨서 이명원을 부르러 가는 것이오니까?"
"의안군의 병세를 보았소?"
"보았습니다."
"난 그 증세를 잘 아오. 한눈에 알아. 그래 허직장이 본 그 증세가 어떻더이까? 세세히 말해 보오."
"그것보다 의안군이 그 병이라면 ... 그리고 지금 어의나 모두 그 일로 우리를 보내 이직장을 서둘러 불러들이는 것이라면 특히 남주부님을 동행시키는 것이 ...
다음 순간 허준은 자기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남응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연 건 또 허준이었다.
"이 모든 사세가 돌림병의 일단이 이미 궁중에도 퍼졌다는 그런 판단에서가 아니올지!"
"의안군의 병이 여역이라면 그렇겠지."
의외로 남응명의 말이 수월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이제야 기다리고 벼르던 숙적을 만나기나 한 듯이 투지에 빛나고 있었다.
허준은 숨을 삼켰다. 그 뇌리에 전염병에 휩쓸려 떼주검이 실려나오고 곡성이 진동하는 대궐의 광경이 스치고 있었다.
허준은 자기가 본 의안군의 병세를 세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닌 듯하군."
문득 남응명이 자신의 긴장을 풀며 말했다.
허준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의 안도였다.
다음날 다시 낮밤을 달려 일행이 황주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직 여명이 남은 강 건너의 들판곽 산비탈에 서너 군데 불길이 치솟고 그건 모두 방화의 불길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나루를 점령하고 길을 가로막은 황주 관아의 관원들이 어제 아침부터 이 고장에 같은 병증에 의한 환자의 초상이 삼 개 부락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며 국도를 우회하여 북상할 것을 지시했다.
남응명이 곧 신분을 밝히고 길을 막은 지휘군관을 불러 죽은 병자들의 병세를 캐묻곤 신음했다.
"여역(癘疫) 맞네."
"뭐라고요!"
"어김 없네."
"의주 어간 운운하더니 벌써 이곳까지 ..."
남응명이 이를 악물었다.
"여역일세. 병자가 죽으면 병자가 죽을 때 송장에서 병균이 새나온다하여 집을 불태우는데 이미 그 병세를 아는 사람의 솜씨일세."
허준은 강 건너 군데군데 소리없이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을 망연히 건너보았다.
갑자기 눈앞의 강물도 죽음에 잠긴 듯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강 건너의 불길만 일렁일렁 비칠 뿐이었다.
곡산에서 시체들을 태우는 마을의 불길들을 바라본 그날이 밝아 일행이 평양 남쪽 40리 어간인 중화에 이르기까지 허준의 코끝에는 시체를 태우던 역한 냄새가 떨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살아서야 인간이다.
살아 숨쉴 제는 제 살이라도 베어 먹일 듯이 정을 주는 것이 인간들의 미속이건만 일단 숨을 떨군 송장의 불에 타는 그 냄새는 차마 아무나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허준이 의원으로서의 관심에서 일행과 떨어져 불타는 마을에 일일이 찾아들어 사자의 생전의 병을 앓는 모습을 물어보고 나올 적마다 남응명만이 동구 밖에서 묵묵히 기다려줄 뿐 여타 일행들은 외면하고 구역질하고 허준의 옷자락에 죽음의 병균이라도 묻었을까 섬뜩한 눈빛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건너볼 뿐 말을 갈아타는 역참에서도 말 한마디조차 건네려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남응명만이 이미 수년 전 처가 일가의 함몰이라는 참혹한 체험을 지녔음에서 허준이 유족이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어오는 견문을 종합해,
"그해의 바로 그 병이오. 내 처가 일가의 목숨을 모두 해쳤던 그 병." 하며 이를 악물었다.
온역(장티푸스)의 두 형태인 대두온증과 대두종 그리고 두창을 통틀어 의서는 여역이라 일컫는데 이 여역의 여(癘)자 는 곧 염병 여(癘)자다.
염병 ...
피하지도 외면할 수도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온갖 증오를 담아 '염병할!' 하고 되알진 욕설을 사람들은 내뱉지만 욕설이 아닌 염병의 실체는 가래침과 함께 뱉어버릴 수 있는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니요,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참상 그것이었다.
그 발병의 경로는 지독한 흉년이나 대기근으로 인간들의 체력을 탕진시킨 뒤 오랜 장마로 이어진 덥지 않은 여름이나 이상 난동을 치른 봄이면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찾아드는 이 염병은 걸렸다 하면 허약자는 발병 당일로 물고가 나고 이틀에서 사흘, 엿새에서 이레, 길면 15일에서 17일 사이에 생사의 양계로 갈리는데 열에 여덟아홉씩이나 고목에 낙엽 떨구듯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치사율을 지니고 있었다.
얄팍한 인간들이 겨울의 혹한을 원망하지만 자연이 그 겨울을 준비한 것은 그 추위야말로 그 철에 죽일 것을 죽이고 살릴 것은 살려 더욱 새로운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한철을 살곤 죽어야 할 미물들이 춥지 않은 겨울이면 그대로 살아남아 묵은 알을 까고 새끼를 쳐 그 불결하고 독한 병균들이 들쥐의 뱃속을 살아남거나 족제비나 새떼 깃털 속에 옮아 살아 우물이나 인가에 알을 슬고 마침내는 인체에 침입하면서 인간들에게 재앙은 시작되는 것이다.
'십중팔구의 치사율!'
의주 어간에 여역의 혐의가 짙은 돌림병이 번졌다는 소문이 떠돈 지 겨우 사흘, 이제 도보로 사흘 거리가 넘는 평양의 훨씬 남방 여러 고을에 번지고 있는 전파의 경로도 수수께끼려니와 그 속도가 너무도 전율스러웠다.
'그리고 ...!'
말머리를 나란히 채찍을 더해 달리는 남응명을 돌아보며 또 한번 허준은 굳이 이 일행 속에 종친부 파송의원인 그가 끼인 사실을 불안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의안군이 발병한 지는 비록 하루에 불과하다 해도 상대는 왕자가 아닌가. 외형과 내경의 각 병증을 두고 태의의 지휘하에 각 부서의 의원들을 모아 면밀한 심병을 거쳤을 것이고 안타까워하는 인빈에게조차 병명을 감춘 채 남응명과 자기를 선발해 이명원을 데리러 보내는 비밀은 무언가!
'기안군이 앓고 있는 병도 이 여역이다! 틀림없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니 차마 상상해서도 아니 되는 그 의문을 이제야 허준은 눈앞의 현실로 직시하는 느낌이었다.
평양 성문 아래 당도하기까지 그 의문을 되풀이 정리한 허준은 남응명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강한 눈길을 그의 얼굴에 박았다.
"아까부터 허직장의 눈길을 알고 있었네."
남응명이 거두절미한 침착한 어조로 그 허준에게 말했다.
"하오면!"
"맞네. 의안군의 병증이 내 눈에는 틀림없는 염병일세. 내가 먼저 태의께 말했네."
"...!"
"허나 미리 왕자의 병이 염병이라 소문날 때 궐내의 혼란을 어찌 막겠는가. 염병이 왕실 내에 틈입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왕실은 물론 세상이 발칵 뒤집히네."
"하오나 그토록 전염률이 빠르고 치사율이 높은 병을 어째서 태연히 격리시키지도 않은 채 그냥 두오니까. 저 또한 발정 직전에 다시 찾아들어 직접 심병했었습니다. 증상이 기묘하여 차마 불온한 말은 발설치 못하였으나 ..."
"그대는 아직 염병을 다룬 체험이 없나 모르나 전조 명종대왕 때부터 태의도 나도 아프도록 겪은 병일세."
"...?"
"특히 나는 첫눈에 왕자의 병이 그 증상의 초기다 확신했네. 허나 장소가 왕실이요 병자가 왕자이고 보매 차마 경망하게 말을 꺼내지 못했고 더 좀 명확한 증거로 사태를 대처하고자 역질이 치발하고 있는 지역에 수행해 있는 이명원을 데리러 가는 것이네."
"허나!"
허준은 사태도 사태려니와 염병 병자로 확인된 의안군의 방에 간병의 역을 다하고자 앉아 있던 세 사람 시위상궁의 위태로운 목숨을 생각했다.
"내 말 더 듣게!"
말을 막는 남응명의 눈빛이 딴때없이 강했다.
"마저 상황을 일러주소서. 소상하게!"
"왕자의 병실에 궁녀조차 없이 할 순 없잖은가. 그건 주인을 모시던 인간의 피치 못할 운명인 게고 ... 그러나 주상전하를 비롯, 인빈도 그 밖의 어떤 이도 지금쯤 저경궁에는 출입이 금지돼 있을걸세."
"우리가 이명원을 대동해 돌아가 이명원이 그 동안 현지에서 수없이 보았을 병자들의 증상과 의안군의 증상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기 이전까지 ..."
"굳이 나와 그대 내의원 의원으로 하여 이명원을 데리러 가게 한 비밀한 사연을 이제 알겠는가?"
허준은 출발 전 자기 혼자 의안군의 병실에 들어가 의안군의 몸을 만지고 코앞 가까이 들여다보며 왕자의 숨소리를 세던 사실을 상기했다.
"...!"
어쩌면 그 순간 염병의 병균은 자신의 몸속에 옮겨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 이상했다. 세상을 뒤흔들 거대한 병균의 집단을 목격한 의원으로서의 긴장인지 투지가 앞설 뿐 가냘프게 맡아지던 어린 왕자의 호흡 속에서 병균이 자신의 몸속으로 옮아왔다는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얼 하오. 곧 성문이 닫힌다 하오."
일행인 병조의 관원이 10여 보 앞까지 달려와 소리쳤으나 허준은 아직 한낮인 중천의 하늘을 흘긋 본 채 다시 남응명에게 말했다.
"만일 의안군의 병이 북쪽과 이곳에 번지고 있는 염병이란달 때 그렇다면!"
"들어 갑시다."
허준이 남응명의 옷소매를 다시 잡았다.
"그렇다면 병은 대궐 안뿐 아니라 이 평안도에서 한양에 이르는 모든 길목에 이미 번졌다는 증좌가 아니오니까?"
"한양뿐이 아니지. 아미 더 남쪽까지 자꾸 번지고 있다 여겨 틀림이 없을 게요."
숨을 삼킨 채 이번에는 허준이 못박혔고 이번에는 남응명이 그 허준을 이끌었다.
"지금쯤 아마도 내의원은 발칵 뒤집혀 있을 게요. 의안군도 의안군이려니와 이미 각처의 수령들이 띄우는 수십 기의 파발들이 경의가도의 처처에 번진 사태를 조정에 계달 치보하고 있을 것 인즉."
허준은 문득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왕자의 손목에서 맥을 짚고 그 눈을 까뒤집어 병증을 찾을 때 자신의 손끝에 옮아오던 왕자의 고열이 자신의 손끝에 되살아나는 듯했고 또 그것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병균을 보유한 병자인지도 모르는 채 시시때때로 이마를 짚고 함께 아파하며 조용히 지켜앉아 병자가 토하는 숨결을 함께 호흡하고 있는 세 사람 궁녀의 처연한 모습도 떠오르고 있었다.
이날밤 두 사람은 구주지역에 파송된 구황경차관 이동형의 수행에서 급거 귀경 명령을 받아 평양부로 돌아온 이명원과 해후했다.
발병지역으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평양에서 소환 당해 온 이명원은 기다리고 있는 인물들이 내의원 동료들인 남응명과 허준이자 가득히 반가운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그 해후는 한끼 서로 밥상을 마주할 사이도 없이 꺼졌다.
허준들을 뒤따라왔다고 여겨지는 파발이 전한 내의원으로부터의 급보는 임금 선조의 제삼자 의안군은 어제 새벽 허준들이 평양으로 출발하자 곧 괴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당일로 급서했으며 임금은 그 슬픔에 조정과 저자가 사흘을 쉬어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시 삼일을 정했다는 머리말 끝에 이명원과 남응명의 즉시 귀경과 허준에게는 이명원을 대신하여 평안도 지구 구황경차관에게 수행할 것을 내의원 도제조와 태의 양예수의 연명으로 명령하고 있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
<小說 허준 (許浚)第95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免賤 第九
왕자 의안군의 죽음 ... 병 앞에 그리고 죽음 앞에야 왕자나 서민의 차별이 있을까만 바로 엊그제 자기 손으로 짚어보고 들여다보았던 환자의 사망 소식은 돌림병이 만연한 오염지역으로 달리는 허준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있었다.
전갈을 듣고 찾아가 병자 가족의 인사를 받으며 아랫목에 편안히 좌정하고 병세를 물어보고 맥을 짚어보는 그런 유장한 대거리가 아닌 것이다.
걸렸다 하면 온 식구에게 옳고 그리곤 곧 바로 떼죽음으로 내닫는 염병이라는 이름의 잔인한 병마 ...
'병이 있으면 반드시 약이 있다.'
그것이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신념이지만 자기의 짧은 인생과 경첩으로는 감히 짚어볼 수 없는 세상의 수많은 기괴한 병들이여...
생각하면 혜민서에서도 부인병이요 소아병이요 그리고 잡병이라 이름하여 수많은 가닥으로 병을 분류했거늘 그 각각 다른 병자를 다루는 병동을 조석으로 바라보고 오가면서 왜 자기는 오로지 침술에서만 의술을 발견하려 했더란 말인가.
침술 따위로 감히 어쩔 수 없는 저 집단으로 발생하는 돌림병에 대하여서는 다른 이의 분야려니 미루어온 자신의 태만이 이제야 뼈저렸다.
세상을 무시로 횡행하는 수많은 병명 속에서 과연 스스로 자신 있다 자부하는 병이 대체 몇 가지나 되기에 내의원 의원이란 영예를 코끝에 걸고 고작 눈앞에 띄는 병자나 낫우는 것으로 허송세월했더란 말인가.
눈앞의 병자를 낫우는 것도 기쁨이요 보람이리라.
그러나 진실로 세상을 위한 의원이고자 소망하거든 병이 있기 전에 병이 오는 길을 가로막는 그런 의원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고통하기 전에 미리 병을 막아 세인에게는 비록 눈에 띄거나 화려한 소문은 나지 않는 외로운 의원이라 할지라도 이미 온 병을 낫우는 의원보다 병 오기 전에 가로막는 의원이 더 가치 있는 의원이리라.
너무 좁게 살고 있어서 그저 한두 가지 아는 걸로 세상 모든 병을 다아는 듯이 교만한 얼굴로~
물론 허송세월이라 할 만큼 세상을 한눈 팔며 살아오진 아니했다. 딴엔 직처에 나가거나 집에 돌아와서나 낮도 밤도 없이 의에 관한 꾸준한 생각을 했었노라 자부하지만 온 세상에 치발하고 있는 저 염병에 당장 속수무책이란다면 오늘에 대비하지 못한 자신의 공부는 허송세월이라는 자책을 면할 수 없으리라.
더구나 내 나라의 역사 속에 주기적으로 되풀이 발생했던 돌림병에 미리 유의하고 관심했던들 지금 세상의 저 떼죽음 앞에 이토록 당황하지만은 아니했으리라. 세상 속을 돌아다니지 않고 내의원 방안에서 고작 의서 따위에나 의지해 자기의 의술을 닦으려 한 자신이 그는 부끄러웠다.
또 있다. 외국의 의술과 그 이론에 굶주려하고 6천여 리를 달려가 반년 세월을 허비하며 명의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한눈 팔던 과거.
'조선땅에서 병 앓는이여, 이 못난 허준을 용서하오.'
허준은 진심으로 그런 자괴를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웠다.
'여역!'
하고 평양 감영에서 초집한 의원들과 함께 밤을 도와 구성으로 향한 서북가도를 달리며 허준은 또 신음했다.
온 세상 병든 모습을 향해 돌아오는 건 후회뿐이었다. 비록 겪어내지는 아니했으되 그래서 염병에 대처하는 경험의 축적이 없으되 허준은 지금 자기가 향해 달리는 이 길이 의원으로서의 자신의 앞길에 커다란 전환이 되는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 팔도에 생겨나는 병이거든 어떤 병일지라도 내 한몸 던져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바로 그 결단의 길이어야 한다고... 관서의 산맥들은 봉우리마다 눈을 뒤집어쓰고 있건만 지상은 봄날씨였다.
겨울이 겨울이지 않은 그 이상난동의 서북가도엔 안개가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안개들은 마치 생물처럼 허준 들을 감싸고 흩어졌다가는 다시 감싸며 허준 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절기가 이월인데 무슨 안개가 이토록 심한 건지 마치 병마의 입김 같소."
초집한 의원들을 선도하는 감영의 향도역이 탄식했다.
"누가 아니라오. 마치 봄밤 같소. 온 산 꽁꽁 얼어붙고 북풍이 휘몰아쳐야 할 철에 일기가 이토록 눅으니 땅속 벌레가 모두 되살아나는 게지."
구성에서 약재를 타러 급거 평양까지 달려와 허행한 후 허준 등과 일행이 된 초로의 관원이 자꾸만 주위 어슬한 골짜기에 불안한 눈알을 굴렸다.
떠나기 전 그가 전한 구주의 참상은 허준이 평양에 당도하기까지 연도에서 목격한 바로 그 병자들의 증상과 모두 일치했다. 각자의 잠복기간을 경계로 병자는 순식간에 고열의 습격을 받고 골이 빠개지듯한 두통에 시달리며 헛배가 부르고 심장 밑이 뻣뻣해지고.
여기까저의 상태를 일러 대두종 또는 뇌두풍이라고도 가려 부르기도 하나 이 고열의 고비 다음은 머리꼭지가 지끈거리고 다음 진행은 머리 주위에 부스럼이 생기며 또 헐다가 목안이 부어오르고 부어오르고 자꾸 부어오르다가 마침내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목쉰 비명을 지르다가 죽어가고.
또 다른 예로 처음 심한 감기처럼 열이 솟다가 코안과 귀뿌리부터 헐고 붉게 부어오르고 삭신이 쑤시다가 역시 목안이 물도 넘기지 못하도록 부어오르다가 기가 막혀 죽고... 그 발병서 낙명까지 사람따라 다르나 즉일서 열흘, 길어서 두이레면 생사가 갈리는데 재채기가 나면 목안이 다시 틔어 사는 증좌요 재채기가 없으면 죽는다.
저마다 경첩 속에서 처방은 많다.
감초, 천궁, 당귀, 박하 등 17가지의 약재를 생강 세 쪽에 달이는 방풍퉁성산이라는 복잡한 약에서부터 진피, 천화분, 당귀, 천궁, 길경, 후박 등 14가지 약재로 달여 물탄 술로 마신다는 탁리소독산까지.
그리고 장달환, 인진사황탕, 고삼산 등 가지가지 약명과 대문과 사립에 소피를 흥건히 발라두면 병이 못 들어온다는 황당한 소문 속에 농가의 외양간마다 병가족들의 필사적인 습격이 휩쓸고 있다는 소문과 새벽 첫닭 울 무렵에 목욕재계하고 마당 가운데 서서 사해의 신명을 세 번 씩 외면 들었던 병도 도로 도망친다는 웃지 못할 너무도 슬픈 처방까지...
'그러나 ...!'
허준은 믿지 않았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때로 성황당 돌무더기에 비는 그런 허황한 처방이 잠시의 자기 위안이 될지는 모르되 자신이 평양에 이르기까지 본 그 참혹한 죽음들과 불태우는 집들과 거기서 뿜어나온 송장 타는 내음은 이미 신불에게 비는 영역과는 상관이 없는 냉혹하고 거대한 떼죽음의 현장들이었다.
죽은 이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할값에, 앓고 있는 이도 또 어쩔 수 없다 할값에 아직 온전한 이 그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마 앞에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이들을 지켜주기 위하여서는 신불에의 기도보다, 수십가지 동원해야 하는 난삽한 방법보다 손쉽고 확실한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그 길뿐 ... 병엔 요행이 없어!'
의원으로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나라 안 최고수들이 머리를 맞대어 내 놓은 온갖 처방 속에서 와병 불과 하루 만에 병자의 목숨을 물고낸 이 여역[ 癘疫~돌림으로 앓는 열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 역려(疫癘).] 이라는 이름의 병마의 위세를 꺾을 방법...
그러나 아직 허준에게는 이 공포의 역질에 대처할 단 한가닥의 실마리도 희망도 잡혀 있지 않았다.
구성 경계까지 40리,
그 정주땅에 들어서면서 이윽고 일행은 안개를 벗어났다.
밝아오는 하늘은 여명 속에서 청명했다. 그러나 하늘이 아닌 땅 그 지상의 광경은 인적 없는 황량한 광경 그것이었고 그건 이른 새벽 시각이어서가 아니라 군관의 지휘 속에 길목마다 인구의 이동을 가로막아 통제하는 당지 관원들의 횃불 속에서 더욱 긴장감만 더할 뿐이었다.
구성도 안개였다. 정주에서 본 해는 환시인 듯이 사라지고 허준 일행이 닿은 구성 관아는 지척의 동헌 마루가 안내를 받아 다가서기까지 보이지 않도록 짙은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미리 연통을 받았네. 반가우이."
위엄 지니고 아랫관원의 현신을 기다릴 법한데 방문 밖까지 나와 맞이 해주는 구황경차관(救荒敬差官)은 사행(私行) 때 친교를 튼 이동형이었다.
구황경차관 이동형은 한양에 소환된 이명원을 대신해 나타난 내의원 의원이 허준이라 헤어져 살던 아우를 만난 듯이 반겼다. 또 당상관이요 어사인 높은 지체를 파탈하여 자신의 숙소에 허준의 잠자리를 함께 배설케 했고 다정스럽게도 원로의 여독을 물어주었다.
허준이 감동되어 더욱 존경의 태도로 대답했다.
"아직 젊사와 여독을 핑계할 정도는 아니옵니다."
"그러면 좋네. 수백 리 밤을 도와 달려온 사람에게는 미안한 노릇이나 오늘밤 우리 회집에 끼이게."
구성은 도호부다. 이동형의 주재 속에 부사와 선천 군수, 곽산 군수가 동석했고 그밖에 인근 고을의 현감을 비롯, 각지의 병세 구완에 참여했던 의원 그리고 병에 감염되었다가 요행히 살아났다는 백성들을 참여시켜 각자의 경험을 종합하고 대책을 강구하자는 모임이었다.
하나 아무도 자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의원들과 현지를 순시해 돌아다닌 관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개인적인 목격담과 의원인 허준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미신적인 속방의 나열과 중구난방의 비관론뿐이었다.
어떤 약이나 어떤 처방에서 확실히 실효를 보았노라는 주장은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아니했다.
병든 후 나았다고 주장하는 동석한 백성들의 체험담에 허준이 특히 관심을 보였으나 그 촌로 둘과 젊은이와
소년 하나 그리고 말석에 불려와 앉은 고부 두 여자도 약을 먹고 나았다는 말이 아니고 성황신에 빌고 바위에 절을 해서 나았다는 황당한 주장이었고 두 촌로도 닭의 피를 방문에 처발라 병을 몰아냈다는 허황된 것인데다 소년의 증상은 애초부터 여역과 상관이 없는 황달이 분명했다. 가재의 즙을 짜내 먹으니 황달이 나았다는 산골 마을에 굴러다니는 속방이 소년의 말이었고 남은 젊은이의 주장인즉 하나도 둘도 꿩고기를 먹고 나았다는 되풀이였다.
그러나 허준의 눈에는 그의 앓았던 대머리가 헐고 입술이 부르튼 증세등이 염병의 모습에 비슷은 하되 손가락 사이가 진물렀던 흔적이 좀 앓다가 나은 병자지 여역과는 달랐다.
그 어느 체험담도 허준이 이곳에 이르기까지 목격했던 병자들과는 증상의 일치가 없다고 판단한 허준이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나자 좌중은 다시 "어찌 대처할지 ... 하는 탄식 속에서 서울 높은 곳에서 내려온 허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할 말이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만져보고 말아보고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것뿐 여역 환자를 낫을 처방에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감염을 무릅쓰고 각처의 환자를 증상의 경중별로 나누어 함께 무릎을 맞대고 일일이 물어보고 촉진하는 그 길뿐이라 생각했다.
"어째야 하는가?"
좌중의 침통한 침묵을 이동형이 깼으나 시선만 들었을 뿐 허준은 그들을 당장 안심시킬 대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허준은 한시바삐 날이 새기를 바랐다. 관리인 그들이 병자를 보되 의원의 눈처럼 세밀할 까닭이 없고 의원의 관심처럼 애써 가까이 상종하지도 아니했을 터이다.
'그건 의원인 내가 할 일이다.'
허준은 날이 밝는 길로 현지에 달려가 더 좀 자세히, 더 좀 많은 병자를 접하여 기어이 어떤 해답을 얻으리라 자신의 결심을 거듭 다짐했다.
"의원이란 인물이 어째 이토록 묵묵부답인가."
질문을 듣지도 못한 허준에게 돌연 선천 군수가 눈을 치뜨며 화를 냈다.
"무어라 하문이 계셨사오니까?"
"답답도 한지고. 별이 퍼지는 망상이 아침저녁이 다른 터에 의원으로서 무어라 방책을 내놔야 하잖는가!"
"소인도 처음 접하는 증상들이오라 날이 밝는 길로 특히 병이 치발한 지역을 답사하여 처방의 실마리를 찾아보리라는 말 외 지금은 달리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백성들이 다 어육이 된 뒤에 말인가!"
말끝에 그 선천 군수의 손가락질이 허준에게 향했다.
"지금 당장 이 시각에도 백성들은 약을 달라, 살려달라 울부짖고 버둥버둥 죽어자빠지는데 한양에서 달려온 의원이란 자의 말이 고작 이제 실마리를 찾기 위할 묵상이라?"
"고정하오,"
이동형이 제어하자 이번에는 관할 내에 이미 150여의 사망자를 냈다는 곽산 군수도 노기 어린 눈으로 허준을 쏘아보았다.
"병사는 평화로운 날에도 군사를 조련하여 불의의 전란에 대비하는 것이요 의가는 무병할 재도 고난에 대처할 줄 알아야 진실로 의원이라 하겠거늘, 오는 자 가는 자가 모두 속수무책이라니 국록을 먹는 자가 창피도 모르는가!"
허준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 창피 뼈저리게 깨닫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
"말해 보아. 그래 하오나 그 뒷말은 뭔가!"
허준은 말하지 못했다 ... 변명은 걱정을 더 부를 뿐이다.
'가서 목격하고, 다시 더 세세히 살펴보는 그 길뿐.'
언제부터인지 닭 우는소리가 아스라이 들리고 있었다.
이때 새벽녘 임지로 달려가야 하는 두 군수를 위해 밤참을 겸한 간략한 주안상이 들여졌다. 그러자 그 주안상 앞에서 남 먼저 술을 따라 허준에게 건네준 것은 잠시 전 허준을 매도하던 선천 군수였다.
"어전에 드나드는 내의라 하여 세상 만병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건 내 또한 모르는 바 아니로되 온 고을이 곡성과 비명뿐인데 어느 누구 뾰족한 방책을 내지 못하니 불현듯 그대를 향해 고성이 터진 것이니 이해하게."
"넉히 아옵니다."
"안다고는 말게. 말로 들은 이들은 모르네. 현지에서 보고 겪기 전엔 참상을 아무도 짐작 못해."
"허준이라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그렇거든 명심해 주게. 타군 타현보다 특히 내 고을에 병이 치성하니 행장이 갖춰지는 대로 제일 먼저 내 군으로 달려와 살펴주게."
"소인도 꼭 찾아보려 하옵니다."
"예서 선천은 70여 리, 우리 곽산은 60리가 못되네. 내 지경에도 참상이 목불인견이라 가까운 우리 쪽부터 들려주게."
이번엔 곽산 군수가 허준의 술잔에 손수 잔을 치며 말했다.
허준은 방안의 모든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병 앞에 무력한 의원으로서의 자신을 사과했다.
날이 밝아오자 허준은 서둘렀다. 꼬박 밤을 밝힌 그였으나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여역이라는 거대한 적을 발견한 데 대한 강렬한 투지가 잠 따위는 멀리 내쫓고 있었다.
허준은 이동형과 구성 부사에게 청하여 고장에서 자원한 의원 중 강행군할 여정에 견딜 특히 젊은 의원 10명과 지난날 여역이라는 전염병과 조우한 적이 있는 경첩 깊은 4명의 의원을 선발했다.
허준은 먼저 의주로 향할 작정이었다.
그 의주는 중국의 문물을 들여온 길목인 동시에 대륙으로부터의 모든 전염병을 묻혀들여오는 길이기도 하기에 우선 의주에서 시작된 병의 발생 형태와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간 속도와 날짜별로 발전한 여러 양상을 추적하고 특히 타 지역보다 월등히 사망자를 낸 고장의 지리적 특성도 고찰한다는 계획이었다.
병은 날로 번지고 있고 그 치유방법을 찾는 일이 화급한 터에 자신이 세운 계획이 혼자 지휘 정리하기엔 버겁다 여긴 그는 내의원으로 응원해 줄 의원의 증파를 요청하는 글을 적어 부사에게 부탁한 후 10일 안에 의주, 정주, 선천, 곽산, 삭주를 거쳐 돌아올 것을 이동형에게 품의했다.
이동형이 허준의 강행군의 일정을 묵묵히 듣고 향도 두 사람과 특히 낯선 관아에서 신속한 협조를 얻어낼 역을 맡을 인물로 판관을 딸려보내는 호의를 보이며 한마디 물었다.
"각처의 병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날로 더 치성한데 의사에 자문해 줄 그대가 10여 일씩이나 자리를 비우면 기다리는 날들이 너무 지루하다 여기네. 물론 이 일은 그대의 판단이 우선이라 떠나기는 하되 언제쯤 하회를 들을 수 있겠는가?"
"가는 곳마다에서 소인의 견해를 즉시즉시 대감께 전해지도록 조치하려 하옵니다."
"꼭 그렇게 하게. 부디 그대의 안목 속에서 이 흉칙한 병을 잡을 실마리가 발견되기를 빌겠네."
구성서 의주까지는 방향을 서로 잡아 110리. 삭풍이 몰아쳐야 할 2월의 그 의주가도는 곳곳이 자욱한 안개에 덮인 채 병을 부르는 이상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행 18명의 말발굽소리가 몇 개의 역참을 통과했을 때 자욱한 안개 속으로부터 허준에게는 낯설지 않은 냄새가 맡아지기 시작했다.
'송장을 태우는 내음,'
지방 관원들이 하나 둘 명주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안개 속 어디선가 상여가 나가는 요령소리도 들리다가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은 다시 안개속으로부터 나타났다.
좌우 산비탈을 가득히 메운 민초들의 무덤들. 전서부터 생겨 있던 것이 아닌 돌림병이 돌며 새로 생겨난 1백도 2백도 넘는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